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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에는 유독 붉은 보름달만 뜨는데, 그 이유는 마족들이 붉은 보름달에서만큼은 어마어마하게 강해지기 때문이다. ‘어마어마라는 표현이 거슬리면, ‘매우 강해진다.’라는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냐면...

 

흐음? 그 정도인가? 아까 전과는 달리 많이 지쳐있는 모습이군?”

 

시끄러워...잡화점 열어야 하는데 너 때문에 못 열잖아.”

 

과거에 단련하고 경험하고 노력해왔던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처참하게 깨져나가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도망갈 수 있게 구멍을 파놓는 나의 성격을 어떻게 읽었는지, 빠져나갈 수 없는 결계가 사방에 널려있을 무렵. 아직 익숙하지 않는 이 몸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 신기했다.

 

아니. 익숙하긴 해도, 신장차이가 있기 때문에 유효타를 넣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겠지. 온 몸이 욱신거리고 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엉망진창이 되었어도 아직까지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라면, 과거의 신체 데이터를 백업하여 원상복구 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지금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사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잡화점을 열어야 한다는 그 하나 때문에...

 

프리트론 왕국의 몰락을 막아낸 것은 좋으나, 그 바보 같은 행동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구나.”

 

사실 프리트론은 어찌 되도 상관은 없는데, 일단 마왕을 만나러 온 것뿐이니까.”

 

만나러 온 이유야 뻔한 이유지만...

 

짐이 누군지 알면서도 만나러 왔다? 그러면서 명을 재촉하는 것이야 말로 실로 우습구나.”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호랑이 가죽을 남긴다고 하지. 아니, 다른 건가? 어쨌든 마왕을 만나려면 마계로 가는 게 아무래도 일반 상식 아닐까? 솔직히 내가 한 말을 끊고 호랑이를 잡는 거겠지!”라던가,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 거다!”라고 소리치는 걸 듣고 싶었다만, 뭐 지금에 와서야 그런 바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으려나?”

 

마음이 좀 착잡해졌다. 그래도 태클을 걸면서 살아온 인생이 좀 오래 되었으니, 이렇게라도 만담을 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이나마 추억이 되살아나려고 할 때, 마왕 옆에 천천히 다가왔다.

 

마왕님. 이 소녀를 저에게 주신다면 쓸만한 아이로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쓸만한 아이는 뭐야?

 

마음에 드는가? 그대는 아직까지 거느리고 있는 신부가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만?”

 

새로운 장난감은 언제나 가지고 싶은 법이죠.”

 

뭔지 모르겠지만 저 남자를 날 바비인형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군. 허나, 짐 또한 저 소녀에게 아직 못 본 것이 많다. 그러니 그걸 확인 하기 전까진 보류로 해두도록 하지.”

 

그렇군요. 그럼...”

 

그 남자의 시선이 날 훑고 지나갔다. 어마어마한 사념이 나에게 침투했는데, 그 중엔 피투성이가 된 체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한 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대체 신부들에게 무슨 짓을 하면 그 지경까지 가는 거지?

 

저건 마계토착 생물을 떠나서 이미 정상이 아닌데...”

 

아무래도 마계공작 중 하나인 거 같네.”

 

자기가 닥친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세린은 매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잡화점 주인 밖에 보이지 않는 세린을 마계공작이나 마왕 레프리시아가 볼 일은 전혀 없다만, 지금 그런걸 생각할 때가 아니라, 저런 변태 같은 녀석에게 갈고리에 걸려서 엔티티에게 제물로 받쳐지는 걸 막으려면, 이제 슬슬 이탈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로 나는 검을 허공에 집어 넣었다.

행동으로부터 이미 레프리시아에게 전해지자, 눈살이 살짝 찌그러진 마왕. 그거 하나만으로 거대한 마기가 나를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내지 말라고? 잡화점 문을 열어야 하는 시간이라서 말이야. 슬슬 돌아가봐야 하거든.”

 

도망치게 놔둘 것 같은가!”

 

거대한 마기가 허공에 응축되어 모든 땅을 갈아내도, 내 손에 바다 빛의 마나가 한 곳에 모여 퍼지기 시작했다.

 

새벽<Daybreak>.”

 

-파사사사사삭!

 

뭣이?”

 

마기는 자연상태로 되돌아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애초에 내 앞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건 그리 큰 효과가 없다.

 

마왕도 생각보다 약하네? 이런 마법에 상쇄 당할 줄이야?”

 

사실 내가 특이한 거지만 분위기에 맞춰서 도발을 해보았다. 이런 도발에 걸린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왕 레프리시아는 상상이상으로 냉철한 분석가였다.

 

모든 마법을 단숨에 자연상태로 바꿔버리는 마법. 확실히 그대는 마법사에게 있어선 최대의 적이로구나. 지금까지 쓰지 않았다가 쓰는 걸 보아하니, 어떻게든 아껴서 반격을 할 속셈이었군. 실력을 숨기고 있어서 몰랐으나, 마계공작에 어울릴만한 기술이니라. 다만, 잡화점이라는 장소는 그저 잡다한 물건을 파는 곳인데, 그게 세계를 종말로 몰아넣을 마왕을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인가?”

 

맞아. 더 중요해.”

 

호오...”

 

실로 흥미로운 동물이 아닐 수 없구나!”라는 듯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마계의 군단을 회군시킬 정도로 거대한 힘을 지닌 사람이, 잡화점 하나 열어야 한다고 세계평화고 나발이고 집어 던지면서 돌아가니까.

