614

 

 

 

시나와 같이 사키엘의 문을 열고 나온 곳은...어라?

 

벌써 왔어?”

 

키르갤이 아직까지 자고 있는 용사에게 무릎베개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잡화점을 운영하고 문을 닫고 다시 찾아오는 그 시간과는 별개로 이 시간이 멈춰있었단 소리일까? 아니면 사키엘의 문은 결국 시공간까지 간섭해서 원하는 장소만이 아닌, 시간까지 정해서 갈 수 있는 것인가?

 

조만간 잡화점이 아니라 파란색 경찰박스로 만들어놔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주로 진출해서 외계인들과...

 

어딜 가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현실부터 직시하시지?”

 

머나먼 우주로 진출해있는 잡화점의 생각을 단숨에 지워버렸다.

 

보통 다녀오면 연회를 할 줄 알았는데, 아니면 다 끝났다거나?”

 

잡화점은 아침까지 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도 역시 못 온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여신님은 같이 온 거야?”

 

내 옆에 앉아있는 시나는 올빼미 형태로 있었지만, 말하는 올빼미가 얼마나 인상에 깊었는지 단숨에 여신이라고 말했다.

 

어라 성녀님? 언제 오셨습니까?”

 

그 사이에 졸았는지 자고 있었는지 벽에서 졸고 있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성녀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렇군요. 카린님이라고 해야...하지만, 성녀님이라고 부르는 게 상황적인 면에서는 좋지 않습니까?”

 

상황적인 면에서는 용사의 동료니까 잡화점 주인이라고 할 수 없고 성녀라고 말하는 건가? 어쨌든 나는 성녀가 아니다.

 

상황적인 면에서는 그렇게 말해도 상관은 없지만, 그 이외에는 성녀가 아니니까 되도록이면 이름으로 부르세요.”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아직까지 자고 있는 용사 앞에 서서 연회의 시작시간을 기다렸다. 키르갤과 별일 없이 잡담을 하고 있는 끝에, 침묵을 고수하는 궁수가 문을 활짝 열었다. 내 기준으로는 어제였지만, 여기는 1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는지, 아직까지 껄끄러운 공기가 나와 그 궁수 사이에 고이기 시작했다.

 

고여서 썩기 직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연회에는 나가야 하는 거 맞죠? ...그러니까 침묵의 현령?”

 

그냥 현령이다. 침묵의 현령은 무슨 의미냐?”

 

...그저 마음속으로 말해야 했던 이명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걸 대체 뭐라 해명해야 하지? 내 왼손에 히드라가 꿈틀거린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아니, 그 때는 흑염소였던가? 흑염룡이었던가? 어쨌든, 지금 당장의 혼돈을 잠재울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래. 그냥 연회를 들먹이며 이 상황을 타개하자.

 

혀를 깨문 것뿐입니다. 그러니 연회에...”

 

아니. 혀를 어떻게 깨물어야 그런 소리가 나와?”

 

키르갤이 마지못해 태클을 걸어왔지만 무시한 채 현령이 열어놓은 문 밖으로 나왔다.

 

마스터. 침묵의 현령이라는 것보단 심연의 론도(윤무곡) 현령이라는게...”

 

누가 그런 이명에 대한 의견을 내놓으라고 했어!”

 

애꿎은 시나에게 목소리를 높혔다.

그보다 심연의 론도(윤무곡)이라니?

멋있잖아?

 

나중에는 이명에 대해 고찰을 할 필요가 있어 보여.”

 

막상 실수로 저지른 일이긴 해도 저런 이명을 가지고 있다면, 손발이 다 사라지긴 하더라도 자기만 멋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니 내가 나에 대한 이명도 지어보도록 하자. 그 빌어먹을 백장미만 들어가지 않으면 될 거 같긴 한데...

 

마스터. 연회가 시작되었는데 아직도 그런 생각만 하고 있는 겁니까?”

 

어라? 언제 또 시작했지?

주변을 둘러보니 용사는 언제 일어났는지 키르갤의 보살핌에 따라 음식을 먹고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춤을 추는 사람들은 없었다. 아직까지 연회라고 해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언제 풀릴지 모르는 대결계 속에서도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대가 이곳에 포위한 마계공작을 처치한 자인가?”

 

제가 아니라 용사가 했습니다. 그리고 처치한 것이 아니라 도망갔으니, 물러났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네요. 그리고 저는 단순히 백업만...”

 

호오? 의외로 겸손할 줄 아는 자로군. 아니면 거짓을 고하는 것이 특기인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대격변 이후의 류하 씨였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냐고 물어본다면 붉은 적색을 하염없이 장식해놓은 금색의 용. 하란국 특유의 수려하고 단아한 외모에서도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위엄. 그녀가 용사가 아닌 나에게 직접 찾아와 이런 말을 한 걸로 보아. 현령이라는 남자가 사실대로 상황을 말한 것이 틀림 없었다.

