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68
568
무턱대고 들어간 장소는 복사 후에 붙여 넣기처럼 지루하게 짝이 없는 풍경을 뿐. 너무 지루한 나머지 딴생각이 머리에서 뛰어 놀고 있는 중이다. 그 딴생각의 내용이라면 꿈을 꿨을 때 나타난 6번째 양의 존재다. 6번째 양은 매번 울타리를 넘지 않고 장난을 치는 건지 진짜로 넘지 못하는 건지, 괴상한 방법을 총 동원하여 날 놀라게 만드는데, 300년 이후에는 6번째 양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과연 그 양의 정체는...
“그나저나, 이 길은 어디가 끝인 거야?”
1시간정도 더 걸어갔을 무렵.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어디부터가 잘못 되었는지, 출구가 나타나지 않고 뒤를 돌아봤을 땐 루니아 누나도 없어진 상태였다. 시공섬으로 깰 수 없는 통로라고 생각하고 처음엔 외부 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실험 좀 하고 싶었지만, 막무가내로 걸어가보니 내가 여장하고 있다는 상황을 이제서야 깨닫고,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싶을 지경이다.
옷이야 직접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힘은 아끼고 아껴야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으니, 지금은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고 앞으로 30분정도 더 걸어가다 아무것도 없으면, 잡화점으로 긴급귀환을 하도록 하자.
“하지만 이 불안감은 어디서 나타나는 걸까.”
혼자서 어두운 길을 걷고 있으면 누군가가 뒤에서 확 덮치거나, 앞에서 놀라게 만드는 상상을 한 적이 있지 않는가? 혹은 유령이 벽 옆에서 튀어나오는 날엔, 내 경우에는 전력을 다해 손바닥을 휘두를지도 모른다. 그런 장소에서 오랫동안 걷다가 갑작스레 이런 생각이 난다면, 계속해서 불안해지고 그 불안감은 서서히 커지지 않는가?
지금 내 상황이 그렇다.
유령이나 살인자나 그런 건 무섭진 않은데, 어느 순간 루니아 누나가 튀어나오는 날이라면 충분히 기절하고도 남겠지. 하지만, 문제라고 한다면 루니아 누나가 어느 사이에 뒤에서 사라지고 나서, 우리 둘 다 이곳에서 갇혀 있는 건지. 아니면 루니아 누나는 빠져나가고 나 혼자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하는지에 대해 아무도 몰랐다.
“소피아. 들려?”
[아! 아빠...어라? 아빠는 어디 있지?]
우선 소피아에게 자문을 묻기로 하자. 안리아스의 수정구가 작동하는 걸 보아하니, 딱히 텔레파시나 신호를 차단하는 건 없는 듯 했다. 그건 그렇고 다급하게 물어본다는 나의 행동이 이런 화근을 낳을 줄이야.
“소피아. 우선 내 말부터 들어줘. 지금 이상한 공간에...”
[아! 아빠 백장미 모델로 일하고 있는 중이구나!]
“아니. 이건...”
[그럼 뭐야? 혹시 여장이 취미야?]
...제길. 이건 또 뭐라 대답을 해야 하지?
“음. 일단 열심히 일하는 중이야.”
[역시! 모델 일을 하는 구나! 정말 잘 어울려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내가 그런 소리를 들으려고 루니아 누나에게 강제여장을 당한 줄 알아!”라며 속이 시원하게 외치고는 싶은데, 자세한 경위를 모르는 딸에게 소리치는 건 실례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그 거짓말 좀 빌려 쓰도록 하자.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상한 공간에 내가...”
[염라대왕님! 이거 보세요! 저희 아빠가 여장을 했다니까요!]
“야! 소피아! 어디로 가는 거야!”
그보다 염라대왕이 왜 소피아 옆에 같이 있는데. 보통 무한한 영혼들을 심판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잖아. 요즘 영혼이 없어서 저승사자가 직접 때려죽여야 일거리가 생기는 건가?
안리아스의 수정구를 급하게 꺼버리고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머리에서 휙하고 돌아가는 조각들을 차곡차곡 모아 뭉치기 시작하면, 거대한 해답의 열쇠가 나오거나, 오히려 더 혼란스러운 의문의 찌꺼기로 융합하게 되는데, 지금의 경우는 후자 쪽이다.
