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

 

 

 

인생에 가장 허망한 순간이라면 내가 나중에 봐야 할 책의 내용을 스포일러 당했을 때. 뜬금없이 그건 무슨 소리냐고 물어볼 수 있는데, 마왕군에게 겨우겨우 도망쳐서 잡화점에 들어가 책을 읽을 무렵, 리제로트가 오후에 말싸움을 했던 복수로 책이 재미있어지려고 하면, 스포일러를 거침없이 터트려서 허무함을 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그거 주인공이 알고 봤더니...”

 

. 주인공이 알고 보니 범인이었다는 거야? 아님 죽는다는 거? 대체 이번이 몇 번째야?”

 

슬슬 짜증이 입에 가시가 돋아나듯 솟아오르기 시작할 때. 리제로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세린은 한숨을 내쉬면서 내 앞에 걸어왔다.

 

어린애 같이 싸우지 말고 그 마왕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는 해봐야겠지?”

 

한가지 특단의 조치가 있어.”

 

그래?”

 

내가 잡화점 밖으로 안 나가는 거야. 역시 이불 밖은 위험...꺄아악!”

 

잡화점 바닥이 순식간에 튀어올라 머리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남자나 여자나 저런 비명을 지르는 건 당연하겠지만, 잡화점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여성체의 모습으로 있어야 하기에...아니, 사실상 밖에서는 세린이 멋대로 날 여성체로 고정시켜놨기에, 정신적으로도 아파죽겠는데, 물리적으로도 아파 죽을 지경이다.

 

어째서! 내가 잡화점 밖에 안 나가겠다고 하는데! 내가 잡화점의 주인 아니냐!”

 

글쎄? 아무리 주인이라고 해도, 밖에 나가지 않고 놀고 먹고 살겠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가 없거든? 뭐 그 모습으로 계속 있고 싶다면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아 맞아. 원래 성별로 돌아가야 하지. 지금은 세계 멸망을 막건 말건, 빨리 되돌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

 

지금 당장 규칙부터 수정하라고!”

 

싫어.”

 

아무리 잡화점의 주인이라고 해도, 잡화점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것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은 없지. 지금 상황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린에게 훈계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리제로트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계속 보고만 있고, 결과적으로 이 세상은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이 잡화점은 느닷없이 땅이 솟아오르고 그래요?”

 

잡화점이 땅에서 솟아오른 게 아니라 바닥이 솟아오른 거잖아. 잡화점을 두더지마냥 만들지 마...”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마왕 레프리시아의 눈에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혹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적이 될 거 같아 귀찮은지. 그건 사실상 중요하지 않은데 문제는 마계공작 중에서 여럿이 그릇된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잠깐 봤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이 날 장난감으로 선택한다는 발언.

 

리제로트.”

 

?”

 

밖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했으니까. 네가 나갈 때는 꼭 나에게 말하고 같이 동행한다는 것만 약속해.”

 

카린의 모습으로 같이 동행을 해준다면 생각해볼게요.”

 

어째서 너희들은 모두 날 카린으로 못 만들어서 안달이 난 거야? 애초에 20년 이상 남자로 살아오다가 갑자기 이런 모습으로 살라고 하면 불편하거든? 키도 바뀌는 바람에 적응도 안 돼.”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리제로트의 눈빛에서는 ~ 어련하시겠습니까? 그저 내 눈에만 보기 좋으면 되는 거지~”라고 훼방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눈이 반짝이며 내 모습을 순식간에 훑고는...

 

어라? 그러고 보니 안 씻으세요?”

 

같이 씻자는 소리는 하지마.”

 

그럼 씻겨드려요?”

 

네 정신상태부터 씻고 오던가...”

 

여전히 한결 같은 리제로트의 끊임없는 욕망을 지워버리고, 여전히 손님이 오지 않는 잡화점 안에서 물품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스으윽

 

옷깃을 타고 뱀처럼 다가온 세린의 손. 포션을 정리하려는 내 작은 손등을 침범했다.

 

이번 건 또 뭐야.”

 

아니. 잠깐 진단을 해보는 거야. 좋아. 정상이네.”

 

진단을 한다는 것치곤 세린의 경우에도 어마어마한 욕망이 눈빛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초근거리에서 봐야 하는 내 입장에선 호러가 따로 없었는데, 힘을 줘서 뿌리치려고 해도 세린의 힘이 더 강했다는 사실에 참담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아니 그런 미래는 오면 안 돼.

 

세린. 네가 뭘 하려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아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그대로 좀 놔둬! 바꾸지 말란 말이야!”

 

어처구니 없게도 세린이 내 신체를 진단한다는 자체는, 결과적으로 내 상태를 변화시킨다는 의미가 더 크다. 내가 입고 있던 옷도 자기 멋대로 바꾸고 난리라니.

 

그리고 네가 고르는 의상마다 노출도가 은근히 거슬리거든?”

 

옛 현자는 노출도와 방어력은 서로 비례관계라고 말했지.”

 

전혀 아니거든!”

 

대체 어느 현자가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은 거야?

 

카린 씨는 잡화점에 있으면서 그런 옷도 입고 계신가요?”

 

아니. 그보다 지금 흘리고 있는 침이나 닦아.”

 

이젠 리제로트 쪽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거침없이 치고 들어왔으니,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소리치는 작업은 복잡했다.

 

이 옷은 뭐야? 꼭 웨딩드레스를 개조한 것처럼 생겼는데, 옷에서 쓸 때 없이 은은하게 발광하고 있잖아?”

 

그거야 당연히 명등룡의 소재로 만들었기 때문이지.”

 

“...너 언제부터 헌터가 된 거야?”

 

세린의 활동범위마저도 다른 세계를 침범하고 있는 건가? 생각해보니 세린도 나의 에너지와 같은 종류잖아?

 

창조신이 일전에 다뤘던 에너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는 것. 애초에 잡화점 그 자체인 세린의 입장에선 이미 인간의 시점이 아니다. 잠깐? 그러면 잡화점 안에 있는 것이 다른 신이 안 되는 이유가...

 

인간이 잡화점의 주인이 되야 하는 이유는 지금 남자로 돌아간다면 잡화점 그 자체와 동화되기 때문?”

 

대단하네? 이제서야 내 마음을 알았구나?”

 

순식간에 해머에 맞은 충격이 머리에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세린의 입장에서는 내가 남자든 여자든, 내가 잡화점에 동화하지 않고 우선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심술궂은 일을 벌이고 있었으니까. 미움을 받을지언정 자신의 소중한 사람은 꼭 지키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말로 이야기를 해야 할 거 아냐. 그런 이유라면 아무리 나라도 먼저 소리치지 않는다고.”

 

애초에 네가 알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알아도 이야기는 못했으니까. 어차피 지금은 네가 알아챘으니 진실을 말해도 상관없지.”

 

다만...

 

카린 씨? 문이...”

 

연미복을 입은 리제로트의 인형 월터가 문을 향해 경계를 하고 있었다. 잡화점에 드디어 손님이라도 온 것일까? 아니, 평범한 손님이라면 월터가 경계를 하지 않고, 리제로트 마저 내 등뒤에 숨어있지는 않았다.

 

호오? 이곳이 그 잡화점인가? 짐이 예상한대로 손쉬운 진입방법이 아니구나.”

 

마왕 레프리시아?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들어온 거야?”

 

현관으로 들어왔노라.”

 

아니. 지금 내가 그런 시시한 장난을 하자고 그런 질문을 한 줄 알아!”

 

질문의 의도야 어떻든 타락의 마왕이자, 모든 차원계를 흔들어버릴 만한 강력한 마왕. 레프리시아는 칠흑의 드레스를 입고 잡화점에 쳐들어와버렸다. 사실 마왕성에 용사가 쳐들어오는 건 흔한 클리셰인데, 마왕이 잡화점에 쳐들어온 것만 생각하면 마을을 침략하는 것보다 더 흔하지 않는 클리셰임이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은하게 달빛으로 내려오는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나부끼는 동안, 주변에 마계공작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거지.”

 

사실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의상이든 성별이든 일단 작은 걸 떠나서, 지금 레프리시아가 흘리는 오러가 잡화점 내부를 침식하려고 들었다.

 

그야 당연히 짐이 보낸 청혼에 대해 왔노라. 그리 사랑스러운 모습을 하고 짐을 만나고 싶어했다면, 흔쾌히 시간을 들여 준비하라고 했을 터.”

 

이런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결혼을 하고 싶다는 건 아니거든? 그리고 이건 잡화점이 멋대로 입혀놓은 거야. 그러니까 쓸 때 없는 힘주지 말고 그 불길한 오러를 제거해주겠어? 내 뒤에 있는 아이에게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니까.”

 

마왕이라는 존재는 일반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거북한 존재였다. 가빠오는 리제로트의 숨소리를 듣고 세린에게 리제로트를 보호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마왕의 보라 빛 눈동자는 살며시 빛을 띠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아이? 그런가? 유부녀인가?”

 

웃기지마! 남자에게 유부녀라는 소리를 한다는 거 자체가 이상하지 않아?”

 

지금은 여자이지 않는가?”

 

시끄러워어어어!”

 

소리는 공기를 찢으며 퍼져나갔고 레프리시아는 그런 나를 무표정 반응했다. 상대의 표정을 읽고 파악할 수 없는 레프리시아의 포커페이스에, 천천히 진정을 하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곳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마왕? 이곳에 온 사람이라면 어찌 되었든 모두 똑같은 손님일 뿐. 지금은 신분이든 계급이든 모두 다 제한된 장소야.”

 

그야 당연히 그대를 찾아왔다. 그대와 결혼을 하기 위해 말이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어느 누구도 찾아낼 수 없는 잡화점에 들어온 건가? 아니, 어쩌면 내가 맨 처음으로 레시아를 2층에서 소환했던 전과가 있으니, 가능성이 거의 없는 가설이라면 2층의 물건 중 하나가 지금의 마왕까지 이곳을 찾아오게 만든 것일지도 몰라. 그야 당연하게도 각본가는 모두 제외되었고, 왜곡된 이야기는 분명 없으리라고 생각하니까.

 

아니면 짐이 남성체가 되는 편이 더 좋은가?”

 

그러니까 본래 성별인 남자에게 그런 소리를 하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청혼 안 받아준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그래도 그대는 짐을 보기 위해 마계까지 온 것이 아닌가?”

 

그래. 맞아. 회군을 하기 위해서보단 개인적으로 보고 싶다고 했지. 그리고 봤잖아? 봤으면 내 목적은 다 완료한 거라고? 이제 네가 세상을 부수던 가루를 만들던 상관 안 할거야.”

 

그러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레프리시아의 키가 더 컸으니 내가 자연스레 올려다 보게 되었고, 빠질 것만 같은 레프리시아의 눈동자와 마주친 상태로, 시간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그대는 짐을 처음 보았을 때, 쓸쓸한 눈을 하고 있었다. 보통 마왕을 처음 보았어도 쓸쓸하거나 그리운 듯한 눈을 하지 않지. 그러나 곧 이어 실망에 빠졌다. 그대가 찾고 있던 마왕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미겠지. 그 반응을 추측한다면, 그대는 일전에 짐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노라. 그대는 누구이고, 이곳에 어찌 왔는지 말해보거라.”

 

너무 날카로워서 베이는 줄 알았다.

이 마왕에게 무서울 정도로 통찰력을 준 창조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카일. 나는 모순덩어리. 본래 있어서는 안 될 존재야.”

 

이런 식으로 소개를 한다면 상대방 입장에선 좀 강한 면모를 남길 수 있을까?

아님...그냥 바보 같은 허세병으로 병자취급을 받을까?

 

그리고, 잡화점의 주인이자. 마왕 레프리시아의 주인이기도 하지.”

 

뭣이?”

 

당황한 모습을 여기서 보이는 건가? 자신의 위는 없다고 생각했던 마왕에게 있어. 나의 대답은 충격적이라고 봐야 했다. 힘이 사라진 마왕의 손가락을 살짝 치우고 뒤를 돌아 말을 이어 나아갔다.

 

물론 너를 말하는 건 아냐. 너보다 더 귀여운 검은 고양이가 있거든. 나는 그 아이와 혼인을 했고, 너의 청혼은 받아들이지 않아.”

 

의미를...모르겠군.”

 

모르는 게 당연해. 지금의 너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인걸.”

 

마왕에게 쐐기를 박았다.

물론 나 자신에게도...

 

그러면 이제 볼일 다 봤으면 돌아가주겠어?”

 

아니. 짐은 아직 돌아가지 않는다.”

 

대체 왜? 아무리 같은 타락의 마왕이라고 해도, 다른 건 다른 거다. 그렇게 쐐기까지 박았다면, 보통 돌아가는 것이...아니, 내가 상대를 좀 얕봤구나. 상대가 아무리 다르더라도 본질은 타락의 마왕.

 

그대가 이전에 어떤 생활을 했는지 몰라도, 이전의 짐과 같이 생활을 했었다는 건 사실이라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그대의 곁에서 짐과 오래 생활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흔적이 보인다고?”

 

그렇다. 함께 했던 사념을 이곳에서 볼 수 있노라. 짐은 마왕이다. 마왕이 모르는 것 또한 없어야 하며, 설령 다른 차원에서 일어났던 일이라도, 그것을 감지하고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기묘한 긴장감속에 만들어진 고요함. 그리고 그 고요함을 깨부수는데 5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 매일 이곳에 찾아오겠다.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대는 오히려 편한 관계를 더 선호하기 마련. 그대의 마음을 얻어야 세계정복도 손쉽게 이룰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확실히 레시아와 같은 점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인가?

마왕의 뒷모습이 내 눈 앞에서 사라지는 동안, 굳어버린 듯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세계정복을 하러 나가라고. 이곳에 왜 매일 놀러 오겠다는 건데?”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다.”

 

더 불길해...

그보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이곳에 찾아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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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597

 

 

마계에는 유독 붉은 보름달만 뜨는데, 그 이유는 마족들이 붉은 보름달에서만큼은 어마어마하게 강해지기 때문이다. ‘어마어마라는 표현이 거슬리면, ‘매우 강해진다.’라는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냐면...

 

흐음? 그 정도인가? 아까 전과는 달리 많이 지쳐있는 모습이군?”

 

시끄러워...잡화점 열어야 하는데 너 때문에 못 열잖아.”

 

과거에 단련하고 경험하고 노력해왔던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처참하게 깨져나가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도망갈 수 있게 구멍을 파놓는 나의 성격을 어떻게 읽었는지, 빠져나갈 수 없는 결계가 사방에 널려있을 무렵. 아직 익숙하지 않는 이 몸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 신기했다.

 

아니. 익숙하긴 해도, 신장차이가 있기 때문에 유효타를 넣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겠지. 온 몸이 욱신거리고 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엉망진창이 되었어도 아직까지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라면, 과거의 신체 데이터를 백업하여 원상복구 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지금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사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잡화점을 열어야 한다는 그 하나 때문에...

 

프리트론 왕국의 몰락을 막아낸 것은 좋으나, 그 바보 같은 행동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구나.”

 

사실 프리트론은 어찌 되도 상관은 없는데, 일단 마왕을 만나러 온 것뿐이니까.”

 

만나러 온 이유야 뻔한 이유지만...

 

짐이 누군지 알면서도 만나러 왔다? 그러면서 명을 재촉하는 것이야 말로 실로 우습구나.”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호랑이 가죽을 남긴다고 하지. 아니, 다른 건가? 어쨌든 마왕을 만나려면 마계로 가는 게 아무래도 일반 상식 아닐까? 솔직히 내가 한 말을 끊고 호랑이를 잡는 거겠지!”라던가,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 거다!”라고 소리치는 걸 듣고 싶었다만, 뭐 지금에 와서야 그런 바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으려나?”

 

마음이 좀 착잡해졌다. 그래도 태클을 걸면서 살아온 인생이 좀 오래 되었으니, 이렇게라도 만담을 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이나마 추억이 되살아나려고 할 때, 마왕 옆에 천천히 다가왔다.

 

마왕님. 이 소녀를 저에게 주신다면 쓸만한 아이로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쓸만한 아이는 뭐야?

 

마음에 드는가? 그대는 아직까지 거느리고 있는 신부가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만?”

 

새로운 장난감은 언제나 가지고 싶은 법이죠.”

 

뭔지 모르겠지만 저 남자를 날 바비인형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군. 허나, 짐 또한 저 소녀에게 아직 못 본 것이 많다. 그러니 그걸 확인 하기 전까진 보류로 해두도록 하지.”

 

그렇군요. 그럼...”

 

그 남자의 시선이 날 훑고 지나갔다. 어마어마한 사념이 나에게 침투했는데, 그 중엔 피투성이가 된 체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한 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대체 신부들에게 무슨 짓을 하면 그 지경까지 가는 거지?

 

저건 마계토착 생물을 떠나서 이미 정상이 아닌데...”

 

아무래도 마계공작 중 하나인 거 같네.”

 

자기가 닥친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세린은 매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잡화점 주인 밖에 보이지 않는 세린을 마계공작이나 마왕 레프리시아가 볼 일은 전혀 없다만, 지금 그런걸 생각할 때가 아니라, 저런 변태 같은 녀석에게 갈고리에 걸려서 엔티티에게 제물로 받쳐지는 걸 막으려면, 이제 슬슬 이탈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로 나는 검을 허공에 집어 넣었다.