 

거짓을 고하는 게 특기라고 한들, 저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청색으로 매끄러운 곡선을 지닌 형물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술잔을 나에게 주며 따르는 동안 입을 열기를...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있지. 그대는 그 책임을 전부 놓고 싶어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건가?”

 

아뇨. 그건 아니고, 좀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어서요. 그보다 이런 대사를 나누는 건 용사의 동료인 제가 아니라 용사에게...”

 

“‘가 보기에는 그대야 말로 이 시대를 구원해줄 자로 보이는구나.”

 

격변 이전에도 류하 씨는 자신을 칭할 때 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곳은 별반 다를 것이 없구나. 별반 다르지 않아서 쉽게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지금 하란국의 미래를 들먹여서 이곳에서 당장 모두 철수 시켜야 하는 내 입장이, 앞으로 내뱉을 말에 대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냥 막아내고 전선을 유지시킨다는 것도 괜찮긴 하지만, 칸포리우스 제국까지 밀려나지 않으면 인간들은 단합이 되지 않는다.

 

저는 시대를 구원할 사람이 아닙니다. 솔직히 저는 이 시대가 망하든 말든 상관이 없어요.”

 

호위로 보이던 여성이 내 목에 창을 겨눴다.

 

지금 뭐라 했소!”

 

사실 내가 방금 전에 말한 건 실수가 있었다. 안 그래도 마왕군의 침공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데, 시대가 망하든 말든 상관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느 누구라도 화가 나기 마련이다. 지금 당장 멸망할 수 있는 와중에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들었으니...

 

실례. 이 시대가 망하든 말든 상관 없다는 의미는, 하란국이 멸망해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라, 마왕군이 어딜 점령하든 인간이 단합해서 마왕군을 몰아내든, 저는 저대로 조용히 살아가 평화롭게 지내면 그만이란 소리였습니다.”

 

마왕군을 몰아내야 평화가 찾아온다. 단순한 이치도 도달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성녀라고 칭할 수 있소?”

 

미안하게도 저는 성녀가 아니라 잡화점 주인입니다. 누가 그런 보고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향후 저를 성녀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만...”

 

잔뜩 살기를 받아도 나는 꿋꿋하게 류하 씨가 따라준 술을 단숨에 들이켰...

 

푸후우욱! 으엑! 너무 쓰잖아!”

 

들이켰다가 내 혀가 다 날아가는 줄 알았다. 쓴맛이 뇌를 거쳐 온 신경에 강타를 했을 때, 류하 씨가 잠깐 호리병 안쪽을 보더니...

 

. 미안하군. 아무래도 여가 잘못 들고 온 모양이다. 귀빈용으로 줄 술이 아니라 여가 자주 마시던 소주를 줘버렸노라.”

 

알코올이 내 몸을 아직도 휘젓는 것과 동시에 이 몸이 아무래도 술에 약하다는 걸 인지시키듯, 몸이 정밀하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도수 높은 걸 주면 어쩌자는 거냐!

 

미안하군. 그런데 이곳에 온 목적이 뭐지?”

 

목적? 대체 그걸 왜 묻는...

 

. 그렇군. 설마 그 안에 약물을 탄 거야? 자백제라던가 그런 비스무리한 거? 그래서 이 술의 맛이 더 쓴 거였구나.”

 

연회는 진행중이고 내 이야기는 음악소리에 묻혔다. 다만, 내 주변에 있던 류하 씨나 측근들은 나의 혼잣말을 정확히 들어버렸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애석하게도 저는 약물에 대해 영향을 받지 않는 몸이라서요. 알코올은 잘 모르겠지만 머지않아 빠르게 분해되겠죠. 그건 그렇고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하지, 왜 이런 쓸 때 없는 짓을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여기에 온 목적은 단 한가지...”

 

모두가 내 말을 귀담아 들었다. 언제 어디서든 내 입에서 폭탄발언이 나올 수 있는 그 긴장감.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 같은 상황에서...

 

그보다 안주 좀 주세요. 입안에 고기라도 넣어야 할 거 같은데...”

 

내 입은 안주를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류하 씨의 벙찐 얼굴과 주변 측근들은 전부 쓰러지듯 휘청거렸다.

 

““ 목적부터 말해!!!””

 

전원 소리치는 것보다 음악소리가 더 크기 때문에 묻혔지만, 그래도 주위 20M반경의 사람들에겐 시선이 집중될만한 목소리였다. 분노, 당혹감 등. 여러 감정이 버무려지는 공간에서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그나마 고기의 육즙과 향이 엉망이었던 입 안을 정화하고 있었다.

