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

 

 

 

일이 상당하게 꼬여서 어디부터 풀어야 할지 난감한 하루는 아직 오후 1시경을 넘어가고 있을 무렵. 아침에 먹었던 것이 스트레스와 결합하여 내 속을 엉망으로 만들기 전에, 합당한 이유로 스트레스를 풀어야만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은...

 

넌 체력이 너무 없어. 그러니까 이런 운동을 해야 하는 거야.”

 

그렇다고! 어린 소녀에게! 팔굽혀펴기는 좀 아니잖아요...!”

 

그 동안 리제로트에게 쌓였던 스트레스를 체력훈련을 통해 풀게 되었던 것. 조만간 격투술도 가르쳐서 어느 정도 호신술을 할 수 있다면, 내가 동행하지 않고도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줘야지.

 

어린 소녀든 건장한 청년이든,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선 체력이 중요해.”

 

그렇다고 해도...크으읏! 힘들어어엇!”

 

귀여운 단말마가 지나간 이후엔 축 늘어진 리제로트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저질체력을 극복하는데 몇 달이나 걸릴지. 레시아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고 금방 성장하는 바람에 빨리 진도가 나갔지만...

 

역시 마왕과 인간의 신체능력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나 보네.”

 

마왕과 인간 자체가 이미 종부터 다르잖아요.”

 

힘없이 내 말을 받아 치는 리제로트는 땀 범벅이 되어 늘어졌으나, 시간적으로 따졌을 땐 아직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재대로 밖에나 나가겠어? 너는 아직 어리니까 지금이라도 체력을 길러놔야 해. 맨날 인형이나 논다고 방에 처박히면 안 되잖아.”

 

그럼 카린 씨도 밖은 위험하다면서 매번 방에 처박히려다가, 용사와 마왕 때문에 이중으로 끌려나갈 판이잖아요!”

 

그냥 우리 둘 다 방구석 폐인이라고 지정하자. 아니, 그 이전에 나는 너보다 많은 여행을 떠나보긴 했어. 그러니까 지금 당장 은퇴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거지. 비록 아직까지 20대 초반이긴 하지만, 무릎에 화살을 맞지 않아도 경비병이 될 수 있다는 거야.”

 

무릎에 화살을 맞아야만 경비병이 된다는 말은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도, 지금의 내 입장에선 모든 걸 내려놓고 쉬고 싶을 뿐이었다. 설령 마왕이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든, 용사가 그 마왕을 퇴치하든 나는 잡화점 상인의 위치로, 평온한 삶을 바라며 하루하루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성녀라고 찍혀서 용사를 보조하라고 난리를 친다면, 이 일은 과연 어찌해야만 하는 가? 게다가 용사라는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어디 양아치 깡패 같은 녀석이 용사라고 칭하고 난동부리면 이 일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진다. 애초에 나라에서 그나마 마왕토벌에 가능성을 두고 있으니, 때려 잡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실력은 둘째치고 여신에게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내가 섣부르게 공격을 하거나 배신하는 행위를 한다면, 이후 하늘에서 날벼락이 쏟아져 내릴지도 모르니까.

 

아니, 천계든 마계든 나의 존재에 대해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곤란하다.

 

그런데 5분동안 팔굽혀펴기를 한 것치곤 단 한 개도 못했잖아? 그런 근력으로 나쁜 사람들에게 붙잡혔을 때 맥없이 납치당한다고?”

 

시끄러워요! 저에겐 월터가 있어요!”

 

그 월터가 없을 때는 네가 네 스스로 몸을 지키라는 소리야. 사람을 인형으로 만드는 정신지배계열의 초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눈을 가리거나 정신방어 아이템으로 무장한 녀석이 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거라고? 아니면 에너지볼트에 맞아서 비명횡사 할지도 모르고?”

 

팔이 후들거리며 힘겹게 일어나는 모습이, 마치 작은 동물이 태어나자마자 바로 일어서려는 것처럼 가련함이 느껴졌다. 보호욕구가 솟아오른다고 해야 할까? 일시적이나마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할 줄이야. 그건 그렇고, 방금 전부터 가장 신경 쓰인 것에 대해 입을 열도록 하자.

 

그런데 그 체육복하고 뭐야?”

 

당연히 현대식에 맞춘 체육복이죠. 땀 배출도 잘 되고 움직이기도 편하고, 혹시 저의 러블리한 모습에 반했나요?”

 

쓸 때 없는 소리하지 말고 씻기나 해. 러블리가 아니라 호러블이겠지...”

 

, 너무 하잖아요! 카린 씨!”

 

제길. 내 이름은 카일인데...

언제까지 성별이 뒤바뀐 상태로 살아야 하는 거야?

 

이름 하나 때문에 살아가면서 자괴감이 든다. 러블리인지 나발인지 하나 때문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아침에 용사를 데려온다는 기사가 아직까지 오지 않았지만, 평생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차라리 위험한 일에 휘말려서 이곳에 올 염두가 나지 않았다는 그런 일이 생기면 좋았을 텐데.

 

성녀님!”