행동으로부터 이미 레프리시아에게 전해지자, 눈살이 살짝 찌그러진 마왕. 그거 하나만으로 거대한 마기가 나를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내지 말라고? 잡화점 문을 열어야 하는 시간이라서 말이야. 슬슬 돌아가봐야 하거든.”

 

도망치게 놔둘 것 같은가!”

 

거대한 마기가 허공에 응축되어 모든 땅을 갈아내도, 내 손에 바다 빛의 마나가 한 곳에 모여 퍼지기 시작했다.

 

새벽<Daybreak>.”

 

-파사사사사삭!

 

뭣이?”

 

마기는 자연상태로 되돌아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애초에 내 앞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건 그리 큰 효과가 없다.

 

마왕도 생각보다 약하네? 이런 마법에 상쇄 당할 줄이야?”

 

사실 내가 특이한 거지만 분위기에 맞춰서 도발을 해보았다. 이런 도발에 걸린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왕 레프리시아는 상상이상으로 냉철한 분석가였다.

 

모든 마법을 단숨에 자연상태로 바꿔버리는 마법. 확실히 그대는 마법사에게 있어선 최대의 적이로구나. 지금까지 쓰지 않았다가 쓰는 걸 보아하니, 어떻게든 아껴서 반격을 할 속셈이었군. 실력을 숨기고 있어서 몰랐으나, 마계공작에 어울릴만한 기술이니라. 다만, 잡화점이라는 장소는 그저 잡다한 물건을 파는 곳인데, 그게 세계를 종말로 몰아넣을 마왕을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인가?”

 

맞아. 더 중요해.”

 

호오...”

 

실로 흥미로운 동물이 아닐 수 없구나!”라는 듯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마계의 군단을 회군시킬 정도로 거대한 힘을 지닌 사람이, 잡화점 하나 열어야 한다고 세계평화고 나발이고 집어 던지면서 돌아가니까.

 

마치 내가 중요해! 일이 중요해!”라고 했더니 일이 중요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아님 말고...

아무튼 완전하게 적의가 없다는 표시로 뒤로 돌아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뒤에 기습을 받을 수 있긴 하지만, 이미 시공간까지 조작하는 내가 그런 거에 당할 일은 없었다.

 

-파앙!

 

집에 좀 가자! 아프잖아!”

 

오늘 처음 있는 걸로 하자.

 

보내지 않는다. 애초에 세상에는 관심이 없는 자라고 한들, 그 정도의 힘을 지녔다면 분명 짐에게 있어선 커다란 장해물이 될 존재. 그러니 선택을 하거라.”

 

보나마나 자신의 아군이 될지 죽도록 싸울지 결정하라고 하겠지.”

 

맞다. 짐과 같이 세계를 멸망시키고, 더 나아가 모든 차원을 한줌의 흙으로 공허에 흩뿌리지 않겠는가?”

 

모든 차원을 한줌의 흙으로 흩뿌리기엔 아직까지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는 레시아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바보 같은 허상은 언제나 이럴 때만 나타나네. 아무튼 나는 그런 거에 관심이 없거든? 그렇다고 해서 죽도록 싸울 의미도 없어. 단지 그 기사의 각오를 무시하기엔 너무 애처롭거든. 그래서 1번 정도는 회군시키도록 유도한 것뿐이야. 그 다음에 프리트론이 망하던 칸포리우스 제국이 망하든, 잡화점만 열 수 있다면 나와는 전~혀 관계 없지.”

 

나의 말을 들을 때마다 분한 건지 아쉬운 건지 계속해서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마왕. 저들 입장에서도 소녀 하나가 마계의 대군을 막고, 왕국 하나를 구한 셈이 되어버렸으니 어떻게든 죽이거나, 자신의 수하로 만드는 선택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자신보다 어느 정도 약해야지, 내 경우에는 지금 마왕마저 갈등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아니, 그 이상으로 힘을 숨기고 다녔다. 그 진가를 알아보는 건 역시 레프리시아 밖에 없는 건가?

 

그럼 어쩔 수 없지.”

 

순식간에 내 앞으로 순간이동한 레프리시아. 그리고...

 

짐의 수하로 있기는 싫고 그렇다고 죽도록 싸우기 싫다고 하는 의미는 지금 그대는 적의가 전혀 없다는 것으로 인지해도 괜찮은가?”

 

멀리서 마법을 맞을 땐 몰랐지만, 예전에도 많이 본 레시아의 칠흑의 드레스를 기초로, 흑색의 무구들이 마왕의 카리스마를 더욱 높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렇게 인지해도 상관 없어.”

 

다만, 그대가 언제 돌변하여 짐에게 칼을 들이밀지 모르는 일. 그런고로 짐은 사소한 변수마저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이곳에서 전한다.”

 

만일 내가 용사와 같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지했는지, 그런 가능성도 없는 경우의 수마저 제거하기 위한 마왕의 입이 열렸다.

 

짐의 신부가 되어라.”

 

......

 

?”

 

짐의 신부가 되라고 말했다.”

 

아니. 신부고 나발이고 나는...”

 

알고 있다. 그대는 본래 여성체가 아니라는 것쯤은. 다만, 그대가 설령 남성체라고 해도 짐의 신부가 되라는 말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기본적으로 남자가 신랑이고 여자가 신부라고!”

 

그대는 지금 소녀이지 않는가?”

 

.

제길. 마왕에게 논리적으로 밀려버렸다.

 

아냐. 잠깐만! 아냐! 그게 아냐!”

 

짐과 애정관계를 쌓으면 언젠가 짐을 위해 움직이는 날이 올 것이고,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고 해도 짐의 감시 아래에 그대가 수상한 행동을 할지라도, 초기 진압이 가능한 이점을 살린 것이다.”

 

그보단, 타락의 마왕이니까 결국 내가 타락해서 마왕군에 들어갈 거라는 생각을 한 거겠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그 특유의 파동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멀쩡한 사람도 결국 타락할 테니까.”

 

짐의 의도마저 파악할 정도인가?”

 

오랫동안 봐오면 무슨 꿍꿍이인지 자동으로 알게 된다.

 

그러니 나는 잡화점을 오픈 하러 갈 거야. 신부가 되라는 제안은 정말 진심을 다해 거절할게.”

 

대체 왜 장르나 전개가 이 모양으로 되는 건지...

분명 모든 시공간에 있는 각본가는 왜곡시켰을 터인데.

 

아니, 불허하다. 운이 좋게도 짐은 마왕이니라. 얻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얻어야 하며, 얻을 수 없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어야 하느니라.”

 

내 입장에서는 운이 너무 나쁜 거 같은데...”

 

조용히 하거라. 짐이 윤허하지 않는다!”

 

초창기의 레시아는 고분고분한 성격이었다면, 지금의 마왕은 그냥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성격인가?

 

저기...역지사지라는 말 알아?”

 

알아도 모른다 할 것이다.”

 

전혀 상대방을 생각해주지 않잖아!”

 

그야 당연하게도 마왕이기 때문이니라.”

 

이걸 때려? 말아?

아니, 왠지 때려도 내가 곱게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전 세계에 레시아와 성격이 은근히 비슷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도 신부는 싫어. 또 과도한 사랑을 받다가 죽거나, 힘 조절 안 되는 태클을 맞으면 죽어버릴지도 몰라.

 

아니면, 지금 당장 혼약식을 치르도록 하지.”

 

진도가 너무 빠르잖아! 학원강사냐!”

 

가끔가다 학원강사들이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는 문제를 풀게 만들어, 학교 선생님을 깔보게 만드는 그런 경우도 있다. 그 이전에 이 세계에는 학원강사라는 개념이 없지. 300년 이전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보다 더 멀리 왔을지도 모르니.

 

아니면 짐이 남성체로 변해야 받아들일 건가?”

 

내 성별은 원래 남자라고!”

 

그럼 그대가 남자로 변해서 짐의 신부가 될 것인가?”

 

태클을 걸어야 할 곳이 너무 반복적이니 따로는 말하지 않겠는데...”

 

따로 말하지 않는 거면 승낙하겠다는 의미로 알겠...”

 

좀 사람 말을 끝까지 듣고 멋대로 해석하지 말란 말이야!!!”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면서 잠깐 고개를 숙이고 지친 정신을 수습했다. 마왕과 싸우면 적어도 장엄한 전투로 인해 죽는 경우는 봤어도, 마왕과 이야기 하다가 화병으로 먼저 쓰러질 뻔한 이야기는 전혀 없겠지만...5분만 더 이 상황이 지속되었으면, 오늘 처음으로 마왕과 이야기 하다가 고혈압으로 사망한 캐릭터가 될 뻔했다.

 

뭐가 문제인가? 짐은 이래 보여도 꽤 귀엽다고 생각한다.”

 

그게 지금 마왕이 할 말이냐...”

 

모든 각본가는 제외시켰으니, 원래대로라면 용사와 마왕의 싸움, 제국과 마왕군의 대립. 더 나아가 인간의 내부분열 등. 흐름을 타고 악순환이 되어도 나는 아무도 오지 않는, 어쩌면 가끔씩 의뢰인이 오는 잡화점 안에서, 평화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뒹굴 거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걱정 말거라. 처음에만 아플 뿐이라고 마계공작 중 한 명이 말했으니...”

 

누가 그걸 걱정한대!”

 

경험이 있는 것인가?”

 

무슨 경험타령이야!”

 

가위바위보 말이다.”

 

그 망할 것의 가위바위보는 대체 왜 이곳까지 나타나서 괴롭히는 거냐고! 그게 처음에만 아프다는 건 또 뭔 상황인데!”

 

아무래도 세계가 대격변을 해도 중심점은 마왕의 가위바위보가 아닐까?

그건 그렇다고 해도...가위바위보를 처음 하면 많이 아픈 건가? 내 생에 첫 가위바위보는 4살 때 동네친구와 같이 했던 기억밖에 없다. 졌을 때도 마음이 아프거나 그러진 않았으니까.

 

혼례를 한 뒤에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은 정통이 아닌가?”

 

대체 어느 곳의 정통이 그렇게 삶은 물에 데쳐먹을 정도로 막장이 됐는지 설명부터 해!”

 

아무래도 나의 사명은 차원을 넘어서도 계속 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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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는 첫날밤에 가위바위보를 한 뒤에 공격팀과 수비팀으로 나뉜뒤 일리오스로 떠납니다.(??????????????????????)

...그냥 잊어주세요.

 

596

 

 

 

잡화점 내부에서는 본래의 모습으로 지낼 수 없으니, 밖으로 나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인생은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인데, 어째서인지 밖으로 나가도 나는 카린이라는 여성체의 모습일 뿐. 결국 한숨을 쉬고 나중에 되돌아갈 방법을 찾기로 생각했다. 대부분 짧은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폭염이지만, 숲에는 긴바지를 입어야 마음이 놓인다.

 

맨살이 드러난 부분에 가시에 찔리거나 독을 지닌 생물에게 물리기라도 하면, 어떤 변수로 작용해 목숨을 빼앗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리베리티아 고원 특유의 바람은 오히려 시원하다 못해 서늘할 정도니, 반팔과 반바지를 입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된다. 최적의 기온으로 맞춰진 이곳이 낙원이긴 하지만...

 

그 덕에 이곳에 몰려오는 수많은 몬스터들과 인간들의 전쟁터가 되었구나.”

 

덕분에 비릿한 냄새가 떠나지 않는 붉은 빛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리베리티아 고원에서 조금만 더 가면 요정과 엘프들이 사는 숲이 나오지만, 어차피 들어갈 일이 없으니 비명을 들었던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다. 주변에 시체로 황폐해진 곳을 산림욕 하듯이 들어갈 수 없는 이 찝찝한 기분은 뒤로하고, 세린에게 말을 걸어 내가 궁금한 것부터 말했다.

 

혹시나 하는 말인데 너도 내 상태정보라던지 그런 걸 수정하거나 멋대로 작성할 수 있어?”

 

일부는 가능하지만 일부는 불가능하지.”

 

내 성별은?”

 

“......”

 

. 침묵을 하시겠다?

 

당장 돌려내! 이 로리콘아!”

 

나는 겨우 로리콘이 아냐. 그저 귀여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것뿐이지. 만약 잡화점의 주인이 키도 작고 귀여운 남자애나 여자애였으면, 보살필 맛이 나는데 어째서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사람이 우중충하고 따질게 많은 남자였는지.”

 

어째서인지 평소의 카린보다 키가 좀 더 작더니만!”

 

그나마 여성체로 변했을 때는 160cm 후반대로 갔다면, 이번엔 아예 150cm초반대로 가버렸다. 이래서 내 프로필을 적을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키가 어느 정도고 몸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죄다 불명으로 적거나 변수가 많음으로 적어야 하잖아!

 

대체 어느 신체검사원이 좋아하겠냐고!

그보다 겨우라는 말을 사용한 거냐? 지금?

 

아무래도 은팔찌를 차야 할 녀석은 너로구나.”

 

글쎄? 잡화점에 팔이 있던가? 집을 감옥에 넣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보라고 하시지?”

 

저 얄미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카린의 입지가 더 굳어져서는 안 되는데...

 

지금은 주변에 있는 시체부터 조사를 해야 되나?”

 

시체를 뒤적거린다고? 그런 지저분한 일을 그런 귀여운 모습으로 할 거야?”

 

생존에 있어서 귀엽고 멋지고가 어디 있어? 그냥 추악하게 사는 거지. 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게 시체든 쓰레기더미든 모두 뒤적거리며 살고 있는 거잖아. 어차피 모든 생명은 죽지만, 모든 생명은 구차하게도 살아남으려는 강한 생존 의지가 있지. 그거야 말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거야.”

 

거대한 손톱에 깊게 파인듯한 갑옷. 그 안에 들어있는 따듯한 내장들이 텅 비어있었다. 사람이 습격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고, 어처구니 없게도 정말 마왕군에게 쫓겼는지 내 근처만 해도 풀 숲에서 감시하는 듯한 고블린 무리가 감지 되었다.

 

그래도 일단 나를 공격하지 않으니 모른 척.

다만, 마나가 요동치며 주변의 공기를 휘두르고 있을 때. 주변에서 발 소리가 더 들려왔다.

 

뭐지? 지원군인가?”

 

곧 죽어갈 것 같은 여성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울려오자마자, 주변에 있던 고블린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거기 이쪽으로 빨리 오세요. 그런 곳에 있으면 죽어버릴 테니까.”

 

, 알았다. 그런데 너 같은 소녀가 이런 곳에 무슨 일이지?”

 

소녀라는 말에 열이 받쳤지만,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 멋대로 화내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럼 당신 같은 기사가 이곳에서 대패한 이유는 뭔가요?”

 

흔적을 쫓다 보면 멋대로 추측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전투가 벌여진 것으로 보였다.

 

대패한 이유야 13대 마왕 레프리시아가 이끄는 군세 때문이지. 벌써 프리트론까지 함락하고 있어. 미약하게나마 부탁을 하지...”

 

제가 부탁을 받는다고 해도 손쓸 도리는 없어 보입니다만...”

 

적어도 프리트론에 있는 귀족들만이라도...”

 

귀족이 아니라 약자를 지키는 게 기사의 사명 아니던가요? 저는 어차피 기사도 아니고 민간인이니 그 말을 들어줄 의무는 없다고 봅니다만?”

 

-털썩!

 

묵직한 소리가 땅을 울리고 내 시선은 무릎을 꿇은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간절히 외쳤다.

 

제발! 부탁이다! 약자를 보호해주는 것이 나의 사명이지만, 그 약자를 이끌고 보살피는 것이야 말로 왕과 귀족이 행해야 하는 사명이니까! 그들을 지켜야지만 약자를 이끌고 모두 대피할 수 있다!”

 

대답이 좋았다.

아니, 정말로 이 기사는 자신의 주인만 생각한 줄 알았으나,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남을 챙길 생각을 할 줄이야.

 

그렇군요. 적어도 당신은 올바른 사람인가 보네요. 그렇다면 그대로 가만히 있으세요.”

 

드디어 공격을 감행하려는 듯한 풀숲의 움직임. 순식간에 뛰어가 기사의 등을 밟고 뾰족한 단검을 든 고블린의 얼굴에 발로 차버렸다. 살살 차면 살아있을 수 있으니, 목뼈가 날아갈 정도로 강하게 차버렸다.

 

물 흐르듯이 허공에 떨어지려는 뼈 단검을 붙잡고, 내 동쪽 방향으로 빠르게 던지자, 풀 숲 한곳에서 찢어지는 짐승의 비명이 울렸다. 한 손에는 검을 만들어 휘두르고, 다른 한 손에는 마나를 모아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일방적인 학살을 하고야 말았다. 어쩌다 보니 고블린이 더 불쌍해질 정도로 괴멸시켰고, 엉망이 되어버린 숲을 더욱 더 황폐하게 만들어서야, 널려있는 고블린의 시체들은 곱게 죽지 못해 사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거기 다친 데는 없어요?”

 

다친 데는 없는지 물어보고 있지만, 그 기사는 뭐에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숨을 쉬는 걸로 봐선 서서 죽었다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으니, 다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서는데...

 

, 혹시 용사입니까?”

 

아뇨. 잡화점 주인입니다. 그보다 이 나라에 용사가 없어요?”

