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2

 

 

 

마왕군과 하란국의 공방전은 서서히 끝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대략 2주가 흐른 뒤에 아직까지 용사가 루니아 누나의 표적으로 지내는 동안, 리제로트가 칸포리우스 제국의 성기사단을 이끌고 찾아왔기 때문이었고, 결계를 해제한 하란국의 여제 또한 다시 강력해진 상태였다. 아직까지 피해복구를 하느라 밖에서 힘을 쓸 때쯤. 하란국 내부의 외교에서는 의외로 상황이 좀 심각해지고 있었으니...

 

성녀는 지금 용사일행과 같이 움직이고 있는데, 지금 칸포리우스의 성녀가 없다는 것을 빌미로 넘기라는 말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닙니까?”

 

대주교님은 그녀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내린 방침입니다. 지금 천계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성녀의 이름으로 여신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여신은커녕 천계가 거의 전멸 되었다는 시나의 말을 기억했다. 다만, 아직까지 이 사람들이 나에 대한 인식을 좀 깨달을 필요가 있는데.

 

저는 성녀가 아니라 잡화점 주인이라니까요...”

 

리제로트가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얄미운 웃음이 저절로 피어 오르고 있었다. 금발 인형처럼 잘 가꿔놓은 소악마적인 웃음이라니. 직접 당하는 입장인 나에게 있어선 속에 기름을 붙고 불을 부었는데, 또 다시 기름을 붇는 그런 상황이다.

 

칸포리우스 제국의 협력 조건이 성녀를 데리고 가는 것이니까요!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성녀만 주시죠?”

 

제가 어디 사고 파는 물건입니까? 리제로트 씨.”

 

사고 파는 물건은 아니지만...잘 간직해야 할 물건인 것은 확실하죠. ‘카린?”

 

말 한마디도 안 지겠다는 의지가 저 두 눈에서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극적인 희생장면을 내가 당해야 한다고? 용사그룹이야 루니아 누나에게 맡기면 상관 없지만, 지금 당장 떨어져서 걱정되는 것보단, 칸포리우스 제국으로 가서 무슨 일을 당할 지가 더 걱정이 되었다.

 

보통 광신도들이 넘쳐흐르는 곳에 들어가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진압할 수도 없고, 어떻게든 나에게 목줄을 채워놓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일단 가도록 하죠. 어차피 성녀도 아닌데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잠깐만 보고 오면 해결 될 일이잖아요?”

 

하지만 나에게 힘이 있으니, 그렇게 썩어빠진 녀석들이 대신관들이라면 교육을 하면 되고, 만약 아니라면 차분하게 다음을 향해 나아갈 생각을 하면 될 뿐이다. 어차피 잡화점에 수시로 다녀올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라리 칸포리우스 제국 자체를 지도 밖으로 날려버리면 될 뿐이다. 아마 최후에 실행해야 할 일은 칸포리우스 제국을 없애는 것이 되지 않을까?

 

성녀님...”

 

옆에 있던 용사가 걱정되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저 애는 이 와중에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사람 화나게...

 

저는 괜찮아요. 당분간 루니아 누...언니를 붙여놓을 테니 전력이 될 거에요. 다만, 칸포리우스 제국에서 마왕성까지 용사들을 지원한다는 건 왜 없는 거죠?”

 

차라리 내가 없다면 나를 대신할 사람은 칸포리우스 제국에서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의 꼬리를 물려고 할 때, 얄밉게도 내 앞에 불쑥 고개를 들이민 리제로트가 친히 입을 열었다.

 

그거야 당연히 하란국을 지원하러 온 것뿐이지. 용사를 지원하러 온 것이 아니랍니다. 하란국은 칸포리우스 제국에게 있어서 마왕군의 진격을 저지할 배틀필드. 그곳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하고, 거의 무료로 수도를 넘어 마왕군이 정복한 땅까지 되찾아드리는 거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병력을 쪼개 용사들을 지원하기에는 힘들고, 비용도 만만치 않으며 전투력의 공백이 생기고, 최후방에도 마왕군의 특수병사들이 침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해, 성녀님을 빛의 대성당으로 모시며 힘과 정신적인 지지를 얻는 것이야 말로, 칸포리우스 제국의 뜻이랍니다.”

 

이 녀석 죽을 위기를 넘겨서 칸포리우스 제국으로 가더니, 완전히 빛의 교도에 교화되어 돌아왔잖아.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러면 우리들은 개고생을 해서 마왕성으로 가야 한단 소리잖아!”

