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

 

 

 

시나와 같이 사키엘의 문을 열고 나온 곳은...어라?

 

벌써 왔어?”

 

키르갤이 아직까지 자고 있는 용사에게 무릎베개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잡화점을 운영하고 문을 닫고 다시 찾아오는 그 시간과는 별개로 이 시간이 멈춰있었단 소리일까? 아니면 사키엘의 문은 결국 시공간까지 간섭해서 원하는 장소만이 아닌, 시간까지 정해서 갈 수 있는 것인가?

 

조만간 잡화점이 아니라 파란색 경찰박스로 만들어놔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주로 진출해서 외계인들과...

 

어딜 가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현실부터 직시하시지?”

 

머나먼 우주로 진출해있는 잡화점의 생각을 단숨에 지워버렸다.

 

보통 다녀오면 연회를 할 줄 알았는데, 아니면 다 끝났다거나?”

 

잡화점은 아침까지 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도 역시 못 온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여신님은 같이 온 거야?”

 

내 옆에 앉아있는 시나는 올빼미 형태로 있었지만, 말하는 올빼미가 얼마나 인상에 깊었는지 단숨에 여신이라고 말했다.

 

어라 성녀님? 언제 오셨습니까?”

 

그 사이에 졸았는지 자고 있었는지 벽에서 졸고 있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성녀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렇군요. 카린님이라고 해야...하지만, 성녀님이라고 부르는 게 상황적인 면에서는 좋지 않습니까?”

 

상황적인 면에서는 용사의 동료니까 잡화점 주인이라고 할 수 없고 성녀라고 말하는 건가? 어쨌든 나는 성녀가 아니다.

 

상황적인 면에서는 그렇게 말해도 상관은 없지만, 그 이외에는 성녀가 아니니까 되도록이면 이름으로 부르세요.”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아직까지 자고 있는 용사 앞에 서서 연회의 시작시간을 기다렸다. 키르갤과 별일 없이 잡담을 하고 있는 끝에, 침묵을 고수하는 궁수가 문을 활짝 열었다. 내 기준으로는 어제였지만, 여기는 1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는지, 아직까지 껄끄러운 공기가 나와 그 궁수 사이에 고이기 시작했다.

 

고여서 썩기 직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연회에는 나가야 하는 거 맞죠? ...그러니까 침묵의 현령?”

 

그냥 현령이다. 침묵의 현령은 무슨 의미냐?”

 

...그저 마음속으로 말해야 했던 이명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걸 대체 뭐라 해명해야 하지? 내 왼손에 히드라가 꿈틀거린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아니, 그 때는 흑염소였던가? 흑염룡이었던가? 어쨌든, 지금 당장의 혼돈을 잠재울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래. 그냥 연회를 들먹이며 이 상황을 타개하자.

 

혀를 깨문 것뿐입니다. 그러니 연회에...”

 

아니. 혀를 어떻게 깨물어야 그런 소리가 나와?”

 

키르갤이 마지못해 태클을 걸어왔지만 무시한 채 현령이 열어놓은 문 밖으로 나왔다.

 

마스터. 침묵의 현령이라는 것보단 심연의 론도(윤무곡) 현령이라는게...”

 

누가 그런 이명에 대한 의견을 내놓으라고 했어!”

 

애꿎은 시나에게 목소리를 높혔다.

그보다 심연의 론도(윤무곡)이라니?

멋있잖아?

 

나중에는 이명에 대해 고찰을 할 필요가 있어 보여.”

 

막상 실수로 저지른 일이긴 해도 저런 이명을 가지고 있다면, 손발이 다 사라지긴 하더라도 자기만 멋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니 내가 나에 대한 이명도 지어보도록 하자. 그 빌어먹을 백장미만 들어가지 않으면 될 거 같긴 한데...

 

마스터. 연회가 시작되었는데 아직도 그런 생각만 하고 있는 겁니까?”

 

어라? 언제 또 시작했지?

주변을 둘러보니 용사는 언제 일어났는지 키르갤의 보살핌에 따라 음식을 먹고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춤을 추는 사람들은 없었다. 아직까지 연회라고 해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언제 풀릴지 모르는 대결계 속에서도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대가 이곳에 포위한 마계공작을 처치한 자인가?”