 

, . 용사는 여신의 신탁을 받고 축복을 받아야만 가능하니까요. 지금으로부터 500년동안 대마법사 엘티노스 일행 말고는 용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 내가 알던 용사들은 바퀴벌레보다 더 많은 숫자로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직업인 줄 알았는데, 이곳은 비정상적으로 신탁을 받고 축복을 받아야 용사로 취급되는 세계구나.

 

아니. 너희가 이상한 거잖아. 매번 용사들이 득실거려서 무서울 지경이었다고?”

 

세린은 조용히 하고 있어.”

 

? 무슨 소리를?”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말들을 받아 치느라 머리는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음이 호수처럼 넓은 내가 참아야지.

 

그러면 마왕은 어디서 볼 수 있죠?”

 

, 마왕이라면? 13대 타락의 마왕 말입니까?”

 

. 맞아요.”

 

그 마왕 아니면 누가 있겠어? 이런 잔혹한 일을 벌이는 건 내가 아는 레시아가 아니라, 어느 이야기에서 나올 법한 잔혹한 마왕 레프리시아라고 보면 된다. 어찌되었든 나와 마주했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혹은 맨 처음 만나자마자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전투가 벌어질 지도 모른다.

 

마왕은 직접 대군을 이끌지 않고 마계에 있는 마왕성에 있지만, 마기가 가득해 여신의 축복을 받지 않는 이상 도달할 수 없다고...”

 

. 거기에 있구나. 알려줘서 고마워요. 어차피 마계로 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

 

잘 들었으면서 못들은 척을 하다니요? 마계로 가는 길은 알고 있다는 소리에요. 다만, 제가 알고 있는 방식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마왕을 막아야 한다는 건 맞죠?”

 

마왕을 막는 게 개구리를 만질 수 있는 용기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라면 싸우지 않고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에서야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결정하는 방법은 통하지 않으니까. 철저한 방해공작을 통해 프리트론 왕국과 반대 방향으로 끌어들일 수 밖에 없다.

 

인간계의 반대 방향이라면 마계밖에 없지만, 이렇게라도 유인을 해야 지금 당장이라도 함락되지 않고 더 많은 시민들을 살릴 수 있잖아요?”

 

하지만...혼자서 그 마계대군을 막을 수는...”

 

아니. 유인만 하는 거지 누가 군세를 막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군세를 막을만한 위력을 지닌 무언가가 필요했다. 계기라던가 아니면 내가 직접 마왕성을 때려부수거나. 아니면 다른 세계처럼 마왕을 자칭하거나...아니, 이 모습으로 마왕을 자칭하기도 힘들겠구나. 이미지라는 것이 있지.

 

그러면 저는 출발할 테니 고블린 이빨이라도 가져가세요. 팔면 그래도 저녁에 먹을 음식이 호화롭게 될 테니까요.”

 

고블린 이빨은 잡화점에서 취급한 적이 있었는데, 화살촉으로 만들면 위협적인 물건이 되니까. 잡상인에게 팔면 짭짤하게 벌 수 있다. 그나저나, 돈과 관련된 일이 있으면 주제를 벗어난 독백을 하는 버릇 좀 고쳐야겠다.

 

그럼 마계로 가는 게이트를 열어줘. 세린.”

 

마계로 가는 길은 스스로 갈 수 있잖아?”

 

그럼 본래 성별로 되돌려 주던가!”

 

그건 싫은데?’

 

대체 세린을 어떻게 아이언 클로를 해야 내가 남자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가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하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걸어가는 동안, 마기가 몸을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몸 안쪽에선 신성력과 마기, 마나를 계속해서 합성하기 때문에, 마기에 대한 침식은...

 

아니! 게이트를 열어줄 거면 열어주던가!!!”

 

조금 걸어갔는데 마계로 간다는 그 자체가 이상하잖아.

 

이건 내가 한 게 아니거든? 이것도 네가 가고 싶다는 소망이 이루어낸 기적이야.”

 

내가? 그런 거야?”

 

그래. 또 그 마왕을 되찾으려는 거야? 아니면 그 마왕을 죽이러 가는 거야?”

 

그야 뭐. 되찾으러 가는 거긴 한데. 생각을 좀 해보니까 마계에서 난동을 부리고 마왕에게 호감을 얻는 건 바보 같은 일이고, 결국 죽이러 가는 것보단, 어쩌다 보니 싸우러 간다는 표현이 맞다. 이 세계에 있는 레시아가 날 알아본다는 가능성은 0에 수렴하지만, 그래도 0.1정도 가능성이 있다면 괜찮겠지.

 

뭐가 되었든 회군시키러 가볼...”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살기가 주변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레시아와 잡화점 생활을 하면서, 매우 얕보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레시아의 정보습득 능력은...”

 

전군. 정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미 최상위권이잖아...”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배치. 거대한 군세에 포위당한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환영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많이 데려오지 않았으면 좋겠...”

 

타락하라.”

 

마왕 레프리시아의 말 한마디에 내 주변이 모두 빛으로 물들었다. 주인공은 악당들의 대사를 끝까지 기다려주는 경우가 있는데, 어째서 악당들은 말도 듣지 않고 속전속결로 공격하려는 걸까?

 

거대한 폭음도 들리지 않고 그대로 전신에 충격이 몰아쳤다.

 

아프잖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내가 바닥에 기고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탈진감부터 서서히 몸의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다.

 

흐음? 마왕님? 저 인간 일어났는데요?”

 

그야 당연하지 않는가? 인간이기엔 매우 변칙적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짐의 마법을 직격으로 맞고도 살아남는 자가 있다니.”

 

...사람이 말을 할 때, 마법을 직격으로 날리지 말던가...”

 

레시아와 시나가 항상 예측이 불가능한 곳에서 마법을 사용하니까, 조금이라도 마법을 사용하는 움직임이 보이면, 그대로 마법방패와 몸 안에 에너지를 둘러서 충격에 대비하는 버릇이 빛을 발휘했다.

 

차이점이라면 지금 건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마법인 거 같은데, 생각보다 10배는 더 아프게 느껴진다. 그래도 살아남은 게 의아한 걸까? 굳어있던 마왕의 고개는 살짝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름이 뭔가 소녀여?”

 

소녀 아냐...원래는 남자라고...”

 

아무래도 나에 대한 정보는 습득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보다 내 이름을 묻는다면 둘 중 하나인데. 하나는 대화를 할 여지가 있거나, 다른 하나는...

 

짐의 마법을 버틴 자의 이름을 알리고, 최후까지 전해주도록 해주기 위함이니라. 어서 대답하거라.”

 

그래 저거. 꼭 사람 죽이려고 하면 피해자의 이름을 듣더라.

아이고...

 

내 이름은 카...”

 

잠깐만. 그 입으로 카일이라는 흉한 이름을 대는 건 아니겠지?”

 

그럼 내가 카린이라고 대답해야겠냐!”

 

그렇군. 그대의 이름이 카린인가?”

 

아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세린의 방해공작으로 나의 진짜 이름을 알리지 못한 체, 카린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당장 저 마왕에게 살해당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고양이 모습이었을 때는 그나마 고분고분 잘 따라줬는데, 각본가가 사라지고 난 세상의 레프리시아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잔인한 마왕임이 틀림 없다.

 

마왕답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도 난 마법 한번으로 뻗어버리지 않아.”

 

아마 두 번 맞으면 뻗어버릴 것 같은데...

어쨌든 설령 패배해도 날 죽이지 못하도록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하니까. 얇고 긴 백은의 검을 만들었다. 붉은 달 아래에 휘날리는 검은 그 뒤에 별빛이 따라다니듯 어두운 공간에 잠깐이나마 실선을 번뜩였다.

 

그대는 용사인가?”

 

처음으로 마왕 레프리시아의 눈빛에는 빛을 띄기 시작했다. 자신의 호적수라도 찾은 모양인지 고양된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봐도...내 대답은 고정되어있었다.

 

아니. 잡화점 주인인데...저녁에는 잡화점을 열어야 하니까 그냥 돌아갈까?”

 

이토록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대사가 어디 있을까?

...내가 했으니 여기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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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일이 절 죽이네요.

위험등급이 진돗개 2마리 정도라 글을 제대로 못씁니다.

죄송합니다.

 

595

 

시간은 유연하게 변한다.

따라서 공간도 유연하게 변한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모든 걸 꼬아버렸다.

그런 나에게 어떤 벌이 내려지는 걸까?

-혼자서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카일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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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순덩어리다.

그야 말로 내 존재 차체는 이미 모순으로 가득 찼...아니, 이렇게 인트로를 시작하려니까, 내 왼팔에 흑염룡이 살고 있는 거 같잖아. 사실 흑염룡은 없고 월식이라는 검은 뱀은 살고 있긴 한데. 아무튼 현재 모든 시공간에 존재하던 각본가가 사라지고 나서, 나를 죽이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상황이 없어졌으니. 착한 마왕인 레시아나, 친근하게 다가오는 루니아 누나라던가. 아무튼 그냥 다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원래 없는 존재니까. 인간관계부터 원만하지 못한 경우가 되겠지.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보도록 하자. 세린.”

 

? 뭔데?”

 

뒤에서 나를 바라보던 세린은 이전과 다르게 차분히 대답했다. 내가 항상 물어보면 퉁명스럽게 대답하거나, 뭔가 시비가 목에 걸려서 따가웠는데...

 

어째서 나는 카린의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거냐!!!”

 

날카로운 비명은 여김 없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애초에 남자이며 이름은 카일이다. 설령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존재하고 있으니, 아무리 그래도 잡화점 내부에서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으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애초에 네가 규칙을 수정해달라면서.”

 

그래! 맞아! 이 곳을 운영하는 종족을 늘려달라고 했지! 신이든 뭐든 상관없게 말이야!”

 

하지만 그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그러니 너의 본 모습인 남자는 이미 인간을 벗어나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규격으로 남아있던 카린이라는 여성형 인간으로 남아있는 거야.”

 

도대체 너는 왜 내 말부터 무시하는...머리 쓰다듬지 마!”

 

그리고 이 상황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니...

 

. 카린 씨. 오늘은 저를 어떤 신비한 세계로 보내주실 건가요?”

 

리제로트. 이건 타디스가 아니거든? 메두사 폭포로 던져버리기 전에 이제 좀 나가!”

 

어머머? 이런 가녀린 소녀를 혼자 버려두겠다는 건가요?”

 

달라붙지 맛!”

 

찹쌀떡처럼 달라붙으려는 리제로트를 겨우겨우 뿌리치고 잡화점 창문을 바라보았다. 먼 은하수가 펼쳐진 공간은 이 시간대가 밤이란 걸 알려주고 있지만, 미래에서 볼 법한 거대한 빌딩이나, 전등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과거. 아니, 내가 본래 되돌아가야 할 고향과 같은 장소.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정말로 약육강식의 세계네.”

 

파이론은 마왕으로부터 멸망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지금은 누가 마왕인지 모르겠지만 레시아라고 해도 똑바로 잡아줄 사람이 없다면, 제멋대로인 폭군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육포에 대한 집착만 봐도...아니, 이런 걸 육포에 빗대어서 뭐하게?

 

봐요. 밖은 몬스터들이 불을 키고 살아있는 사람을 잡아먹는 세계라고요. 시체를 처음으로 보는 건 아니지만...”

 

음산한 기운이 리제로트를 감싸듯 들어왔다. 그래도 여기는 그나마 좋은 점이라면, 백장미가 없다. 이거야 말로 이 세상이 좀 좋아지는 이유인가? 세상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환멸을 느낄 때쯤.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잡화점에 손님이 찾아...와야 하는데...

 

내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도, 손님이 잘 안 온다는 공통점은 어째서일까?”

 

그거야 내가 막고 있으니까. 이미 이곳은 마왕군의 손아귀에 있잖아. 그런데 인간이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퍼져봐. 어떻게 생각하겠어?”

 

지금 겨우 평화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지만, 약육강식이 살벌한 공간에 잡화점이 나오면, 그 안에서 물품을 구입하기 보단, 약탈과 습격의 빈도가 매우 많이 늘어날 거라 생각한다.

 

일리가 있네. 그냥 이대로 매출 없이 평생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렇게 빈둥거리면서 오지 않는 손님이나 기다리며, 죄다 사라진 잡화점 멤버들에 대한 그리움도 잊어보자. 아니...잊혀질 리는 없나.

 

그나저나 아쉽네요. 잡화점 멤버가 있을 당시엔 저와 어울려줄 꽃들이 많았을 텐데.”

 

널 위해서 잡화점 멤버를 영입한 게 아니거든. 리제로트.”

 

저 사막여우보다 더 괘씸한 생각을 가진 리제로트의 말에 대못을 박았다. 아니, 사막여우는 괘씸하지 않고 귀여운 동물인가? 실제로 여우를 본 기억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심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창문이나 보고 있는 소녀는 이윽고...

 

밖에 나가고 싶어요.”

 

안 돼. 밖은 안전하지 않아.”

 

답답함을 못 참고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걸 만류해보려고 해도 이제 4일정도 경과했으니, 탐색과 정보를 모을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니까...

 

내일 나하고 같이 나가자. 너는 월터가 붙어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해도, 사실 마법에 대한 지식은 초보잖아? 그러니...”

 

아니? 마법에 대한 기초는 이미 마스터 했는데요?”

 

?

 

잠깐? ? 어떻게?”

 

놀라는 모습이 귀엽네요?”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어떻게 기초를...! 잡화점은 사라진 게 아니니 엘티노스의 자서전과 서적들이 남아있구나!”

 

엘티노스의 자서전과 서적. 그리고 덤으로 어마어마한 물품들까지. 사실 모든 시공간에 레이베리아를 빠짐없이 가둬버리면서, 엘티노스의 잡화점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모순투성이인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잡화점은 이 시대에 모순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 재미있더라고요. 이 시기의 마법은 전성기에 가까울 정도로 발전했잖아요? 마법공학이 발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그러면 카린 씨도 마법사의 길을 걸으신 거 맞죠?”

 

카일이라고 불러.”

 

지금은 카린 씨잖아요? ..? 푸훗!”

 

저 앙증맞은 볼을 잡아서 늘려버릴라!

 

세린. 규칙을 바꾸자고 했을 때 말 좀 들으라고...”

 

한숨을 곱게 포장해 밖으로 내뱉었다. 산지직송으로 가는 한숨은 공기 중에 사라졌고, 새벽 1시가 다 되어갈 무렵. 조용하게 생각하고 싶은 내 입장에선 리제로트가 빨리 잠들길 바라고 있었다.

 

넌 안 자냐? 키 안 큰다?”

 

카린과 같이 잔다면 지금쯤 꿈나라에 갔을 텐데요?”

 

! 그 이름은 거론해선 안 돼. 볼트모트와 같은 거야.”

 

카린 씨야 말로 말하면 안 되는 이름을 거론했잖아요?”

 

한숨만 쌓였다.

, 밖을 외출하면 본래 남자로 되돌아갈 수 있을 테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려나? 그냥 검은 고양이인 레시아를 쓰다듬으며 새벽을 보내는 게, 하얀 올빼미인 시나를 옆에 두고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제는 기억에서 독처럼 남아 퍼지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작별인사도 못 건넸구나.

적어도 몇 마디 나눴으면 좋았을 텐데.

 

천천히 눈을 감고 조용히 정리를 하자. 내일 아침에 밖에 나가면 기다리는 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 그런데 어디서 재료를 사야 하지? 밥은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현실적인 생각이 먼저인가?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 것이 맞는 표현인가 보네.”

 

눈을 떴다.

시야는 이미 햇빛이 들쳐진 아침. 오랫동안 생각했다고 했는데 설마 아침이 올 줄은 몰랐다. 정기적으로 명상처럼 빠지는 것도 아니고, 눈을 깜빡 하는 사이에 모든 것이 지나갔다. 아무래도 내 의지를 받들어 지금 이 순간은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기적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그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 볼...”

 

생각해보니 나는 깨어났어도 리제로트는 아직까지 자고 있는 시간대. 멍하니 앉아있기도 뭐해서 아침을 만들러 나아갔다.

 

그나마 암흑물질이나 형광물질 같은 건 먹지 않으니 다행인가?”

 

그렇다고 해도 루시피나의 요리는 먹고 싶었다.

 

모든 걸 버리고 떠나는 건 후회만 남는 일이구나. 어쩔 수 없지.”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겠지?”

 

세린은 가시가 돋친 말을 여김 없이 뿌렸다. 거칠게 마음을 파고드는 말은 나를 더 강인하게 해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약해진다는 말은 맞지만, 너는 꽤 신난 거 같다? 혹시 잡화점 멤버가 없어지고 나서 나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거야?”

 

아니. 진정한 파트너에 대해 알려주려고 했지.”

 

그러니까 왜 이 안에서 내가 여성체를 지니고 있어야 하냐고! 규칙 바꾸는 걸 수락하기만 해도 나는 남자인 모습으로 자유롭게 살았을 거 아니냐!”

 

사실 카린이었을 때가 보기 더 좋거든. 쓸 때 없이 위화감이 들지도 않고.”

 

쓸 때 없이 위화감이 드는 이유가 뭔데? 반신이라서?”

 

카일이라서?”

 

넌 진짜 타이타닉이 붕괴될 때 구출되지 마라.”

 

아무래도 자신이 나올 타이밍이라던가, 사실 이전에 레인처럼 세린과 같이 붙어 다니는 모습에 질투가 난 것일지도 모르지만...어쨌든 리제로트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침밥은 완성이 되어갔다. 얼마 없는 재료로 토스트와 에그 스크램블이 끝이지만...

