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66
566
영혼까지 고통 받는 음식을 먹고 눈을 뜨는 기분은,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있을 이유를 하나 버린다는 의미다. 다시 먹을 수 있는 가능성과 더불어, 형용할 수 없는 다양한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살아있다는 정의는 내 개인적인 생각엔 죽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죽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눈을 뜨고 살아있는 게 아닌가? 정의를 내리려면 그에 반대되는 현상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솔직히 이런 생각을 본래부터 가지게 된 것은 아닌데, 살다 보면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게 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래, 내 앞에 무지개 빛 칠면조 고기가 아직도 많이 남았을 때가 되겠지.
만약 유명한 요리사가 이걸 보았다면, 기절부터 시작했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독설을 퍼붓는다면 양피지 50장에 가까운 논문형식의 독설이 탄생했으리라. 현재 머리에 머물고 있는 50장에 가까운 독설을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인내심 하나를 갈아내며 천천히 루니아 누나를 올려다 보았다.
“이게 뭐에요?”
“서비스으?”
죽음에 이르는 음식을 먹었더니, 죽음에 이르는 음식을 또 주는 1+1형태의 서비스였다. 그보다 의문문으로 나에게 물어본들 명확한 의도를 알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 아니던가...
“더 이상 못 먹어요. 그보다 안 먹어도 되요. 이제 명계로 가지 않아도 연락수단은 만들어놨으니...지금 포크 들지 말라고요!”
깔끔하게 잘려진 무지개 빛의 파편을 포크에 찍어 내 입에 몰래 넣으려고 했지만, 여태 당해온 나날을 생각하면 이제 이런 수법은 걸리지 않는다.
“그래도오. 음식은 남기면 벌을 받는다고 했어요오.”
“루니아 누나는 음식의 수준을 이미 뛰어 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요리가 아니라 연금술이라고요. 지금은 연금술을 뛰어넘어 흑마법이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하면 칠면조 요리가 상대방의 영혼까지 타격을 줄 수 있냐고요!”
이 현상을 마탑에 가져간다면 80년이 지나도 이 미스터리를 해결하지 못하겠지. 아니 80년도 너무 짧았다. 세계가 재창조가 될 때쯤에도 밝혀낼 수 없다고 본다. 그러니 지금은 금발의 여기사를 설득하여 미스터리가 풍부한 무지개를 먹지 않기로 하자.
우선 주제를 바꿔볼까?
“루니아 누나. 지금은 유랑극단의 일에 집중을 하죠.”
“카일이 이거 한 점만 먹는다면요오.”
그러면 완곡하게 거절을 해볼까?
“안 먹어요! 이제 평생을 걸쳐서 안 먹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오 몸은 솔직...”
“웃기시네!”
다른 사람에게 구조요청을 해보자.
“루비아! 나 대신 이걸 먹...”
루비아에게 흑기사를 신청하려고 했는데 흑색의 머리카락이 다른 테이블을 타고 축 늘어졌다. 몸은 이미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가운데, 루비아와 루니아가 본래는 자매였으나, 루니아 누나의 죽음의 연금술...아니, 요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면서 면역이 사라져버린 모양이다.
“지금 여기엔 카일 밖에 없어요오.”
레시아와 루시피나와 마리아와 람파시나 등 잡화점 멤버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잠깐 한숨을 내쉬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2초의 시간을 벌었다. 지금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걸까? 아니, 루니아 누나야 말로 잘 알고 있다. 유랑극단이 인간계, 천계, 마계를 한꺼번에 뒤흔드는 일도 알고, 우리가 300년 미래에서 표류중인 것도 알고 있는데, 무한을 뛰어넘는 거대한 여유의 의미가 늘 궁금했다.
“루니아 누나는 우리가 전에 살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나요?”
“그야 돌아가고 싶긴 하지마안. 이 장소에는 백장미를 찍을 수 있는 장소가 굉장히 많아요오. 그 성지들을 순례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에요오.”
“루니아 누나만 빼놓고 가기 전에 지금 했던 말은 철회하시죠.”