 

마치 내가 중요해! 일이 중요해!”라고 했더니 일이 중요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아님 말고...

아무튼 완전하게 적의가 없다는 표시로 뒤로 돌아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뒤에 기습을 받을 수 있긴 하지만, 이미 시공간까지 조작하는 내가 그런 거에 당할 일은 없었다.

 

-파앙!

 

집에 좀 가자! 아프잖아!”

 

오늘 처음 있는 걸로 하자.

 

보내지 않는다. 애초에 세상에는 관심이 없는 자라고 한들, 그 정도의 힘을 지녔다면 분명 짐에게 있어선 커다란 장해물이 될 존재. 그러니 선택을 하거라.”

 

보나마나 자신의 아군이 될지 죽도록 싸울지 결정하라고 하겠지.”

 

맞다. 짐과 같이 세계를 멸망시키고, 더 나아가 모든 차원을 한줌의 흙으로 공허에 흩뿌리지 않겠는가?”

 

모든 차원을 한줌의 흙으로 흩뿌리기엔 아직까지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는 레시아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바보 같은 허상은 언제나 이럴 때만 나타나네. 아무튼 나는 그런 거에 관심이 없거든? 그렇다고 해서 죽도록 싸울 의미도 없어. 단지 그 기사의 각오를 무시하기엔 너무 애처롭거든. 그래서 1번 정도는 회군시키도록 유도한 것뿐이야. 그 다음에 프리트론이 망하던 칸포리우스 제국이 망하든, 잡화점만 열 수 있다면 나와는 전~혀 관계 없지.”

 

나의 말을 들을 때마다 분한 건지 아쉬운 건지 계속해서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마왕. 저들 입장에서도 소녀 하나가 마계의 대군을 막고, 왕국 하나를 구한 셈이 되어버렸으니 어떻게든 죽이거나, 자신의 수하로 만드는 선택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자신보다 어느 정도 약해야지, 내 경우에는 지금 마왕마저 갈등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아니, 그 이상으로 힘을 숨기고 다녔다. 그 진가를 알아보는 건 역시 레프리시아 밖에 없는 건가?

 

그럼 어쩔 수 없지.”

 

순식간에 내 앞으로 순간이동한 레프리시아. 그리고...

 

짐의 수하로 있기는 싫고 그렇다고 죽도록 싸우기 싫다고 하는 의미는 지금 그대는 적의가 전혀 없다는 것으로 인지해도 괜찮은가?”

 

멀리서 마법을 맞을 땐 몰랐지만, 예전에도 많이 본 레시아의 칠흑의 드레스를 기초로, 흑색의 무구들이 마왕의 카리스마를 더욱 높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렇게 인지해도 상관 없어.”

 

다만, 그대가 언제 돌변하여 짐에게 칼을 들이밀지 모르는 일. 그런고로 짐은 사소한 변수마저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이곳에서 전한다.”

 

만일 내가 용사와 같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지했는지, 그런 가능성도 없는 경우의 수마저 제거하기 위한 마왕의 입이 열렸다.

 

짐의 신부가 되어라.”

 

......

 

?”

 

짐의 신부가 되라고 말했다.”

 

아니. 신부고 나발이고 나는...”

 

알고 있다. 그대는 본래 여성체가 아니라는 것쯤은. 다만, 그대가 설령 남성체라고 해도 짐의 신부가 되라는 말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기본적으로 남자가 신랑이고 여자가 신부라고!”

 

그대는 지금 소녀이지 않는가?”

 

.

제길. 마왕에게 논리적으로 밀려버렸다.

 

아냐. 잠깐만! 아냐! 그게 아냐!”

 

짐과 애정관계를 쌓으면 언젠가 짐을 위해 움직이는 날이 올 것이고,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고 해도 짐의 감시 아래에 그대가 수상한 행동을 할지라도, 초기 진압이 가능한 이점을 살린 것이다.”

 

그보단, 타락의 마왕이니까 결국 내가 타락해서 마왕군에 들어갈 거라는 생각을 한 거겠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그 특유의 파동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멀쩡한 사람도 결국 타락할 테니까.”

 

짐의 의도마저 파악할 정도인가?”

 

오랫동안 봐오면 무슨 꿍꿍이인지 자동으로 알게 된다.

 

그러니 나는 잡화점을 오픈 하러 갈 거야. 신부가 되라는 제안은 정말 진심을 다해 거절할게.”

 

대체 왜 장르나 전개가 이 모양으로 되는 건지...

분명 모든 시공간에 있는 각본가는 왜곡시켰을 터인데.

 

아니, 불허하다. 운이 좋게도 짐은 마왕이니라. 얻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얻어야 하며, 얻을 수 없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어야 하느니라.”

 

내 입장에서는 운이 너무 나쁜 거 같은데...”

 

조용히 하거라. 짐이 윤허하지 않는다!”

 

초창기의 레시아는 고분고분한 성격이었다면, 지금의 마왕은 그냥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성격인가?

 

저기...역지사지라는 말 알아?”

 

알아도 모른다 할 것이다.”

 

전혀 상대방을 생각해주지 않잖아!”

 

그야 당연하게도 마왕이기 때문이니라.”

 

이걸 때려? 말아?