 

세린.”

 

카린과 비슷한 외형을 지닌 세린은 내 옆에서 ?”라고 대답을 했다.

 

너도 먹는 거야.”

 

난 잡화점의 중추인격일 뿐이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

 

그러니까 먹어. 어차피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주제에...”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내 앞에 앉는 세린. 거울 속의 내 자신을 보는 듯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수려하면서도 차분한 외모와 신비로운 분위기. 날씬한 몸과 고풍스러운 옷의 조화가 주변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토스트에 버터를 발라 한 입에 무는 모습은, 예를 갖춘 귀족의 영애와 같다고나 할까?

 

쉽게 풀어서 말하면 고작 토스트 하나 먹는 주제에 매우 고상하...

 

아침을 먹는 다면 그런 쓸 때 없는 독백은 그만두고 어서 먹기나 하시지? 고풍스러운 카린 양?”

 

시끄러워.”

 

결국 고풍스러운 태그까지 붙어가며 아침식사는 이어갔다. 여전히 리제로트는 꿈나라에 빠지고 있는 동안, 잡화점 밖에는 함성소리와 칼부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프리트론 왕국은 파이론을 되찾으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파이론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추격하는 중인지.

 

, 그건 중요하지 않나?

 

하아암~ 어라? 카린 씨? 밖이 너무 소란스러운데요? 조용히 해달라고 하면 안 되요?”

 

왜 일어난 거야? 영원히 잤으면 더 좋았을 텐데.”

 

키스로 깨우시는 거에요?”

 

월터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도대체 왜 죽은 사람이 키스를 하면 깨어난다고 생각하는 거야?”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확인된 치료법이잖아요.”

 

정말 숲으로 버려버린다.”

 

더 이상 찾지 못하도록 깊게 봉인해버리겠어. 나의 결의가 마음속으로 다져지는 순간 사람의 비명소리가 찢어지듯 들려왔다.

 

아아아악!”

 

밖에 무슨 일이 있나요?”

 

누군가가 몬스터에게 쫓기고 있는 모양이야. 나야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자세한 상황은...”

 

지금 도와주는 게 도리잖아요!”

 

도리?

 

그 도리 하나로 모든 걸 망치고 싶다면 네가 직접 나가서 구해보던가? 자세한 상황을 몰라서 멋대로 끼어들다가 죽어버린 녀석도 많이 봤어. 잡화점 멤버들은 정보능력이 좋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 너는 생존에 있어선 아무것도 몰라. 머나먼 미래...아니, 레이베리아가 만들었던 그 공간은 치안과 안전이 확보된 공간이었으니 당연하다고 해도! 아냐...아니지. 심지어 그런 공간마저도 도리 하나로 인생이 망하는데, 그런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이 세상은 지금 살아남기 위해 얼마든지 인간을 버릴 수 있는 시공간이다. 심지어 남의 눈에는 짐승만도 못한다고 한들, 자신의 가족에겐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먹여 살리는 가장으로 보이는 모순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그런 혼돈의 세계가 바로 지금 이곳이다.

 

애초에 너처럼 예쁜 아이를 납치해서 인형으로 만드는 녀석이 도리라는 단어를 꺼내지 마. 내가 생각했을 땐 차라리 저것들이 너보단 더 나아.”

 

리제로트는 고개를 홱 돌리고 분한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그 이후로 잡화점엔 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리제로트도 저지른 죄가 있지만 마음을 고치고 갱생한다고 해서 저지른 업보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그나저나.

밖에 상황이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고 정보수집을 해야 하니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삐쳐있으니 대답은 안 할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다녀오도록 하지. 넌 밖으로 나가지 마. 밖은 내 생각보다 더 위험하니까.”

 

그래도 탈출할 수 있으니 세린에게 문을 굳게 닫아놓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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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의 리셋


이제 몬헌월드 해야지...

 

594

 

 

 

자신이 존재함에 있어서 꼭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 행성에서 자신의 가치와 살아있었다는 발자취를 남기는 걸까? 아니,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존재에 대한 가치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존재를 자신만의 각본으로 적어 넣어 최후를 맞이하게 하고, 또 다른 이들의 삶에 개입하여 수정하고 돌려놓는다.

 

그 각본만 빼면 너는 대체 뭐가 되냐는 거야. 레이베리아.”

 

아무런 말도 없던 여신은 그대로 나를 바라본다. 저 표정에서 무슨 정답을 찾아야 할까? 아니, 꼭 정답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정답을 찾아도 사탕을 준 선생님은 없다.

 

그렇다면 잡화점의 주인. 너는 지금 무엇이 될 수 있지?”

 

나는 잡화점의 주인이지.”

 

아니. 너는 신도 될 수 있지. 하지만 굳이 인간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뭐지?”

 

그야 내 사고방식은 인간이니까. 틀을 깨부수는 건 새로운 경지에나 올라갈 때의 이야기고, 아무리 생각해도 신이든 여신이든 인간이든 마족이든 모든 생명체에는 딱 한가지 공통점이 있어. 그게 뭔 줄 알아?”

 

그건 레이베리아의 각본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너는 진실을 꿰뚫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든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이 살짝 짧았어. 너는 진실을 꿰뚫어버렸기 때문에 그걸 왜곡할 수 있는 거야. 꿰뚫고 비틀기만 해도 상처는 더 커지고 심해지지. 하지만 어느 누구도 너의 각본을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고 있어. 당장 자신의 운명이 너의 손에 달렸는데도 말이야.”

 

심지어 레이베리아를 창조한 창조주마저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스스로 모순된 세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야.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체 파멸을 위해서 모든 걸 망치고 있는 거라고. 물론 그 원인이 각본에 쓰여지지 않는 나겠지.”

 

어깨를 으슥이며 내 말을 마쳤다. 레이베리아가 진정으로 사용할 줄 아는 힘은 진실을 보고 그걸 바꾸는 것. 하지만 자신을 직접 창조한 창조주에겐 먹히지 않아, 다른 자들을 이용해 봉인하거나 쫓아냈다고 했지만, 내 경우에는 3개의 에너지를 합치기도 전에, 각본에 쓰여지지 않았다.

 

지금 내 생각으로 이 일이 가능했던 이유...

내 생각을 말하기 위해 입은 다시 움직였다.

 

꽤 그럴 싸한 생각인데. 머나먼 미래를 보고 너에게 대항하기 위해 나를 누군가가 창조해냈어. 그것도 원래 없어야 하는 인물이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수를 만들어내는 그 무언가...세상에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을 많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추측을 말해보자면.”

 

그리고 모두의 기대 속에서 한 박자 쉬었다.

뜸을 들이며 주변의 반응을 보고 다시 내뱉었다.

 

아니. 그리 궁금하지 않으면 듣기 싫다고 하지.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내 옆에 있던 리제로트가 치켜 뜬 눈으로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자신을 잊고 레이베리아와 상대를 하기 때문에 지루해진 것은 아닐까?

 

지금 레이베리아가 저를 이용해서 당신을 죽일 수 있다고 하잖아요! 지금 제가 당장 죽게 생겼는데 이곳까지 와서 그런 바보 같은 헛소리를 한 땀 한 땀 들으라는 건가요?”

 

내가 말하는 게 뜨개질인 줄 알아? 하긴, 내가 생각한 추측으로는 구멍이 많을 거 같으니, 차라리 말을 하지 않았던 게 좋았을 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내 생각으론 너는 각본에 죽을 상이 아냐. 관상이 그리 말해주더라고?”

 

사람의 얼굴만 보고 어찌 그리 판단해요? 당신 바보에요?”

 

바보라니! 나처럼 평범한 낙제생이 어디 있다고!”

 

그게 바보잖아요! 이 바보야!”

 

적을 앞에 두고 만담을 펼치니 기분이 묘하지만...

 

아무튼, 내 존재의의는 결과적으로 널 막는 거야. 그러기 위해 잡화점의 주인이 된 거고. 원래 이 시간대에 있어야 하는 레이베리아가 없다는 걸 보면, 다른 시간대로 이동해서 진실을 마주하고 있겠구나. 뭐야. 따지고 보면 진실을 마주해도 인정할 수 없어서 이런 바보 같은 일을 만들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대야 말로 레이베리아의 최후인가.

지금 이 공간이야 말로 레이베리아의 묘비가 되는 셈이잖아?

추측이지만.

 

굉장하네. 모든 것을 이용해서 날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를 했어. 마왕부터 시작해서 드래곤, 검은 달의 여왕, 최강의 여기사 등. 시도 때도 없이 내 주변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제서야 납득이 가기 시작해. 맨 처음에는 그들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날 죽이려고 했던 거야.”

 

아리엘의 경우도 그렇고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날 죽이기 위한 계획이었다.

 

다만, 예상하지도 못한 방해와 변수 때문에 실패를 한 거지. 그게 어떻게 일어났는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알지 못하는 내 입장에서도 아리송한 일이다. 사실 초창기에 레시아를 잡화점에서 소환할 당시. 나는 세상이 완벽하게 멸망한 줄 알았지만, 이는 과거로부터 내 영향을 받은 레시아가 성장해 마왕이 되었고, 천계와 휴전을 하면서 평화로운 세계를 이어 나아갔다.

 

만일 내가 없었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각본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군. 아니면...이것도 창조주가 계획한 일인가?”

 

다른 곳에서도 이게 모두 창조주의 계획이라면서, 공룡화석 파묻고 자신을 믿는지 시험하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아니...이건 다른 이야기잖아.

 

결과적으로...

 

창조주 또한 네가 그럴 거라 생각하고 날 만들어냈는지. 아니면 다른 요인으로 내가 창조된 건지 잘 모르겠네. 가장 확실한 건 내가 살아있는 동안, 너의 방해만 되는 존재란 거지. 게다가 리제로트에게 어떤 각본을 썼는지 몰라도, 이미 그 각본은 유효기간이 지났잖아? 사실 리제로트의 최후를 각본에 쓴다고 한들, 그 내용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해.”

 

모순은 이미 일어났어. 각본가. 내 존재 자체야 말로 모순이야.”

 

쐐기를 꽂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니 내 할말만 무작정 하고 있는데, 어마어마한 분위기가 대기를 짓눌렀다.

 

웃기지마...웃기지마!”

 

날카로운 비명이 모든 공간을 지배했다.

 

쇼는 아직이야! 각본은 계속 되어야 한다! 잡화점 주인이 나를 가로막는 방해꾼이라면!”

 

잠깐만? 그 거대한 에너지덩어리는 또 뭐야?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도 에너지는 존재했다. 창조주마저 쫓아냈던 레이베리아의 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에도 항상 강인할까?

 

모든 걸 걸고 존재자체를 소멸시켜주겠어!”

 

. 그 정도면 확실하게 위험하네.”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고요! 이 세계 자체를 지워버릴 것만 같잖아요! 왜 그렇게 태연하세요!”

 

확실히 아직까지 인간적인 상식을 지닌 리제로트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다면

 

그러네. 태연하게 있으면 안 되겠네. 지금 여기서 사라진다면 네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이게 시간대로 가고 있는 게 맞을까?”

 

나로 인해 제대로 이어져야 할 미래가 서서히 끊어지고 붕괴한다면...

 

레이베리아의 무덤이긴 하지만, 내가 직접 죽인다면 미래는 보존되겠군. 그렇지?”

 

나는 엘티노스에게 받은 붉은 버튼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거대한 빛의 구체가 조금이라도 땅에 닿으면 모든 걸 소멸할 기세로 타올랐으나, 지금은 그 공간만 사라진 체 무산이 되어버렸다.

 

그럼 이곳의 레이베리아의 힘을 모두 제거하고 살려놓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뭐라고요?”

뭣이?”

 

단순한 질문이잖아. 왜 오물을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싸늘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만회를 할까? 애초에 이런 일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이 존재하지 않는 걸까?

 

왜 그런진 굳이 이유를 묻지 않겠지만, 그런 식으로 날 바라보는 건 그만두지 않을래? 단순한 질문을 이상한 망상력을 사용해서 기묘한 이야기를 써 내리지 말고.”

 

당신은 정말 변태야...”

 

뭘 생각했는지 대충 예상은 가지만 난 네가 상상한 그런 사람이 아냐. 이곳에 버리고 가기 전에 눈빛부터 고쳐줘...”

 

사람을 죽일 눈빛이 많지만 정신적으로 참살해버리는 저런 눈빛...

어린애가 얼마나 수라장을 겪었길래 저런 눈빛까지...아니, 나 때문에 수라장을 겪고 있었으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구나.

 

불안전 변태는 완전 변태든 그런 단어는 곤충에게 맡겨버리고, 레이베리아. 한 가지 협상을 하도록 하지.”

 

같은 미래가 반복되는 걸 막기 위함인가? 하지만 거절한다.”

 

글쎄. 아까와도 말했지만 나 자체가 모순이라...그 거절은 거절할게. 아니면 힘으로 막아보던가?”

 

내 말 한마디에 레이베리아는 사라졌다.

그리고.

 

죽어!”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

딱히 뭐라 설명할 것도 없는 거대한 하얀 구체.

 

그렇게 질 낮은 에너지 덩어리로 죽으라고 해도 쉽게 죽지도 않아. 히드라!”

 

왼팔에 감겨있던 사슬들이 검은 빛을 띠며 서서히 거대해졌다.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9머리의 괴수. 모든 걸 집어삼키는 자는 세상을 향해 침을 흘린다. 거대한 입이 벌어져 레이베리아가 쏘아 올린 에너지를 먹어 치우고 더 성장했다.

 

잡화점의 주인...이런 맛없는 걸 먹여놓고 협력을 하라니?”

 

맛없는 것치곤 너무 상큼하게 먹는데?”

 

농담을 주고 받아도 언제나 흐름을 끊는 건 리제로트의 말 한마디.

 

장난치지 말고 제발 제대로 싸우실래요!”

 

제대로 싸우면 분량이 안 나오는데...

, 별로 상관 없나?

 

-샤아악!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빛이 내 주변을 버터처럼 잘라냈다. 땅속에 파묻는 것도 모자라, 이 행성의 내핵까지 파묻을 기세로 사라졌고,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용암은 튀어나와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행성의 핏물이 이곳 저곳에서 튀어나왔으나, 오히려 부동자세로 오른손을 펴 입을 열었다.

 

황혼!<Dusk>”

 

-파앙!

 

하얀 실선이 레이베리아의 몸을 꿰뚫었으나, 잠깐만의 경직이 있을 뿐 곧이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다시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면역이 된 건가?

 

제길.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에너지인가. 방금 전과는 차원이 다르군...”

 

그럼 못 먹는 거냐?”

 

아니. 빛으로 이루어진 건 껄끄러울 뿐. 다만 먹기엔 좀 거부감이 있지. 마치 가지 볶음을 처음 먹는 듯한 그런 기분 말이야.”

 

어째서 예시가 구체적이냐?  그 미묘한 식감에 대해선 나도 동의를 하지만...”

 

세상을 집어삼키는 녀석이 그 세상의 극히 일부인 채소를 껄끄러워 한단 말이야? 날로 갈수록 이 녀석도 편식이 늘어가는구나?

 

너의 힘은 창조주와 같은 것! 하지만 나는 창조주를 이미 뛰어 넘었다! 그런 나를 막을 수 있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아!”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레이베리아의 눈을 당당히 마주하며 나는 입을 연다.

 

그래? 마법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확실히 인간이 일으키는 기적은 마법이라고 하지. 그렇다면 그 마법은 일으킬 수 있는 위대한 기적 중 하나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너를 나락으로 몰아넣을 위대한 기적을 보여줄게. 히드라! 내뱉어라!”

 

나의 말에 맞춰 지금까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먹어 치운 에너지들을 거대한 검은 광선으로 내뱉었다. 리제로트와 월터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묵묵히 지켜보고 있지만, 그래. 이게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기괴한 싸움방식이긴 하지.

 

네가 황혼<Dusk>마저 먹히지 않으면 이걸 써야지?”

 

본래 창조의 에너지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지만 인간의 틀을 넘어설 수 없는 나에겐, 간편한 옷이나 무기를 만드는 제작마법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틀을 벗어나 우주의 이치를 알고, 모든 걸 통달할 수 있게 된다면? 지금은 나야 말로 최악의 신이 되리라 생각한다.

 

극야!<Polar Night>”

 

모든 것을 다시 어둠으로 바꿨다.

말 그대로 더 이상 빛이 없는 장소.

모든 장소 중에서 가장 고독하고 추운 곳이다.

 

...뭐야? 이건? 방금 전에 걸어왔던 그 터널인가?”

 

아니. 여긴 좀 달라. 이곳은 내가 추방하고 싶은 자들을 추방하기 위해 만든 공간. 각본가는 이곳에서 퇴장한다.”

 

리제로트에게 설명하면서 내 손을 슬쩍 보았다. 겉보기엔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일까? , 그건 둘째치고...

 

뭐야. 이 공간은? 어째서 또 다른 내가 잠들어 있는 거지? 방금 전에 미래로 갔던 마저?”

 

이번 기적은 월식의 힘을 빌렸어. 솔직히 나 혼자서 이런 바보 같은 공간은 만들지 못하거든. 그리고 솔직히 너만 불러오려고 했으나, 아니나 다를까...월식의 힘이 또 다른 차원까지 영향 받은 모양이네.”