 

저는 여러분을 칸포리우스 제국으로 안전하게 보내드리려는 것과 이곳에서 최종방어선을 구축하여 마왕군의 세력을 밀어낼까에 대해 제안을 하러 온 것뿐입니다.”

 

내 말에 모든 분위기가 흔들렸다. 심지어 꿋꿋하게 내 말을 무시하던 음악마저 멈췄으니, 언제 얼마든지 배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같이 마왕군을 몰아내는데 칸포리우스에 의탁을 할 것이냐, 아니면 직접 방어선을 구축하여 몰아낼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받았으니 말이다.

 

최종방어선을 하란국으로 하겠다? 칸포리우스의 의탁하는 걸 최우선으로 삼았을 것 같아 보이는데, 어째서 이곳을 최종방어선으로 하겠다는 거지?”

 

당연히 내 옆에 있던 시나마저 둥그런 올빼미 눈으로 쳐다봤다.

아니, 올빼미의 눈은 원래부터 둥그런 눈이던가?

 

그저 대결계 안에서 자멸하고 있었다면 칸포리우스에 의탁을 하겠지만, 의외로 수도 전역을 덮는 대결계 안에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과, 보급을 지속적으로 받는 것이 아닌 생산을 하는 것에 있어서, 이곳을 최종방어선으로 만들고 지원을 받는 것으로 끝을 내려고 합니다. 그러면 칸포리우스에게 의탁하는 것보다 더 적은 요구가 들어올 것이고, 어떻게 보면 마왕군이 칸포리우스 제국을 침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아직까지 하란국이 버텨주기 때문이 아닙니까? 아우리스 여신에게 전달하는 것은 용사의 몫이지만, 적어도 1주일만 농성을 더 해주면 칸포리우스 제국에서도 하란국을 구원하기 위해 움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칸포리우스 제국은 탐욕에 물든 국가이거늘! 어떻게 확신할 수 있소!”

 

류하 씨 옆에 측근 중 창을 내 목에 들이밀었던 자가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의심하고 있는 눈초리와 분위기는 가시지 않는 모양. 불신 덩어리를 보는 눈은 편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넓은 이해심을 바탕으로 입을 열었다.

 

칸포리우스 제국에 용사일행이 설득을 하면 되는 일이기도 하고, 다른 차원의 여신이 나타나서 협력을 요구하면 됩니다. 제가 보기엔 두 번째 방안이 더 빠르겠네요. 전력을 분산하는 것보다 그래도...”

 

여가 보기에는 두 번째보단 첫 번째 방안이 더 빠르다고 보는데, 그대가 말한 방안이 더 빠르다는 이유를 알 수 있는가?”

 

나는 답했다.

 

제 어깨 위에 있는 존재가 다 해결할 거라서요.”

 

그렇게 시나는 한 번 더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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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은 늘 바뀌기 마련...

 

613

 

세계를 망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나 티끌이라도 살아있다면 재생이 가능 한 것이 세계이기 때문.

그러기 때문에 나는 이런 세계가 싫다.

아니, 싫다고는 해도 나 역시 이런 세계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것인가?

-시나와 레시아에게 목욕탕으로 끌려가는 카일...아니 카린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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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동안 자다 일어난 것은 기억했다.

당연히 꿈에서도 6번째 양의 활약과 태클로 인해 깨어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또 무엇일까?

 

오오! 잡화점 주인의 목욕탕은 넓구나!”

 

! 마스터! 어서 이곳에 오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 녀석들에게 끌려가면서 목욕을 해야 할 의무는 없는데, 어처구니 없는 약속 하나 때문에 이리 된 것인가? 그보다 시나의 눈이 예사롭지가 않다. 내 본능이 이곳에서 빨리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다. 아니, 외치다 못해 이제 절규까지 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남성체가 되었든 여성체가 되었든 내가 내 알몸을 본다고 해서 부끄러워하는 시기는 한참 지나버렸지만, 역시 남들에게 보여진다는 그 자체부터가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다.

 

오히려 그게 더 좋다고 봐달라고 하면 그건 정신적으로 약간 삐끗한 선이고...

 

어서 들어오거라! 잡화점의 주인! 차고로 여자는 알몸을 보이며 친구가 되는 것이다!”

 

시끄러워. 난 내가 알아서 씻고 나갈 테니까...꺄악!”

 

내 귀에 물보라가 힘껏 일어났다. 분명 나는 탈주를 하려고 했으나 나를 붙잡았다. 제길...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여자가 왜 알몸을 보이며 친구가 되는 건지 이해가 안 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좋으니 나 혼자 씻도록...으하아악!”