아니, 왠지 때려도 내가 곱게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전 세계에 레시아와 성격이 은근히 비슷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도 신부는 싫어. 또 과도한 사랑을 받다가 죽거나, 힘 조절 안 되는 태클을 맞으면 죽어버릴지도 몰라.

 

아니면, 지금 당장 혼약식을 치르도록 하지.”

 

진도가 너무 빠르잖아! 학원강사냐!”

 

가끔가다 학원강사들이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는 문제를 풀게 만들어, 학교 선생님을 깔보게 만드는 그런 경우도 있다. 그 이전에 이 세계에는 학원강사라는 개념이 없지. 300년 이전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보다 더 멀리 왔을지도 모르니.

 

아니면 짐이 남성체로 변해야 받아들일 건가?”

 

내 성별은 원래 남자라고!”

 

그럼 그대가 남자로 변해서 짐의 신부가 될 것인가?”

 

태클을 걸어야 할 곳이 너무 반복적이니 따로는 말하지 않겠는데...”

 

따로 말하지 않는 거면 승낙하겠다는 의미로 알겠...”

 

좀 사람 말을 끝까지 듣고 멋대로 해석하지 말란 말이야!!!”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면서 잠깐 고개를 숙이고 지친 정신을 수습했다. 마왕과 싸우면 적어도 장엄한 전투로 인해 죽는 경우는 봤어도, 마왕과 이야기 하다가 화병으로 먼저 쓰러질 뻔한 이야기는 전혀 없겠지만...5분만 더 이 상황이 지속되었으면, 오늘 처음으로 마왕과 이야기 하다가 고혈압으로 사망한 캐릭터가 될 뻔했다.

 

뭐가 문제인가? 짐은 이래 보여도 꽤 귀엽다고 생각한다.”

 

그게 지금 마왕이 할 말이냐...”

 

모든 각본가는 제외시켰으니, 원래대로라면 용사와 마왕의 싸움, 제국과 마왕군의 대립. 더 나아가 인간의 내부분열 등. 흐름을 타고 악순환이 되어도 나는 아무도 오지 않는, 어쩌면 가끔씩 의뢰인이 오는 잡화점 안에서, 평화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뒹굴 거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걱정 말거라. 처음에만 아플 뿐이라고 마계공작 중 한 명이 말했으니...”

 

누가 그걸 걱정한대!”

 

경험이 있는 것인가?”

 

무슨 경험타령이야!”

 

가위바위보 말이다.”

 

그 망할 것의 가위바위보는 대체 왜 이곳까지 나타나서 괴롭히는 거냐고! 그게 처음에만 아프다는 건 또 뭔 상황인데!”

 

아무래도 세계가 대격변을 해도 중심점은 마왕의 가위바위보가 아닐까?

그건 그렇다고 해도...가위바위보를 처음 하면 많이 아픈 건가? 내 생에 첫 가위바위보는 4살 때 동네친구와 같이 했던 기억밖에 없다. 졌을 때도 마음이 아프거나 그러진 않았으니까.

 

혼례를 한 뒤에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은 정통이 아닌가?”

 

대체 어느 곳의 정통이 그렇게 삶은 물에 데쳐먹을 정도로 막장이 됐는지 설명부터 해!”

 

아무래도 나의 사명은 차원을 넘어서도 계속 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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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는 첫날밤에 가위바위보를 한 뒤에 공격팀과 수비팀으로 나뉜뒤 일리오스로 떠납니다.(??????????????????????)

...그냥 잊어주세요.

 

596

 

 

 

잡화점 내부에서는 본래의 모습으로 지낼 수 없으니, 밖으로 나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인생은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인데, 어째서인지 밖으로 나가도 나는 카린이라는 여성체의 모습일 뿐. 결국 한숨을 쉬고 나중에 되돌아갈 방법을 찾기로 생각했다. 대부분 짧은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폭염이지만, 숲에는 긴바지를 입어야 마음이 놓인다.

 

맨살이 드러난 부분에 가시에 찔리거나 독을 지닌 생물에게 물리기라도 하면, 어떤 변수로 작용해 목숨을 빼앗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리베리티아 고원 특유의 바람은 오히려 시원하다 못해 서늘할 정도니, 반팔과 반바지를 입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된다. 최적의 기온으로 맞춰진 이곳이 낙원이긴 하지만...

 

그 덕에 이곳에 몰려오는 수많은 몬스터들과 인간들의 전쟁터가 되었구나.”

 

덕분에 비릿한 냄새가 떠나지 않는 붉은 빛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리베리티아 고원에서 조금만 더 가면 요정과 엘프들이 사는 숲이 나오지만, 어차피 들어갈 일이 없으니 비명을 들었던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다. 주변에 시체로 황폐해진 곳을 산림욕 하듯이 들어갈 수 없는 이 찝찝한 기분은 뒤로하고, 세린에게 말을 걸어 내가 궁금한 것부터 말했다.

 

혹시나 하는 말인데 너도 내 상태정보라던지 그런 걸 수정하거나 멋대로 작성할 수 있어?”

 

일부는 가능하지만 일부는 불가능하지.”

 

내 성별은?”

 

“......”

 

. 침묵을 하시겠다?

 

당장 돌려내! 이 로리콘아!”

 

나는 겨우 로리콘이 아냐. 그저 귀여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것뿐이지. 만약 잡화점의 주인이 키도 작고 귀여운 남자애나 여자애였으면, 보살필 맛이 나는데 어째서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사람이 우중충하고 따질게 많은 남자였는지.”

