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

 

 

 

무분별하게 힘을 휘두른다는 건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힘을 제대로 조종하지 못하는 경우와 또 다른 하나는 그 힘에 심취한 나머지 중독이 된 경우다.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그 전자에 속했으며, 마리아와 동화된 상태로 검은 달의 여왕의 권능을 억지로 끌어올려 사용한 결과...

 

여왕님! 이쪽 한번만 보시죠!”

 

여왕님! 이쪽으로 와서 저희들에게 축복을...”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이렇게 되기까지 20분 전의 상황으로 되돌려보자.

사실상 무력으로 참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리아는 무력이 아닌 자신의 권능을 이용하면, 자신이 다른 차원의 환경으로부터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나는 검은 성배를 불러오는 것까지 성공하고 휘두르는 걸 생각했는데, 애초에 내가 마리아와 자주 동화는 되었어도 그 권능이 뭐가 있는지 잘 몰랐으니, 어떻게든 권능을 사용해서 이 상황을 정리해야겠다는 심산으로 대충 휘저으며 검은 성배의 물이 폭포수처럼 흐르기 시작했고...

 

, 잠깐만 카일이여! 그 권능은!”이라는 마리아의 소리를 들은 것으로 내 본능이 , 이거 완전히 소나무 잣이 되어버렸는데요?”라고 답했다. 의문사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답한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 소나무 잣이 되었다는 말이 왜 이리 거슬릴까? 이게 그나마 15세까지 볼 수 있게 만들어서 그런가? , 그건 둘째치고...

 

. 아무래도 마왕성에 있어야 할 자들이 아니라, 그대 옆에서 보필해야 할 거 같구나...짐은 마왕이긴 하나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다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 현상은 피하지 못하겠노라.”

 

자신의 정예병을 단 한방에 다 잃어버린 마왕과 심복들은 그저 허탈하게 마왕성으로 돌아갔고...아니, 이러니까 마왕이 로켓단처럼 보이잖아. 너무 허망하게 돌아간다고!

 

애초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지만, 싸우지 않고 이 많은 병사들을 내 부하로 만드는 건 계획에 없었다. 생각을 해보면 마리아의 주특기는 정신공격이었지? 내가 그걸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검은 성배를 휘두른 대가가 이건가?

 

이래서야 성녀라고 볼 수도 없잖아?”

 

어차피 모두 검은 달의 일원들이니 모조리 첩에게 맡기기나 하거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마리아의 손짓으로 인해, 수많은 정예병들이 모두 검은 성배 속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저 성배는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구나? 나중에 요긴하게 써먹을 구간이 있을 거 같지만...그보다...

 

마리아? 내 머리카락이 검은색에서 안 바뀌는데요?”

 

. 완벽하게 동화되었으니 그런 거다. 신경 쓰지 말거라.”

 

. 그렇구나.”

 

잠깐? ?

 

완벽하게 동화라뇨! 벌써 적응하신 거에요!”

 

그야 그 정도 힘을 무지막지하게 휘둘러도 이렇게 안정적인 걸 보면, 카린의 몸과 첩이 잘 맞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보다 카일이었을 시절에도 몇 번 그대의 몸에 숨어들지 않았는가?”

 

하긴...그렇긴 한데...

이렇게 되면 용사 일행이 머리가 검은색이 되었단 이유로 마녀재판을 시작하지 않을까? 아니면 탄환논파를 시작해서 초고교급 검정이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초고교급 벌칙을 받는 것이 아닐까?

 

어이. 카린이여? 초고교급에서 빨리 벗어나지 못하겠느냐?”

 

그치만 마리아? 초고교급이에요? 초고교급이 얼마나 파괴력이 높은데요? 초고교생만이 얻을 수 있는 호칭이에요? 그런데 제가 과연 초고교급의 검정이 될 수 있을까요?”

 

하아...어째서 다른 이야기로 튀어나갔는지 모르겠지만 빨리 돌아오거라. 안 그러면 그대의 머리에 직접적으로 지금까지 백장미 컬렉션을 모조리 다 보여주는 것이 가능하노라?”

 

! 제발! 그것만은! 그러지마! 마리아! 이 나쁜 사람! 그러지 마!”

 

안 돼! 내 머리 속에 다른 영상이 들어오고 있어! ! 제발 그만! 남자에게 토끼 복장을 입히는 거 아냐! 2초만에 끝나버린다고! 24시간 내내 발정기가 아니란 말이다! 제발 그만해!

 

정신적인 충격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있을 때, 초고교급이 무엇인지도 생각하기 전에 잡화점으로 돌아왔다. 아직까지 리제로트가 칸포리우스 제국으로부터 지원군을 이끌고 오기 전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지만, 이 정도면 하란국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벌어준 것이 아닐까? 그보다 왜 이렇게 오지 않는 거지? 보통 지원군을 부른다면 1주일 이내에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카일이여. 보통 사람이 신뢰를 얻고 지원군까지 부르는 단계를 얻고자 하는 것은, 최소 6개월 이상이 걸린다.”