백장미는 확실하게 말하면 방해물이 아니다. 실제로 백장미를 증오하고 있지만 그 덕에 순탄하게 흘러가는 사건들이 많았으니, 오히려 일을 쉽게 해결하는 열쇠 같은 그런 건데, 그런 잡지 하나로 내 인생을 연명하는 방법은 좋지 않다.
나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그럼 카일이 선택하세요오. 음식을 먹거나 아니면 지금 백장미를 찍으러 가시던가아.”
“하나는 정신적으로 고통 받고, 다른 하나는 영혼이 갈리는 건데요?”
흥!하고 고개를 돌린 루니아 누나였지만, 실제로 고개를 돌리고 싶은 건 내 쪽이었다.
“루니아 누나.”
“선택해주세요오.”
내가 전생에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양자택일은 너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할 말만 하면서 몰아붙이다가 문뜩 생각났는지 삐친 얼굴을 풀고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수정구에 비추어진 저 아이는 누구에요오?”
안리아스 수정구에 비추어진 형상은 어린 레시아를 닮고 있었는데, 후드를 넘기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연보라 빛 머리카락과 붉은 눈은 레시아를 이어받았지만, 영특한 지혜는 이어받지 못한 듯 했다.
“소피아. 무슨 일이야?”
[아! 아빠!]
-달그락!
옆에서 바로 들은 루니아 누나의 포크가 떨어졌다. 나를 먹이려고 했던 무지개 빛의 고기조각은 땅에 떨어졌고 그 밑에 있는 수많은 박테리아들을...죽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보통 음식 위에 올라오는 게 정답일 텐데, 살균작용까지 가능한 무지개 빛음식이라니...
아니,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아! 잘 되는구나! 처음으로 문안인사를 해보려고! 이곳은 애석하게도 통화가 안 잡히는 명계라서 말이지! 그런데 아까 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뭐, 포크가 떨어지긴 했는데 그리 큰 걱정은 안 해도 괜찮아. 적어도 내가 명계까진 제대로 전달한 모양이네.”
[응! 정말 고마워!]
“자! 잠시만요오! 아빠라니요오!”
나는 잠깐 수정구를 건드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했다. 당황한 루니아 누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는데, 힘이 너무 들어갔는지 의자에서 내 엉덩이가 벗어나 허공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루니아 누나! 300년 뒤의 미래에요! 현재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보다 얼마나 휘두를 생각이에요! 그만 좀 휘둘러!”
산소부족으로 먼저 죽을 거라 생각은 해봤는데, 아차! 하고 루니아 누나가 손을 놓자마자 빠른 속도로 다른 벽에 부딪쳐서 떨어지는 운명을 맞이했다. 루니아 누나의 레인보우 푸드가 아닌 직접 손으로 제거당할 뻔했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렸고, 초조해진 루니아 누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카일과 저의 후손도 있죠오! 분명 저의 백장미 사업을 이어나간 아이가 있으리라 믿어요오!”
후손의 생존여부를 묻는 이유는 백장미가 아직까지 나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인가? 하지만 300년으로 넘어와서 진지하게 조사를 하지 않아도, 루니아 누나가 다시 백장미를 미래에 뿌리기 전까지 가업을 이어받았다는 소식자체가 없었다.
“지금은 루시피나와 레시아의 후손까지는 찾았는데, 레이비스 가문이 아직까지 현존하고 있지만 자세한 건 잘 모르겠고, 아직 찾아야 할 사람은 좀 많이 있긴 해요. 베가프의 후손은 찾긴 했어요.”
“그럼 저와 카일의 명작품은요오! 유산은요오! 황금의 정신은요오!”
“마지막은 기묘한 모험 시리즈에서나 찾으세요.”
황금의 정신은 다른 사람에게 박혀있으리라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겐 없는 정신이니 머리를 열어서라도 찾지 말도록.
“안 되겠어요오. 아무도 없는 이 틈을 타서 백장미를!”
“백장미 찍을 생각하지 마요.”
무엇보다 눈을 보아하니 백장미‘만’찍는 것이 아니리라 본다. 다른 이유로 트라우마에 한발자국 다가서기 전에, 수정구를 건드리고 소피아와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빨리이! 입으세요오!”
“이런 젠장!”
얼마가 지났는지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은 무한한 지옥처럼 느껴졌다.