 

키르갤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안 그래도 드래곤 피어가 모든 공간을 옭아매기 시작하자, 진한 살기를 내뿜는 성기사단들이 전부 무기를 꺼내 대치하고 있었고, 용사 그룹마저 무기를 빼며 싸울 의지를 보였다.

 

그만! 제가 가면 되잖아요!”

 

나의 소리가 허공을 가득 메우고 분위기가 양극화되기 시작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넌 좀 나중에 보자.”

 

리제로트가 환희에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뭔가 꿍꿍이가 숨겨진 웃음은 내 눈을 피하지 못했다. 빛의 대성당에서 무엇을 봤길래 리제로트가 날 끌어들이려고 작정한 건지...

 

아무래도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이 나를 반기는 듯 했다.

 

***

 

마차라는 건 많이 타보지 못했다.

잡화점에는 사키엘의 문이라는 편리한 이동수단이 있으니까.

자신이 원하는 공간을 생각하고 문을 열면 그 광경이 펼쳐지는데, 집중력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곧바로 하늘에서 번지점프를 할 수 있다.

 

그것도 줄 없이.

 

다만, 마차를 타고 칸포리우스 제국으로 가는 길은 매우 따분한 여정이 되고 있지만, VVVIP 대우를 해주는 리제로트가 옆에서 꾀꼬리마냥 재잘거렸다.

 

그러니까...빛의 대성당에 뭔가 터질 거 같아서 나를 부르는 거지?”

 

. 용사 그룹들과 떨어뜨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건 카린 씨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거 같거든요.”

 

그보다 그 광신적인 표정과 연기는 언제 연습한 거야?”

 

저는 의외로 연기에 소질이 있었다는 설정이 첨부되어있던 거죠.”

 

스스로 설정이라고 말하지마. 정신 사나우니까.”

 

그보다 너무 딱 붙어있잖아? 마차는 마주보면서 가는 거 아니었어?

 

그리고 그거 잊지 않으셨죠?”

 

아니. 잊었어. 완벽하게 잊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안나.”

 

웃기지 마요!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해도 진짜 몬스터를 풀어놓고 죽어라 달리던 저를 흐뭇하게 보셨잖아요!”

 

흐뭇하게 본적 없어. 그냥 잘 뛰네...라고 생각했지.”

 

봐요! 기억하잖아요!”

 

제길. 유도심문에 걸려버리다니.

내 옷을 붙잡은 리제로트의 힘이 점차 강해졌다. 꽉 잡고 더 이상 놔주지 않겠다는 듯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번 밤에 습격할 거니까 문은 잠가놓지 마시죠?”

 

“3중 잠금에 양자 잠금까지 할 테니 기대해도 좋을 거야.”

 

밤에 습격하겠다는 예고를 직접 날리는 리제로트.

조만간 잡화점에서 내쫓아야겠다.

 

농담은 그 정도로 하고 마왕군이 진격하는 와중에 아직까지 정신차리지 못한 제국은 칸포리우스 제국이란 소리겠네?”

 

어차피 최후의 보루가 칸포리우스 빛의 대성당이잖아요? 그렇기에 기고만장해진 고위급 관리들은 자신의 배만 채우기 바쁘죠.”

 

그러면 그 녀석들을 전부 갈아 없애는 것이 주된 임무인가. 아무래도 성녀라는 직함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걸리기도 하고...

 

그럼 나를 어떻게든 구속해서 자기 좋을 대로 써먹겠다는 의미네. 지금 이렇게 나를 끌고 가는 의미 또한...”

 

. 맞아요. 하지만 카린 씨는 잡화점의 주인이잖아요? 성녀가 아니라?”

 

성녀가 아닐뿐더러 지금은 마리아가 나에게 동화되어있기 때문에, 다른 여신을 담을 수도 없는 몸이야. 시나는 어디에 있길래 너와 같이 있지 않은 거야?”

 

여신님은 지금 천계수복작업을 하고 있어요. 천계의 생태계가 말도 아니라는 말과 함께, 빛의 대성당에서 보자고 하셨거든요.”

