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600
600
일이 상당하게 꼬여서 어디부터 풀어야 할지 난감한 하루는 아직 오후 1시경을 넘어가고 있을 무렵. 아침에 먹었던 것이 스트레스와 결합하여 내 속을 엉망으로 만들기 전에, 합당한 이유로 스트레스를 풀어야만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은...
“넌 체력이 너무 없어. 그러니까 이런 운동을 해야 하는 거야.”
“그렇다고! 어린 소녀에게! 팔굽혀펴기는 좀 아니잖아요...!”
그 동안 리제로트에게 쌓였던 스트레스를 체력훈련을 통해 풀게 되었던 것. 조만간 격투술도 가르쳐서 어느 정도 호신술을 할 수 있다면, 내가 동행하지 않고도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줘야지.
“어린 소녀든 건장한 청년이든,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선 체력이 중요해.”
“그렇다고 해도...크으읏! 힘들어어엇!”
귀여운 단말마가 지나간 이후엔 축 늘어진 리제로트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저질체력을 극복하는데 몇 달이나 걸릴지. 레시아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고 금방 성장하는 바람에 빨리 진도가 나갔지만...
“역시 마왕과 인간의 신체능력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나 보네.”
“마왕과 인간 자체가 이미 종부터 다르잖아요.”
힘없이 내 말을 받아 치는 리제로트는 땀 범벅이 되어 늘어졌으나, 시간적으로 따졌을 땐 아직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재대로 밖에나 나가겠어? 너는 아직 어리니까 지금이라도 체력을 길러놔야 해. 맨날 인형이나 논다고 방에 처박히면 안 되잖아.”
“그럼 카린 씨도 밖은 위험하다면서 매번 방에 처박히려다가, 용사와 마왕 때문에 이중으로 끌려나갈 판이잖아요!”
“그냥 우리 둘 다 방구석 폐인이라고 지정하자. 아니, 그 이전에 나는 너보다 많은 여행을 떠나보긴 했어. 그러니까 지금 당장 은퇴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거지. 비록 아직까지 20대 초반이긴 하지만, 무릎에 화살을 맞지 않아도 경비병이 될 수 있다는 거야.”
무릎에 화살을 맞아야만 경비병이 된다는 말은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도, 지금의 내 입장에선 모든 걸 내려놓고 쉬고 싶을 뿐이었다. 설령 마왕이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든, 용사가 그 마왕을 퇴치하든 나는 잡화점 상인의 위치로, 평온한 삶을 바라며 하루하루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성녀라고 찍혀서 용사를 보조하라고 난리를 친다면, 이 일은 과연 어찌해야만 하는 가? 게다가 용사라는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어디 양아치 깡패 같은 녀석이 용사라고 칭하고 난동부리면 이 일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진다. 애초에 나라에서 그나마 마왕토벌에 가능성을 두고 있으니, 때려 잡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실력은 둘째치고 여신에게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내가 섣부르게 공격을 하거나 배신하는 행위를 한다면, 이후 하늘에서 날벼락이 쏟아져 내릴지도 모르니까.
아니, 천계든 마계든 나의 존재에 대해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곤란하다.
“그런데 5분동안 팔굽혀펴기를 한 것치곤 단 한 개도 못했잖아? 그런 근력으로 나쁜 사람들에게 붙잡혔을 때 맥없이 납치당한다고?”
“시끄러워요! 저에겐 월터가 있어요!”
“그 월터가 없을 때는 네가 네 스스로 몸을 지키라는 소리야. 사람을 인형으로 만드는 정신지배계열의 초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눈을 가리거나 정신방어 아이템으로 무장한 녀석이 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거라고? 아니면 에너지볼트에 맞아서 비명횡사 할지도 모르고?”
팔이 후들거리며 힘겹게 일어나는 모습이, 마치 작은 동물이 태어나자마자 바로 일어서려는 것처럼 가련함이 느껴졌다. 보호욕구가 솟아오른다고 해야 할까? 일시적이나마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할 줄이야. 그건 그렇고, 방금 전부터 가장 신경 쓰인 것에 대해 입을 열도록 하자.