 

저 멀리서 오후 햇빛을 받아도 광택은커녕 칙칙한 회색이 더 눈에 띄었다. 거침없이 나를 성녀라고 착각하고 부르는 남성은 그 뒤에 용사일행을 데려왔는지, 자신이 오히려 발걸음에 맞춰 잡화점을 향하고 있었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사람의 모습이 왜 이렇게 싫은 걸까? 확실히 내 본능은 이 사람들이 오면 귀찮아진다는 걸 경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칠 수 없는 이 상황...

 

뭐냐? 언제부터 장르가 무겁고 비참해진 거야?

 

용사와 그의 동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왜 온 거에요?”

 

?”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순식간에 본심이 나와서 나도 당황했지만, 용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기로 했다.

 

, 당신이 성녀님이군요! , 처음 뵙겠습니다!”

 

건들거리지 않는 걸 보아하니, 엘티노스 같은 인간이 용사가 되는 건 아닌가 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목소리가 너무 젊다. 똑바로 마주해도 나보다 키가 더 작은 남자아이가, 어디서 맞췄는지 모르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반짝이는 눈으로 날 올려다 보고 있으니. 어느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마주한다면 당연하게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뭐냐. 이 꼬마는?

어디서 구해온 거야? 이 아이가 그 마왕 레프리시아를 처리할 마지막 빛이라고? 지금 당장 마왕군이 쳐들어 온다고 해도 이 애가 시간을 끌어서 프리트론의 귀족을 구했다고?

 

정말로 제 7그룹의 용사라고?”

 

경악이라는 말이 머리에서 손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못 믿겠다는 눈빛을 기사에게 표출했으나, 그 기사는 매우 흡족한 목소리로 자랑스럽게 그렇습니다!”라고 외쳤다. 믿겨지지 않았지만 제 7그룹에 있는 건 딱 봐도 어려 보이는 용사와 뭐에 심취해있는지 모르겠지만, 고난과 역경을 몰고 오는 기사...는 프리트론 왕국 소속이니까 용사의 그룹은 아닌가?

 

그 외에도 뒤에서 번뜩이는 눈으로 보고 있는 여성 마법사.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체 주변을 경계하는 차가운 도시남자 같은 성격의 궁수가 서있을 뿐이다. , 동료가 있든 말던 내가 파악할 사항은 아니지만...

 

그보다 저는 성녀가 아니라 잡화점의 주인이라고...”

 

아닙니다. 저의 목숨을 구해주시고 프리트론의 위기를 한차례 구해주신 은인께선, 그에 맞는 칭호를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하아...”

 

누구든 좋으니까 지금 이 상황을 다 날려버렸으면 좋겠다. 두통이 한 가득 올라가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마법사가 어린 용사의 물품을 챙겨주고 있었다.

 

이 돈으로 잡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물품을 사도 된답니다.”

 

고마워! 키르겔!”

 

우후훗! 고마워 할 필요 없답니다.”

 

자애로운 표정으로 용사를 바라보는 마법사. 마치 어린 아들과 엄마처럼 사이가 매우 각별해 보였다. 정말로 저 어린아이가 마왕군을 막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마 주변에 있는 동료들이 전부 시간을 벌었다고 할 수 있겠지.

 

제가 제 7그룹과 같이 움직이기엔, 그 주변 사람들이 충분히 강하다고 봅니다만?”

 

그래도 용사님의 잠재능력을 깨우기 위해선, 성녀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잠재능력?

그 정도로 기대할 가치가 있는 건가?

아무리 봐도 잡화점에 있는 물품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의 잠재능력은 어디까지 일지? 확실히 마나는 비정상적으로 많이 있긴 한 거 같은데...

 

아니? 잠깐만? 저 아이 주변에서 소용돌이가 치잖아!

 

말도 안 돼...”

 

그렇죠? 저도 많이 놀랐답니다? 그보다 당신도 상당히 말도 안 되는 사람이네요?”

 

내 귓가에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 아까 용사와 이야기 했던 여 마법사의 목소리다. 아까 이름이 키르겔이라고 했던가?

 

당신 같은 존재가 저 아이를 보살피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순간 키르겔의 눈빛이 내 가슴을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갔다. 아니, 그런 표정을 지으면 나도 무서우니까 그만 해.

 

당신...단순한 성녀가 아니군요?”

 

아니. 전 잡화점 주인이라고요. 상인이라니까요? 그리고 단순한 성녀와 단순하지 않은 성녀의 차이점은 잘 모르겠으니. 제 어깨에 한 가득 힘이 들어간 손은 좀 놔주시겠어요? 일반인이라면 어깨뼈가 아작 나도 모르겠는데요?”

 

왼쪽 어깨에 고통이 밀려와 입 밖으로 신음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꿋꿋하게 참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다. 말도 안 되는 허세의 끝은 무엇으로 보상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자존심 하나를 지키기 위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다니.

 

그보다 너무 아파. 진짜 아파. 그러니까 좀 놔줘!

 

흐응? 실례했습니다. 다만...”

 

알았어. 나는 비밀은 지켜.”

 

묘한 신경전이 한 차례 지나갔을 때 세린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오직 나에게만 보이니까. 누가 보면 내가 미쳐버린 줄 알겠네. , 잡화점의 주인에게만 보이니까.

 

아침부터 지금까지 쉴 틈이 없네. 그런데 잡화점 안에 들어간 아이가 용사라고?”

 

맞아. 용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에 대해 듣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찾아와서 포션이나 사간다면 나에겐 오히려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지. 그것만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닌가 보네...”