 

어째서인지 평소의 카린보다 키가 좀 더 작더니만!”

 

그나마 여성체로 변했을 때는 160cm 후반대로 갔다면, 이번엔 아예 150cm초반대로 가버렸다. 이래서 내 프로필을 적을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키가 어느 정도고 몸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죄다 불명으로 적거나 변수가 많음으로 적어야 하잖아!

 

대체 어느 신체검사원이 좋아하겠냐고!

그보다 겨우라는 말을 사용한 거냐? 지금?

 

아무래도 은팔찌를 차야 할 녀석은 너로구나.”

 

글쎄? 잡화점에 팔이 있던가? 집을 감옥에 넣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보라고 하시지?”

 

저 얄미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카린의 입지가 더 굳어져서는 안 되는데...

 

지금은 주변에 있는 시체부터 조사를 해야 되나?”

 

시체를 뒤적거린다고? 그런 지저분한 일을 그런 귀여운 모습으로 할 거야?”

 

생존에 있어서 귀엽고 멋지고가 어디 있어? 그냥 추악하게 사는 거지. 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게 시체든 쓰레기더미든 모두 뒤적거리며 살고 있는 거잖아. 어차피 모든 생명은 죽지만, 모든 생명은 구차하게도 살아남으려는 강한 생존 의지가 있지. 그거야 말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거야.”

 

거대한 손톱에 깊게 파인듯한 갑옷. 그 안에 들어있는 따듯한 내장들이 텅 비어있었다. 사람이 습격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고, 어처구니 없게도 정말 마왕군에게 쫓겼는지 내 근처만 해도 풀 숲에서 감시하는 듯한 고블린 무리가 감지 되었다.

 

그래도 일단 나를 공격하지 않으니 모른 척.

다만, 마나가 요동치며 주변의 공기를 휘두르고 있을 때. 주변에서 발 소리가 더 들려왔다.

 

뭐지? 지원군인가?”

 

곧 죽어갈 것 같은 여성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울려오자마자, 주변에 있던 고블린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거기 이쪽으로 빨리 오세요. 그런 곳에 있으면 죽어버릴 테니까.”

 

, 알았다. 그런데 너 같은 소녀가 이런 곳에 무슨 일이지?”

 

소녀라는 말에 열이 받쳤지만,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 멋대로 화내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럼 당신 같은 기사가 이곳에서 대패한 이유는 뭔가요?”

 

흔적을 쫓다 보면 멋대로 추측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전투가 벌여진 것으로 보였다.

 

대패한 이유야 13대 마왕 레프리시아가 이끄는 군세 때문이지. 벌써 프리트론까지 함락하고 있어. 미약하게나마 부탁을 하지...”

 

제가 부탁을 받는다고 해도 손쓸 도리는 없어 보입니다만...”

 

적어도 프리트론에 있는 귀족들만이라도...”

 

귀족이 아니라 약자를 지키는 게 기사의 사명 아니던가요? 저는 어차피 기사도 아니고 민간인이니 그 말을 들어줄 의무는 없다고 봅니다만?”

 

-털썩!

 

묵직한 소리가 땅을 울리고 내 시선은 무릎을 꿇은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간절히 외쳤다.

 

제발! 부탁이다! 약자를 보호해주는 것이 나의 사명이지만, 그 약자를 이끌고 보살피는 것이야 말로 왕과 귀족이 행해야 하는 사명이니까! 그들을 지켜야지만 약자를 이끌고 모두 대피할 수 있다!”

 

대답이 좋았다.

아니, 정말로 이 기사는 자신의 주인만 생각한 줄 알았으나,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남을 챙길 생각을 할 줄이야.

 

그렇군요. 적어도 당신은 올바른 사람인가 보네요. 그렇다면 그대로 가만히 있으세요.”

 

드디어 공격을 감행하려는 듯한 풀숲의 움직임. 순식간에 뛰어가 기사의 등을 밟고 뾰족한 단검을 든 고블린의 얼굴에 발로 차버렸다. 살살 차면 살아있을 수 있으니, 목뼈가 날아갈 정도로 강하게 차버렸다.

 

물 흐르듯이 허공에 떨어지려는 뼈 단검을 붙잡고, 내 동쪽 방향으로 빠르게 던지자, 풀 숲 한곳에서 찢어지는 짐승의 비명이 울렸다. 한 손에는 검을 만들어 휘두르고, 다른 한 손에는 마나를 모아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일방적인 학살을 하고야 말았다. 어쩌다 보니 고블린이 더 불쌍해질 정도로 괴멸시켰고, 엉망이 되어버린 숲을 더욱 더 황폐하게 만들어서야, 널려있는 고블린의 시체들은 곱게 죽지 못해 사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거기 다친 데는 없어요?”

 

다친 데는 없는지 물어보고 있지만, 그 기사는 뭐에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숨을 쉬는 걸로 봐선 서서 죽었다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으니, 다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서는데...

 

, 혹시 용사입니까?”

 

아뇨. 잡화점 주인입니다. 그보다 이 나라에 용사가 없어요?”

 

, . 용사는 여신의 신탁을 받고 축복을 받아야만 가능하니까요. 지금으로부터 500년동안 대마법사 엘티노스 일행 말고는 용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 내가 알던 용사들은 바퀴벌레보다 더 많은 숫자로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직업인 줄 알았는데, 이곳은 비정상적으로 신탁을 받고 축복을 받아야 용사로 취급되는 세계구나.