“그런데 그 체육복하고 뭐야?”
“당연히 현대식에 맞춘 체육복이죠. 땀 배출도 잘 되고 움직이기도 편하고, 혹시 저의 러블리한 모습에 반했나요?”
“쓸 때 없는 소리하지 말고 씻기나 해. 러블리가 아니라 호러블이겠지...”
“너, 너무 하잖아요! 카린 씨!”
제길. 내 이름은 카일인데...
언제까지 성별이 뒤바뀐 상태로 살아야 하는 거야?
이름 하나 때문에 살아가면서 자괴감이 든다. 러블리인지 나발인지 하나 때문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아침에 용사를 데려온다는 기사가 아직까지 오지 않았지만, 평생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차라리 위험한 일에 휘말려서 이곳에 올 염두가 나지 않았다는 그런 일이 생기면 좋았을 텐데.
“성녀님!”
저 멀리서 오후 햇빛을 받아도 광택은커녕 칙칙한 회색이 더 눈에 띄었다. 거침없이 나를 성녀라고 착각하고 부르는 남성은 그 뒤에 용사일행을 데려왔는지, 자신이 오히려 발걸음에 맞춰 잡화점을 향하고 있었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사람의 모습이 왜 이렇게 싫은 걸까? 확실히 내 본능은 이 사람들이 오면 귀찮아진다는 걸 경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칠 수 없는 이 상황...
뭐냐? 언제부터 장르가 무겁고 비참해진 거야?
“용사와 그의 동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왜 온 거에요?”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순식간에 본심이 나와서 나도 당황했지만, 용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기로 했다.
“다, 당신이 성녀님이군요! 처, 처음 뵙겠습니다!”
건들거리지 않는 걸 보아하니, 엘티노스 같은 인간이 용사가 되는 건 아닌가 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목소리가 너무 젊다. 똑바로 마주해도 나보다 키가 더 작은 남자아이가, 어디서 맞췄는지 모르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반짝이는 눈으로 날 올려다 보고 있으니. 어느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마주한다면 당연하게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뭐냐. 이 꼬마는?
어디서 구해온 거야? 이 아이가 그 마왕 레프리시아를 처리할 마지막 빛이라고? 지금 당장 마왕군이 쳐들어 온다고 해도 이 애가 시간을 끌어서 프리트론의 귀족을 구했다고?
“정말로 제 7그룹의 용사라고?”
경악이라는 말이 머리에서 손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못 믿겠다는 눈빛을 기사에게 표출했으나, 그 기사는 매우 흡족한 목소리로 자랑스럽게 “그렇습니다!”라고 외쳤다. 믿겨지지 않았지만 제 7그룹에 있는 건 딱 봐도 어려 보이는 용사와 뭐에 심취해있는지 모르겠지만, 고난과 역경을 몰고 오는 기사...는 프리트론 왕국 소속이니까 용사의 그룹은 아닌가?
그 외에도 뒤에서 번뜩이는 눈으로 보고 있는 여성 마법사.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체 주변을 경계하는 차가운 도시남자 같은 성격의 궁수가 서있을 뿐이다. 뭐, 동료가 있든 말던 내가 파악할 사항은 아니지만...
“그보다 저는 성녀가 아니라 잡화점의 주인이라고...”
“아닙니다. 저의 목숨을 구해주시고 프리트론의 위기를 한차례 구해주신 은인께선, 그에 맞는 칭호를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하아...”
누구든 좋으니까 지금 이 상황을 다 날려버렸으면 좋겠다. 두통이 한 가득 올라가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마법사가 어린 용사의 물품을 챙겨주고 있었다.
“이 돈으로 잡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물품을 사도 된답니다.”
“고마워! 키르겔!”
“우후훗! 고마워 할 필요 없답니다.”
자애로운 표정으로 용사를 바라보는 마법사. 마치 어린 아들과 엄마처럼 사이가 매우 각별해 보였다. 정말로 저 어린아이가 마왕군을 막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마 주변에 있는 동료들이 전부 시간을 벌었다고 할 수 있겠지.
