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

 

 

 

본래 내가 아는 염라대왕이라면 거대한 의자에 앉아, 매서운 눈을 하고 죄인의 업보를 생각하며 가차없이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자. 지옥이라면 무궁무진한 고통과 절규로 가득 차 있으니, 행한 업보만큼 고통을 받아야 깨끗한 영혼이 되어 환생한다는 게 명계의 존재다. 신과 여신의 선택을 받거나 신앙에 몸을 담근 영혼들은 죄를 지어도 용서를 틈틈이 구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훗날 천계에 부름을 받는다. 베가프도 지금쯤이면 천계에 있어야 할 녀석이긴 한데...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하고 있는 거냐?]

 

머리에서 울려 퍼진 말소리는 히드라 안에 있는 월식의 목소리였다. 남이 오래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냐며 대답할 수 있지만, 그런 까칠한 말은 하지 말고 다른 말을 선택지에서 골라하도록 해보도록 하자.

 

[지금 이 시간이 너무 길어서 잡생각 좀 하고 있었어.]

 

방금 전만해도 염라대왕과 대면을 했을 때 나눈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저 특이사항이 하나 있다면...

 

보이드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본인은 알고 싶어할 것이 있다네.’

 

염라대왕쪽에서 먼저 나에게 보이드에 대한 진실과 원인을 알려고 했다. 명계도 그곳에선 세계로 인식되니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이 존재할 터. 그러기에 모든 장소에도 보이드가 가로지를 수 있다.

 

[레이베리아의 힘이 날로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겠는데, 시공간의 개념이 달라도 날려먹는 것만큼은 똑같다는 소리가 되는데, 이건 다른 평행차원마저도 날려 먹을만한 위력인 거지. 일이 파면 팔수록 더욱 더 커지는 건 기분 탓인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이 상황을 막아야 해.]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 막을 건지 생각만 하는 건가?]

 

[아니...]

 

나는 잠깐이나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더니...

 

이것도 잘 어울리다니이! 역시 카일이에요오!”

 

아니나 다를까 아직도 백화점에 잡힌 상태로 계속해서 루니아 누나가 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백장미에 찍을 옷을 구입하기 위해 여성의류만 계속...10분만 입고 있어도 정신적으로 힘들어 죽겠는데 2시간째 흐르고 있는 이 지옥이라면, 염라대왕도 인정하고 새로운 지옥을 만들어주지 않을까?

 

끊임없이 고통 받고 있는 중이라 생각만으로 도피하고 있었는데, 눈을 뜨고 현실을 마주하니 도피는 도피일 뿐이며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구경꾼들이 더 몰려와 따가운 시선이 무차별공격을 퍼붓고 있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집에나 돌아갔으면 좋겠다.

 

사건이고 뭐고 그냥 전부 다 귀찮아지기 시작했어.

 

저기요. 좀 조용히 해주세요. 구경꾼들이 데이 아 빌리언스처럼 쏟아져오고 있잖아요. 커멘드 센터를 순식간에 이쪽이 그들의 놀이터가 되기 전에, 목소리 좀 낮추고 이야기 해봐요.”

 

저 옆에 흐뭇하게 웃고 있는 여직원도 내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얼른 고개를 돌려서 다른 손님을 보았다. 저 인파들을 어떻게 뚫고 나갈지는 이미 다 계산을 해뒀으니, 지금은 루니아 누나가 여장 당한 나를 끌고 백화점 한 바퀴를 돌지 않기로 간절히 빌자.

 

간절히 빌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

 

! 그럼 음식코너로 가볼까요오?”

 

줘야 하는데 날 도와줄 우주는 다 죽었나 보다.

아니면 보이드에 지워졌거나.

 

하는 수 없이 끌려가는 와중에 안리아스 수정구에 불빛이 들어왔다. 크기를 자유자재로 키우고 줄일 수 있으니, 지금은 귀걸이의 장신구 형태로 남아있었는데, 살짝 건들이자 허공에 투영된 영상에는 소피아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어라? 옷이 바뀌어있네?]

 

. 어쩌다 보니...”

 

[굉장히 잘 어울려! 마치 선녀 같은 느낌인걸?]

 

저걸 그냥...

다시 명계로 찾아가서 아이언 클로를 사용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이번엔 무슨 일이야?”

 

[! 맞다! 이번 명계에 올 때 금화 2개를 준비하라고 전해달래!]

