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

 

 

 

저녁을 먹겠다는 나의 단결된 의지가 마왕 하나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리제로트는 계속해서 자고 있는데, 아무래도 자고 있는 척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일단 속아주는 척을 하면서 침실까지 데려갔지만, 세린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한숨의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

 

그래서, 저 암흑물질은 어디다 버릴 거야? 또 벽난로에 집어넣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들켰네.”

 

너 진짜...!”

 

세린은 지금 당장이라도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암흑물질과 이전 루니아 누나의 무지개 푸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으니,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보면 추억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재앙이었다. 트라우마라고도 불리기도 하고, 그걸 먹고 저승까지 다녀와보지 않았는가? 그러니 벽난로에 버리는 행위는 그만두고, 문을 열고 저 머나먼 곳으로 날려보냈다.

 

잡화점의 주인은 입맛이 까다롭구나.”

 

아니, 그러니까 저걸 먹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고. 지금 리제로트가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라니까.”

 

상세하게 보았을 때 혀끝에만 대고 기절했는지, 삼키지 않아 입안에 있는 독극물을 제거할 수 있었다. 내장까지 들어갔다면 모든 장기가 녹아 내리는 대참사가...

 

그러면 이제 하란국을 점령하러 가면 되는가?”

 

점령을 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피난이 우선이야. 바보같이 또 일이나 벌리지 말라고, 그랬다간 계약이고 부탁이고 없는 줄 알아.”

 

상당히 까칠해지지 않았는가?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부부 사이에 스킨십은 중요하다고...”

 

누가 부부야! 그 머리 열어서 화분이라도 심어줄까!”

 

아직까지 끈적한 감각만이 남아있는 양쪽 귀를 무의식적으로 쓸어 내렸다. 보통 저런 미남에게 스킨십은커녕 호감이 가득한 눈빛과 말만 걸어와도 다른 이들의 정신은 날아오르겠지만, 애석하게도 내 정신상태의 기본상태는 남자다. 오히려 이런 상태에서도 남자와 여자 중에 어느 쪽을 더 선호하냐고 물어보면 여자라고 대답한다.

 

하란국의 주민들을 대피시킨다? 그건 무슨 의도라도 있는 건가?”

 

마왕군이 가장 점령하기 어려운 칸포리우스 제국에 다 집어넣을 거야. 그리고 거기서 최종방어선을 구축하고 용사와 함께 마왕군을 기적적으로 밀어낸다.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리저리 대치를 하고만 있다가 휴전을 선언하고, 그 사이에 상호간의 오해라던가 정복의지가 없다는 걸 알려주면, 종전까지 갈 수 있는 형태가 만들어지지. 마왕이기에 꼭 대륙을 정복할 이유도 없고, 마족이라고 해서 꼭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면서 살아갈 종족이 아냐. 오히려 전쟁이라는 것을 통해 상호간의 성장을 확인하고, 그걸 토대로 발전하면서 살아가는 게 중요한 거지.”

 

상호간의 성장이라...확실히 인간계를 정벌하고 나서 남아있는 게 있는가에 대하여 고뇌한 적이 있노라. 짐의 머리로도 그 어떤 결론도 도출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전쟁을 통한 성장을 가장하려면 지금까지 마계공작들을 설득해야만 한다. 하지만, 마계공작들을 설득하기엔 그들이 반란이라도 하면 짐은 꼼짝없이 숙청을 당하겠지.”

 

지도자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로 착각하고 멋대로 마왕을 끌어내리기 위한 움직임을 펼칠 것이다. 마계 12공작을 홀로 상대하기엔 그 힘은 너무 막대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마왕도 살고 인간계와 서로 공존하기 위해선 내가 용사 일행과 함께 마계공작들을 전부 처리하거나, 설득이라는 걸 시켜야겠지만...

 

그런 일은 없어. 용사 일행과 다 죽을 테니 말이야.”

 

그러면 짐의 간부들이 다 잘려나가는 셈이로군? 그러면 짐은 어찌되는 것인가?”

 

마왕의 붉은 눈에는 분노나 적대가 서려있지 않았다.

 

그쪽은 내 사역마나 되는 거야. 어차피 마왕이라는 거 따분했잖아?”

 

오히려 큭큭하고 웃는 마왕은 웃음기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대가 봐도 역시 짐은 따분하다고 보인 것인가? 애석하게도 그 말이 너무 당연하여 웃음 이외엔 다른 건 나오지 않는구나. 아직까지 머나먼 생에 따분함만 있는 줄 알았더니, 역시 끝까지 살아남아봐야 아는 것이구나. 다만, 의문이 있다면 어찌하여 짐이 그대의 사역마가 되야 하는가?”

 

싫으면 말고.”

 

굳이 사역마로 삼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히려 사역마로 다시 삼았다간 시나와 세린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더 귀찮아질 뿐. 그나저나 시나는 어디에 있길래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지?

 

여기에 하얀 올빼미는 못 봤어?”

 

. 그 비둘기 말인가?”

 

너도 비둘기라고 부르냐?

 

,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입니다.”

 

주방 쪽 어디선가 미약하게 소리가 울렸다. 주방에는 폭발로 인해 엉망이었을 텐데, 터져버린 밀가루 속에서 올빼미 머리가 쑥하고 튀어 올랐다. 추측하는 것으로 보아 마왕의 암흑물질을 시식하다가, 시나마저 기절하고 정신이 메두사 폭포까지 날아갔는데, 비둘기 소리를 듣자마자 올빼미라며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아무리 기절을 하든 죽을 위기에 처했어도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임을 강조하기 위해 살아나는 건가? 불사조도 그렇게 못살아오겠다.

 

마스터. 죄송합니다. 저 간사한 마왕의 생각을 미처 읽지 못하고 독극물을 먹는 바람에...”

 

너도 예전에 많이 당했잖아. 왜 그런걸 아직까지 먹고 탈나는 거야?”

 

하지만, 이것을 먹게 되면 마스터가 저를 좋아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암흑물질과 무지개 푸드 때문에 고생했을 텐데, 또 저런 말에 넘어가서 먹고 기절해있다니. 그래도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걸까. 내 어깨까지 날아서 온 소녀는...잠깐? ?!

 

-콰앙!

 

마스터는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습니다. 마왕. 그런 모습으로 마스터를 현혹한다고 한들, 마스터는 결국 남자이기 때문에 저와 같은 여성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가? 확실히 남자로 살아가다가 여자로 되는 저주에 걸린 자들도 많이 보았노라. 다만, 짐이 그 자들을 겁...아니, 교육을 하며 알아낸 것은, 한번 적응을 한 몸으로 인해 결국 여성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어딜 주든 뭘 적응시키든 둘 다 입 다물어!”

 

오늘도 제발 정상적인 15세 이상 관람작이 되게 해주세요...

아니, 내가 누구에게 부탁을 하는 거야?

 

시나. 일단 내려와. 일단 너도 날 도와서 하란국을 점령하는데 도와줘야지.”

 

안 됩니다. 저와 같이 목욕한다고 약속해주시면 내려오겠습니다.”

 

제기랄...평생 올라가있던가 그럼.’라는 말을 할 수 없으니, 목 바로 밑까지 올라온 단어들을 꾸역꾸역 삼켰다.

 

알았으니까 내려와.”

 

짐은?”

 

네가 왜 같이 들어가! 그 남성체로 같이 들어갈 생각이냐! 네오 제트 싸이클론 암스트롱 포를 자랑하고 싶은 거냐고!”

 

아무리 비정상적인 생각을 지녔어도 저건 아니지. 윤리적으로도 그렇고 삼진 아웃밖에 되지 않는다.

 

괜찮다. 짐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쪽이 신경 쓰여!”

 

그럴 때는 참을 인을 3번 외우면 된다. 참을 인 3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지.”

 

그거 300번을 해도 네가 살해당하는 건 면하지 못해!”

 

그 때는 300하고도 1번을 더 하면 된다.”

 

너 그냥 같이 들어가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잖아!”

 

조만간 저 마왕도 같이 날려버릴 생각을 좀 해보자. 아니 조만간이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죽어어엇!”

 

-파아아앙!

 

매번 잡화점의 벽이 무너질 때마다 눈초리를 주는 세린이 옆에 있기에, 식은땀이 마구 흘렀어도 나는 해야 할 도리를 했다.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의 할 도리를 다 했다면, 실패를 해도 떳떳한 법. 그러니 나는 스스로에게 떳떳해지기로 하자.

 

그러면 짐이 여성체로 다시 되돌아가면 같이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어느 사이에 여성체...라기보단, 어린 소녀가 된 마왕은 의기양양한 웃음과 함께, 작은 가슴을 활짝 내밀며 당당한 웃음을 선보였다. 그보다 저 모습은 내가 예전에 레프리시아와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잖아? 나에게 은팔찌와 전자발찌를 선물할 생각인가? 현실로도 받지 않고 마음으로도 받지 않겠다.

 

왜 굳이 내가 꼭 목욕을 같이한다는 전제로 이야기가 되고 있는지 설명해줄래?”

 

그야 저 비둘기...”

 

올빼미입니다.”

 

아무튼 같은 소녀의 외형이면 그대가 거부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외형은 둘째치고 그 생각이 이미 거부감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어.

곧 우주까지 채워지겠지.

 

지금은 피곤하니까 좀 놔둬. 게다가 잡화점을 운영해야 할 시간이니까, 목욕은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제발 좀 떨어지라고!”

 

아직까지 엉겅퀴마냥 붙으려는 시나와 마왕을 떨쳐냈다. 다만, 잡화점 창가에 있는 흔들의자만큼은 양보해줄 수 없는 강박관념에 몸을 맡겨, 흔들의자에 앉아 언제 만들어졌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허브티를 찻잔에 따랐다.

 

앞으로의 행동과 계획.

일단 하란국은 수도를 내주고 후퇴를 해서 칸포리우스 제국에 의탁하게 만들면 되지만, 그때는 정말 국가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전후처리를 한다면 꽤 복잡하게 흘러가리라 본다. 당연히 그 전후처리 과정에는 내가 끼어들 이유도 없지만, 기왕 평화가 찾아온다면 국가간의 갈등을 남겨서는 안 된다.

 

갈등을 남겼다간 하란국에선 내 제안으로 인해 그리 되었으니, 나에게 책임을 물고 책임은 곧 평화와 평온이 깨져나간다는 뜻이니까, 귀찮은 일의 시작과 더불어 파멸의 길을 걷는다고 보면 된다.

 

철저하게 칸포리우스 또한 하란국에게 빛을 지어야만 되...는데?”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더니 들푸른 초원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니, 잠깐만? 이 초원은 설마?

 

-메에에~

 

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상황.

그리고 양들이 울타리를 하나씩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는 세계를 갈아엎어도 나오는 공간이냐?”

 

하긴, 이건 다른 신들이 만들었다는 기이한 공간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6번째 양은 어디 있는 거야?”

 

5마리까지 보이고 남은 한 마리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혹시 이곳도 개편되어 5마리밖에 없는 건가? 그렇다면 정말 다행...

 

-메에에~

 

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을 산산조각 내고, 이마부분에 6이라고 적혀있는 양이 저 멀리서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몸통 쪽에 뭔가 짊어지고 있는데 홀스터가 양쪽에...아니, 잠깐만? 왜 석양이 지려고 하고 있는 건데!

 

한동안 울타리를 바라보던 6번째 양은 건조한 서부에서나 볼 수 있는 건초더미가 자신의 앞을 굴러가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의 적은 넘을 수 없는 울타리이며, 그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성장을 할 수 있기에,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던 울타리의 악몽에서도 졸업을 할 때가...아니! 잠깐만! 나에게 이런 독백을 하게 만들지 마!

 

-메에에!

 

질풍같이 쇄도하는 6번째 양. 그리고 하늘을 나는 듯한 도약을 하며 울타리를 뛰어넘었...

 

-타아앙!

 

?”

 

자연스럽게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6번째 양은 뛰어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추락하였고, 장의사모자를 쓴 양이 6번째 양을 끌고 저 멀리 사라졌다. 내 시선이 울타리로 향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총을 자신 뒷 편에 홀스터로 슬쩍 넣었다. 이윽고 울타리는 자신의 본연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만족감과 함께...

 

대체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하는 거야아아아아!”

 

소리지르며 깨어난 나와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마왕과 시나.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고 다시 창가를 바라보며, 무안한 감정이 밖으로 빠져 나오려는 것을 다 식어버린 허브티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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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양

 

611

 

 

 

보통 전개 중에 생각해보자면 마왕의 간부를 무찌르고 나서 그 간부가 사실 나는 마왕 간부 중 최약체다! 나를 쓰러뜨려도 이하생략-” 같은 분위기로 나오는 적이 많을 터. 그러나, 이곳 마왕의 간부라고 할 수 있는 마계 12공작 중 탐욕의 공작은 나와 상성이 맞지 않아 빠르게 재기불능 상태가 되어버린 경우다. 절대적으로 약하거나 강한 존재는 없고,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강자에게 삼켜지는 것이 마계의 생활. 마왕 레프리시아의 통치가 내가 바라는 방향과 정 반대로 나가거나, 조금이라도 내 방향과 맞지 않으면 결국 약육강식이란 말은 마계 언제 어디서나 있다. 심지어 가까운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저기, 성녀님? 마지막에는 광고가 살며시 들어간 거 같은데요?”

 

착한 용사는 신경 끄도록. 그보다 너도 이제 내 독백을 읽고 태클을 거는 거야?”

 

왜 나는 행복할 수가 없지?

내 주변사람들은 독백을 읽는 괴물들만 존재하는 걸까?

 

하란국의 대다수가 점령을 당해도 한 곳만큼은 강한 보호막이 막고 있다. 절대적인 불가침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건 정확한 단어선정이 아니며, 가장 확실한 단어선정이라면 자신이 허락한 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장소다.

 

먼저 들어갔던 침묵의 궁수..., 내가 지어낸 이명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 남자를 따라가 도착한 곳에 인자해 보이는 남자신하가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란의 궁궐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낯선이여. 나는...”

 

, 잠깐만요.”

 

멈춰.

훈민정음이라도 만들 생각이냐?

 

마왕을 과학승리로 이길법한 대사의 일부를 들은 나는, 신하인지 황제인지 분간할 것도 없이 말을 멈춰 세웠다.

 

말씀해 보시오.”

 

조만간 그쪽이 집현전이라도 만들기 전에 묻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곳 궁궐이 이렇게 넓었나요?”

 

내가 다른 것에 대해 태클을 걸기 전에 스스로 화제를 전환했다.

 

전쟁이라도 난다면 수도에 있는 민간인들은 보호해야 하오. 그러니 궁궐의 크기와 맞먹는 보호막이 존재하는 것이오.”

 

차라리 하란국을 가지 못했다면 원래 이런 크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호막은 하란국의 궁궐뿐만이 아니라 시장이라고 생각했던 장소까지 다 덮고 있었다. 무분별하게 보호막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생활을 하고 힘을 길러서 방어할 능력까지 갖추고 있던 것.

 

그보다 용사님들은 탐욕의 공작을 타개하고 이곳에 당도했다고 들었네만?”

 

그거야 전부 성ㄴ...”

 

전부 용사가 잘 해냈으니 다행이죠.”

 

용사가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말을 가로막아 용사의 공으로 돌렸다. 내 능력의 일부를 아는 것만으로도 계획이 비틀어지기 때문에, “? 하지만 성녀님?”이라고 용사가 말하기 전에, 용사의 머리를 깊게 눌러 쓰다듬기 시작했다.

 

키르갤의 시선이 따갑긴 하지만 입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계획이라면 이곳에 있는 모든 민간인과 여제까지 모두 탈출시킨 뒤, 마왕이 이곳을 점령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약속을 잡고 움직이는 거니까 밑밥을 깔기 시작해야겠지. 그러기 위해선 여제와 만나야만 했다.

 

그렇군요. 이거 참으로 경사가 아닐 수 없소이다. 저희 폐하께서 작게나마 연회를 준비하셨으니 부디 참석을 바라오.”

 

연회! !”

 

키르갤이 반응을 했다.

 

그리고 남자!”

 

아무래도 다른 목적까지 끼어있었나 보다.

분명 용사바라기였을 텐데.

 

연회! !”

 

저기 있던 기사도 반응을 했다. 마지막에는 여자라고 외칠 생각인가?

 

그리고 중장비!”

 

아무래도 자신의 장비를 새로 맞출 생각에 들떠...

 

그거 연회와 아무런 상관 없잖아!!!”

 

결국 기사에게 버럭! 하고 소리를 쳐버렸다. 이상한 곳에 틀어진 기사와 남자를 왜 만나고 싶어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여 마법사. 대체, 이 녀석은 언제쯤 말을 할지 알 수 없는 궁수. 그리고 내 무릎 위에서 자고 있는 어린 용사까지 5명이서 커다란 방 하나에 모여 앉아있었다.

 

저기. 키르갤. 용사에게 무릎배게는 네가 해야 하지 않아?”

 

아무래도 용사님은 지금은성녀를 잘 따르는 모양이야. 게다가 하나부터 열까지 너에게 눈치를 줘봤자 소용없다는 것도 알았고.”

 

...그래?”

 

그러니까, 이 치욕은 계속해서 모아놨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한방을...”

 

! 음침한 목소리로 해도 다 들리거든!”

