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606
606
루시피나가 불러서 찾아왔다라는 말을 두고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해보자. 내가 과연 루시피나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제 발로 찾아온 걸까? 만약 나에게 볼일이 있었다면, 내가 가는 쪽이 아니라 루시피나가 오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키르갤이 “안 오면 유성로 만들어버리겠데.”라는 말만 아니었어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우중에 하나가 되고 싶지 않으니, 제 7용사와 더불어 시나까지 한꺼번에 우루루 몰려오자. 격변 이전에는 화사한 웃음으로 맞이했겠지만, 지금은 격변 이후의 루시피나다.
-콰지지직!
음. 동굴의 벽은 그리 강하지 않은 모양인...
“어이. 어째서 이 사람들이 내 소중한 레어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거야? 키르갤?”
“그야 내 동료니까. 아 저 성녀님은 빼고.”
“잡화점 주인이라고 몇 번을 말해.”
잡화점 주인이 여자란 이유로 성녀취급을 받는 건 좀 그렇다. 아니, 차라리 날 성녀라고 부를 거면 잡화점을 성당으로 만들어 놓고 그런 소리를 하던가? 다른 이들에게 오해의 여지를 살만한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평화로 가는 지름길이다.
“저 올빼미는 또 뭐야? 오늘은 거물을 너무 많이 만나는데?”
“저는 람파시나. 마스터의 사역마입니다.”
“오오! 말했어!”
하긴 오랫동안 시나와 루시피나도 같이 보고 살아왔으니, 올빼미 상태에서 이야기를 하는 건 그리 위화감이 없지만, 제 7그룹의 용사들에겐 꽤 강력한 자극이 되었나 보다. 저 꼬마 용사가 탄성을 지르는 것도 그렇고, 내 바로 옆에 있던 거한을 무표정하게 쏜 주제에, 올빼미가 말한다고 하여 눈썹이 살짝 움직인 남자이며...
“뭐야? 이 올빼미 인형인가? 혹시 복화술사야?”
날 복화술사로 보고 눈을 반짝이는 키르갤을 마지막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 기사는 다른 곳에 간 건가? 아니 애초에 찾질 말자. 사람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상태가 마음이 편하다.
골치거리가 많이 있다는 생각은 내 앞에 붉은 머리를 한 여성도 마찬가지. 고운 이마가 다 찌그러진 상태로 살기를 끌어 모았다. 근데 왜 눈은 나를 바라만 보고 있는 걸까나?
“우리 잠깐 밖에서 좀 이야기 할까?”
루시피나의 가녀린 팔에 비해 내 어깨는 타 들어가는 감각만이 날뛰고 있었다. 내 어깨를 안마해주는 건 확실하게 아닐 테고,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내 팔을 잡아 뜯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만둬! 내 팔의 라이프는 이미 제로야!
결국 질질 끌려 나와 레어 밖에 있는 들판에서...
“푸하아악!”
어처구니 없게도 땅바닥에 굴렀다. 흙과 풀의 일부가 어느 정도 내 입에 들어간 듯한데, 씹지 않고 퉤퉤! 하며 뱉어냈다.
“대체 너 정체가 뭐야!”
“자, 잡화점 주인인데요...”
아무래도 루시피나가 이렇게 화내는 이유 중에 큰 이유가 있다면, 람파시나의 존재 때문일까? 다른 차원의 여신은 이곳에선 영향력을 크게 줄 수 없지만, 아직까지 내 사역마로 취급되고 잡화점 멤버라는 인식이 있다면, 이곳에서도 거대한 영향력을 준다는 의미다. 다른 차원에 있다고 해서 힘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그런 거물이 자신의 레어에 쳐들어왔으니...
“잡화점 주인이 이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 아무리 봐도 그 올빼미는 초월급의 개체인데! 너 정말 성녀라도 되는 거야? 마왕이라면 싸울 수 있어도 저런 걸 이길 리가 없잖아!”
저런 걸이라면 람파시나를 말하는 건가? 아니, 그건 상관 없다. 지금 루시피나의 말을 듣고 기괴한 전투력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으니까. 이전 잡화점에 있을 땐 레시아와 람파시나는 대등할 정도로 힘이 강하다면, 지금의 마왕인 레프리시아는 람파시나를 이길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는 마왕이라는 카테고리가 너무 강하지만, 지금은 람파시나의 등장으로, 밸런스가 한쪽으로 치우쳐버렸으니까.