 

여전히 말 없이 경계하고 있는 남자는 둘째치고, 어린 용사를 뒷바라지 하고 있는 마법사나, 나에게 슬그머니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려는 기사.

 

세린. 이 상황...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

 

각본가는 없어졌으니 의도적인 건 아닐지라도, 확실히 이상하긴 이상하네. 시공간은 안정적인걸 보아하니 붕괴 위험성은 없어 보이는데.”

 

붕괴 위험성이 없다는 소리라면, 이 세상은 여전히 의도적으로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란 소리가 된다. 다른 시공간의 세계가 하나로 맞물려서 모든 시공간이 무너질 뻔한 이전 사건을 계기로, 끊임없이 이 시공간을 계산하던 세린은 이곳이 안전하다는 걸 나에게 말했다.

 

한가지 걱정했던 일은 끝났으니, 다른 하나가 남았다면...

 

키르겔! 이곳에 마법석도 팔아! 하나같이 다 반짝여!”

 

용사님! 그렇게 뛰면 위험하다고요?”

 

앞으로 일어날 난장판을 어떻게 치워나가야 할지...게다가 마왕이라면 아마 이 상황과 변수도 다 계산을 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이곳까지 나타나서 용사를 먼저 처단하거나, 아니면 다른 심복을 보내지 않는 이유라면...

 

나를 신뢰하고 있는 모양이네. 이곳 마왕은...”

 

글쎄? 신뢰하는 것도 카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내 이름은 카일이야.”

 

지금은 여성체니까 카린이지.”

 

은근히 기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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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화특집을 쓰고 싶어도 이미 바쁜 일정때문에...ㅠ

 

599

 

 

 

다짜고짜 이곳에 찾아와서 스트레스를 푼다는 마왕의 선전포고를 듣고, 마왕이 세계정복을 하다가 용사들에 의해 저지당하면, 내가 무슨 꼴을 당하게 되는 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마왕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에는 뭐가 있을까? 적어도 따듯한 차를 마시면서 심신을 달래진 않을 텐데 말이다. 기본적으로 이라는 속성을 가진 자들의 유희라면, 생포한 포로를 고문하거나 자신의 욕망해소로 사용하는 등. 누가 보면 정말로 비인간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 생각을 해보니 포로를 심문할 때도 그런 경우가 있긴 하지. 그러면 마계의 유희는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행위를 일삼는다는 말이 더 모욕적일까? 어느 날 고문을 하고 있는 마족에게 찾아가서 ! 정말 인간적이시네요!”라고 말하는 날엔, 때에 따라 그 자리에서 즉석고문을 당할지도 모른다.

 

. 어쩌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왔더라?

아무튼, 지금은 아침부터 잡화점 청소를 하고 있으니 오랜만에 깨끗해지는 공간을 보며, 마음 속에 의지가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외출해서 남자로 되돌아가야지 언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있을 수 있나?

 

. 세린. 잡화점도 깨끗하게 닦고 물품도 가지런히 정리했어. 이제 밖에 나갈 테니 슬슬 성별 좀 되돌려주지 않을래?”

 

안 돼.”

 

이 빌어먹을 단호박 같은 녀석! 그 머리를 때고 할로윈에 장식하기 전에 바로...,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이렇게 노력을 했는데...슬슬 본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서...헤헷...!”

 

순식간에 분노조절장애가 왔다가, 서리 빛의 싸늘한 눈동자를 바라보자마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뭐야 저 표정...무서워. 순식간에 내 등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니까?

 

잡화점 밖에서도 그 모습으로 있어야 해. 이건 부탁이기보단 잡화점인 나의 명령이야.”

 

내가 잡화점의 주인인데 잡화점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는 힘을 봉인한다면,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되니까 괜찮지 않아?”

 

사람의 틀을 이미 부셔버리고 어떻게 사람으로 돌아올 거야? 그럴 줄 알았으면 시공간술사의 길을 걸었을 때, 너의 인간이었던 모습을 미리 백업했어야지?”

 

아니, 그래도 최대 24시간 전의 나를 백업하는데, 몇 일이 지난 그 모습을 어떻게 되찾아? 차라리 외장메모리에 저장하면 모를까, 시공간술사의 길은 인간이 담기엔 너무 버겁단 말이야!”

 

그건 네 능력부족이지.”

 

저 잡화점을 판자째 뜯어서 캠프파이어로 만들어버릴라...아침부터 혈압이 오르는 말이 오고 가는 동안 리제로트는 의외로...

 

카린 씨? 아침 드세요?”

 

잠깐. 카일이라고 부르란 말이야.”

 

요리를 할 줄 아는 아이였다. 예전에 납치한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다과회나 파티를 자주 했고, 음식은 전부 리제로트가 만들어서 나눠줬다고 했다. 그래도 사람이니까 영양분은 섭취하고 잠은 꼬박꼬박 재워야 오랫동안 가지고 논다나 뭐라나...

 

지금은 카린 씨잖아요. 그러니까 카린 씨라고 부르는 건데요? 카린 씨?”

 

오호라? 그렇게 3파장 스텐드마냥 디럭스 콤보를 먹이시겠다?”

 

꺄아..! 귀여운 여자아이가 잡으러 온다~!”

 

누가 귀여운 여자아이야! 너 거기 안 서!”

