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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한 대화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건 언제나 감정에 휘말려서 그르치기 마련. 영혼이 있기에 그런 부작용이 있지만, 감정에 휘말려도 좋은 점은 있긴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빈 껍데기를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발언하는 리제로트. 그릇이 비어있을 때야 말로 무엇이든지 채울 수 있다고는 하지만, 리제로트가 하는 건 그릇을 비워놔도 그 안에 있는 공기조차 비우기 위해 노력하는 바보였다. 그 안에 채워져 있는 공기만큼은 절대로 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영혼이 아닐까?

 

인간의 영혼이 공기 같은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절대로 오해하지는 말자.

 

. 알겠어요.”

 

눈싸움에서 진 리제로트는 고개를 획 돌리며 월터와 같이 등을 돌렸다.

 

그래도 의뢰는 의뢰죠? 선금은 얼마로 해드리는 게 좋을까요?”

 

선금?”

 

. 느닷없이 . 저는 의뢰 못해요.”라는 바보 같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족쇄를 좀 채워놓을 생각이랍니다.”

 

선금이라...”

 

솔직히 선금을 받고 일해본 적이 오랜만이라, 지금 이 일에 대뇌는 목숨을 돈으로 환산해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뇌의 경우에는 눈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한쪽 다리를 못 떨게 만들었고, 중뇌의 경우에는 제어하지 못하는 왼쪽 다리가 스스로 떠는 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아니. 독백의 표현 방법이 왜 이래?

엉망이잖아.

 

선금으로 얼마를 받을지 모르시나요?”

 

솔직히 나는 돈 때문에 사건을 해결하는 타입이 아니거든.”

 

위선자네요.”

 

위선자고 나발이고 내가 사건에 휘말려서 억지로 해결하는 바람에 돈이고 뭐고 못 버는 경우가 많다는 소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의뢰를 받으면 그에 맞는 의뢰비를 받아야 하지만, 몬스터들은 화폐가 아니라 물물교환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물품들을 나에게 줬다. 이빨부터 뜯는 녀석도 있고, 왠 이상한 돌덩이를 메테오로 날려버리는 녀석들. 실제로 죽을 뻔한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지만, 실제로 기록에 쓰여져 있지 않았던 일중에는 해결해줘서 고맙다며, 영원한 죽음을 선물해주려는 기괴한 녀석도 있었다.

 

그런 에피소드는 없는데요오?”

 

그냥 어물쩍하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어째서 제 생각을 읽고 없다는 진실까지 말하는 겁니까?”

 

맞다. 그런 적 없다.

어떤 바보 같은 녀석이 은혜를 입은 은인에게 영원한 죽음을 선물로 줄 생각을 할까?

 

아무튼 빨리 백장미 찍게 이리오세요오.”

 

뭘 더 찍을 게 있다고!”

 

삑삑!”

 

......

 

어디선가 익숙한 새소리. 옆을 바라보니 건강한 근육을 자랑하는 웨이터 얼굴에 하얀 뱁새얼굴을 한 생명체를 보고야 말았다.

 

.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삑삑!”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언밸런스한 그 모습. 여기서 알바를 하고 있는 건지 종업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이곳 카페의 주인은 백곰이었나? 아무리 백곰이라도 저런 기괴한 생명체는...

 

삑삑!”

 

그만해! 그리고 그 앞치마는 또 뭐냐! 나더러 입으라고? 웃기지마! 네 놈 정상이냐!”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꿈쩍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째서 저런 녀석이 신수라고 할 수 있지?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을 촬영할까요오?”

 

안 해요!”

 

사람의 눈이 많이 띄는 장소에서 이런 옷을 입고 일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지. 혹은 자살방지를 위해서 너 자살하기 전에 분홍색 앞치마에 여장을 하고 고양이 귀를 달아서 아르바이트를 뛰어라.”라고 말하면, 그 순간 자살하는 사람은 어이가 없어서 자살을 그만두게 되고, 밝고 활기찬 미래만이 반겨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진짜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위로의 말 대신 저 위에 있는 말을 꺼내진 말자. 그 사람이 죽기 전에 본인부터 살해당할지도 모르니까.

 

저는 이 옷의 저주를 빨리 풀어야 하기 때문에, 백장미고 뭐고 찍을 마음도 없어요.”

 

카일이 많이 아픈가봐요오...”

 

진짜로 절 환자 취급하지 말아달라니까요?”

 

이 정도면 날 정신병으로 몰고 갈 생각인가?

 

저는 갈길 갈 겁니다.”

 

기괴한 뱁새 이비를 지나치고 앞으로 나아갈 무렵. 저 멀리서 앉아있는 릴리스가 다가왔다. 결국 환영에 불과하지만 너무 사실적이라 착각을 일으키는 기괴한 환영마법. 강인한 정신방어능력이 아니면 분별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내 정신방어능력은 남들이 다 알아줄 정도로 강력하나 보다.

 

아무래도 이 정신방어능력의 존재의의는 내가 맨정신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함인가?

 

여전히 떠들썩해서 좋네.”

 

떠들썩해서 좋은 이유는 없다. 그런데 릴리스 이비가 왜 저기서 알바를 하는 거야? 아리엘은 알고 있어?”

 

아니. 나도 처음 알았는데. 나중에 아리엘에게 알려줘야겠당~”

 

당은 또 뭐야?”

 

포도당~”

 

하지마!”

 

이 개그 하나로 더운 낮이 영하 10도로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팔짱을 끼는 감촉마저 사실인 것 같지만, 결국 환영인 릴리스는 실제로 내 옆에 없는 존재다.

 

꿈의 미로에서 지켜보니 재미있나?”

 

재미있지. 정말 재미있어. 꿀잼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쓰이는 걸까나?”

 

제기랄...

빨간 티셔츠만 입는 곰돌이가 사용할 법한 단어는 또 뭐냐? 이곳에 와서 이상한 것들만 배운다니까?

 

그런데 한가지. 리제로트에게 당한 건 많은데, 의뢰인으로 받아준 자기의 생각을 듣고 싶어. 혹시 또 하나의 컬렉션 추가야? 고독하고 외로운 아이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평생 각인될 황홀한 경험을...”

 

일단 멈춰. 그리고 입 닫아. 2분간 입 닫고 있으면 내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네가 잡화점으로 찾아왔을 때 아이언 클로를 출격해야 하는지 생각을 좀 해야 되니까. 아니면 지금 당장 꿈의 미로로 찾아가서 난동부릴 테니 각오해둬.”

 

그래도 말은 잘 듣는지 정말 2분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2분이 지났을 때.

 

이 로리콘!”

 

정말 죽어볼래!”

 

어째서 나는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걸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던 릴리스에게 화낼 기력도 없다. 결과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친 나는 모든걸 내팽개치고 잡화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나마 돌아갈 장소라는 곳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했지만, 힘들고 지칠 때는 그냥 쉬고 싶은 장소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건 마찬가지겠지.

 

사람은 영혼이 없는 상태가 순수하다라...”

 

리제로트의 말을 내 입에서 곱씹었다. 영혼이 있기에 타락을 하기도 하고, 신앙으로 깨끗해진다고 하지만, 사실상 성향이 바뀐다는 말을 사용하는 게 더 정확하다.

 

자기는 그 소녀가 했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거야?”

 

어느 정도라면 어디까지인지 설명해줄래?”

 

대략 15%정도?”

 

15%.

 

대체 얼마나 동의를 해야 15%라는 수치가 나오는 걸까?

 

사람은 영혼의 유무에 따라 순수함이 달라지는 게 아냐. 순수하다는 기준도 멋대로 만든 거지. 다이아몬드를 가공해서 그 완성품이 순수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고, 원석 그대로 자연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순수하다는 평가도 내릴 수 있어. 영혼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순수함을 따지는 건 넌센스야.”

 

말 같지도 않는 걸 그대로 지워버리고, 릴리스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거리를 맴돌았다. 드디어 도착한 장소는 평범한 구두점. 아니, 300년 뒤의 발전된 세계에 비하면 대략 60년정도 뒤떨어진 건물이었다.

 

이런 곳에서 누가 사는 거지? 혹시 저 건물도 풍선 달고 날아다니는 거 아냐?”

 

지금 잡화점은 300년이나 낡았다고, 상대적으로 보면 저 건물이 최신식인데?”

 

릴리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뭐가 기쁜지 먼저 앞서나가는 릴리스를 뒤따라가며, 문 앞까지 도달하자 신사다운 노크를 2번 정도 했다.

 

그 다음은 눈사람 만들러 갈 거냐고 물어보는 거지?”

 

그거 리듬에 맞춰서 5번 두드린 다음 하는 거거든?”

 

릴리스는 작년 겨울에 눈사람을 만들지 못한 것에 한이 맺혔나? 아니면 또 다른 기괴한 문화가 오염되어 무의식적으로 입밖에 퍼트리는 상황인가? 릴리스는 옆머리를 귓가 뒤로 쓸어 내리면서 입을 열었다.

 

이 장소는 이전에 아리엘과 같이 왔던 장소 중 하나야.”

 

그래?”

 

이곳에서 Yee.T 보드게임도 했지.”

 

그건 듣고 싶지 않아.”

 

그 보드게임은 언제부터 이 세계를 침공하기 시작한 걸까? 만약 멋대로 과거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보드게임부터 제거하는 걸 시작으로 타임라인을 정리할 것이다. 과거로 가는 장치를 가진 미치광이가 자신의 흑역사를 제거하는 것처럼.

 

그 뭐냐...슈트는 절대로 초록색으로 하지 말아달라는 그 사람.

 

그 사람은 마블에서 일하고 있잖아?”

 

왜 내 독백을 읽고 마블에서 일한다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거냐. X교수님이 네 머리 속에 직접 텔레파시라도 걸어온 거냐.”

 

아무튼 난 녹색 슈트가 싫어서 안 한다고 했어.”

 

완전히 다른 곳에서 부르고 있잖아!”

 

녹색반지는 고향이 따로 있다고.

울트라 맨처럼 따로 고향이 존재한단 말이다.

 

그보다 벨리알은 잘 살아 있으려나?

 

악당 생각이나 하는 건 좀 아닌데.”

 

그래도 울트라 맨 악당 중에서 가장 멋졌다고.”

 

만일 악당이 된다면 차라리 그런 악당이 되어 우주적으로 놀아보고 싶긴 했다만, 나의 또 다른 이면은 그렇게 되면 매우 귀찮아지기에, 그저 안전한 장소에서 가만히 놀고 있는 게 좋겠지. 선악의 개념이 매우 불투명한 이런 순간엔, 내가 좋은 일로 움직여도 남들이 보기엔 악당이 될 수 있다.

 

잡화점에서 악당 노릇이나 하면 무슨 일부터 할 거야?”

 

반 농담 삼아 릴리스가 물어봤다. 그러나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니 또 다시 반문을 하는 나.

 

악당 노릇? 그건 왜?”

 

자기가 악당이 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볼만할 거 같아서.”

 

악당이라고 한들...

 

3류악당이 될 마음은 없다. 그러니까 이제 좀 들어가자고.”

 

노크를 해도 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직접 문고리를 붙잡고 들어갔는데, 문이 열리면서 낮임에도 불구하고 빛은 이제서야 그 안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밝아지는 장소.

 

이번엔 어떤 손님인지 기대되는데? 저주를 잔뜩 가지고 오다니. 마왕이라도 잘못 건들인 건가?”

 

어떤 마왕을 건드려야 여장을 당한 상태로 평생을 사는 저주를 받는 거지?

 

. 어떤 이야기든 심각하지는 않은 거 같은데? 이리로 들어오게.”

 

울려 퍼지는 여성의 목소리.

그보다 이 가게는 구두점 아니었던가?

 

구두점에서 저주를 풀 수 있다고? 나에게 말을 거는 존재가 누구길래?”

 

그거야 당연히.”

 

밝은 빛이 계속해서 자리를 채운다.

 

덤디덤...”

 

여기서 나올 대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차라리 샌즈에게 해주를 요청하겠다.”

 

그거 참 때리는 해주가 되겠구나.”

 

이 녀석 너무 잘 알잖아.

뭐 하는 녀석이야?

 

꼭 표정이 내가 뭘 하는 인간인지 궁금해 하는 거로군.”

 

아닌데.”

 

일단 거짓말이라도 하자.

 

. 거짓말이라도 부정하고 싶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네.”

 

대체 어떻게 알고 저렇게 말하는 거냐고.

 

그래도 그 모습으로 나만의 고양이가 되어준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과거 때부터 겪어온 게 많으니까 좀 그렇지?”

 

좀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이 그렇지. 그보다. 과거에서 이곳까지 날아온 걸 어떻게 안 거지? 릴리스와 아리엘이 한번 찾아와서 그런가?”

 

방안이 비추고 모습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온 정신에는 충격이 돌아 뇌가 정지할 뻔했는데...

 

오랜만이야. 잡화점의 주인.”

 

켈모리아...”

 

켈모리아 마그누스.

생각을 해보니 그녀도 시공간술사의 길을 걸었던 최고의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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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냥 일찍 자러 간다고 퇴근했습니다.

앞으로 11시간은 자겠군요.


그래도 피곤하다면 이 몸은 답이 없는 거죠.

 

587

 

 

 

어떤 삶을 살고 있던 나는 과연 정상을 위해 도약하는가? 아니면 절벽에서 추락하는가? 그걸 알아내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걸 꿋꿋하게 보여주겠다고 절벽에서 밀어버린다면,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기분이 수 십 차례나 맴돌게 된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람을 마주할 때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멋대로 사고하는 바가 있다.

 

그래도 지금은 내 멋대로라도 생각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루니아 누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카일~ ~”

 

제가 먹을 수 있다니까요.”

 

소녀는 언니가 받아주는 걸 먹어야 한답니다아!”

 

남자거든요!”

 

정말로 중요한 듯하면서도 불필요한 포지션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통 4사분면으로 모든 기준을 나누는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사람의 기준은,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이익이 존재하고 무엇보다 합이 잘 맞아서 행복해야 한다. 반대로 가장 중요하지 않고 가장 불필요한 사람이라면, 손해만 있고 같이 있으면 매우 불편한 것. 그것들이 각각 1사분면과 3사분면에 속해있다고 했을 때. 루니아 누나의 경우는 확실하게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받아먹고 있는 케이크가 내 입 안에서 뭉개지는 동안,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빠져나가 여장을 풀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기로 하자.

 

잡화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이가 좋네요.”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는 비꼬는 말투겠지만, 앞에 루니아 누나와 루비아가 있는 한, 리제로트는 매우 부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홍조를 띠면서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세상 하나 없어져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평행세계 모두가 사라지니까, 지금 내 개인적인 감정에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참기로 하자.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래도 지금은 케이크를 받아먹으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고분고분하게 받아먹는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루니아 누나가 주는 케이크를 받아먹지 않으면, 커다란 사건 하나를 더 만드는 셈이 되니까, 얌전히 가만히 있는 것뿐이다. 사실상 케이크는 좋아하긴 하지만, 수틀리면 또 다른 난장판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 얌전하게...

 

. ~ 하세요. 안 하면 또 다시 구속을 하고 질질 끌고 갈 겁니다.”

 

루비아. 케이크를 준다면 준다는 건 고맙지만, 너도 좀 먹는 게 어때?”

 

저는 이미 충분히 먹고 있습니다.”

