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98
598
인생에 가장 허망한 순간이라면 내가 나중에 봐야 할 책의 내용을 스포일러 당했을 때. 뜬금없이 그건 무슨 소리냐고 물어볼 수 있는데, 마왕군에게 겨우겨우 도망쳐서 잡화점에 들어가 책을 읽을 무렵, 리제로트가 오후에 말싸움을 했던 복수로 책이 재미있어지려고 하면, 스포일러를 거침없이 터트려서 허무함을 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그거 주인공이 알고 봤더니...”
“뭐. 주인공이 알고 보니 범인이었다는 거야? 아님 죽는다는 거? 대체 이번이 몇 번째야?”
슬슬 짜증이 입에 가시가 돋아나듯 솟아오르기 시작할 때. 리제로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세린은 한숨을 내쉬면서 내 앞에 걸어왔다.
“어린애 같이 싸우지 말고 그 마왕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는 해봐야겠지?”
“한가지 특단의 조치가 있어.”
“그래?”
“내가 잡화점 밖으로 안 나가는 거야. 역시 이불 밖은 위험...꺄아악!”
잡화점 바닥이 순식간에 튀어올라 머리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남자나 여자나 저런 비명을 지르는 건 당연하겠지만, 잡화점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여성체의 모습으로 있어야 하기에...아니, 사실상 밖에서는 세린이 멋대로 날 여성체로 고정시켜놨기에, 정신적으로도 아파죽겠는데, 물리적으로도 아파 죽을 지경이다.
“어째서! 내가 잡화점 밖에 안 나가겠다고 하는데! 내가 잡화점의 주인 아니냐!”
“글쎄? 아무리 주인이라고 해도, 밖에 나가지 않고 놀고 먹고 살겠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가 없거든? 뭐 그 모습으로 계속 있고 싶다면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아 맞아. 원래 성별로 돌아가야 하지. 지금은 세계 멸망을 막건 말건, 빨리 되돌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
“지금 당장 규칙부터 수정하라고!”
“싫어.”
아무리 잡화점의 주인이라고 해도, 잡화점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것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은 없지. 지금 상황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린에게 훈계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리제로트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계속 보고만 있고, 결과적으로 이 세상은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이 잡화점은 느닷없이 땅이 솟아오르고 그래요?”
“잡화점이 땅에서 솟아오른 게 아니라 바닥이 솟아오른 거잖아. 잡화점을 두더지마냥 만들지 마...”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마왕 레프리시아의 눈에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혹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적이 될 거 같아 귀찮은지. 그건 사실상 중요하지 않은데 문제는 마계공작 중에서 여럿이 그릇된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잠깐 봤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이 날 장난감으로 선택한다는 발언.
“리제로트.”
“네?”
“밖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했으니까. 네가 나갈 때는 꼭 나에게 말하고 같이 동행한다는 것만 약속해.”
“카린의 모습으로 같이 동행을 해준다면 생각해볼게요.”
“어째서 너희들은 모두 날 카린으로 못 만들어서 안달이 난 거야? 애초에 20년 이상 남자로 살아오다가 갑자기 이런 모습으로 살라고 하면 불편하거든? 키도 바뀌는 바람에 적응도 안 돼.”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리제로트의 눈빛에서는 “네~ 어련하시겠습니까? 그저 내 눈에만 보기 좋으면 되는 거지~”라고 훼방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눈이 반짝이며 내 모습을 순식간에 훑고는...
“어라? 그러고 보니 안 씻으세요?”
“같이 씻자는 소리는 하지마.”
“그럼 씻겨드려요?”
“네 정신상태부터 씻고 오던가...”
여전히 한결 같은 리제로트의 끊임없는 욕망을 지워버리고, 여전히 손님이 오지 않는 잡화점 안에서 물품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스으윽
옷깃을 타고 뱀처럼 다가온 세린의 손. 포션을 정리하려는 내 작은 손등을 침범했다.
“이번 건 또 뭐야.”
“아니. 잠깐 진단을 해보는 거야. 좋아. 정상이네.”
진단을 한다는 것치곤 세린의 경우에도 어마어마한 욕망이 눈빛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초근거리에서 봐야 하는 내 입장에선 호러가 따로 없었는데, 힘을 줘서 뿌리치려고 해도 세린의 힘이 더 강했다는 사실에 참담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아니 그런 미래는 오면 안 돼.