 

결국 마지막에는 저 녀석 때문에 내가 팔려나가는 건가?

차라리 네가 흑막을 해라.

 

슬슬 잡화점으로 돌아가고 싶다. 너무 지쳤어.”

 

너무 지쳤다는 건 체력적으로 고갈된 것이 아니라 심신이 지쳐버렸다. 이 시간만 되면 오지도 않는 손님을 기다리면서 책이나 읽고 있을 터인데, 오랜만에 여행을 떠나서 그런지 연회고 뭐고 빨리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여행은 사람을 지치게 만드네.”

 

여행은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는 게 아닙니까?”

 

기사가 내 한마디에 위와 같이 반문했다. 여행이라는 건, 식견도 넓어지고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는 요소가 맞지만 리스크도 매우 크다. 이상한 산적이나 그런 녀석들과 시비가 붙을 수도 있고, 취미가 안 좋은 귀족에게 괜히 잡혀 사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죽거나...

 

굳이 성장이라고 할 수 없어요, 사람은 목숨을 잃으면 모두 끝이니까. 조금이나마 경험을 쌓기 위해서 모든 걸 잃을 필요도 없잖아요? 여행을 하는 진정한 의미라면, 자신이 정하는 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뿐. 그 과정 속에서 성장을 하든 말든 결과는 여행이 끝난 이후에 나타나죠.”

 

그렇군요. 역시 성녀...아니, 카린님. 그런 넓은 혜안을 가지고 계시다니!”

 

감격하지 마시죠. 내 멋대로 말하는 거에 감격하지 말라고요. 너희들은 누군가 높은 사람이나 위대한 사람이 말한다고 해서 다 믿거나, 그걸 목숨처럼 여기고 다니지 마세요. 자신이 관철하고 싶은 신념이라는 건 없는 건가요?”

 

? 그야 있긴 하죠. 저는 마왕을 타도하기 전까지 성녀님을 지키는 것만을 일념으로 하면 됩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나지막하게 안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자신만의 규칙이나 그런 거라도 있어야 성장의 발판이 되기도 할 텐데. 굳이 나를 지키겠다는 그 일념 하나만으로 여행을 다니겠다니. 그렇게 되면 쉽게 목숨을 버리는 걸 정당화 해버린다. 오직 사람은 살아 남아야 그 다음의 변수를 준비할 수 있기 마련.

 

이건 숙제에요. 자신만을 위해. 그리고 자신만이 이 험난 세상을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신념을 찾으세요. 목숨을 함부로 버리거나 그런 일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며, 누군가를 희생해서 다른 이들을 구하는 것이 아닌, 최우선으로 모두가 다같이 살아남는 행복한 결말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하면 좋을지. 그리고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정해놓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전 당신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기사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 저 멀리서 낮은 음성의 남자 목소리가 나왔다.

 

모두가 다 같이 살아남는 결말이라. 성녀는 진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내가 멋대로 이명을 지어놓은 침묵의 궁수가 드디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 진정으로 그리 말하는 겁니다. 모두가 살 수 있는 방안을 도모하는 것은 최우선으로 행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혼자서도 마왕의 간부를 잘도 날려버리던데? 그것은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강자이기 때문에, 우리를 지켜줄 여유라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뭐냐?

내가 그리모스를 날려버린 걸 본 건가? 아니, 어쩌면 저 궁수의 시력이 좋아 멀리서도 내 상황을 지켜볼 수 있으리라. 다만, 극도의 냉정을 지키고 있는 저 남자가 저렇게 기분 나쁘게 말할 정도라...

 

당신이 비아냥거릴 정도로 제 말이 불쾌했다면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드리죠. 다만, 제가 말하는 최우선의 선택사항에서는 힘의 차이가 있고 없고를 떠난 이야기입니다.”

 

힘이 없으면 그런 일도 행하기 불가능에 가깝다. 아닌가?”

 

잠깐만, 어째서 그게 말싸움으로 번진 거야? 동료잖아?”

 

키르갤이 나타나서 중재를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반대편의 남자 측에서 나를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아니. 나는 아직까지 신용할 수 없다. 성녀인지 잡화점주인인지 그리고 아까 그 돼지가 말했던 마왕의 신부후보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힘을 감추고 전력으로 싸우고 있지 않아.”

 

그건 부작용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나도 마법을 쓸 때 좀 생각을 고려해서 쓰잖아?”

 

아냐. 달라. 저 가녀린 성녀 안에는 또 다른 초월체가 잠들어있다. 오히려 마왕보다 더 악질로 될 수 있다면 이상하지 않지.”

 

그렇군. 그 짧은 시간의 일을 놓치지 않고 본거로구나. 순간 집중력만큼은 꽤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확실히 2초간 남자로 변했을 때 누군가에게는 그 짧은 시간이, 무언가의 허상처럼 지나가기도 했고, 백일몽처럼 빠르게 사라지는 환상에 불과했지만, 저 궁수는 현실을 직시하고 나를 먼저 의심하기 시작했다.

 

현령! 너 적당히 하지 않으면...!”

 

아니. 키르갤. 그 자의 말이 맞아요. 확실하게 말하자면 이건 본래 제 모습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다 같이 봤잖아요? 알 수 없는 흑발의 남자. 애석하게도 그 모습은 이 세상을 날려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익숙하지도 않은 여성의 모습으로 있는 겁니다.”

 

체념을 하듯 모든 걸 다 털어놔보자. 그래도 일단 말을 꺼내선 안 될 것이, 이 상황이 어쩌다가 세계가 2번씩이나 뒤집어졌는지에 대해, 그리고 잡화점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그거 말고는 현령이라는 궁수가 알고 싶어하는 것도 이야기를 해줘야겠지.

 

그러면...그 여장이 잘 어울릴 거 같은 중성적인 외모의 남성이 너란 말이야?!”

 

어째서 여장이 잘 어울릴 것 같은이란 바보 같은 수식어까지 붙여가면서 강조를 하는 겁니까아!”

 

태클을 안 걸려고 해도 결국 원인제공은 다 저쪽에서 해주잖아! 이러니까 내가 빠르게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는 거지!

 

그건 그렇다고 해도, 여자로 된지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야? 위화감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이전에도 사고 때문에 된 적도 있고, 그렇다고 해서 이런 몸이 가장 편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그나저나...”

 

그보다 이 용사는 주위에서 그렇게 소란을 피우고 소리치는데도 불구하고, 편안하게 잘 자고 있는 건가? 어지간히 무릎배게가 좋은 모양이다.

 

키르갤에게 용사를 맡기고 나서 잡화점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사키엘의 문을 통해 다시 귀환한 나는 3층에서 2, 2층에서 다시 1층으로 내려오고 있을 무렵. 연회는 대략적으로 용사그룹에게 맡기고 이곳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거기까지가 나의 예정.

그러나...

 

. 잡화점의 주인인가. 어서 오거라. 이 집안에 있는 계집에게 물어보니 딱 이정도 시간에 온다고 하여 맞춰놨노라.”

 

연보라색 머리카락 위에는 고양이귀가 솟아올라있고,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분홍색 앞치마를 두르고, 한 손에는 국자를 들며 나를 반기는 것이었다. 지금 상황도 심란해 죽겠는데, 마왕이 남성체로 변한 탓이라 끝나지 않는 괴리감으로 인해, 내 정신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 저 우주 어딘가로 박혀버렸다.

 

, 잠깐만?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머지않아 박혀있던 정신이 광속을 뛰어넘어 이곳에 도달했으니, 내가 가진 의문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고, 내 앞에 있는 마왕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야 당연히 짐이 그대를 위한 요리를 했으니 말이다. 애석하게도 짐은 맛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기 테이블에 앉아있는 계집에게 맛을 좀 봐달라고 했다.”

 

테이블에 시선이 찾아가보니 입에 보라색거품을 물고 의식이 없는 흰자만 드러낸 체, 다잉메시지로 추정되는 글귀. 아무래도 내가 지금 살해현장을 직접 목격한 거 같은데.

 

뭔지 예상은 가지만 뭘 요리했는지 일단 알려줄 수 있어?”

 

그야 당연히 암흑물질이다.”

 

이 빌어먹을 암흑물질은 세계가 갈아 엎어져도 꼭 있는 거냐!”

 

그보다 리제로트.

용케 죽지 않았구나.

 

. 역시 마계식단은 인간에게는 좀 무리인가?”

 

그거 마계에서도 무리거든!”

 

폭식의 공작은 잘 먹었노라.”

 

폭식의 공작잘 먹었겠지!”

 

들이댈 것을 들이대야지. 지금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잡화점에 돌아가니까 왠 마왕이 요리를 하고 있다고? 날카로운 눈매와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분홍색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고 있다고 생각해봐라. 그건 요리가 아니라 그냥 고문을 준비하는 무언가가 되겠지.

 

아니면, 목욕이라도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나..?”

 

-파아아아앙! 파바방!

 

마왕의 자가 사라질 때까지 마나를 폭파시켰다.

이성의 끈이 어느 정도 매듭을 지으며 다시 이어졌을 땐, 다행히 무효화의 반지로 인해 아무런 영향도 없는 리제로트는 그 자리에 기절해있었고, 주방이 전쟁터의 폐허로 돌변해있을 무렵.

 

. 아무래도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분명 신부가 집에 들어오면 이렇게 하라고 색욕의 공작이 말했노라. 짐이야 많이 연습하고 보여준 것이라 자신이 있었으나...”

 

대체 왜 그런 녀석에게 그런 쓸 때 없는 기교를 배워오냐고오!”

 

상처는커녕 옷에 흠집조차 나지 않은 마왕이 내 뒤에서 살며시 끌어당겼다.

 

그건 그렇고 탐욕의 공작을 날려버린 건 보고는 잘 들었노라. 역시 짐의 신부이지 않는가? 그 정도의 힘을 숨겨놓고 아무런 편에 들지 않는다라...확실히, 그 힘은 이곳 세계와는 이질적인 것이로다.”

 

마왕이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귓가에 간질이는 목소리가 애원하듯 머리 속을 파고들었다.

 

잡화점의 주인. 부탁이 있노라.”

 

또 쓸 때 없이 신부네 뭐네 하면 마왕성을 갈아 엎을 거야?”

 

그건 아니고, 잡화점에 있는 물건을 멋대로 봐서 미안하다만, 이런 사진을 보고야 말았노라.”

 

사진이라면 다 사라진 게 아닌가? 아니면 세린이 멋대로 백업한 사진이 있나?

 

이전의 차원은 아무래도 짐이 제대로 된 구원을 받았겠지. 그렇기에 이런 많은 자들과 같이 서 있는 게 아닌가?”

 

이전에 잡화점 멤버가 한 가득 있을 무렵. 대체 언제 찍어놓은 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찍혀있는 가족사진과 같은 것이었다. 가운데는 나를 시작으로, 왼편에는 레시아, 마리아, 루시피나가 서 있었고, 오른쪽에는 람파시나, 루나, 루니아 누나가 서있었다.

 

물론 나중에 루비아나 아이니스 등. 다른 사람도 달려와서 사진을 찍었다만 그 와중에 사진기가 고장이 나버리는 바람에 추억으로만 간직한 사진은 저것뿐이었다.

 

저기 귀여운 남자가 그대겠지? 여장이 참으로 잘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구나.”

 

그 빌어먹을 여장이 참으로 잘 어울릴 것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여놓는다고 해서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거든!”

 

다른 방향으로 주제가 엇나가기 전에 마왕은 다시 본래 목적을 말했다.

 

아무튼 짐의 부탁은 이전에 짐을 어찌 불렀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불러줄 수 없겠는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짐은 마왕이니라. 그대를 만나든 만나지 않았든, 짐이 마왕이라는 것은 다르지 않으며, 이미 저질러놓은 일은 마무리하고 평화를 만끽할지. 세상을 지배할지 고민하기 전에, 그대가 짐을 어떻게 불렀는지 알고 싶노라.”

 

한동안 떨어지지 않은 말과 이걸 꼭 말해야만 하는 가에 대해 갈등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

 

으갹! 뭐 하는 거야!”

 

귀에 느껴지는 위화감이 내 온몸에 내달렸다. 이놈의 마왕은 대체 뭐하고 있는 가에 대한 의문이 먼저 더 앞서고 있을 무렵. 힘껏 혼까지 빨아드릴 듯한 소리가 나더니, 끈적거리는 무언가가 내 귀에서 늘어졌다.

 

그야 귀를 핥고 있노라.”

 

내가 묻는 건 대체 그 행위를 왜 하느냐에 대해 묻고 있는 거야!”

 

그야. 그대가 짐을 뭐라고 부르는지에 대해 알기 전까지 계속 집행할 예정이니라.”

 

이게 무슨 고문도 아니고...우아앗! 그만! 그만! 레시아! 그만! 그만하라고!”

 

이번엔 다른 귀에 경보음이 들림과 동시에 머리가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핥는 듯한 혀 끝으로부터, 내 다른 쪽 귀가 뇌로부터 버틸 수가 없다는 경고를 계속해서 보내왔고, 그에 따라 다급하게 외쳐본 이름은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는 외침이었다.

 

흐음? 레시아라. 그렇군. 듣기 좋은 이름이노라. 그런데 우선 잡화점의 주인의 반응이 재미있으니 더 해보도록 하겠다.”

 

잠깐! 그만하겠다는 약속은 어디에...!”

 

맞다.

이 마왕은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집행을 하겠다고 했지, 부른 후에 이걸 멈추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교활한 악마녀석!”

 

크큭. , 어찌 불러도 좋다. 그나저나 이번엔 혀를 넣어도 되겠나? , 물론 귓속에 말이다.”

 

될 리가 있겠냐아아아!!!”

 

저녁 먹으러 갔다가 커다란 봉변을 당하기 전에, 마왕의 발등을 밟고 잡고 있는걸 풀면서, 지근거리 마나 캐논<Close Range Mana Cannon>으로 마왕을 날린 시간은 내가 소리를 지른 이후부터 약 2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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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로레로레로레로레로레로레로


 

610

 

 

 

뚱뚱하다고는 하나 민첩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나의 속도를 상회하는 몸놀림이 여러모로 나를 놀라게 했다. 매번 오호! 오호!”하며 쫓아오긴 하지만, 마계 12공작에 버금가는 위력을 선사했다. 검붉은 할버드가 눈을 어지럽히며 나에게 날아올 때마다, 정면으로 막아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 피하기 급급했다.

 

오호호! 그러고 보니! 저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군요. 저는 탐욕의 공작 그리모스라고 합니다! 오호호! 이제 저의 이름을 알았으니 투항하거나, 같이 밥을 먹으러 가시죠?”

 

잠깐만. 왜 뒤에 같이 밥 먹자고 꼬드기는 거냐? 너는 적과 아군에 구분할 것 없이 밥을 먹는 거냐? 탐욕보다는 폭식이 가장 어울릴 법한 대사잖아?”

 

시도 때도 없이 공방을 벌여가면서 이야기 하는 바보 같은 일을 여기서 하고 있지만, 적에게도 대뜸 싸우다 말고 오호호! 배가 고프니 잠깐 음식점에 들려서 뭐라도 먹고 싸우시죠!”라고 권유할 것만 같았다.

 

왜 싸우다 말고 밥 먹으러 가는지 모르겠지만...

 

오호호! 저는 탐욕의 낙인을 받은 자로서, 모든 욕망은 우선 선행하고 본다는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있습니다.”

 

멋쩍게 자신의 투구를 긁고는 다시 할버드로 나를 내리찍었다. 당연히 그 순간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오히려 히드라를 이용해 반격을 했지만, 공으로 착각할 정도로 빨리 바닥을 굴러 회피했다. 저런 중장비로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더 신기하지만...

 

[마계공작의 이름은 하는 모양이군.]

 

[그러게. 확실히 말하자면 좀 귀찮은 상대이긴 해.]

 

아군일 때 같이 친구하면 맛집 탐험도 하고 좋을 텐데, 적으로 만나니 변칙적인 요소가 많아 까다로울 뿐이다.

 

오호호! 그대의 실력은 이게 다가 아니란 건 태초부터 알고 있습니다. 슬슬 본 실력을 낼 때 아닙니까?”

 

내가 본 실력을 내면 너는 필히 죽거든?”

 

양손에 쥔 단검을 그대로 없앴다. 그 후 천천히 주먹을 풀며 나아갔고 빈틈인 줄 알았는지, 공기를 찢으며 날아드는 할버드의 날을 왼손으로 잡아챘다. 얼마나 강하게 휘둘렀는지 손으로 잡아도 미세하게 떨려오는 힘. 그러나, 나의 행동으로 인해 탐욕의 공작은 크게 당황했다.

 

오호호..., 이런 일이? , 어떻게 일어나는...푸학!”

 

마나가 한 가득 담은 주먹으로 통통한 배에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이전 기괴한 메이드 장이었던 쇼콜라에게 많이 맞았다고는 하나,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 면밀이 관찰한 건 사실이니. 3M나 되는 덩치가 순식간에 50M정도 멀어진 곳에서 흙먼지를 날린 체 사라졌다.

 

할버드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나. 마왕군의 척후병들은 사기가 완전히 꺾여버렸다.

 

, 성녀님...”

 

뭔가 기사가 괴물을 보는 마냥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안해.

성녀의 이미지를 박살내서 미안해...