 

이런 취급을 받으려고 이 세상을 한바탕 갈아 엎은 게 아닌데. 이럴 때마다 자괴감이 든다. 그래도 아침에 신문이라도 와야 세상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 텐데, 어처구니 없게도 잡화점 근처에 마을은 전멸해버렸으니, 지금 남아있는 건 주둔하고 있는 고블린 때, 그리고 먹을 것이 없는지 어슬렁거리고 있는 마수들뿐이었다.

 

이래서야 사람이 찾아올 일은 없네.”

 

프리트론 왕국으로 가볼까?

아니, 어쩌면 프리트론 왕국도 망했을지도 몰라. 만약 전쟁중이라면 더더욱 참여를 해선 안 된다. 나는 그 어느 누구의 편을 안 하기로 맹세했으니까. 맹세까지는 아니고...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래, 괜히 귀찮은 일에 끼어들어가서 생고생하지 말고, 평화와 평온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다짐.

 

맞아. 더욱 더 격렬하게 이 집에서 나가면 안 돼.”

 

일이나 하시지. 잡화점 매출이 아예 없어도 곤란하니까.”

 

지금은 자동으로 세금을 땔만한 나라는 없지 않나? 그냥 나는 이대로 자급자족하면서 살면 될 텐데?

 

일이라. 그래도 위험천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 늘 그래왔듯이 의뢰를 받는 잡화점은 더 이상...”

 

-벌컥!

 

이제서야 아침 먹으러 들어갔는데 곧바로 누군가가 문을 열어버렸다. 세린과 나는 그저 당황한 눈으로 열린 문만 바라보았고, 리제로트는 먼저 먹고 있다가 포크를 입에 넣은 상태로 정지해버렸으니.

 

...찾았습니다.”

 

? 찾다니요? 그보다 당신은 그때 만났던 기사잖아요?”

 

그보다 잡화점 주변에 인파가 많이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을 찾은 사람은 저 기사 하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서늘한 감촉의 건틀릿이 내 양손을 감싸며 절박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성녀님! 저희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시옵소서! 이전처럼 저의 프리트론 왕국의 구원을 주시옵소서!”

 

이건 또 무슨 개판이야.

 

아니. 저기요...일단 저 아침부터 먹어야 하는데...”

 

. 그러시군요! 그러면 저흰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아니. 그 제안은 승낙한 것도 아니고, 저는 성녀도 아닌...”

 

일전에 성녀님께서 마왕군을 혼자 괴멸하여 후퇴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여신님께서 보내신 성녀님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습니까?”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정말 잘못 꼬여버렸다.

 

애초에 잡화점은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올 수 있게 만들었으니, 지금 내 앞에 있는 기사가 이곳에 찾아오는 건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분명 세린이 아무도 올 수 없도록 가상좌표까지 열어놨다고 했을 텐데.

 

하긴. 어제 마왕이 불쑥 찾아온 것도 그렇고...

 

각본가는 분명 모두 사라졌을 텐데 말이야...”

 

? 방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일단 손부터 놔야 제가 아침을 먹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중얼거림을 당신 모르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쪽 귀에 들렸으니 이 기회에 제가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제 양손을 해방시키기를 권유하는 바입니다.”

 

어찌 된 상황인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먹고 천천히 생각을 해보자.

갑작스러운 정보가 한꺼번에 몰려왔을 땐, 상상을 초월한 스트레스가 몰려오기 마련,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에 있어선, 잠깐 동안 쉬면서 문제를 해결할 작전을 세우는 것밖에 답이 없다.

 

그 잠깐 동안 쉰다는 행위는 스트레스를 줄이기만 하면 되는데, 먹는 것도 그렇고 자는 것도 그렇고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만 하면 된다.

 

음식을 다 먹고 허브티를 마시는 와중에도, 그 기사는 주변에 정리되어있는 물품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전부 잡화점에서 파는 물품입니까?”

 

. 이 세상에서 다양할 정도로 기괴한 물품을 파는 잡화점이지요. 다만, 저는 단지 잡화상인일 뿐. 여신이 내려준 성녀라던가 용사라던가, 저 은하 너머에 있는 걃스나 욟스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욟스?”

 

아니. 이건 잊어주세요. 어쨌든 저는 신의 사도라던가, 인류의 구원자 같은 게 아니란 겁니다. 오히려 저는 이 시대를 방관해야 하는 방관자에 걸맞죠. 손님으로 와서 마왕을 퇴치하기 위해 물품을 사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제가 직접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모든 것은 용사가 스스로 나서서 마왕을 타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왕은 용사가 무찌른다.

혹은 마왕을 무찌른 자가 용사가 된다.

 

이런 두 가지의 전승을 보았을 때, 나는 잡화상인이니까 그저 길목에 지나간다면 포션만 싸게 처리해도 상관이 없다는 의미다. 그래 맞아. 잡화상인이 길목에 따라다니면서 파는 경우도 있는데, 생각을 해보면 마왕성 깊은 곳까지 잡화상인이 대기하면서 아이템을 파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그러니까 잡화상인은 용사보다 더 강해야 한다.

 

어쩌다가 이런 생각까지 오게 되었더라?