 

당황하는 레이베리아와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레이베리아

 

네가 가장 미래에서 왔으니까. 너만 깨어있는 거야. 시공간의 규칙을 부수고 돌아다니는 불멸자에겐 가장 잘 어울리는 벌이지.”

 

! 그렇게 따지면 너라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아니, 적어도 리제로트만큼은...”

 

오해할 여지가 있으니 아직까지 질질 붙잡고 있던 레이베리아에게 말했다.

 

아니. 그건 좀 다르지. 첫째로 나는 모순덩어리에 불과해. 그리고 둘째는 리제로트는 아직 잡화점의 의뢰인이야. 의뢰인이 자신의 결과에 만족하면 의뢰는 끝나지만, 의뢰인으로 남아있을 때까진 잡화점에서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긴 한다고? 그리고 셋째로...잡화점은 나보다 더 강하거든.”

 

-콰앙!

 

결국 인간을 벗어났구나. 이래서 골치덩어리는 잡화점의 주인일 자격이 없다니까?”

 

흔히 카린의 모습처럼 코발트 블루의 긴 머리를 한 소녀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잡화점 안에서 나왔다.

 

그래서 다급하게 잡화점의 규칙을 바꾼 거 아냐. 내가 잡화점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슬슬 가자. 너 때문에 일이 너무 복잡하게 되어버렸어. 신경 쓰지 않고 되돌아가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새침한 눈으로 보다니. 츤데레같잖아.”

 

네가 츤데레처럼 생겼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지.”

 

무슨 농담이 그러냐...

내가 어딜 봐서 츤데레라고?

 

, 잠깐 기다려!”

 

한 때 여신이였던 존재는 내 소매를 붙잡았다. 언제 다가와서 붙잡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생각을 좀 하면 지금도 무서운 여신이잖아?

 

이대로 날 두고 갈 생각은 아니겠지? 모든 시공간에 있는 각본가를 없애다니? 지금 이렇게 돌아가면 너의 평상시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맞이하게 된다고! 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잡화점 멤버들을 그저 나 하나 때문에 버릴 셈이야?”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거 같으니 말해주지.”

 

리제로트와 월터를 먼저 잡화점에 데려가라고 세린에게 눈치를 추고, 레이베리아의 눈높이를 마주하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네가 조작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야. 그녀들이 날 좋아하도록 만들어서 나는 수많은 죽음을 뛰어넘었지. 모든 것에 대해 모순으로 비틀며 살아갔으니까. 각본은 어디서부터 시작한 건지 몰라도, 어린 레시아가 나를 만났던 것부터. 너의 각본은 오랫동안 진행되었어. 그러니...이제 너의 각본이 없는 진짜 세계를 내 눈으로 볼 예정이야. 그러니 너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쉬도록 해. 그 누구도 너의 잠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아냐...절대 안 돼! 지금의 나라면 몰라도! 유랑극단으로 타락한 나라면 몰라도! 적어도! 한 때 위대한 창조주를 따라 정의감으로 무장한 각본가는 풀어줘! 그러지 않으면 세상은 완전하게 엉망이 될 거라고!”

 

나는 천천히 일어나면서 붙잡힌 소매를 거칠게 옆으로 털었다. 힘에 끌려가듯 레이베리아의 몸은 휘청거리며 옆으로 돌아갔고 확실한 거절을 위해 짧게 대답했다.

 

거절하지.”

 

안 돼! 돌아와! 제발 이 아이만큼은 데려가 달란 말이야!!!”

 

잠들어있는 레이베리아 중. 한 명을 들고 힘겹게 몸을 끌어보지만, 내가 잡화점에 도달해서 문을 닫는 속도가 더 빨랐다. 검은 나무로 칠해져 있는 나무바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곧 이어 잡화점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이베리아를 극야<Polar Night>로 내던져버린 이후...

 

주변에 방이 완전히 다 사라졌네.”

 

이변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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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패러독스가 시작 됩...<-파악!

 

593

 

 

 

이 시공간을 의심했던 순간은 언제부터일까? 그건 후손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후손이 어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300년이 지난 이후 나의 자손이 어찌 생겼는지. 그리고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유전적인 경우를 뛰어넘어 300년이 지나도 내가 아는 사람은 대부분 살아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과거로 돌아갔다면, 300년 이전에도 레시아의 행방이나 다른 이들의 흔적을 찾았어야 했지만, ‘일기장이라는 수식어 하나만으로 이곳의 시공간이 안전하게 지나왔다고 볼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레인이 일기장을 보고 있다는 시점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다.

 

분명 레인은 일기장에 적혀있는 내용대로 수행할 것이고, 나는 그 내용을 모르고 그 일기장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되는 일. 결과적으로 그 일기장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레인은 리제로트를 죽이는 걸 포기했다.

 

후손과 내 일기장이라는 타이틀로 이곳에 오랫동안 발을 묶거나, 정해진 미래대로 나조차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 도달할 때까지라...과연, 내 사고방식은 역시 인간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 혹은 다시 돌아올 거란 것도.”

 

그럼. 저란 존재도 가짜인가요?”

 

아니. 그건 아냐. 이 시공간 자체를 창조하고 생명을 만들었으니까, 가짜는 아니지만 이곳에 날아든 잡화점 멤버를 제외하곤 생사여부는 레이베리아에게 달려있다는 거지. 그걸 따져봤을 때, 레인이 살고 있는 잡화점에 일기장은...단순히 레이베리아의 각본에 불과하다는 소리가 되는 거고, 이 여신은 결국 방구석에서 내가 스스로 자멸할 때까지 볼 생각만 했다는 거야.”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군. 언제까지 자신의 각본에 맞아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걸까?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창조된 시점부턴 이미 가짜는 아닌데, 과거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 너를 증인으로 사용할 수 있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과거로 날아갈 거야.”

 

좋군요. 과거로 간다니. 제 기억 속에 있는 과거가 맞는지, 아니면 당신의 추측대로 이것이 전부 조작된 것인지 확인해보겠어요.”

 

동의는 얻었다.

그러면...

 

히드라. 힘을 좀 나눠줘야겠다.”

 

내 왼팔에 잠들어있는 사슬에게 외쳤다.

 

[과거로 가기 위해 나의 힘이 필요하다는 건가?]

 

별거 아냐. 과거로 가기 위해선 네가 좀 같이 움직여야 하거든.”

 

생각을 해보면 시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게 있지만, 어째서인지 내가 스스로 사용하지 못하고, 남에게 꼭 힘을 빌려서 가야 하는 슬픔. 나중에 스스로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봐야겠다.

 

다양한 시공간과 평행차원에 퍼져있어도 하나인 존재잖아. 월식이란 건 그런 거 아냐?”

 

[그렇군. 종족의 특성을 이용해 이 차원의 과거로 갈 생각인가?]

 

맞아. 제대로 이해했으면 빨리 진행하자고. 방해꾼이 찾아오면 내일 가야 하니까. 귀찮은 일은 오늘 안에 끝내놓고 잡화점 운영을 해야, 다음날에도 일찍 일어날 수 있어.”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기엔 좀 무리가 있어도, 마음의 평화라는 건 별도의 문제니까. 사슬이 자기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원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9개의 쇠사슬 끝에는 단검이 허공에 박히기 시작했다. 박혀있는 장소에 마법진이 나타나면 꽤나 멋있는 연출일 것 같지만, 블랙홀처럼 검은 원형의 공간만 나타날 뿐.

 

. 과거로 가자. 어찌 되어먹었는지 확인하자고?”

 

자연스럽게 리제로트를 인도하며 발을 앞으로 향했다. 이러니까 이상한 나라로 끌어들이는 토끼처럼 느껴지는데? 아니, 그래도 하트 여왕은 안 나오니까 상관 없나? 어두운 공간은 얼마든지 걸을 수 있고, 우리의 목적지가 나올 때까진 무조건 걸어가야 한다. 뛰어가든 날아가든 상관은 없는데, 언제까지 가야 할지도 모르는 그 길을 뛰고 날다간 쉽게 지쳐버리니까.

 

그리고...

 

, 제발...좀 천천히 걸어요...”

 

월터에게 업어달라고 하던가? 얼마나 체력이 안 좋으면 고작 15분정도 걸었는데 지치는 거야?”

 

당신은 3보 이상 자동차 몰라요?”

 

너의 장래가 심히 걱정된다.”

 

세상에 리제로트가 먼저 만담을 열다니. 심리상태를 꿰뚫는 건 아니지만, 나와 있으면서 경계를 하는 모습은 많이 풀어졌다. 물론 월터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면도날처럼 날카롭기 시작했지만...

 

그런데 이 공간은 뭐죠? 위험하지 않나요?”

 

당연히 위험하지. 날 놓치고 다른 길로 가면 시공간적으로 미아가 되어버려서, 찾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니까.”

 

당신은 어떻게 이 길을 잘 알고 있는데요?”

 

내 왼팔에는 이 공간을 열어준 존재가 있어. 그 존재를 믿고 따라가고 있는 거야.”

 

[그래도 이 몸이 만약 그대를 다른 길에 방황하게 만드는 함정을 팠다면?]

 

[만약 그러면 넌 레시아와 시나에게 맞아 죽는 일 밖에 없어.]

 

대부분 주인공들은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매우 강하거나 강해지는데, 나는 왜 아무리 강해져도 주변에서 보살핌을 받는 걸까? 정형적인 클리셰 중에 여주인공이 맨 처음에 남주인공을 지켜주다가, 남주인공이 각성하고 강해지면서 거의 마지막쯤에는 여주인공을 지켜주지 않는가?

 

근데 나는 아무리 강해져도 아직까지 초반부마냥, 레시아와 시나 이외에도 잡화점 멤버들에게 지켜지고 있다. 맨 초기에는 혼자 구르면 거의 반은 죽어서 왔어도,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오히려 잡화점 멤버들에게 반정도 죽는 일이 더 많다.

 

그 바보 같은 백장미만 아니었어도...

 

과거로 가서 충격이나 받지 말라고. 처음 보는 과거에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서슴없이 하는 바보 같은 녀석이 아니길 빌어야지.”

 

과거에 가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뇨?”

 

너는 그 영화도 안 본 거냐? 자동차 타고 과거로 갔다가 본인이 사라질 뻔했잖아. 다행히 해결책을 찾고 겨우겨우 미래로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그 영화는 마지막에 미래가 바뀌었잖아요?”

 

솔직히 그 영화가 지금 시대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째서 이렇게 잘 아는지 금시초문이다. 본적도 없는 지식이 마음대로 흘러 들어오는 일은 이렇듯 좋은 일은 아니다. 아무튼...

 

슬슬 다 왔는데.”

 

기나긴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고 처음 본 광경은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진짜냐? 이 상황?”

 

모든 땅이 전부 메말라있었다. 그 누구도 없고 생명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을 무렵. 언제부터 이 일이 계속 진행되어왔을까?

 

내가 너무 과거로 돌아와서 이 땅이 이렇게 된 건가?”

 

이 땅에 있는 모든 존재는 창조가 되었는지, 적합한 환경에 의해 진화를 한 것인지에 대해, 이 세계는 창조와 진화를 반반 섞어버린 닭마냥, 물을 만들고 산소를 만들고, 태양빛에 보호하는 오존층대신 다른 보호막을 씌웠다.

 

레이베리아는 없나 보네.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망해버린 세상은 이런 거야. 그보다 이곳 시간대가 언제야? 내가 왜 이런 꼬맹이와 같이 어린 왕자를 찍어야 하는데?”

 

제가 꼬맹이가 아니라 당신이 늙은 거에요. 어린 왕자는 또 뭐에요? 당신이 왕자라고 말할 정도로 젊기라도 해요?”

 

아직 젊어! 아직 20대밖에 안 됐어!”

 

거기에 300은 추가로 붙여야 하잖아요!”

 

“300을 왜 붙여! 스파르타냐!”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무렵. 이곳의 현재시간을 알아보기로 했다. 레시아와 시나가 있으면 더 정확한 측정이 가능했겠지만, 지금의 내 능력에도 대략적인 결과값을 찾아낼 수 있으니, 잠깐만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뜨자. 내 시야 위에 13자리 정도 숫자가 나타났다.

 

내가 아까 있던 곳과 상대적인 숫자를 알려줄래...”

 

내 혼잣말이라도 들었는지 순식간에 줄어드는 숫자. 최종적으로 줄어든 숫자를 보며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게 5년전의 파이론이라고?”

 

“5년전?”

 

모든 이들이 5년전이 모두 사라졌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데? , 무슨 일이 있는지 그리 궁금하지 않지만, 확실히 재창세가 되기 전에 모두가 사라졌다.

 

내가 넘어가버린 세계는 결국 5년만에 만들어진 가짜란 소리다. 아니, 가짜 세계는 아니지만, 나를 속이려고 만든 세계니 내 입장에선 가짜.

 

그래서 이 세계는 왜 다시 만드는 거지? 너의 각본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무조건 다시 부수고 만드는 건가?”

 

허공에다 외치는 듯한 내 소리는 방향을 정확하게 찾아 날아갔다.

 

레이베리아!”

 

결국 잡화점의 주인은 이곳까지 찾아온 건가?”

 

결국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 보니 내가 지금쯤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나 보네?”

 

4쌍의 날개는 대체 뭘 의미하는지 이제 기억이 잊을 정도, 여신이라는 태그가 붙으면 보통 인간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압도하지만, 그건 일반인이나 신앙심이 가득한 사람의 경우다.

 

모든 건 멸망했어. 이런 미래는 원하지 않았지. 각본에 쓰여지지 않는 멸망의 시. 잡화점의 주인. 그건 모두 당신 때문이야.”

 

나 때문인지 아닌진 잘 모르겠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경우는 머나먼 미래의 일이니까.”

 

아무리 봐도 295년 이후의 일이잖아.

그렇지 않나?

 

잡화점의 주인. 아니...카일. 이 각본에는 당신이 기록되어있지 않아.”

 

그보다 각본에 하나하나 적을 생각부터 하는데?”

 

우주의 별 하나마저 모두 끝이 존재하지. 그 끝을 막기 위해서라도 모든 이들을 각본에 적을 필요가 있어.”

 

그렇다고 쳐도, 재창세를 하기 위해 모조리 갈아 없는 건 문제가 있는데? 아니, 애초에 모조리 갈아 없애는 것에 문제 유무는 따지지 않도록 할 게. 하지만, 가짜 일기장을 레인의 잡화점까지 집어넣을 정도로 날 묶어놓을 이유가 뭐야? 너 또한 300년 이후의 미래보다 더 머나먼 미래에서 온 레이베리아잖아.”

 

지금 이 시간대의 각본가가 아닌, 다른 시간대의 각본가.

 

맞아. 나는 다른 시간대의 각본가. 유랑극단 최후의 단원이자 단장. 다른 미래에도 너 때문에 모든 것이 망해버렸지.”

 

꼭 내가 살아있으면 모든 게 망해버린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 같은데. 당연하게도 내가 살아있으면 너희들이 손해보고, 너희가 살아있다면 내가 손해를 봐. 하지만, 다른 존재들은 그런 거에 신경이나 쓸까?”

 

뭐라고?”

 

불멸자든 필멸자든 언젠가 끝이 있다고 해도, 전부 너의 각본대로 움직여서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얼마나 대단하든 차원에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기록할 수 없는 일이니까.”

 

격노하는 듯한 레이베리아에 투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지금 죽이면 미래가 바뀌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 같은데...글쎄? 불가능하지 않을까? 넌 나를 각본에 적을 수 없잖아?”

 

직접적으로 적을 수 없지만, 네가 데리고 온 그 계집을 이용하면 가능하지.”

 

가능하다고?”

 

생각을 해보니까 저 레이베리아는 상대적으로 미래에서 왔으니까, 리제로트의 최후에 대한 각본은 이미 적혀있겠지. 그러나 여기서 문제...

 

각본이 없다면 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거지?”

 

그 질문 하나가 모든 공기를 멈추는 듯했다.

아니, 애초에 이곳엔 공기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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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리벳팅을 했어요.

솔리드 리벳 죽이고 싶어요.


어째서 수동으로 쥐어 짜내야 하는 건가요...

내 손목...

 

592

 

 

 

싸움보단 말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다. 무의미한 폭력은 그리 좋지 않다. 당연하게도 나는 평화주의자이기에 평화롭게 해결하는 걸 좋아한다. 평화 최고. 혼돈은 멀리하고 평화를 가까이 하는 게 좋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평화고 뭐고 없구나.”

 

쓰러져 있는 레인을 바라보며 단검을 집어 넣었다.

 

카일 씨...왜 그렇게 강해요? 591에서 592로 넘어갔다고 느닷없이 제가 져있잖아요?”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가 남는 그런 기묘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만, 지금은 이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만 알아둬라. 그보다 일기에도 네가 지게 되어있는 거야? 아니면 지금 내가 일기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야?”

 

확신이 서지 않지만...

 

일기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기엔...

 

지금 일기의 가이드라인을 생각해보면 탈선의 수준이 아니에요. 이미 우주로 날아가서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고요.”

 

과거로 빨리 돌아가는 편이 좋다고 본다.

 

그래도 레인은 원망을 하거나 한숨을 짓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내가 이곳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레인의 성격상 오히려 일이 엉망으로 되었을 때 수습하는 걸 더 좋아하는 기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까. 내가 쓴 일기도 엉망진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이야기가 뜻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인가요?