 

제가 아니라 용사가 했습니다. 그리고 처치한 것이 아니라 도망갔으니, 물러났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네요. 그리고 저는 단순히 백업만...”

 

호오? 의외로 겸손할 줄 아는 자로군. 아니면 거짓을 고하는 것이 특기인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대격변 이후의 류하 씨였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냐고 물어본다면 붉은 적색을 하염없이 장식해놓은 금색의 용. 하란국 특유의 수려하고 단아한 외모에서도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위엄. 그녀가 용사가 아닌 나에게 직접 찾아와 이런 말을 한 걸로 보아. 현령이라는 남자가 사실대로 상황을 말한 것이 틀림 없었다.

 

거짓을 고하는 게 특기라고 한들, 저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청색으로 매끄러운 곡선을 지닌 형물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술잔을 나에게 주며 따르는 동안 입을 열기를...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있지. 그대는 그 책임을 전부 놓고 싶어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건가?”

 

아뇨. 그건 아니고, 좀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어서요. 그보다 이런 대사를 나누는 건 용사의 동료인 제가 아니라 용사에게...”

 

“‘가 보기에는 그대야 말로 이 시대를 구원해줄 자로 보이는구나.”

 

격변 이전에도 류하 씨는 자신을 칭할 때 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곳은 별반 다를 것이 없구나. 별반 다르지 않아서 쉽게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지금 하란국의 미래를 들먹여서 이곳에서 당장 모두 철수 시켜야 하는 내 입장이, 앞으로 내뱉을 말에 대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냥 막아내고 전선을 유지시킨다는 것도 괜찮긴 하지만, 칸포리우스 제국까지 밀려나지 않으면 인간들은 단합이 되지 않는다.

 

저는 시대를 구원할 사람이 아닙니다. 솔직히 저는 이 시대가 망하든 말든 상관이 없어요.”

 

호위로 보이던 여성이 내 목에 창을 겨눴다.

 

지금 뭐라 했소!”

 

사실 내가 방금 전에 말한 건 실수가 있었다. 안 그래도 마왕군의 침공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데, 시대가 망하든 말든 상관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느 누구라도 화가 나기 마련이다. 지금 당장 멸망할 수 있는 와중에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들었으니...

 

실례. 이 시대가 망하든 말든 상관 없다는 의미는, 하란국이 멸망해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라, 마왕군이 어딜 점령하든 인간이 단합해서 마왕군을 몰아내든, 저는 저대로 조용히 살아가 평화롭게 지내면 그만이란 소리였습니다.”

 

마왕군을 몰아내야 평화가 찾아온다. 단순한 이치도 도달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성녀라고 칭할 수 있소?”

 

미안하게도 저는 성녀가 아니라 잡화점 주인입니다. 누가 그런 보고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향후 저를 성녀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만...”

 

잔뜩 살기를 받아도 나는 꿋꿋하게 류하 씨가 따라준 술을 단숨에 들이켰...

 

푸후우욱! 으엑! 너무 쓰잖아!”

 

들이켰다가 내 혀가 다 날아가는 줄 알았다. 쓴맛이 뇌를 거쳐 온 신경에 강타를 했을 때, 류하 씨가 잠깐 호리병 안쪽을 보더니...

 

. 미안하군. 아무래도 여가 잘못 들고 온 모양이다. 귀빈용으로 줄 술이 아니라 여가 자주 마시던 소주를 줘버렸노라.”

 

알코올이 내 몸을 아직도 휘젓는 것과 동시에 이 몸이 아무래도 술에 약하다는 걸 인지시키듯, 몸이 정밀하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도수 높은 걸 주면 어쩌자는 거냐!

 

미안하군. 그런데 이곳에 온 목적이 뭐지?”

 

목적? 대체 그걸 왜 묻는...

 

. 그렇군. 설마 그 안에 약물을 탄 거야? 자백제라던가 그런 비스무리한 거? 그래서 이 술의 맛이 더 쓴 거였구나.”