 

애석하게도 마왕 레프리시아에게 벌써 6그룹의 용사가 당했습니다. 거의 죽어서 돌아왔고 살아있다고 해도 타락하는 바람에 마왕군에 붙어있거나,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이 많아요.”

 

설마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세계를 멸망시켜버리겠다고 직접 움직이고 있으니,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일지도...

 

그러니까 마왕성 전체를 날려버릴 만한 위력을 가진 용사 6그룹이 전부 날아갔다고요?”

 

마왕 레프리시아는 뛰어난 통찰력과 치밀한 전략을 선호하는 마왕입니다. 저희가 마왕의 군세를 막을 때, 마왕성을 공략하려고 하면 어느 사이에 정예부대를 이끌고 돌아와서, 용사들을 전부 공격하죠.”

 

아니, 마왕의 핵심 간부들이 다 살아있는데, 그걸 처리하지 않고 다짜고짜 빈집을 공략하려고 했으니 다 망해버리잖아. 마계 12공작은 그냥 폼이 아니라고?

군고구마 동시에 16개정도 집어넣다가 속이 막혀버린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내 오른손이 자동으로 이마에 대고 고래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전략부터 다 잘못 되었어요. 도대체 용사가 무능한 건지 용사에게 명령을 내리는 칸포리우스 제국이 무능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기본적으로 핵심세력은 자르고 기습작전을 펼치는 건데, 그걸 다 무시하고 사지로 내몰아서 용사가 다 당했다는 소리밖에 안 들린 나는, 한심함이 가득 찼으나 어떻게 보면 그거야 말로 승부수라고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전선에 나가있을 때 빈집을 털어버리는 건 기초전략이지만, 상대는 마왕 레프리시아. 이미 통찰력에는 따라갈 수 없으니 모두가 다 당했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통찰력이 뛰어나다는 건 그 용사그룹은 어느 것이 강점이고 약점인지 다 파악한 모양.

 

제국은 그리 무능하진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것도 하나의 전략. 하지만, 마왕 레프리시아는 그걸 뛰어넘는 괴물이었습니다. 오히려 역으로 이용해서 용사들을 전부...”

 

. 생각해보니 그렇게 되기도 하겠네요.”

 

애초에 나란 존재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은 모순적인 존재이지만, 그거마저 변수로 인지하고 나를 쫓아 마왕군을 이끌고 돌아올 정도다. 이렇게 보면 레프리시아에게 초인적인 감각이 달려있거나, 아니면 엔티티가 속삭여줄지도 모르지...

 

엔티티는 뭔가요?”

 

남의 독백을 함부로 읽는 게 아닙니다.”

 

뭐냐? 내 독백은 아직 이름도 알지 못한 기사에게까지 보이는 값싼 녀석인 거야? 언제부터 내 가치가 그렇게 떨어진 건데? 하긴 지나가던 잡초마저 읽을 수 있는 게 내 독백인데...

 

결과적으로 남아있는 용사가 없다는 건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이제 저희들에게 있어서 마왕을 토벌할 힘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성녀님.”

 

아니. 전 성녀가 아니라니까요.”

 

그럼 여신입니까?”

 

여신 찾을 거라면 천계로 가란 말이에요!”

 

말을 듣지 않으니 소리를 치게 되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내 앞에 있는 기사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엎드려 사과를 하고 있었다. 마왕 레프리시아가 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도 그렇고, 그걸 막고 평화를 되찾는 것도 그렇고, 애초에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거늘...

 

아무래도 조율은 필요할 거 같은데요? 카린 씨?”

 

조율이라는 단어가 내 귀에 걸렸다. 리제로트의 단 한마디가 분위기를 다짜고짜 부셔버린 것.

 

애초에 전쟁이라는 것은 양국이 모두 발전하는 단계를 뜻하잖아요? 마왕이 너무 우세하니까 그 반대쪽으로 붙어서 균형을 맞추면...”

 

우리가 붙어봤자 마왕 레프리시아를 막을 수는 없어.”

 

세린이 직접 출동한다면 모르겠지만...딱 잘라서 거절의 표시를 날렸다. 각본가가 사라지기 전, 레시아와 함께 행동했을 때는 빈틈이라던가 변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그렇다면 용사와 같이 행동하시지요.”

 

뭐야? 용사가 있었어?

 

7그룹을 편성하는 중인가보네요? 그 사이에 제가 참가하라는 말씀입니까?”

 

지금 살아있는 용사를 죽게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프리트론 왕국의 주민들이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는 이유는 성녀님의 숭고한 희생도 있었지만, 용사의 존재가 그곳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숭고한 희생이라니...저 아직 안 죽었거든요?”

 

실례했습니다. 성녀님의 아름다운 희생이...”

 

희생이란 단어 좀 빼고 말해주시겠어요!”

 

대체 누굴 희생해서 오벨리스크의 거신병을 소환할 거야?

머리를 식히고 생각을 해보면, 애초에 이 사건에 나설 수 없는 몸이니까. 지금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는 이런 귀찮은 일에 직접 나서서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만 돌아가주세요. 그 제안은 승낙할 수 없네요.”

 

, 어째서입니까?”

 

귀찮아서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도 없고, 이들에게도 계기가 되는 한마디는 던져놔야겠다. 내 말은 절대 거짓이 아니면서도 살짝 일을 커지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한 마디라면...