 

아니, 절대로 충분히 먹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시켜놓고 나에게만 다 먹이고 있잖아. 초콜릿 케이크도 한 조각만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 접시만 5개가 쌓였다.

 

그리고...

 

그 공허한 눈으로 먹고 있다고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거든! 너 여태까지 케이크조각 하나도 먹지 않고, 나에게만 퍼 먹이고 있잖아!”

 

퍼 먹이다라는 표현은 너무 남성적이니, 여성스러운 단어로 떠 먹여준다는 표현으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애초에 말하는 것에 대해 남성적과 여성스러움이 뭐가 중요해!”

 

그렇게 제가 먹는 모습이 보고 싶다면 차라리 저에게도 떠먹여주시죠?”

 

접시까지 다 넣어줄 테니 입 벌리고 있...크앗!”

 

살기를 감지한 것일까? 루니아 누나는 포크 뒷부분으로 내 이마를 때렸다. 다만, 내 주관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때렸다는 게 아니라, 강타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겠지. 뇌를 흔드는 충격이 아직까지 머리에서 뛰어 놀고 있는 동안, 매우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리제로트와 다른 손님들.

 

이게 뭐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상황인가?

 

그래서 리제로트 양은? 우리 카일의 뭐죠오?”

 

은인이에요. 적어도 제가 레이베리아로부터 살려줬죠. 그 이후에는 뜨거운 밤을 보낸...”

 

그 어느 누구도 살려준 은인과 뜨거운 밤을 보내지 않아. 알아들어?”

 

절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

 

헛소리 말고! 제대로 이야기를 하란 말이야!”

 

소리지르는 것도 목에 한계가 있는데, 조만간 득음을 할 지경이다. 한숨이 기가 막히게 튀어나가는 동안 리제로트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당신의 친구는 당신의 은인에게 암살하려고 시도하잖아요?”

 

네가 아이리스를 인형으로 만든 게 시작지점이잖아.”

 

그때는 너무 귀여워서 그만...”

 

귀여우면 모두 인형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냐? 한숨이 한 가득 나오게 되는 답변을 들었지만, 리제로트는 잡화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인형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불안감도 살짝 맺히기 시작했다. 다만, 그런 일을 하기 전에 리제로트가 오히려 굴복하게 되지 않을까?

 

잡화점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내가 걱정을 따로 안 해도 될 정도라니.

아니지. 내가 걱정을 끼치는 입장이었네.

 

인형으로 만드는 게 무슨 재미가 있나요오?”

 

그야 제 말에 복종하잖아요.”

 

잡화점에 돌아가기 전까지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을 것 같은 루니아 누나가, 리제로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굴러오는 질문을 보기 좋게 받아 친 리제로트의 대답에, “흐응~ 그렇군요오.”라고 입을 열었다.

 

말에 복종한다는 의미는 잘 알고 있는지요오?”

 

말에 복종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제 명령에...”

 

아뇨오. 당신은 타인의 진심을 여태껏 모르고 살아왔다는 말이에요오.”

 

얼어붙기 시작했다.

루니아 누나의 분위기는 항상 극과 극으로 나뉘어지는데, 이럴 때마다 항상 무서워 죽겠다. 천진난만하고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바보 같은 일을 벌여도, 루니아 누나의 본 모습을 보통 사람이 견딜 일은 없으니까.

 

리제로트가 쥐고 있던 컵이 살짝 떨기 시작했다.

 

사람의 진심이 왜 필요한 거죠?”

 

당신의 그 나락 같은 삶을 벗어나기 위함이죠오.”

 

나락 같은 삶이란 소리에 또 다시 리제로트는 흠칫하고 놀란다. 옆에 있던 월터가 그에 동요했는지, 얼어붙는 살기가 우리 주위를 몰아치기 시작했고, “월터. 가만히 있어.”라며 리제로트의 당돌한 한마디가 분위기를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다.

 

조만간 싸움이 일어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글레이프니르를 꺼낸 루비아 씨가, 다시 상황을 보고 서서히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그보다 그거 주머니에서 꺼내는 거였어?

 

그 밧줄이 그렇게 작은 주머니에 다 들어가던가?

 

루비에몽이라고 불러주시죠.”

 

남의 생각을 읽고 거기에 맞게 태클 걸어달라고 자신을 꾸미지 말라고!”

 

저럴 때마다 내 정신이 대나무 헬리콥터를 타고 저 멀리 날아간다. 그러나 내가 루비아와 대화를 주고 받아도, 루니아 누나와 리제로트는 서로 공방전을 하느라 바쁜데, 자세한 이야기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달그락!

 

웃기지 마세요! 당신이야 말로 저에 대해 뭘 안다는 거에요!”

 

저는 카일의 누나이기 이전에 기사단장이랍니다아. 많은 사람들을 봐오면서 이끌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지요오. 당신도 근본적으로 착한 아이이긴 하지마안, 우리와 함께 걸어가기 위해선 자신의 능력을 버려야 해요오. 바로 저 뒤에 있는 집사 인형도 같이 말이죠오.”

 

태연하게 자신의 모든 힘을 포기하라는 루니아 누나. 그걸 부정하는 리제로트 사이에는 불길한 기운이 맴돌기만 했다.

 

다른 이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조금 더 조용하게 이야기 해주시길 바랍니다.”

 

일하는 종업원에게 한 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

 

그걸 줄이면 갑분싸가 됩니...”

 

제발 내 생각 읽고 멋대로 입 열지 말아줄래!”

 

루비아는 내 생각 하나하나 전부 다 읽는 게 가능한 건가? 호문쿨루스의 특수능력이 언제부터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게 되었을까? 티르야 말로 최고의 연금술사다운 제작솜씨다.

 

이건 티르와 관계 없습니다.”

 

제발 같은 태클 3번 걸기 전에 자중할 수는 없는 거냐?”

 

없습니다.”

 

자중하라고!”

 

속도가 빠른 공방전은 이곳도 마찬가지. 각기 다른 토론대회나 만담대회를 진행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서 이쯤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게다가 나는 중대한 사명이 있으니, 이런 한가로운 곳에서 케이크나 강제로 받아먹으며 앉아있을 위인이 못 된다. 애초에 여장 당한 상태인데, 그 옷까지 저주받아서 벗지를 못하고 있으니, 지금 당장 저주를 풀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 한단 말이지.

 

저는 슬슬 자리에 일어나도 될까요?”

 

안돼요오. 카일은 누나와 백장미를 촬영해야 한다고요오.”

 

대체 왜 백장미를 찍자고 하는 거냐.

 

백장미를 찍기 전에 전 이 옷의 저주부터 풀고 싶다고요. 일단 저주를 풀어야...”

 

다른 여성의류도 입기 때문이죠오?”

 

아니라고!”

 

도대체 어떤 남자가 다른 여장을 하기 위해 저주를 푼다는 건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그러니 루니아 누나의 사고방식은 정상범주에서 벗어나있다. 결국 비정상중의 비정상은 루니아 누나인...

 

-파악!

 

!”

 

뭔가가 빠르게 날아와 내 머리를 힘껏 때렸다. 가만히 보니까 별이 5개정도 떠있는 걸 보면, 어디 돌침대가 생각나는데...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는 언제까지나 정상이랍니다아. 오히려 카일이 비정상이 아닐까요오? 자신의 귀여움을 멀리 퍼트릴 생각을 하지 않고, 숨기시려고 하시다니이...혹시! 즐길 사람만 즐기라는 뜻의 배려인가요오?”

 

호수 같은 배려 좋아하시네! 어떻게 자매끼리 남의 생각을 읽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에 능통한 것부터가 비정상이거든요!”

 

애초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비정상이라는 소문이 들리긴 했는데, 루니아 누나 또한 붉은 눈을 가지고 있다. 모두 주변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을 보면, 거기를 멀리하고 집을 가까이 하는 편이 좋다.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천성적으로 착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가까이 해도 좋답니다아~”

 

내 생각 좀 그만 읽어!!!”

 

본래 독백은 남들에게 읽히라고 하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그전에 리제로트에게 무슨 의도로 그런 말 했는진 잘 모르겠지만, 지금 싸우자는 의도는 아니라고 보는데요.”

 

싸워도 득이 없는 건 저 소녀도 잘 알고 있답니다아. 다만, 저는 카일에 대해 1%라도 위험을 없애기 위해 그리 말한 것이지요오.”

 

나를 생각해서 말했다는 말은 진심이겠지.

이전에 리제로트는 나를 납치했던 전과가 있으니까, 더 이상 나에게 위험이 되지 않도록 인형들을 포기하라는 것. 아마 인형을 만드는 그 자체를 포기하라는 거니까, 자신의 초능력을 포기하라는 셈이 된다.

 

내가 알던 인형사 사브누아는 영혼을 집어넣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리제로트는 인간의 영혼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영혼이 없을 때야 말로 가장 순수해! 그러니 귀여운 아이들을 순수한 채로 남아야 한다고!”

 

영혼이 없는 게 순수해?

그러니까 아무것도 담지 않은 그릇자체가 보기 좋다는 건가?

 

그건 꽤 기발한 헛소리네.”

 

저 말을 듣자마자 내 입에서 자동반사마냥 튀어나갔다.

 

영혼이 없는 상태가 가장 순수하다고? 그래서 내 딸을 그렇게 만들었냐!”

 

그저 본능적으로 외친 소리. 다른 시간대일지 몰라도 카렌을 지키지 못했던 무기력한 자신. 그리고 엉망이 된 카렌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분노가 리제로트에게 단번에 몰아쳤다. 오늘의 일을 과거까지 끌고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내 분노에 반응한 마나들이 주변을 요란하게 뒤흔들었다.

 

넌 정말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의 의뢰를 들어주기 위해 이곳에 있지만, 말 한마디를 듣고 내가 정말 무르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없고 잘못하지 않았다는 듯한 그런 소리를 한번만 더 하면...

 

내 분노를 마주한 리제로트에게 성큼 다가가선 나지막하게.

그리고 최대한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내 모든 걸 걸고 너 하나만큼은 꼭 죽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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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 회사는 쉬는 날이 없을까요?

요즘은 그나마 페이스 조절을 하는 거 같았는데,

일정이 당겨진 거 비해, 다른 업체에서 아직까지 일할 준비가 안 되었다니...


조만간 백수되겠네요.

 

586

 

 

 

만일 조사를 받는 와중에 자신이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장을 했는데 그게 하필 검은 고양이 코스프레였고, 살인미수를 한 인간이 자신의 잘못은 스틱스 강 저 멀리 던져버리며 멀쩡하게 이야기 하고 있고, 하필 건들인 사람이 적과 아군을 둘째치고 거대한 기업의 영애라고 한다면, 지금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양한 사고를 경험했지만 이렇게 다각도로 사람을 미쳐버리게 한 상황이 어디 있을까?

 

더군다나 나는 한마디도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 어차피 조사를 받는 건 레인이지 내가 살인을 저지르려고 한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초능력을 이용한 범죄는 일반 경찰이 조사하기엔 무리가 있다. 뜬금없이 샤프심이 총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는 기괴한 현상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 이상, 그 말을 믿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니 이건 무슨 해프닝인가에 대해 조사를 하다가 끝나긴 하겠지만...

 

저도 피해자라니까요? 세상에 총알처럼 빠른 샤프심으로 죽을 뻔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날아드는 방향을 보아 시민들 사이에서 날아들었다는 건데, 그런 연약하고 힘 없는 시민은 저에게도 적용되는 사항이라고요. 제가 비록 이런 이상한 가면을 써서 믿지 않으시려고 하겠지만, 제 옆에 있는 여자친구도...아니. 코스프레 일 때문에 여장한 친구도 무서운 경험을 했다니까요? 안 그래도 소극적인 사람인데 이 일로 트라우마가 되면 어쩌겠어요?”

 

참으로 당당하게 자기가 저질러놓고 수습하기 위해 말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매우 능숙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그보다 여장한 친구라고 떠벌린 순간, 모든 사람들이 날 바라보는 시선은 가지각색으로 바뀌었다. , 코스튬 플레이 문화가 있긴 하니까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경향은 상대적으로 적겠지만, 방금 이 녀석 나를 여자로 착각했었지? 조만간 때릴까? 그리고 누가 소극적이야?

 

당신. 본부에 직접 전화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저 남자를 잡아가는 게 좋을 걸?”

 

서리가 피어 오르듯한 리제로트의 말에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나이가 어려도 카리스마가 타고난다면 자신보다 더 작은 어린 아이에게도 압도당할 수 있다. 하긴, 힘을 가진 자야말로 카리스마가 있기 마련인가?

 

그것도 아닐 텐데...

 

우선 경찰서까지 가시죠. 그보다...”

 

나를 바라본 경찰은 잠깐 고민하며 경직된 체 서 있었다. 나에게 끊임없는 불안감을 심어주는 행동을 5초동안 하다가, 다시 옆에 있던 리제로트가 입을 열기를...

 

그 사람은 놔두세요.”

 

여전히 나에게 볼일이 있다는 건가?

 

[레인은 괜찮을까?]

 

릴리스가 경찰관 사이에서 유령처럼 통과한 체 나에게 날아들었다. 다른 이들에게 허상이라고 해도, 그 허상이 내 손을 붙잡을 때는,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따듯했다.

 

[레인이야 알아서 해결하겠죠. 레인도 인맥이 없지 않아 있을 테니까요.]

 

자기가 일을 벌이고 수습하는 걸 밥 먹듯이 하는 녀석이니까. 저런 일에 익숙하다고 한다면...

 

[문제는 저에게 처해진 상황이네요.]

 

리제로트는 살며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더니.

 

잠깐 같이 차를 마실 시간은 있겠죠? 만약 없다면 그런 모습으로 조사받으러 가셔도 상관 없어요?”

 

천천히 경찰서로 끌려가는 레인을 바라보며 한숨을 마음속으로 포장했다.

 

좋아. 옷의 저주를 풀어야 하지만, 잠깐의 휴식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런데...”

 

유랑극단의 간부가 어째서 적의 입장인 자신과 이렇게 해도 되냐고 물어보고 싶은 거죠? 유랑극단은 애석하게도 결단력이 거의 없는 단체거든요. 당장 죽어야 할 적일지라도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일 뿐이에요.”

 

그런 것도 각본가가 다 쓴 거야?”

 

각본가의 존재는 모든 일을 미리 적어놓고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지만, 레이베리아의 힘이 그렇게까지 전지전능하지 않았나 보다.

 

아뇨. 이건 각본과는 별로 상관 없어요. 아무리 레이베리아라도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보다 제가 맛있는 찻집은 잘 알고 있으니 따라오시죠.”

 

적어도 옷의 저주라도 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내 여장이 리제로트 입장에선 보기 좋았나 보다. 정상적인 옷을 입고 있었을 때는, 기어가는 지네를 바라보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표정이 많이 나아졌다. 그런데...

 

꼭 이렇게 걸어가면서 공개처형이라도 해야겠냐?”

 

괜찮아요. 월터가 저희를 지켜줄 거에요.”

 

내가 내 몸 하나 지키지 못하는 줄 알아?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게 싫다는 거야.”

 

저주가 걸려서 벗지도 못하잖아요? 이렇게 된 이상 당당하게 커밍아웃이라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여장으로 커밍아웃을 왜 하는데? 여장을 당했는데 그런 비참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아.”

 

여장을 하던 말던 자신의 신변에 대해 궤변을 늘여놓는 건 잘 하시네요.”