그러니까 잡화점의 주인이라고 말할 때 좀 들었어야지!!!

 

하긴, 바퀴벌레를 무서워하고 가녀린...건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마왕군의 간부를 주먹으로 후려쳐서 사기를 깎아버리는 성녀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얼추 정리된 거 같네에?”

 

키르갤이 천천히 걸어 나와 내 옆에 섰다. 로브로 바람이 펄럭이지만 그 바람은 인위적으로 마나를 끌어 모아 생성한 모양이다.

 

성녀님! 괜찮으세요!”

 

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잘 모르는 용사는 마족의 피로 목욕을 한듯한 모습으로 해맑게 웃으며...아니! 잠깐만! 그렇게 웃지마! 스릴러의 한편을 보는 줄 알았잖아! 누가 보면 死번째는 너랑께?”하고 오는 거 같잖아!

 

그리고 나를 걱정했다면 웃으면서 달려오지 말라고!

 

오호호...! 아무래도 제가 방심한 듯하군요.”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탐욕의 공작의 목소리, 아무래도 형편없이 도망을 간 건 아닌 모양이다. 흙먼지가 인위적으로 거세게 걷히고 나서 보이는 건, 검붉은 색의 갑옷이 아닌, 황금색의 갑옷이 번뜩였다. 그 뒤로 이리저리 멋지게 휘두르는 황금색의 할버드.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2페이즈인가...”

 

항상 밀리기 시작하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기 위한 형태로 다듬기 마련. 나 또한 한번 쓰러지고 나서부터 본 실력을 내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생각해냈다. 아무래도 내 앞에 있는 상대 또한 비장의 수를 숨겨왔던 모양. 황금색이야 말로 탐욕의 공작이란 말이 잘 어울릴 정도였다. 당연히 탐욕이라는 것은 재산에 대한 욕망도 가지고 있으니까.

 

오호호! 지금의 저는 조금 더 강하답니다.”

 

자신만만하게 다가오는 탐욕의 군주. 아무래도 저 말은 허세가 아닌 모양이다.

 

-쉬이익! !

 

어느 순간 할버드를 휘둘렀다고 인지했는데, 정작 본능적으로 막은 내 팔에 직격하고 말았다.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버린 팔이 거대한 통증을 낳고 있는 동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할버드의 날이 깔끔한 소리와 함께 내 왼쪽 팔을 날려버렸다. 고통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인간의 방어기제가 나를 경직에서 구해준 모양. 다시 저 멀리 떨어지고 나서 상황을 지켜보았을 때. 모두가 나를 향해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물론 그 놈의 성녀 소리는 듣기 싫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3명이 전부 성녀에 관한 소리를 했으니 말이다.

 

대단하네. 강해.”

 

오호호! 항복하려면 지금입니다. 아무래도 마왕님은 팔다리를 자르는 걸 허락하신 모양이라서 말이죠.”

 

, 목숨만 붙어있으면 팔다리는 잘라도 상관 없겠지. 왜냐하면...”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이유라면, 애초에 내가 걸었던 마법사의 길이 시공간 술사의 길이었기 때문. 지금에서 시간역행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1시간 전의 신체로 다시 역행하기 시작하면서, 쏟아져 나갔던 피는 거꾸로 내 몸으로 들어가고, 잘려나갔던 왼팔이 순식간에 붙고 상처는 어느 사이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팔다리를 잘라도 이유가 없거든.”

 

탐욕의 공작은 겨우 기세를 잡았다 했더니 실망한 분위기가 무럭무럭 커지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팔다리를 자르던 말던 시간을 역행하면 결국 제자리. 아무리 자신의 재산이 많다고 한들, 그건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재산만큼 더욱 더 강해지는 탐욕의 공작이라...사실상 내가 없는 용사 그룹이라면 고전했을지도 몰랐겠지만, 지금은 운이 그리 좋지 않네. 나를 상대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저 재산에 비례해 강화를 한다고 해도, 정작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결국 쓸모 없는 거 아냐?”

 

도발을 하는 내 어조에도 크게 화를 내지 않고, 어느 정도 냉정한 목소리로 오호호.”라는 감탄사만 내뱉었다. 확실히 지금 탐욕의 공작으로선 날 이길 방도가 없진 하겠지. 정작 자신의 본 실력을 내겠다고 한들, 어처구니 없게도 비장의 카드가 막혀버린 거니까.

 

팔 하나 잘라간 건 어느 정도 강하다고 인정해줄게. 다만, 강하다는 편이지 날 위협하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 착각하지 말라고?”

 

뭡니까? 그 마지막에 애매모호한 츤데레 연기는?”

 

키르갤이 태클 걸어왔지만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오호호. 아무래도 마왕님께서 자신의 신부로 삼으면서까지 성녀를 데리고 가려는 이유가 있나 보군요.”

 

아니, 성녀가 아니라 잡화점의 주인이라니까? 나는 그런 거창한 사람이 아니야.”

 

어쩌면 마왕군으로부터 나를 성녀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잡화점 주인으로 인식시켜야 하는 세뇌작업이 필요한 모양이다. 어처구니 없게도 저게 나아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니 계속 밀어붙여보자.

 

본인의 비장의 카드인 막시멜로스의 재고가 먹히지 않은 이상, 이후 다른 마계공작에게 싸움을 양도해야겠군요. 오호호!”

 

도망할 셈인가? 근데 내가 안 놔둔다면?”

 

오호...크하악!”

 

우선 최대한 힘을 억누른다는 의미로 세린 몰래 본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머리가 짧아지고 짙은 청색의 머리카락이 아닌, 밤에 물든 짧은 흑발로 돌아와 있겠지. 오랜만에 넓은 시야와 순식간에 마나가 몸 안쪽으로 몰아붙이는 듯한 이 감각. 남자로 되돌아가면서 감회가 새롭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만, 개방을 하고 나서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찾아왔다만, 최대 4초도 되지 않겠지.

 

시공의 눈은 이미 개안 되어있다. 알았나? 그리모스. 그래도 너의 희망사항대로 일단 놔주기는 하지. 그렇지만...”

 

시간이 늘어지면서 프레임 단위로 쏟아져 내려오는 형상들. 그 중 그리모어의 3초 전으로 추정되는 형태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현상. 3초 이전에는 절대로 데미지를 받지 않은 자신이, 3초 전의 데미지를 받은 에너지가 이제서야 도달 되는 기괴한 형태. 맞았을 때 뼈가 부셔지는 과정이 있어야 하지만, 이미 3초 전에 끝나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형태였다.

 

그것도 알게 모르게...

 

팔 하나 잘라간 값은 해야 되지 않겠나? 이제서야 고통이 찾아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설마 멀쩡했던 뼈가 3초 전에 부러졌을 줄은...”

 

-파악! 파각!

 

쿠헉! 쿠악! 그만! 그마아안!”

 

또 어디 잘났다 듯이 오호호라고 외쳐보던가. ‘막시멜로스의 재고로 강화한 몸이 그렇기 유리조각 마냥 부러지고 있는 걸 보아하니, 우선 너와 나의 상성이 가장 나쁘다는 건 확실하게 알았겠지?”

 

3초 전의 형상이 그대로 본체에 대미지로 작용했지만, 아직까지 대미지는 대미지일 뿐 실제 형상으로 보면 멀쩡한 상태다. 그런고로 내 앞에 있는 적에게 최악의 선물을 주기로 했다.

 

갱신<Update>”

 

-파뜨득! 파지직! 푸드득! 푸득!

 

거구의 내부에는 뼈는 물론이고 내장까지 손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 몸에서 터져나오는 고통의 오케스트라는 그리모스의 반주에 맞춰 천천히 붕괴하고 있었고, 그 과정은 실제시간으로 2초에 걸쳐서 일어난 일밖에 되지 않았다.

 

어처구니 없게도 2초만에 다시 여성의 모습을 돌아와 날뛰는 힘을 억누르고 있었다. 히드라가 자신이 직접 먹이를 집어 삼켜도 되냐는 물음에 나는 하지 말라고 답했다.

 

저들에게 있어 공포와 경고가 필요하다.

마계 12공작 중에 최약체인지 뭔지 하는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나마 살아있던 척후병들이 그리모스의 거대한 신체를 질질 끌고 바쁘게 도망갔다. 아프다는 말도 하지 못하는 걸로 봐선 이미 기절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우두머리를 공략했다면 저들은 우리가 4명이든 2명이든 더 이상 공격하지 않겠지.”

 

다시 짙은 청색의 긴 머리카락과 낮아진 시야를 확인하니, 한숨을 곱게 포장해서 택배로 붙이기 위해 우표를 찾아야 하는 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 방금 전에 무슨 일이...”

 

내 눈앞에 있는 키르갤의 목소리를 보아, 자신과의 레벨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나 보다.

 

내 본래의 모습와 더불어 실질적으로 힘을 개방하지 않은 이유.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잡화점에 틀어박혀서 그 어떤 일에도 간섭하고 싶지 행동을 선택한 것. 너희들이 보았을 때는 단 2초만에 일어난 일이겠지만, 시공간술사의 길을 걷는 자라면 2초 같은 시간은 너무 느려도 한참 느린 시간이란 것도 알거든.”

 

인과율로 인해 시공간마법은 상당히 위험한 마법이지만, 마왕군의 간부를 쓰러뜨리려고 사용했다고 하면, 천계에서도 어느 정도 눈을 감아줄 것이다.

 

싫으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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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자로 되돌아가면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최강의 먼치킨이...지만 결국 태클 거는 건 똑같을 듯한...

 

609

 

 

 

하란국의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수도 외에 전역이 마왕군의 깃발로 가득 매워져 있고,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면, 아직까지 저항하고 있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으나, 그 힘이 미약하여 타파할 수 있는 처지도 안 된다. 급기야 마왕이 직접 나서서 제국을 점령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애석하게도 마계 12공작의 힘을 내가 너무 물로 본 탓도 있다.

 

12공작 중 1명의 공작이 자신만의 군단을 이끌고 하란국의 대부분을 삼켜버린 것. 아무래도 내가 단독으로 마계에 찾아갔을 무렵 나를 내려다 봤던 12명의 공작 중 하나라고 하지만, 그 공작의 힘도 잘 모르겠거니와 내가 알던 마계공작들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이웃집 아저씨 목소리가 나던 보라색 슬라임 또한 보이지 않고, 하나를 행동하는 데 수십 초가 걸리는 나무늘보 또한 보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상세하게 알아본 것은 나를 장난감마냥 취급하겠다고 자신에게 달라던 그 빌어먹을 작자뿐. 상상이상의 취향인지 유희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쓰레기 같은 녀석은 반드시 죽여야 앞으로의 평화가 찾아오겠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이 상황에서 게릴라 부대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게다가...

 

[마왕과 이곳을 점령하겠다고 약속한 것 어찌할 건가? 잡화점의 주인.]

 

히드라는 남자목소리와 여자목소리를 죄다 믹서기마냥 갈아 넣은 듯한 음성으로, 내 머리에 직접 퍼트렸다. 꽤 골치 아픈 상황이라면 마왕과의 약속도 어느 정도 완수해야, 나의 위치가 용사편도 아니고 마왕편도 아닌 중립에 가까운 위치로 옮겨지니까. 고작 바퀴벌레 하나 무섭다는 성녀에게 기대고 있는 용사 그룹도 신기하지만...

 

[그건 시나가 잘 해줄 거야. 그러니 내가 언급한 시나리오에 맞춰서 행동하면 결과는 괜찮아.]

 

괜찮기 하지만...

들켰을 때의 뒷감당을 어찌 짊어질 수 있을지...

 

그냥 마계고 인간계고 싹 다 갈아 엎어버릴까?

 

성녀님. 안 추우신가요?”

 

성녀가 아니라 잡화점 주인이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매번 성녀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애석하게도 내 포지션은 성녀인 모양이다. 이럴 때마다 빨리 남자로 되돌아가서 나는 사실 신입니다. 우헤헤헤!”라는 전개를 하고 싶지만, 저런 건 맨정신으로 할 수 없는 노릇이고, 설령 모든 능력을 개방한다고 해도 적과 아군 구별할 것 없이 죄다 날아가는 일 밖에 없다.

 

?

일시적인 한계 개방이라.

좋아. 그런 설정으로 나아가서 세린 몰래 남자로 변신하자.

내가 내 능력의 한계를 조정할 수 있는 물품은 잡화점에 존재할 거 같으니, 그걸로 고정을 시킨다면 어느 정도는 괜찮으리라 본다. 일부 힘을 봉인하는 아이템은 내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 깨져나갔지만, 잡화점의 물품이라면 마법을 완전하게 막아주는 반지도 있었으니 찾다 보면 나오겠지.

 

하지만 성녀님을 성녀님이라고 부르지 못하면 무엇으로 불러야.”

 

잡화점의 주인이라고 부르기엔 전투에서 좀 긴가? 하긴 급박한 상황에서 커다란 목소리로 잡화점의 주인! 괜찮습니까!” “잡화점의 주인! 어디 안 다치셨습니까!”이런 식으로 말하면 부르는 입장에서 짜증날 수 밖에 없다.

 

카린이라고 부르세요.”

 

이름입니까? 성은 어떻게 되시는지?”

 

성은 없어요.”

 

...”

 

투구를 눌러쓴 기사는 잠깐이나마 어째서 성이 없지?”라고 중얼거렸지만, 이내 결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카린님. 모포라도 드릴까요? 그 모습으로 있으면 감기에...”

 

감기에 걸릴 일은 없으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거죠?”

 

수도 안에 펼쳐진 것은 금빛의 결계와 더불어 절대적인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불린다. 하란국의 여제가 발동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결계를 거론한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 류하 씨만이 알 거 같지만, 지금 하란국의 여제가 류하 씨인지 다른 사람인지는 불명. 어쨌든 지금은 수도 근처에 있는 언덕에서 대기하고 있는 용사 그룹만이, 그 결계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놀랍게도 그 결계 안에 먼저 들어가서 협상을 보고 있는 건, 침묵의 궁수...라고 내가 멋대로 이명을 붙였지만, 아무튼 그 남자가 하란국 출신이기 때문에 아무런 탈 없이 결계에 들어가고 20분이 흘렀다.

 

용사님. 오늘은 추우니까. 이렇게 꼭 붙어있어야 한답니다~”

 

키르갤...숨막히는데...”

 

저 옆에는 따듯해야 한다는 핑계로 용사를 멋대로 안고 풀어주지 않았지만, 용사의 경우엔 마왕군을 토벌하기 전에 키르갤의 가슴에 질식사를 하지 않을지 더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런 커플이 꽁냥거리고 있는 동안, 기사는 용사의 상태를 보고 달려가 키르갤님! 용사님의 얼굴이 몹시 안 좋아 보입니다만!”이라며 태클을 걸었고, 키르갤은 용사님의 얼굴은 원래 보라색이야.”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뜨렸다.

 

용사의 얼굴이 보라색이라니?

어디 호러 장르에나 나오는 청귀<> 라도 되는 거냐? 뭐 자일리톨 청귀라도 나오는 그런 거? 그 전에 진짜로 용사가 암살 당할 거 같으니 그만 좀 놔줬으면 좋겠는데? 용사가 아둥바둥 빠져 나오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곧바로 내 앞까지 달려와 내 등 뒤로 숨었다. 시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왜 다 내 등 뒤에 숨는...어라? 잠깐만?

 

오호? 카리이이이인?!”

 

뭐냐 요즘 마법사는 광폭화<Berserker>도 사용하는 거냐? 눈에 금빛 안광이 날 산화시키는 듯 노려보고 있는 걸로 보아, 이 여마법사는 아무래도 마법사가 아니라 광전사로 전직해야 할 것만 같았다.

 

, 잠깐만? 아이어에 목숨이나 바치지 말고, 용사가 내 등 뒤에 숨은 것뿐이잖아. 난 손대지 않았어!”

 

“3일 전에 네가 용사의 머리를 쓰담쓰담 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어어어어!”

 

, 잠깐만! 팀을 죽일 셈이야!? 그만둬! 마법은 사용하지마! 마왕군에게 들킨단 말이야!”

 

당장 용사님을 내놔!”

 

용사가 무슨 마약이냐!

금단 증세라도 보이는 거냐고!

 

키르갤을 진정시켜야 할지, 아니면 덩달아 나도 마법으로 대응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찰나,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각자의 무기를 뽑았다.

 

흐응~ 아무래도 이건 내가 소리쳐서 들켰다기 보단, 벌써 마왕군의 척후병이 이곳까지 찾아냈다는 건데?”

 

분명 침묵<Silence>마법을 광역으로 사용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도 상관이 없다고 하지만, 혹시 마나를 뒤늦게 추적해서 찾아온 것이 아닐까?”

 

마족은 지식의 종족.

매번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는 방대한 지식의 양이기에, 이런 역추적은 손쉽게 할 수 있다. 설령 그게 검을 사용하는 마족이라도, 평생의 지식을 습득하는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마족의 백인대장만 두고 보면 전문지식의 일부는 어느 정도 습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호라? 오랜만에 포식을 할 수 있겠군, 적어도 100여마리 정도 되는데?]

 

[그거 좋겠네. 다만 저 척후병을 다 전멸시켜야 100여마리로 끝나지, 또 놓쳐서 보고라도 들어가면 그거 나름대로 골치 아파. 그러니까 척후병을 포함한 전령까지 모조리 다 제거해야 해.]