 

연회는 진행중이고 내 이야기는 음악소리에 묻혔다. 다만, 내 주변에 있던 류하 씨나 측근들은 나의 혼잣말을 정확히 들어버렸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애석하게도 저는 약물에 대해 영향을 받지 않는 몸이라서요. 알코올은 잘 모르겠지만 머지않아 빠르게 분해되겠죠. 그건 그렇고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하지, 왜 이런 쓸 때 없는 짓을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여기에 온 목적은 단 한가지...”

 

모두가 내 말을 귀담아 들었다. 언제 어디서든 내 입에서 폭탄발언이 나올 수 있는 그 긴장감.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 같은 상황에서...

 

그보다 안주 좀 주세요. 입안에 고기라도 넣어야 할 거 같은데...”

 

내 입은 안주를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류하 씨의 벙찐 얼굴과 주변 측근들은 전부 쓰러지듯 휘청거렸다.

 

““ 목적부터 말해!!!””

 

전원 소리치는 것보다 음악소리가 더 크기 때문에 묻혔지만, 그래도 주위 20M반경의 사람들에겐 시선이 집중될만한 목소리였다. 분노, 당혹감 등. 여러 감정이 버무려지는 공간에서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그나마 고기의 육즙과 향이 엉망이었던 입 안을 정화하고 있었다.

 

저는 여러분을 칸포리우스 제국으로 안전하게 보내드리려는 것과 이곳에서 최종방어선을 구축하여 마왕군의 세력을 밀어낼까에 대해 제안을 하러 온 것뿐입니다.”

 

내 말에 모든 분위기가 흔들렸다. 심지어 꿋꿋하게 내 말을 무시하던 음악마저 멈췄으니, 언제 얼마든지 배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같이 마왕군을 몰아내는데 칸포리우스에 의탁을 할 것이냐, 아니면 직접 방어선을 구축하여 몰아낼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받았으니 말이다.

 

최종방어선을 하란국으로 하겠다? 칸포리우스의 의탁하는 걸 최우선으로 삼았을 것 같아 보이는데, 어째서 이곳을 최종방어선으로 하겠다는 거지?”

 

당연히 내 옆에 있던 시나마저 둥그런 올빼미 눈으로 쳐다봤다.

아니, 올빼미의 눈은 원래부터 둥그런 눈이던가?

 

그저 대결계 안에서 자멸하고 있었다면 칸포리우스에 의탁을 하겠지만, 의외로 수도 전역을 덮는 대결계 안에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과, 보급을 지속적으로 받는 것이 아닌 생산을 하는 것에 있어서, 이곳을 최종방어선으로 만들고 지원을 받는 것으로 끝을 내려고 합니다. 그러면 칸포리우스에게 의탁하는 것보다 더 적은 요구가 들어올 것이고, 어떻게 보면 마왕군이 칸포리우스 제국을 침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아직까지 하란국이 버텨주기 때문이 아닙니까? 아우리스 여신에게 전달하는 것은 용사의 몫이지만, 적어도 1주일만 농성을 더 해주면 칸포리우스 제국에서도 하란국을 구원하기 위해 움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칸포리우스 제국은 탐욕에 물든 국가이거늘! 어떻게 확신할 수 있소!”

 

류하 씨 옆에 측근 중 창을 내 목에 들이밀었던 자가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의심하고 있는 눈초리와 분위기는 가시지 않는 모양. 불신 덩어리를 보는 눈은 편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넓은 이해심을 바탕으로 입을 열었다.

 

칸포리우스 제국에 용사일행이 설득을 하면 되는 일이기도 하고, 다른 차원의 여신이 나타나서 협력을 요구하면 됩니다. 제가 보기엔 두 번째 방안이 더 빠르겠네요. 전력을 분산하는 것보다 그래도...”

 

여가 보기에는 두 번째보단 첫 번째 방안이 더 빠르다고 보는데, 그대가 말한 방안이 더 빠르다는 이유를 알 수 있는가?”

 

나는 답했다.

 

제 어깨 위에 있는 존재가 다 해결할 거라서요.”

 

그렇게 시나는 한 번 더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

예정은 늘 바뀌기 마련...

 

블로그 이미지

FNL-Phantasm

카테고리

판타즘의 공간 (757)
글쓰기 관련 공지 (2)
취미로 글쓰는 중? (753)
즐거운 스트리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