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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화점에 돌아와서 눈 앞에 바로 닥쳐온 사건에 대해 신경을 쓴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가장 큰 오산이라고 보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만 신경을 쓰고 다른 이들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가뜩이나마 시간이 날아가버려서 멸망한다거나, 마네킹의 삶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 정지된 시간 속에서 유랑극단이 보고 싶은 것은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과 결과물이겠지.

 

각본가가 쓰는 예언 중에서는 나 때문에 어처구니 없게도 빗나가거나, 틀어지는 방향으로 진행이 될 테니까. 아무튼 다시 잡화점으로 돌아오면서 레시아는 늘 그렇듯 마왕의 입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검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앞발이나 핥으면서 카운터 위에 올라와있고, 마리아와 루시피나는 루니아 누나가 요리하는 것을 전력으로 막고 있었다.

 

서로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세계가 멸망하기 직전이라도 이 사람들은 서로 싸우겠지.

 

이런 편안한 기분도 오랜만이로다. 300년동안 본래의 마왕생활로 돌아가서, 무시무시한 용사들을 처리했기에 긴장을 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라. 그러니 주인. 오랜만에 쓰다듬어라.”

 

마왕인가?

아니면 고양이인가?

 

가끔 레시아를 보면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시작하는데, 고양이의 모습을 오랫동안 해와서 그런지, 마왕성에서 마족들을 이끄는 그런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보단, 이런 고양이 모습이 더 정감이 가기 시작했다. 오른손이 레시아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에도, 고양이의 본성이 남아있는지 자신의 머리를 이리저리 비비면서,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고양이 입의 구조상 웃고 있는 얼굴처럼 양쪽 끝이 올라가있는 구조이지만, 지금은 잠깐의 행복을 느긋하게 즐기는 중이라고 본다.

 

주인은 여전히 쓰다듬는 것이 능숙하군. 게다가 아리엘과 같이 봉인 되었을 때도 별일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니라. 만약에 여자가 또 하나 늘었다면 마왕성 지하감옥에 가둔 다음,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양이 베기를 사용했노라.”

 

제가 아리엘에게 수작을 걸기보단, 아리엘이 저에게 수작을 거는데요.”

 

그래서 문제이니라. 남자인 주제에 여자에게 습격이나 받는다니, 그거야 말로 정말 꼴사나운 모습이 아닌가?”

 

가장 맨 처음에 습격한 건 레시아거든요?

 

그런데 잡화점 안에는 시간에 관련된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시간에 관련된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과거로 갔을 당시에 잡화점 내부에서 시간이 멈췄었고, 티아만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돌아다녔지만, 잡화점 건물에서 외부와 내부를 중심으로 시간이 따로 흐르는 것이 맞겠지.

 

아직까지 잡화점의 미스터리가 전부 밝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에 대해선 잡화점에게 물어보거나, 엘티노스에게 물어봐야 하지만...천계와 인간계의 통로가 막혀버린 이상, 엘티노스에게 물어본다는 선택지는 자연스럽게 소거되었다.

 

그나저나 비둘기가 그렇게 걱정되는 것인가?”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입니다.”

 

머리 위에서 하얀 올빼미 하나가 내려오더니, 내 머리 위에 날카로운 발톱으로 착지하면서 말을 꺼냈다.

 

다음부터 올 때는 내 머리 위에 착지하지 말아줘. 차라리 모자를 쓸 때 착지를 해주던가...”

 

괜찮습니다. 마스터. 이 정도로 마스터의 모발은 튼튼하니까요.”

 

사무적인 어조로 말한들 지금 탈모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발톱이 균형을 잡기 위해, 어마어마한 힘으로 내 머리를 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시나가 잡화점에 왔다는 소리는 밖에 시간이 멈췄다는 소리인가?

 

밖에서 우리가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도록 힘써주고 있다는 건 들었어. 여기에 왔다는 것은 지금 모든 시간이 정지했다는 소리지?”