 

[일단 노력은 해보도록 하지. 다만 전쟁이나 전투의 변수는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게 만드니, 잡화점 주인의 바램은 이루어질 확률이 극히 적어.]

 

아예 없다고 봐야 하나. 그러면 최대한 수를 줄일 수 밖에 없다.

 

포위당한 거 같습니다.”

 

당연히 100여명의 물량으로 4명을 포위하는 건 쉽지.

뭘 그리 긴장하며 말하는 걸까?

 

그 궁수가 돌아오기 전까지 몸이나 풀어두라고, 7 그룹의 용사 일행의 실력을 내가 봐야 신뢰하지 않겠어?”

 

나는 일부러 도발했다.

격려가 아니라 도발을 한 이유는 이 상황이 여유로운지에 대해 농담을 던져본 것이고, 애초에 골드 드래곤이 유희로 용사 일행을 돕고 있는데, 용사는 여신의 보호와 축복을 겸비했는데, 이런 수로 버겁다거나 힘들다거나 그런 맥없는 소리를 하면 내가 용서 못한다.

 

정말 많은 걸 바라네. 너야 말로 바퀴벌레가 무서워서 뒤쳐지지나 말라고?”

 

성녀님은 제가 지킬 테니 걱정 마세요!”

 

키르갤과 용사는 내 도발에 응수해왔다.

 

-쉬이이익! !

 

하아. 투창의 기본이 안 되어있는 녀석들이란 좀 더 섬세함이 부족해.”

 

기사는 날아오는 투창을 가볍게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군에게 처참히 깨져서 약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제 밥값은 하는 모양이다.

 

그러면 한 명도 죽지 말라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쳐나감과 동시에 투창과 화살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전면에 마법방패<Magic Shield>를 내세워 돌격하는 동안, 용사는 여신의 축복을 사용했는지 광채가 나기 시작하면서 투사체가 스스로 비켜주기 시작했다. 키르갤은 보호마법을 펼치면서 광역마법을 준비한 사이, 기사는...언제 저기까지 간지 모르겠지만 벌써부터 마왕군의 병사 하나를 처치했다.

 

[히드라. 엄호해줘.]

 

[알았다.]

 

왼쪽의 사슬이 풀려나기 시작하면서 9개의 이빨이 각자 적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양손에 창조마법을 사용했다. 달 아래에 환히 빛나는 은빛 송곳니의 유산과 같은 단검을 꽉 쥐며 가속도의 탄력을 받아 그대로 회전하며 휘둘렀다.

 

-차자자자작!

 

갑옷이라고 말하기 어설플 정도로 종이처럼 잘려나가는 흑색의 방어구는, 이윽고 검은 피와 함께 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반월!<Half Moon>”

 

전방의 원뿔 모양으로 지나가는 밝은 실선, 그 죽음의 실선에 걸려버린 마족병사들은 허무하게 양단이 나버리고,

 

만월!<Full Moon>”

 

이윽고 내 주변으로 만월이 나타나자 수도 없이 많은 비명과 피가 터지는 소리에, 적들의 사기를 푹푹 깎아 나아갔다.

 

, 성녀라고 생각했더니! 완전히 검사와 다를 바가 없잖아! 궁수! 이곳으로 지원...!”

 

신성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왠 단검 두 자루와 이상한 사슬들이, 마족병사의 목을 꿰뚫자마자 온 몸으로 느껴지는 적들의 두려움을 만끽하고 있었던 찰나.

 

-쐐애애액! !

 

어둠을 틈타 날아드는 할버드를 쳐냈다고 생각했더니, 어느 틈에 내 뒤에서 강압적인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설마 내가 뒤를 잡혔다고 생각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마법을 통해 공간이동을 한 것으로 추측했다.

 

-샤아아악! !

 

내가 있었던 자리에 거대한 홈이 파졌을 무렵. 순식간에 내 뒤를 잡아 기습하려던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오호호? 꽤나 날렵하시군요. 반반한 얼굴을 보아하니 마왕님께서 점을 찍으신 약혼녀 아닙니까? 중립이라고 하셨으면서 지금은 용사의 편에 붙어 있군요?”

 

익살스러운 남성의 목소리. 꽤 가벼워 보이지만 일격은 상당히 무거웠다. 막지도 않고 피했다는 판단이 오히려 옳았을 정도. 대략 3M가 넘어 보이는 거구의 사내에게 신세한탄을 좀 할 겸 입을 열었다.

 

. 그건 너희 마왕도 허락한 거라서. 이렇게 붙든 저렇게 붙은 내 맘대로잖아?”

 

오호호!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직접 포로로 잡아서 맘대로 부려도 상관 없으시겠죠?”

 

내 몸을 음침하게 훑고 지나갔다. 거대한 뿔이 솟아난 투구에 알 수 없는 투기까지 느껴졌고, 일단 알아두면 대책이라도 마련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물어보았다.

 

덤으로 뭘 할건데?”

 

오호호! 그러면 그대의 손발을 구속한 다음에...”

 

희망사항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뜸을 들이며 군침이 도는 듯한 혀 놀림을 한 뒤.

 

마왕군이 인간계를 모두 점령하면 유명한 맛집 투어에 강제로 동참을 시킬 겁니다!”

 

, ! 잠깐만! 군침이 도는 듯한 혀 놀림이 맛집 탐방에 기대되는 그런 의미였냐! 그럴 거면 왜 손발을 묶어!”

 

그거야 줄 듯 안줄 듯 하면서 괴롭히기 위해서입니다.”

 

너는 진짜 여러 의미로 나쁜 녀석 맞다.”

 

세상에...손발을 다 묶어놓고 하는 짓이 음식으로 고문하는 거냐!

대체 이런 녀석은 뭐했길래 마계 12공작이 된 거야?

이것도 일단 생각난 김에 물어보도록 하자.

 

대체 너희 마계 12공작을 뽑는 기준이 뭐냐?”

 

오호호? 그거야 당연히 가위바위보이지 않습니까?”

 

그 빌어먹을 가위바위보가 왜 나오냐고!!!”

 

이 세상도 제대로 된 세상은 아닌 모양이다.

아니, 사실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지함이 떨어지는 그런 바보 같은 세계일 줄은 누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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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호호! 한입 줄까? 말까? 안준다! 오호호호호호! 

 

606

 

 

루시피나가 불러서 찾아왔다라는 말을 두고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해보자. 내가 과연 루시피나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제 발로 찾아온 걸까? 만약 나에게 볼일이 있었다면, 내가 가는 쪽이 아니라 루시피나가 오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키르갤이 안 오면 유성로 만들어버리겠데.”라는 말만 아니었어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우중에 하나가 되고 싶지 않으니, 7용사와 더불어 시나까지 한꺼번에 우루루 몰려오자. 격변 이전에는 화사한 웃음으로 맞이했겠지만, 지금은 격변 이후의 루시피나다.

 

-콰지지직!

 

. 동굴의 벽은 그리 강하지 않은 모양인...

 

어이. 어째서 이 사람들이 내 소중한 레어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거야? 키르갤?”

 

그야 내 동료니까. 아 저 성녀님은 빼고.”

 

잡화점 주인이라고 몇 번을 말해.”

 

잡화점 주인이 여자란 이유로 성녀취급을 받는 건 좀 그렇다. 아니, 차라리 날 성녀라고 부를 거면 잡화점을 성당으로 만들어 놓고 그런 소리를 하던가? 다른 이들에게 오해의 여지를 살만한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평화로 가는 지름길이다.

 

저 올빼미는 또 뭐야? 오늘은 거물을 너무 많이 만나는데?”

 

저는 람파시나. 마스터의 사역마입니다.”

 

오오! 말했어!”

 

하긴 오랫동안 시나와 루시피나도 같이 보고 살아왔으니, 올빼미 상태에서 이야기를 하는 건 그리 위화감이 없지만, 7그룹의 용사들에겐 꽤 강력한 자극이 되었나 보다. 저 꼬마 용사가 탄성을 지르는 것도 그렇고, 내 바로 옆에 있던 거한을 무표정하게 쏜 주제에, 올빼미가 말한다고 하여 눈썹이 살짝 움직인 남자이며...

 

뭐야? 이 올빼미 인형인가? 혹시 복화술사야?”

 

날 복화술사로 보고 눈을 반짝이는 키르갤을 마지막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 기사는 다른 곳에 간 건가? 아니 애초에 찾질 말자. 사람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상태가 마음이 편하다.

 

골치거리가 많이 있다는 생각은 내 앞에 붉은 머리를 한 여성도 마찬가지. 고운 이마가 다 찌그러진 상태로 살기를 끌어 모았다. 근데 왜 눈은 나를 바라만 보고 있는 걸까나?

 

우리 잠깐 밖에서 좀 이야기 할까?”

 

루시피나의 가녀린 팔에 비해 내 어깨는 타 들어가는 감각만이 날뛰고 있었다. 내 어깨를 안마해주는 건 확실하게 아닐 테고,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내 팔을 잡아 뜯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만둬! 내 팔의 라이프는 이미 제로야!

 

결국 질질 끌려 나와 레어 밖에 있는 들판에서...

 

푸하아악!”

 

어처구니 없게도 땅바닥에 굴렀다. 흙과 풀의 일부가 어느 정도 내 입에 들어간 듯한데, 씹지 않고 퉤퉤! 하며 뱉어냈다.

 

대체 너 정체가 뭐야!”

 

, 잡화점 주인인데요...”

 

아무래도 루시피나가 이렇게 화내는 이유 중에 큰 이유가 있다면, 람파시나의 존재 때문일까? 다른 차원의 여신은 이곳에선 영향력을 크게 줄 수 없지만, 아직까지 내 사역마로 취급되고 잡화점 멤버라는 인식이 있다면, 이곳에서도 거대한 영향력을 준다는 의미다. 다른 차원에 있다고 해서 힘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그런 거물이 자신의 레어에 쳐들어왔으니...

 

잡화점 주인이 이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 아무리 봐도 그 올빼미는 초월급의 개체인데! 너 정말 성녀라도 되는 거야? 마왕이라면 싸울 수 있어도 저런 걸 이길 리가 없잖아!”

 

저런 걸이라면 람파시나를 말하는 건가? 아니, 그건 상관 없다. 지금 루시피나의 말을 듣고 기괴한 전투력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으니까. 이전 잡화점에 있을 땐 레시아와 람파시나는 대등할 정도로 힘이 강하다면, 지금의 마왕인 레프리시아는 람파시나를 이길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는 마왕이라는 카테고리가 너무 강하지만, 지금은 람파시나의 등장으로, 밸런스가 한쪽으로 치우쳐버렸으니까.

 

그건 그렇고...”

 

흙먼지를 터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입을 열기를...

 

본 모습으로 돌아가봐.”

 

그건 왜요?”

 

그야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 때문이지! 내가 반할 정도로 잘 생겼는지, 아니면 뭔가 사고가 있어서 강제로 결혼하게 된 건지! 그 이유를 알아봐야겠어!”

 

그런걸 알아 봤자 뭐에 쓴다고?

 

강제로 결혼을 당한 건 접니다만..., 믿기지 않겠다고 생각은 해도 어차피 이해를 구하지는 않아요.”

 

이해를 구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루시피나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도 없다.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니?”

 

당연히, 지금의 세계는 격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니까요. 제가 꼭 본 모습으로 돌아가서 확인시킬 이유도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본 모습으로 변하면 힘의 팽창을 막을 수 없어요. 그림이나 사진이 있었다면 좋겠지만...”

 

왜 하필 남아있는 게 백장미뿐이냐?

그 전에 너무 잘 찍어놔서 전부 다 태워버리고 싶잖아.

이건 보여주지 않는 걸로 하자.

 

그런데 그 말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닐 텐데요?”

 

바람이 바뀐다. 굳이 따로 부른 이유라고 한다면 아마 지금 루시피나가 해야 할 말이 진짜겠지. 생각과 감정을 정리한 듯한 루시피나는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네 힘은 봉인할 수 없어. 이미 너무 늦었던 거야.”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별로 감흥이 없다.

 

이미 늦었다면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도와주려고 하는 걸 보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네요? 아니, 드래곤이었지.”

 

난 그리 좋은 드래곤이 아냐. 이건 전부 잠깐의 흥미였을 뿐이지. 그런데, 그 목에 있는 용족혼인의 문양은 정말 나와 결혼 한 거야?”

 

용족혼인의 문양을 지니고 별 탈 없이 일정기간이 지나면, 부부를 선언하는 거잖아요? 그러니 저와 격변 이전의 루시피나는 별 탈 없이 행복하게 지냈었죠. , 만약 그 기억이 보고 싶다면 제가 어느 정도 힘을 써드릴 수 있긴 한데.”

 

?”

 

루시피나가 듣던 중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여줄 방법이 없었지만, 어차피 내 힘을 막을 수 없다고 하니, 무한정으로 늘어나는 그 힘을 잠깐이나마 이용해서, 용족혼인의 문양을 매개체로 내 기억을 보여줄 생각이다.

 

내 품속에서 나온 수정구는 당연하게도 평범한 수정구가 아니다.

 

이건 안리아스의 수정구에요. 원본이 온전하다면 무수한 복제품을 만들고, 이 수정구로 어느 차원이든 어떤 곳이든 통신이 가능하게 만들죠. 당연히 녹화기능도 있고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한 기능이 많이 있지만, 이걸 통해 제 기억도 녹화해서 투영하는 게 가능하답니다. 그러니 루시피나도 이쪽에 손을 올려보세요.”

 

, 손을 올리라고? 설마 함정은 아니겠지?”

 

이걸로 함정을 만든다고 해서 제가 무슨 이익이라도 있습니까? 어차피 함정인 걸 알면 제가 이런 말 하기도 전에 초광속으로 냅다 집어 던졌을 텐데요?”

 

, 그건 맞지만...”

 

수줍게 얼굴을 붉히면서 그 사실을 인정하지마. 정말 날 초광속으로 내던질 참이냐? 이 행성 궤도 밖으로 내던지려고 했다고? 아니다, 잡다한 생각은 그만둬. 지금은 행복한 시간대를 보여줘야지 지금 당장 이런 바보 같은 태클을 생각하면, 초광속이 아니라 그 이상을 넘나드는 속도로 슈팅스타를 부르며 갈지도 몰라.

 

그러면 시작할게요.”

 

수정구에 의식을 집중하자 서서히 떠오르는 기억. 그 안에서는...

 

-흐헤헤…! 신랑! 이것도 한 번 입어봐!”

 

-그렇다. 주인. 모든 입어봐야 옷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잠깐만? 왠지 불길한 분위기가...

 

-싫어! 그만둬! 남자에게 그딴 옷 입히지 말란 말이야! 어디서 그런 전대물에서 나올 법한 쫄쫄이를 입히냐고요! 그보다 그 외형을 보아하니 여성용 맞죠! 그렇죠!

 

루니아 누나에 의해 제압당한 내가 처절하게 목소리를 외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사심이 가득한 여성들이 나를 포위하고, 각자 자신들이 내가 입길 원하는 여성용 의복을 하나씩 양손에 들고, 어마어마한 가학적인 미소와 더불어 음흉한 눈길이 내 온 몸을 구석구석 훑고 지나갔다.

 

-마스터. 역시 안목이 뛰어나시군요. 이제 어느 정도 여장에 익숙해졌나 봅니다.

 

-익숙해지긴 개뿔! 이거 끝나면 너희들 모두 아이언 클로야! 아이언 클로에 당하기 싫으면 제발 이것 좀 풀어달란 말이야!

 

-카일?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아. “혼날 거 같으면 일단 저지르자아!”

 

-옛말에 그딴 말 없거든요! 그만둬! 입히지마! 아아아아아악!

 

-Wasted

 

그런 흑백 엔딩으로 끝내지마!”

 

이번엔 내가 수정구를 초광속의 세계로 날려보냈다. 용족혼인의 문양을 매개로 삼으면 루시피나와 내가 알콩달콩하며 꽁냥꽁냥거리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이 보일 줄 알았는데, 지금 그 빌어먹을 백장미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수도 없이 털려버린 그런 트라우마를 꺼내게 될 줄이야.

 

푸하하핫! 아하하하하핫! , 바보같아! 아하하하! 배아파아아악!”

 

얼마나 웃겼는지 웃음인지 고통의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만, 평원에서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만 웃어요.”

 

, 남자가 여러 여자에게 여장을 푸히히힛!”

 

웃지 말라고 소리칠 수도 없고, 웃음소리를 계속 듣자니 내 인내심이 끊어질 거 같고, 이걸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그냥 세계를 다시 갈아 엎어버리고 목격자를 없애버려?

 

제길...”

 

들리지 않게 내뱉은 단어는 루시피나의 웃음소리에 처참히 부셔졌다. 앞으로 이 치욕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야 할지, 아무리 초월체가 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지. 아마 창조신도 생명을 만들고 자기들끼리 개판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 내가 진짜 이걸 왜 만들었지?”라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디 구약에서는 홍수로 물갈이 한번 하고, 다시 생명을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미안, 좀 많이 웃었네. 그래도 네가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 맞아. 이전에 있던 친구라는 녀석은 나를 실컷 이용해먹으려고 했던 나쁜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키르갤의 말대로...아니, 키르갤의 말을 떠나서 너는 좋은 사람이네.”