 

그렇게 길게 걸려요?”

 

대체 그대는 외교를 무엇으로 보고 있는 건가? 평소에는 꽤나 치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럴 때만큼은 정말 터무니 없는 생각을 지녔노라.”

 

터무니 없는 생각만 있는 건 아니다.

절대 아니야.

 

그러면 어쩌다 보니 첩은 군사를 얻었고, 상은 무엇으로 해주는 것이 좋은가?”

 

우선 남자로 되돌아갔으면 좋겠네요. 마리아라면 제 힘을 억누를 수 있잖아요.”

 

. 그건 곤란하군. 그렇지! 첩이 귀청소를 해주겠노라!”

 

남자로 돌아가고 싶어요!”

 

. 곤란하다. 그렇지! 첩의 성배의 기능을 자세히 알려주도록 하지!”

 

남자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도대체 몇 일째야?

아니 몇 주째야?

아니 얼마나 더 있어야 해!!!

 

그 모습 그대로 귀여우니 앞으로 그래도 살면 되지 않는가? 어차피 카일의 근본이 중요한 거지,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라.”

 

어떻게든 이 모습에서 안 바꾸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시네요?”

 

그러면 첩이 남자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걸 협조해주는 대신 백장미 프레스티지 에디션을 해야 하니라.”

 

그건 또 무슨 에디션이야!!!”

 

돈이 꽤 많이 나갈 거 같은 에디션이잖아? 마리아의 터무니 없는 제안은 결국 강제로나마 날 여자로 있게 만들었다. 남자로 변해도 백장미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지옥을 넘어도 지옥이란 소리인가? 아니, 지옥을 넘었더니 연옥이었다는 결말인가?

 

***

 

용사 일행을 만나기엔 검은 머리카락으로 변해버린 터라 마음이 걸린다. 하지만 어차피 난 성녀도 아니고, 용사와 루니아 누나가 연습하고 있는 연무장으로 들어갔...

 

, 살려주세요오!”

 

아아~♥ 용사는 왜 이리 귀여운 거에요오~

 

...도대체 이건 뭐가...

아니지, 내가 할 행동은 따로 있지.

 

,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게 아니에요! 성녀님!”

 

일단 지금 당장 설명할 수 있는 건, 대충 귀여운 걸 보면 미쳐 날뛰는 루니아 누나가 용사를 덮치는 장면이었다. 이건 마치 맹수가 사람을 공격할 때 그 모습.

 

어라아? 카린? 머리가 검은색으로 되었네요오?”

 

마리아와 싱크로 되었거든요. 이제 엑셀 싱크로의 길만 남았...아니, 이게 아니라. 지금 뭐하고 있는 거에요? 제가 용사에게 쓸 때 없는 트라우마는 남기지 말라고 했죠?”

 

그래도 우리 용사는 배우는 속도가 빠른 걸요오?”

 

그렇게 정당화해도 안 돼.

당장 떨어져.

안 그러면 저 멀리 있는 포돌이를 강제로 소환할 거야.

아니, 포순이인가?

 

아 몰라! FBI까지 같이 와라!

 

“FBI OPEN UP!”

 

순식간에 모든 창문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그와 동시에 모든 특수대원들이...

 

[Take 2]

 

그래도 우리 용사는 배우는 속도가 빠른 걸요오?”

 

배우는 속도가 빠른 게 아니라 루니아 누나가 용사를 습격하는 속도가 더 빠른 거 아닐까요?”

 

언니에요오.”

 

루니아 언니...아무튼! 지금 당장 용사를 해방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같이 안 잘 거에요. 알겠어요?”

 

.”

 

방금 혀를 찬 루니아 누나의 모습에서 다크한 암흑의 오러가 보인 거 같은데? 용사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 등 뒤까지 숨어서 루니아 누나를 기피하고 있었다. 다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건 고마워요...”라는 수줍은 용사의 한마디였다.

 

키르갤이 왜 용사에게 빠졌는지 알 거 같네.”

 

?”

 

아무것도 아니에요. 용사님은 어서 일행에게 돌아가세요. 제 머리에 대해선 마왕이 아니라 다른 요인에 의해서 바뀐 거라고 미리 알려주시고요. 아무 말 없이 제 머리가 검은 색으로 변해서 난리가 나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 말이죠.”

 

마굴에서 빠져나가는 듯이 재빠른 발걸음으로 도망가는 용사를 뒤로하고, 루니아 누나와 잠깐이나마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진지한 이야기라면 저와 카린의 2세 계획이죠오?”

 

어느 방면에서는 그게 정말 진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진지한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없잖아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곳은 엘티노스가 없고, 이 세계는 누군가의 각본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거라고요.”

 

각본가는 모조리...”

 

모조리 날렸어요. 다만, 각본가라는 역할 자체만큼은 날려보낼 수 없었다는 게 크죠.”

 

지금 어느 누군가는 각본가를 하고 있고,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거라면...