“제가 제 7그룹과 같이 움직이기엔, 그 주변 사람들이 충분히 강하다고 봅니다만?”
“그래도 용사님의 잠재능력을 깨우기 위해선, 성녀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잠재능력?
그 정도로 기대할 가치가 있는 건가?
아무리 봐도 잡화점에 있는 물품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의 잠재능력은 어디까지 일지? 확실히 마나는 비정상적으로 많이 있긴 한 거 같은데...
아니? 잠깐만? 저 아이 주변에서 소용돌이가 치잖아!
“말도 안 돼...”
“그렇죠? 저도 많이 놀랐답니다? 그보다 당신도 상당히 말도 안 되는 사람이네요?”
내 귓가에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 아까 용사와 이야기 했던 여 마법사의 목소리다. 아까 이름이 키르겔이라고 했던가?
“당신 같은 존재가 저 아이를 보살피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순간 키르겔의 눈빛이 내 가슴을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갔다. 아니, 그런 표정을 지으면 나도 무서우니까 그만 해.
“당신...단순한 성녀가 아니군요?”
“아니. 전 잡화점 주인이라고요. 상인이라니까요? 그리고 단순한 성녀와 단순하지 않은 성녀의 차이점은 잘 모르겠으니. 제 어깨에 한 가득 힘이 들어간 손은 좀 놔주시겠어요? 일반인이라면 어깨뼈가 아작 나도 모르겠는데요?”
왼쪽 어깨에 고통이 밀려와 입 밖으로 신음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꿋꿋하게 참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다. 말도 안 되는 허세의 끝은 무엇으로 보상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자존심 하나를 지키기 위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다니.
그보다 너무 아파. 진짜 아파. 그러니까 좀 놔줘!
“흐응? 실례했습니다. 다만...”
“알았어. 나는 비밀은 지켜.”
묘한 신경전이 한 차례 지나갔을 때 세린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오직 나에게만 보이니까. 누가 보면 내가 미쳐버린 줄 알겠네. 뭐, 잡화점의 주인에게만 보이니까.
“아침부터 지금까지 쉴 틈이 없네. 그런데 잡화점 안에 들어간 아이가 용사라고?”
“맞아. 용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에 대해 듣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찾아와서 포션이나 사간다면 나에겐 오히려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지. 그것만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닌가 보네...”
여전히 말 없이 경계하고 있는 남자는 둘째치고, 어린 용사를 뒷바라지 하고 있는 마법사나, 나에게 슬그머니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려는 기사.
“세린. 이 상황...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
“각본가는 없어졌으니 의도적인 건 아닐지라도, 확실히 이상하긴 이상하네. 시공간은 안정적인걸 보아하니 붕괴 위험성은 없어 보이는데.”
붕괴 위험성이 없다는 소리라면, 이 세상은 여전히 의도적으로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란 소리가 된다. 다른 시공간의 세계가 하나로 맞물려서 모든 시공간이 무너질 뻔한 이전 사건을 계기로, 끊임없이 이 시공간을 계산하던 세린은 이곳이 안전하다는 걸 나에게 말했다.
한가지 걱정했던 일은 끝났으니, 다른 하나가 남았다면...
“키르겔! 이곳에 마법석도 팔아! 하나같이 다 반짝여!”
“용사님! 그렇게 뛰면 위험하다고요?”
앞으로 일어날 난장판을 어떻게 치워나가야 할지...게다가 마왕이라면 아마 이 상황과 변수도 다 계산을 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이곳까지 나타나서 용사를 먼저 처단하거나, 아니면 다른 심복을 보내지 않는 이유라면...
“나를 신뢰하고 있는 모양이네. 이곳 마왕은...”
“글쎄? 신뢰하는 것도 카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내 이름은 카일이야.”
“지금은 여성체니까 카린이지.”
은근히 기뻐한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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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화특집을 쓰고 싶어도 이미 바쁜 일정때문에...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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