 

그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어떻게 아군이라고 판명할 수 있는지가 신기할 따름이지만, 그러면 저는 이제 초광속으로 날아가거나 그러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건 아니지.”

 

아군으로 식별해도 초광속으로 날아가는 건 똑같나?

 

마스터.”

 

하얀 올빼미가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았다. 무언가 쫓기듯 다급하게 왔나 했더니, 저 멀리서 제 7그룹의 용사일행이 뛰어오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말하는 올빼미가 너무 신기한 나머지 과한 관심 끝에,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단 건가?

 

성녀님! 그 올빼미 여신 맞죠! 그렇죠!”

 

그런 눈동자로 나에게 물어본들, 알려주지도 않을 거야.”

 

역시 여신이죠!”

 

이 어린 용사를 어찌하면 좋을까...기억을 지워버리고 시공의 폭풍으로 보내버릴까?

아니, 그러면 저 질투의 오러를 뿜어내고 있는 키르갤이 날 죽이려고 할 거야.

 

하아...맞아. 여신이야. , 이 세계에 영향력을 주는 여신이 아니고, 다른 차원에서 나를 위해 찾아온 여신이라고 해야겠지.”

 

내 오른손이 자연스럽게 올빼미의 머리를 쓰다듬자, 내 손에 기대어 안식을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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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일이 너무 바빴어요.


매일 같이 새벽2시에 퇴근해도 아침 8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힘들어서 매번 회사에 지각했죠.


다행히 이런 거에는 자유로운 회사라 일을 아직까지 다니고 있습니다.


그나마 틈나면 쓰는 글이지만...

일에 집중하고 난 뒤에 이야기를 쓰려면 그에 따른 머리의 회전력이 필요해서.


사실상 내용의 진도는 나아가지 않고 있네요...

빨리 쉬고 싶다;

 

602

 

 

 

어째서인지 잡화점 근처에서 야영을 하게 된 용사그룹은 아직까지 탐지마법에 대한 기초가 부족하다고 보고 있다. 마왕이 근처에서 나에게 치근덕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오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걸 반대로 생각해보면 마왕은 탐지마법을 모두 회피하고 이곳에 침입한 셈이다. 물론 여심을 사로잡기보단 사람 하나 잡아버릴 듯한 강력한 벽 치기를 선보였고, 어떻게든 자신의 편으로 유혹하고자 저런 미남으로 바꾸면서까지 찾아왔으니까.

 

. 내 입장에선 별 의미도 없는 노릇이지만, 리제로트의 경우에는 매우 달랐다.

 

저런 백마탄 왕자님이 나만의 카린 씨를 빼앗아 가려고 하다니!”

 

자신의 초능력을 봉인하는 렌즈를 빼먹은 듯한 짙은 보라 빛의 불꽃이, 아름답게 피어 올랐다. 두 손을 굳게 쥐면서 결심한 리제로트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입을 열었다.

 

이대로라면 그 마왕에게 빼앗겨버리고 말아요! 그러니 그 전에 제가 먹...보호해 드리도록 하겠어요!”

 

방금 무엇을 말하려다가 고쳤는가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 않았지만, 두 번 다시 저 발언을 한다면 그대로 땅속에 집어 넣어버려야지.

 

네가 날 보호하기엔 그 체력부터 단련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보호받기 이전에 내가 널 보호해야 할 입장인데? 월터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에는 월터와는 차원이 다른 강자들이 사방에 널렸으니까. 그리고 방금 전에 마주하지 못하고 피했으면서 어떻게 날 지키려고 한 거야?”

 

, 그거야. 조금이라도 더 쳐다보면 죽거나 심하면 침을 흘릴 정도로 위험한 상태였기 때문이죠...그 남자 대체 뭔가요? 어떻게 그 남자를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에요?”

 

정신방어가 강해지면 리제로트도 마왕과 맞서는 게 가능할까? 정신방어는 일시적으로 올릴 수 있지만, 마왕의 카리스마를 견뎌야 한다면, 일시적으로 올리는 건 턱 없이 부족하다. 마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 반지가 있긴 하지만, 그 반지를 낀다면 회복마법이나 이로운 마법도 받지 않으니까...

 

아니, 리제로트는 마법과는 별반 다른 초능력이니까 별로 상관 없지 않나?

뜬금없지만 3층으로 올라갈 일이 생겼다. 결심을 한 몸은 거침없이 일어나 3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향해 움직였다. 세린도 내 모습을 보고 따라오고, 리제로트도 내 행동에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만 따라왔다.

 

2층을 지나 3층에 올라올 무렵. 여전히 3층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사키엘의 문을 중심으로, 주변에 가지런히 장식 되어있는 물품들 한 가운데에, 검은색 작은 반지 상자가 존재했다. 그 상자 안에 요염하게 빛을 내는 반지 하나. 리제로트와 세린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모든 마법을 무시하는 반지. 솔직히 적임자가 없다기보단 이게 세상에 발견되면 꽤나 귀찮아지는 일이 많아질 거라 생각해서 봉인을 했지만, 지금 리제로트가 마법에 영향을 전혀 관계없는 초능력자이기에, 이걸 착용해도 별 무리가 없으리라고 봐. 다만, 이걸 착용하면 마나와는 근절된 삶을 살게 될 거고...어차피 예전부터 그렇게 살아온 리제로트니까.”

 

나는 반지를 빼내 리제로트 손가락에 걸어줬다. 어디 손가락이든 상관은 없지만 검지에 걸어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다는 의미는 검사의 길 최상급이 내뿜는 검강<Aura Blade>에도 맨몸으로 거뜬하게 견딜 수 있지. 검강이 감싸고 있는 검에 직격으로 맞으면 죽겠지만, 마나, 마기, 신성력에 관련된 모든 에너지에 대해 방어가 된다는 소리야.”

 

리제로트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며 투덜댔다.

 

기왕이면 약지에 걸어서 혼인신고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당장 반지 빼기 전에 입 다물어.”

 

고맙다고 말하지 못할 망정 약지가 아니라고 투덜대는 건 뭐야?

 

농담이에요, 카린 씨. 고마운 게 당연하잖아요! 절 아끼고 있는 증거니까요!”

 

그러면서 나를 껴안았다. 작은 몸으로 내 몸에 잔뜩 기대며 행복해 하는 얼굴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런 일을 하는 것도 그리 쓸모 없진 않았다. 어쨌든 잡화점에서 같이 살아가는 멤버니까, 서로 아끼고 지켜줘야 하는 건 당연하지.

 

어른이 다 되었네. 저런 꼬마애도 쉽게 다루고?”

 

세린.”

 

리제로트가 듣는 앞에서도 세린의 존재를 거론했다. 당연하게도 리제로트에게 있어선 인지할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에 혼잣말처럼 느껴지겠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내 할말만 했다.

 

우선 내 쪽에는 그렇게 오래 붙어있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리제로트를 최우선으로 보호하도록 해. 지금은 내가 잡화점 주인이긴 해도, 차기에 주인이 될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지금 남아있는 리제로트가 될 확률이 매우 높으니까.”

 

다음 후계자로 저 아이를 지목한 거라면, 이번 일 이후로 이곳과 영영 이별할 생각이야? 네가 남자로 되어 반신의 규격을 뛰어넘고 정말로 신이 된다면...”

 

그때는 잡화점과 이별이지 뭐. 그래도 후계자는 찾았잖아?”

 

어라? 저기? 누구하고 이야기 하시길래 제가 이 잡화점의 후계자라고 하는 거죠?”

 

뜬금없는 나의 발언에 혼란이 가중되어버린 리제로트의 머릿속이, 곧이어 심하게 떨리는 눈과 당황스러움의 미소까지 단계를 거쳐서 오염되고 있었다.

 

후계자를 찾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세린은 버럭 소리를 쳤지만, 그 소리는 리제로트 귀에 닿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세린의 분노를 마주할 뿐이며, 나는 꾸준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나는 이 일을 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어. 네가 날 이런 모습으로 구속하려고 한들, 힘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게 느껴지거든. 그게 언제가 될지 몰라도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아.”

 

아니!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요! 카린 씨!”

 

이번엔 리제로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금발의 머리카락은 매번 봐도 신기한데, 빛에 반사되면 태양처럼 눈부셨다. 어처구니 없는 소리 퍼레이드에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발을 동동 구를 때마다, 약간 웨이브 진 머리카락은 미약하게 흔들렸고, 화로 인한 상기된 볼은 하얀 피부로 인해 명백히 드러났다.

 

그야 다음 잡화점의 주인은 너더러 하라는 거야. 애석하게도 잡화점의 규칙에는 인간이 운영할 수 있고, 주인과 같이 할 동반자가 있어야 하지. 너는 초능력자라서 마법이나 연금술에는 무지하지만, 그건 어차피 엘티노스의 자서전만으로도 가능...”

 

그만! 그만하란 말이야!”

 

이번에는 리제로트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어째서...갑자기...그런 말을 하는 거에요...”

 

말 그대로. 내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지. 처음에는 힘을 가졌을 때 좋다고 생각하지만, 3개의 에너지원을 합치고 나서부터 내 힘은 쇠약해지거나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그 힘은 더욱 더 성장해가고 있어. 일전에 창조신은 세상을 만들 때 에너지를 3개로 나눴지. 그 환경에 걸맞게 피조물들이 창조되었거든. 마나, 마기, 신성력은 근본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강한 에너지 원이야. 그런데 그걸 합쳤다고 생각을 해봐.”

 

본래 인간의 규격을 한참 전에 뛰어넘고 반신의 상태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인간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상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사고는 천천히 인간의 틀을 깨기 시작했고, 주변을 둘러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환각처럼 기원이나 과거, 앞으로의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내가 리제로트를 보았을 때, 내 다음을 이어 잡화점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라던가, 잡화점은 오랫동안 남아있어도 멀쩡하게 살아있다거나. 아니면 돌을 보았는데 그 돌이 알고 봤더니 머나먼 우주에서 날아온 소행성인데, 그 소행성 안에는 걃스와 욟스가 살았...아니, 이 정도면 근본이 아니라 정말 마약을 해서 환각을 보는 거 같잖아.

 

걃스와 욟스는 사실이라고!

아무튼 사실이라니까!

 

사실 이렇게 여체화를 한 것도 잡화점에서 억지로 나를 구속하기 위함이거든. 그런데 그 구속을 뚫고 나는 인간과 반신을 넘어 그 무언가로 변하려고 해. 신이 될지 재앙이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뭐 그건 나중에 보도록 하고 슬슬 체력단련의 시간이니까 옷이나 갈아입어. 그런 복잡한 원피스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니까.”

 

-손님 나가신다!

 

잡화점 문이 열리면서...

아니, 손님을 알리는 종은 대체 어디 가고 걸걸하고 우렁찬 노장의 외침이 들리지?

 

잡화점 주인 있나?”

 

용사에겐 한 없이 부드럽지만 남들에겐 신경이 살짝 곤두서게 만드는 날이 서있는 음색. 7그룹의 여마법사 키르갤 혼자 아직 영업도 하지 않은 잡화점에 나타났다. 아직 3층에 있으니 내 행적이 그리 쉽게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분명 문을 잠갔을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천천히 내려오면서 그 모습을 확인했을 땐, 로브를 서서히 내리고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다.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

 

무슨 이야기?”

 

내 정체를 단숨에 알았던 것은 둘째치고, 네 목에 있는 그 용족혼인의 문양은 누구의 것에 대한 이야기지.”

 

무의식적으로 왼손이 내 목을 가렸다. 하긴 이 옷은 목까지 다 감싸주지 못하니, 들켰다고 한들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아직 이곳의 세상은 레드 드래곤의 위치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걸 말한다고 한들 머나먼 미래에 크게 달라질 것은 없지.

 

이 문양은 루시피나와 혼인했다는 증거. 드라고니스에 루시피나가 잘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시피나를 찾고 있다거나 만나려는 건 아니야.”

 

루시피나...드래곤 로드의 딸인가? 그보다 언제 너와 혼인을 한 거야?”

 

그야. 이곳 평행세계에 오기 전이지. 그래도 루시피나는 나름 현모양처였어. 잡화점 멤버가 날 가지고 장난칠 때마다, 루시피나는 나를 아껴준 유일한 멤버였어. 만약 루시피나까지 장난치고 다녔다면, 아무래도 과도한 사랑을 받아 죽어버렸겠지.”

 

레드 드래곤은 인간을 싫어하지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 순간부턴 그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산다. 용족혼인의 문양이 많은 역할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혼인한 사람들끼리는 서로 잘 살게 만들어주는 다리역할을 한다.

 

그래서 저번에 루시피나가...”

 

? 루시피나가 뭐라고 말했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런 재미있는 일은 너에게 알려주기엔 너무 이르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키르갤은 다음 질문을 했다.

 

그러면 이곳에 온 이유는 정확하게 뭐야? 용사에게 협조하기 싫은 이유는 그 마왕과 애증관계에 있기 때문인가?”

 

마왕과 애증관계는 이전에 있던 평행차원이면 충분해. 그리고 너는 내 성별이 원래 남자라는 것도 알잖아. 그런 미남이 껴안아주든 말든 그런 거엔 별 감흥이 없어.”

 

지금은 귀여운 여자애잖아? 그래도 내 용사님은 빼앗지 말아줘?”

 

안 뺏어. 그리고 귀엽다고 하지마.”

 

매번 이런 태클도 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엔 마음이 찝찝하지. 그런데 마왕이 일방적으로 나에게 꽁냥거리는 것도 봤으면, 맨 처음부터 공격을 하거나 추궁을 했을 텐데. 키르갤은 나의 존재에 대해 놀랍지도 않고, 이해를 했다는 듯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확인하고 싶은 게 뭐야?”

 

그야 당연히. 지금 마왕보다 더 위험한 재앙에 대해서지. 마왕의 침공은 우리가 나서면 어떻게든 저지하거나 되돌아가게 만들 수 있어. 토벌까지 했으면 좋겠지만 마왕 레프리시아는 쉽게 토벌을 당할 마왕이 아니지. 하지만, 마왕과 인간이 싸우는 와중에 그 둘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가 나타난다면, 결국 일시적으로 동맹을 하지 않을까?”

 

이 녀석 설마?

 

검은 달의 여왕을 부를 생각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계획밖에 없다. 그 전에 키르갤은 뭘 원하는 거지?

 

흐음? 더 위험한 존재에 대해 추측이 아니라, 정확하게 집어낼 줄은 몰랐는데?”

 

그런 미친 짓은 그만두는 게 좋아.”

 

검은 달의 여왕이 진심으로 세상 하나 없애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강림하자마자 아무것도 못하고 차원 하나가 없어진다.

 

그러면 어떻게 할래? 네가 그 존재를 대신 해주겠어?”

 

나더러...최종보스가 되라는 소리야?”

 

저 여자...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저런 소리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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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주말 반납하고 일해야 할듯하네요.

주말에 글쓰기 힘들듯한...

 

601

 

 

 

용사도 이곳에 찾아오고 마왕도 이곳에 찾아오니, 이 정도면 내 잡화점은 이론상 먼지가 되어 허공에 뿌려지거나, 어마어마한 손님으로 북적거리게 되는 극과 극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내 잡화점에 온 손님들은 정상적인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번에는 제 7그룹으로 참여해달라는 프리트론 왕국의 기사나, 아무리 봐도 10대 초반의 어린애가 용사이며, 마왕은 프리트론을 밟고 차근차근 진격하고 있다. 프리트론 왕국을 점령하고 동쪽으로 가게 되면 칸포리우스 제국과 하란국이 존재하는데, 그 곳에서 시간을 얼마나 버느냐에 따라, 마왕군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 7그룹은 잡화점에 와서 한다는 일은, 어린 용사에게 잡화 물품에 대해 설명해주고 부족한 물품을 사는 중이다. , 체크포인트 같은 역할이라면 잡화점이 당연하지만...

 

! 키르겔!”

 

~ 용사니임~!”

 

저 안에서 애정행각 비스무리한 건 그만 뒀으면 좋겠다. 아무리 봐와도 키르겔이라는 저 여성은 용사를 심상치 않은 눈으로 보고 있는 듯 한데, 조만간 은팔찌를 채우고 아공간에 던져놔도 할 말이 없을 법한, 범죄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지...

그런걸 내가 신경 써서 어쩌겠다고?

우선 이 상황을 어떻게든 빠져 나와 두 번 다시는 귀찮은 일에 휩싸이지 않도록 해야지.

 

아까부터 내 앞에 있는 기사는 뭔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가만히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었다. 관심법을 사용하지는 못해도 이 상황으로 보면 꽤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마주한 거 같은데.

 

왜요? 뭐라도 묻었나요?”

 

아뇨. 성녀님께서 지금 안고 계시는 고양이는 뭡니까? 키우시는 겁니까?”

 

고양이?”

 

잠깐 고개를 밑으로 내려다보니 검은 고양이 하나가 내 무릎 위로, 기분 좋게 앉아있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듯 ?”하고 올려다 봤다. 무심결에 쓰다듬고 있는 손을 멈추고는...

 

아이 깜짝이야! 뭐야 이거!”

 

냐아앙!”

 

뭐야! 언제 내 무릎 위에 앉아서 저렇게 기분 좋다는 듯이 앉아 있었던 거야! 그나저나 검은 고양이라니? 내가 알고 있는 검은 고양이라면 분명...