 

어릿광대. 어째서인지 그 녀석의 행보를 알 수 없다고 했더니만, 어처구니 없게도 어릿광대의 각본일 가능성이 매우 커요.”

 

유랑극단 중 한 명.

최고이자 최악의 도플갱어.

만인을 속이기 위해 누구든 연기할 수 있는 최고의 광대.

 

어릿광대가 각본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요오? 그건 말도 안 될 거 같은데에...”

 

내 말에 동의를 할 줄 알고 내심 기대를 했지만, 루니아 누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면서 부정을 표했다. 어릿광대가 각본가일 가능성이 있다는 건 동의를 하는 바이지만, 뭔가 의심적인 모습이 나의 의문을 끌어올렸다.

 

그건 왜요?”

 

그치마안...어릿광대가 각본가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한다며언, 카린이 지금쯤 휘둘려야 하는데 용사가 휘둘리고 있잖아요오?”

 

그야 제가 각본에 쓰여지지 않으니까.”

 

그때 각본가도 카린이 각본에 쓰이지 않아서, 주변인물을 통해 수 백, 수 천 번을 더 굴리고 또 굴린 거 기억 안나세요오? ! 물론 백장미 촬영은 굴리는 것이 아닙니다아? 그건 성스럽고 절대적인 행사 중 하나였죠오.”

 

황홀한 표정으로 그런 소리 하지 마시죠.”

 

루니아 누나는 마치 천사를 보았어.”라는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멍 때리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각본가가 누구인지 밝혀내야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아니면 각본가가 없어질 때마다 세상이 다 갈려버릴 테니 방치하는 것이 좋은 건가?

 

그런데 용사를 길러서 마왕을 무찌르게 할 생각인가요오?”

 

글쎄요? 그나저나 저 용사는 어때요?”

 

귀엽고 순진한 것에 비해 전투만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잘 하더라고요오. 물론 너무 직선적인 움직임만 있어서 교정해주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마안, 조금씩 조금씩 세ㄴ...아니, 교육을 해가면서 성장한다면, 분명 좋은 백장미 소재...가 아니라 용사가 될 수 있을 거에요오.”

 

지금 백장미 소재라고 했죠! 검술교육을 하라니까 뭘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루니아 누나는 요염한 눈을 하며 나를 바라봤다.

 

어라아? 혹시 카린의 백장미 자리가 사라질 거 같아 걱정되나요오? 괜찮아요오! 백장미는 언제나 카일이 담겨질 구간을 비워두고 있답니다아~”

 

그걸 걱정하는 게 아냐!!!”

 

누가 그런 저주받을 잡지에 실리지 않는 걸 걱정하겠냐고!

============================================================================

 

2개월 뒤에 올렸다

이번엔 3개월 뒤에 올렸네요.

이제 4개월 뒤에 ㅂ...<-퍽!

 

619

 

루니아 누나에게 검을 배운다는 건 매우 가혹한 일 중 하나다. 당연하게도 목숨을 걸고 배워야 하는 건 기본이긴 한데, 사실상 목숨을 걸어서 배우는 것보다 더욱 더 극한의 상황까지 가고 있으니.

 

...스승님?”

 

네에?”

 

여린 용사는 루니아 누나에게 애처로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 이건 마법소녀의 옷이잖아요!”

 

마법소녀 옷 맞아요오.”

 

루니아 누나의 취향에 맞게 백장미를 찍는 걸로 인해, 연보라색을 베이스로 한 마법소녀로 변한 용사였다. 과할 정도로 프릴이 달려있지만, 애초에 용사의 외모는 귀여운 외모에 속했으니,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특히 키르갤은 피로 적혀진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었다. 그러다 과다출혈로 죽는 게 아닐까?

 

자아! 검술 훈련을 하기 전에 커여운 목소리를 5초간 발사해보아요오.”

 

커여운 목소리는 뭐야?

귀여운 목소리겠지.

그보다 전투 중에 귀여운 목소리를 발사하면 어쩌자고?

 

후에에!”

 

진짜 하냐!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루니아 누나에게 검을 배웠을 당시에 저러지 않았는데, 어쩌면 시공섬으로 인한 다중차원도약을 통해 이상한 걸 배워서 온 모양이다. 나는 그 전에 졸업해서 다행이구나.

 

자아. 카린도 5초간 발사아!”

 

하겠냐아아아아!!!”

 

그렇게 내 귀여운 목소리는 하겠냐아아아아!!!”로 되어버렸다. 가 아니라! 그런 일 없어! 절대로 없어! 우주가 빅뱅과 빅크런치를 5번 왕복해도 그런 일 절대로 없어!

 

이게 용사의 수련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은 1도 하지 않지만, 루니아......니의 밑에서 검술을 제대로 배우는 건 흔하지 않는 기회는 맞아. 그래도 이상한 요구를 하면 제발 안 한다고 좀 해줘...”

 

안쓰러워서 용사에게 부탁했다.