 

좋은 일인지 아닌진 잘 모르겠네. 그래도 지금은 내가 결정한 것에 따라가야지. 그보다 아이리스는 다 완치가 되었다면서?”

 

카렌 씨는요?”

 

카렌? ...

그렇지. 어째서 카렌은 활동하지 않는 이유라고 하면...사춘기라고 해야 하나? 자립심이 너무 올라갔다고 해야 하나? 어느 순간 사라지고 나선 보이지 않은 게 흠이다. 돌아갈 장소가 또 있다는 건 나쁘지 않지만, 어차피 내 복제품과 비슷하기도 하고,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

 

일단 복수에 대한 건 진심이든 아니든 접어둬. 지금 이렇게 해도 별 다른 이득은 없어.”

 

이익중심으로 움직이는 건가요?”

 

아니. 평화중심이지.”

 

내 마음속의 1순위는 언제나 평화다. 그런데 현실은 평화가 왜...

자괴감이 든다.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평화를 위해서라니...

 

이미 미래는 뒤틀리기 시작했어. 그렇다고 리제로트가 죽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을 때, 오히려 리제로트가 안 죽을 수도 있는데, 내가 있으니까 죽거나 심하면 침을 흘리겠지.”

 

최소와 최대가 바뀌었지 않았나요?”

 

이 말버릇 레시아에게 전염된 건가. 빨리 고쳐야겠다. 리베리티아 고원의 특유한 바람은 300년이 지나도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이곳은 개발도중 청정구역이라고 지정한 모양이다. 사실 청정구역인지 다른 마법적인 요인으로 손을 대지 못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쾌하게 쓸고 지나가는 바람을 뒤로한 채, 뒤에서 차를 마시고 여유롭게 앉아있는 리제로트에게 돌아갔다.

 

너는 아까 내가 위험했을 때 도와주지도 않더라?”

 

해결사가 해야 하는 일을 의뢰인이 꼭 도와주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래도 협조나 도움은 줘야 할 거 아냐. 방금 전에 레인이 던졌던 마법공학 유탄을 다른 시공간으로 날려버리지 않았으면, 이 일대가 지금 다 사라졌을 거라고.”

 

그렇다고 해도 저는 시공간술사의 길을 걸은 기억도 없고, 애초에 마법사가 아니라 초능력자라서요.”

 

초능력자라고 해도 마나는 가지고 있으면 마법사의 길을 좀 가란 말이다.

 

뭐 어떻게든 위기는 넘겼으니 상관 없겠지.”

 

리제로트는 차를 놓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평소에는 푸른색의 컬러렌즈로 자신의 초능력을 봉인하지만, 어느 사이에 짙은 보라 빛의 눈으로 돌아와있었다.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는데. 저를 과거로 데려다 주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 보라 빛의 눈은 혹시라도 정신오염이 먹힐 거 같아서?”

 

.”

 

인간성이 어디로 간 거냐 넌...

 

여전히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가 없으니 기괴하네. , 그래도 너의 초능력은 강력한 최면술일 뿐이니까. 결국 망각의 샘물을 먹이지 않는 이상, 영구적으로 너의 인형이 안 되는 거잖아? 게다가 나는 이미 인외의 존재로 되어가는 중이라서, 명계에서 퍼 올리는 망각의 샘물이 아닌 이상 잘 듣지도 않을 걸?”

 

한 때, 내가 만약에 신이 된다면. 이 지상을 평화롭게 만든다거나 그런 건 없었고, 그냥 내 마음대로 세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을 해보면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평화롭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어쨌든 슬슬 이곳도 정리할 거니까 어서 돌아가기나 해. 라 캄베리의 영애는 자신의 일정은 내팽개치고 이렇게 농땡이 부려도 되는 거야?”

 

어차피 오늘 일정은 없는 걸요. 오늘 하루 디즈니에서 나오는 쥐나 보면서 편안한 오후를 보내고 싶기도 하고요. 거추장스러운 남자 둘이서 이리저리 치고 박고 싸우는 건 제가 보기엔 너무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서 문제네요.”

 

거기서 선정적이란 단어가 왜 나와?”

 

그렇게 폭력적인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잘도 봐온 주제에.

 

아이고...삭신이야...이럴 줄 알았으면 잡화점에 있는 물품을 가지고 오는 건데.”

 

그거 멸망의 지름길이니까 가져오지 말아줄래?”

 

레인의 섬뜩한 소리가 내 귀에 흘러가지 못하고 그대로 걸려서 위험을 경고했다. 안 그래도 마법공학 수류탄을 레인이 직접 던지는 바람에, 지도가 완전히 바뀔 뻔했지만, 지금은 우주 어딘가 터지면서 안전한 처리과정을 거쳤으리라 본다. 생각을 해보면 모든 위험한 것들은 우주 밖으로 내던지는 게 편리하지 않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쓰레기를 블랙홀에 내던지는 방법도 생각해봐야겠다.

물론 블랙홀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렸지만...

 

그러면 이제 슬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운명을 바꾼다는 건 모든 걸 바꾼다는 의미야.”

 

나는 주변이 황폐해진 리베리티아 고원으로부터 손을 뻗어 힘을 집중했다.

 

모든 걸 바꾼다는 건 재창세와 같지. 그걸 원하는 건 레이베리아도 그렇겠지만, 사실상 이 힘은 창조주와 거의 같다고 봐도 괜찮아. 레이베리아는 창조주의 근원 중 일부인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뿐이고,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서 재창세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 거지. 내 모든 힘을 뽑아서 빌려 쓰기 위함이기도 해.”

 

그러면 당신이 신이 된다면?”

 

아니. 나는 결국 반신이 한계야. 기껏해야 최대로 할 수 있는 게 엉망인 걸 고치거나, 이 세상에 있는 물품을 보고 이해해야 겨우 제작할 수 있는 정도지. 그 이외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마나로 나누는 귀찮은 작업까지 해야 하고.”

 

서서히 자연의 모습 그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리베리티아 고원을 바라보며, 리제로트는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런 유용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을 손쉽게 끝낼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그거야 아직 내가 잡화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지. 기본적으로 인간이었다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문제가 있고, 인간의 이해 범위 밖을 내가 어떻게 다 이해를 하겠어? 그건 신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야.”

 

지금 이렇게 수복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솔직히 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의 길을 어느 정도 걸어봤다면 가능한 마법이다. 이런 광범위한 공간을 모두 되돌리기 위해선 거대한 마나가 필요하긴 해도, 마나만 받쳐준다면 이런 일은 마법사라면 가능하단 소리지.

 

결국 내가 한 일이라고는 신의 영역에 발자국을 살짝 가져다 댔는데, 안 보이는 벽에 의해 선만 아주 살짝 밟은 상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만일 내가 신이 되었다면...”

 

이런 바보 같은 일은 그만두고 지루할 만큼 평화를 가지고 사는 건데.

 

아냐. 아무것도. 그러니까 결국 너의 의뢰를 해결하려면 모든 걸 다 바꿔야 해.”

 

모든 걸 다 바꾼다면?”

 

너의 과거로 가야지.”

 

나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는데, 그와 상반된 리제로트의 얼굴은 마치 썩은 달걀을 본 눈빛이었다. 아니 썩은 달걀을 봐도 지금 저 표정보단 더 좋겠지.

 

당신 정말 변태네요.”

 

변태라니. 내가 곤충도 아니고 탈피하지 않는다고?”

 

하아...저는 그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닐 텐데요!”

 

! 화났어! 무서워!

월터도 주먹을 들었어! 날 때리려고 하다니! 무서워!

 

그런데? 각본가의 각본을 찢자는 건요?”

 

. 그거? 너무 위험해서. 나란 사람은 또 온순하고 평화적이잖아?”

 

온순과 평화란 단어는 당신에게 절대로 안 어울려요. 그리고 어떻게 하루도 안 지났는데 다른 제안을 할 수 있죠? 그보다 제 과거로 가서 뭘 캐낼 생각이에요?”

 

과거로 가서 지금의 를 지울 거야.”

 

어마어마한 시간차를 뚫고 겨우 ?”라고 대답한 리제로트의 말. 절망이 담겨있는지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지 서서히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 어떤 사람에게 지금 당장 당신을 이 세상에서 없는 존재로 만들 겁니다.”라고 말하면, 누가 좋다고 ! !”라고 대답하겠는가?

 

자신의 모든 삶을 부정하겠다는 나의 말 한마디에 월터가 스스로 움직였다.

 

-슈아악!

 

어마어마한 발차기가 내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기 시작한 이후로, 마법방패<Magic Shield>를 전개해 막아내고 있는 동안, 날카로운 외침이 내 귀를 쑤셨다.

 

어째서요! 당신은 제 편이 아닌가요!”

 

당연히 너의 편이지. 너는 운명을 거부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상태가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안 들어?”

 

월터의 거대한 주먹이 마법방패를 뒤흔들었다.

 

애초에 모든 힘을 포기하라는 루니아 누나의 말도, 지금 모든 걸 버리면 우리가 보호해주겠다는 간접적인 메시지였어. 하지만 너는 거부를 했지. 내가 말했잖아? 너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눈에 띄는 거라고, 결국 레이베리아에게 찍힌 거고 각본에 쓰여진 거야.”

 

그리고...그 각본의 내용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각본이든 내 일기장마저 무시하고 다른 선택지를 골랐어. 그 뜻은 결국 이 시간대는 원래 없는 시간대나 마찬가지야!”

 

월터의 공격이 멈췄다.

크게 동요하고 있는 리제로트는 자신의 존재가 허황된 가짜라는 사실에, 그만 무릎을 꿇고 넋을 놓고야 말았다.

 

물론. 지금은 내 가설에 불과하지만, 너를 데리고 과거로 돌아가서 진실을 마주한다면, 도대체 어떤 개판이 벌어졌길래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고 증인이 될 수 있어. 유랑극단이 시간을 숨기고 공간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겨우겨우 해결했다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일기장마저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없거든. 그리고...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나는 슬슬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엘티노스는 자서전인 마냥 일기 같은 걸 잡화점에 남기고 있어도.

나는 단 한번도 내 일기장을 잡화점에 보관하고 있다는 소리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남이 보는 게 부끄러워서 내 전용 아공간에만 일기장을 넣고 다닌다고?”

 

그래. 처음부터 레인이 읽은 일기장은 거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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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계주는 급커브를 시전하였다!


 

591

 

 

새벽에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자장가를 불렀을 때, 레시아와 시나의 정신이 앞들과 뒷동산으로 출타하는 동안, 운명에 대한 고찰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생명은 태어나서 결국 죽는데. 그걸 자연의 섭리라고 보고 운명이라고 한다. 죽음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네크로멘서들은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는 것일까? 자신은 죽었는데 시체로 되살아나버린 경우에는, 그것 또한 그 시체의 운명인 것일까?

 

결론을 말하자면 운명 또한 무질서한 무언가를 질서 있게 보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따라서 운명이란 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면 운명은 없다. 그저 자신의 미래가 어찌 되는지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의뢰는...

 

그래서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죠?”

 

저 앞에 당돌하면서도 차분하게 입을 여는 소녀.

리제로트에게 받은 의뢰에 대해 정확한 내용으로 수정을 할 필요가 있다.

 

너를 보자고 한 이유야 의뢰 때문이지.”

 

그래요? 해결할 수 있나요?”

 

그리고 나는 잠깐 숨을 들이켜서 틈을 만들어냈다. 상대방이 가장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이끌어낼 짧은 시간. 그리고 나는 이야기한다.

 

아니. 해결할 수는 없어. 그 대신...”

 

정확한 내용을 수정한다는 건 이런 의미다.

 

너의 소망을 들어주지. 그거면 되지 않을까?”

 

뭐라고요?”

 

어처구니 없어서 한숨이 입 밖으로 출타하려는 모습이 눈에 보이고 있지만, 한숨을 쉬지 못하도록 빠르게 치고 나갔다.

 

네가 전에 말한 그 의뢰는 사실상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거든. 그저 이야기 책에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이지 않게 했다고 너는 말하지만, 운명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살아있는 것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건 그렇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모르는 나의 말에 리제로트는 째려보며 대답했다.

 

다만, 거기서 내가 죽어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것도 맞지?”

 

당신은 지금 살아있잖아요.”

 

아냐.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내 존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닐지도 몰라.”

 

?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여태 새벽부터 고찰한 내용을 단 한 문장으로 함축하기로 하자.

 

그 책에 내 이름이 적히지 않는 이유야, 원래 나는 이 평행차원에 없던 존재이기 때문이야.”

 

는 거짓말이고 사실 그 책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잡화점의 대마력이 방어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이곳에 존재하는데 무슨 소리에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시공간은 본래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지, 하지만 과거에도 각본가의 책에 적혀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면, 어처구니 없게도 내 존재는 이 세상으로부터 본래 없었던 거야. 그거 있잖아. 죽음의 기사 4명 중에 하나가 왠 이상한 차원에 떨어져서 영문도 모르고 악마와 싸우는 그런 이야기. 아마 내가 케이스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지.”

 

물론 이것도 거짓말이고...

 

그러니까. 난 이 차원의 사람이 아냐.”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세요! 그런 소리 하려고 절 이곳에 불러서 소망을 들어준다고 한 거에요?!”

 

당연하지. 생각을 해보니까 나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잖아?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진 못하지만, 말만 해. 뭐가 어떻게 되었든 소망 하나는 들어줄게. 그리고 나는 원래 있었던 장소로 되돌아간다.”

 

그 소망 하나가 분명.

리제로트가 원하는 의뢰내용이라고 생각했다.

 

뭐든지요?”

 

. 그렇다고 높은 수위의 기묘한 소원은 안 받아줘. 노블이니 뭐니 하는 그런 공간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19세 마크가 없다고?”

 

리제로트가 원하는 소망 하나를 들춰내는 것도 정말 어렵구나. 소녀의 마음이라는 건 이런 건가? 내가 잡화점 멤버의 장난으로 소녀가 되어본 적은 있긴 하지만, ...지금은 무슨 심상인지 까먹었네.

 

그럼...”

 

오랜 고민 끝에 말하는 건 아니지만, 리제로트의 입장에선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으리라 생각했다. 거대한 내적갈등에도 입을 연다는 그 자체가 결정했다는 소리니까...

 

전 죽기 싫어요. 그러니...살려주세요.”

 

과연.

운명에 벗어나고 싶다는 말은 결국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건가.

 

방법이야 많지. 대신 잃는 것도 많아.”

 

저런 소망을 듣고 절대로 공짜로 해줄 이유는 없다. 그래도 사람 하나가 살아나는 거니까 최대한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잃는 거라면?”

 

우선 루니아 누나의 말처럼 그 힘을 버려야겠지.”

 

제 초능력이요?”

 

. 물리적으로 하지 않아도 괜찮아. 단순하게 봉인하는 절차니까. 위급한 상황이나 죽기 직전에만 잠깐 발동하도록 만들 거야. 완전하게 빼앗지는 않아.”

 

선천적으로 발현된 초능력을 마법적으로 봉인한다는 그 자체는 개념이 달라서 불가능해 보이지만,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는 이 힘은 근본적으로 마나를 뛰어넘은 자원이다. 그러니 봉인마법과 이미지만 어떻게 해준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째서죠? 힘이 있어야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잠깐 생각을 하고 나는 한숨을 지었다.

 

애초에 힘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운명을 벗어나는 게 아냐. 오히려 힘이 있든 없든 운명은 존재하지. 아니, 난 딱히 운명론자가 아니니까 종착지라고 표현을 하자. 어쨌든 그 끝에 다다르는 원인 중에 하나는 힘이 없어서도 있지만, 너무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해. 힘이 있든 없든 눈에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면, 삼손도 대머리로 죽지 않았을 거야.”

 

“......”

 

그러니까. 넌 너무 많은 힘을 가지고 있어. 힘이라는 그건 어떤 것도 상징할 수 있지. 라 캄베리의 영애라는 타이틀도 그렇고, 유랑극단의 간부이기도 하고, 너의 초능력은 너무 강력해서 내 정신방어마저도 흔들어버릴 정도야. 게다가 아이리스를 건드려서 레인에게 죽을 위기까지 처했고, 레이베리아의 말을 듣지 않고 나를 살려주다가 놓친 이후로, 나와 이렇게 몰래 만나면서 레이베리아에게도 죽을 위기에 놓여졌다. 결국 각본가는 너의 죽음에 대한 각본을 썼을 테고, 너는 그걸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거지. 맞잖아?”

 

, 맞아요.”

 

각본가의 각본은 또 언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너의 각본을 적기 전에 내용을 본 거 같으니까. 지금 미래가 어찌 될지 몰라서 답답할 지경이네.”

 

내가 레이베리아라면 배신자에게 어떤 각본을 써서 비참하게 죽였을까?

나라면 깃털로 간지럼을 태워서 죽였을 거 같은데...

 

당신. 저질이군요.”

 

아니. 남의 독백을 읽고 그런 표정을 짓기 전에 사생활침해라는 거 몰라? 나는 뭐 상상의 자유도 없나? 자유도도 없는 GTO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고.”

 

“O가 아니라 A겠죠...아무튼 절 볼 때마다 그런 상상만 했어요? 변태.”