이 공간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발생했다고 하기엔 알 수 없는 현상이 한 가득했다. 시공간을 통과하는 축인가? 이 곳을 벗어나면 다른 세계가 열리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길다고 느껴지는 건 당연한 거다.
우리는 3차원에 익숙한데 4차원으로 넘어가면 머리가 부셔질 정도로 복잡하니, 가능하면 아주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을 하겠다. 보통 3차원에서 우리가 걸어가는 건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가 가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지만, 이걸 4차원으로 보는 모습은 어떨까? 하나 하나 액자처럼 모든 움직임을 프레임에 담아 나열해보면, 우리는 앞으로 걸어가는 거리와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럼 이 통로에서는 어느 정도 걸어가면 더 이상 직진이 되지 않고, 앞으로 가는 방향만 인지하면서 걷고 있지만, 사실 그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게, 하나 같이 다 같은 풍경이고 앞과 뒤가 너무 어두워서 설령 뒤를 가도 앞으로 간다고 생각하게 되리라.
그리 하면 보통 앞으로 나아가는 프레임과는 전혀 다른 프레임들이 찍히게 될 텐데, 사람의 눈으론 그걸 볼 수 없으니 지금 가만히 서서 뇌를 거칠게 굴려야만 했다.
“그럼 단순히 시공간에 구멍이 났다고 생각할 수 있겠네.”
시공간에 구멍이 났어도 시간은 늘 움직여야 할 텐데. 이곳은 완전히 멈춰진 상태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루니아 누나의 시공섬이 먹히지 않는 이유는 뭘까? 좀 가볍게 생각을 하자.
사과가 있다.
칼로 썬다.
사과가 베인다.
그럼 다른 의미로는...
시공간이 존재한다.
시공섬을 사용한다.
시공간이 베인다.
가 성립하게 되는데. 그럼 내가 있는 장소는 본래 있어선 절대로 안 될 장소란 소리이고...
“아. 이런. 큰일났네.”
언제 닫힐지 모르는 공간으로 들어와버린 거잖아. 말 그대로 보이드<Void>에 들어와버렸다. 우주 어딘가에는 별조차 다가가지 않는 공허한 공간이, 이런 골목길 형태로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누군가가 마법에 실패해서 이곳에 보이드를 만들어놓고 도망을 갔나? 그럼 최소 시공간술사의 길 최상급은 되는 녀석일거다. 아이니스의 경우 염력만으로 블랙홀을 만드는 경지까지 찍어버린 놀라운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염력만으로 보이드의 공간을 만든다는 자체는 불가능하고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공간 자체가 죽어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있고, 어떻게 생각을 하고, 어찌하여 존재하고 있는가?
“신에 버금가는 에너지가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내 몸이 은은하게 빛이 포근하게 감싸며 보호하고 있었다. 존재 자체를 유지시키려는 의도인 거 같은데, 가끔 내가 능숙하게 사용해야 하는 힘이,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매우 고맙지.
“시공섬이 먹히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시공간의 개념이 무식하게 박살 난 곳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왜 이런 공간이 이 장소에 나타났을까?”
혼잣말로 다시 주변을 휩쓸었다. 여전히 멀게 느껴지는 공간 속에서 불안감은 커져만 갔는데, 머리는 재빠르게 불안을 삭이고 천천히 머리가 돌기 시작했다. 홀 센서가 좀 불안정하긴 하지만, 잘 회전하는 두뇌에서 가장 간단한 해결방안이 떠올랐는데.
잡화점으로 긴급귀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참에 이 힘으로 시공간술사의 길 하급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좌표마법이야 티아에게 훈련을 받아 기초원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천천히 내가 바라보는 공간상의 좌표를 그려보기로 했다.
시공간이 완전이 없어진 장소라면, 내가 멋대로 공간좌표를 그려도 틀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는데, 말 그대로 내 힘은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기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쓸모 없는 일이 아니다.