 

머리 위에 있는 하얀 올빼미와 눈을 마주하기 위해 눈동자를 아무리 올려봐도, 마주할 수 없으니까, 시나가 앞쪽으로 구부려서 시선을 마주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이건 분신입니다. 마스터에게 힘을 공급받기 위해 잠깐 만들어냈지만, 마스터 안에 있는 에너지가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이런 분신으로도 받아내기가 힘듭니다. 차라리 본체로 찾아와서 공급을 받는다면 좋겠지만, 다음에는 30체의 분신을 만들어서 공급받으러 오겠습니다.”

 

30체의 하얀 올빼미들이 이곳 저곳에서 날아든다고?

여기는 호그와트 마법 학교가 아냐.

잡화점이지.

 

시나도 오자마자 하는 소리의 내용이 내 안에 있는 에너지구나.”

 

하지만 마스터가 담아낸 그 에너지는 제가 방출하는 에너지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확실히 신성력과 마나, 마기를 합쳤으니까. 초창기에 창조주가 지녔던 힘과 같을지도 몰라. 시나는 다른 차원에서 창조주역할을 했으니까, 닮아있다는 것은 무리도 아닐 거야.”

 

내 말을 듣자 시나는 그렇군요.”라고 말하며 내 손에 쓰다듬어지고 있는 고양이를 내려다봤다.

 

냥캣. 각본가는 찾으셨는지요?”

 

아직이다. 의외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중이니라. 주인도 이렇게 잡화점에 도착했으니 슬슬 진행해야겠지.”

 

다음계획이라뇨?”

 

여전히 내가 모르는 것들을 전부 담고 있는 판도라상자마냥, 레시아는 내 손길에서 벗어나 4발로 일어섰다.

 

지금부터 유랑극단의 멤버인 맹수 조련사와 어릿광대를 잡을 것이다.”

 

어릿광대와 맹수 조련사를 잡는다니.

죽인다는 것보단 포획에 가까운 뉘앙스였다.

 

같은 유랑극단의 단원들을 잡아서 고문이라도 하게요?”

 

그런 포학한 방법으로 그 두 명이 말할 거라면 오히려 짐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은 살아가면서 가끔씩 봐온 것으로 보아, 그렇게 쉬울 정도로 유랑극단에 대한 정보를 말하는 자들이 아니기에, 미인계를 쓰는 작전으로 해야 할지도 모르지.”

 

그 말에 잠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미인계를 왜 그런 애들에게 사용하는지에 대해서도 그렇고, 누가 미인계를 사용하는 가에 대해서도 그렇고, 지금 당장 이것에 대해 반론을 하거나 막지 않는다면, 내 오래된 경험으로 예리해진 감각이 매우 위험하다고 알려줬으니까.

 

미인계를 그 애들에게 왜 써요? 그보다 어떻게 써요?”

 

그야 어릿광대는 주인을 맹목적으로 같은 부류에 넣으려고 하지 않는가? 맹수 조련사의 경우에는 카린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보아, 손쉽게 배신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제가 그들과 마주해봐서 잘 알고 있지만, 우선 어릿광대는 제 안에 있는 월식이 사라져버린 이상, 그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저를 좋아하려고 들지 않아요.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오히려 공격해서 죽이고 힘을 흡수해가려는 포식자처럼 행동하려고 하는 거지, 어릿광대가 절 좋아한다는 의미는 절 죽이겠다는 의미와 같은 거라고요. 게다가 맹수 조련사의 행동은 여성 한정으로 매우 친절하게 대하지만, 친절한 것은 친절한 거고...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맹수들을 오히려 더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걸로 봐선, 쉽게 배신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보다 보통의 전투력으로 그 둘을 잡는다는 그 자체가 무리야.

 

그러니 우선 시도라도 해야 한다.”

 

시도는 무슨! 레시아! 그게 무리수라고 하는 거에요?”

 

무리수? 그건 무슨 물이더냐? 아리수의 친구이냐?”

 

지금 그런 말장난이 나오냐!”

 

냐아아아아아! 어째서 아이언 클로는 변함 없이 강한 것이냐!”

 

있는 힘껏 아이언 클로를 하고 나서 오른손에 쥐가 살짝 나는 것 같았지만, 축 늘어져서 카운터에 쓰러져있는 레시아를 바라보며 시나는 천천히 이야기했다.