 

아니. 너희가 이상한 거잖아. 매번 용사들이 득실거려서 무서울 지경이었다고?”

 

세린은 조용히 하고 있어.”

 

? 무슨 소리를?”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말들을 받아 치느라 머리는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음이 호수처럼 넓은 내가 참아야지.

 

그러면 마왕은 어디서 볼 수 있죠?”

 

, 마왕이라면? 13대 타락의 마왕 말입니까?”

 

. 맞아요.”

 

그 마왕 아니면 누가 있겠어? 이런 잔혹한 일을 벌이는 건 내가 아는 레시아가 아니라, 어느 이야기에서 나올 법한 잔혹한 마왕 레프리시아라고 보면 된다. 어찌되었든 나와 마주했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혹은 맨 처음 만나자마자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전투가 벌어질 지도 모른다.

 

마왕은 직접 대군을 이끌지 않고 마계에 있는 마왕성에 있지만, 마기가 가득해 여신의 축복을 받지 않는 이상 도달할 수 없다고...”

 

. 거기에 있구나. 알려줘서 고마워요. 어차피 마계로 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

 

잘 들었으면서 못들은 척을 하다니요? 마계로 가는 길은 알고 있다는 소리에요. 다만, 제가 알고 있는 방식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마왕을 막아야 한다는 건 맞죠?”

 

마왕을 막는 게 개구리를 만질 수 있는 용기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라면 싸우지 않고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에서야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결정하는 방법은 통하지 않으니까. 철저한 방해공작을 통해 프리트론 왕국과 반대 방향으로 끌어들일 수 밖에 없다.

 

인간계의 반대 방향이라면 마계밖에 없지만, 이렇게라도 유인을 해야 지금 당장이라도 함락되지 않고 더 많은 시민들을 살릴 수 있잖아요?”

 

하지만...혼자서 그 마계대군을 막을 수는...”

 

아니. 유인만 하는 거지 누가 군세를 막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군세를 막을만한 위력을 지닌 무언가가 필요했다. 계기라던가 아니면 내가 직접 마왕성을 때려부수거나. 아니면 다른 세계처럼 마왕을 자칭하거나...아니, 이 모습으로 마왕을 자칭하기도 힘들겠구나. 이미지라는 것이 있지.

 

그러면 저는 출발할 테니 고블린 이빨이라도 가져가세요. 팔면 그래도 저녁에 먹을 음식이 호화롭게 될 테니까요.”

 

고블린 이빨은 잡화점에서 취급한 적이 있었는데, 화살촉으로 만들면 위협적인 물건이 되니까. 잡상인에게 팔면 짭짤하게 벌 수 있다. 그나저나, 돈과 관련된 일이 있으면 주제를 벗어난 독백을 하는 버릇 좀 고쳐야겠다.

 

그럼 마계로 가는 게이트를 열어줘. 세린.”

 

마계로 가는 길은 스스로 갈 수 있잖아?”

 

그럼 본래 성별로 되돌려 주던가!”

 

그건 싫은데?’

 

대체 세린을 어떻게 아이언 클로를 해야 내가 남자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가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하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걸어가는 동안, 마기가 몸을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몸 안쪽에선 신성력과 마기, 마나를 계속해서 합성하기 때문에, 마기에 대한 침식은...

 

아니! 게이트를 열어줄 거면 열어주던가!!!”

 

조금 걸어갔는데 마계로 간다는 그 자체가 이상하잖아.

 

이건 내가 한 게 아니거든? 이것도 네가 가고 싶다는 소망이 이루어낸 기적이야.”

 

내가? 그런 거야?”

 

그래. 또 그 마왕을 되찾으려는 거야? 아니면 그 마왕을 죽이러 가는 거야?”

 

그야 뭐. 되찾으러 가는 거긴 한데. 생각을 좀 해보니까 마계에서 난동을 부리고 마왕에게 호감을 얻는 건 바보 같은 일이고, 결국 죽이러 가는 것보단, 어쩌다 보니 싸우러 간다는 표현이 맞다. 이 세계에 있는 레시아가 날 알아본다는 가능성은 0에 수렴하지만, 그래도 0.1정도 가능성이 있다면 괜찮겠지.

 

뭐가 되었든 회군시키러 가볼...”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살기가 주변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레시아와 잡화점 생활을 하면서, 매우 얕보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레시아의 정보습득 능력은...”

 

전군. 정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미 최상위권이잖아...”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배치. 거대한 군세에 포위당한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환영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많이 데려오지 않았으면 좋겠...”

 

타락하라.”

 

마왕 레프리시아의 말 한마디에 내 주변이 모두 빛으로 물들었다. 주인공은 악당들의 대사를 끝까지 기다려주는 경우가 있는데, 어째서 악당들은 말도 듣지 않고 속전속결로 공격하려는 걸까?

 

거대한 폭음도 들리지 않고 그대로 전신에 충격이 몰아쳤다.

 

아프잖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내가 바닥에 기고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탈진감부터 서서히 몸의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다.

 

흐음? 마왕님? 저 인간 일어났는데요?”

 

그야 당연하지 않는가? 인간이기엔 매우 변칙적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짐의 마법을 직격으로 맞고도 살아남는 자가 있다니.”

 

...사람이 말을 할 때, 마법을 직격으로 날리지 말던가...”