 

밝게 웃으며 저승 편도 티켓을 끊을 금액을 내 앞에서 말하다니, 상상을 초월한 딸을 가진 나는 살아있는 자들의 생각을 먼저 알려줘야 할지 고민했다.

 

살아있는 자들은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는데, 그 이유는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한된 수명 속에서 좀 더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한 발버둥일까? 매번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인생에서 죽으면 다 잃더라도 꼭 해야 하는 것이 존재할까?

 

과연, 인생이란 것은 아직까지 깊게 파고들만한 단어다.

물론...여장을 당하고 사는데 딸에게 저승으로 오라는 통보를 받는 내 인생 말고...

 

금화 2개는 왜?”

 

[그야 저승으로 가려면 뱃사공에게 돈을 줘야 하거든! 어라? 이거 아빠에게 용돈 받는 건가? 그러면 매우 신나는 일이네!]

 

용돈 받고 저승으로 보내는 게 신나는 일이라면야 당연하겠지만, 명계로 가는 길이 어린아이가 들뜬 마음으로 놀이공원에 가는 길이 아니다. 죽은 자가 심판을 받기 전에 거치는 단계지.

 

그래도 레시아가 만일 잘 웃고 다녔다면, 저렇게 예쁜 미소를 매번 볼 수 있는 걸까? 레시아가 웃는 경우라면 극소수에 해당하지만...나중에 레시아를 웃겨라!’라는 것도 해보도록 하자. 자매품으로 시나를 웃겨라.’도 해보고...

 

[아빠. 또 레프리시아 생각하는 거야?]

 

어쩌면 이렇게 아빠의 속을 잘 알지? 역시 부모의 마음을 잘 아는 건 자식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라면, 어디서 많이 본듯한 공허한 붉은 눈빛이 내 심장을 꿰뚫고 한기가 등을 타고 올라오게 만드는 거지.

 

실로 무섭다.

지금이라도 명계로 끌려갈 것 같아서 더욱 더 무섭다.

 

아냐. 소피아가 자주 웃으니 예쁘다고 생각해서.”

 

[정말! 헤헤헷!]

 

태세전환은 내가 말하자마자 2초후에 이루어졌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내 목숨을 겨우 부지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실로 무서운 아이구나...

 

미래의 나는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지금의 나까지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거냐고...멱살이라도 잡고 흔들면서 묻고 싶어졌다. 나에게 왜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명계에 가야 하는 이유라면...염라대왕이 불러서 가는 건 아니지?”

 

내 업보에 대한 죄를 선고 받고 무한한 고통을 받으며, 새로운 영혼으로 탄생한다는 일이 벌어져선 절대로 안 된다. 그 때만큼은 죽음을 뒤집어서라도 살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명계에 가야 하는 이유는 없어. 우리가 올라가면 되니까.]

 

이번엔 염라대왕이 중간계로 올라와서, 모든 이들을 심판하러...잠깐? 중간계에 염라대왕이 올 필요까지 있던가? 사람들이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업보를 한 가득 쌓고 있다고 해도, 강림해서 싹 쓸어버리는 건 노아의 방주 시즌에 폭우가 무차별적으로 내리지 않는 이상, 하나하나 유죄와 무죄를 따지는 것도 힘들...

 

[아빠! 또 엉뚱한 생각하는 거야!]

 

요즘 딸들은 다 초능력자인가?

내가 엉뚱한 생각을 한다는 건 어떻게 아는 거야?

볼을 부풀리며 바라보고 있자니 귀여워서 웃음만 나왔다.

아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명계의 존재들이 지상에 올라가는 이유는, 곧 죽은 자를 데려가기 위함이 아냐?”

 

[아니. 가끔 백장미 사러 올라오는데?]

 

. 그래...명계에 왜 그렇게 퍼져있는지 이유를 알겠다. 다시 혼란스러운 머리를 붙잡고 수정구를 보았다.

 

잡화점으로 가 있으면 될 거야. 안리아스의 수정구는 잡화점의 물품이니, 나에게 받았다고 하면 쉽게 문을 열어주겠지. 그런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는 거지만...혼자 오는 거야?”

 

수정구로 이야기하는데도 목소리를 조용히 깔아 내리며 속삭였다. 혹시 근처에 염라대왕이라도 들으면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니 말이다.

 

본인이 들으면 안 되는 말이라도 있는가?”

 

아뇨. 당연히 없죠. 설마 지상에까지 올라와서 저를 명계를 끌고가 심판하려는 일을 경계하는 것은 아니...허어어어억!”