 

볼품 없는 목소리를 내게 된 원인이라면, 내 배를 감싸고 있는 시나의 팔 때문이다. 뱀처럼 휘감아 절대로 놔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행동. 그리고 시나는 나를 올려다 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마스터는 제가 하나부터 48가지를 전부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째서 숫자가 불길하게 한정되어있는 거야!”

 

기본적으로 목욕이라는 건 몸의 피로를 회복시키고자 청결을 유지하도록 하는 행위지만, 어째서인지 더욱 더 귀찮고 몸의 피로가 더 쌓이는 듯한 기괴한 효과를 낳을 듯 했다. 그보다 48의 의미는 대체 뭔데?

 

거의 광기에 가까운 목욕을 끝냈다. 시나는 둘째치고 소녀의 모습을 한 마왕까지 나에게 달라붙어, 나쁜 손들이 내 몸을 휘젓기 전에 둘 다 아이언 클로를 걸어버렸다. 겨우겨우 마수에서 빠져 나와 시계를 보았을 땐, 아직까지 새벽 1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뒤따라 나온 시나와 마왕은...

 

짐은 레시아라고 부르지 않는 것인가?”

 

뜬금없이 저런 말을 들으면 내가 지금까지 해온 독백이 모두 다 날아가버리잖아?

 

레시아라고 부르는 건 격변 전의 세계의 사역마를 부르는 말이지만, 지금은 마왕이잖아. 레시아라고 부를 이유가 없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실수로 마왕을 레시아라고 부르는 언행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마왕이라고 가려서 부르는 거야.”

 

그 말은 즉 짐을 걱정해서 그런 소리를 했다는 거로군.”

 

내 말에 대체 어디에 너를 걱정했다는 소리가 있는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잖아?”

 

심안으로 대사를 바라보면 있노라.”

 

웃기고 있네!”

 

정말 웃긴 말이라서 지금 당장 저 마왕의 머리를 잡고, 검은 하늘 저 멀리 날려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지금 당장 잼 아저씨에게 저 마왕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다시 바꿀 수 있는 빵을 구워달라거나.

 

아무리 짐이라도 머리를 교체할 수 없노라. 버터 언니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째서 너는 내 이상한 독백을 기이한 각도로 받아 치는 거야!”

 

지금 당장 날아간 내 독백이 담장을 넘어가 만루홈런을 선언했다. 여전히 오염된 정보가 멋대로 들어가는 것도 있지만, 마족은 무한한 지식이 살아가면 갈수록 쌓이는 종족. 그런데 하필이면 잼 아저씨와 버터 누나의 정보가 마왕에게 들어갔다.

 

별 쓸모도 없는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마스터. 오늘은 같이 잘 수 있는 겁니까?”

 

오늘은 같이 잘 수 없지. 잡화점 운영을 끝내고 용사 일행과 합류해서 움직여야 하니까. 잠을 자는 건 좋긴 하지만, 피곤하거나 잠을 안자면 면역력이 떨어진다는 그런 이유가 슬슬 없어지고 있어. 어쩌면 이제 잠을 안자고 계속 활동해도 괜찮을지도 몰라.”

 

그건 곤란합니다. 마스터의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서라도 수면은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래도 내 몸을 걱정해주는 건 시나 밖에 없었ㄷ...

 

그리고, 마스터는 한번 자기 시작하면 일어날 때까지는 누가 그 옆에서 뭘 하든 자고 있기 때문에, 그 틈을 이용해서 습격을 하는 것도...”

 

시나야. 너의 쓸 때 없는 소리 하나 때문에 나의 감동이 가득 담긴 독백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잖아. 어떻게 할 거야? 너 때문에 독백이 다 깨져버렸으니까 책임져.”

 

그러면 마스터. 이런 모습으로는 약간 부족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멈춰! 멈추라고! 책임지라는 말이 그런 뜻은 아니잖아! 그나마 가린 수건을 풀려고 하지마! 아니, 그보다 하프로 기타소리를 내는 그런 센스를 보이란 말이다!”

 

확실히 하프에서 전자기타 소리가 나는 건 이상하지만, 어쨌든 내가 말했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에 무척이나 당황했다.

 

짐이라면 그렇게 노골적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비둘기여.”

 

올빼미입니다. 냥캣.”

 

냥캣은 또 뭔가! 아무리 짐이 고양이 수인이 기초베이스라고 하지만, 짐은 무지개를 달고 우주에서 날아다니지 않는다!”

 

아무리 격변을 했다고 한들 저 주제로 싸우는 건 오랜만에 봤다.

 

마왕 하나만 있어도 이렇게 시끄러울 줄이야.”