[어라? 무슨 일 있었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피아는 수정구 너머에 있는 나를 훑어보려고 했지만, 소피아와 연락을 하면서도 루니아 누나가 뜬금 없이 여성용 의류를 들고 오느라, 결국 추격전이 벌여졌고 5분동안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틀어막아 겨우겨우 여장 당하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중이다.
-쿵!쿵!쿵!
“빨리 열어요오!”
[열어야 하는 거 아냐?]
“아니. 열면 내가 죽어. 정신적으로 죽기 때문에 절대로 열기 싫어.”
문이 부셔져도 이상하지 않는 충격이 내 등뒤에 울려 퍼지고 있는데, “계속 이러면 누나 화낼거에요오!”라고 경고도 서슴없이 했다. 안부인사를 묻는 작은 계기가 어쩌다 이런 난장판이 되었을까?
[그런데 저 언니를 피해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어?]
“가만히 있는 사람을 여장시키겠다고 뛰어오는데 당연히 도망가야지. 그걸 받아주고 있을 수는 없거든. 이상한 모델잡지나 세우려고 하니까...”
[백장미를 말하는 거야?]
이름을 듣자마자 사례가 강렬하게 들릴 뻔했다. 그나마 어마어마한 인내의 힘으로 참아냈지만, 엉킨 실타래마냥 거대한 혼돈이 머리에 묶여버렸다.
“...왜 그게 명계에도 이름이 퍼져있는지 잘 모르겠네.”
“그거야 염라대왕님도 보시니까.”
...요즘 염라대왕님께선 일이 없으신가?
“대체 그걸 왜 보는 거야. 어째서 명계에서 그런 게 퍼지냐...”
명계에도 퍼졌는데 온 우주에도 퍼졌겠지. 젠장할...
[우아! 그 모델 아빠였구나! 어쩐지! 가끔가다 이상한 여자가 눈에 보이곤 했는데, 일부러 친구라고 속이고 그런 플레이를...]
“플레이라고 하지마! 그리고 난 미래에도 여장을 당하는 거냐!”
루니아 누나가 미래에 같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하지만 루니아 누나는 인간일 터. 나는 용족혼인을 나타내는 문양도 있으니, 내 수명은 기본 인간들보다 훨씬 긴 것이 맞다. 그런데...
불길한 미래 스포일러는 꾸준히 내 귀에 들어왔다. 결국 나는 머나먼 미래에서도 여장이나 당하면서 트라우마를 겪어야 하는 불행한 인생을 계속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도 이번엔 염라대왕이 보는 잡지를?
염라대왕이 왜 백장미 같은 걸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인간계에 있는 물건을 명계에 가져가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게 보는데... 천계에서도 인간계에 있는 물품을 가져오면 안 되겠지만, 아우리스가 어기는 바람에 백장미 하나는 허용했다고 한다.
다시 생각을 바꿔서 정리하자.
명계에 갈 방법?
있다.
그런데 문제는?
쓰기가 싫다.
게다가 내가 유도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겠지. 내가 요구하는 목표는 유랑극단을 막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이니까. 명확한 목적과 명계에도 커다란 타격이 끼친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진, 이렇게 소피아와 이야기를 하면서 상황에 대해 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소피아로부터 안부를 수정구로 받았지만, 루니아 누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지개 푸드를 먹이거나, 여장시키려는지 이유는 찾아볼 수 없으니 문제.
그러면 루니아 누나는 정말 내가 하는 일에 방해만 되는 존재일까?
그것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잡화점 외부에 있는 적대세력은 루니아 누나가 직접 요격하고 있으니, 쉬는 날에만 이러고 있는 것뿐이다. 여파는 크지만 스트레스 해소라고 생각해야 할까?
-콰지직!
몸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라는 명령을 내리고, 고개는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대검의 옆면을 통해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잡화점에 있는 문들은 그리 튼튼한 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외부충격은 모두 흡수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좀 나빴다.
“여기있네요오. 카일...후후후훗.”
“아아아아아악!”
공허한 붉은 눈이 뚫린 틈 사이에서 내 눈을 꿰뚫듯 보고 있는데, 원초적인 비명을 질러버린 이후로 기억의 단편이 날아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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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사 할 거 같네요...
살려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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