 

[설마 용사들과 접촉했을 줄이야. 역시 짐의 예상대로군.]

 

[마왕!?]

 

그 깜찍한 모습으로 내 무릎 위에 올라와서 동태를 이미 다 살펴보고 있었나. 게다가 키르겔마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그보다 그대의 말대로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모습이로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잡화점에 용사 일행이 도착했다면, 그대가 귀찮아하지 않도록 지금 당장 쓸어버리는 것쯤은 간단하다.]

 

[그럼 지금 해치우던가...]

 

옛날부터 전승된 이야기로 용사와 마왕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면, 변수가 생기기 전에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다만, 나에게 다시 다가와 앞발을 핥는 고양이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으니...

 

[아니, 좋은 시나리오가 생각났다. 그대가 용사의 대열에 참전하여 짐이 있는 마왕성까지 끌고 온 다음에 끝에 타락을 하여 배신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런 흔한 레퍼토리를 내가 왜 해줘야 하는데?]

 

그 놈의 타락과 배신으로는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는 거냐?

 

[성녀가 악의 힘에 굴복해 타락하는 것이야 말로 흔하지만 좋은 기믹으로...]

 

[성녀 아니라고!!!]

 

머리에 분노라는 점화장치가 터지자마자, 거칠게 고양이 머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그대로 끌어올렸다. 고양이의 두개골을 부셔버리겠다는 심정으로 오랜만에 아이언 클로가 나와버렸고, 그 덕에 작은 4개의 다리가 허우적거리면서 고양이의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몇 번을 말하지만 나는 잡화점 상인일 뿐이란 말이야!!!”

 

, 저기! , 고정하세요!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성녀님은...!”

 

순간 내 눈빛을 본 기사의 헬멧이 덜그럭거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살의를 담았기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질겁을 했겠지만...

 

, 그래도 그 고양이는 죄가 없습니다. 물론 신성한 성녀님의 무릎을 침범하는 행위를 했지만...”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성녀 아니에요. 그리고 고양이 하나가 그저 앉아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렇게까지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되요.”

 

성녀가 아니고 잡화점 상인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어차피 듣지도 않고...

 

[, 이것이 성녀의 힘인가...가녀린 체구에 비해 역시 신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자로다. 하마터면 방심할 뻔했노라.]

 

한눈 판 사이에 마법으로 순간이동 했는지, 내 손에서 벗어나 저 멀리서 노려보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 사실 마왕이 고양이가 될 필요가 없지만, 마왕이 고양이가 되어 인간계를 살펴보고 전략을 세운다는 그 자체가 이상하지 않을까?

 

이제 좀 돌아가주세요. 잡화점 청소도 겨우 했고, 지금 잡화점 개방시간이 아니니까요.”

 

이제 다 좋으니까 모두 사라져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너무 앞선 나머지, 입이 자동으로 위와 같은 말을 했다.

 

, 그러면 저희도 이 근처에서 야영을 준비하겠습니다.”

 

왜 잡화점에서 야영을 준비하는 건데요...”

 

잡화점 근처에서 야영을 준비한다는 의미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대로 찾아오겠단 소리인가? 아니 어떤 모험가가 잡화점 근처에서 야영을 즐기는 걸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메타가 바뀐 건가? 잡화점 야영 메타는 어디서 나온 거지? 최근에는 간절하게 기도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속설은 들었지만, 잡화점 근처에 야영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포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닌데?

 

성녀님! 무슨 일이 있으면 절 불러주세요!”

 

도저히 저 꼬마 용사에게 뭔가 부탁하기에는 너무 빈틈이 많았다. 그렇다고 한들 자랑스럽게 웃어 보이고 있으니, 한숨을 내쉬며 알았다고 말했다. 눈동자가 밝게 빛나면서 한 사람의 몫을 했다는 듯한 기쁜 발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잡화점 밖으로 빠르게 빠져 나온 용사 일행. 그리고 그 모습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타이밍을 읽고 있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옆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저 사람들이 마왕을 타도할 제 7용사라고 하는데?.”

 

확실히 저 꼬마아이에겐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보이긴 한다. 허나 짐은 마왕이니라. 저런 아이 하나 이기지 못하고 어찌 마계를 이끌 것인가? 그러니 침공을 하는 동안에도 제 7그룹을 절대 얕보지 않을 것을 이곳에서 선언하노라.”

 

시끄럽고 그만 내 발목에서 그만 떨어지시지?”

 

안 된다. 그대는 짐의 것이니라.”

 

저 고양이 목에 방울 걸어서 진도8.0으로 흔들어버릴까?

 

그나저나 용사도 갔으니 짐도 이런 불편한 모습을 그만둬야겠군.”

 

순식간에 마기를 끌어 모아 변한 모습은 편하게 보이는 검은 면바지와 맞췄는지 검은 와이셔츠가 눈에 보였다. 옅은 회색으로 줄무늬를 넣어 심플하면서도, 깔끔한 이미지를 띄고 있으면서도, 손목에 있는 금빛의 장신구가 여럿...잠깐만?

 

어째서 남성체로 변한 거냐!”

 

말 그대로 여성체의 마왕은 카리스마가 있으면서도 주변을 현혹시킨다면, 남성체의 마왕은 모든 것을 압도하고 굴복시키는 무언가를 뿜어낸다. 형용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네크로노미콘을 보는 듯한 기분. 사실 네크로노미콘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모르겠지만, 분위기와는 관계없이 어울리지 않은 짧은 자색의 머리를 긁적이며 마왕은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히 그대는 여성체이고 여성체와 같이 한 쌍을 이루는 것이야 말로 남성체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니라. 아직 짐은 마왕이지만 다른 방면에서 지식이 계속 들어와도, 끊임없는 무한한 지식은 아직까지 짐의 고뇌를 뿌리치지 못하게 하는...”

 

그 지식이 어느 정도 맞긴 하지만 대체 누구에게 들었는데?”

 

색욕의 공작에게 들었다.”

 

아무래도 색욕의 공작 특유의 성교육을 마왕에게 가르친 거 같지만, 마왕은 그와 다르게 깊이 있고 심도 있는 고뇌와 고찰로 인해 전혀 효과가 없는 모양이다. 리제로트는 문 밖으로 나오다가 마왕을 보고는 다시 문을 닫아 들어갔으니...

 

아무래도 리제로트의 입장에선 지금의 마왕을 이겨내기엔 무리인가...”

 

마왕에게는 특유의 오러가 뿜어져 나온다. 그 중 13대 마왕인 레프리시아만의 오러는 상대방을 순식간에 죽이거나 심한 경우 침을 흘리게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강도가 전혀 반대인 거 같지만, 리제로트가 마왕을 보자마자 바로 문을 닫아 피한 것은 현명한 대처라고 볼 수 있다.

 

마왕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분위기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뒤로 움직였다. 그러나 벽에 다다르고 나서 갈 길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마왕은, 내 얼굴 바로 옆에 있는 벽을 쾅!하고 치면서 박력을 내세...

 

-파아아아앙!

 

우려고 했으나 어마어마한 파괴력으로 잡화점 벽 일부가 날아가면서, 남자의 박력보단 이 무식한 파괴력은 어디서 나오는 가에 대해 고찰하게 생길 판이다.

 

. 그대는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상대에게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이건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거의 사형선고잖아.”

 

로맨틱하지 않은 건가?”

 

로맨틱이 어디 죽어버렸냐!”

 

누가 가르쳤는지 모르겠지만 그 어떤 것도 살인기술로 승화하는 마왕을 볼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옆에서 뭐가 폭발하는 마당에 장르가 로맨스가 아닌 스릴러로 변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러면 짐이 마이클 마이어스가 되어 할로윈마다 나타나면 되는 건가?”

 

그 빌어먹을 정보는 어디서 나왔길래, 아무런 거부감 없이 술술 튀어나오는 거야!”

 

이 세상.

이 시간대는 아무리 봐도 잘못 되어있었다. 결국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원래 없어야 할 지식이 이곳에 오염되어있는 것일까? 아니, 모든 차원의 융합으로 인한 붕괴도 막았고, 그런 일을 꾸미는 사회자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가끔씩 이런 오염된 정보가 나타나고 있으니, 결국 이렇게 마왕과 한가하게 만담이나 하는 것도 누군가에 의해 쓰여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왕.”

 

나는 진지하게 이 세상의 비밀 같은 것을 풀어보려고 했다. 그리고 마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가? 불을 꺼야 그나마 부끄럽지 않은 것인가?”

 

뭘 끄긴 꺼! 이 미친 마왕아! 댁 정신부터 꺼줄까!”

 

아무리 봐도 예전에 레시아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마왕이잖아? 이곳까지 와서 태클의 사명을 이끌고, 최선을 다해 오늘도 태클을 거는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니, 나란 인간은 도대체 언제쯤 평화를 맞이할까?

 

이번엔 짐이 그대를 쓰다듬고 싶군. 아까 고양이었을 때 잠깐 느꼈지만, 쓰다듬을 받는 쪽은 기분이 좋아도 쓰다듬는 쪽은 기분이 어떠한 가에 대해 알고 싶다.”

 

어째서 댁 같은 마왕이 마왕이 되어 마왕 같은 일을 마왕처럼 하다가 나를 만난 이후로 마왕 같지 않은 일을 마왕이 하는 건지부터 알고 싶은데요. 어떤 마왕이 쓰다듬는 쪽과 쓰다듬을 받는 쪽에 대해 고민을 하냐고!!!”

 

끊임없는 폭주와 태클로 인해 심신이 모두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저 잡화점 안에 쓸쓸히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평화롭게 창 밖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내 오른 팔을 붙잡은 따듯한 감각이 내 몸을 확 끌었다. 마왕의 온화한 미소를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지금이 그런 미소겠지. 저게 연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뒷머리와 허리를 살짝 끌어 안은 마왕은 다음과 같이 입을 열었다.

 

그대의 중심으로 마나가 소용돌이를 치고 있는 현상은 모든 생물들에게도 이로운 영향을 주지. 결혼을 하기 싫다면 짐의 마나 창고라도 되는 것이 어떠한가?”

 

나는 누군가의 마나 창고가 되어준 적은 있어도 너는 아니거든?”

 

. 그리 서두르지는 않지. 천천히 공들인다면 그대도 결국 짐에게 타락하게 되어있을 테니 말이다.”

 

아무래도 이 마왕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내 성별은 본래 남자라고, 그런 말을 들어봤자 전부 쓸모 없는 이야기란 말이다.

그나저나, 나는 언제쯤 본래의 성별을 되찾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래도 한달 안에는 어떻게 해결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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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진행하면서 더 바빠질 예정이라네요.

...망했...

 

600

 

 

 

일이 상당하게 꼬여서 어디부터 풀어야 할지 난감한 하루는 아직 오후 1시경을 넘어가고 있을 무렵. 아침에 먹었던 것이 스트레스와 결합하여 내 속을 엉망으로 만들기 전에, 합당한 이유로 스트레스를 풀어야만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은...

 

넌 체력이 너무 없어. 그러니까 이런 운동을 해야 하는 거야.”

 

그렇다고! 어린 소녀에게! 팔굽혀펴기는 좀 아니잖아요...!”

 

그 동안 리제로트에게 쌓였던 스트레스를 체력훈련을 통해 풀게 되었던 것. 조만간 격투술도 가르쳐서 어느 정도 호신술을 할 수 있다면, 내가 동행하지 않고도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줘야지.

 

어린 소녀든 건장한 청년이든,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선 체력이 중요해.”

 

그렇다고 해도...크으읏! 힘들어어엇!”

 

귀여운 단말마가 지나간 이후엔 축 늘어진 리제로트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저질체력을 극복하는데 몇 달이나 걸릴지. 레시아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고 금방 성장하는 바람에 빨리 진도가 나갔지만...

 

역시 마왕과 인간의 신체능력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나 보네.”

 

마왕과 인간 자체가 이미 종부터 다르잖아요.”

 

힘없이 내 말을 받아 치는 리제로트는 땀 범벅이 되어 늘어졌으나, 시간적으로 따졌을 땐 아직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재대로 밖에나 나가겠어? 너는 아직 어리니까 지금이라도 체력을 길러놔야 해. 맨날 인형이나 논다고 방에 처박히면 안 되잖아.”

 

그럼 카린 씨도 밖은 위험하다면서 매번 방에 처박히려다가, 용사와 마왕 때문에 이중으로 끌려나갈 판이잖아요!”

 

그냥 우리 둘 다 방구석 폐인이라고 지정하자. 아니, 그 이전에 나는 너보다 많은 여행을 떠나보긴 했어. 그러니까 지금 당장 은퇴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거지. 비록 아직까지 20대 초반이긴 하지만, 무릎에 화살을 맞지 않아도 경비병이 될 수 있다는 거야.”

 

무릎에 화살을 맞아야만 경비병이 된다는 말은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도, 지금의 내 입장에선 모든 걸 내려놓고 쉬고 싶을 뿐이었다. 설령 마왕이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든, 용사가 그 마왕을 퇴치하든 나는 잡화점 상인의 위치로, 평온한 삶을 바라며 하루하루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성녀라고 찍혀서 용사를 보조하라고 난리를 친다면, 이 일은 과연 어찌해야만 하는 가? 게다가 용사라는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어디 양아치 깡패 같은 녀석이 용사라고 칭하고 난동부리면 이 일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진다. 애초에 나라에서 그나마 마왕토벌에 가능성을 두고 있으니, 때려 잡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실력은 둘째치고 여신에게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내가 섣부르게 공격을 하거나 배신하는 행위를 한다면, 이후 하늘에서 날벼락이 쏟아져 내릴지도 모르니까.

 

아니, 천계든 마계든 나의 존재에 대해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곤란하다.

 

그런데 5분동안 팔굽혀펴기를 한 것치곤 단 한 개도 못했잖아? 그런 근력으로 나쁜 사람들에게 붙잡혔을 때 맥없이 납치당한다고?”

 

시끄러워요! 저에겐 월터가 있어요!”

 

그 월터가 없을 때는 네가 네 스스로 몸을 지키라는 소리야. 사람을 인형으로 만드는 정신지배계열의 초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눈을 가리거나 정신방어 아이템으로 무장한 녀석이 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거라고? 아니면 에너지볼트에 맞아서 비명횡사 할지도 모르고?”

 

팔이 후들거리며 힘겹게 일어나는 모습이, 마치 작은 동물이 태어나자마자 바로 일어서려는 것처럼 가련함이 느껴졌다. 보호욕구가 솟아오른다고 해야 할까? 일시적이나마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할 줄이야. 그건 그렇고, 방금 전부터 가장 신경 쓰인 것에 대해 입을 열도록 하자.

 

그런데 그 체육복하고 뭐야?”

 

당연히 현대식에 맞춘 체육복이죠. 땀 배출도 잘 되고 움직이기도 편하고, 혹시 저의 러블리한 모습에 반했나요?”

 

쓸 때 없는 소리하지 말고 씻기나 해. 러블리가 아니라 호러블이겠지...”

 

, 너무 하잖아요! 카린 씨!”

 

제길. 내 이름은 카일인데...

언제까지 성별이 뒤바뀐 상태로 살아야 하는 거야?

 

이름 하나 때문에 살아가면서 자괴감이 든다. 러블리인지 나발인지 하나 때문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아침에 용사를 데려온다는 기사가 아직까지 오지 않았지만, 평생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차라리 위험한 일에 휘말려서 이곳에 올 염두가 나지 않았다는 그런 일이 생기면 좋았을 텐데.

 

성녀님!”

 

저 멀리서 오후 햇빛을 받아도 광택은커녕 칙칙한 회색이 더 눈에 띄었다. 거침없이 나를 성녀라고 착각하고 부르는 남성은 그 뒤에 용사일행을 데려왔는지, 자신이 오히려 발걸음에 맞춰 잡화점을 향하고 있었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사람의 모습이 왜 이렇게 싫은 걸까? 확실히 내 본능은 이 사람들이 오면 귀찮아진다는 걸 경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칠 수 없는 이 상황...

 

뭐냐? 언제부터 장르가 무겁고 비참해진 거야?

 

용사와 그의 동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왜 온 거에요?”

 

?”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순식간에 본심이 나와서 나도 당황했지만, 용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기로 했다.

 

, 당신이 성녀님이군요! , 처음 뵙겠습니다!”

 

건들거리지 않는 걸 보아하니, 엘티노스 같은 인간이 용사가 되는 건 아닌가 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목소리가 너무 젊다. 똑바로 마주해도 나보다 키가 더 작은 남자아이가, 어디서 맞췄는지 모르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반짝이는 눈으로 날 올려다 보고 있으니. 어느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마주한다면 당연하게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뭐냐. 이 꼬마는?

어디서 구해온 거야? 이 아이가 그 마왕 레프리시아를 처리할 마지막 빛이라고? 지금 당장 마왕군이 쳐들어 온다고 해도 이 애가 시간을 끌어서 프리트론의 귀족을 구했다고?

 

정말로 제 7그룹의 용사라고?”

 

경악이라는 말이 머리에서 손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못 믿겠다는 눈빛을 기사에게 표출했으나, 그 기사는 매우 흡족한 목소리로 자랑스럽게 그렇습니다!”라고 외쳤다. 믿겨지지 않았지만 제 7그룹에 있는 건 딱 봐도 어려 보이는 용사와 뭐에 심취해있는지 모르겠지만, 고난과 역경을 몰고 오는 기사...는 프리트론 왕국 소속이니까 용사의 그룹은 아닌가?