 

마치 거울을 보듯이 여성체의 나와 매우 닮아있는 세린은, 한숨을 내쉬며 내 옆에 앉았다. 마왕이 없어도 시끄럽긴 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보니 오랜만에 안심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빛의 여신을 데리고 하란국에 가서 나가라는 것까진 좋지만, 애석하게도 칸포리우스는 아우리스 여신이 있잖아? 하란국을 칸포리우스에 데려가는 것도 결국, 아우리스 여신이 다른 차원의 여신이라거나, 이단의 낙인을 찍게 된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때는 나도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서 천계를 뒤집어 놓을 거야. 물론 격변 전의 아우리스 여신은 뭔가 나사 하나가 빠진 그런 여신이지만, 지금의 여신은 절대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아. 인정하긴 싫지만, 그 놈의 백장미가 그래도 모든 사건을 완화하게 만들어준 원인이나, 지금은 백장미가 없는 세계에서는 좀 더 강압적으로 과감하게 해결할 필요가 있어.”

 

그러고 보니 카린?”

 

내 이름은 카일이야.”

 

세린은 거침없이 여성체였을 때의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거침없이 남성체였을 때의 이름으로 반박했다.

 

잠깐 동안 본 모습으로 되돌아갔지?”

 

최대한 억제를 했어, 다시 되돌아왔으니 그걸로 다행이잖아?”

 

하지만 세린의 질문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많이 빗나갔다. 솔직히 잡화점의 양식이 되려고 작정했냐는 소리를 무지막지하게 큰 소리로 나만 들을 줄 알았더니...

 

시간에 간섭을 했다면 이미 천계에선 너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거야. 비록 그 찰나의 시간까지는 아니지만,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 많은 정보를 얻지는 못했겠지. 네가 천계에서 뒤집는다는 말을 멋대로 하라는 소리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용사에게 붙어있는 존재가 또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초월체라고 한다면, 지금 이곳에 있는 창조신은 어떻게 생각할까?”

 

설마?

, 그렇군.

이 세계에는 창조신이라는 이름의 초월체가 두 명이 되어버리는 경우구나.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머리가 아픈 일이네. 각본가가 없고 용사와 마왕이 서로 유혈난무하고 있는 정상적인 이야기에, ‘라는 존재가 하나 끼어버렸으니 이 세계도 잘못하면 다른 방향으로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는 거네.”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는 말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방향이라는 것이, 뜬금없이 탈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소리다. 비록 내가 그런 일에 하나하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그로 인해 다시 한번 대격변을 겪는다면 또 다시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 되겠지. 격변 이전의 일 또한 각본가를 멋대로 치워버린 건 내가 한 일이다. 그 각본가는 나라는 존재를 쓸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고, 자신의 이야기에 넣을 수도 없는 존재. 자신이 이야기를 만드는 와중에, 뜬금없이 또 다른 자아가 충돌해서 멋대로 내용을 휘젓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모래성을 쌓았는데, 뜬금없이 다른 녀석이 찾아와서 모래성을 모래 탱크로 만드는 그런 기분이다.

 

...아닌가?

그보다 탱크가 왜 나와?

 

각본가도 꽤나 고생을 많이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 각본가가 없는 이 상황에서 내가 이 세계의 흐름을 흩트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또 다른 각본가가 각성을 해서 막으려고 할까?”

 

신인류 사건, 켈모리아가 멋대로 아리엘이 마신으로 각성시킨 사건, 시간이 납치된 사건, 가상의 시공간인 300년 후로 넘어간 사건.

 

그 모든 것을 다 겪고 나서도 나란 존재는 이야기를 훼손하려고 한다. 그것도 이상한 정보가 계속 흘러나와 오염시키면서 말이지.

 

다른 각본가가 각성한 것이 아니라면, 이번에는 이 세계의 창조주와 싸우게 될지도 몰라.”

 

그건 뭐 마왕보다 더 심각한 포지션이잖아? 내가 마계를 담당하는 여신도 아니고?

 

잡화점의 주인. 계속 누구와 이야기를 하길래 혼잣말을 하는 것인가?”

 

마왕이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입을 열었다.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는 모습마저 귀여웠지만, 저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노리고 한 것이다. 그보다...

 

옷은 안 입어?”

 

이곳은 온도가 따듯해서 옷이 필요 없노라.”

 

보는 눈이 있으니까 옷은 입어줄래?”

 

오히려 이 모습이 더 끌리지 않는가?”

 

소녀의 모습으로 이런저런 포즈를 잡으며 우아하게 있어봤자, 내 시신경을 통해 뇌에 내려진 명령은 버드 미사일을 처박아주지라는 명령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박사님의 허가가...아니, 나 지금 뭐라고 독백을 하는 거니?

 

그보다 버드 미사일은 또 무엇인가? 혹시 독수리 5남매에서 나오는 그 미사일 아닌가?”