 

궤변이라니? 나처럼 정론을 이야기 하는 사람도 없다고? 모든 세상사람들이 전부 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나야.”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니 이 말싸움은 내가 이긴 거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 이기고 지는 걸 따지는 내 입장을 잠깐 생각하자니, 너무 비참해서 머릿속에 있는 휴지통에 넣고 삭제를 누르기로 하자. 찻집에 따라가는 내내 월터의 팔을 바라보았는데, 샤프심임에도 불구하고 무기보다 더 심한 살상력으로 끌어올린 레인의 공격을 버티고도 아무일 없다는 듯이 잘만 움직였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 이 세상이 잘못 되었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건가요?”

 

인지는 하지. 어차피 이 시간대에서 내가 사라지기만 하면 되잖아. 나도 본래 장소로 돌아가고 싶어서 미칠 거 같아. 그러나, 해결해야 할 일이 한 두 개가 아니라서 말이지. 추후 미래의 유랑극단에 대한 일도 처리하고 싶으나, 애석하게도 우리끼리 싸우면 모든 곳이 다 멸망해버리니, 어쩔 수 없이 지금 당장이라도 뒤집지는 않는다고.”

 

뒤집는다면?”

 

레이베리아와 일기토를 벌일 생각도 하고 있어. 하지만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어.”

 

리제로트와 월터의 걸음이 멈추고 나도 따라서 멈췄다.

 

왜 나를 구해줬지?”

 

내 한마디에 리제로트는 우두커니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결정한 듯 입을 열었다.

 

당신이 죽는 건 각본에 없으니까요. 애초에 각본엔 당신의 이름도 특징도 적히지 않아요.”

 

내가 적히지 않는다는 건 예전부터 일어난 일이지, 그렇게까지 놀랄 필요는 없어.”

 

정해진 각본이었다면 죽었다는 건가? 아니면 그 각본에 쓰여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구해준 건가? 아니, 날 구한 목적은 따로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각본에 없다는 의미는 정해져 있는 결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증거. 그러니 당신을 한 번 살려주고, 그 은혜로 저에게 정해진 결말을 부셔달라는 의뢰를 하고 싶은 거에요.”

 

[호오? 꼬마가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데?]

 

나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던 릴리스의 감탄사는 내 귀를 때렸다. 유랑극단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의뢰를 했다는 말은, 적과 아군의 구분을 떠나서 일단 같은 배를 탄다는 의미가 되는데, 의뢰인이 배신을 안 할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저 어린 표정에는 절박함이 드러나있다.

 

그래? 내가 널 살려줬으니, 너도 날 살려달라 이런 소리구나.”

 

멋지게 돌려 말했는데 당신은 낭만이 없군요.”

 

의뢰를 받는 순간부터 낭만이고 뭐고 없어. 배신하지 않는다면 나는 의뢰인을 최대한 도와주는 것뿐이야.”

 

그러니 배신을 하면 그 이후엔 어찌될지 모른다는 협박을 미리 깔아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제로트는 흔쾌히 손을 내밀었는데. 악수라는 건 기본적으로 서로 잘해봅시다.”라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은 손을 붙잡고 살짝 흔들며 의뢰를 받아들인 찰나.

 

[자기? 아무래도 다른 곳에 위험이 생긴 거 같은데?]

 

[위험?]

 

리제로트가 이제 와서 자신을 미끼로 함정을 팔 이유는 없고.

 

[위험이라면? 적습은 아니겠지?]

 

일부러 위험이라는 단어를 쓰는 걸 보면, 명확한 정보를 모르는 모양이다. 유랑극단이 보낸 자객이라고 생각하기엔 의구심이 드는데...

 

카일~ 어디서 다른 소녀와 놀기 위해 비밀친구 서약을 하고 있는 거죠오?”

 

역시나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는 법이다.

 

대체 이게 무슨 난장판이야!”

 

거대한 검기가 리제로트와 월터를 노리는 게 아니라, 정확히 나를 노리며 뿜어져 나왔다. 공중으로 날아갈 만큼 힘껏 도약을 하자마자 기이한 밧줄이 날아왔는데, 마법방패<Magic Shield>로 내 주변을 감싸며 빠르게 회전시켰다. 밧줄은 빠른 회전에 튕겨나가고 안착한 자리에서 루비아와 루니아 누나를 마주했다.

 

그보다 명백하게 저를 먼저 죽이려고 하지 않았나요?”

 

당연히 카일이라면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안일하게 넘어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하물며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그런 생각을 안 했으면 좋겠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이지 않는가? 특히 나에게...

 

당신들도 같이 찻집에 가시죠?”

 

리제로트는 나와 마주할 때와는 전혀 다른 호의적인 미소와 함께, 루비아와 루니아 누나에게 권유를 했다. 물론 귀여운 걸 보면 환장하는 루니아 누나라면 받아들이고도 남았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유랑극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섣불리 승낙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귀여운 카일을 데리고 온 거랍니다아. 차는 잡화점 안에서 마셔도 상관 없거든요오.”

 

그런가요? 그럼 그 잡화점에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상상이상의 전개가 나오고 있어서 나 또한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다. 사실은 흥미진진하다기 보단, 여기서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 더 무서웠지만, 이제 하다못해 집까지 찾아오려고 한다. 지금 유랑극단들이 잡화점을 찾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다는데. 이렇게까지 말하는걸 보면 그냥 날로 먹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기다려. 잡화점은 아직까지 유랑극단은 아직까지 적이야. 너를 잡화점에 들어오게 하고 싶은 마음이 1%가량이 있어도 지금은 안돼.”

 

아까까지만 해도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얼굴이 살짝 풀어진 리제로트가 다시 정색을 하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흐음? 어여쁜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꼭 한번 찾아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진정으로 노리는 건 잡화점 멤버들이냐?

리제로트의 눈빛이 살짝 번뜩인 걸로 보아 진짜인 모양이다.

 

꽃밭에서 놀고 싶은 건 소녀의 마음이라고요?”

 

내 표정을 읽어서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만, 네가 말하는 꽃밭의 의미는 아무래도 전혀 다른 의미인 거 같으니까. 안 된다고 해둘게. 실제로 꽃밭에서 꽃들만 있는 줄 알아? 곤충도 있고 지렁이도 있고 그 사이에서 사냥하고 있는 고블린도 있다고.”

 

몬스터들의 숲에 2 3일로 캠핑을 해봐야 꽃밭도 전혀 아름답지 않다는 걸 깨닫겠지. 실제로 네펜데스 돌연변이들이 사람을 집어삼키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차이점이 있다며 그냥 네펜데스는 가만히 있고, 돌연변이들은 직접 뛰어서 사람을 집어삼킨다.

 

당신은 아직까지 자신이 어떤 삶을 사는지 잘 모르시나 보네요?”

 

글쎄? 사람이 많은 것이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여장하면서 이상한 잡지 모델이나 하는 삶은 원하지 않거든.”

 

잡화점에서 부정적으로 살아가는 건 없지만, 마냥 긍정적일 수 없는 이유라면, 아직까지 따라다니고 있는 투명한 카메라 같은 것들이, 온 종일 날아다니면서 잡지의 재료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리라.

 

물론, 지금 카메라를 든 루니아 누나 또한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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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연재주기가 길어지고 있네요.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 기간이 매우 짧아서, 제가 휴일 없이 야근을 1달에 30일정도를 하고 있거든요.


집 오면 새벽 12시부터 2시인데 아침 8시 30분까지 출근이니.

적어도 7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 와중에 글을 쓸 시간보단 제가 설계쪽의 일을 하면서 설계와 관련된 것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네요.


역시 직장인의 삶은 힘든가 봅니다...

 


 

585

 

 

 

세상 사람들 중에는 헛것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은데, 오늘은 그들 중 한 명이 바로 내가 되는 날이다. 몽마의 여왕답게 잠을 자고 있지 않아도 환상으로 나타나, 이곳 저곳 대려다 달라고 하고, 실물을 먹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보면 나 혼자 아이스크림 2개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으로 보고 있으리라. 애초에 여장을 한 상태에서 아이스크림 2개를 들었으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아이스크림을 매우 좋아하는 여장이 잘 어울리는 변태라고 보겠지.

 

그래, 아이스크림 2개를 드는 건 별로 타격이 없으니, 제발 여장이라도 풀어줬으면 좋겠으나, 레인이 따라다니기까지 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은 더욱 더 이곳으로 쏠렸다. 옷에 저주가 묻어서 존재감이 더 올라간 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어도, 시도 때도 없이 떠들고 있는 레인은 내가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저번에도 진공청소기로 모든걸 다 정리했죠.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시체도 남기지 않고 다 빨아들인다고요?”

 

그래? 너는 헌터들이 판치는 곳에서 나타나는 게 좋지 않겠냐? 환영극단인지 뭔지 하는 곳에 들어가면 잘 받아줄 거 같은데?”

 

저는 넨을 사용하지 않는데요?”

 

가끔씩 이런 농담을 주고 받을 때도 이 세계는 여전히 미쳐있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뿐이다. 다른 설정과 배경이 섞여버리는 기괴한 현상. 원인이라고 한다면 나와 레인이 각자 소유하고 있는 잡화점이, 하나의 시공간에 같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잡화점의 중추인격인 세린과 자주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런 상황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잡화점 하나가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뿐이고, 무리해서라도 지금 남아있는 방법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도 유랑극단이 미래를 난장판으로 만드는데, 본래 시간대인 300년전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사실...안전하다고 생각은 한다.

 

어차피 300년 뒤에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확인했어도, 지금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미래에는 누군가가 해결해줄 것이라고 판단을 했거나, 아니면 자신이 직접 찾아오면 잡화점이 그때는 3개가 될 테니까, 모든 평행차원과 함께 붕괴될 위험이 있으니, 일부러 찾아오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30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아무런 일 없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한번쯤은 미래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지 않는가? 예를 들어 복권이 있다.

 

물론 내 경우에는 300년 뒤의 1등 당첨금액이 얼마인지 알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미리 알아두기만 한다면 기분 좋지 않을까? 이건 너무 사소한 거 같으니......적어도 자신이 미래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스포일러라고는 하나, 자신이 잘 되는 스포일러를 미리 경험한다면 그게 또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고, 미래에 불행해진다고 한다면 그 불행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르지. 어차피 삶이란 것은 불안정한 4차원속에서 선택을 끊임없이 하기 때문에, 다른 평행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곳과는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삶은 매우 유동적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카일 씨는 그렇게 생각하나요?”

 

멋대로 남의 독백하는 글귀를 읽고 그럴싸한 질문을 던지지 말아줄래? 나는 어째서 독백을 읽히는 거냐? 아니면 내 타임라인에 독백이 올라와서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는 거냐?”

 

아뇨. 리트윗이 되고 있는데요?”

 

결국 공유를 하고 있다는 거잖아? 아니, 생각만 하고 있는데 왜 그런 것들이 실제로 공유가 되는 거야? 직접 문장을 치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말한 기억도 없다.

 

혹시 태클을 운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의 페널티가 아닐까요?”

 

페널티 킥으로 죽어볼래?”

 

이쯤 되면 창조신이 대체 무슨 이유로 날 창조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니, 창조신이 창조한 건 아니지. 나는 하늘에 계신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으니까.

 

...지금은 300년 뒤니까 부모님은 하늘에 계신 게 맞다. 물론 300년 전으로 돌아가면 살아계시겠지만.

 

카일 씨는 운명론자에요?”

 

운명은 개척이 가능하다.”

 

책에 쓰여진 그대로네요?”

 

그거 내가 일기에 썼던 내용이냐?”

 

기이하게도 내가 필수로 적어 넣어야 할 내용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일기나 자서전 같은 건 자신이 겪어온 과거와 그로 인한 성공과 실패, 자아성찰에 대한 내용들이 기술되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들어서 적는 게 아니고!

 

가급적이면 나에 대한 스포일러는 자제해줄래? 매번 일기나 그런 걸 채워 넣을 때마다 신경 쓰게 만들잖아?”

 

어라? 카일 씨. 일기도 쓰세요?”

 

나는 본래 일기를 쓰는 게 습관이야. 하루가 어떻게 마무리 되는 가를 쓰는 게 아니라, 내가 살아오면서 괴상한 경험들을 하나하나 기록해서, 최후에는 그 기록에 따라 아이언 클로를 집행해야 하기 때문이지.”

 

. 일기를 쓰는 건 좋지만, 목적이 매우 불순하네요.”

 

불순하다는 건 또 무슨 의미야?”

 

레인은 한숨을 내뱉고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불순하다는 건 딴 속셈이 있어 참되지 못하다라는 뜻이에요.”

 

어디 사전 검색해서 이야기 하지 말라고, 내가 말한 의도는 그게 아니잖아. 아이언 클로를 날리기 위한 일기장도 필요에 의해 쓸 수 있다고!”

 

모든 것엔 목적이 있지만, 꼭 그에 맞는 목적을 설정하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운동하는 목적은 건강보다는 배가 더 고프면 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있지 않는가? 그러니 무언가 하는 행위에는 여러 목적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러니 나는 불순하지 않아.

오히려 순수하다고 봐야 한다.

 

내가 마음을 다 잡았을 무렵, 레인은 내 쪽에서 한 발자국 벌어졌다. 고작 한 발자국 멀어진 거 같지만 분위기 상, 마음의 거리는 우주 저 끝까지 나아가고 있겠지. 어쩌면 우주를 넘어 다른 평행차원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지금은 그런 추진력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만...

 

목적은 사소한 거라도 다 가능해. 예를 들어 네가 개미를 관찰하고 인간의 집단은 개미보다 더 못하다. 라는 일기를 써도 일기의 기능을 제대로 한다고.”

 

나중에 미래를 예지하는 일기를 쓰시는 건가요?”

 

그 일기는 파손되면 죽는 거잖아.”

 

미래를 예지하는 일기라...

있으면 그리 쓸모는 없다고 본다.

 

그건 이미 정해진 운명으로 도달하게 만드니까.

 

정해진 운명이 그리 좋은 건 아니지. 인생은 언제나 순탄하게 가지 않으니까. 미래가 참하면 그게 살맛이 나겠냐?”

 

그렇군요. 그러면 카일 씨의 일기를 다 태울까요?”

 

알아서 해라. 태우던지 불쏘시개로 쓰던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태워버리라고 하고 싶은데, 차기 잡화점의 주인이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내가 태우라고 했는데 레인이 거절한다고 해도, 뭐라 말할 이유도 뭐도 안 된다.

 

자기~ 저 옷 사주면 안 되?”

 

저 옷을 내가 왜 사줘? 그 전에 너는 환각에서나 튀어나오는 귀신 같은 존재잖아. 아니면 꿈의 미로에서 나와서 직접 현실로 튀어 나오던가?”

 

릴리스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내 말에 반박했다.

 

아니. 저건 자기가 입을 건데?”

 

안 입는다고!”

 

지금 여장한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오늘의 신상품이라고 나온 저 옷을 입으라고? 차라리 나더러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따오라고 해라.

 

저주를 풀러 왔다면 나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이렇게 거절하면 자기는 한 곳만 방황하다가 오늘 하루를 다 날리는 것이 아닐까?”

 

이 녀석...조만간 잡화점에 찾아오기만 해봐라...”

 

어머? 그렇게 나를 보고 싶어하는 거야? 기뻐라~”

 

저 표정.

구겨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이언 클로가 현실세계와 꿈의 경계를 부수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뻗었지만 아무런 형체가 없이 허공만 스칠 뿐.