 

그 외에도 뒤에서 번뜩이는 눈으로 보고 있는 여성 마법사.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체 주변을 경계하는 차가운 도시남자 같은 성격의 궁수가 서있을 뿐이다. , 동료가 있든 말던 내가 파악할 사항은 아니지만...

 

그보다 저는 성녀가 아니라 잡화점의 주인이라고...”

 

아닙니다. 저의 목숨을 구해주시고 프리트론의 위기를 한차례 구해주신 은인께선, 그에 맞는 칭호를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하아...”

 

누구든 좋으니까 지금 이 상황을 다 날려버렸으면 좋겠다. 두통이 한 가득 올라가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마법사가 어린 용사의 물품을 챙겨주고 있었다.

 

이 돈으로 잡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물품을 사도 된답니다.”

 

고마워! 키르겔!”

 

우후훗! 고마워 할 필요 없답니다.”

 

자애로운 표정으로 용사를 바라보는 마법사. 마치 어린 아들과 엄마처럼 사이가 매우 각별해 보였다. 정말로 저 어린아이가 마왕군을 막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마 주변에 있는 동료들이 전부 시간을 벌었다고 할 수 있겠지.

 

제가 제 7그룹과 같이 움직이기엔, 그 주변 사람들이 충분히 강하다고 봅니다만?”

 

그래도 용사님의 잠재능력을 깨우기 위해선, 성녀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잠재능력?

그 정도로 기대할 가치가 있는 건가?

아무리 봐도 잡화점에 있는 물품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의 잠재능력은 어디까지 일지? 확실히 마나는 비정상적으로 많이 있긴 한 거 같은데...

 

아니? 잠깐만? 저 아이 주변에서 소용돌이가 치잖아!

 

말도 안 돼...”

 

그렇죠? 저도 많이 놀랐답니다? 그보다 당신도 상당히 말도 안 되는 사람이네요?”

 

내 귓가에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 아까 용사와 이야기 했던 여 마법사의 목소리다. 아까 이름이 키르겔이라고 했던가?

 

당신 같은 존재가 저 아이를 보살피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순간 키르겔의 눈빛이 내 가슴을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갔다. 아니, 그런 표정을 지으면 나도 무서우니까 그만 해.

 

당신...단순한 성녀가 아니군요?”

 

아니. 전 잡화점 주인이라고요. 상인이라니까요? 그리고 단순한 성녀와 단순하지 않은 성녀의 차이점은 잘 모르겠으니. 제 어깨에 한 가득 힘이 들어간 손은 좀 놔주시겠어요? 일반인이라면 어깨뼈가 아작 나도 모르겠는데요?”

 

왼쪽 어깨에 고통이 밀려와 입 밖으로 신음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꿋꿋하게 참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다. 말도 안 되는 허세의 끝은 무엇으로 보상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자존심 하나를 지키기 위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다니.

 

그보다 너무 아파. 진짜 아파. 그러니까 좀 놔줘!

 

흐응? 실례했습니다. 다만...”

 

알았어. 나는 비밀은 지켜.”

 

묘한 신경전이 한 차례 지나갔을 때 세린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오직 나에게만 보이니까. 누가 보면 내가 미쳐버린 줄 알겠네. , 잡화점의 주인에게만 보이니까.

 

아침부터 지금까지 쉴 틈이 없네. 그런데 잡화점 안에 들어간 아이가 용사라고?”

 

맞아. 용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에 대해 듣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찾아와서 포션이나 사간다면 나에겐 오히려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지. 그것만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닌가 보네...”

 

여전히 말 없이 경계하고 있는 남자는 둘째치고, 어린 용사를 뒷바라지 하고 있는 마법사나, 나에게 슬그머니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려는 기사.

 

세린. 이 상황...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

 

각본가는 없어졌으니 의도적인 건 아닐지라도, 확실히 이상하긴 이상하네. 시공간은 안정적인걸 보아하니 붕괴 위험성은 없어 보이는데.”

 

붕괴 위험성이 없다는 소리라면, 이 세상은 여전히 의도적으로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란 소리가 된다. 다른 시공간의 세계가 하나로 맞물려서 모든 시공간이 무너질 뻔한 이전 사건을 계기로, 끊임없이 이 시공간을 계산하던 세린은 이곳이 안전하다는 걸 나에게 말했다.

 

한가지 걱정했던 일은 끝났으니, 다른 하나가 남았다면...

 

키르겔! 이곳에 마법석도 팔아! 하나같이 다 반짝여!”

 

용사님! 그렇게 뛰면 위험하다고요?”

 

앞으로 일어날 난장판을 어떻게 치워나가야 할지...게다가 마왕이라면 아마 이 상황과 변수도 다 계산을 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이곳까지 나타나서 용사를 먼저 처단하거나, 아니면 다른 심복을 보내지 않는 이유라면...

 

나를 신뢰하고 있는 모양이네. 이곳 마왕은...”

 

글쎄? 신뢰하는 것도 카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내 이름은 카일이야.”

 

지금은 여성체니까 카린이지.”

 

은근히 기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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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화특집을 쓰고 싶어도 이미 바쁜 일정때문에...ㅠ

 

599

 

 

 

다짜고짜 이곳에 찾아와서 스트레스를 푼다는 마왕의 선전포고를 듣고, 마왕이 세계정복을 하다가 용사들에 의해 저지당하면, 내가 무슨 꼴을 당하게 되는 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마왕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에는 뭐가 있을까? 적어도 따듯한 차를 마시면서 심신을 달래진 않을 텐데 말이다. 기본적으로 이라는 속성을 가진 자들의 유희라면, 생포한 포로를 고문하거나 자신의 욕망해소로 사용하는 등. 누가 보면 정말로 비인간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 생각을 해보니 포로를 심문할 때도 그런 경우가 있긴 하지. 그러면 마계의 유희는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행위를 일삼는다는 말이 더 모욕적일까? 어느 날 고문을 하고 있는 마족에게 찾아가서 ! 정말 인간적이시네요!”라고 말하는 날엔, 때에 따라 그 자리에서 즉석고문을 당할지도 모른다.

 

. 어쩌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왔더라?

아무튼, 지금은 아침부터 잡화점 청소를 하고 있으니 오랜만에 깨끗해지는 공간을 보며, 마음 속에 의지가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외출해서 남자로 되돌아가야지 언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있을 수 있나?

 

. 세린. 잡화점도 깨끗하게 닦고 물품도 가지런히 정리했어. 이제 밖에 나갈 테니 슬슬 성별 좀 되돌려주지 않을래?”

 

안 돼.”

 

이 빌어먹을 단호박 같은 녀석! 그 머리를 때고 할로윈에 장식하기 전에 바로...,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이렇게 노력을 했는데...슬슬 본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서...헤헷...!”

 

순식간에 분노조절장애가 왔다가, 서리 빛의 싸늘한 눈동자를 바라보자마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뭐야 저 표정...무서워. 순식간에 내 등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니까?

 

잡화점 밖에서도 그 모습으로 있어야 해. 이건 부탁이기보단 잡화점인 나의 명령이야.”

 

내가 잡화점의 주인인데 잡화점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는 힘을 봉인한다면,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되니까 괜찮지 않아?”

 

사람의 틀을 이미 부셔버리고 어떻게 사람으로 돌아올 거야? 그럴 줄 알았으면 시공간술사의 길을 걸었을 때, 너의 인간이었던 모습을 미리 백업했어야지?”

 

아니, 그래도 최대 24시간 전의 나를 백업하는데, 몇 일이 지난 그 모습을 어떻게 되찾아? 차라리 외장메모리에 저장하면 모를까, 시공간술사의 길은 인간이 담기엔 너무 버겁단 말이야!”

 

그건 네 능력부족이지.”

 

저 잡화점을 판자째 뜯어서 캠프파이어로 만들어버릴라...아침부터 혈압이 오르는 말이 오고 가는 동안 리제로트는 의외로...

 

카린 씨? 아침 드세요?”

 

잠깐. 카일이라고 부르란 말이야.”

 

요리를 할 줄 아는 아이였다. 예전에 납치한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다과회나 파티를 자주 했고, 음식은 전부 리제로트가 만들어서 나눠줬다고 했다. 그래도 사람이니까 영양분은 섭취하고 잠은 꼬박꼬박 재워야 오랫동안 가지고 논다나 뭐라나...

 

지금은 카린 씨잖아요. 그러니까 카린 씨라고 부르는 건데요? 카린 씨?”

 

오호라? 그렇게 3파장 스텐드마냥 디럭스 콤보를 먹이시겠다?”

 

꺄아..! 귀여운 여자아이가 잡으러 온다~!”

 

누가 귀여운 여자아이야! 너 거기 안 서!”

 

이런 취급을 받으려고 이 세상을 한바탕 갈아 엎은 게 아닌데. 이럴 때마다 자괴감이 든다. 그래도 아침에 신문이라도 와야 세상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 텐데, 어처구니 없게도 잡화점 근처에 마을은 전멸해버렸으니, 지금 남아있는 건 주둔하고 있는 고블린 때, 그리고 먹을 것이 없는지 어슬렁거리고 있는 마수들뿐이었다.

 

이래서야 사람이 찾아올 일은 없네.”

 

프리트론 왕국으로 가볼까?

아니, 어쩌면 프리트론 왕국도 망했을지도 몰라. 만약 전쟁중이라면 더더욱 참여를 해선 안 된다. 나는 그 어느 누구의 편을 안 하기로 맹세했으니까. 맹세까지는 아니고...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래, 괜히 귀찮은 일에 끼어들어가서 생고생하지 말고, 평화와 평온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다짐.

 

맞아. 더욱 더 격렬하게 이 집에서 나가면 안 돼.”

 

일이나 하시지. 잡화점 매출이 아예 없어도 곤란하니까.”

 

지금은 자동으로 세금을 땔만한 나라는 없지 않나? 그냥 나는 이대로 자급자족하면서 살면 될 텐데?

 

일이라. 그래도 위험천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 늘 그래왔듯이 의뢰를 받는 잡화점은 더 이상...”

 

-벌컥!

 

이제서야 아침 먹으러 들어갔는데 곧바로 누군가가 문을 열어버렸다. 세린과 나는 그저 당황한 눈으로 열린 문만 바라보았고, 리제로트는 먼저 먹고 있다가 포크를 입에 넣은 상태로 정지해버렸으니.

 

...찾았습니다.”

 

? 찾다니요? 그보다 당신은 그때 만났던 기사잖아요?”

 

그보다 잡화점 주변에 인파가 많이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을 찾은 사람은 저 기사 하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서늘한 감촉의 건틀릿이 내 양손을 감싸며 절박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성녀님! 저희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시옵소서! 이전처럼 저의 프리트론 왕국의 구원을 주시옵소서!”

 

이건 또 무슨 개판이야.

 

아니. 저기요...일단 저 아침부터 먹어야 하는데...”

 

. 그러시군요! 그러면 저흰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아니. 그 제안은 승낙한 것도 아니고, 저는 성녀도 아닌...”

 

일전에 성녀님께서 마왕군을 혼자 괴멸하여 후퇴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여신님께서 보내신 성녀님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습니까?”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정말 잘못 꼬여버렸다.

 

애초에 잡화점은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올 수 있게 만들었으니, 지금 내 앞에 있는 기사가 이곳에 찾아오는 건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분명 세린이 아무도 올 수 없도록 가상좌표까지 열어놨다고 했을 텐데.

 

하긴. 어제 마왕이 불쑥 찾아온 것도 그렇고...

 

각본가는 분명 모두 사라졌을 텐데 말이야...”

 

? 방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일단 손부터 놔야 제가 아침을 먹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중얼거림을 당신 모르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쪽 귀에 들렸으니 이 기회에 제가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제 양손을 해방시키기를 권유하는 바입니다.”

 

어찌 된 상황인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먹고 천천히 생각을 해보자.

갑작스러운 정보가 한꺼번에 몰려왔을 땐, 상상을 초월한 스트레스가 몰려오기 마련,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에 있어선, 잠깐 동안 쉬면서 문제를 해결할 작전을 세우는 것밖에 답이 없다.

 

그 잠깐 동안 쉰다는 행위는 스트레스를 줄이기만 하면 되는데, 먹는 것도 그렇고 자는 것도 그렇고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만 하면 된다.

 

음식을 다 먹고 허브티를 마시는 와중에도, 그 기사는 주변에 정리되어있는 물품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전부 잡화점에서 파는 물품입니까?”

 

. 이 세상에서 다양할 정도로 기괴한 물품을 파는 잡화점이지요. 다만, 저는 단지 잡화상인일 뿐. 여신이 내려준 성녀라던가 용사라던가, 저 은하 너머에 있는 걃스나 욟스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욟스?”

 

아니. 이건 잊어주세요. 어쨌든 저는 신의 사도라던가, 인류의 구원자 같은 게 아니란 겁니다. 오히려 저는 이 시대를 방관해야 하는 방관자에 걸맞죠. 손님으로 와서 마왕을 퇴치하기 위해 물품을 사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제가 직접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모든 것은 용사가 스스로 나서서 마왕을 타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왕은 용사가 무찌른다.

혹은 마왕을 무찌른 자가 용사가 된다.

 

이런 두 가지의 전승을 보았을 때, 나는 잡화상인이니까 그저 길목에 지나간다면 포션만 싸게 처리해도 상관이 없다는 의미다. 그래 맞아. 잡화상인이 길목에 따라다니면서 파는 경우도 있는데, 생각을 해보면 마왕성 깊은 곳까지 잡화상인이 대기하면서 아이템을 파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그러니까 잡화상인은 용사보다 더 강해야 한다.

 

어쩌다가 이런 생각까지 오게 되었더라?

 

애석하게도 마왕 레프리시아에게 벌써 6그룹의 용사가 당했습니다. 거의 죽어서 돌아왔고 살아있다고 해도 타락하는 바람에 마왕군에 붙어있거나,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이 많아요.”

 

설마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세계를 멸망시켜버리겠다고 직접 움직이고 있으니,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일지도...

 

그러니까 마왕성 전체를 날려버릴 만한 위력을 가진 용사 6그룹이 전부 날아갔다고요?”

 

마왕 레프리시아는 뛰어난 통찰력과 치밀한 전략을 선호하는 마왕입니다. 저희가 마왕의 군세를 막을 때, 마왕성을 공략하려고 하면 어느 사이에 정예부대를 이끌고 돌아와서, 용사들을 전부 공격하죠.”

 

아니, 마왕의 핵심 간부들이 다 살아있는데, 그걸 처리하지 않고 다짜고짜 빈집을 공략하려고 했으니 다 망해버리잖아. 마계 12공작은 그냥 폼이 아니라고?

군고구마 동시에 16개정도 집어넣다가 속이 막혀버린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내 오른손이 자동으로 이마에 대고 고래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전략부터 다 잘못 되었어요. 도대체 용사가 무능한 건지 용사에게 명령을 내리는 칸포리우스 제국이 무능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기본적으로 핵심세력은 자르고 기습작전을 펼치는 건데, 그걸 다 무시하고 사지로 내몰아서 용사가 다 당했다는 소리밖에 안 들린 나는, 한심함이 가득 찼으나 어떻게 보면 그거야 말로 승부수라고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전선에 나가있을 때 빈집을 털어버리는 건 기초전략이지만, 상대는 마왕 레프리시아. 이미 통찰력에는 따라갈 수 없으니 모두가 다 당했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통찰력이 뛰어나다는 건 그 용사그룹은 어느 것이 강점이고 약점인지 다 파악한 모양.

 

제국은 그리 무능하진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것도 하나의 전략. 하지만, 마왕 레프리시아는 그걸 뛰어넘는 괴물이었습니다. 오히려 역으로 이용해서 용사들을 전부...”

 

. 생각해보니 그렇게 되기도 하겠네요.”

 

애초에 나란 존재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은 모순적인 존재이지만, 그거마저 변수로 인지하고 나를 쫓아 마왕군을 이끌고 돌아올 정도다. 이렇게 보면 레프리시아에게 초인적인 감각이 달려있거나, 아니면 엔티티가 속삭여줄지도 모르지...

 

엔티티는 뭔가요?”

 

남의 독백을 함부로 읽는 게 아닙니다.”

 

뭐냐? 내 독백은 아직 이름도 알지 못한 기사에게까지 보이는 값싼 녀석인 거야? 언제부터 내 가치가 그렇게 떨어진 건데? 하긴 지나가던 잡초마저 읽을 수 있는 게 내 독백인데...

 

결과적으로 남아있는 용사가 없다는 건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이제 저희들에게 있어서 마왕을 토벌할 힘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성녀님.”

 

아니. 전 성녀가 아니라니까요.”

 

그럼 여신입니까?”

 

여신 찾을 거라면 천계로 가란 말이에요!”

 

말을 듣지 않으니 소리를 치게 되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내 앞에 있는 기사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엎드려 사과를 하고 있었다. 마왕 레프리시아가 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도 그렇고, 그걸 막고 평화를 되찾는 것도 그렇고, 애초에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거늘...

 

아무래도 조율은 필요할 거 같은데요? 카린 씨?”