 

대체 마왕이 그걸 알아서 뭐에 쓰려고!!!”

 

소리친 이후에 다시 찾아온 정적.

태클을 걸고 난 이후에 찾아온 것은 쓸 때 없는 곳에 태클을 걸었다는 후회뿐이었다.

 

그보다 아까 목욕탕에서 이런 저런 곳을 만져가면서 친분을 다져가는 시간을, 아이언 클로 하나로 단숨에 박살내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저런 곳을 만진다라는 그 말부터 이미 내 시점에선 아웃이야.”

 

하지만 모든 여자가 그렇다고 하진 않아도, 잡화점 주인과 짐의 친목을 위해서라면, 지금쯤 뜨거운 몸을 안으며...”

 

카놀라유로 튀겨버리기 전에 그 입 다물어!”

 

자동차마저 놀란다는 전설의 기름으로 박살내버리겠다는 내 살기가, 마왕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마스터. 이야기마다 한번씩은 서비스를 해야 인원이 유지되는 법입니다.”

 

무슨 서비스냐고 그게! 난 누구에게 서비스를 하는 거냐!”

 

과연 한번씩 서비스를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설마 백장미와 관련 있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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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 : 그래서 작가님 저는 언제쯤 남자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요?

작가 : 남자로 돌아가면 다시 백장미 촬영이 시작될텐데?

카린 : ......루니아 누나말고도 또 그 빌어먹을 잡지를 찍을 사람이 있어요?

작가 : 아마도...

 

612

 

 

 

저녁을 먹겠다는 나의 단결된 의지가 마왕 하나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리제로트는 계속해서 자고 있는데, 아무래도 자고 있는 척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일단 속아주는 척을 하면서 침실까지 데려갔지만, 세린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한숨의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

 

그래서, 저 암흑물질은 어디다 버릴 거야? 또 벽난로에 집어넣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들켰네.”

 

너 진짜...!”

 

세린은 지금 당장이라도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암흑물질과 이전 루니아 누나의 무지개 푸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으니,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보면 추억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재앙이었다. 트라우마라고도 불리기도 하고, 그걸 먹고 저승까지 다녀와보지 않았는가? 그러니 벽난로에 버리는 행위는 그만두고, 문을 열고 저 머나먼 곳으로 날려보냈다.

 

잡화점의 주인은 입맛이 까다롭구나.”

 

아니, 그러니까 저걸 먹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고. 지금 리제로트가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라니까.”

 

상세하게 보았을 때 혀끝에만 대고 기절했는지, 삼키지 않아 입안에 있는 독극물을 제거할 수 있었다. 내장까지 들어갔다면 모든 장기가 녹아 내리는 대참사가...

 

그러면 이제 하란국을 점령하러 가면 되는가?”

 

점령을 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피난이 우선이야. 바보같이 또 일이나 벌리지 말라고, 그랬다간 계약이고 부탁이고 없는 줄 알아.”

 

상당히 까칠해지지 않았는가?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부부 사이에 스킨십은 중요하다고...”

 

누가 부부야! 그 머리 열어서 화분이라도 심어줄까!”

 

아직까지 끈적한 감각만이 남아있는 양쪽 귀를 무의식적으로 쓸어 내렸다. 보통 저런 미남에게 스킨십은커녕 호감이 가득한 눈빛과 말만 걸어와도 다른 이들의 정신은 날아오르겠지만, 애석하게도 내 정신상태의 기본상태는 남자다. 오히려 이런 상태에서도 남자와 여자 중에 어느 쪽을 더 선호하냐고 물어보면 여자라고 대답한다.

 

하란국의 주민들을 대피시킨다? 그건 무슨 의도라도 있는 건가?”

 

마왕군이 가장 점령하기 어려운 칸포리우스 제국에 다 집어넣을 거야. 그리고 거기서 최종방어선을 구축하고 용사와 함께 마왕군을 기적적으로 밀어낸다.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리저리 대치를 하고만 있다가 휴전을 선언하고, 그 사이에 상호간의 오해라던가 정복의지가 없다는 걸 알려주면, 종전까지 갈 수 있는 형태가 만들어지지. 마왕이기에 꼭 대륙을 정복할 이유도 없고, 마족이라고 해서 꼭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면서 살아갈 종족이 아냐. 오히려 전쟁이라는 것을 통해 상호간의 성장을 확인하고, 그걸 토대로 발전하면서 살아가는 게 중요한 거지.”

 

상호간의 성장이라...확실히 인간계를 정벌하고 나서 남아있는 게 있는가에 대하여 고뇌한 적이 있노라. 짐의 머리로도 그 어떤 결론도 도출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전쟁을 통한 성장을 가장하려면 지금까지 마계공작들을 설득해야만 한다. 하지만, 마계공작들을 설득하기엔 그들이 반란이라도 하면 짐은 꼼짝없이 숙청을 당하겠지.”