 

레시아와 시나가 항상 예측이 불가능한 곳에서 마법을 사용하니까, 조금이라도 마법을 사용하는 움직임이 보이면, 그대로 마법방패와 몸 안에 에너지를 둘러서 충격에 대비하는 버릇이 빛을 발휘했다.

 

차이점이라면 지금 건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마법인 거 같은데, 생각보다 10배는 더 아프게 느껴진다. 그래도 살아남은 게 의아한 걸까? 굳어있던 마왕의 고개는 살짝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름이 뭔가 소녀여?”

 

소녀 아냐...원래는 남자라고...”

 

아무래도 나에 대한 정보는 습득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보다 내 이름을 묻는다면 둘 중 하나인데. 하나는 대화를 할 여지가 있거나, 다른 하나는...

 

짐의 마법을 버틴 자의 이름을 알리고, 최후까지 전해주도록 해주기 위함이니라. 어서 대답하거라.”

 

그래 저거. 꼭 사람 죽이려고 하면 피해자의 이름을 듣더라.

아이고...

 

내 이름은 카...”

 

잠깐만. 그 입으로 카일이라는 흉한 이름을 대는 건 아니겠지?”

 

그럼 내가 카린이라고 대답해야겠냐!”

 

그렇군. 그대의 이름이 카린인가?”

 

아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세린의 방해공작으로 나의 진짜 이름을 알리지 못한 체, 카린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당장 저 마왕에게 살해당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고양이 모습이었을 때는 그나마 고분고분 잘 따라줬는데, 각본가가 사라지고 난 세상의 레프리시아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잔인한 마왕임이 틀림 없다.

 

마왕답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도 난 마법 한번으로 뻗어버리지 않아.”

 

아마 두 번 맞으면 뻗어버릴 것 같은데...

어쨌든 설령 패배해도 날 죽이지 못하도록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하니까. 얇고 긴 백은의 검을 만들었다. 붉은 달 아래에 휘날리는 검은 그 뒤에 별빛이 따라다니듯 어두운 공간에 잠깐이나마 실선을 번뜩였다.

 

그대는 용사인가?”

 

처음으로 마왕 레프리시아의 눈빛에는 빛을 띄기 시작했다. 자신의 호적수라도 찾은 모양인지 고양된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봐도...내 대답은 고정되어있었다.

 

아니. 잡화점 주인인데...저녁에는 잡화점을 열어야 하니까 그냥 돌아갈까?”

 

이토록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대사가 어디 있을까?

...내가 했으니 여기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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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일이 절 죽이네요.

위험등급이 진돗개 2마리 정도라 글을 제대로 못씁니다.

죄송합니다.

 

595

 

시간은 유연하게 변한다.

따라서 공간도 유연하게 변한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모든 걸 꼬아버렸다.

그런 나에게 어떤 벌이 내려지는 걸까?

-혼자서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카일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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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순덩어리다.

그야 말로 내 존재 차체는 이미 모순으로 가득 찼...아니, 이렇게 인트로를 시작하려니까, 내 왼팔에 흑염룡이 살고 있는 거 같잖아. 사실 흑염룡은 없고 월식이라는 검은 뱀은 살고 있긴 한데. 아무튼 현재 모든 시공간에 존재하던 각본가가 사라지고 나서, 나를 죽이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상황이 없어졌으니. 착한 마왕인 레시아나, 친근하게 다가오는 루니아 누나라던가. 아무튼 그냥 다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원래 없는 존재니까. 인간관계부터 원만하지 못한 경우가 되겠지.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보도록 하자. 세린.”

 

? 뭔데?”

 

뒤에서 나를 바라보던 세린은 이전과 다르게 차분히 대답했다. 내가 항상 물어보면 퉁명스럽게 대답하거나, 뭔가 시비가 목에 걸려서 따가웠는데...

 

어째서 나는 카린의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거냐!!!”

 

날카로운 비명은 여김 없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애초에 남자이며 이름은 카일이다. 설령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존재하고 있으니, 아무리 그래도 잡화점 내부에서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으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애초에 네가 규칙을 수정해달라면서.”

 

그래! 맞아! 이 곳을 운영하는 종족을 늘려달라고 했지! 신이든 뭐든 상관없게 말이야!”

 

하지만 그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그러니 너의 본 모습인 남자는 이미 인간을 벗어나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규격으로 남아있던 카린이라는 여성형 인간으로 남아있는 거야.”

 

도대체 너는 왜 내 말부터 무시하는...머리 쓰다듬지 마!”

 

그리고 이 상황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니...

 

. 카린 씨. 오늘은 저를 어떤 신비한 세계로 보내주실 건가요?”

 

리제로트. 이건 타디스가 아니거든? 메두사 폭포로 던져버리기 전에 이제 좀 나가!”

 

어머머? 이런 가녀린 소녀를 혼자 버려두겠다는 건가요?”

 

달라붙지 맛!”

 

찹쌀떡처럼 달라붙으려는 리제로트를 겨우겨우 뿌리치고 잡화점 창문을 바라보았다. 먼 은하수가 펼쳐진 공간은 이 시간대가 밤이란 걸 알려주고 있지만, 미래에서 볼 법한 거대한 빌딩이나, 전등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과거. 아니, 내가 본래 되돌아가야 할 고향과 같은 장소.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정말로 약육강식의 세계네.”