“세린. 네가 뭘 하려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아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그대로 좀 놔둬! 바꾸지 말란 말이야!”
어처구니 없게도 세린이 내 신체를 진단한다는 자체는, 결과적으로 내 상태를 변화시킨다는 의미가 더 크다. 내가 입고 있던 옷도 자기 멋대로 바꾸고 난리라니.
“그리고 네가 고르는 의상마다 노출도가 은근히 거슬리거든?”
“옛 현자는 노출도와 방어력은 서로 비례관계라고 말했지.”
“전혀 아니거든!”
대체 어느 현자가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은 거야?
“카린 씨는 잡화점에 있으면서 그런 옷도 입고 계신가요?”
“아니. 그보다 지금 흘리고 있는 침이나 닦아.”
이젠 리제로트 쪽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거침없이 치고 들어왔으니,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소리치는 작업은 복잡했다.
“이 옷은 뭐야? 꼭 웨딩드레스를 개조한 것처럼 생겼는데, 옷에서 쓸 때 없이 은은하게 발광하고 있잖아?”
“그거야 당연히 명등룡의 소재로 만들었기 때문이지.”
“...너 언제부터 헌터가 된 거야?”
세린의 활동범위마저도 다른 세계를 침범하고 있는 건가? 생각해보니 세린도 나의 에너지와 같은 종류잖아?
창조신이 일전에 다뤘던 에너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는 것. 애초에 잡화점 그 자체인 세린의 입장에선 이미 인간의 시점이 아니다. 잠깐? 그러면 잡화점 안에 있는 것이 다른 신이 안 되는 이유가...
“인간이 잡화점의 주인이 되야 하는 이유는 지금 남자로 돌아간다면 잡화점 그 자체와 동화되기 때문?”
“대단하네? 이제서야 내 마음을 알았구나?”
순식간에 해머에 맞은 충격이 머리에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세린의 입장에서는 내가 남자든 여자든, 내가 잡화점에 동화하지 않고 우선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심술궂은 일을 벌이고 있었으니까. 미움을 받을지언정 자신의 소중한 사람은 꼭 지키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말로 이야기를 해야 할 거 아냐. 그런 이유라면 아무리 나라도 먼저 소리치지 않는다고.”
“애초에 네가 알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알아도 이야기는 못했으니까. 어차피 지금은 네가 알아챘으니 진실을 말해도 상관없지.”
다만...
“카린 씨? 문이...”
연미복을 입은 리제로트의 인형 월터가 문을 향해 경계를 하고 있었다. 잡화점에 드디어 손님이라도 온 것일까? 아니, 평범한 손님이라면 월터가 경계를 하지 않고, 리제로트 마저 내 등뒤에 숨어있지는 않았다.
“호오? 이곳이 그 잡화점인가? 짐이 예상한대로 손쉬운 진입방법이 아니구나.”
“마왕 레프리시아?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들어온 거야?”
“현관으로 들어왔노라.”
“아니. 지금 내가 그런 시시한 장난을 하자고 그런 질문을 한 줄 알아!”
질문의 의도야 어떻든 타락의 마왕이자, 모든 차원계를 흔들어버릴 만한 강력한 마왕. 레프리시아는 칠흑의 드레스를 입고 잡화점에 쳐들어와버렸다. 사실 마왕성에 용사가 쳐들어오는 건 흔한 클리셰인데, 마왕이 잡화점에 쳐들어온 것만 생각하면 마을을 침략하는 것보다 더 흔하지 않는 클리셰임이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은하게 달빛으로 내려오는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나부끼는 동안, 주변에 마계공작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거지.”
사실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의상이든 성별이든 일단 작은 걸 떠나서, 지금 레프리시아가 흘리는 오러가 잡화점 내부를 침식하려고 들었다.
“그야 당연히 짐이 보낸 청혼에 대해 왔노라. 그리 사랑스러운 모습을 하고 짐을 만나고 싶어했다면, 흔쾌히 시간을 들여 준비하라고 했을 터.”
“이런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결혼을 하고 싶다는 건 아니거든? 그리고 이건 잡화점이 멋대로 입혀놓은 거야. 그러니까 쓸 때 없는 힘주지 말고 그 불길한 오러를 제거해주겠어? 내 뒤에 있는 아이에게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니까.”