“그건 그렇고...”
흙먼지를 터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입을 열기를...
“본 모습으로 돌아가봐.”
“그건 왜요?”
“그야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 때문이지! 내가 반할 정도로 잘 생겼는지, 아니면 뭔가 사고가 있어서 강제로 결혼하게 된 건지! 그 이유를 알아봐야겠어!”
그런걸 알아 봤자 뭐에 쓴다고?
“강제로 결혼을 당한 건 접니다만...뭐, 믿기지 않겠다고 생각은 해도 어차피 이해를 구하지는 않아요.”
이해를 구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루시피나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도 없다.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니?”
“당연히, 지금의 세계는 격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니까요. 제가 꼭 본 모습으로 돌아가서 확인시킬 이유도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본 모습으로 변하면 힘의 팽창을 막을 수 없어요. 그림이나 사진이 있었다면 좋겠지만...”
왜 하필 남아있는 게 백장미뿐이냐?
그 전에 너무 잘 찍어놔서 전부 다 태워버리고 싶잖아.
이건 보여주지 않는 걸로 하자.
“그런데 그 말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닐 텐데요?”
바람이 바뀐다. 굳이 따로 부른 이유라고 한다면 아마 지금 루시피나가 해야 할 말이 진짜겠지. 생각과 감정을 정리한 듯한 루시피나는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네 힘은 봉인할 수 없어. 이미 너무 늦었던 거야.”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별로 감흥이 없다.
“이미 늦었다면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도와주려고 하는 걸 보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네요? 아니, 드래곤이었지.”
“난 그리 좋은 드래곤이 아냐. 이건 전부 잠깐의 흥미였을 뿐이지. 그런데, 그 목에 있는 용족혼인의 문양은 정말 나와 결혼 한 거야?”
“용족혼인의 문양을 지니고 별 탈 없이 일정기간이 지나면, 부부를 선언하는 거잖아요? 그러니 저와 격변 이전의 루시피나는 별 탈 없이 행복하게 지냈었죠. 아, 만약 그 기억이 보고 싶다면 제가 어느 정도 힘을 써드릴 수 있긴 한데.”
“뭐?”
루시피나가 듣던 중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여줄 방법이 없었지만, 어차피 내 힘을 막을 수 없다고 하니, 무한정으로 늘어나는 그 힘을 잠깐이나마 이용해서, 용족혼인의 문양을 매개체로 내 기억을 보여줄 생각이다.
내 품속에서 나온 수정구는 당연하게도 평범한 수정구가 아니다.
“이건 안리아스의 수정구에요. 원본이 온전하다면 무수한 복제품을 만들고, 이 수정구로 어느 차원이든 어떤 곳이든 통신이 가능하게 만들죠. 당연히 녹화기능도 있고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한 기능이 많이 있지만, 이걸 통해 제 기억도 녹화해서 투영하는 게 가능하답니다. 그러니 루시피나도 이쪽에 손을 올려보세요.”
“소, 손을 올리라고? 설마 함정은 아니겠지?”
“이걸로 함정을 만든다고 해서 제가 무슨 이익이라도 있습니까? 어차피 함정인 걸 알면 제가 이런 말 하기도 전에 초광속으로 냅다 집어 던졌을 텐데요?”
“그, 그건 맞지만...”
수줍게 얼굴을 붉히면서 그 사실을 인정하지마. 정말 날 초광속으로 내던질 참이냐? 이 행성 궤도 밖으로 내던지려고 했다고? 아니다, 잡다한 생각은 그만둬. 지금은 행복한 시간대를 보여줘야지 지금 당장 이런 바보 같은 태클을 생각하면, 초광속이 아니라 그 이상을 넘나드는 속도로 슈팅스타를 부르며 갈지도 몰라.
“그러면 시작할게요.”
수정구에 의식을 집중하자 서서히 떠오르는 기억. 그 안에서는...
-흐헤헤…! 신랑! 이것도 한 번 입어봐!”
-그렇다. 주인. 모든 입어봐야 옷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잠깐만? 왠지 불길한 분위기가...
-싫어! 그만둬! 남자에게 그딴 옷 입히지 말란 말이야! 어디서 그런 전대물에서 나올 법한 쫄쫄이를 입히냐고요! 그보다 그 외형을 보아하니 여성용 맞죠! 그렇죠!
