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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어서 이곳에 가만히 있겠다는 신선한 헛소리는 1급 청정수급의 신선함을 자랑한다고 광고를 내고 싶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서로를 경계하면서 긴장의 끈을 놓으면 죽이겠다니. 자기 멋대로 사는 것도 정도 것이지만, 월식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공복을 채우기 위해서, 어떤 수를 쓰던 꼭 그걸 이루어내는 야비한 녀석이다.

 

예전에 월식이 봉인된 구슬을 잘못 건드릴 때는 좋다고 내 몸을 빼앗아갔지만, 지금은 시나와 오랫동안 활동해서인가? 아니면 창조신에 버금가는 힘을 손에 얻어서 그런가?...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제멋대로 잠식하지 못하는 걸로 보아 보안이 걸려있는 모양이다.

 

하나이면서도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자 하나인 존재라니. 다른 우주에 있는 마블에서는 우주적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이곳에서는 그저 월식에 대한 종족의 컨셉인 모양이다. 오래 전에 거대한 어둠이었다가 잘게 쪼개지더니 뱀으로 변했다. 라는 듯한 전설 속의 동물 같으니라고!

 

그럼 이제 진짜 궁금한 걸 물어보도록 하지.”

 

좋다. 인간이여. 뭐가 그리 궁금한가?”

 

이곳에서 왜 굶어 죽는지 이유를 알 수 있나?”

 

그 대답은 간단하다.”

 

대답은 간단해서 좋...

 

파멸까지 몰아가는 유랑극단들의 행차에 모든 곳은 보이드로 뒤덮이며, 눈을 떠보니 거대한 암흑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절망적인 우주를 창조하고, 그 우주는 점점 수축을 하다가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레이베리아의 손에 창조되리라. 그 이후엔 모든 존재와 모든 세계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질서, 다른 환경, 다른 경험으로 생성된다.”

 

대답이 간단하다며.

얼마나 긴 거야?

 

간추리자면 재창세에 대한 이야기로군. 대체 뭐가 불만이길래 이런 세계를 뒤바꾸겠다고 300년씩이나 걸린 끝에 이제서야 바꾼다는 거지?”

 

잡화점의 주인은 항상 그들의 방해가 되었으니 말이다. 가만히 보아하니 여장을 좋아하는 괴상한 남자인 줄 알았으나, 잡화점의 주인은 여장이 더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는데 진짜로군.”

 

이런 제기랄!

왜 월식에게 여장이 더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데!

 

내 여장이고 나발이고 이야기는 해줄 테니, 내 궁금증이나 마저 해결해주길 바래. 그렇다면 이 공간은 네가 만든 것이 아니라 레이베리아가 만든 건가?”

 

이 세계의 균형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창조신이 자리에 없고 천계와 마계는 인간들 사이에선 알게 모르게 대전쟁을 치르고 있지.”

 

대전쟁이라면?”

 

“Yee.T 보드게임을 건 대전쟁이다.”

 

왜 그딴 걸 걸고 대전쟁을 하냐고! 무엇보다 그 보드게임이 얼마나 중요하길래!

 

대체 왜 그 보드게임이 중요한 거야? 어쨌든, 그런 사이에 유랑극단은 이런 보이드를 계속 만들어서, 이 세계를 지우개를 쓰는 것처럼 지우고 있다는 소리지?”

 

정확하다.”

 

유랑극단의 속셈은 뭔지 알았고, 창조신의 자리가 공석인 것을 이용해서, 다른 공간을 무차별적으로 지우기 시작했다는 의미도 잘 알았다.

 

하지만, 이곳에 잡화점 주인이 온 뒤로 보이드 또한 사라지고 있으니, 유랑극단에선 잡화점의 주인을 필사적으로 배제하려고 하는 거겠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창조신의 공석을 대신 맡아주는 꼴이 되어버렸구나. 내가 죽이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군.”

 

창조신의 공석을 내가 대신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시나도 대신 채워줄 수 있긴 했다. 힘이라면 비슷한 성질을 띄고 있으니까. 그러나 시나의 경우 다른 차원에서 왔으니 이곳 차원에서는 이곳을 맡아서 관리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고작 해봐야 빛의 추종자 하나를 길러냈으니 말이지.

 

내가 와서 기껏 힘겹게 시공간을 지워서 생긴 보이드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거네?”