 

그런 상상만이라니. 이 상상은 지금 처음 하는 거고, 앞으로는 안 할 상상이란 말이야. 그리고 형벌 중에 간지럼은 예로부터 내려온 끔찍하고 잔인한 형벌 중 하나란 말이다. 염소가 네 발을 지속적으로 핥아본 적 없잖아?”

 

당신도 없잖아요.”

 

“......”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건 여전하군. 아무리 궤변을 늘어뜨려도 그 사이에 포인트만 집어서 공격을 하다니. 어린 나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냉철한 아이였다.

 

뭐 아무튼. 자세히 어떤 죽음을 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할 정도로 끔찍하고 잔인한 결말이 쓰여졌겠지. 아니면 지금 쓰고 있거나, 아니면 슬럼프가 와서 마감이 다가와도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았거나. 그러다가 담당자가 찾아와서 으름장을...아니, 이건 너무 갔구나.”

 

하아...이런 바보 같은 사람에게 내 미래가 걸렸다니...”

 

바보 같은 사람이라니 바보에게 실례군.”

 

바보에게 실례인가요...”

 

지쳤는지 태클도 밍밍하게 들어오는군. 즐거운 잡담은 이 정도로 끝내자. 어쨌든 바보에게 미안한 내 입은 다른 주제를 향해 나아갔다.

 

어쨌든, 그런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해. 예를 들어 죽는다는 진실에 결코 도달하지 않는다거나...”

 

그거 영원히 죽는 거라니까요?”

 

아니면, 진실을 덧씌우는 거지.”

 

그런 능력은 당신에게 있어요?”

 

그건 솔직히 말하자면 없는데...

 

꼭 그럴 필요까지 있나? 말했잖아.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고, 예를 들자면...그래, 각본가의 각본을 찢는다거나.”

 

분위기가 일그러졌다. 각본가의 각본을 찢는다는 방법을 상상이라도 했겠지만, 레이베리아의 힘이 막강해서 그럴 수는 없었겠지. 애초에 여신 중에서 가장 강력해진 레이베리아의 힘이 깃든 각본을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일 터.

 

그러니. 각본을 찢고 자유가 되면, 불안정한 운명 속에서 삶을 연장할 수 있다는 거야.”

 

그건...불가능해요. 다른 방법은 있나요?”

 

여전히 부정하는 리제로트. 그런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있지. 당연히. 최후를 맞이하는 거야. 여러 방법이 있으니까 잘 생각해봐.”

 

잠깐만?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리제로트는 날 악인 취급하고 있을까? 심각하게 경계를 하는 눈초리를 하면서도, 조심스레 작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당신이 제안한 것 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뭐죠?”

 

가장 높은 건 당연히...”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각본을 찢고 불태우는 일 밖에 없지.”

 

얼마나 자랑스럽게 말했는지 리제로트의 얼굴에 경악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정도였는데, 리제로트의 동요는 찻잔 하나를 깨먹고서야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거 레이베리아에게 직접 선전포고를 하는 건가요?”

 

당연하지. 물론 그 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 있어.”

 

뭐죠?”

 

나지막하게 웃은 나는 지금쯤 리제로트의 옆머리로 슬쩍 손을 뻗었다.

 

, 당신 바보에요? , 무슨 짓을 하려고 점점 가까이 오는 거에요! 설마 소녀의 첫 키스라도 뺏을 작정으로...!

 

-파바박!

 

손에 따끔한 통증이 도사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손등에 박혀있는 샤프심이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꽂혀있는 상황.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 어째서 너의 첫 키스를 가져가는 거냐? 지금 당장 살기를 품고 암살하려는 녀석부터 막아야지.

 

내 한숨이 너의 말 때문에 가출해버렸잖아. 책임져.”

 

, 책임을 지라뇨!”

 

어라? 카일 씨? 오순도순 대화를 하는 거 같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던 거에요?”

 

암살하려던 녀석이 태연하게 내가 뭘 하는지부터 묻는 거냐? 그리고, 지금 리제로트를 죽이지는 마라.”

 

내 말에 어깨를 으슥이던 레인은 감정이 알 수 없는 가면으로 들이댔다. 그보다 그 가면은 언제까지 쓸 작정이냐? 지금 덥지도 않나?

 

리제로트를 죽이지 말라는 그 말은 아직 그녀가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인가요?”

 

이용가치가 아니라 의뢰인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 누구의 의뢰를 받고 정상적으로 해결한 적은 있냐?”

 

없죠.”

 

그거 자랑 아니거든?”

 

가늠하기 어려운 녀석들은 꼭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점이다.

 

, 한번 잘 막아보세요? 어차피 피도 흘리지 않는 걸로 봐선, 카일 씨도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모양인데 말이죠?”

 

. 인정은 하지. 그래도...신은 아니잖아?”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은 있어도, 신의 영역에 돌입하는 인간은 없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선 레인과 어쩔 수 없이 한판 벌여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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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이라니!

내가 동원이라니!!!!!!!!!!!!!!!!!

 

590

 

 

 

그나마 다행이라면 평생 여장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점. 결국 불행해지는 건 잡화점에 돌아오고 나서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찾아온 나의 거주지라는 것은 또 다른 태클의 시작이었으니까.

 

주인은 짐의 저주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가? 흐응...짐에 대한 애정이 식었구나.”

 

남에게 저주를 씌운 것이 어떻게 애정의 표현으로 될 수 있는지 서술해보시죠. 5점을 드릴 테니까.”

 

“1번이니라.”

 

객관식 아니라고!”

 

애정이 식었네 뭐하네 하는 주제에, 결국 검은 고양이 상태로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레시아. 13대 마왕이고 타락의 마왕이면서, 결과적으로 내 사역마였으나 지금은 결혼을 했으니까 부부관계인데. 솔직히 어떤 부부가 남의 옷에 저주를 퍼붓냐고?

 

아마. 나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레시아의 입장에서는 나는 좋은 마나 창고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좋은 장난감 하나라고 취급하겠지.

 

그렇군. 주인은 그 옷이 귀엽지 않아서 해주를 한 것이로군.”

 

아니. 남자가 여장을 한다는 그 자체부터가 이미 글러먹었다니까요.”

 

뭐 아서라. 짐이 조만간 더 귀여운 옷으로 주인에게 선물할 테니 말이다.”

 

아 글쎄! 여장 때문에 벗어 던진 거라니까요!”

 

이렇게 소리를 쳐도 레시아는 레시아 나름대로만 생각을 하는 중이다. 어깨 위에 올라온 하얀 올빼미는...

 

마스터에게 입혀야 할 옷은 그런 거추장스러운 여장이 아닙니다.”

 

그래도 시나 밖에...”

 

저처럼 하얀 날개를 단 천사복장을 해야 합니다.”

 

도대체 너희들이 왜 그런 걸로 싸우는 건지 이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태세전환이 우디르를 넘어 드랙스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제발 나를 피곤하게 하지 말아줄래?”

 

잡화점 안에 돌아가도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 그래도 밖에서 골치 썩는 것 보단, 여유를 가지고 조그마한 트러블에 대응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잡화점 창가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몸과 정신의 피로를 달래보려고 했으나, 어린 아이처럼 달라붙는 레시아와 시나에 의해 편하게 쉰다는 단어가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버렸다. 나중에 지구로 모여서 롤링발칸이라도...아니, 너무 갔으니 그만하자.

 

. 이렇게 하루 종일 붙어있게만 해준다면 여장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말이다. 그러나 주인은 인기가 은근히 좋다. 아니, 좋아도 너무 좋다. 어째서 연관되는 사람들마다 주인을 원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저를 원하는 게 아니라 제가 일을 해결해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건 사람의 호불호로 갈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와 위치가 어디인지부터 파악해야 하는 일이다. 잡화점의 주인은 기괴하게도 다른 사람의 의뢰를 받긴 하는데, 잡화점이라면 보통 진귀한 물건이나 대규모의 잡화물품을 의뢰 받는 건 줄 알았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해결사나 잡일을 처리하는 1회용 노동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그 규모가 매우 커서 그래도, 의뢰의 보상이 어째서인지 백장미의 매출을 못 따라가고 있는 아이러니함마저 의구심이 들기 마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뢰를 하기 위해 나를 지목하는 사람과 몬스터가 많이 있었다.

 

과거에 실베스 씨가 기괴한 청혼을 위해 도와달라는 말부터 추억이 되어버렸다.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할 거니까. 리제로트의 의뢰만 처리하고 돌아가죠.”

 

그리고 그녀도 잡화점에 들어오는 겁니까? 마스터?”

 

아니. 리제로트까지 과거로 데려갈 이유는 없지. 그런데, 지금 당장 레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찰서에서 풀려난 모양입니다. 이 세상에는 초능력자에 대해 인식을 하고 있지만, 레인의 경우에는 감춰주고 숨겨주는 자들이 있으니까요.”

 

다른 곳에서 아리엘이 터벅터벅하고 걸어왔다. 조금은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진 키가 크지 않은 상태. 아니...오히려...

 

왜 키가 작은 거냐?”

 

무슨 소리에요? 제 키는 원래부터 작았다고요? 아담한 사이즈를 좋아한다는 카일 씨의 성향에 맞춘 건 아니라고요?”

 

듣기만 해도 오해 수치가 100정도 쌓일만한 발언은 그만둬라. 그리고 미묘하게 츤데레 캐릭터를 따라 하려고 들지도 말고. 너의 캐릭터는 애초에 뭔지 나조차 이해가 안 되니까.”

 

전에는 마신을 한번 했었죠.”

 

그런 거 말고!”

 

자주 못 봐서 그런 건지 몰라도, 사람이 성장을 한다면 키가 크고 있다는 걸 느껴야 하는데, 아리엘의 경우에는 키가 작은 건지 아니면 저게 성장한 건지 애매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보다 마왕님. 여신님. 제 자리가 없잖아요!”

 

그보다 신랑. 내 자리는?”

 

루시피나는 요리하다 말고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나마 내가 교제를 한다고 했을 때 정상적인 취급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늘씬한 미녀. 레드 드래곤의 일족임과 동시에 첫 혼인 대상자다.

 

어른스러운 면이라기보단 다정다감한 누나의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 평상시의 모습이고, 루시피나가 화를 낸다면 그것보다 더 살벌한 상황은 없다. 그나저나 내가 어쩌다가 이런 말이 들어야만 했을까? 아니, 그보다...

 

모두가 그렇게 몰려오면 제 입장이 어떻겠어요?”

 

행복하지 않는가?”

 

행복이기 이전에 힘들다고요!”

 

모든 남자들이 그런걸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래도 미녀나 미소녀들이 나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달라붙는 상황이 현실로 찾아온다면, 사실상 좋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소리다. 최소 0.3초 동안 망설여지는 순간이 있는데, 과연 저 사람들이 다 달라붙으면 나는 숨이라도 쉴 수 있는가?

 

생존부터 걱정하는 내 입장에선 행복하기 이전에 살아 돌아갈 수 있느냐가 더 걱정이다.

 

그래도 짐의 취급을 공기로 하는 것보다 좋지 않는가? 아니면 뭔가? 짐이 귀여운 여자아이가 되어 공기취급으로 되는 걸 원하는 것인가? 역시 주인은 은팔찌를 차야 하는 인물이로다.”

 

아뇨. 언제 공기취급을 했는데요? 제가 레시아를 공기취급 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마스터. 저희들의 출현이 어째서 잘 일어나지 않는지 설명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희들이 그 기괴한 여장만 시키지 않았더라면, 나의 행적은 잡화점 내부로부터 시작했겠지!”

 

일어날 때 개운하게 일어나면서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평화로운 나날을 기리고 있다만, 요즘 들어 자고 있는데 계속해서 결계가 깨져나가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중이다. 어차피 부부인데 뭐가 문제냐고 말하지만, 자고 일어났을 때 초죽음 상태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늘도 눈을 떠보니 여장이 되어있었습니다. 라는 상황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야.”

 

맞습니다. 마스터.”

 

아니라고!”

 

하긴 이미 여긴 평범이라는 말이 치고 들어갈 수 없는 건가? 내 인생에 평범이라는 단어와는 더 이상 견우와 직녀마냥 만날 수 없는 건가? 아니, 만날 수는 있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실에 불과하나?

 

혹은 내가 평범에 도달할 수 없다는 진실을 가지고 있거나, 나는 평범할 수 있다는 진실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말장난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결국 평범이라는 단어와 사이 좋게 지낼 수 없는 일.

 

어쩔 수 없는 현실에 한숨을 접어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주인에게 밀착하려는 자들이 많은가!”

 

어째서긴요. 레시아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이 건에 대해선 정리가 필요하겠다!”

 

뭔가 또 난장판이 될 징조가 보인다. 안 그래도 리제로트의 의뢰를 빨리 해결하고 과거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레시아가 저러면 의뢰는 과연 언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래서 뭐 어쩌시려고요. 1주일마다 달라붙을 수 있는 사람들을 지정할 겁니까?”

 

아니. 짐이 주인에게 달라붙어 있다면 상관이 없지만, 짐이 주인의 곁에 없을 때는 그 누구도 달라붙지 못하도록 하겠노라!”

 

너무 당당한 나머지 이 고양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못 알아 들을 지경이다.

 

말도 안 됩니다. 냥캣. 그런 억지를 부리기 전에 냥캣의 인성을 다시 되돌아보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짐은 본래 마왕이니라!”

 

고양이와 올빼미가 또 한바탕 싸우고 있는 동안, 방 안에서 짜증나는 목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지 않는가! 모처럼 첩이 자고 있는데...어라? 카일이여! 언제 온 것이냐?”

 

성인이라고 보기엔 한참 힘든 외형이지만, 연한 초콜릿 피부를 가진 소녀는 사실상 어마어마한 신급의 카테고리로 들어간다. 짙은 흑색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을 무렵.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 흔들의자가 더 뒤로 젖혀짐과 동시에 무게가 늘어났으니...

 

아아.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 하지 않는가? 첩은 언제나 카일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홍빛 잠옷이라는 게 그리 귀엽지는 않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얼굴을 내 가슴팍에 파묻었다.

 

, 잠깐만! 허무의 공작! 짐이 보는 앞에서 주인에게 뛰어들다니!”

 

어라? 아까 마왕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마왕님께서 붙어계실 때는 그 누구도 상관없다고.”

 

아직 개정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조만간 세린에게 찾아가 내 개인적인 방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그보다, 잡화점의 규칙에 개정하려는 건 아니겠지?

 

잡화점 규칙에 나에게 달라붙는 규칙을 적는다면 그거야 말로 골치 아픈 건 없지만, 애초에 주인은 나라서 내가 직접 개정하지 않는 이상, 그런 바보 같은 규칙은 늘어나지 않는다.

 

잠깐? 규칙이라?

 

맞아! 규칙! 규칙을 개정하면 되는 일이었어!”

 

마스터?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요?”

 

뜬금없는 나의 외침에 시나가 당황한 듯 묻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는 규칙을 바꿀 수 있으니 솔직히 내가 인간이든 아니든, 마지막 항목에서는 어떤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에 인간을 뜻한다. 그러니까 저 어떤 사람이라는 말을 제대로 바꾸기만 하면, 내가 인간을 초월하든 말든, 잡화점의 주인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내가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나려고 하길래, 다른 방법이 없는지 생각했는데, 그냥 잡화점의 규칙을 잠깐이나마 바꾸면 되는 거였어.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이 되었네. 이제 리제로트의 의뢰만 어떻게 해결하면 과거로 그냥 돌아가자고. 미래에 더 있는 건 위험하니 말이야.”

 

그렇군요. 그런데 마스터.”

 

?”

 

마리아와 얼마나 붙을 생각이십니까?”

 

, 살기!?

 

작은 올빼미에게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이전에!”

 

나는 빠르게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안 그러면 레시아와 작정하고 또 다시 마법을 날릴 테니까.

 

지금 나가서 할 일이 있어요.”

 

안 된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랑을 증명해보거라!”

 

뭘 증명해요!”

 

그렇다면 사랑의 저주를...”

 

그건 사랑도 뭣도 아니잖아!”

 

결과적으로 다시 저주받은 여장을 당하기 전에, 모두를 설득하는데 애쓰고 모두가 진정할 때쯤 시간은 흘러 새벽에 이르렀다. 언제나 규칙에 따라 잡화점 운영을 하고 있는 나는, 레시아와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리제로트라는 자는 전에 주인을 납치한 자가 아니더냐? 그런데 이번엔 목숨을 구해줬으니 도와달라는 건가?”

 

. 그런 거라기보단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엘 샤다이를 말하는 건가?”

 

괜찮아. 문제없어. 라는 대사를 하기 싫으니까 이상한 요소를 가져오지 마시죠.”

 

검은 고양이에서 가지런히 앉아있는 여성으로 변한 레시아. 지금 상태에서 정신방어가 약한 사람이 본다면 죽거나 심한 경우 침을 흘린다고 하는, 변칙적인 패시브를 지니고 있었으나, 잡화점 멤버에는 정신방어능력이 모두 뛰어났으니 발작을 일으킬 일은 없었다.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을 스윽 하고 쓸어 내리며 팔짱을 끼고 있는 마왕. 그러면서도 위압감이나 카리스마는 여김 없이 뿜어져 나왔다. 칠흑의 드레스로 무장된 분위기는 무겁기만 했

 

그래도 그런 장비는 괜찮은가? 에서 그런 말장난은 괜찮은가?로 변환하면 써먹을 수 있지 않는가?”