루니아 누나에 의해 제압당한 내가 처절하게 목소리를 외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사심이 가득한 여성들이 나를 포위하고, 각자 자신들이 내가 입길 원하는 여성용 의복을 하나씩 양손에 들고, 어마어마한 가학적인 미소와 더불어 음흉한 눈길이 내 온 몸을 구석구석 훑고 지나갔다.
-마스터. 역시 안목이 뛰어나시군요. 이제 어느 정도 여장에 익숙해졌나 봅니다.
-익숙해지긴 개뿔! 이거 끝나면 너희들 모두 아이언 클로야! 아이언 클로에 당하기 싫으면 제발 이것 좀 풀어달란 말이야!
-카일?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아. “혼날 거 같으면 일단 저지르자아!”
-옛말에 그딴 말 없거든요! 그만둬! 입히지마! 아아아아아악!
-Wasted
“그런 흑백 엔딩으로 끝내지마!”
이번엔 내가 수정구를 초광속의 세계로 날려보냈다. 용족혼인의 문양을 매개로 삼으면 루시피나와 내가 알콩달콩하며 꽁냥꽁냥거리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이 보일 줄 알았는데, 지금 그 빌어먹을 백장미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수도 없이 털려버린 그런 트라우마를 꺼내게 될 줄이야.
“푸하하핫! 아하하하하핫! 바, 바보같아! 아하하하! 배아파아아악!”
얼마나 웃겼는지 웃음인지 고통의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만, 평원에서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만 웃어요.”
“나, 남자가 여러 여자에게 여장을 푸히히힛!”
웃지 말라고 소리칠 수도 없고, 웃음소리를 계속 듣자니 내 인내심이 끊어질 거 같고, 이걸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그냥 세계를 다시 갈아 엎어버리고 목격자를 없애버려?
“제길...”
들리지 않게 내뱉은 단어는 루시피나의 웃음소리에 처참히 부셔졌다. 앞으로 이 치욕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야 할지, 아무리 초월체가 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지. 아마 창조신도 생명을 만들고 자기들끼리 개판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아. 내가 진짜 이걸 왜 만들었지?”라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디 구약에서는 홍수로 물갈이 한번 하고, 다시 생명을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미안, 좀 많이 웃었네. 그래도 네가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음, 맞아. 이전에 있던 친구라는 녀석은 나를 실컷 이용해먹으려고 했던 나쁜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키르갤의 말대로...아니, 키르갤의 말을 떠나서 너는 좋은 사람이네.”
“그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어떻게 아군이라고 판명할 수 있는지가 신기할 따름이지만, 그러면 저는 이제 초광속으로 날아가거나 그러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건 아니지.”
아군으로 식별해도 초광속으로 날아가는 건 똑같나?
“마스터.”
하얀 올빼미가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았다. 무언가 쫓기듯 다급하게 왔나 했더니, 저 멀리서 제 7그룹의 용사일행이 뛰어오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말하는 올빼미가 너무 신기한 나머지 과한 관심 끝에,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단 건가?
“성녀님! 그 올빼미 여신 맞죠! 그렇죠!”
“그런 눈동자로 나에게 물어본들, 알려주지도 않을 거야.”
“역시 여신이죠!”
이 어린 용사를 어찌하면 좋을까...기억을 지워버리고 시공의 폭풍으로 보내버릴까?
아니, 그러면 저 질투의 오러를 뿜어내고 있는 키르갤이 날 죽이려고 할 거야.
“하아...맞아. 여신이야. 단, 이 세계에 영향력을 주는 여신이 아니고, 다른 차원에서 나를 위해 찾아온 여신이라고 해야겠지.”
내 오른손이 자연스럽게 올빼미의 머리를 쓰다듬자, 내 손에 기대어 안식을 취하고 있었다.
==========================================================================최근에 일이 너무 바빴어요.
매일 같이 새벽2시에 퇴근해도 아침 8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힘들어서 매번 회사에 지각했죠.
다행히 이런 거에는 자유로운 회사라 일을 아직까지 다니고 있습니다.
그나마 틈나면 쓰는 글이지만...
일에 집중하고 난 뒤에 이야기를 쓰려면 그에 따른 머리의 회전력이 필요해서.
사실상 내용의 진도는 나아가지 않고 있네요...
빨리 쉬고 싶다;
'취미로 글쓰는 중?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610 (0) | 2019.01.28 |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609 (0) | 2019.01.22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602 (0) | 2018.11.06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601 (2) | 2018.10.28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600 (0) | 2018.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