 

레이베리아가 저번에 리제로트에게 잡혔을 때도 바로 죽이라는 이유가 그거였군. 이미 나라는 존재 자체가 거대한 방해물이 되어버렸다. 유랑극단의 어릿광대도 월식을 계승 받은 존재니까, 자연스럽게 이 뱀은 유랑극단의 음모론을 꿰뚫고 있다는 소리고, 거짓말일지도 모르지만 믿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제 인간이여. 너의 이야기를 해다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지내왔는지.”

 

아니. 내가 너에게 말하면 모든 이야기는 어릿광대에게 흘러가잖아? 너희 종족은 하나이자 모든 것이라면서. 어릿광대에도 월식이 심어져 있었고, 카멜롯 마법학원에 있던 한 녀석도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전제하에, 월식의 파편을 지니고 있으니 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그 뿐만이 아냐. 이곳은 시공간이 아예 없는 공간이고, 또 다시 만들어내는 바탕이 된단 말이지. 지금 나는 시공간마법을 사용해서 이곳에 공간좌표를 만들어냈어. 그 말은 무슨 뜻인 줄 알아?

 

이곳에 시공간이란 개념을 새로 만들었다는 건가?”

 

맞아. 내 존재가 그리 큰 걸림돌이라며. 이런 공간은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지.”

 

당연히 그 시공간을 재편성하기 위해 쏟아야 하는 피와 눈물이 많겠지만...

 

그러면 내가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다.”

 

아니. 있어.”

 

여태까지 내가 유랑극단의 본거지를 몰랐던 이유. 그리고 암묵적인 네트워크를 사용하면서도 그리티스 씨가 모든 세계에 분신을 퍼트려도 못 찾았던 한가지 이유라면...

 

그 유랑극단들. 전부 보이드에 터를 잡아놨지?”

 

월식은 침묵했다.

침묵은 긍정의 표시니 무의식적으로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시공간이 아닌 장소에 숨어버리면 그만이다. 그것도 나처럼 일부분만 시공간좌표를 재편성해서, 그나마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면...

 

여태 찾을 수 없는 이유가 다 있었네.”

 

머리에 잠금 장치가 하나 풀려나간 기분이 든다. 이제서야 작은 자물쇠를 풀었는데, 더 큰 자물쇠가 문 여는 걸 방해했으니...

 

유랑극단이 숨어있는 보이드를 찾기 위해선 너의 힘이 필요하니까.”

 

다만, 월식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설득을 한다는 그 자체부터가 심든 녀석이고 진짜 진지하게 말해서, 저 녀석만큼은 백장미인지 뭔지 하는 것도 통하지 않을 거다.

 

나와 같이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라면, 인간의 목 위에 있는 것이 평범한 모자걸이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겠군.”

 

월식과 같이 움직이는 건 어릿광대에게 위치가 노출된다는 소리도 있고, 더군다나 다른 차원의 월식들 중 몇몇은 이곳 세계에 넘어올 수 있다는 소리지만, 그런 양날 검은 이미 이해하고 있는지 오래다. 내가 평범한 모자걸이에서 적어도 생각하는 모자걸이가 되기 위해 내용들을 정리하고 내뱉기 시작했다.

 

지금은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해. 너희 종족은 모든 정보가 다 공유된다고 하지만, 공유가 안 되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두 번째 가능성은 이 보이드 자체가 너희들의 공유를 끊고 있다는 거야. 하지만 보이드를 찾아서 돌아다니는 너희들의 입장에선 두 번째 사항은 그리 신빙성이 없군. 애초에 물고기도 잡아본 사람이 더 잘 안다고 하지. 내가 월식을 좀 상대해봐서 알지만, 너 정도의 크기라면 꽤 오래 살았다고 보는데?”

 

기본적으로 정보공유가 가능한 종족이라면 어린 나이일수록 유리하다. 모든 지식과 정보를 내려 받는 것이 가능하고 앞으로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누적될 정보가 얼마나 많을까? 그렇기에 오래 살면 살수록 약간의 불이익이 존재한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자신만이 간직하고 싶은 정보를 찾고 경험하기 위해 공유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웃는 법을 알면 우는 법도 안다.

해야 하는 것을 잘 알면,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잘 안다.