 

짙은 화장을 실물로 보니 강렬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나보다 키는 작지만 건들이면 큰일나요.’라는 분위기는 모든 이들을 휘어잡기 마련. 명계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무엇보다도 찬란한 금색과 붉은색의 테두리가 가미된, 원피스는 확실히 눈에 띄었다.

 

지금은 겨울인데, 옷이 계절에 비해 얇은 것도 눈에 띄었고...

 

무엇이 안 되는지 똑바로 말해라. 안 그러면 형량을 더 추가하도록 하지.”

 

저기. 제 업보와는 무관하게 형량을 올린다는 건...”

 

조금이나마 살고 싶다는 간절한 자비를 몸을 굽실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 주변을 한 바퀴 두르며 천천히 음미하듯 관찰하기 시작했다. 염라대왕이 이곳에 온 이유가 백장미 모델이 실존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하러 온 거야?

 

수많은 영혼들의 끊임없는 재판은?

이러다 죽을 사람이 안 죽고 계속 살아있는 걸까?

 

그렇군. 명계에 영향을 끼친 원인이 바로 너였군.”

 

명계에 무슨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겠지만, 그 잡지는 태워야 하는 게 맞아요.”

 

아니. 보이드가 생겨난 원인 말이다. 지금 그대가 이곳에 현존함에 따라, 수많은 차원이 너를 중심으로 융합하려고 하고 있다.”

 

나 때문에 융합한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군.

너무 당황해서 목소리 톤이 살짝 삐끗해도 나에 대한 변호는 멈추지 않았다.

 

저는 마나의 축복을 받은 거지. 우주의 축복을 받는 건 아니에요. 만약에 우주의 축복을 받았다면 지금쯤 제가 간절히 소원을 빌 때, 직접 나서서 도와줬을 거라고요.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서 염라대왕님이 소원을 간절히 빌어도, 우주가 직접 나서서 도와주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본인은 삼천세계에 흥미가 없다. 다만, 명계가 허물어지면서 죽은 자의 세계에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 그러니 선택을 하거라.”

 

그 전에 어째서 다른 차원까지 융합하려고 하는지 생각을 좀 해볼 필요가 있는데, 이건 우주적인 관측이 필요하지만 내 시야로는 모든 우주와 평행차원을 한 눈에 담을 수 없다.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염라대왕은 선택을 강요했는데...

 

첫 번째는 이 시간 축을 떠나거라. 엘티노스의 잡화점은 시간 축당 하나가 되어야 한다. 두 번째는 네가 죽는 방법이 존재하지. 하지만 본인이라면 이 시간 축을 떠나는 일은 아주 간단할 터. 어찌 이곳을 벗어나지 않고 계속 존재하려 하는 것인고?”

 

계속 존재하는 이유는 당연히 사건에 휘말려버렸기 때문이지 않는가? 정확하게는 내 후손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얼마나 살아남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300년 뒤의 미래에 나는 어떠한 존재이며, 또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발자취도 확인할 겸이었지만...그건 스포일러를 직접적으로 확인하는 거니 그렇게 상세히 파고들지 않았다.

 

만일 후손의 일 때문이라면 당장 떠나는 것이 현명할 터. 후손들이 알아서 처리할 일을 과거의 망령이 지금 찾아와서 해결할 일이 아니다.”

 

뭐라 변명은 하고 싶은데, 날카롭게 뜬 눈은 변명하면 죽이겠다는 메시지를 아낌없이 퍼붓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직접 자네를 명계로 끌고가 심판대에 세워야겠지.”

 

저승사자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하겠다는 의지를 보아하니, 어지간히 나의 존재가 거슬린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가지. 딱 한가지만 물어봐도 됩니까?”

 

무엇인가?”

 

주변을 둘러보자 나와 염라대왕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결계가 생성된 건지, 아니면 나를 다른 공간으로 잠깐 이동시킨 건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내가 하는 말은 염라대왕만 들을 수 있다는 의미니까.

 

제가 보이드의 주 원인을 해결하고 가면 안 됩니까?”

 

나의 말을 들은 염라대왕의 얼굴이 거대한 분노로 인해 일그러져만 갔다.

===========================================================================

믿겨지지 않아...

나에게 휴일이 없다니...[주말 출근에 야근]

 

블로그 이미지

FNL-Phantasm

카테고리

판타즘의 공간 (757)
글쓰기 관련 공지 (2)
취미로 글쓰는 중? (753)
즐거운 스트리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