 

파이론은 마왕으로부터 멸망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지금은 누가 마왕인지 모르겠지만 레시아라고 해도 똑바로 잡아줄 사람이 없다면, 제멋대로인 폭군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육포에 대한 집착만 봐도...아니, 이런 걸 육포에 빗대어서 뭐하게?

 

봐요. 밖은 몬스터들이 불을 키고 살아있는 사람을 잡아먹는 세계라고요. 시체를 처음으로 보는 건 아니지만...”

 

음산한 기운이 리제로트를 감싸듯 들어왔다. 그래도 여기는 그나마 좋은 점이라면, 백장미가 없다. 이거야 말로 이 세상이 좀 좋아지는 이유인가? 세상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환멸을 느낄 때쯤.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잡화점에 손님이 찾아...와야 하는데...

 

내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도, 손님이 잘 안 온다는 공통점은 어째서일까?”

 

그거야 내가 막고 있으니까. 이미 이곳은 마왕군의 손아귀에 있잖아. 그런데 인간이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퍼져봐. 어떻게 생각하겠어?”

 

지금 겨우 평화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지만, 약육강식이 살벌한 공간에 잡화점이 나오면, 그 안에서 물품을 구입하기 보단, 약탈과 습격의 빈도가 매우 많이 늘어날 거라 생각한다.

 

일리가 있네. 그냥 이대로 매출 없이 평생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렇게 빈둥거리면서 오지 않는 손님이나 기다리며, 죄다 사라진 잡화점 멤버들에 대한 그리움도 잊어보자. 아니...잊혀질 리는 없나.

 

그나저나 아쉽네요. 잡화점 멤버가 있을 당시엔 저와 어울려줄 꽃들이 많았을 텐데.”

 

널 위해서 잡화점 멤버를 영입한 게 아니거든. 리제로트.”

 

저 사막여우보다 더 괘씸한 생각을 가진 리제로트의 말에 대못을 박았다. 아니, 사막여우는 괘씸하지 않고 귀여운 동물인가? 실제로 여우를 본 기억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심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창문이나 보고 있는 소녀는 이윽고...

 

밖에 나가고 싶어요.”

 

안 돼. 밖은 안전하지 않아.”

 

답답함을 못 참고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걸 만류해보려고 해도 이제 4일정도 경과했으니, 탐색과 정보를 모을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니까...

 

내일 나하고 같이 나가자. 너는 월터가 붙어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해도, 사실 마법에 대한 지식은 초보잖아? 그러니...”

 

아니? 마법에 대한 기초는 이미 마스터 했는데요?”

 

?

 

잠깐? ? 어떻게?”

 

놀라는 모습이 귀엽네요?”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어떻게 기초를...! 잡화점은 사라진 게 아니니 엘티노스의 자서전과 서적들이 남아있구나!”

 

엘티노스의 자서전과 서적. 그리고 덤으로 어마어마한 물품들까지. 사실 모든 시공간에 레이베리아를 빠짐없이 가둬버리면서, 엘티노스의 잡화점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모순투성이인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잡화점은 이 시대에 모순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 재미있더라고요. 이 시기의 마법은 전성기에 가까울 정도로 발전했잖아요? 마법공학이 발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그러면 카린 씨도 마법사의 길을 걸으신 거 맞죠?”

 

카일이라고 불러.”

 

지금은 카린 씨잖아요? ..? 푸훗!”

 

저 앙증맞은 볼을 잡아서 늘려버릴라!

 

세린. 규칙을 바꾸자고 했을 때 말 좀 들으라고...”

 

한숨을 곱게 포장해 밖으로 내뱉었다. 산지직송으로 가는 한숨은 공기 중에 사라졌고, 새벽 1시가 다 되어갈 무렵. 조용하게 생각하고 싶은 내 입장에선 리제로트가 빨리 잠들길 바라고 있었다.

 

넌 안 자냐? 키 안 큰다?”

 

카린과 같이 잔다면 지금쯤 꿈나라에 갔을 텐데요?”

 

! 그 이름은 거론해선 안 돼. 볼트모트와 같은 거야.”

 

카린 씨야 말로 말하면 안 되는 이름을 거론했잖아요?”

 

한숨만 쌓였다.

, 밖을 외출하면 본래 남자로 되돌아갈 수 있을 테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려나? 그냥 검은 고양이인 레시아를 쓰다듬으며 새벽을 보내는 게, 하얀 올빼미인 시나를 옆에 두고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제는 기억에서 독처럼 남아 퍼지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작별인사도 못 건넸구나.

적어도 몇 마디 나눴으면 좋았을 텐데.

 

천천히 눈을 감고 조용히 정리를 하자. 내일 아침에 밖에 나가면 기다리는 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 그런데 어디서 재료를 사야 하지? 밥은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현실적인 생각이 먼저인가?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 것이 맞는 표현인가 보네.”

 

눈을 떴다.

시야는 이미 햇빛이 들쳐진 아침. 오랫동안 생각했다고 했는데 설마 아침이 올 줄은 몰랐다. 정기적으로 명상처럼 빠지는 것도 아니고, 눈을 깜빡 하는 사이에 모든 것이 지나갔다. 아무래도 내 의지를 받들어 지금 이 순간은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기적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그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 볼...”

 

생각해보니 나는 깨어났어도 리제로트는 아직까지 자고 있는 시간대. 멍하니 앉아있기도 뭐해서 아침을 만들러 나아갔다.