 

사실, 전 마왕에게 노려지고 있어요. 머지않아 마왕의 부인이 될지도 모르죠...”

 

살짝 어두운 기색을 하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시선은 땅바닥으로 약 45도로 내렸다. 이 정도면 내 입장은 사연이 많은듯한 사람으로 보이겠지. 애초에 마왕에게 노려지고 있는 말은 사실이고, 마왕의 부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도 사실이다. 마왕 레프리시아의 입장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신부로 취급하는 기이한 가치관이 있는데, 그 기발한 발상은 왜 이전에 있던 레시아와 같은지 모르겠다.

 

그러니 저는 용사그룹과 이동한다면 언젠가 배신할 운명이라는 겁니다.”

 

지금의 말은 가정을 통해 나를 절대로 용사그룹에 데려가면 안 되는 이유를 명확하게 집었다. 아무리 내가 성녀든 여신이든 뭐든 간에, 용사를 배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로 데려가지 않겠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제서야 납득을 하는 건가...

 

그럼 제가 이곳에 용사를 불러오도록 하지요.”

 

? 아니. 그럴 필요가...”

 

그럼 나중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결심했다는 듯한 행동은 거침없이 잡화점 밖을 빠져나갔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곳에 용사를 불러서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진다면, 잡화점 문을 잠가버려야 하나? 아니면 잡화점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야 하나?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데 이번 일을 받아들이면 마왕 레프리시아가 토벌되기 전까진 끝나지 않을 테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꼬였지...”

 

자업자득이네요. 카린 씨가 이상한 말로 사람들에게 오해하게 만드니까 그렇죠.”

 

옆에 있던 리제로트를 마법으로 날려버리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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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왜 줄지 않지...?

어째서 쌓여만 가는 걸까요...

 

598

 

 

 

인생에 가장 허망한 순간이라면 내가 나중에 봐야 할 책의 내용을 스포일러 당했을 때. 뜬금없이 그건 무슨 소리냐고 물어볼 수 있는데, 마왕군에게 겨우겨우 도망쳐서 잡화점에 들어가 책을 읽을 무렵, 리제로트가 오후에 말싸움을 했던 복수로 책이 재미있어지려고 하면, 스포일러를 거침없이 터트려서 허무함을 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그거 주인공이 알고 봤더니...”

 

. 주인공이 알고 보니 범인이었다는 거야? 아님 죽는다는 거? 대체 이번이 몇 번째야?”

 

슬슬 짜증이 입에 가시가 돋아나듯 솟아오르기 시작할 때. 리제로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세린은 한숨을 내쉬면서 내 앞에 걸어왔다.

 

어린애 같이 싸우지 말고 그 마왕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는 해봐야겠지?”

 

한가지 특단의 조치가 있어.”

 

그래?”

 

내가 잡화점 밖으로 안 나가는 거야. 역시 이불 밖은 위험...꺄아악!”

 

잡화점 바닥이 순식간에 튀어올라 머리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남자나 여자나 저런 비명을 지르는 건 당연하겠지만, 잡화점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여성체의 모습으로 있어야 하기에...아니, 사실상 밖에서는 세린이 멋대로 날 여성체로 고정시켜놨기에, 정신적으로도 아파죽겠는데, 물리적으로도 아파 죽을 지경이다.

 

어째서! 내가 잡화점 밖에 안 나가겠다고 하는데! 내가 잡화점의 주인 아니냐!”

 

글쎄? 아무리 주인이라고 해도, 밖에 나가지 않고 놀고 먹고 살겠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가 없거든? 뭐 그 모습으로 계속 있고 싶다면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아 맞아. 원래 성별로 돌아가야 하지. 지금은 세계 멸망을 막건 말건, 빨리 되돌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

 

지금 당장 규칙부터 수정하라고!”

 

싫어.”

 

아무리 잡화점의 주인이라고 해도, 잡화점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것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은 없지. 지금 상황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린에게 훈계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리제로트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계속 보고만 있고, 결과적으로 이 세상은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이 잡화점은 느닷없이 땅이 솟아오르고 그래요?”

 

잡화점이 땅에서 솟아오른 게 아니라 바닥이 솟아오른 거잖아. 잡화점을 두더지마냥 만들지 마...”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마왕 레프리시아의 눈에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혹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적이 될 거 같아 귀찮은지. 그건 사실상 중요하지 않은데 문제는 마계공작 중에서 여럿이 그릇된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잠깐 봤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이 날 장난감으로 선택한다는 발언.

 

리제로트.”

 

?”

 

밖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했으니까. 네가 나갈 때는 꼭 나에게 말하고 같이 동행한다는 것만 약속해.”

 

카린의 모습으로 같이 동행을 해준다면 생각해볼게요.”

 

어째서 너희들은 모두 날 카린으로 못 만들어서 안달이 난 거야? 애초에 20년 이상 남자로 살아오다가 갑자기 이런 모습으로 살라고 하면 불편하거든? 키도 바뀌는 바람에 적응도 안 돼.”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리제로트의 눈빛에서는 ~ 어련하시겠습니까? 그저 내 눈에만 보기 좋으면 되는 거지~”라고 훼방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눈이 반짝이며 내 모습을 순식간에 훑고는...

 

어라? 그러고 보니 안 씻으세요?”

 

같이 씻자는 소리는 하지마.”