당연하게도 그게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카리인? 용사와 마법소녀의 공통점은 뭐죠오?”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루니아 누나를 바라보는 내 눈이 정상적인 눈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보 같은 질문의 대답을 해야 하는 나의 사명이 내 머리를 근질거렸다.

 

악과 맞서 싸운다는 건가요?”

 

틀렸어요오. 정답은 기합이에요오.”

 

그래서 그 기합이 지금 마법소녀 옷을 입은 용사와 무슨 관계인데요!”

 

보통 전투시의 기합이란 건 사기진작에 도움을 주는 거지, 김빠지는 소리로 용사에게 측은함을 느끼게 하는 동정심 유발 스킬이 아니란 말이야. 아니, 단순히 소리지르는 것만으로도 스킬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냥 전투행위 중 하나잖아?

 

제대로 검이나 가르쳐놔요. 그 용사는 그대로 잠재능력이 뛰어난 아이니까.”

 

그렇긴 하네요오. 카린 다음으로 백장미의 후계자가 결정될 수 있는 중요한...”

 

백장미가 아냐!!!”

 

소리지르고 밖으로 나와 답답함을 신선한 공기로 달래보려고 했다. 가까운 곳에서 마리아가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만 보이고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은 거라면, 환각이나 귀신이라고 취급할 수 있겠구나. 그렇다고 해서 꺄악! 귀신이야!”라고 소리칠 수 없다.

 

방금 첩에 대해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은 건가?”

 

아무것도...그래서 마리아는 무슨 일로 나온 거에요?”

 

밖으로 나가자! 밖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정보가 부족하다!”

 

마왕군이 밖에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는데 밖으로 나가자고 하는 마리아. 당연하게도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간섭할 수 있는 유일한 정신체다. 안정화를 위해 숙주를 나로 삼고 있지만, 솔직히 안에 가만히 있는 것도 답답하고 밖으로 나가보도록 할까?

 

그래도 하란국에선 제가 마왕하고 내통하고 있다거나, 배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 격리조치만 하지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잠깐 잡화점에 다녀온다고 하면 되지 않는가?”

 

, 그것도 일리가 있네.

결정을 했다면 신속하게 움직일 때. 잡화점에 잠깐 들렸다가 다시 하란국 근처로 사키엘의 문을 이용했다. 밖의 초목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만, 마왕군과의 전투에서 황폐화된 장소도 여럿 있었다.

 

꽤 화려하게 저질렀군. 정신적인 사념으로 보아하니 기괴한 돼지 하나 잡는데 본 모습으로 돌아갔구나.”

 

그야 사로잡아서 맛있는 음식을 안주고 농락하겠다는데, 어느 누가 진심으로 안 때리겠어요?”

 

이곳도 이상한 간부들밖에 없구나. 흐음...”

 

그리모스라는 간부도 좀 이상한 녀석이었지. 처음 보자마자 항복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자고 꼬드기니까. 그때는 내가 모든 뼈를 박살 내는 바람에 순살치킨이 되었을 지도 몰라. 얼마 안 있으면 다시 부활하겠지만, 한동안 나 때문에 하란국에 접근하는 건 꺼려하겠지.

 

이런 세계는 카일의 손짓 한번이면 모든 것이 뒤바뀌지 않는가?”

 

그거야 가능은 하죠. 하지만 이질적인 무언가가 자꾸 걸려서요. 분명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지만, 이 또한 누군가의 개입이 들어간 거 같아요.”

 

세계를 뒤집어 엎는 것도 확실히 그 세계의 관리자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곳은 내가 관리자가 아니다. 어떻게 창조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결정지을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매번 이질적인 기분과 근본도 없는 정체불명의 이 나를 통제하고 있다. 관리자가 아닌 녀석이 차원을 뒤흔드는 건 커다란 상처가 남을 테니 말이지.

 

이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 차원의 관리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건가?”

 

아니면, 우리가 이 차원을 떠나는 방법이 있죠.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곳에도 의뢰를 몇 가지 받은 바람에 잡화점이 이동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잡화점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주인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놓으면 어떻게 하냐? 아니, 애초에 잡화점 자체만으로 미스터리잖아? 언젠가 한번 잡화점을 뜯어보던가 해봐야겠다. 세린은 분명 흔쾌히 거절할 거야.

거절 당하는 거구나.

 

차원의 관리자라기 보단 이곳도 각본가처럼 임의대로 만들어낸 공간 같은데, 애석하게도 각본가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단 말이죠?”

 

각본가가 존재하지 않아도 그 자리를 대신 할 수 있다는 의미로군?”

 

마리아는 내가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미리 이야기 했다. 각본가를 자청하는 존재가 사라질지언정, 그 자리는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은 그 역할은 여전히 내 근처에서 서성이며,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

 

오호? 우연이로군? 짐을 찾으러 온 것인가?”

 

마왕?”

 

하긴, 이곳에서는 누군가가 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 그렇게 부르는 것을 허락하노라.”