 

하아.”

 

한숨이 밖으로 나와 하늘로 날아갔다. 누군가는 괴롭힘을 받고 누군가는 괴롭힌다. 이건 무슨 음과 양의 관계와 관련이 있는 걸까? 아니, 세상의 이치는 아주 간단하게 기준이라는 것이 정해진 모양이다.

 

그 기준은 전부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필요한 걸까? 언제나 세상은 중심적...

 

자기? 그런 독백은 재미가 없어서 뒤로 가기를 누르는 사람이 분명 존재할 텐데?”

 

시끄러워! 개나 소나 독백을 다 훔쳐보고!”

 

나는 개나 소는 아닌데? 혹시 그런 게 좋다면 노력은...”

 

이상한 쪽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이 하도 훔쳐보는 바람에 눈물이 나려고 한다.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독백은 멋대로 볼 수 있다는 상황이 너무 불공평하다. 당연히 훈련을 한다면 사람의 심리상태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는 있어도, 자세하게 독백을 한다는 자체는 너무하지 않나?

 

설마 이런 독백 하나하나 읽는 것도 설정이 오염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어차피 이게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는 일이긴 하지만, 시공간에 관련된 것도 복잡해 죽겠는데 평행차원까지 생각하니까 머리가 터지려고 하네.”

 

그래서 저 옷은?”

 

안 입어!”

 

틈새시장을 공략하려는 릴리스에게 소리를 친 뒤에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세상이 무너져도 정신상태가 아다만티움보다 더 뛰어난 잡화점 멤버들의 장난은 가위바위보부터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가위바위보를 하면 거의 무조건 이기는 마왕이 있는가 하면, 나타날 때마다 세계가 날아가는 여왕이 있고, 대체 이게 인간인지 괴물인지 모르는 여기사를 필두로, 내가 싫어하는 것만큼은 계속해서 건들이기 시작한다.

 

시나의 경우는 그나마 얌전하기 때문인데 대략 소금이 있다면 시나의 경우에는 물에 약간 희석시킨 정도가 된다.

 

그래도 짠 건 마찬가지...

이후 릴리스와 아리엘, 루비아까지 늘어나면서 24시간 쉴 틈도 없이 날 괴롭히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악마가 오면 질색하면서 도망갈 것이고, 어쩌면 아다만티움이 그들의 정신력과 음흉함에 비하면 나트륨까지 내려갈 수 있으리라.

 

나트륨은 물에 닿으면 폭발...”

 

그만 읽어!!!”

 

레인에게도 한차례 소리질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어쩌겠어요? 그게 카일 씨의 운명인데?”

 

내 운명이 남들에게 태클 거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내내 독백이나 흘리는 괴상한 운명이냐? 차라리 기묘한 운명을 타고나서 파문이라도 사용하는 게 속이 더 편하겠다!”

 

파문의 호흡은 건강에 좋다고도 하니까.

 

그래도 이렇게 상대함으로써 카일 씨도 심심하지 않잖아요.”

 

심심하지는 않지. 분노가 치솟고 있으니까.”

 

입고 있는 옷의 저주를 풀기 위한 여행은 그리 순탄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하루를 쓸 때 없는 잡담으로 날리는 중이니까.

 

어라? 카일 씨.”

 

또 왜?”

 

앞을 보세요.”

 

내가 걷고 있는 방향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그쪽이 앞이 아닌가? 그러나 더 멀리 바라본 시야에서는 소녀와 키가 큰 남자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받으며 걷고 있었다.

 

여전히 인기가 많구만...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옆에서 레인의 행동을 차마 막지 못하고 눈으로 쫓을 수 밖에 없었는데...레인이 꺼낸 샤프의 끝부분이 정확하게 리제로트를 겨누며 딸칵하고 눌렀다.

 

-피이잉!

 

바람을 가르고 지나가는 샤프심이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간 것도 무서웠지만, 집사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리제로트를 가리고 양팔로 막아내기까지 했다.

 

! !”

 

나는 레인에게 따지려고 소리를 쳤지만 금세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숨만 쉬면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보내는데, 이런 대형사고를 내 근처에서 쳤으니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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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글을 올린 이유는

일이 새벽에 끝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항상 새벽에 끝나ㅇ...[털썩]

 

584

 

언제나 사람은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라면 매우 간단하다.

내가 나를 챙겨야 하는데 남을 생각할 시간이 있을까?

언제나 나 자신에 대한 여유를 찾아야, 오지랖 넓게 남을 생각해주는 척을 할 수 있지.

-맹렬한 추격전을 끝마치고 결국 붙잡힌 카일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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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로트 처리 여부는 레인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장 우려한 것은 조용히 일을 처리하기 싫어하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 보통 고위급의 간부나 귀족, 대상인 등. 세상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암살자들을 고용하여 조용하게 처리하는 것이 일반상식이다. 다만, 레인의 경우에는 일반상식을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분명 개인방송국을 열어서 ! 오늘! 살인합니다!”라고 경찰서 앞에서 신나게 떠벌릴게 분명하니까.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언제나 자극적이지 않으면 만족을 못하는 부류에, 켈모리아 마그누스가 있었고 레인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은 보기 좋게 틀려버렸다. 레인의 성격을 고찰하면 고찰할수록, 이 녀석은 자극적이지 않으면 만족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생 살아가는 동안 자극적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내가 마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태클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

 

레인은 1 1초라도 지루할 틈이 없다.

 

위험천만한 것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 초능력도 레인의 성격과 매우 흡사한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 따라서 지금은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가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 이른 아침에 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도 눈을 떴는데, 거기에는 백장미를 못 찍게 하는 나에게 반기를 들어버린 루니아 누나를 필두로, 모든 잡화점 멤버가 기습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빠르게 도망쳐 나왔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모든 도로와 모든 건물들을 통해서 달리고, 뛰고, 부수고, 날리고를 반복. 그 일대에 피해는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20분 뒤에 치열하고 처절했던 아침운동은 막을 내렸다. 루비아의 글레이프니르 앞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아무런 힘도 못쓰고 그대로 붙잡혀야만 하는 사기적인 아이템.

 

매번 나를 죽이라는 말을 해도, 되돌아오는 것은 자비가 아닌 비웃음과 더불어 빌어먹게도...

 

카일 씨는 보면 볼수록 여장이 진화하네요?”

 

닥쳐.”

 

레인이 내 신경을 긁다 못해 삽으로 파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살인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는 분노를 천천히 조절하면서 제거하고 있는 나의 모습. 마음속에서 심호흡을 1시간 전부터 120번 내쉬고, 한번의 한숨으로 내 입밖에 튀어나왔다.

 

심호흡을 마음속으로 내쉬는 것도 좀 이상하지만, 현 상황이 더 이상하니까 빨리 여장을 풀기 위해 노력을 하자. 어처구니 없게도 옷 하나하나가 모두 기괴한 저주덩어리들이라, 물품을 이용하여 해주를 하거나 고위 프리스트를 찾아 나서야 하는 상황. 레인에게 찾아간 이유는 레인의 능력을 이용해서, 저주를 해제하려고 했으나 위험한 건 하나같이 다 들어가있는 잡화점 물품의 특정상, 지금 해주 할 수 있는 물품을 찾으러 떠나고 있다.

 

지금은 천계가 모조리 비어있는 상황에서 대주교를 찾아가던 성녀를 찾아가던 권능을 빌릴 수 없는 상황이다. 물품을 빨리 찾고 이 바보 같은 옷에서 벗어나도록 하자.

 

그래서 이번엔 검은 고양이인가요?”

 

닥치라고 했지.”

 

마왕님과 커플룩이네. 아니, 커플 종족인가?”

 

분자단위로 해체해버리기 전에 닥쳐.”

 

닭을 때리라뇨. 카일 씨는 잔인한 사람...! 아파! 알았어요! 잘못했다니까요!”

 

커플 종족이라는 어감이 굉장히 이상해서, 본래 때리려는 힘보다 1.2배정도 강하게 때렸다. 내가 여장을 함에 따라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황폐화되기는커녕, 잡화점 멤버들은 좋아하고 있고, 히드라는 계속해서 !”하고 짧은 웃음을 스타카토로 연주했다. 조만간 불러내서 중모리장단으로 때려야지.

 

이걸 도와주면 리제로트를 제거하는 것에 동참하겠다는 소리죠?”

 

애석하게도 죽이는 게 목적은 아니지, 하지만 내가 죽이라고 하면 죽여도 상관 없어. 대신 멋대로 먼저 죽이지는 마라. 물어볼 건 물어보고 죽일지 살릴지 결정해야 하니까.”

 

역시 어린애를 좋아해서 그런가?”

 

은팔찌를 찰만한 발언은 그만둬라. 그리고 나에 대한 오해가 너무 많은 거 같은데, 어린애를 좋아하는 건 너잖아. 이 범죄자야.”

 

범죄자라뇨. 고성능 싸이코라고 해주세요.”

 

어째서 너는 그런 대답이 나오는 거냐?”

 

사람들이 자신에게 싸이코라고 하는 경우는 친한 친구들의 대화 중에선 나올 수 있지만, 정상인과 비정상인들의 대화에서 비정상인이 싸이코라고 한다면, 그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당장 피하자.

 

그런데 리제로트를 끌어 내려면...”

 

무슨 소리하려는지 알고 있으니 제발 좀 조용히 해.”

 

정말요?”

 

아니. 사실 모르는데 짜증나니까 조용히 하라고.”

 

레인은 시큰둥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너무 과민반응을 한 터라 혹시나 마음이 상했을까? 그나마 미안함이라는 감각이 내 이성을 정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지금은 조용히 있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 폐가에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카메라들이 사방팔방에 있는 거야.”

 

기존에 찍었던 백장미와는 다르게 생동감을 주기 위함이라고, 내 주변에 카메라처럼 생긴 물체들이 이곳 저곳에 날아다니고 있었다. , 어디에 묶여서 강제로 촬영을 당하는 것도 나쁜 거지만, 이건 뭐...대놓고 도찰하겠다는 거잖아?

 

조만간 가지 말아야 할 폐가에 찾아가서 기이한 현상을 카메라에 담는 건가요?”

 

이 세상에 폐가에 찾아갈 생각을 왜 하는 거야? 애초에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면 안 되지.”

 

무엇이든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무튼 가장 큰 목적은 유랑극단도 아니고, 리제로트를 찾는 것도 아니고, 옷에 걸려있는 저주를 풀어서 자연스러운 나를 찾기 위함이니, 오늘 하루는 이 일에 집중을 하도록 하자.

 

카일 씨는 여장을 가장 싫어하네요?”

 

그야 하기 싫은데 억지로 입히니까 그렇지. 잡화점 멤버는 기본적으로 내 의견은 묵살하고 입히거든. 카메라에 녹화가 되니까 그 이상 말은 하지 않겠지만, 이렇게 보여도 나는 꽤 복잡한 삶을 살고 있다고 봐.”

 

그 어떤 인간도 성별이 바뀌는 경험을 체험하는 건 쉽지 않는 일이지만, 잡화점 안에 있으면 방심하는 순간 바뀌는 터라, 전생에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갑갑한 내 상황에 한숨을 내쉬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고정이 되었는데, 제길 한숨을 쉬는 것조차 반응하도록 내 존재감을 높여버렸나?

 

뜬금없이 말하는 거지만 시선이 너무 많이 쏠리는데요?”

 

아까와도 말했듯이 이 옷들은 저주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레시아와 시나가 같이 다니지 않는 게 가장 크겠지만, 지금 내 존재는 일이 너무 바빠 죽을듯한 사람도 나를 무시 못하게 되어있어. 이래선 차량을 운전하는 사람들이 사고가 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 일부러 차가 적은 구역을 돌아다니고 있는 건데, 여기도 사람이 너무 밀집된 구역이라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네.”

 

주변에서 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아직까지 내 몸에서 타고 흐르는 싸늘한 소름은 내 생각을 거부하기 마련. 보고도 못 본척하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람부터, 그냥 대놓고 보면서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까지 가지각색이다. 또 다른 경우라고 한다면...

 

? 고양이 꼬리는 진짜 같구나.”

 

뒤에서 뜬금없이 목소리를 낸 릴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겨울이 지나갔다고 해서 그 추위는 전부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꽃샘추위를 견디기 위한 흰색의 시스루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스커트와 연분홍색의 연분홍 빛이 스며든 세미 자켓을 입고 있었다.

 

대체 고양이가 뭐길래 계속해서 고양이 귀와 꼬리를 다는지 그 이유부터 묻고 싶지만, 지금은 매우 바쁘니 그 일에 대해 나중에 말하도록 하지.”

 

사실상 여장을 당하는 와중에도, 릴리스가 그럼 고양이 귀와 꼬리를 다는 건 어떨까?”라는 말 한마디에 고양이 귀와 꼬리가 최적화된 코디로 바뀌어버렸다. 불 나는 집에 기름을 더 부어버린 릴리스는 옷을 입고 있어도, 감각적인 몸과 다른 이들을 홀려서 녹일 듯한 외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유라면 내 환각에만 보이기 때문.

 

아무리 환각을 이용하더라도 적절하게 쓰면 그거야 말로 좋은 정보원이 될 수 있는데, 지금의 경우에는 릴리스가 길잡이를 해주고 있는 역할이다. 여태까지 나는 목적이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니까, 릴리스에게 책임을 묻고 저주를 풀기 전까지 길잡이를 하라고 했다.

 

아무튼 지금 거의 다 온 거야?”

 

아니~ 아직 한~참 남았어.”

 

아직 한참 남았으면 지금 빨리 가야 할 텐데, 매번 미소를 짓고 여유가 있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데이트 했으면 좋겠다~ 이런 봄 날에~”

 

그거 협박이지?”

 

글쎄? 나는 협박 같은 거 모르는데?”

 

천진난만하게 나를 보고 있는 릴리스의 말과 의도를 번역하자면, “데이트 해주기 전까지 그 옷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장소를 가르쳐주지 않을 거야.”라고 들리게 되었다. 기이하게도 분명 피해 받은 사람은 나고, 이런 꼴로 만든 공범은 릴리스인데도, 갑과 을의 관계는 릴리스가 더 높았다.

 

하아...지금은 레인도 동참하고 있으니까 데이트는 나중에...”

 

?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해주를 할 수 있는 물품을 파는 곳이 떠오르지가 않네?”

 

! 진짜! 알았어! 하면 되잖아!”

 

이 모습을 입고 데이트를 한다고? 나를 죽이다 못해 무덤에서 꺼낸 뒤에, 5개로 분해하고 5대륙에 파묻는 것과 같다. 소리질러서 이곳으로 다시 시선집중이 되었는데, 주변 반응에 아랑곳 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 건가? 자기가 데이트를 해준다니 따라갈 수 밖에 없잖아?”

 

내가 어쩌다 이런 모습으로 환각과 같이 데이트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환각이라고는 해도, 나와 적절하게 링크가 되어있으니 잘 대해줘야 해?”

 

그리고는 나와 레인의 사이를 뛰어들어 내 팔을 붙잡았다. 그 사람에게만 보이는 환각은 그 감각까지 혼란을 일으키지만, 레인의 경우에는 릴리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접촉자체를 할 수 없으니 아무일 없는 듯이 걸어갔다.

 

릴리스라는 분은 어디에 있는 거에요?”

 

지금은 꿈의 미로에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겠지.”

 

몽마들의 여왕이기 때문인가요?”