 

지도자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로 착각하고 멋대로 마왕을 끌어내리기 위한 움직임을 펼칠 것이다. 마계 12공작을 홀로 상대하기엔 그 힘은 너무 막대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마왕도 살고 인간계와 서로 공존하기 위해선 내가 용사 일행과 함께 마계공작들을 전부 처리하거나, 설득이라는 걸 시켜야겠지만...

 

그런 일은 없어. 용사 일행과 다 죽을 테니 말이야.”

 

그러면 짐의 간부들이 다 잘려나가는 셈이로군? 그러면 짐은 어찌되는 것인가?”

 

마왕의 붉은 눈에는 분노나 적대가 서려있지 않았다.

 

그쪽은 내 사역마나 되는 거야. 어차피 마왕이라는 거 따분했잖아?”

 

오히려 큭큭하고 웃는 마왕은 웃음기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대가 봐도 역시 짐은 따분하다고 보인 것인가? 애석하게도 그 말이 너무 당연하여 웃음 이외엔 다른 건 나오지 않는구나. 아직까지 머나먼 생에 따분함만 있는 줄 알았더니, 역시 끝까지 살아남아봐야 아는 것이구나. 다만, 의문이 있다면 어찌하여 짐이 그대의 사역마가 되야 하는가?”

 

싫으면 말고.”

 

굳이 사역마로 삼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히려 사역마로 다시 삼았다간 시나와 세린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더 귀찮아질 뿐. 그나저나 시나는 어디에 있길래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지?

 

여기에 하얀 올빼미는 못 봤어?”

 

. 그 비둘기 말인가?”

 

너도 비둘기라고 부르냐?

 

,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입니다.”

 

주방 쪽 어디선가 미약하게 소리가 울렸다. 주방에는 폭발로 인해 엉망이었을 텐데, 터져버린 밀가루 속에서 올빼미 머리가 쑥하고 튀어 올랐다. 추측하는 것으로 보아 마왕의 암흑물질을 시식하다가, 시나마저 기절하고 정신이 메두사 폭포까지 날아갔는데, 비둘기 소리를 듣자마자 올빼미라며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아무리 기절을 하든 죽을 위기에 처했어도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임을 강조하기 위해 살아나는 건가? 불사조도 그렇게 못살아오겠다.

 

마스터. 죄송합니다. 저 간사한 마왕의 생각을 미처 읽지 못하고 독극물을 먹는 바람에...”

 

너도 예전에 많이 당했잖아. 왜 그런걸 아직까지 먹고 탈나는 거야?”

 

하지만, 이것을 먹게 되면 마스터가 저를 좋아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암흑물질과 무지개 푸드 때문에 고생했을 텐데, 또 저런 말에 넘어가서 먹고 기절해있다니. 그래도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걸까. 내 어깨까지 날아서 온 소녀는...잠깐? ?!

 

-콰앙!

 

마스터는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습니다. 마왕. 그런 모습으로 마스터를 현혹한다고 한들, 마스터는 결국 남자이기 때문에 저와 같은 여성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가? 확실히 남자로 살아가다가 여자로 되는 저주에 걸린 자들도 많이 보았노라. 다만, 짐이 그 자들을 겁...아니, 교육을 하며 알아낸 것은, 한번 적응을 한 몸으로 인해 결국 여성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어딜 주든 뭘 적응시키든 둘 다 입 다물어!”

 

오늘도 제발 정상적인 15세 이상 관람작이 되게 해주세요...

아니, 내가 누구에게 부탁을 하는 거야?

 

시나. 일단 내려와. 일단 너도 날 도와서 하란국을 점령하는데 도와줘야지.”

 

안 됩니다. 저와 같이 목욕한다고 약속해주시면 내려오겠습니다.”

 

제기랄...평생 올라가있던가 그럼.’라는 말을 할 수 없으니, 목 바로 밑까지 올라온 단어들을 꾸역꾸역 삼켰다.

 

알았으니까 내려와.”

 

짐은?”

 

네가 왜 같이 들어가! 그 남성체로 같이 들어갈 생각이냐! 네오 제트 싸이클론 암스트롱 포를 자랑하고 싶은 거냐고!”

 

아무리 비정상적인 생각을 지녔어도 저건 아니지. 윤리적으로도 그렇고 삼진 아웃밖에 되지 않는다.

 

괜찮다. 짐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쪽이 신경 쓰여!”

 

그럴 때는 참을 인을 3번 외우면 된다. 참을 인 3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지.”

 

그거 300번을 해도 네가 살해당하는 건 면하지 못해!”

 

그 때는 300하고도 1번을 더 하면 된다.”