 

냥캣의 작전에는 결점이 많아 보입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알아주는 것이 시나라서 다행...

 

마스터가 착용할 여장에 대해 확실하게 말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 말이죠.”

 

이라 생각했는데.

 

너희들은 그냥 날 여장시키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 아냐?”

 

우선 고풍스러운 하늘색 바탕의 하란복장을 계량한 것과 더불어, 주변에는 연분홍 빛의 날개 옷으로...마스터? , 아픕니다. 아이언 클로는 그만해주세요. 분신이 아파합니다.”

 

분신이 아파하던 말던 무슨 상관이야! 애초에 그런 이상한 여장은 안 할거니까. 그런 기묘한 물건을 만들려고 하지도...”

 

시나를 내 머리 위에서 때어낸 다음, 아이언 클로를 동시에 사용하면서 훈계하려고 있는 사이에, 시선이 자연스레 주방으로 쏠렸을 무렵. 루니아 누나는 시나가 말한 대로 정확하게, 계량된 하란복장과 더불어 연분홍 빛의 날개 옷이 가지런하게 접혀있었고, 오른쪽 옆머리 일부를 이용해서 땋은 듯한 머리모양에, 뒤에는 연꽃이 활짝 핀듯한 머리핀이 존재했다.

 

이럴 때는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루니아 누나는 음식을 만드는 줄 알았더니, 주방에서 코스튬을 완성한 것일까?

 

내가 말을 잘 하다가 끊어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내 평생에 기억이 남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안 입어요. 집어 넣어요.”

 

그래도 새로운 백장미 시즌을 맞이해야 하는 걸요오?”

 

무슨 시즌이에요? 시간이 날아가버려서 세상이 망하게 생겼는데!”

 

무의식적으로 내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화를 내자, 내 왼손에 매달려있던 시나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마스터? 화를 내면서 힘을 주면 제가 더 아픕니다. 아이언 클로는 풀어주시고 이야기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전히 사무적으로 이야기하는 터라 아픈지 안 아픈지, 감정은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았지만, 날개를 파드득거리면서 거대하고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두 다리가 허공을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시나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자 축 늘어져있는 레시아 옆에, 날개를 쭉 펴면서 땅에 축 늘어진 하얀 올빼미. 그 틈에 루니아 누나가 나긋나긋하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내 손바닥을 보여주며 멈추라고 무의식적으로 행했다.

 

마왕님의 작전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요오? 카일이 여장을 한다면 어릿광대가 넘어올지도 몰라요오?”

 

넘어온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어릿광대도 백장미의 구독자이기도 하고...”

 

그 빌어먹을 놈의 하얀 잡지는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거야!”

 

무심코 거친 말이 산발적으로 튀어나갔다. 그 놈의 백장미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다른 이들도 그렇고, 무심결에 다른 곳을 멸망시키는 곳도 그렇고, 백장미에 연관되어있는 사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여장으로 사람 하나를 꼬시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남자가 애초에 여장하고 미인계를 쓴다는 그 자체부터 아웃.

내 기준으로 하기 싫다는 의미다.

 

어릿광대는 애초에 성별도 모르는 도플갱어인데, 여장을 해서 미인계를 쓴다고 해서 통할 리가 없죠.”

 

아니. 반대로 생각해서 도플갱어는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좋아하니, 짐은 이 작전이 제대로 먹힐 것이라 생각하니라...냐아아아아! 그만! 그만하거라! 귀는 언제나 설정이 민감하다고 하지 않았는가아아아!”

 

시끄러워! 이 바보 같은 고양이야! 설정에서 좀 조정하면서 살던가!”

 

분노에 몸을 맡긴 체 검은 고양이의 귀를 잡아 늘려버린 뒤에, 내 등에서 느껴지는 영문도 모르는 분위기에 뒤를 돌아봤을 때, 루니아 누나가 곱게 접혀진 옷을 들고 있는 상태로, 당장이라도 나에게 입히려는 투기를 보이고 있었다.

 

세상이 멸망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러는 걸 보면...

정신상태가 아다만티움을 넘어선 것이 아니라,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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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비정상적인...이 아니라 비범한 잡화점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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