 

그나마 암흑물질이나 형광물질 같은 건 먹지 않으니 다행인가?”

 

그렇다고 해도 루시피나의 요리는 먹고 싶었다.

 

모든 걸 버리고 떠나는 건 후회만 남는 일이구나. 어쩔 수 없지.”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겠지?”

 

세린은 가시가 돋친 말을 여김 없이 뿌렸다. 거칠게 마음을 파고드는 말은 나를 더 강인하게 해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약해진다는 말은 맞지만, 너는 꽤 신난 거 같다? 혹시 잡화점 멤버가 없어지고 나서 나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거야?”

 

아니. 진정한 파트너에 대해 알려주려고 했지.”

 

그러니까 왜 이 안에서 내가 여성체를 지니고 있어야 하냐고! 규칙 바꾸는 걸 수락하기만 해도 나는 남자인 모습으로 자유롭게 살았을 거 아니냐!”

 

사실 카린이었을 때가 보기 더 좋거든. 쓸 때 없이 위화감이 들지도 않고.”

 

쓸 때 없이 위화감이 드는 이유가 뭔데? 반신이라서?”

 

카일이라서?”

 

넌 진짜 타이타닉이 붕괴될 때 구출되지 마라.”

 

아무래도 자신이 나올 타이밍이라던가, 사실 이전에 레인처럼 세린과 같이 붙어 다니는 모습에 질투가 난 것일지도 모르지만...어쨌든 리제로트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침밥은 완성이 되어갔다. 얼마 없는 재료로 토스트와 에그 스크램블이 끝이지만...

 

세린.”

 

카린과 비슷한 외형을 지닌 세린은 내 옆에서 ?”라고 대답을 했다.

 

너도 먹는 거야.”

 

난 잡화점의 중추인격일 뿐이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

 

그러니까 먹어. 어차피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주제에...”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내 앞에 앉는 세린. 거울 속의 내 자신을 보는 듯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수려하면서도 차분한 외모와 신비로운 분위기. 날씬한 몸과 고풍스러운 옷의 조화가 주변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토스트에 버터를 발라 한 입에 무는 모습은, 예를 갖춘 귀족의 영애와 같다고나 할까?

 

쉽게 풀어서 말하면 고작 토스트 하나 먹는 주제에 매우 고상하...

 

아침을 먹는 다면 그런 쓸 때 없는 독백은 그만두고 어서 먹기나 하시지? 고풍스러운 카린 양?”

 

시끄러워.”

 

결국 고풍스러운 태그까지 붙어가며 아침식사는 이어갔다. 여전히 리제로트는 꿈나라에 빠지고 있는 동안, 잡화점 밖에는 함성소리와 칼부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프리트론 왕국은 파이론을 되찾으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파이론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추격하는 중인지.

 

, 그건 중요하지 않나?

 

하아암~ 어라? 카린 씨? 밖이 너무 소란스러운데요? 조용히 해달라고 하면 안 되요?”

 

왜 일어난 거야? 영원히 잤으면 더 좋았을 텐데.”

 

키스로 깨우시는 거에요?”

 

월터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도대체 왜 죽은 사람이 키스를 하면 깨어난다고 생각하는 거야?”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확인된 치료법이잖아요.”

 

정말 숲으로 버려버린다.”

 

더 이상 찾지 못하도록 깊게 봉인해버리겠어. 나의 결의가 마음속으로 다져지는 순간 사람의 비명소리가 찢어지듯 들려왔다.

 

아아아악!”

 

밖에 무슨 일이 있나요?”

 

누군가가 몬스터에게 쫓기고 있는 모양이야. 나야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자세한 상황은...”

 

지금 도와주는 게 도리잖아요!”

 

도리?

 

그 도리 하나로 모든 걸 망치고 싶다면 네가 직접 나가서 구해보던가? 자세한 상황을 몰라서 멋대로 끼어들다가 죽어버린 녀석도 많이 봤어. 잡화점 멤버들은 정보능력이 좋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 너는 생존에 있어선 아무것도 몰라. 머나먼 미래...아니, 레이베리아가 만들었던 그 공간은 치안과 안전이 확보된 공간이었으니 당연하다고 해도! 아냐...아니지. 심지어 그런 공간마저도 도리 하나로 인생이 망하는데, 그런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이 세상은 지금 살아남기 위해 얼마든지 인간을 버릴 수 있는 시공간이다. 심지어 남의 눈에는 짐승만도 못한다고 한들, 자신의 가족에겐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먹여 살리는 가장으로 보이는 모순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그런 혼돈의 세계가 바로 지금 이곳이다.

 

애초에 너처럼 예쁜 아이를 납치해서 인형으로 만드는 녀석이 도리라는 단어를 꺼내지 마. 내가 생각했을 땐 차라리 저것들이 너보단 더 나아.”

 

리제로트는 고개를 홱 돌리고 분한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그 이후로 잡화점엔 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리제로트도 저지른 죄가 있지만 마음을 고치고 갱생한다고 해서 저지른 업보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그나저나.

밖에 상황이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고 정보수집을 해야 하니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삐쳐있으니 대답은 안 할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다녀오도록 하지. 넌 밖으로 나가지 마. 밖은 내 생각보다 더 위험하니까.”

 

그래도 탈출할 수 있으니 세린에게 문을 굳게 닫아놓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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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의 리셋


이제 몬헌월드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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