 

대격변 이후의 마왕은 자신의 심복 몇 명만 이끌고 하란국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듯했다. 그보다 허락은 무슨 허락을 말하는 걸까?

 

그런데 잡화점 주인 안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느껴지는군? 짐의 타락의 영향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끝에 검은 머리는 누구의 짓인가?”

 

마왕은 나에게 생긴 이상현상에 대해 경계했다. 격변이전의 레시아라면 검은 달의 여왕과 비등하거나 더욱 더 높은 서열에 있겠지만, 지금의 마왕은 검은 달의 여왕에게 간단히 죽을 수도 있다.

 

염색을 잘못했다는 말은 통하지 않을 거 같네. 이전 세계에 있던 동료가 찾아왔지. 검은 달의 여왕이라고 하면 아실지 모르겠지만...”

 

일부러 정체를 말한 이유는 2가지.

이곳을 만든 각본가가 내가 예상하고 있는 자라면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만약 아니더라도 나름대로의 혼란을 더욱 더 가중시킬 수 있다. 검은 달의 여왕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그걸 섣불리 건드리다가 전멸할 수 있으니 말이지.

 

검은 달의 여왕이면 멸망하는 차원의 구세주인가?”

 

마왕은 손쉽게 답을 말했다.

그러면 내가 아는 각본가는 하나로 좁혀지지.

다만, 지금은...

 

격변이전의 세계에선 수많은 동료들 중에 하나야.”

 

[아니. 신부 중 하나라고 하거라.]

 

[마리아. 아무리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말을 해야 합니까?]

 

[첩도 대격변이 지나간 이후 오랫동안 출연하지 못했단 말이다!]

 

[이게 무슨 버라이어티 쇼인줄 알아요? 출연이 아니라 출현이겠죠!]

 

멸망하는 차원의 구세주는 무슨...

멸망해버린 맞춤법부터 구제해야 할 판이다.

 

[다만, 첩이 생각하기엔 이건 확인 방법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첩이 간섭한 차원이 많을뿐더러, 격변 이전의 차원 또한 첩이 공식적으로 있는 자리가 있으니 말이다. 첩이 생각하는 초점은 어째서 엘티노스가 거론되지 않고 이어져가는 가에 대한 것이 아닌가?]

 

[그 유명한 양반이 거론되지 않았다고요? 그럴 리가 없...]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대화에서 엘티노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나? 그보다 엘티노스라는 이름이 거론되긴 했을까?  아니면 이곳은 엘티노스가 없는 세상이 아닐까?

 

그렇네. 잘 생각해보니 그랬어.”

 

? 무슨 소리인가?”

 

엘티노스는 이전 모험을 떠난 기록이 있다. 그 과정에서 마왕을 일방적으로 구타하는 바람에 인간계의 침략을 막아버렸으니까. 지금 엘티노스가 그런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면, 지금 이 마계의 침략은 엘티노스라는 키워드가 빠져버린 상태다. 그러면 제목도 잡화점 이야기로 되어버리잖아?

 

제길...그 성질 나쁜 아저씨를 어디로 날려버린 거지?

 

엘티노스. 알아?”

 

나는 마왕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 그 자는 누구이지?”

 

대답을 듣고 확신을 했다.

엘티노스가 빠져버린 차원에서 내가 할 일은, 엘티노스가 없어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것과 아니면, 엘티노스라는 키워드를 빠뜨린 각본가를 찾아서 뒤집어 엎어버리거나...

 

지금 내가 있는 잡화점은 엘티노스 잡화점이야. 그리고 엘티노스라는 자는 500년전 모험을 떠나면서 영웅이라고 칭송 받을 정도로 업적을 이룬 대마법사이기도 하지. 물론 이 잡화점은 내가 물려받았으나, 현재는 엘티노스라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의문이기도 해.”

 

하지만 짐은 살아생전 그 이름을 듣지 못하였노라. 그렇게 크나큰 위인이라면 짐이 살아오면서 지식이 습득될 터.”

 

그러면 대격변의 이유는 각본가를 제외시키면서, 엘티노스까지 사라져버린 세계가 되어버렸다. 이건 마치 직소퍼즐이 500피스인데 하나가 사라졌다고 생각했더니, 두 개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1개 없어진 건 그나마 봐줄 수 있어도, 두 개가 비어있는 건 사람에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주니까.

 

나만 그런가?

 

그렇군. 확실히 짐이 모르는 지식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그대는 기괴하다고 볼 수 있노라. 다만, 지금은 전쟁 중이기도 하고 그대는 세간에서 용사그룹의 일원 중 하나.”

 

숲 속에서 중무장 된 병사들이 차례대로 나왔다.

매복을 하고 있었던 건가?

 

내가 나올 줄 알고 있었나 보네?”

 

그대의 세계와 짐의 세계의 차이점은 마왕성에서 듣도록 해보도록 할까? 아니면, 그대가 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는 편이 더 신빙성이 높은가?”