 

너 그냥 같이 들어가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잖아!”

 

조만간 저 마왕도 같이 날려버릴 생각을 좀 해보자. 아니 조만간이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죽어어엇!”

 

-파아아앙!

 

매번 잡화점의 벽이 무너질 때마다 눈초리를 주는 세린이 옆에 있기에, 식은땀이 마구 흘렀어도 나는 해야 할 도리를 했다.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의 할 도리를 다 했다면, 실패를 해도 떳떳한 법. 그러니 나는 스스로에게 떳떳해지기로 하자.

 

그러면 짐이 여성체로 다시 되돌아가면 같이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어느 사이에 여성체...라기보단, 어린 소녀가 된 마왕은 의기양양한 웃음과 함께, 작은 가슴을 활짝 내밀며 당당한 웃음을 선보였다. 그보다 저 모습은 내가 예전에 레프리시아와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잖아? 나에게 은팔찌와 전자발찌를 선물할 생각인가? 현실로도 받지 않고 마음으로도 받지 않겠다.

 

왜 굳이 내가 꼭 목욕을 같이한다는 전제로 이야기가 되고 있는지 설명해줄래?”

 

그야 저 비둘기...”

 

올빼미입니다.”

 

아무튼 같은 소녀의 외형이면 그대가 거부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외형은 둘째치고 그 생각이 이미 거부감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어.

곧 우주까지 채워지겠지.

 

지금은 피곤하니까 좀 놔둬. 게다가 잡화점을 운영해야 할 시간이니까, 목욕은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제발 좀 떨어지라고!”

 

아직까지 엉겅퀴마냥 붙으려는 시나와 마왕을 떨쳐냈다. 다만, 잡화점 창가에 있는 흔들의자만큼은 양보해줄 수 없는 강박관념에 몸을 맡겨, 흔들의자에 앉아 언제 만들어졌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허브티를 찻잔에 따랐다.

 

앞으로의 행동과 계획.

일단 하란국은 수도를 내주고 후퇴를 해서 칸포리우스 제국에 의탁하게 만들면 되지만, 그때는 정말 국가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전후처리를 한다면 꽤 복잡하게 흘러가리라 본다. 당연히 그 전후처리 과정에는 내가 끼어들 이유도 없지만, 기왕 평화가 찾아온다면 국가간의 갈등을 남겨서는 안 된다.

 

갈등을 남겼다간 하란국에선 내 제안으로 인해 그리 되었으니, 나에게 책임을 물고 책임은 곧 평화와 평온이 깨져나간다는 뜻이니까, 귀찮은 일의 시작과 더불어 파멸의 길을 걷는다고 보면 된다.

 

철저하게 칸포리우스 또한 하란국에게 빛을 지어야만 되...는데?”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더니 들푸른 초원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니, 잠깐만? 이 초원은 설마?

 

-메에에~

 

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상황.

그리고 양들이 울타리를 하나씩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는 세계를 갈아엎어도 나오는 공간이냐?”

 

하긴, 이건 다른 신들이 만들었다는 기이한 공간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6번째 양은 어디 있는 거야?”

 

5마리까지 보이고 남은 한 마리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혹시 이곳도 개편되어 5마리밖에 없는 건가? 그렇다면 정말 다행...

 

-메에에~

 

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을 산산조각 내고, 이마부분에 6이라고 적혀있는 양이 저 멀리서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몸통 쪽에 뭔가 짊어지고 있는데 홀스터가 양쪽에...아니, 잠깐만? 왜 석양이 지려고 하고 있는 건데!

 

한동안 울타리를 바라보던 6번째 양은 건조한 서부에서나 볼 수 있는 건초더미가 자신의 앞을 굴러가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의 적은 넘을 수 없는 울타리이며, 그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성장을 할 수 있기에,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던 울타리의 악몽에서도 졸업을 할 때가...아니! 잠깐만! 나에게 이런 독백을 하게 만들지 마!

 

-메에에!

 

질풍같이 쇄도하는 6번째 양. 그리고 하늘을 나는 듯한 도약을 하며 울타리를 뛰어넘었...

 

-타아앙!

 

?”

 

자연스럽게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6번째 양은 뛰어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추락하였고, 장의사모자를 쓴 양이 6번째 양을 끌고 저 멀리 사라졌다. 내 시선이 울타리로 향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총을 자신 뒷 편에 홀스터로 슬쩍 넣었다. 이윽고 울타리는 자신의 본연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만족감과 함께...

 

대체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하는 거야아아아아!”

 

소리지르며 깨어난 나와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마왕과 시나.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고 다시 창가를 바라보며, 무안한 감정이 밖으로 빠져 나오려는 것을 다 식어버린 허브티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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