 

기이하게도 꿈은 모든 차원과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 공간이니까. 꿈에 한정을 짓자면 릴리스가 잡화점에서 최강자에 속해. 레시아도 릴리스가 꿈에서 추방시키면 꿈의 미로로 들어가지 못하거든.”

 

세계를 창조하고 강력한 마왕이 되고 최고의 여기사로 명성을 떨쳐도, 현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공간의 규칙에 대해 얽매이기 마련. 그 시공간의 규칙을 깨고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릴리스야 말로, 어찌 생각을 해보면 최강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존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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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일하기 싫ㅇ...

 

583

 

 

 

사실상 방법이라면 미래에 대한 걸 알아버렸으니 과거로 돌아가서 바꾸는 것이 있다. 그러나, 멋대로 과거를 바꿔서 난장판이 된 이야기가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과거를 바꾸지 않고 미래에서 해결만 하려는 선택지를 골랐다. 그런데 내가 미래에 오래 있어도 상황은 악화되고, 무분별하게 과거를 바꾸려고 시도하면 시간의 파수꾼들이 찾아오리라. 시간의 파수꾼 중 유랑극단과 손을 잡은 자가 존재한다면, 과거로 가든 미래에 있든 나에게 불리하다는 것만큼은 별만 다를 바가 없지. 잡화점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멤버들은 하나 같이 침묵을 유지할 뿐이다.

 

분명 내 앞에 있는 멤버들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를 생각하는 거라면 정말 좋겠지만...

 

그래서 주인. 언제쯤 촬영을 시작할 건가?”

 

난 분명 찍는다는 말도 없었는데 검은 고양이가 판을 깔아놓고 있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요?”

 

하지만 카일? 누나 생각으로는 백장미를 찍는 것도 중요해요오.”

 

파도가 치는듯한 금발의 여성은 레시아의 말에 동조했다.

 

루니아 누나. 제 말을 다 듣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요?”

 

기왕 이 세상이 언젠가 사라진다면, 어쩔 수 없이 카일의 귀여운 모습을 최대한 많이 남겨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오?”

 

안 좋아요.”

 

찍히는 당사자가 안 좋아.

 

그래도 어릿광대가 신이 되었다라아? 결국 미래에 오래 있어봤자 다른 평행차원의 설정들이 이곳까지 섞여 녹아 들고 누군가는 기괴한 설정에 오염된다는 소리군요오?”

 

기괴한 설정에 오염이 되어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4차원을 뛰어넘은 대재앙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으리라. 만약 다른 세상의 설정이 오염된다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사각형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나무젓가락과 공하나 올려놓는 듯한 모습으로 오염될지 모른다.

 

심지어 세계관까지 오염된다면 오메가버스인지 스쿨버스인지까지 되어버리면, 그 즉시 총채적 난국으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 그리고 몇몇 평행차원은 우린 멸망했어요.”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이곳을 오염시킨다면, 모든 평행차원 자체가 멸망 당하는 것뿐이다. 그 이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겠지.

 

따라서, 지금 가장 커다란 문제는 수 많은 평행차원 중. 분명 멸망하여 사라진 우주가 존재하리라 예상하고, 그걸 방지하면서도 유랑극단을 부셔야 하지만...

 

생각해보니 미래까지 유랑극단이 있다는 소리는,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유랑극단을 모조리 제거하는데 실패했다는 소리가 된다. 따라서, 미래에서 해결을 보고 과거로 돌아가서 유유자적하게 준비만 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역시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기에, 머릿속은 매우 복잡하고 정리하려고 하니 너무 꼬여버렸다.

어쨌든...

 

지금은 생각하지도 못한 재앙을 통해 우리가 살아갈 길을 알아보도록 하자. 늘 계속 생각해왔던 거지만, 내가 잡화점을 처음 접하기 전부터 300년 뒤에 나는 이런 바보 같은 일을 꾸준하게 진행했다는 증거야말로, 이곳에는 존재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태클을 걸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이 미래를 제대로 매듭짓지 못하면, 결국 과거의 나는 알지도 못하는 기괴한 지식을 자연스럽게 받아 치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행동하게 되리라.

 

물론 그건 재앙이 아니다.

진짜 재앙은 아까 전에 말했듯이, 설정이나 세계관이 오염되는 경우일 뿐. 어쩌면 레이베리아의 진짜 목표라면, 평행차원이 융합되기 전에 일어나는 혼돈을 막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세계의 설정이 침범한다면, 꿈과 희망이 없는 이야기의 설정도 이곳에 찾아올 수도 있죠. 예를 들어 마법소녀가 사람을 죽이고, 그 사람이 부활해서 매지컬~”이라는 기묘한 말과 함께 온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거요.”

 

그럼 저도 매지컬 루니아로 활동할 수 있으니 좋은 거네요오?”

 

매지컬에 대한 단어가 무조건 좋다는 게 아니잖아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어요!”

 

으음. 백장미 찍고 싶다고 했었죠오.”

 

제멋대로 말하지마! 그런 단어는 단 한마디도 안 했어!”

 

아직까지도 백장미타령을 신나게 하고 있는 루니아 누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리친 것에 대해 뭐라 할 줄 알았더니. “귀여워라아~”라고 말하는 게 더 무서웠으니, 가급적이면 백장미를 찍자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도망가도록 하자.

 

검은 고양이는 내 다리 위에서 앞발을 핥았다.

 

그렇군. 주인의 말대로 확실히 이 재앙은 성가신 것이니라. 마왕이라는 존재는 분명 대중적인 눈으로 볼 때, 대부분 다 악인이 틀림없노라. 그런 설정이 짐에게 오염되기라도 한다면, 그거야 말로 무시무시한 일이 되어버리니. 지금 당장이라도 과거로 돌아가서 평행차원이 합쳐지는 것을 막는 일 밖에 없다.”

 

잡화점이 하나의 시공간에 2개가 되지 않으면 될 일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렇다.”

 

매우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이다.

본래 시간대로 되돌아가는 건 오래 전에도 했으니까.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요?”

 

없다.”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요?”

 

당연히 본래 시간대로 되돌아가서 그것을 하려고 할 뿐이다.”

 

세상에~”

 

그것은 또 뭔데? 광대가 나와서 어린애들을 실종시키는 영화인가?

 

마왕님도 대담하시군요. 그런 계획이라면 첩은 지금 당장 본래 시간대로 이동시킬 준비를...”

 

연한 초콜릿 피부를 지닌 마리아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체격은 어린애지만 검은 달의 여왕으로서, 저래 보여도 대재앙의 증거이며 새로운 시작의 알림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슬슬 아이니스에게 받아놨던 육포가 다 떨어졌으니 충전해야 한다.”

 

결국 육포냐!”

 

나름 진지하게 생각하길래 그래도 레시아만큼은 다르다고 생각을 했더니. 결국 육포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가 있어야 할 시간으로 돌아간다니. 육포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선 다음에 고찰하자.

 

그래도 지금까지 들어본 바로는 상당히 위험한 상태라는 거죠?”

 

황혼을 담은 듯한 눈빛이 번뜩였다. 1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이 베어 나오고 있는 소녀는 은빛의 비단과 같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푸른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앉아있는데, 조만간 길거리 싸움터에 나갈 준비라도 하는 걸까?

 

아무튼 나는 아리엘의 질문에 대답하기로 했다.

 

맞아. 지금 이대로라면 몽마의 설정도 막 바뀌기 시작해서, 네가 한쪽 손에 시퍼런 칼날이 손톱처럼 자라나있는 장갑을 끼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죽일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양호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일은 어느 시간대를 가든 다 똑같이 일어날 꺼야. 그 증거로 우리는 미래에 오기도 전에 알지도 못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고 농담과 태클에 써먹고 있지. 이건 마치 성경책을 펼치고 반야심경에 대한 내용을 확인하는 것과 똑같다는 거야.”

 

예시마저 저희가 원래 몰라야 하는 거잖아요.”

 

허탈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리엘의 말을 들어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러면 나의 순수했던 과거부터 지금까지 평행차원들은 이쪽 차원으로 응집되고 있었다는 모양인데, 지금은 설정이 뒤틀려서 니알라토텝이 되어버린 어릿광대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어릿광대가 뭘 하는지 중요한 이유라도 알 수 있습니까? 마스터?”

 

그 무지막지한 혼종이 다른 곳에서 난리를 치면 안 되거든...”

 

하얀 올빼미가 내 어깨에 붙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상 갸웃이라기엔 기이하게 꺾여버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다음 내용을 덧붙였다.

 

시나는 그나마 다른 평행차원에서 넘어온 케이스라서 면역이 되어있는 희망 가득한 캐릭터인가?”

 

그건 확실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희망이 가득한 캐릭터는 아닙니다. 마스터에게 예쁨과 사랑을 항시 받아야 하는 가련한 캐릭터죠.”

 

비둘기가 가련하다는 말은...”

 

올빼미입니다. 냥캣.”

 

시끄럽다! 내려와라! 싸우자!”

 

또 서로 경쟁심에 불붙기 시작했구나. 사소한 싸움은 좋지 않다만 지금 이런 모습을 보니, 저 둘에게 기이한 세계의 설정이 오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당연히 안도하고 있는 와중에 거대한 마력폭발에 휩쓸렸다고 해서 안 아픈 건 아니다.

 

잠깐 정신을 잃는 동안에도 나는 생각을 했는데...

아니? 정신을 잃었는데 생각을 어떻게 해?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살짝 검게 그을린 상태로 기침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 결계와 방어를 했는지 멀쩡히 일어서있을 뿐이었다. 물론 최고의 중심부에 맞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모두 나만 바라보면서 멍하니 있을 뿐.

 

왜요? 또 뭐가 문제에요?”

 

기괴하군. 평상시의 흐름이라면 주인은 마력폭발에 기절하고, 그 사이에 백장미를 찍을 옷을 입힌다는 정상적인 진행이 되어야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의 주인은 쓰러지지 않고 멀쩡하게 서 있지 않는가?”

 

그게 왜 평상시의 흐름이고 정상적인 진행입니까? 그리고 중복된 말을 사용해서 강조하지 마시죠?”

 

평상시의 흐름은 잡화점에 사건이 들어오면 그걸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거다.

생각을 해보니 잡화점에서 사건을 받고 그걸 해결하는 것 또한 이상한데? 다시 생각을 해보면 잡화점 안에 있는 위험한 물품이 2층과 3층에 있는데, 그걸 지키는 역할이 더 비중이 크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기괴한 잡지를 찍기 위해 잡화점의 주인이 된 건 아니란 말이지.

 

그러면 일단 투표를 하죠.”

 

투표내용이라면 여기서 백장미를 찍는가? 아니면 본래 시간대로 돌아가서 찍는가에 대한 거죠?”

 

아니에요. 루비아 씨.”

 

루니아 누나의 여동생인 루비아마저 기괴한 밧줄형태의 무언가를 손에 감싸며 입을 열었다.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의 부정하는 사람의 심정을 잘 모르는 거 같은데?

 

그렇게 정색을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만, 루비아 상처받았습니다. 에엥. 에엥.”

 

영혼마저 없는 울음소리라니. 그보다 신사에서 입었던 그 무녀복장 말고 좀 더 편한 옷이 있잖아요?”

 

이것마저 입지 못하면 저의 캐릭터를 지킬 수 없습니다.”

 

왜 캐릭터를 지키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건 개인의 자유니까 제가 뭐라 할 처지는 아니네요.”

 

그럼 제 개인의 자유로 지금 백장미 찍을 것을...”

 

사람의 말을 듣고 멋대로 해석하지 내뱉지 말아주실래요?”

 

잠깐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리제로트를 처리해야 할 건도 있으니. 본래 시간대로 돌아가는 건 잠깐 미루도록 하죠. 그나마 시간이 덜 걸리는 이유라면, 레인의 성격상 자기가 공격할 시간을 멋대로 골라서 통보할 성격이니까요.”

 

아직은 돌아갈 시간은 아니다.

 

리제로트는 굳이 죽이지 않으시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거 같은데 말이죠?”

 

윈디는 내 옆에서 그리 말했다. 나는 분명 꼭 죽일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결국 레인을 돕는 건 나고, 죽일지 살릴지 결정하는 것에 대해 내 의견을 살짝 얹었을 뿐. 레인이 리제로트를 먼저 발견하여 죽인다면, 그건 어쩔 수 없이 레인의 선택일 뿐이다.

 

아무리 강대한 적이라도 피를 흘려서 해결하는 방법은 옳지 못하지만, 레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사실상 나도 그 녀석만큼은 막지 못할 거야.”

 

솔직히 말하면 레인을 막기가 싫다.

어차피 레인은 또 다시 자기 멋대로 일을 저지르고 수습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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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내내 일하면 죽어가는 것도 느껴집니다.

 

582

 

 

 

보통 사람이 칼에 찔리면 처음에는 고통이 없으나, 이후에는 천천히 고통이 느껴지고 조금만 더 있으면 고통이 커지는데, 이걸 매우 쉽게 말하면 칼에 찔리면 마이아파.”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지금 내 몸 어딘가에 단검이 박혀있는지 눈으로 쫓고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심장부근에 박혀 빠지지 않는 상태였고, 칼에 찔린 것도 서러워죽겠는데 어릿광대의 조소가 내 귀로 들어와 정신적인 피해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몸에 이변이 생기고 있다는 건 붉은 피가 흘러나와 출혈로 인해 빈혈이 생기기보단, 오히려 아주 조금만 흘렸을 뿐. 안에는 이제 남아있지 않다는 듯이 피는 나오지도 않고, 마치 지점토에 칼을 찌른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지점토가 칼에 찔리면 이런 느낌이 강하겠지.

 

[인간...도대체 어찌 된 것이냐?]

 

사람은 피를 흘린다라는 공식이야 말로 이 세상의 법칙이자 변하면 안 된다. 히드라가 충격을 먹고 나에게 질문을 하는 동안, 주변 바람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윈디가 동요하는 동안 어릿광대의 조소는 멈추지 않았다.

 

역시나!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렸어! 피가 도중에 나지 않잖아!”

 

아니. 잠깐만 기다려봐. 아마 지금 토마토소스를 섭취한다면 분명 더 나올 거 같으니까. 지금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토마토 좀 사줄래?”

 

당연히 직접 찔린 당사자 또한 매우 당황해야 정상이지. 게다가 통증도 이제 느껴지지 않았고, 곧바로 죽어야 하는 치명상임에도 불구하고 농담하나 제대로 던질 정도라면, 이제 물리적인 방법으로 내가 죽기엔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단 소리다.

 

나도 모르게 어릿광대가 쑤셔 넣은 단검을 빼냈다. 분명 피가 있었으니 검은 단검에도 보이는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지만, 내 몸을 살펴보니 그 자리에는 피가 흐르다 만 것 이외에 신성력과 마기, 마나가 합쳐져 있는 거대한 에너지가 상처부위를 막고 재빠르게 재생까지 했다.

 

세상에...”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또 뭐가 되어버린 거지?

 

이제 인간이 아니네. 완벽하게 인간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존재, 혹은 새로운 신으로 뻗어 나아가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뿌듯해. 너무 뿌듯해서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니까? 아 맞다. 지금은 가면을 쓰고 있으니 눈물을 흘릴 수가 없지. 그럼 소리라도 내도록 할게! 에엥! 에엥!”