머리에 과부화가 걸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몸이 삐걱거렸다. 마나를 한 가득 담아도 계속해서 들어가는 거대한 용량을 지녀도, 그 힘의 반발력은 마나만 품었던 시절과는 천차만별인데, 이것마저 뛰어넘지 못하면 두 번 다시 마법의 길 자체에 들어서는 건 불가능했다.
“제길...서클이 꼬여버린 마법사가 이런 기분인가...”
속에서는 용암이 끓다 못해 내 얼굴에 있는 구멍으로 모조리 튀어나올 기세였다. 실제로 입에 비릿한 맛이 나기 시작하고, 코에서도 뜨거운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을 무렵. 눈 앞에 보이는 실선들과 중앙을 나타내는 좌표 하나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시공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천천히 개안하면서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좋아...콜록! 콜록!”
아니. 몸은 안 좋다.
거센 기침 속에 피가 섞여있으니 기분이 나빴다. 무의식적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니 왼손바닥에 피 웅덩이를 만들며 쏟아졌다. 또 다른 검붉은 색의 뭉텅이가 없으니, 아슬아슬하게 몸이 붕괴하는 경우는 피해간 것 같고...
<신기한 인간이군. 꼭 이런 곳에 와서 시공간마법을 사용할 줄이야.>
“망할...저건 왜 아직도 있는 거야.”
세상을 삼키는 거대한 뱀.
달을 삼키며 위용을 떨쳤던 검은 뱀.
‘월식’이라 불리는 흉악한 괴물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여전히 다가가기 꺼려지는 목소리와 함께...
대체 저 뱀은 뭘 하는 종족이길래 끊임없이 나와 마주하는 건가? 그 전에 어릿광대도 월식에 속해있으니, 어릿광대야 말로 또 다른 월식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모른다는 의미라면 단 한가지...
‘이 보이드는 월식의 피난소인가?’
이 뱀은 세계를 포식하는 뱀이니까.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다음 후보자는 그리티스 씨인데, 그리티스 씨의 포식은 시공간 자체를 날려먹으면서도, 보이드까지 깔끔하게 먹어 치우니까 제외하도록 하자.
“인간의 아이여. 너는 우리 동족에게 한번 몸을 잠식당한 적이 있구나.”
“뭐. 그건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해도 너에게 몸을 빌려줄 수 없거든?”
“그거야 나도 알고 있으며 이곳에 나갈 이유도 없다. 천천히 굶주려 죽어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그래도 배고픈 것보다 심심해서 죽을 찰나에 말상대가 와서 기쁘다. 그러니 말상대가 되면 좋겠다.”
이번 녀석은 완전히 별종이군.
“말상대?”
“그래. 아무 주제나 다 상관하지 않는다. 유랑극단이던 네가 우리 동족에게 몸을 잠식당해 벌어진 학살극이든.”
“이 녀석. 처음부터 이미 다 알고 있잖아.”
“우리 동족은 본래 하나였으나 여럿으로 나뉘어진 존재. 그러니 모두이면서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모두일지니. 그대 안에 티끌 같은 흔적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단편적인 기억일 뿐. 자세히 알려면 직접 몸에 잠식을 하거나, 네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지.”
이야기를 순순히 들려준다고 해서 끝날 것은 아닌 거 같다만, 아니지...내가 궁금한 게 있으니 그것부터 물어보자. 그 이후에 어떤 이야기든 적당히 말하면 되니까.
“그 전에 궁금한 게 있어. 이 공간은 너의 피난처인가?”
“왜 피난처라 생각하는 거지?”
“그야 당연히 너는 나를 아직도 경계하고 있으니까.”
뱀이 경계를 하면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상대를 노려본다. 지금 당장이라도 날 물어뜯으려는 8M의 거대 뱀은 “크큭!”하고 웃으며 검은 혀를 날름거렸다.
“통찰력은 제법이군. 그렇다. 나는 너를 경계한다. 언제 어디서 내 목숨을 뺏어갈지도 모르는 그 거대한 힘 앞에 방심할 수 없으니 말이다.”
가시방석도 따로 없는 장소로군.
나도 방심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잖아.
서로 경계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것만큼 피곤한 일이 세상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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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만 하니 피곤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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