 

마왕의 사기가 끓어오르자 주변의 병사들의 사기 또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 적당히 저항해서 도망친다면 그게 더 신빙성이 높지 않을까?”

 

아직까지 마왕과 나는 세계를 상대로 연기를 하는 중이니 말이지.

그래도...투쟁의 기운을 한 몸에 받은 나 또한 즐겁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지금의 나를 이길 수 있다면 말이야?”

 

연기라는 것은 보는 사람에게 있어서 실감나야 하니 말이다

============================================================================

글을 내놓고 거의 한달이 지난 이후에 아니, 두달인가???

아무튼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때까지 일을 하면서 바쁜 스캐쥴을 소화하고...

일하면서 욕도 먹고 칭찬도 먹고 돈도 먹으면서 그나마 안정권이 되었는데

글을 자주 안쓰다보니까 내용이 어떻게 된 건지 까먹는 바람에

 

제 글을 정주행하고 어느 정도 갈피를 잡아서 썼습니다.

 

사실상 글쓰는 걸 접어야 하나 생각은 했는데...

게임 안하면 유튜브 보는 일인데 그것도 안하면 글을 쓰는 거였네요...

 

결국 오랜시간동안 안올리다 지금에 와서 올립니다.

어차피 연재중지라는 말도 안 했는데 계속 이어져도 되겠죠...

 

여러분은 일하지 마세요

일하면 패배...당신들 누구야! 읍읍!

 

618

 

 

 

가능하면 어느 누구도 손해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용사의 트라우마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선, 루니아 누나에게 무릎베개와 귀청소를 하겠다고 하자, 흔쾌히 승낙을 하고는 지금 하란국의 숙소 안에서 귀청소를 하는 중이다. 루니아 누나의 귀에는 딱히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깨끗하지만, 마사지로 인해 편안해지는 것 때문인지 조용히 있는 루니아 누나.

 

그래서 이곳에 오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길래, 릴리 기사단 복장을 집어 던지고 사이버틱한 복장으로 오신 거에요?”

 

소녀는 신기한 일에 자주 휘말린답니다아.”

 

아무리 그래도 소녀가 공간을 찢지는 않아요. 게다가 루니아 누나 나이를 생각해서라도...흐아앗!”

 

흐응? 역시 카린의 허벅지는 부드럽네요오? 그리고 언니라고 불러야죠오?”

 

지금 귀이개가 루니아 누나의 뇌까지 관통할 뻔했잖아요! 그리도 둘이 있을 때는 누나든 언니든 그냥 들어요! 은근슬쩍 더 허벅지 안쪽까지 들어가지 마시고요!”

 

지금 당장이라도 손을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설득으로 시작을 해보자. 좀 더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말이지. 어쨌든 루니아 누나는 지금까지 차원을 찢어가면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니까아. 트리케라캅 씨하고 바바리아나 씨하고 같이 쿵퓨리 씨를 도와서어, 히틀러를 제압하고 다녔답니다아?”

 

대체 누가 그런 일을 하냐고요! 그보다 트리케라캅 씨는 또 뭐에요?”

 

얼굴이 트리케라톱스인데 멀쩡하게 이족보행을 하는 의무감 넘치는 경찰이랍니다아.”

 

도대체 그런 생명체와 왜 일한 거에요!”

 

모든지 해킹할 수 있는 해커맨에게 도움 받기 위해서죠오?”

 

누가 들으면 그 해커맨이 시공간도 해킹할 수 있는 줄 알겠다.

...진짜냐?

 

아니, 그것보다 쿵퓨리라는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인데요?”

 

그거야. 형사죠.”

 

아마 정상적인 형사는 아니겠지? 어디서 뛰어내리는 와중에 권총으로 차를 쏴서 시동을 걸만한 그런 인간일 거야. 한쪽의 귀청소가 끝나서 반대편으로 돌아달라고 말했는데, 루니아 누나의 붉은 눈이 나와 마주하는 순간,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라아? 마리아가 카린의 몸 속에서 적응하는 건가요오?”

 

. 그렇죠.”

 

아무래도 코발트 블루 색상의 머리카락 끝에는 검게 물든 흑발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으니까. 마리아가 완전히 적응되면 비상시에 내 몸을 이용해서 권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겠지만, 그럴 바에 차라리 내 힘으로 둘로 쪼개서 카린의 몸은 마리아에게 양도하고, 나는 본래 모습인 카일의 몸으로 살아가면 된다.

 

! 그렇게 되면 완전한 힘으로 뭉쳐지지 않고 양분하니까, 본래 성별인 남자의 모습으로도 잡화점에게 흡수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카린과 카일을 묶어놓고 백장미와 흑장미 콜라보로 찍으면언?”

 

그런 대재앙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겁니까?”

 

대재앙이라뇨오? 이것은 신화창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아. 혹은 빅뱅이 터진다고 하죠오?”

 

백장미와 흑장비를 콜라보하면 우주가 멸망했다가 다시 재탄생하는 건가? 아니...도대체 그 망할 잡지가 뭐길래!