 

단검을 들고 양손으로 하얀 가면을 가리면서 우는 척 하는 게, 어린 아이들의 생일파티보다 더 짜증이 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는 잡화점에서 쫓겨날 처지가 되긴 해도, 아직까지 루니아 누나가 잡화점 안에 남아있으니, 나 대신 잡화점의 후계자가 되어도 상관이 없으나, 지금은 실제로 내가 인간의 틀을 완벽하게 벗어났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오히려 이런 상황은 프리스트들이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신성력을 빌려 자신의 몸을 일시적으로 에너지화 시키는 경우도 있으니. 아직까지 나는 잡화점의 주인일 뿐이다.

 

, 이건 따로 생각하도록 하자. 이렇게 되면 염라대왕이 날 명계로 못 끌고 갈 테니, 내 명줄이 좀 더 늘어났다고 생각만 해보자.”

 

명줄이 늘어난 게 아니라 특수한 공정을 거치지 않으면 영원하게 살 수 있겠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입장에서는 내 개인적인 견해로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아직까지 할 일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부터라도 긍정적인 면을 좀 보고 살아봐야지.

 

결국엔 나와 자기는 영원히 싸울 수 있다는 거야. 이렇게 되면 결혼식도 올리고 다른 여자들도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아니.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다른 존재로 돌연변이가 되었다고는 하나, 결과적으로 널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그래서 이제 도망갈 준비를 하는 거냐?”

 

조금씩 거리가 멀어지는 착각을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정말로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

 

그래도 지금은 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왜 의문문을 의문문으로 대답하냐? 쓸 때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지 마.”

 

그럼 이렇게 180도로 돌려서...”

 

“180도로 고개를 어떻게 돌...으아악! 이 괴물 같은 녀석! 진짜로 돌리지 말고 제대로 갸웃거리기나 해!”

 

괴물 같은 게 아니라. 따지고 보면 도플갱어도 몬스터에 속하니까 괴물 맞아.”

 

그런 거 수긍하지 말고! 목뼈 부러지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린다!”

 

아무리 도플갱어라도 목은 180도로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러면 오늘은 여기서 끝내볼까? 다음에 볼 때는 방해자가 없으면 좋겠는...”

 

-콰아앙!

 

어릿광대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폭발 하나. 굉음은 이곳까지 울리고 온 천하를 전율에 떨게 만드는 진동이 사방을 퍼져나갔다. 그 뒤에 아쉬운 듯 짧게 혀를 찬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다음 말을 이었다.

 

! 도망 하나는 잽싸군. 뭐 어쨌든 다음에 만나면 제거하도록 해야지. 설령 다른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한들, 짐 앞에서는 약간 껄끄러운 제거대상일 뿐이니라.”

 

마왕이 외신을 제거할 수 있다는 말에 더욱 더 놀랐다.

 

마스터. 상처는 없으신지요?”

 

아아! 짐이 멋지게 주인을 구하며 등장하고 있는데, 새치기를 하다니! 비둘기...”

 

올빼미입니다.”

 

어쨌든 당장 주인의 어깨에서 내려오거라!”

 

하얀 올빼미와 말싸움을 하고 있는 검은 고양이야 말로 300년전 당시의 최고의 마왕. 마계 역사상 문화와 사회자체를 뒤바꿔버린 타락의 마왕 레시아와 다른 차원을 창조한 빛의 여신 시나의 말 싸움은 끝날 줄 몰랐다. 옆에서 고양이와 올빼미가 앞발과 날개를 마치 사람의 손처럼 힘겨루기 하고 있는데, 보면 볼수록 가관이었다. 저러다 폭주하면 내 어깨에서 마법이 날아올 건 안 봐도 뻔하니까.

 

그리고 쓸쓸한 희생자가 되겠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제발 내 어깨 위에서 싸우지 마세요. 저를 구하러 왔다는 건 감사하지만, 오히려 암살자는 저와 가까운 레시아나 시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불안에 떨고 있으니 5초 이내로 둘 다 내려가지 않으면 아이언 클로가 출격할 거에요.”

 

내 말을 듣고 얌전하게 내려가는 레시아와 시나. 원하지 않는 스트레스와 피해는 재앙이 되니까 철저하게 관리를 하자. 그나저나...

 

제가 위험한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에요?”

 

잡화점의 멤버를 알리는 반지가 효력은 있어도 그리 뛰어나진 않을 텐데. 용케 잘 알고 이곳까지 찾아온 걸 보면...

 

슬슬 백장미를 찍어야 한다고 루니아가 데려오라고 했노라.”

 

맞습니다. 슬슬 모델활동을 하셔야 합니다. 마스터.”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 투성이지. 이곳까지 와서 단검에 찔리고 혼란에 빠져있는 사이에도, 내가 다쳤는지 다른 존재가 되었는지 신경도 쓰지 않은 체, 그저 저주받을 하얀 잡지를 찍어야 한다고 이곳까지 찾아온 거라니.

 

안 찍어! 도대체 그 잡지가 뭐길래!”

 

그 잡지는 예로부터 파이론에서부터 시작하여...”

 

시끄러워요!”

레시아의 장황한 설명을 다 들어줄 인내심은 없었다. 검은 고양이는 내 다리를 붙잡더니...

 

짐의 부탁이니라. 찍으러 가도록!”

 

안 찍는다고요...”

 

이번엔 하얀 올빼미가 비어있던 왼쪽다리를 붙잡더니

 

마스터. 저의 부탁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아 글쎄! 백장미 안 찍는다고!”

 

지쳐서 소리지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결국 소리지르게 만드는 듀오. 서로 싸울 때는 원수처럼 싸우더니, 지금처럼 서로 협동할 때는 죽이 너무 잘 맞는다. 이러다가 조만간 저 둘이 변신로봇을 불러서 합체를 하더니, 우주에 구멍을 뚫는 드릴로 적들을 분쇄하지 않을까?

 

가끔 이렇게 생각해보면 참으로 쓸 때가 없다.

 

결국엔 주인은 찍게 되어있다.”

 

맞습니다.”

 

그 운명론적인 대답은 또 뭐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에 무언가가 전개될 거 같은 기분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은데?”

 

기분 나쁜 일이라고 한다면 억지로 때려서라도 데리고 간다는 선택지가 있지만, 지금 내 상태는 쉽게 제압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이번엔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천천히 생각해도 답은 그리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 찍지 않는다면 주인이 명계로 떨어지고 우리들은 그대로 본래 시간대에 돌아가서, 명계에서 농락당하고 있는 주인을 열심히 구경하겠노라.”

 

그건 대체 무슨 벌칙게임이죠?”

 

명계에서 염라대왕에게 심판을 받아야지. 왜 농락을 당해?

신개념 벌칙게임에 나도 놀래고 이걸 읽는 당사자도 놀랬을 거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하늘이 파란색에서 노란색으로 변질될지도 몰라. 그런데...

 

이번엔 명계에 가서 할 일도 없잖아요? 저번에 천계에 한번 다녀온 걸로 느닷없이 저쪽에서 막무가내로 연락을 끊어버리고...”

 

그건 전에 주인이 명계에서 백장미를 찍으라고 말한 걸 듣자마자, 수정구의 연락망을 끊어버린 것이 아닌가? 아무리 짐이 주인의 편이라고 한들, 기본적으로 뭐가 잘못이고 뭐가 나쁜 것인지는 알고 있노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여장을 강요하는 상대의 통신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는 게 잘못은 아니거든요!”

 

내가 여장을 한다는 것부터 잘못이 아닐지...

어쨌든 명계에 볼일도 없고, 직접 찾아가서 따질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 지금은 내 앞에 있는 저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

 

주인! 아무리 인간의 틀을 벗어나려고 해도 감정까지 벗어나려는 건가!”

 

그 백장미가 뭐길래 절 인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겁니까?”

 

가끔가다 생각하는데 그 바보 같은 하얀 잡지는 인생에 무엇일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안 좋으니 나중에 잡화점으로 먼저 돌아가고 이야기 하죠.”

 

상황이 좋지 않다? 그 어릿광대가 무슨 일이라도 한 것인가?”

 

수그러지는 분위기를 토대로 이야기의 주제가 바뀌었다. 유랑극단의 일도 그렇지만 어릿광대가 뜬금없이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다른 신화에서 나와야 하던 니알라토텝이 되어버렸다. 그만큼 다른 평행세계와 가까워졌다는 의미지만, 그렇게 된다면 어릿광대뿐만이 아니라 우리마저도 다른 설정에 섞여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빨리 이곳에서 탈출을 해야 하는데, 가장 근본적으로 레이베리아 때문에 본래 시간대로 못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다른 계획으로 잡화점 2개에서 하나로 줄이는 방법이 있지만, 애석하게도 잡화점이란 것은 인격이 존재하기에, 솔직히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서 당신이 살아있으면 크나큰 해가 되니까 죽어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빌어먹게도...

 

어릿광대가 신으로 각성해버린 이상, 스스로 능력을 자각하기 전까지는 잘 나타나진 않을 거에요. 그래도 니알라토텝이라는 건 신보단 우주적 존재에 가깝기는 해도,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주의하도록 하는 거죠. 그리고 이 상태로 본래 시간대에 돌아가버린다고 해도, 만약에 평행차원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니.”

 

또 다른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모든 걸 되돌리거나. 모든 걸 바꿔버릴 수 밖에 없어요.”

 

지금 상황이라면 과거를 바꿔서 미래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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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회사일에 치중하니...

글을 쓸 시간이 거의 없네요.

짤리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 하는데.

글 쓸 시간마저 할애하고 있습니다.


주말에 좀 쉬었으면 좋겠다.


 

581

 

 

 

검투사는 검과 방패 등. 여러 장비를 부딪치면서 싸워나간다. 그 안에선 수많은 힘겨루기와 심리전이 오고 간다면, 빠르게 휘두르고 길이가 짧은 단검들의 싸움은 힘을 쳐내고 흘리기보단 차라리 피하는 게 속 편하다고 보면 된다. 그 이유라면 단검을 쳐내서 경직을 주는 것보다, 다음 공격이 더 빠르게 들어오기 때문이니까. 차라리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공격경로를 가로막는 게 더 좋다.

 

손끝이 아려오는 칼부림에도 꿋꿋하게 들어오는 공격은 당황을 넘어서 질리게 만들었다. 바람의 정령왕의 가호를 받은 단검인데도 불구하고, 어릿광대가 들고 있는 검은 단검에 뭔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 힘을 계속해서 상쇄하기 시작할 무렵. 거대한 돌풍처럼 내 단검을 감싸고 있던 바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 그렇군.]

 

뭘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혼자만 알고 있는 히드라에게 질문했다.

 

[혼자만 알지 말고 정보는 공유하면서 좀 살도록 하지?]

 

[어차피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범위다. 혼자서 골똘히 잘 생각해보도록.]

 

매정하게 걷어차버리듯이 거절하는 말에 지금 당장이라도 몸통을 붙잡아 비틀어버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기에 대화로 해결하자.

 

[지금은 손과 발. 그리고 머리가 한참 바쁠 시기에 그것까지 생각하려고 하면, 5G여도 불가능하니까 제발 좀 알려줘라.]

 

[흐음. 자비로운 내가 알려주도록 하마.]

 

자비는 개밥그릇에 같이 던져서 준건가? 그 단어는 그렇게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닐 텐데?

 

[저 어릿광대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정확하게 저 객체는 월식에 돌연변이가 생긴 것이라 보면 된다.]

 

[너희들도 돌연변이가 일어나기도 하는구나. 나중에 눈에서 레이저도 나가는 거냐?]

 

[그랬으면 꽤나 재미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돌연변이가 아니다. 월식이라는 존재들은 본래 하나였으나, 다른 객체에게 붙어서 힘을 빼앗기면 다른 객체가 월식이 되는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러니 저 어릿광대도 본래의 형태를 잃고 뱀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지금은 억지로 무언가가 인간의 형태로 붙잡아 놨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뱀의 형태가 아닌 인간형의 월식으로 인지하게 만들게 된 것이다.]

 

[그걸 공유할 수 있는 너희들은 이제 뱀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거잖아?]

 

검은 실루엣의 인간들이 사방팔방에 돌아다녀서 세상을 포식하는 상상을 해보니, 악몽으로 나타나면 꽤 무서운 이미지가 되었다. 지금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데...

 

지금 누구랑 이야기 하고 있는 거람?”

 

이런!”

 

언제 파고들었는지 서늘한 감촉이 내 상의를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웠다면 오른쪽 옆구리부터 왼쪽 어깨까지 베일 뻔했다는 사실이, 내 몸을 조금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신경이 곤두설 때쯤 옆에서 다가오는 검은 칼날을 왼손을 움직여 차단하려고 했으나, 내가 예상하지도 못한 힘 때문에 휘청거릴 뿐이었다. 계속해서 빈틈을 내주면 크게 당하기 마련인데, 그나마 윈디의 바람장막이 어릿광대가 단검을 제대로 찌르지 못하고, 옆으로 빗겨나가 겨우겨우 살 수 있었다.

 

춤을 잘 추지 못하면 앞에 있는 숙녀에게 실례라고?”

 

이게 무슨 춤이냐? 살려고 발버둥치는 거지!”

 

단검에 대한 숙련도도 그렇고 아슬아슬하게 따라붙고 있지만, 미세한 차이로 어릿광대가 내 실력을 앞서고 있다. 결국 다시 시공의 눈을 개안하기 위해 지금까지 신체강화로 사용하던 에너지들을 다량으로 소비하기 시작했고, 서서히 느려지는 어릿광대의 공격을 옆으로 쳐낸 다음, 회전력을 이용하여 왼발로 어릿광대의 가면과 같이 차버렸다.

 

사람들이 항상 궁금해 하는 것은 결정타를 먹일 수 있는 순간인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때려서 결정타를 먹이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 있는데, 내 경우에는 어릿광대에게 뜯어낼 정보가 많아서 그렇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순간 잊고 있었는데 후회가 막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서 느릿느릿하게 일어서는 어릿광대. 천천히 고개를 들고 금이 간 가면 속에 붉은 눈을 한 소녀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선생님. 많이 아프네요. 쿠쿠쿡.”

 

과거에 만났던 어린 시절의 레프리시아 그대로 모습을 바꿔버린 어릿광대. 정말 그 머나먼 과거 속에서도 어릿광대는 도플갱어로서 존재했다.

 

도발의 의미라면 소용없어.”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이번엔 다른 모습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어릿광대. 이번엔 내가 선생으로 변장했을 때의 그 모습. 머리카락은 가발을 써서 긴 장발이었으나, 옷은 광대복장에서 제발 제외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군. 그래도 지금 이 모습이 꽤 좋았는데. 그때는 순한 성격이 아니라 과격하게 밀어붙이는 성격이었지?”

 

사람은 각오를 하면 변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지금 그 모습으로 무엇을 할 생각이야?”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나의 모습으로 어릿광대는 피식하고 비웃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어. 그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깨우쳤으면 좋겠다는 거? 아니, 지금은 그 신적인 에너지를 이용해서 인간의 규격을 벗어나려고 하고 있으니, 깨우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몰라?”

 

이브센티아의 학살자였던 나를 깨우치라는 거냐?”

 

어릿광대의 질문에 답을 내리자. 피투성이인 내가 그 자리 앞에 서 있었다.

 

당연하지! 아직도 자기가 죄값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혹은 죄를 뉘우쳤으니 그 사건에 대해 멀리 떨어져도 좋다는 건가? 아니! 절대로 아니지! 그 잔혹한 학살자는 어디 가지 않고 300년 뒤의 미래에 버젓이 나타나, 모든 평행차원에 대 재앙을 이끌고 있으니까! 이거야 말로 진정한 대학살이 아닐까?”