 

어쨌든 칸포리우스 제국으로 가자는 건가. 하지만 천계의 생태계가 말이 안 된다는 말은 지금 모든 영혼이 어디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소리일까? 사실 윤회를 거쳐서 환생을 한다는 작업은 천계에서 상급 신이나 하급 신 등. 깨끗한 영혼을 가진 영혼이 아닌 다른 모든 영혼들을 환생할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지금 시나가 하는 일은 천계의 생태계를 복원하는 과정이 아냐. 빛의 대성당에 있는 일원들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피신한 것뿐이지. 다른 차원의 여신마저 피신할 정도로 뭔가 꺼림칙한 것이 있다는 거야.”

 

시나가 무엇을 보았길래….

복구작업을 그만두고 숨어버린 것일까?

 

이 세상에는 정화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야. 다른 외계문명에서는 행성자체를 정화한다고 하는데, 이 행성도 불바다로 만들면 모조리 정화가 되겠지? 그러면 내가 칸포리우스 제국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시답지 않은 녀석들이 날 구속하고 지 멋대로 하는 행위 또한 안 봐도 되니까. 좋아 전부 다 불질러 버리자.”

 

안 돼요! 저희가 살 곳이 없어지잖아요! 그보다 용사나 다른 사람은 무슨 죄에요!”

 

가장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하지 않겠다니.

사실상 그렇게 해결했으면 30번은 더 하고도 남았지.

 

그렇다고 칸포리우스의 빛의 대성당이 초콜릿 공장마냥 좋은 곳은 아니잖아. 윌리 왕카가...”

 

윌리 웡카에요.”

 

넌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보고 말하는 거야?”

 

초콜릿 공장이라도 다녀왔나? 그거 황금티켓이 아니면 안 되는데?

 

그렇다면 지금 이 고착상태를 만들고 있는 이유와 천계가 거의 망해가는 이유가, 칸포리우스 제국과 관련이 있다는 소리인데.”

 

그러면 빛의 대성당은 신을 죽이기 위한 준비를 한 것이 아닐까? 마왕군과 긴밀하게 진행해온 일일까?

 

그건 나중에 조사해보면 생긴 일이죠. 그나저나 오랜만에 좀 안아주시죠?”

 

내가 널 평소에도 안아줬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 하고 있는데?”

 

그래도 칸포리우스 제국 내에 들어가서 성공적으로 지원군까지 불러왔잖아요!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제가 이 위치에 올라오는데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는데요!”

 

오랜 세월 치고는 1년도 안 된 시간 속에서 병력과 물자를 지원한 사신으로 왔잖아? 그것만으로도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가늠이 오긴 해. 그리고 왜 멋대로 내 무릎에 누워있는지 알려줄래?”

 

은근슬쩍 내 무릎에 머리를 놓은 리제로트는 세상을 다 가진 편안함으로 기지개를 쭉 폈다. 마차가 아무리 넓다고는 해도 사람이 눕는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제약이 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얼굴로 고양이 같이 고개를 이리저리 비벼댔다.

 

거기는 예쁜 애들이 없거든요. 뭐 정확하게 성녀와 더불어 성녀를 지망하는 무녀조차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무녀마저 없다고?”

 

빛의 대성당에선 신을 받을 그릇으로 모두 불충분하다며 내쫓았다고는 하지만, 이건 역으로 현재 천계에 신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잖아요? 하지만, 이걸 알고 있으면서도 숨기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알면서도 숨길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천계는 어째서 멸망을 했는가? 아마 그건 엘티노스가 상급신으로 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엘티노스가 없는 세계는 천계의 몰락과 함께, 마왕군과 인간의 끝없는 전쟁으로 인한, 칸포리우스 제국의 이익만을 챙길 수 있는 그런 부패된 세계라...

 

어차피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고양이마냥 애교부리는 리제로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바보 같은 짓을 확실히 끝내야겠어.”

 

덜컹거리는 마차만큼이나 심란한 마음은 여김 없이 나를 뒤흔들었다.

============================================================================

 

빨리 이 에피소드도 끝내야 하는데...

잦은 출장과 잦은 야근이 초래한 최악의 연재를 만들어냅니다.

(아무리 그래도 날밤샌 사람에게 곧바로 광주출장가라고 하다ㄴ...)

 

그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실 감기기운까지 도져서 몸과 정신이 신비와 모험으로 가득한 멘붕의 나라로 가고 있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블로그 이미지

FNL-Phantasm

카테고리

판타즘의 공간 (757)
글쓰기 관련 공지 (2)
취미로 글쓰는 중? (753)
즐거운 스트리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