 

모든 것은 흑과 백이 동시에 공존하는 세상인 만큼, 어느 순간에는 정보공유를 끊어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도 않고, 이런 보이드에 박혀있는 상태로 그 누구도 찾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애초에 어릿광대의 위치도 모르겠네. 다른 월식의 위치도 모르고, 그러니 너는 지금까지 죽기 위해 아무도 찾지 않도록 자신의 종족과 공유를 끊고 있었다는 거야. 간단하게 말할 것을 너무 돌리다가 꼬일 정도로 말하긴 했는데, 아무튼 지금은 네 힘이 필요해. 네가 비록 양날의 검이라고 해도 검집에 틀어박혀있는 검을 무서울 리가 없지.”

 

뱀이 순식간에 고개를 당겼다. 스프링처럼 튀어나오는 뱀의 머리를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고 그대로 뱀의 턱을 올려 쳤다. 상대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정확한 빈틈을 노렸다고 보고 있지만, 지금은 내 마음대로 시간의 프레임을 늘리고 줄이는 게 가능하니, 비록 내 눈에서는 매우 천천히 다가오는 거대한 입도, 남이 볼 때는 찰나의 순간에 터져나가는 소리에 깜짝 놀랄 것이다.

 

-파앙!

 

-캬아아아아아악!

 

거대한 괴성이 공간을 타고 저 멀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 곳은 결국 시간과 공간이라는 법칙을 받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소리는 작아지며 더욱 더 멀어지다 사라졌다.

 

주먹에는 하얀 빛이 감싼 상태로 머리가 땅에 처박힌 월식의 머리를 한 번 더 찍어 눌렀다.

 

-콰앙!

 

크아아아아악! 그만! 그만해라!”

 

월식은 나에게 자비를 호소했지만, 돌아오는 건 응징의 주먹일 뿐이다. 월식이 나를 도와준다는 맹세를 할 때까지 멈출 의향은 없다.

 

빈틈을 보이면 죽는다고 했지? 그럼 너는 죽지 않을 것 같냐!”

 

-콰앙! ! 콰앙!

 

거대한 괴성은 매번 울려 퍼졌어도 이 시공간은 새로 생긴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이곳에 오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비록 오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그렇게 구타를 10분정도 했을 무렵.

 

그래서. 나에게 협조 할 거지? 기절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때려뒀으니 대답은 빨리 해.”

 

기꺼이...협력하지...”

 

나는 순수하고 평화를 좋아하여 폭력적인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세상물정 모르고 건방졌던 용병시절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보다 잡화점에 있을 때 내가 성격을 얼마나 죽이고 다녔는가? 반 강제로 잡화점 멤버에게 눌려서, 다양한 방법으로 굴려지고, 심지어 잡화점이 나보다 강하다는 방정식이 성립됨에 따라, 이상한 공간좌표로 귀환되어 천장에서 떨어질 때마다 인내해야 했지만...

 

지금은 내가 주도권을 오랜만에 잡아서 한번 날뛰었다.

 

좋아. 그렇다고 내 몸을 침식하겠다는 것은 아닌데,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물건에 들어가서 내 소유가 되어줘야겠어. 일이 끝나면 제때 해방시켜줄 테니까. 그 점에 대해선 안심하라고?”

 

왼팔에선 장갑처럼 감겨있던 쇠사슬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8개의 칼날이 뱀처럼 목을 치켜세웠다.

 

이 녀석은 뱀 조종자라고 해. 전설의 용병인 은빛 송곳니에게 받았지만, 지금의 티르빙은 나에게 없지. 그래서 새로 하나 만들었는데, 네가 9번째 머리가 되어야겠어.”

 

본래 그 무기의 머리는 6마리 아니던가?”

 

알아. 그런데 8마리인 편이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까지 좋은 건 아니더라고...그래도 9개는 채워야지. 안 그래?”

 

아까까지만 해도 8M나 되었던 거대한 뱀의 몸이 허공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먼지처럼 둥둥 떠다니는 검은 파편들이 순식간에 뱀 조종자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은빛으로 빛나던 쇠사슬과 8개의 칼날은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검은 빛을 띠고, 그 사이로 검은 머리가 하나 더 자라났다.

 

잘 부탁하지. ‘히드라’”

 

필요이상 말하진 않겠다. 내가 이곳에 나가서 섣불리 말하면 느닷없이 공유링크가 걸릴 수 있으니 말이지.”

 

히드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 왼팔을 비늘처럼 감싸며 보호모드로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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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과로사 뿐만이 아니라

회사차를 몰면서 사고사도 리스트에 넣어야 겠네요..

망할 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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