 

조율이라는 단어가 내 귀에 걸렸다. 리제로트의 단 한마디가 분위기를 다짜고짜 부셔버린 것.

 

애초에 전쟁이라는 것은 양국이 모두 발전하는 단계를 뜻하잖아요? 마왕이 너무 우세하니까 그 반대쪽으로 붙어서 균형을 맞추면...”

 

우리가 붙어봤자 마왕 레프리시아를 막을 수는 없어.”

 

세린이 직접 출동한다면 모르겠지만...딱 잘라서 거절의 표시를 날렸다. 각본가가 사라지기 전, 레시아와 함께 행동했을 때는 빈틈이라던가 변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그렇다면 용사와 같이 행동하시지요.”

 

뭐야? 용사가 있었어?

 

7그룹을 편성하는 중인가보네요? 그 사이에 제가 참가하라는 말씀입니까?”

 

지금 살아있는 용사를 죽게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프리트론 왕국의 주민들이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는 이유는 성녀님의 숭고한 희생도 있었지만, 용사의 존재가 그곳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숭고한 희생이라니...저 아직 안 죽었거든요?”

 

실례했습니다. 성녀님의 아름다운 희생이...”

 

희생이란 단어 좀 빼고 말해주시겠어요!”

 

대체 누굴 희생해서 오벨리스크의 거신병을 소환할 거야?

머리를 식히고 생각을 해보면, 애초에 이 사건에 나설 수 없는 몸이니까. 지금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는 이런 귀찮은 일에 직접 나서서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만 돌아가주세요. 그 제안은 승낙할 수 없네요.”

 

, 어째서입니까?”

 

귀찮아서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도 없고, 이들에게도 계기가 되는 한마디는 던져놔야겠다. 내 말은 절대 거짓이 아니면서도 살짝 일을 커지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한 마디라면...

 

사실, 전 마왕에게 노려지고 있어요. 머지않아 마왕의 부인이 될지도 모르죠...”

 

살짝 어두운 기색을 하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시선은 땅바닥으로 약 45도로 내렸다. 이 정도면 내 입장은 사연이 많은듯한 사람으로 보이겠지. 애초에 마왕에게 노려지고 있는 말은 사실이고, 마왕의 부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도 사실이다. 마왕 레프리시아의 입장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신부로 취급하는 기이한 가치관이 있는데, 그 기발한 발상은 왜 이전에 있던 레시아와 같은지 모르겠다.

 

그러니 저는 용사그룹과 이동한다면 언젠가 배신할 운명이라는 겁니다.”

 

지금의 말은 가정을 통해 나를 절대로 용사그룹에 데려가면 안 되는 이유를 명확하게 집었다. 아무리 내가 성녀든 여신이든 뭐든 간에, 용사를 배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로 데려가지 않겠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제서야 납득을 하는 건가...

 

그럼 제가 이곳에 용사를 불러오도록 하지요.”

 

? 아니. 그럴 필요가...”

 

그럼 나중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결심했다는 듯한 행동은 거침없이 잡화점 밖을 빠져나갔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곳에 용사를 불러서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진다면, 잡화점 문을 잠가버려야 하나? 아니면 잡화점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야 하나?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데 이번 일을 받아들이면 마왕 레프리시아가 토벌되기 전까진 끝나지 않을 테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꼬였지...”

 

자업자득이네요. 카린 씨가 이상한 말로 사람들에게 오해하게 만드니까 그렇죠.”

 

옆에 있던 리제로트를 마법으로 날려버리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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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왜 줄지 않지...?

어째서 쌓여만 가는 걸까요...

 

598

 

 

 

인생에 가장 허망한 순간이라면 내가 나중에 봐야 할 책의 내용을 스포일러 당했을 때. 뜬금없이 그건 무슨 소리냐고 물어볼 수 있는데, 마왕군에게 겨우겨우 도망쳐서 잡화점에 들어가 책을 읽을 무렵, 리제로트가 오후에 말싸움을 했던 복수로 책이 재미있어지려고 하면, 스포일러를 거침없이 터트려서 허무함을 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그거 주인공이 알고 봤더니...”

 

. 주인공이 알고 보니 범인이었다는 거야? 아님 죽는다는 거? 대체 이번이 몇 번째야?”

 

슬슬 짜증이 입에 가시가 돋아나듯 솟아오르기 시작할 때. 리제로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세린은 한숨을 내쉬면서 내 앞에 걸어왔다.

 

어린애 같이 싸우지 말고 그 마왕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는 해봐야겠지?”

 

한가지 특단의 조치가 있어.”

 

그래?”

 

내가 잡화점 밖으로 안 나가는 거야. 역시 이불 밖은 위험...꺄아악!”

 

잡화점 바닥이 순식간에 튀어올라 머리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남자나 여자나 저런 비명을 지르는 건 당연하겠지만, 잡화점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여성체의 모습으로 있어야 하기에...아니, 사실상 밖에서는 세린이 멋대로 날 여성체로 고정시켜놨기에, 정신적으로도 아파죽겠는데, 물리적으로도 아파 죽을 지경이다.

 

어째서! 내가 잡화점 밖에 안 나가겠다고 하는데! 내가 잡화점의 주인 아니냐!”

 

글쎄? 아무리 주인이라고 해도, 밖에 나가지 않고 놀고 먹고 살겠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가 없거든? 뭐 그 모습으로 계속 있고 싶다면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아 맞아. 원래 성별로 돌아가야 하지. 지금은 세계 멸망을 막건 말건, 빨리 되돌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

 

지금 당장 규칙부터 수정하라고!”

 

싫어.”

 

아무리 잡화점의 주인이라고 해도, 잡화점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것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은 없지. 지금 상황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린에게 훈계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리제로트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계속 보고만 있고, 결과적으로 이 세상은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이 잡화점은 느닷없이 땅이 솟아오르고 그래요?”

 

잡화점이 땅에서 솟아오른 게 아니라 바닥이 솟아오른 거잖아. 잡화점을 두더지마냥 만들지 마...”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마왕 레프리시아의 눈에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혹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적이 될 거 같아 귀찮은지. 그건 사실상 중요하지 않은데 문제는 마계공작 중에서 여럿이 그릇된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잠깐 봤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이 날 장난감으로 선택한다는 발언.

 

리제로트.”

 

?”

 

밖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했으니까. 네가 나갈 때는 꼭 나에게 말하고 같이 동행한다는 것만 약속해.”

 

카린의 모습으로 같이 동행을 해준다면 생각해볼게요.”

 

어째서 너희들은 모두 날 카린으로 못 만들어서 안달이 난 거야? 애초에 20년 이상 남자로 살아오다가 갑자기 이런 모습으로 살라고 하면 불편하거든? 키도 바뀌는 바람에 적응도 안 돼.”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리제로트의 눈빛에서는 ~ 어련하시겠습니까? 그저 내 눈에만 보기 좋으면 되는 거지~”라고 훼방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눈이 반짝이며 내 모습을 순식간에 훑고는...

 

어라? 그러고 보니 안 씻으세요?”

 

같이 씻자는 소리는 하지마.”

 

그럼 씻겨드려요?”

 

네 정신상태부터 씻고 오던가...”

 

여전히 한결 같은 리제로트의 끊임없는 욕망을 지워버리고, 여전히 손님이 오지 않는 잡화점 안에서 물품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스으윽

 

옷깃을 타고 뱀처럼 다가온 세린의 손. 포션을 정리하려는 내 작은 손등을 침범했다.

 

이번 건 또 뭐야.”

 

아니. 잠깐 진단을 해보는 거야. 좋아. 정상이네.”

 

진단을 한다는 것치곤 세린의 경우에도 어마어마한 욕망이 눈빛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초근거리에서 봐야 하는 내 입장에선 호러가 따로 없었는데, 힘을 줘서 뿌리치려고 해도 세린의 힘이 더 강했다는 사실에 참담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아니 그런 미래는 오면 안 돼.

 

세린. 네가 뭘 하려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아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그대로 좀 놔둬! 바꾸지 말란 말이야!”

 

어처구니 없게도 세린이 내 신체를 진단한다는 자체는, 결과적으로 내 상태를 변화시킨다는 의미가 더 크다. 내가 입고 있던 옷도 자기 멋대로 바꾸고 난리라니.

 

그리고 네가 고르는 의상마다 노출도가 은근히 거슬리거든?”

 

옛 현자는 노출도와 방어력은 서로 비례관계라고 말했지.”

 

전혀 아니거든!”

 

대체 어느 현자가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은 거야?

 

카린 씨는 잡화점에 있으면서 그런 옷도 입고 계신가요?”

 

아니. 그보다 지금 흘리고 있는 침이나 닦아.”

 

이젠 리제로트 쪽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거침없이 치고 들어왔으니,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소리치는 작업은 복잡했다.

 

이 옷은 뭐야? 꼭 웨딩드레스를 개조한 것처럼 생겼는데, 옷에서 쓸 때 없이 은은하게 발광하고 있잖아?”

 

그거야 당연히 명등룡의 소재로 만들었기 때문이지.”

 

“...너 언제부터 헌터가 된 거야?”

 

세린의 활동범위마저도 다른 세계를 침범하고 있는 건가? 생각해보니 세린도 나의 에너지와 같은 종류잖아?

 

창조신이 일전에 다뤘던 에너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는 것. 애초에 잡화점 그 자체인 세린의 입장에선 이미 인간의 시점이 아니다. 잠깐? 그러면 잡화점 안에 있는 것이 다른 신이 안 되는 이유가...

 

인간이 잡화점의 주인이 되야 하는 이유는 지금 남자로 돌아간다면 잡화점 그 자체와 동화되기 때문?”

 

대단하네? 이제서야 내 마음을 알았구나?”

 

순식간에 해머에 맞은 충격이 머리에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세린의 입장에서는 내가 남자든 여자든, 내가 잡화점에 동화하지 않고 우선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심술궂은 일을 벌이고 있었으니까. 미움을 받을지언정 자신의 소중한 사람은 꼭 지키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말로 이야기를 해야 할 거 아냐. 그런 이유라면 아무리 나라도 먼저 소리치지 않는다고.”

 

애초에 네가 알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알아도 이야기는 못했으니까. 어차피 지금은 네가 알아챘으니 진실을 말해도 상관없지.”

 

다만...

 

카린 씨? 문이...”

 

연미복을 입은 리제로트의 인형 월터가 문을 향해 경계를 하고 있었다. 잡화점에 드디어 손님이라도 온 것일까? 아니, 평범한 손님이라면 월터가 경계를 하지 않고, 리제로트 마저 내 등뒤에 숨어있지는 않았다.

 

호오? 이곳이 그 잡화점인가? 짐이 예상한대로 손쉬운 진입방법이 아니구나.”

 

마왕 레프리시아?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들어온 거야?”

 

현관으로 들어왔노라.”

 

아니. 지금 내가 그런 시시한 장난을 하자고 그런 질문을 한 줄 알아!”

 

질문의 의도야 어떻든 타락의 마왕이자, 모든 차원계를 흔들어버릴 만한 강력한 마왕. 레프리시아는 칠흑의 드레스를 입고 잡화점에 쳐들어와버렸다. 사실 마왕성에 용사가 쳐들어오는 건 흔한 클리셰인데, 마왕이 잡화점에 쳐들어온 것만 생각하면 마을을 침략하는 것보다 더 흔하지 않는 클리셰임이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은하게 달빛으로 내려오는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나부끼는 동안, 주변에 마계공작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거지.”

 

사실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의상이든 성별이든 일단 작은 걸 떠나서, 지금 레프리시아가 흘리는 오러가 잡화점 내부를 침식하려고 들었다.

 

그야 당연히 짐이 보낸 청혼에 대해 왔노라. 그리 사랑스러운 모습을 하고 짐을 만나고 싶어했다면, 흔쾌히 시간을 들여 준비하라고 했을 터.”

 

이런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결혼을 하고 싶다는 건 아니거든? 그리고 이건 잡화점이 멋대로 입혀놓은 거야. 그러니까 쓸 때 없는 힘주지 말고 그 불길한 오러를 제거해주겠어? 내 뒤에 있는 아이에게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니까.”

 

마왕이라는 존재는 일반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거북한 존재였다. 가빠오는 리제로트의 숨소리를 듣고 세린에게 리제로트를 보호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마왕의 보라 빛 눈동자는 살며시 빛을 띠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아이? 그런가? 유부녀인가?”

 

웃기지마! 남자에게 유부녀라는 소리를 한다는 거 자체가 이상하지 않아?”

 

지금은 여자이지 않는가?”

 

시끄러워어어어!”

 

소리는 공기를 찢으며 퍼져나갔고 레프리시아는 그런 나를 무표정 반응했다. 상대의 표정을 읽고 파악할 수 없는 레프리시아의 포커페이스에, 천천히 진정을 하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곳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마왕? 이곳에 온 사람이라면 어찌 되었든 모두 똑같은 손님일 뿐. 지금은 신분이든 계급이든 모두 다 제한된 장소야.”

 

그야 당연히 그대를 찾아왔다. 그대와 결혼을 하기 위해 말이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어느 누구도 찾아낼 수 없는 잡화점에 들어온 건가? 아니, 어쩌면 내가 맨 처음으로 레시아를 2층에서 소환했던 전과가 있으니, 가능성이 거의 없는 가설이라면 2층의 물건 중 하나가 지금의 마왕까지 이곳을 찾아오게 만든 것일지도 몰라. 그야 당연하게도 각본가는 모두 제외되었고, 왜곡된 이야기는 분명 없으리라고 생각하니까.

 

아니면 짐이 남성체가 되는 편이 더 좋은가?”

 

그러니까 본래 성별인 남자에게 그런 소리를 하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청혼 안 받아준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그래도 그대는 짐을 보기 위해 마계까지 온 것이 아닌가?”

 

그래. 맞아. 회군을 하기 위해서보단 개인적으로 보고 싶다고 했지. 그리고 봤잖아? 봤으면 내 목적은 다 완료한 거라고? 이제 네가 세상을 부수던 가루를 만들던 상관 안 할거야.”

 

그러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레프리시아의 키가 더 컸으니 내가 자연스레 올려다 보게 되었고, 빠질 것만 같은 레프리시아의 눈동자와 마주친 상태로, 시간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그대는 짐을 처음 보았을 때, 쓸쓸한 눈을 하고 있었다. 보통 마왕을 처음 보았어도 쓸쓸하거나 그리운 듯한 눈을 하지 않지. 그러나 곧 이어 실망에 빠졌다. 그대가 찾고 있던 마왕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미겠지. 그 반응을 추측한다면, 그대는 일전에 짐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노라. 그대는 누구이고, 이곳에 어찌 왔는지 말해보거라.”

 

너무 날카로워서 베이는 줄 알았다.

이 마왕에게 무서울 정도로 통찰력을 준 창조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카일. 나는 모순덩어리. 본래 있어서는 안 될 존재야.”

 

이런 식으로 소개를 한다면 상대방 입장에선 좀 강한 면모를 남길 수 있을까?

아님...그냥 바보 같은 허세병으로 병자취급을 받을까?

 

그리고, 잡화점의 주인이자. 마왕 레프리시아의 주인이기도 하지.”

 

뭣이?”

 

당황한 모습을 여기서 보이는 건가? 자신의 위는 없다고 생각했던 마왕에게 있어. 나의 대답은 충격적이라고 봐야 했다. 힘이 사라진 마왕의 손가락을 살짝 치우고 뒤를 돌아 말을 이어 나아갔다.

 

물론 너를 말하는 건 아냐. 너보다 더 귀여운 검은 고양이가 있거든. 나는 그 아이와 혼인을 했고, 너의 청혼은 받아들이지 않아.”

 

의미를...모르겠군.”

 

모르는 게 당연해. 지금의 너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인걸.”

 

마왕에게 쐐기를 박았다.

물론 나 자신에게도...

 

그러면 이제 볼일 다 봤으면 돌아가주겠어?”

 

아니. 짐은 아직 돌아가지 않는다.”

 

대체 왜? 아무리 같은 타락의 마왕이라고 해도, 다른 건 다른 거다. 그렇게 쐐기까지 박았다면, 보통 돌아가는 것이...아니, 내가 상대를 좀 얕봤구나. 상대가 아무리 다르더라도 본질은 타락의 마왕.

 

그대가 이전에 어떤 생활을 했는지 몰라도, 이전의 짐과 같이 생활을 했었다는 건 사실이라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그대의 곁에서 짐과 오래 생활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흔적이 보인다고?”

 

그렇다. 함께 했던 사념을 이곳에서 볼 수 있노라. 짐은 마왕이다. 마왕이 모르는 것 또한 없어야 하며, 설령 다른 차원에서 일어났던 일이라도, 그것을 감지하고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기묘한 긴장감속에 만들어진 고요함. 그리고 그 고요함을 깨부수는데 5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 매일 이곳에 찾아오겠다.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대는 오히려 편한 관계를 더 선호하기 마련. 그대의 마음을 얻어야 세계정복도 손쉽게 이룰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확실히 레시아와 같은 점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인가?

마왕의 뒷모습이 내 눈 앞에서 사라지는 동안, 굳어버린 듯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세계정복을 하러 나가라고. 이곳에 왜 매일 놀러 오겠다는 건데?”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다.”

 

더 불길해...

그보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이곳에 찾아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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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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