 

진정한 대학살을 하기 전에 너부터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더 빠를지도 몰라.”

 

급격하게 떠오르는 분위기를 급격하게 식혀버렸다. 당연히 내 말 때문에 짜증으로 금이 가기 시작하고,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사뭇 달라지기 시작하던 찰나에, 다시 하얀 가면을 써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 전에 저 가면은 또 어디서 꺼낸 거야?

방금 전에 발차기로 가면을 박살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월식 안에서 작은 난쟁이들이 가면을 만들고 있지롱~”

 

웃기지마! 그 안에 들어가면 다 죽는 건 용병인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 마치 H2O가 산소인 것처럼 말이지!

아니...저건 물이잖아?

누가 저런 말을 당당하게 내뱉은 거야?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우리 자기는 유머감각이 너무 없다~”

 

애석하게도 나는 태클을 거는 사람이거든. 그게 나의 숙명이고 말이야.”

 

다시 날아드는 단검을 오른팔로 휘둘러서 튕겨냈다. 불꽃이 내 눈 앞을 그리고 지나가는데 느닷없이 날아드는 어릿광대의 오른팔은 검은색 뱀이 입을 열고 뻗어 나아갔다. 유연하고 신속함마저 내 눈 앞에서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였고, 대놓고 붙잡아서 멈출 수 있어도 경솔한 판단은 오히려 독이 되니, 거리를 먼저 떨어뜨린 다음 지켜보기만 했다.

 

? 더 이상 두고 볼 것이 또 있는 거야?”

 

당연하지. 미지의 적을 두고 전력을 사용하지 않는 나에게 있어선, 어릿광대. 네가 무슨 꿍꿍이로 그런 무의미한 일을 벌였는지 잘 모르겠어.”

 

과거에 자신이 보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며, 심리를 흔드는 건 나에게 불필요하지만, 아마 어릿광대는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서 보여줬다. 물론 과거에도 어릿광대는 존재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금에 와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크게 보면 지금 이 녀석의 정체는...

 

[월식에서 돌연변이라? 그러면 내 앞에 있는 어릿광대는 다른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거잖아?]

 

[사례가 있다면 지금 딱 모습을 보아하니 니알라토텝이 되겠군.]

 

[왜 크툴루 신화에나 나오던 녀석이 여기서 돌연변이 일으킨다고? 왜 여기서 난동을 부리는 거야? 은가이숲으로 떠나라고 해!]

 

이곳에서 다른 세계의 설정들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아니, 다른 세계의 설정들을 끌어들이는 이유라면 다른 평행차원들이 융합되기 때문일지도 몰라. 모든 평행차원이 이곳으로 밀집되려고 하니까, 그 차원에 다른 에너지들이 이곳으로 점점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 괴상한 크툴루 신화라던가 예전부터 있었던 가지각색의 패러디 같은 것들이 나타난 걸지도 모르지.

 

이 세계는 너무 난장판이네.”

 

? 갑자기 왜 신세한탄을 하는 거야? 자기는 지금 나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

 

이게 그러면 연인싸움이 되는 거냐? 태클을 걸 게 여러 곳 존재하지만, 내가 직접 이야기 하지 않아도 무슨 말이 나올지는 다 알 테니 말을 아끼도록 하지. 레이베리아는 이 일까지 꿰뚫어보고 각본을 쓴 건가?”

 

어릿광대는 키득키득하고 웃었다. 하얀 가면 뒤에 어떤 얼굴로 하며 웃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3초간 웃고는 어릿광대의 가면에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다 깨달은 거 같네? 이번 일로 인해 우리가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달았으면 둘 중 하나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하나는 모든 평행차원을 다 멸망시키는 거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를 그만 놔주고 과거로 가는 거야. 이런 싸움 더 안 해도 된다고?”

 

싸울 의지를 꺾는 걸 넘어서 이곳에 존재할 이유도 제거했다.

 

그래도 뭐...

그건 다른 일이고...

 

뭐 먼 우주적 관점에서 보자면 내 이유는 굉장히 사소하다는 소리인가?”

 

이런 싸움을 하면서 모든 차원을 멸망시킬 이유가 없다는 거지. 어차피 자기는 본래 시간대로 돌아갈 거고, 오히려 미래가 이렇게 되도록 정해진 삶밖에 못 사는 거 아닐까? 그래도 미래를 알았다고 과거를 급하게 바꾸려고 하지는 마. 더 비참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패러독스인가.

 

미래에 모순이 생기는 것만큼 인생이 꼬여버리는 일이 적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감당할 수 있다면 한번 해보던가?”

 

나도 돌아가면 레인과 같이 정해진 흐름대로 살아가야 하는 건가? 그건 또 골치 아픈 소리였다. 누가 예정된 일을 생각 없이 살아가면서 죽기까지 기다릴까? 사람은 죽는 걸 알면서도 잘 살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는 존재다. 영원한 삶이 아니기 때문에 제한된 생명이니까.

 

좀 더 편하고 부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세계를 지워서 다시 만든다고 해보자.

열심히 살아온 모든 게 없어지는 셈이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나만 생각해봐야겠어. 우주가 어찌되든 뭐가 걱정이냐?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데?”

 

흐응?”

 

방금 발언에 의아해하는 어릿광대의 반응을 보아하니, 내가 아무래도 쓰레기 같은 발언을 한 모양인데...

 

뭐 어쨌든...내가 이곳에 있는 건 내 맘대로니까. 멋대로 가라 마라 하지마.”

 

그러면 뭐 어쩔 수 없고.”

 

시공의 눈이 개안된 상태에서 상대의 움직임이 느리지만, 어느 순간 어릿광대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 순간에 튀는 불꽃이 내 시야에 흩날렸고, 머지않아 거대한 실선이 내 몸을 그어버렸다.

 

!”

 

붉은 액체가 내 상체부터 쏟아져 내렸다. 따끔한 고통마저도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박혀있는 검은 단검은 내 몸을 그대로 침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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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일은 정말...

어휴...

 

580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꽃은 이곳 저곳에서 튀어 오른다. 윈디와 동화하여 바람의 힘을 빌리고 있는 동안에도, 어릿광대의 단검은 매섭게 그지 없었고, 하나하나가 죽음으로 가는 편도여행이 되기 전에 쳐내고 회피한지 얼마나 흘렀을까? 아직까지 시공의 눈은 개안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주변에 차량도 없고 사람도 없다는 의미라면, 나와 어릿광대의 싸움이 눈에 보였으니 그 자리에서 피한다는 의미라고 보고 있다.

 

나의 존재감을 극한으로 낮춰도, 어릿광대는 존재감을 낮추거나 그러지 않았으니, 자연스럽게 나까지 사람들의 눈으로 들어왔겠지. 허공을 돌아도 날아오는 검은 단검을 쳐내는 것도 일이지만, 바람장벽 하나가 날아드는 단검을 무력화 시키고, 뱀 조종자가 내 의지를 받들며 내 왼팔에서 쏜살같이 뛰쳐나왔다.

 

-촤라라라라락!

 

[. 히드라. 너는 왜 안 나가냐?]

 

정확하게 8개의 사슬단검만 튀어나가고 가운데에 장식처럼 가만히 서있는 검은 사슬단검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은 움직이기 귀찮다. 봄이니 말이다. 언제나 봄은 편하게 쉬기 위한...]

 

[어째서 월식이 춘곤증에 힘들어하는 거냐! 그러고도 잘도 세상을 포식하고 다녔다?]

 

[먹는 것과 춘곤증은 별개의 문제니 나는 자고 있겠다. 끝나면 다시 깨우도록...하암~]

 

협력관계라서 뭐라 할 수도 없고 어릿광대에게 콩트를 보여줄 만큼 여유로운 상대도 아니니까. 결국 8개의 사슬만으로 내 홈 그라운드를 만들어야겠구나.

 

자기는 매번 아군과 티격태격하나 봐?”

 

너는 춘곤증에 힘들지 않냐?”

 

?”

 

아냐. 아무것도.”

 

어릿광대도 커다란 분류로 따지면 월식이니까. 혹시나 월식의 종족특성상 춘곤증에 약하다라는 약점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춘곤증을 앓고 있는 건 히드라뿐인 것 같다. 이건 대체 무슨 난장판인지...

 

어릿광대는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싸울 마음이 일시적으로 사라졌는지, 살기를 거두고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매번 생각해오는 거지만 자기는 우리를 너무 좋아해서, 300년전에 있어야 할지라도 우리를 방해하러 온단 말이지? 어디 정의의 사도처럼 너희들의 사악한 계획을 막으러 왔다!”라는 패기도 없고, 고작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그저 방해하려고 할 뿐이니까.”

 

너희들의 하는 일이 사악한 계획은 아닐지 몰라도, 지금 이 세계를 지우고 다시 재구축한다는 그 자체가 다른 이들 입장에선 사악한 계획이 아닐까?”

 

흐음? 성경에서도 인간들이 하도 최악을 저지르고 다니니까, 홍수로 모든 생명체의 암컷과 수컷만 남긴 체 한꺼번에 갈아엎어버렸잖아? 어떻게 보면 우리가 신의 대행자와 같은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

 

마치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은 꼭 필요해서 하는 일이라고 자부하고 있구나.

 

각본가. 레이베리아는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어째서 이 세계를 지우려는 거야? 오로지 나 때문이라던가, 잡화점의 존재 때문은 아닐 거고? 살아생전에 레이베리아는 대체 얼마나 더 앞을 내다보고 이런 일을 꾸며왔던 거냐고?”

 

어릿광대는 무너져 내린 의자에 올라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야 안정적인 세계를 가지기 위함이지. 시공간에 대한 제약도 걸어놓고, 천계나 마계, 명계 등. 다양한 차원도 막아놓을 것이고, 어디까지나 인간들만이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함일까? 그 편이 더 안전하다고 하지. 나도 이런 세계가 멸망하든 하지 않든 상관은 없지만, 이 세계가 존재함에 있어서 마법사나 마법공학자들은 언제나 금기를 어기고 살아가니까.”

 

금기를 어긴다니?”

 

그건 자기도 포함되어있는 거야. 지금 시공간술사의 힘을 다시 찾아온 것도 모자라서, 인간의 틀을 깨부수기 직전이지. 다시 봉인하면 괜찮을지 모르지만, 한번 시작한 일은 이제 멈출 수가 없어서 말이야.”

 

한번 시작한 일은 이제 멈출 수가 없다라...

이 힘을 봉인하는 것도 이제 일시적이란 소리가 되나?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에 생각이란 것은 또 다시 굴러가기 시작하고, 평범함을 넘어서 좀 더 우주적인 관점으로 보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마법사들과 마법공학자들의 목표는 모든 우주의 진리를 깨우치고, 더 나아가 자아를 각성하여 전지전능한 것이 꿈이다. 금기를 어기면서까지 사고치는 거야 말로 마법사가 하는 일인데, 그 마법사들이 시공간마법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것도 당연했다.

 

잠깐만? 그러면 엘티노스가 본래 마법사나 마법공학자들의 수를 점차 줄여가고 초능력자를 만든 의미는? 어쩌면 엘티노스마저...

 

뭔가 큰 걸 깨달았다는 의미네? 하하! 애초에 각본가는 유랑극단의 각본만 쓰는 게 아니거든?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각본을 쓸 수 있다는 그 자체야 말로, 각본가가 될 수 있는 자격이 되니까.”

 

그럼 네가 나를 찾는 것도 모두 각본에 쓰여있는 거냐?”

 

상상이상으로 레이베리아의 힘은 너무나도 커져버렸다. 엘티노스가 봉인되어있던 사이에 성장한 각본가의 힘은 알게 모르게 엘티노스마저 조종하고 있었다니? 아니. 엘티노스가 봉인되기 이전에도 분명 레이베리아는 남들 모르게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 힘의 원천은 과연 어디에? 레이비스 가문을 갈아 엎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자기만큼은 레이베리아가 각본을 쓸 수 없어서 고민이라고 하더라고? 어떻게 각본을 쓰려고 해도 카일이라는 존재에 대해선 각본을 적을 수가 없다고 해.”

 

그거 극비는 아니군. 전에 어렴풋이 추측은 가능했으니까.”

 

아주 예전에 맹수 조련사가 자신이 데미지 입을 것을 몰랐다고 퇴각한 적이 있는데, 아마 그 때 이후로도 각본가의 힘은 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와 더불어 레인도 각본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겠지. 그 애는 이미 정신상태부터 난리가 났으니까.

 

어릿광대는 어느 사이에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애초에 각본대로 움직였다면, 지금 이렇게 대치하지도 않았겠지. 그건 그렇고....”

 

물구나무서면서 하얀 가면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왜 그래? 그런 무~서운 얼굴을 하고 말이야?”

 

내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은 어떻게 안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대가 어긋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과거에 어릿광대를 본 기억은 전혀 없었고, 과거에 레프리시아를 구출하는 과정을 모두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과거라면 자기가 선생이었던 그 시절이겠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릿광대는 알고 있었다. 초승달처럼 호를 그린 가면의 입이 더욱 더 짜증나기 시작했다.

 

그거라면 간단해. 나는 오랜 과거부터 사람들 사이에 살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처음으로 자기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 거지! 아아, 그때를 잊을 수 없었어.”

 

괴상한 촌극을 할 거라면 그만두고 제대로 말해.”

 

촌극이라니? 이건 하나의 오페라와 같은 거라고?”

 

뮤지컬이겠지!”

 

어릿광대에게 오페라가 어울릴까 보냐?

...생각해보니 어울리는 오페라도 존재할 것 같다.

 

그래도 그때 어린 마왕을 지키는 자기의 모습을 처음보고, 그 고결한 모습에 내가 악착같이 강해지고 살아남아서, 당당한 모습으로 맞서겠다고 다짐했단 말이야. 하지만 빨리 만나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고, 그 결과! 드디어 모든 시간을 버티고 나서야 자기를 찾았다는 거지. 그 풋풋한 용병시절의 그 모습 그대로!”

 

어릿광대가 나의 과거사부터 참견하기 시작했구나.

 

잠깐만 그럼 내가 과거에 갔을 때 넌 누구였어?”

 

누구였냐고? 당연히 별 볼일 없이 자기가 훔쳤던 옷 가게 주인이었지!”

 

완전범죄라 생각했는데 다 들켰었잖아!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 모습! 나는 매우 로맨틱하다고 생각해. 그 모습에 감명을 받아서 지금까지 내가 있을 수 있었어. 은빛송곳니의 단검술을 따라 한다고 했을 때도, 멀리서 나는 그걸 지켜보며 같이 따라서 했고, 엘티노스 잡화점을 걸었던 가위바위보에서도 나는 그 자리에 있었지. 부디 자기가 엘티노스 잡화점의 주인이 되어, 나를 좀 더 봐주고 추격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일부러 져주기도 했어.”

 

일부러 져주다니?

 

설마. 그 결승전 때...그 아저씨가?”

 

맞아. 그 사람의 모습을 한 였지.”

 

말도 안 돼. 하나부터 열까지 이 녀석이 다 개입되었잖아?

 

그 이전에 월식의 봉인된 구슬을 몰래 그 노인에게 준 것도. 전부 나야.”