 

그럼 씻겨드려요?”

 

네 정신상태부터 씻고 오던가...”

 

여전히 한결 같은 리제로트의 끊임없는 욕망을 지워버리고, 여전히 손님이 오지 않는 잡화점 안에서 물품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스으윽

 

옷깃을 타고 뱀처럼 다가온 세린의 손. 포션을 정리하려는 내 작은 손등을 침범했다.

 

이번 건 또 뭐야.”

 

아니. 잠깐 진단을 해보는 거야. 좋아. 정상이네.”

 

진단을 한다는 것치곤 세린의 경우에도 어마어마한 욕망이 눈빛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초근거리에서 봐야 하는 내 입장에선 호러가 따로 없었는데, 힘을 줘서 뿌리치려고 해도 세린의 힘이 더 강했다는 사실에 참담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아니 그런 미래는 오면 안 돼.

 

세린. 네가 뭘 하려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아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그대로 좀 놔둬! 바꾸지 말란 말이야!”

 

어처구니 없게도 세린이 내 신체를 진단한다는 자체는, 결과적으로 내 상태를 변화시킨다는 의미가 더 크다. 내가 입고 있던 옷도 자기 멋대로 바꾸고 난리라니.

 

그리고 네가 고르는 의상마다 노출도가 은근히 거슬리거든?”

 

옛 현자는 노출도와 방어력은 서로 비례관계라고 말했지.”

 

전혀 아니거든!”

 

대체 어느 현자가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은 거야?

 

카린 씨는 잡화점에 있으면서 그런 옷도 입고 계신가요?”

 

아니. 그보다 지금 흘리고 있는 침이나 닦아.”

 

이젠 리제로트 쪽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거침없이 치고 들어왔으니,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소리치는 작업은 복잡했다.

 

이 옷은 뭐야? 꼭 웨딩드레스를 개조한 것처럼 생겼는데, 옷에서 쓸 때 없이 은은하게 발광하고 있잖아?”

 

그거야 당연히 명등룡의 소재로 만들었기 때문이지.”

 

“...너 언제부터 헌터가 된 거야?”

 

세린의 활동범위마저도 다른 세계를 침범하고 있는 건가? 생각해보니 세린도 나의 에너지와 같은 종류잖아?

 

창조신이 일전에 다뤘던 에너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는 것. 애초에 잡화점 그 자체인 세린의 입장에선 이미 인간의 시점이 아니다. 잠깐? 그러면 잡화점 안에 있는 것이 다른 신이 안 되는 이유가...

 

인간이 잡화점의 주인이 되야 하는 이유는 지금 남자로 돌아간다면 잡화점 그 자체와 동화되기 때문?”

 

대단하네? 이제서야 내 마음을 알았구나?”

 

순식간에 해머에 맞은 충격이 머리에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세린의 입장에서는 내가 남자든 여자든, 내가 잡화점에 동화하지 않고 우선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심술궂은 일을 벌이고 있었으니까. 미움을 받을지언정 자신의 소중한 사람은 꼭 지키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말로 이야기를 해야 할 거 아냐. 그런 이유라면 아무리 나라도 먼저 소리치지 않는다고.”

 

애초에 네가 알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알아도 이야기는 못했으니까. 어차피 지금은 네가 알아챘으니 진실을 말해도 상관없지.”

 

다만...

 

카린 씨? 문이...”

 

연미복을 입은 리제로트의 인형 월터가 문을 향해 경계를 하고 있었다. 잡화점에 드디어 손님이라도 온 것일까? 아니, 평범한 손님이라면 월터가 경계를 하지 않고, 리제로트 마저 내 등뒤에 숨어있지는 않았다.

 

호오? 이곳이 그 잡화점인가? 짐이 예상한대로 손쉬운 진입방법이 아니구나.”

 

마왕 레프리시아?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들어온 거야?”

 

현관으로 들어왔노라.”

 

아니. 지금 내가 그런 시시한 장난을 하자고 그런 질문을 한 줄 알아!”

 

질문의 의도야 어떻든 타락의 마왕이자, 모든 차원계를 흔들어버릴 만한 강력한 마왕. 레프리시아는 칠흑의 드레스를 입고 잡화점에 쳐들어와버렸다. 사실 마왕성에 용사가 쳐들어오는 건 흔한 클리셰인데, 마왕이 잡화점에 쳐들어온 것만 생각하면 마을을 침략하는 것보다 더 흔하지 않는 클리셰임이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은하게 달빛으로 내려오는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나부끼는 동안, 주변에 마계공작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거지.”

 

사실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의상이든 성별이든 일단 작은 걸 떠나서, 지금 레프리시아가 흘리는 오러가 잡화점 내부를 침식하려고 들었다.

 

그야 당연히 짐이 보낸 청혼에 대해 왔노라. 그리 사랑스러운 모습을 하고 짐을 만나고 싶어했다면, 흔쾌히 시간을 들여 준비하라고 했을 터.”

 

이런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결혼을 하고 싶다는 건 아니거든? 그리고 이건 잡화점이 멋대로 입혀놓은 거야. 그러니까 쓸 때 없는 힘주지 말고 그 불길한 오러를 제거해주겠어? 내 뒤에 있는 아이에게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니까.”