 

잘 모르겠지만 이상한 일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전 백장미든 흑장미든 찍지 않...흐아앗!”

 

또 다시 루니아 누나의 나쁜 손이 허벅지 안쪽을 향해 진로를 틀었다.

 

백장미와 흑장미를 찍지 못하게 할 거라면, 백장미와 흑장미가 없이 못사는 몸으로 만들어드리죠오?”

 

무슨 바보 같은 마개조를 할 생각이에요! 그만둬요! 제 귀이개가 루니아 누나의...”

 

언니.”

 

아무튼! 귀이개로 아이스크림 퍼 올리듯이 뇌를 꺼내게 만들지 말라고요!”

 

그렇게 엉망진창인 귀청소가 끝나고 루니아 누나는 기지개를 피며, 내 무릎베개에서...아직까지도 떠나지 않았다. 다 끝났다고 한들 내 복부에 얼굴을 맞대고 있는 루니아 누나. 잠깐 눈이라도 붙일 심정으로 아무 말 없이 잠들어버렸다. 쓸 때 없는 말만 하지 않으면 누구나 다 사로잡힐 듯한 절세미인인데.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관없나?

 

일단, 시나가 올 때까지 특... 서비스를 해드려야죠. 무차별적으로 시공간을 찢고 넘나들면서 고생이 많았을 텐데...”

 

루니아 누나도 잠...

 

......”

 

어째서 자면서까지 내 독백을 알아차리고 잠꼬대를 할 수 있지? 이제 개와 소를 뛰어넘어 잡초뿐만이 아니라 공기 속에 있는 원자와 분자까지 내 독백을 읽을 수 있게 된 거냐? 어쨌든 피로회복과 안정에 효과가 뛰어난 무릎베개를 계속 대여해주는 동안, 생각을 정리하기 좋은 숨소리가 숙소 안에서 퍼졌다.

 

-똑똑똑

 

성녀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내가 들어오라고 하자 조용히 문이 열렸다. 경첩이 녹슬지 않아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아 좋았다. 다만, 들어온 사람은 기사가 아닌 용사였다. 가여운 동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저렇게 보여도 마왕군이 포위했을 때 혼자서 무쌍을 찍은 사람. 다만, 마왕군보다 더 무서운 루니아 누나가 내 무릎에 잠들고 있자, 안 좋은 트라우마가 떠올랐는지 움찔거렸다.

 

...성녀님. 이 분은 위험한 사람입니까?”

 

저는 성녀가 아니지만 이 사람은 매우 위험한 사람이라고 분류하면 됩니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위험한 사람 맞다.

아니, 솔직히 루니아 누나가 있을 때마다 매번 백장미 찍자고 난동을 부려서, 하루는 가출을 설산으로 하고, 나를 굶겨 죽일 때까지 임시은신처에서 포위를 한 체 협상을 하던 인간이다.

 

그래도 제대로 된 교섭을 통해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죠.”

 

, 성녀님은 정말 인자하신 분이군요!”

 

아니, 성녀 아니라고 분명 앞에서 말했잖아!

 

저는 인자하지 않아요. 제가 아는 사람에게만 잘 대해주려고 노력할 뿐이죠. 진정한 성녀의 인자함은 적과 아군을 구분 없이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성녀가 아니고, 잡화점의 주인이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야...”

 

카리인?”

 

졸음에 살짝 힘겨워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루니아 누나. 누군가가 보면 평상시와 다른 갭에 심장을 부여잡을지도 모르겠구나. 다만, 나는 오른손으로 루니아 누나의 눈을 가리며 입을 열었다.

 

아직 피곤해 보이니 더 자고 계세요.”

 

사실 루니아 누나의 시야에 용사가 포착된다면 꽤나 귀찮은 일이 일어나니,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목소리는 잘 몰라도 귀여운 것만 보면 발광을 한다는 기괴한 단점이 있으니까.

 

내 목소리를 수면제 삼아 다시 잠들고 있는 루니아 누나. 용사는 그러한 내 모습을 보며 눈을 더욱 더 반짝였다.

 

, 정말 굉장...!”

 

. 지금 사람이 자고 있으니 조용히.”

 

나는 돌아보며 일부러 입을 열었다. 기껏 이 용사가 위협에서 지키기 위해 내가 희생하고 있는데, 오히려 잠든 사자의 코털을 건들이며 난장판으로 만들어 혼돈의 도가니로 만들 생각인가? 이 사람이 일어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일이 귀찮아진단 말이야.

 

그나저나 볼일이라도 있나요? 없다면...”

 

아뇨. 볼일이라면 있는데...그 사람이 제 스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

스승?

지금 저 용사가 뭐라고 한 거지?

 

제 검을 간파하고 단 1합만에 제압하는 그 실력을 보고 전 알았어요.”