 

는데...진지하게 생각한 것이 겨우 그거라는 생각에 내 자신이 화가 났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그런 생각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아뇨. 못써먹어요.”

 

써먹을 수 있노라!”

 

어디까지 우기는 거냐.

 

리제로트가 뭔가 꾸미고 있는 건 확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유랑극단이건 레인에게 암살당하던 둘 중 하나는 못 막을 거 같네요. 잡화점 안이 가장 안전하지만...”

 

유랑극단의 신분이 있으니 이쪽에서 보호하는 것은 무리로군.”

 

분명 또 주인은 어린아이가 그렇게도 좋은가!”라고 말할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내가 기대한대로 정확한 포인트를 짚어서 레시아가 대답했다.

 

맞아요. 지금 상황에선 유랑극단과 선전포고를 한 이상. 리제로트를 통해 이곳의 위치가 들킬 수 있어요. 기껏 가짜 좌표를 깔아놔도 포위망이 좁아지는 판국에, 트로이목마처럼 들어오는 날엔 끔찍한 경험을 하겠죠.”

 

맞다. 그 뼈다귀 샌...”

 

제발 부탁인데 그 이상 다른 요소를 가져오면 아이언 클로부터 날릴 겁니다. 그러니 그만하시죠.”

 

진지한 이야기에 판지 같은 개그가 나오면 진심으로 때릴 테다.

진정한 양성평등주의자는 여자에게도 드롭킥을 선사할 수 있는 신사이지 않는가?

맞을 짓을 하려고 매를 벌면 사랑의 매로 다독거리면 된다. 물론 그 사랑의 매가 아이언 클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마스터.”

 

눈빛보다 더 새하얀 소녀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시나? 자고 있는 중 아니었어?”

 

이야기 소리가 들려서 깼습니다.”

 

분명 잠이 많긴 하지만, 새벽에 이야기 소리가 시끄러워서 깨어날 줄은 몰랐다. 언제나 내 몸 속에서 동화를 한 체 휴식을 취하지만, 지금 이렇게 나오는 경우는 전혀 없을 텐데.

 

! 그대로 영원히 자고 있지 그런가? 비둘기.”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 입니다. 냥캣.”

 

어쨌든간! 지금은 주인과 짐의 사랑의 밀담을 하고 있지 않는가! 방해가 되니 저 구석진 곳에서 웅크리고 자기나 하거라!”

 

제가 눈을 감는 장소는 언제나 마스터의 품입니다. 이렇게 꼬옥하고 안으면 언제든지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습니다.”

 

정신차려보니 언제부턴가 나에게 안겨서 하품을 하는 시나.

 

잠깐! 언제부터 나에게 안겨 있는 거야?”

 

주인!”

 

아니! 잠깐만! 이상해! 킹 크림존이 있는 거 같아요! 지금 시나가 저에게 안기는 과정이 생략되고 결과만 남았잖아요!”

 

진노하는 레시아를 진정시키려면 얼마 동안의 노력이 필요할까? 한줄기의 희망은 있는 걸까? ...이때는...

 

레시아도 오시던가요...”

 

-꼬옥

 

비어있는 반은 짐의 자리니 넘보지 말거라.”

 

냥캣이야 말로 제 영토를 침범하지 마시죠.”

 

이제서야 저 둘을 어느 정도 다루는 요령이 생기는 듯했다.

 

정해진 운명을 부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자연의 순리대로 맞춰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운명을 부수고 다른 미래를 새겼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이 자연의 순리대로 맞춰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지요.”

 

레시아와 시나가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마왕과 여신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갈등되는 고민 속에 천사와 악마가 싸우는 듯한 모습과는 달리, 신비로운 운명론에 대한 무거운 분위기만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주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스터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사람의 질문은 하나로 뭉쳐졌다.

 

모르죠. 저야.”

 

내가 어찌 알겠나?

 

어쩌다가 운명이 부셔진 것마저 운명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운명이란 건 생각하지도 않아요. 원인과 결과와 나비효과가 겹쳐진 게 운명이라고 해도, 솔직히 그게 운명인지 아닌지는 알게 뭡니까? 막말로 제가 다른 세계에서는 레시아와 대적관계가 되었을 때도 레시아가 지던 이기던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건 안 된다. 주인을 이겨서 짐에게 복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대화의 취지는 운명 같은 거 생각하지 말자라는 거고! 어째서 저를 복종시키는 건데요!”

 

딴 이야기로 빠져나가는 게 마왕의 일인가?

 

그때는 제가 마스터에게 가호를 내리고 있을 테니, 냥캣은 소멸이나 당하시는 게 편할 겁니다.”

 

...다른 세계에서도 레시아와 시나는 싸우는구나.

애초에 존재 할 일이 없는 세계일 터인데...

 

서로 싸우지 말고 각자 방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세요.”

 

주인의 품이 짐의 방이다! 여기서 자겠다!”

마스터가 계신 곳이 제 휴식처이니 이 상태로 잠을 청하겠습니다.”

 

잡화점을 운영해야 하는데 자장가부터 불러주게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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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축구 때문에 일찍 퇴근하고 써내렸다가 지금 올립니다.

꽤 늦었는데...원인은 당연히 일 때문에...

 

589

 

 

 

시공간이동을 자유자재로 하는 사람이 나 이외에 하나 더 있긴 했다. 아니, 내 경우에는 원하지 않았는데 불행하게도 휘말린 거고, 이전에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것은 티아의 도움으로 간 것. 하지만 지금의 켈모리아는 자신이 원하는 시간대로 찾아온 것이다. 당연히 놀러 온 이유는 아닐 것이고, 지금의 나에게 볼일이 있어서 다가 온 거 같은데...

 

세상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 나와 같은 사람. 그리고 나 같지 않은 사람’”

 

꼭 거기에 강조할 필요가 있나? 그보다 내가 알고 있는 켈모리아와는 다른 나이인 거 같은데?”

 

켈모리아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강조했다. 그보다 저 모습은 몇 살이지?

 

숙녀의 나이를 물을 셈이야? 아무리 귀엽다고 한들 여자의 비밀을 쉽게 알려고 해선 안 되지. 안 그래?”

 

도대체 왜 이런 녀석과 그 저주받을 보드게임을 한 거야? 그 전에, 내가 만났던 켈모리아와는 나이가 좀 달라 보인 이유라고 한다면...

 

확실히 나이는 그쪽이 만난 것보다 더 어리긴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거야말로 자네가 쓸 때 없이 미래에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차원이 합쳐지려는 영향 때문이야.”

 

그럼 너는 평행세계에서 온 켈모리아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방금 전에 봤던 이비도 평행세계의 이비. 모두 다른 선택지를 하여 이곳까지 온 존재들이야.”

 

다른 선택지?

 

그럼 너는 평행세계에서 왔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켈모리아는 화사한 웃음이 태양빛에 반사되었다. 보통 저런 웃음을 보면 나도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사심이 가득한 분위기가 켈모리아 몸 주변에서 오러처럼 퍼지고 있으니...

 

. 그렇지. 내가 있는 세계에서는 카일이란 남자는 없어.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거든.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까 자네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들기 시작하는데, 그게 그 옷의 저주인가? 아니면 자네가 귀여운 건가.”

 

옷의 저주야. 100% 옷의 저주네. 저주에 오염되기 전에 지금 당장 이 옷에 있는 저주를 풀어주면 맨 정신으로 돌아오겠지. 나도 다른 사람들이 저주로부터 오염되는 걸 피하기 위함인데, 역시 나는 의로운 일에 움직이는 남자야. 그렇지 않아?”

 

남자라는 말을 강조한 이유는 부디 내 성 정체성이 남자라는 것이야 말로, 평행세계에서 온 켈모리아가 제대로 인식해주길 바람이었다. 남자가 여장을 하는데 그 여장이 더 잘 어울려서 여자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는가? 특정 조건이 붙어서 꼭 여장을 해야 메리트가 있다면 모를까...지금 내 모습은 저주받을 백장미의 양산만 가속화하는 경우가 되니.

 

해주를 한다면 그 마법진 위에 올라와. 릴리스에게는 이미 들어놨으니 자네가 오기 전까지 준비하고 있었거든.”

 

내가 오기 전까지?”

 

나는 마법에 있어선 모든 걸 통달한 마법사. 2의 엘티노스라고도 부르기도 하고...”

 

그건 네 자칭이잖아.”

 

그래도 엘티노스 이외에 마법에 대해 모든 걸 꿰뚫은 사람은 나 밖에 없어. 애초에 내 앞에 있는 남자는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일보 직전이고...시공간술사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래도 자네는...아니, 이 이야기는 나중에 미루도록 하지.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시간이 없다고?”

 

내가 있는 세계의 아리엘은 너무 어리광을 부려서...3시간동안 나를 한번이라도 만나지 못하면, 나를 찾겠다고 카멜롯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대니까.”

 

어리광을 부리는 아리엘이라. 얼마나 심하길래 카멜롯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거지?

 

그 아이. 그쪽 세계에서는 어때?”

 

이쪽에는 장래에 어둠이 드리울만한 은근 사디스트 종류로 진화 중이다.”

 

그런가? 자네도 고생이 많겠군. 뭐 나야 귀여운 아이들이 주변에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지만.”

 

귀여운 아이들이 주변에 있으면 오히려 힘들지 않을까? 마음 고생이 많이 심할 거 같은데. 결국 마법진 안에 들어온 나는 켈모리아의 박수 소리와 함께 모든 옷이 날아가기 시작...

 

! 잠깐만! 모든 옷이 싹 다 날아간다는 말은 없었잖아!”

 

모든 옷이 날아가버려서 급하게 한쪽 팔로 가리고, 다른 팔은 거대한 천을 만들어 감쌌다. 이럴 때야말로 편리한 창조에너지라고 말하고 싶으나...아직까지 동요한 마음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네는 여장을 하기 싫어서 해주 한다고 들었다만? 그렇게 강력한 저주가 담긴 옷을 하나하나 해주를 하고 벗는 건 시간낭비라고? 그러니 한꺼번에 태워버려서 날려버리는 게...”

 

나는 수지침이 없는 줄 아냐!”

 

수치심이겠지. 그리고 자네의 몸을 관찰해야 할 만한 일이 생겼다네.”

 

관찰?”

 

어느 사이에 내 등 뒤로 공간이동을 한 켈모리아. 그리고는 이리저리 옮기면서 나를 바라보는데...

 

환생이야?”

 

내가 틈만 나면 트럭에 치여서 죽는 줄 알아? 환생하는 대부분이 사고로 죽어서 환생한다고 하지만, 내 경우에는 환생이 아니라 무한 루프에서 다른 선택지를 고른 거야. 그런데 그건 왜?”

 

증상을 알아야 치료를 할 수 있으니까. 자네가 지닌 신격화는 결국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리니, 그걸 또 조사해 봐달라는 의뢰가 있었다. 비록 이런 허름한 구두점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애석하게도 자네가 인간을 벗어나는 일은...그게 운명이라고 보면 되겠지.”

 

운명? 결국 나는 신이 된다는 거야?”

 

맞아. 잡화점을 떠나야 한다는 소리야.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말도록. 지금 잡화점의 주인은 자네니까. 자네가 알아서 하겠지.”

 

정말 희망찬 설교로군.”

 

평행세계에서 잠깐 넘어온 켈모리아는 그나마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내가 카멜롯에 방문했던 켈모리아는 아직까지 충동적으로 해결하려는 어린애 같은 성격 덕분에, 결국 일이 비틀어져서 적대를 하고 말았고, 결국 황혼<Dusk>로 인해 마법의 근본을 날려버렸다.

 

과거를 잠깐 떠올리던 머리를 뿌리치고 이제 내가 궁금해 하는 걸 물어보자.

 

그런데 그 평행세계의 카일이 없다는 건. 내가 죽었다는 의미야?”

 

자신의 안경을 치켜세운 켈모리아는 눈웃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어느 평행세계를 다 뒤져봤지만...없었어. 아마, 이곳만 유일하게 네가 살아남은 세계겠지.”

 

이곳이 유일하게 내가 살아남은 세계라...”

 

다른 평행차원의 카일들은 뭘 한 거냐! 가위바위보에서 지기라도 한 건가?

 

대부분 카일이 아니라 카린이라는 이름의 여성체들이니까.”

 

왠지 그거 내가 돌연변이 같잖아. 그 이전에 이곳에서 수많은 남성체 카일이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둬! 잠깐만, 따지고 보면 유일하게 내가 남성체로 현재 진행중인 카일인가? 머리가 느닷없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잖아! 다 너 때문이야!”

 

카일이라는 남자가 없다는 말은 아마 잘못된 사실이고, 다른 평행세계에는 카린이라는 여성체가 많다는 의미겠지. 그게 무슨 시스터즈도 아니고? 레벨 올리는 강화재료로 쓰이는 것도 아니잖아.

 

그 중에 60%정도는 엘티노스와 결혼에 성공했지.”

 

듣자 듣자 하니 쇼킹한 사실만 계속 내뱉는데, 그런 암울한 평행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켈모리아는 입을 가려서 웃었다.

요염한 웃음에 느끼는 감정은 짜증이었지만...

 

아무튼 해주는 끝났고 갈아입을 옷은 다 갈아입은 거 같은데?”

 

아니.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옷이 자동으로 입혀주는 줄 알아? 네가 여태껏 뒤를 돌아보지 않으니까 내가 옷을 입지 못하는 거 아냐?”

 

부끄러워?”

 

시끄러워!”

 

옆에 릴리스도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고 있어서 더 거부감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난장판이지? 어쩔 수 없이 옷을 입긴 하지만, 주변에 마법방패<Magic Shield>를 방벽처럼 쌓았다. 언제나 기초에서 응용하는 내 사고방식은 벽을 만들면 편할 텐데, 굳이 저렇게 다중으로 소환해서 쓸 때 없이 낭비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도 투시할 수 있으니까 상관은 없는데?”

 

제발 너는 고개 좀 돌려!”

 

켈모리아에게 소리치며 빨리빨리 입었다. 릴리스는.... 그래...어차피 갈 때로 간 사이니까 넘어가도록 하자. 어차피 사라지라고 해도 환영마법이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녀석이니까.

 

-스윽. 스으윽.

 

호오~”

 

너 진짜 엿보는 거면 아이언 클로가 튀어나오는 거니 조심해라.”

 

자네는 이런 아름다운 미녀에게 폭력을 휘두를 셈인가? 야만적이지 않는가?”

 

너는 지금 남자의 여린 몸을 탐닉하면서 음흉하게 웃고 있을 거냐? 오히려 네가 죄를 더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괜찮다. 자네는 남자이지 않는가? 여장을 했을 때가 더 부끄러워야 하는 것 아닌가?”

 

남자라고 해서 수치심이 없는 게 아니라고! 부끄러운 거에 뭐가 더 부끄럽고 아니고가 어디 있는가? 한결 같이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다. 머리 맞는 거와 배 맞는 게 어느 쪽이 더 아프냐고 물어보면, 오히려 맞으면 다 아프다.’라는 대답이 정상적으로 나와야지.

 

조만간 너는 성범죄로 끌려가게 될 거야.”

 

자네야 말로 조심하는 게 좋지. 자네의 주변에는 어린 아이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건 잡화점 멤버 일부가 멋대로 변신하는 거고! 실제로 내 취향은 어린아이가 아니란 말이다! 은팔찌가 내 손목에 걸리기 전에 너도 잡혀갈 거다!”

 

이른바 저 사람도 나쁜 사람이에요!”라는 물귀신 작전으로 말이지.

 

농담은 이쯤 하면 되나.”

 

켈모리아의 한 마디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분위기를 밥상 뒤집듯이 바꿔버리는 켈모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평행세계가 사라지던 말던 나는 상관이 없지만, 모든 평행세계가 사라지고 나면 끝이 날까?”

 

켈모리아의 질문이 날아와 내 머리를 때렸다. 모든 것의 끝이 있다면 또 다시 모든 것의 시작이 있을까? 한 때,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내 의견을 듣고 싶은 거냐?”

 

물론.”

 

정답은 나도 모른다야. 내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

 

지금 당장 엘티노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겠고...시나도 어느 순간 자신이 존재하여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니까. 시나에게 물어봐도 잘 모른다고 하겠지.

 

그렇다면 자네가 알게 될지도 몰라. 창조주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으니, 결국 모든 것이 사라져도 자네가 재창세를 할 테니까. 세상을 창조하면서 시공간의 개념이 생기면, 그에 따른 평행세계는 또 다시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갈 거야.”

 

모든 세계가 끝장이 난다고 해도 너는 태평하군?”

 

당연하지. 어차피 이대로 살다 끝날 것이 아닐 텐데.”

 

마치 내가 이 일을 해결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내가 해결 할 일은 리제로트의 의뢰다.

 

그 아이가 말했잖아. 자신의 운명을 바꿔달라고?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까?”

 

정해진 운명을 먼저 알아야 회피를 하던 말던 하지.

 

왠지 모르게 리제로트의 운명을 알아내려면 심하게 고생해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든다만?”

 

그래도 의뢰를 받았으니 굴러야 하겠지?”

 

제길.

어째서 나는 이런 인생을 살아가는 걸까?

그냥 태어난 의미가 굴러다니는 돌보다 더 심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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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은 쉬고 싶은데...

일이 바쁘니 또 못 쉬는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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