 

마왕이라는 존재는 일반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거북한 존재였다. 가빠오는 리제로트의 숨소리를 듣고 세린에게 리제로트를 보호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마왕의 보라 빛 눈동자는 살며시 빛을 띠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아이? 그런가? 유부녀인가?”

 

웃기지마! 남자에게 유부녀라는 소리를 한다는 거 자체가 이상하지 않아?”

 

지금은 여자이지 않는가?”

 

시끄러워어어어!”

 

소리는 공기를 찢으며 퍼져나갔고 레프리시아는 그런 나를 무표정 반응했다. 상대의 표정을 읽고 파악할 수 없는 레프리시아의 포커페이스에, 천천히 진정을 하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곳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마왕? 이곳에 온 사람이라면 어찌 되었든 모두 똑같은 손님일 뿐. 지금은 신분이든 계급이든 모두 다 제한된 장소야.”

 

그야 당연히 그대를 찾아왔다. 그대와 결혼을 하기 위해 말이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어느 누구도 찾아낼 수 없는 잡화점에 들어온 건가? 아니, 어쩌면 내가 맨 처음으로 레시아를 2층에서 소환했던 전과가 있으니, 가능성이 거의 없는 가설이라면 2층의 물건 중 하나가 지금의 마왕까지 이곳을 찾아오게 만든 것일지도 몰라. 그야 당연하게도 각본가는 모두 제외되었고, 왜곡된 이야기는 분명 없으리라고 생각하니까.

 

아니면 짐이 남성체가 되는 편이 더 좋은가?”

 

그러니까 본래 성별인 남자에게 그런 소리를 하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청혼 안 받아준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그래도 그대는 짐을 보기 위해 마계까지 온 것이 아닌가?”

 

그래. 맞아. 회군을 하기 위해서보단 개인적으로 보고 싶다고 했지. 그리고 봤잖아? 봤으면 내 목적은 다 완료한 거라고? 이제 네가 세상을 부수던 가루를 만들던 상관 안 할거야.”

 

그러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레프리시아의 키가 더 컸으니 내가 자연스레 올려다 보게 되었고, 빠질 것만 같은 레프리시아의 눈동자와 마주친 상태로, 시간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그대는 짐을 처음 보았을 때, 쓸쓸한 눈을 하고 있었다. 보통 마왕을 처음 보았어도 쓸쓸하거나 그리운 듯한 눈을 하지 않지. 그러나 곧 이어 실망에 빠졌다. 그대가 찾고 있던 마왕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미겠지. 그 반응을 추측한다면, 그대는 일전에 짐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노라. 그대는 누구이고, 이곳에 어찌 왔는지 말해보거라.”

 

너무 날카로워서 베이는 줄 알았다.

이 마왕에게 무서울 정도로 통찰력을 준 창조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카일. 나는 모순덩어리. 본래 있어서는 안 될 존재야.”

 

이런 식으로 소개를 한다면 상대방 입장에선 좀 강한 면모를 남길 수 있을까?

아님...그냥 바보 같은 허세병으로 병자취급을 받을까?

 

그리고, 잡화점의 주인이자. 마왕 레프리시아의 주인이기도 하지.”

 

뭣이?”

 

당황한 모습을 여기서 보이는 건가? 자신의 위는 없다고 생각했던 마왕에게 있어. 나의 대답은 충격적이라고 봐야 했다. 힘이 사라진 마왕의 손가락을 살짝 치우고 뒤를 돌아 말을 이어 나아갔다.

 

물론 너를 말하는 건 아냐. 너보다 더 귀여운 검은 고양이가 있거든. 나는 그 아이와 혼인을 했고, 너의 청혼은 받아들이지 않아.”

 

의미를...모르겠군.”

 

모르는 게 당연해. 지금의 너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인걸.”

 

마왕에게 쐐기를 박았다.

물론 나 자신에게도...

 

그러면 이제 볼일 다 봤으면 돌아가주겠어?”

 

아니. 짐은 아직 돌아가지 않는다.”

 

대체 왜? 아무리 같은 타락의 마왕이라고 해도, 다른 건 다른 거다. 그렇게 쐐기까지 박았다면, 보통 돌아가는 것이...아니, 내가 상대를 좀 얕봤구나. 상대가 아무리 다르더라도 본질은 타락의 마왕.

 

그대가 이전에 어떤 생활을 했는지 몰라도, 이전의 짐과 같이 생활을 했었다는 건 사실이라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그대의 곁에서 짐과 오래 생활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흔적이 보인다고?”

 

그렇다. 함께 했던 사념을 이곳에서 볼 수 있노라. 짐은 마왕이다. 마왕이 모르는 것 또한 없어야 하며, 설령 다른 차원에서 일어났던 일이라도, 그것을 감지하고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기묘한 긴장감속에 만들어진 고요함. 그리고 그 고요함을 깨부수는데 5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 매일 이곳에 찾아오겠다.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대는 오히려 편한 관계를 더 선호하기 마련. 그대의 마음을 얻어야 세계정복도 손쉽게 이룰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확실히 레시아와 같은 점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인가?

마왕의 뒷모습이 내 눈 앞에서 사라지는 동안, 굳어버린 듯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세계정복을 하러 나가라고. 이곳에 왜 매일 놀러 오겠다는 건데?”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다.”

 

더 불길해...

그보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이곳에 찾아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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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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