 

정말 터무니 없는 소리를 연속으로 들으니 믿기지가 않아서 한숨만 나온다. 한숨이 가출해서 지금쯤 말머리 성운에 도착하고 있을 때인데, 그러면 그 과거에 있었던 일이 전부 우연이 아니라고? 모두가 의도적으로 일어난 일들뿐이야?”

 

정말 머릿속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태 어릿광대가 가면을 선물하고 그 외에 다른 사건에서 죽을 뻔하고, 어이없이 놓친 모든 것들의 원흉은 과거에 레시아의 선생님으로 있었던 그 일 때문이라니?

 

그거 하나 때문에 이브센티아가 몰살당하고,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지금까지 살아가야 했다니? 매번 꿈마다 비가 오는 이브센티아에서 묘비만 바라보게 만든 것이 전부?

 

정말 터무니 없어.”

 

말을 반복하기 싫지만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결과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이 문제니까.

 

터무니 없어도 받아들여야 해~ 첫눈에 반하게 한 책임은 지어야지?”

 

뭐가 첫눈에 반한 책임이냐? 여태까지 내 과거의 행적을 엉망으로 만든 게?”

 

아니지. 그게 과거의 올바른 행적이었다는 거야.”

 

살아있는 자체가 괴로웠던 순간마저도 전부 어릿광대의 개입이라니.

 

그렇군. 아무래도 내가 널 죽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어난 기분이 든다.”

 

그렇지만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힘들면, 지금 싸움을 멈추는 게 당연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다.

 

실피드. 나의 검이 되어라.”

 

윈디의 진명을 부르고 날카로운 돌풍이 단검을 감쌌다. 봄이라서 따듯해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불고 있는 바람은 한겨울처럼 싸늘하기만 했으니.

 

일단 더 물어볼 것은 있으니 죽지는 마라. 죽으면 별 수 없겠지만...”

 

아하핫! 바로 그거야! 그 살의에 가득 차오른 눈. 하도 억울해서 악밖에 남지 않은 그 눈 말이야! 그걸 계속 기다렸는데 이제서야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마음을 알긴 뭘 알아줘! 정신 놨어!”

 

이 상황을 대체 왜 즐기는 거냐?

 

이런 살벌한 무도회장에서 춤추는 춤은 언제나 최고야! 드디어 나를 제대로 봐주기 시작한 것도 너무 흥분돼! 이 일은 내 생에 최고의 날이 될 거야!”

 

대사만 들어보면 사망플래그야. 그거 알아?”

 

그래도 죽지 않을 건데? 오랫동안 같이 싸워나가며 친하게 지내야 하잖아?”

 

싸우면서 친하게 지내는 건 어린 시절 한정 아니었던가? 아직까지도 싸워나가며 사이가 돈독해진다고 착각을 하다니...미운 정이 더 오래간다는 걸 이용할 속셈인가?

 

그것마저 이용한다면 정말 징그러운 녀석이다.

대체 그런 사소하고 쓸모 없는 것까지 사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무래도 내가 상대하고 있는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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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하루는 일하는 게 80%입니다.

 

579

 

 

 

생각을 해보니 이곳도 3월에 가까워졌던가? 윈디가 행복하게 뛰어 노는 모습을 보며, 한차례 한숨을 봄바람 비슷한 공기에 몰래 담았다. 레인과 이야기를 하고 온 것은 알고 있을 테니, 윈디의 반응은 실로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가끔가다 생각하지만, 사방팔방으로 태클을 걸고 다니는 것만큼 에너지 낭비가 심한 행동도 없을 거야. 그러니 나는 좀 쉬고 있을 테니까 제발 가만히 놔둬.”

 

그래도 봄이잖아요! !”

 

봄이 또 왜...”

 

봄이 또 뭐라고? 봄이 그렇게 대수인가? 항상 봄이 올 때마다 좀비마냥 살아나는 뭔가 떠오를 것 같지만, 300년 지난 미래에서 봄을 맞이하는 마음은 과연 어떠할까? 살아생전에 미래에서 맞이하는 봄은 새로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봄은 봄일 뿐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

 

봄이 오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동물들도 있고, 새로운 꽃도 피고, 제 머리 안에 들어있는 그릇된 망상...아니, 순수하고 소녀다운 감수성이 피어 오르기 시작하기 때문이죠!”

 

매번 생각해오는 건데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거니까 고칠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내가 이 타이밍에 아이언 클로든 태클을 걸든 알아서 조치하면 되잖아?”

 

회색 옆머리를 꼬고 있는 윈디가 헤헤...”하고 실없게 웃었다. 뭐야? 그 잔뜩 기대하고 있는 얼굴은? 아무리 당하는 걸 좋아한다고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건 하지 말아줘라. 그렇게 대놓고 웃어도 내 안에는 명경지수와 같이 맑고 깨끗한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냥 세간의 눈이 안 좋게 보기 때문에 걱정하는 거지.

 

그런데 300년 전의 카일 씨죠? 지금의 모습은?”

 

“300년 후에는 내가 뭐로 변해있길래 그런 불길한 질문을 하는 거야? 나중에 나는 다리가 8개 달린 괴물로 변하든?”

 

 

즉답하지마! 이 녀석!”

 

꺄아아아아!”

 

윈디의 즉답을 듣자마자 아이언 클로가 거침없이 뛰쳐나갔다. 애석하게도 윈디가 세상에는 마음이 맑고 깨끗한 사람은 없다는 걸 증명해줬다. 마음부터 쓸쓸해지는 무언가가 한숨으로 환원되어 돌아왔는데,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 아이언 클로를 풀어줬다.

 

땅바닥에 쓰러진 체 으흐흐흐...”하고 웃고 있는 윈디. 맞는 걸 즐기기보단 오래 전부터 그리웠던 거겠지. 다른 세계나 설정에 있는 바람의 정령왕은 전혀 그렇지 않던데? 역시나, 이 세상은 뭔가 뒤틀려있다.

 

이런 뒤틀린 세상을 제거하려는 레이베리아의 행동은 어찌 보면 잘못된 행동은 아니지. 세계를 지우는 것에 있어서 뭐가 잘한 거고, 뭐가 잘못된 것인가는 분명 구분할 수 없다만, 애석하게도 세계를 지우는 일을 한다면, 나도 지워지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런 뒤틀린 세계에 적응이 되어버렸으니, 적응이 된 장소에서 살아가는 게 편하지 않는가?

 

모든 생명체는 적응을 하며 살아가고, 그 환경에 유리하도록 진화하기 때문이니까.

 

거기서 그만 웃고 일어나. 지금은 너도 들었다시피 리제로트에 대한 처분을 결정해야 하니까.”

 

어라? 그걸 왜 저도 결정해야 하나요?”

 

내 말 뜻은 너에게 조언을 얻고 싶다는 거야.”

 

. 그 말은 저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받아들여야겠군요?”

 

어째서 윈디의 질문에 소름이끼치긴 하지만, 그래도 아저씨들이 하는 언어유희에 대한 속뜻이 없다고 한다면 다행이지.

 

...그렇지...근데 왜 그걸 묻는 거야?”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우선

 

우선 침착하게 제 팔을 살짝 물어주시면...꺄아아아악!”

 

“2차 아이언 클로 출격이다!”

 

아무래도 쓸 때 없는 생각이 현실로 그대로 나오는 경우에 대해, 어떤 대참사가 일어나는지는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자. 그건 그렇고 또 다시 바닥에 쓰러져있는 윈디를 뒤로 한 체,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마치 하지 않겠는가?”라는 자세인데요?”

 

말살의 라스트 아이언 클로가 나오기 전에 그 입 좀 제발 다물어줄래? 항상 생각하지만 너는 쓸 때 없는 말만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어.”

 

에헤헤...”

 

멋쩍게 웃고 있는 윈디의 얼굴을 보며 한숨만 나왔다. 한숨이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잠깐 안드로메다로 출장 다녀올게요.”하고 사라지고 있으니, 아직까지 돌아온 한숨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리제로트라면 유랑극단의 단원이잖아요?”

 

맞아. 그렇다고 해서 꼭 죽으라는 이유는 없다만, 레인은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람마저 이용해서 명분을 만들고, 리제로트를 죽이려고 하고 있어.”

 

그런데 왜 리제로트가 죽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물론 저도 레인의 방식이 좋다고 생각하진 않고, 오히려 지금 당장 레인과 리제로트 둘 다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카일 씨는 리제로트에게 빚을 졌다는 이유로 죽일지 살지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보통 적이 살려준다고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그 자비를 받고 그 은혜를 갚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리제로트가 가진 문제가 하나 더 있을 거 같아. 유랑극단을 해체하는 건 당연하게도 실행해야 할 목표이긴 한데, 꼭 누구를 죽여서까지 할 필요는 없단 말이지?”

 

그런 간디와 같은 비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게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비폭력으로 가자는 말은 아니지만, 쓸 때 없는 희생은 줄이자는 말이야.”

 

승리를 하는 것도 싸우지 않고 승리를 하는 것이야 말로 최고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고 서로 이해하고 용서를 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했다. 만일 레이베리아도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닫고 우리를 좀 더 이해하여, 다른 방향으로 수정을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카일 씨는 여전이 어린애 같은 생각만 하네요. 300년이 지나도 생각하는 자체가 글러먹었어요.”

 

너는 300년이 지났지만, 나는 300년이 지나지 않았다고. 실질적인 나이는 21세 그대로야. 아니, 지금은 22세에 가까워졌나? 최근에 시공간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까 시간개념도 까먹고 있네.”

 

벌써부터 노망이 나셨나요? 제가 지금 당장 양로원을 알아봐드릴...꺄아아아악!”

 

, 3차 아이언 클로까지 나왔으니 다음을 준비해야겠구나. 매를 벌면서 고통을 받고 있는 윈디를 다시 내려놓고 천천히 앞을 내다봤다. 예전에는 사람이 거의 없고 들판이 펼쳐진 세상이었다면, 지금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수십 대의 차량이 도로를 매번 지나가기 마련.

 

이 세상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네. 아직까지 변화한 것이 잔뜩 있어서 그런가?”

 

변화한 것이 잔뜩 있다기보단, 카일 씨가 너무 구시대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걸 까요? 남들이 보면 충분히 원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꺄아아악!”

 

4차 출격.

제발 그 입 좀 그만 놀렸으면 좋겠다.

300년 전의 사람을 원시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조상님들이라고 부르는 거겠지. 하긴 바람의 정령왕인데 인간에 대한 예의범절을 논한다는 자체는 오류라고 말할 수 있겠다.

 

라 캄베리 회사는 아직까지 잘 있나 보네. 계속해서 리제로트의 얼굴이 비춰지는 걸 보면, 세간에는 리제로트가 아직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모양이야. 저택인지 별장인지 어디에서 레인이 잡화점을 날려보내서 천장이 박살이 난 것도 그렇고, 일부러 사건을 더 키우기 위해 수족관에 있는 물을 모두 날려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세상사람들은 리제로트의 얼굴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어. 오히려 몇몇은 자신만의 아이돌로 숭배하고 있지.”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에요?”

 

이상한 건 이상한 거지. , 정확히 말하자면 리제로트는 얼굴이 널리 퍼진 유명인이야. 그러니까 기이한 사건 사고에 휘말린다면, 기자들은 불나방처럼 취재하려고 달려들지. 저 스크린에는 그 날의 사건을 알리는 뉴스로 한 가득하고, 내가 지금 잡고 있는 신문에도 1면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딘가엔 나타나 있어야 하지만, 그렇게 빠르게 퍼져나가는 소셜 네트워크에도 보이지 않고, 결국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은폐되었단 소리야. 근데 리제로트 한 명만으로 그 일을 모두 처리하기엔 곤란하겠지?”

 

윈디는 땅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리제로트를 도와주는 사람이 여럿 있다는 거에요?”

 

유랑극단이 그렇지. 그런데 도와준다는 입장이 아니라 협력한다는 입장이라면 말이 달라져. 결국 리제로트는 그들에게 빚을 진 거니까.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도록 모든 관계자들을 날려보낸 거잖아?”

 

, 그러면 리제로트는 자기가 인형사인 주제에, 인형처럼 행동을 강요 받고 있고, 거기에 불만이 쌓이게 될 테니 우리편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네요?”

 

팔짱을 낀 윈디가 자신이 추측한대로 말을 내뱉었다. 살짝 몸을 비틀면서 내가 보는 방향을 따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가능성은 10%도 안 되는데요?”

 

그 설령 1%라고 해도 현실적으로 따지면 50%.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두 가지뿐이니까.”

 

그 두 가지는 참과 거짓밖에 없다.

그러니 수치로 된 확률은 거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 바보 같은 대답을 들은 윈디가 한숨을 내쉬고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그런데 레인은 신용할 수 있어요?”

 

아니.”

 

내 평생 그런 녀석은 신용할 수 없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녀석을 신용한다는 건 목숨을 담보로 계획을 진행한다는 소리니까.

 

자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도 도구로 이용하는 녀석이야. 그런 녀석을 신용하지 않고 적절하게 협력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뜻하지 않는 변수에도 대응할 수 있는 법이지. 나조차 언제 어디서 도구가 되어버릴지도 모르고, 희생말을 삼아서 움직여달라고 할지도 몰라. 그래도 윈디...”

 

한 순간, 말이 바람에 삼켜졌을 무렵.

머릿속에 또 다른 말이 들려왔다.

 

[이쪽으로 누군가가 온다.]

 

뜬금없이 울리는 히드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지금 있는 위치에서 재빠르게 벗어났고, 그 위치에는 커다란 폭발이 내 눈을 한 가득 채웠다. 굉음이 천지를 진동하여 모든 이들의 시선과 비명으로 가득 매울 때. 그 자리에는 검은 그림자에 잠식되어있는 듯한 여성의 실루엣이 그려졌다.

 

아하! 꽤 익숙한 느낌이 나서 찾아왔더니? 이런 곳에 다 있고 말이야?”

 

잠식이 되어있는 듯한 검은 실루엣이라도, 하얀 가면은 눈에 쏙 들어오도록 잘 보였다.

 

나와 같이 있던 월식을 따라 이곳까지 왔군.”

 

그야 당연하지! 자기랑 만날 생각하니까 너무 행복한 거 있지? 그러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서로 죽고 죽이는 순수한 사랑을 시작해볼까? 지금 당장이라도 그 목을 가져가서 걸어놓고 싶어!”

 

최근에 욕구불만인건 잘 알겠으니까, 멋대로 내 목을 잘라서 걸어놓는다거나 그러진 말자. 아무리 나라도 살고는 싶거든? 그리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엔 지금은 너무 이른 시간이야. !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진지한 장면에서 내 대사를 잘라먹고 나타나지 말아줄래?”

 

어라? 그거 진지한 장면이었어? 나는 틀림없이 머리 아픈 설교인줄 알았는데?”

 

비아냥거리는 것도 수준급이구나.

 

하긴. 너에게도 물어볼 것은 있긴 했으니, 지금 당장은 진지하게 싸우지 않겠지만...”

 

초승달을 닮은 은빛송곳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아직까지 해가 떠있지만, 달이라는 존재는 햇빛을 받고 반사하는 위성. 그러니 햇빛을 머금은 단검 두 자루가 번뜩이며 상대를 겨눴다.

 

적당히 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나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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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달간 철야와 주말출근을 한 끝에...일단 쉬어도 된다고 해서 올립니다.

다음글은 또 언제 써서 올릴 수 있을진 미지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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