 

잠깐만, 그렇게 진지하고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뜨리지 않아도 돼. 용사가 검만으로 해결하는 직업은 아니잖아? 마법도 배우고 동료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막타만 먹는 직업 아니었냐고? 아니, 최근의 용사물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기존에 옛날 형식에서는 그렇다는 거지. 어쨌든 그걸 따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지금 네가 스승으로 받들려고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검사란 말이야!

 

좀 더 강해지려면 저에게 체계적인 검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요!”

 

언제부터 시공간을 잘라먹는 검술이 체계적인 검술이 된 거냐? 저건 이론상으로도 못한다고!

 

이 사람에게 검술을 배우면 그 이상으로 혹독한 대가가 따름에도 불구하고요?”

 

그 혹독한 대가라면 아마 여장이겠지. 아니면 백장미에 특수한 페이지로 추가 되거나.

 

, 상관없어요! 모두를 지키고 마왕을 처단할 수 있다면!”

 

인생...

난 모른다.

네 결정에는 네가 후회해라.

 

그래도 키르갤에게는 제대로 이야기 해주셔야 되요. 안 그러면 별 이상한 이유로 싸우게 될 테니까. 이 사람에게는 제가 말할 테니 다른 용무가 없다면 나가보셔도 되요.”

 

사실은 성녀님께 검을 배우고 싶었지만...”

 

저에게요?”

 

그보다 성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

아니, 이렇게 독백으로 집요하게 마음속으로 트집잡는 것도 지치는데.

그래도 순수하게 놀란 이유라면, 용사가 나에게 검을 배우고 싶다는 말 때문일까? 내가 제자를 가르친 적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맞춤형으로 조언만 해줬을 뿐. 매우 뛰어난 제자들은 그것만 알아듣고 나머진 알아서 했다. 용사는 천재라기보단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줘야 하는 평범한 인간의 범주이긴 한데...

 

저에게 배운다는 건 그나마 옳은 선택일지 몰라도, 검사의 길 한정으로는 지금 자고 있는 이 사람이 가장 뛰어나거든요.”

 

당연하게도 어떤 마법을 사용한들 루니아 누나를 이길 방도가 없었다는 게 더 큰 이유였지만, 시공섬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술을 쓰는 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루니아 누나는 아마 시공간의 흐름까지 읽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많이 피곤했는지 이렇게 떠드는데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루니아 누나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성녀님은 그분과 어떤 관계인가요?”

 

순진한 눈망울로 물어보는 용사.

 

부부에요.”

 

무의식적으로 이야기를 이렇게 해버렸지만, 틀린 것도 아니고 혹은 농담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그렇군요.”

 

납득했냐!!!

아무래도 이 용사의 매우 순진한 성격을 계산에 집어넣지 않은 것이 화근인 듯하다.

 

그러면 같이 침대에 손잡고 자면 아이가...”

 

안 생겨요. 키르갤에게 나중에 자세히 물어보던가 하세요. 참고로 황새가 물어다 주는 것도 아니고, 다리 밑에서 주워오는 것도 아니고, 알에서 깨어나는 것도 아니니까 그 이상 묻지 마세요.”

 

알에서 깨어나는 건 신화에나 있을 법한 일이지만, 확실히 인류가 맨 처음 태어나기 전에, 창조신이라는 작자는 어디서 태어난 걸까? 우주에 알에서 태어난 걸까? 아니, 쓸 때 없는 생각으로 용량을 사용하지 말자.

 

아기요오? 그거라면 직접 보여드릴 수 있긴 한데에...”

 

잠깐만요. 일어나는 타이밍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다시 안 자요?”

 

카린이 절 수면마법으로 재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마안! 제 정신력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오!”

 

어디서부터 일어난 거에요? 그보다 지금 어린애 앞에서 뭘 보여줄 생각인데요?”

 

뭐긴 뭐에요오? 사랑의 교미죠오?”

 

집어 던져버릴까?

행선지는 집게리아다.

 

웃기지 마세요! 지금 당장 깊은 저 바다 속 파인애플에 던져버리기 전에, 제 허벅지를 은근히 추행하고 있는 그 손 안 때요!”

 

안 되요오! 저 아이에게 우리의 관계가 끈~적하고 농후한 사이라는 걸 보여줘야죠오?”

 

그 빌어먹을 민달팽이 그만 안 둬? 하지마! 잠깐! 일어나지마! 꺄아악!”

 

그 와중에 순식간에 일어난 루니아 누나가 사냥감을 덮치는 맹수로 돌변해, 순식간에 그 안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지만, 소란을 듣고 찾아온 용사 일행에 의해, 용사의 눈 앞에서 민달팽이인지 뭔지는 당하지 않았다.

 

용사도 나도 서로 트라우마가 되지 않아 다행이네.

============================================================================

그렇게 용사도 지옥행 열차를...아닙니다.

 

블로그 이미지

FNL-Phantasm

카테고리

판타즘의 공간 (757)
글쓰기 관련 공지 (2)
취미로 글쓰는 중? (753)
즐거운 스트리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