마왕이라는 존재는 일반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거북한 존재였다. 가빠오는 리제로트의 숨소리를 듣고 세린에게 리제로트를 보호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마왕의 보라 빛 눈동자는 살며시 빛을 띠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음? 아이? 그런가? 유부녀인가?”
“웃기지마! 남자에게 유부녀라는 소리를 한다는 거 자체가 이상하지 않아?”
“지금은 여자이지 않는가?”
“시끄러워어어어!”
소리는 공기를 찢으며 퍼져나갔고 레프리시아는 그런 나를 무표정 반응했다. 상대의 표정을 읽고 파악할 수 없는 레프리시아의 포커페이스에, 천천히 진정을 하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곳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마왕? 이곳에 온 사람이라면 어찌 되었든 모두 똑같은 손님일 뿐. 지금은 신분이든 계급이든 모두 다 제한된 장소야.”
“그야 당연히 그대를 찾아왔다. 그대와 결혼을 하기 위해 말이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어느 누구도 찾아낼 수 없는 잡화점에 들어온 건가? 아니, 어쩌면 내가 맨 처음으로 레시아를 2층에서 소환했던 전과가 있으니, 가능성이 거의 없는 가설이라면 2층의 물건 중 하나가 지금의 마왕까지 이곳을 찾아오게 만든 것일지도 몰라. 그야 당연하게도 각본가는 모두 제외되었고, 왜곡된 이야기는 분명 없으리라고 생각하니까.
“아니면 짐이 남성체가 되는 편이 더 좋은가?”
“그러니까 본래 성별인 남자에게 그런 소리를 하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청혼 안 받아준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그래도 그대는 짐을 보기 위해 마계까지 온 것이 아닌가?”
“그래. 맞아. 회군을 하기 위해서보단 개인적으로 보고 싶다고 했지. 그리고 봤잖아? 봤으면 내 목적은 다 완료한 거라고? 이제 네가 세상을 부수던 가루를 만들던 상관 안 할거야.”
그러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레프리시아의 키가 더 컸으니 내가 자연스레 올려다 보게 되었고, 빠질 것만 같은 레프리시아의 눈동자와 마주친 상태로, 시간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그대는 짐을 처음 보았을 때, 쓸쓸한 눈을 하고 있었다. 보통 마왕을 처음 보았어도 쓸쓸하거나 그리운 듯한 눈을 하지 않지. 그러나 곧 이어 실망에 빠졌다. 그대가 찾고 있던 마왕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미겠지. 그 반응을 추측한다면, 그대는 일전에 짐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노라. 그대는 누구이고, 이곳에 어찌 왔는지 말해보거라.”
너무 날카로워서 베이는 줄 알았다.
이 마왕에게 무서울 정도로 통찰력을 준 창조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카일. 나는 모순덩어리. 본래 있어서는 안 될 존재야.”
이런 식으로 소개를 한다면 상대방 입장에선 좀 강한 면모를 남길 수 있을까?
아님...그냥 바보 같은 허세병으로 병자취급을 받을까?
“그리고, 잡화점의 주인이자. 마왕 레프리시아의 주인이기도 하지.”
“뭣이?”
당황한 모습을 여기서 보이는 건가? 자신의 위는 없다고 생각했던 마왕에게 있어. 나의 대답은 충격적이라고 봐야 했다. 힘이 사라진 마왕의 손가락을 살짝 치우고 뒤를 돌아 말을 이어 나아갔다.
“물론 너를 말하는 건 아냐. 너보다 더 귀여운 검은 고양이가 있거든. 나는 그 아이와 혼인을 했고, 너의 청혼은 받아들이지 않아.”
“의미를...모르겠군.”
“모르는 게 당연해. 지금의 너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인걸.”
마왕에게 쐐기를 박았다.
물론 나 자신에게도...
“그러면 이제 볼일 다 봤으면 돌아가주겠어?”
“아니. 짐은 아직 돌아가지 않는다.”
대체 왜? 아무리 같은 타락의 마왕이라고 해도, 다른 건 다른 거다. 그렇게 쐐기까지 박았다면, 보통 돌아가는 것이...아니, 내가 상대를 좀 얕봤구나. 상대가 아무리 다르더라도 본질은 타락의 마왕.
“그대가 이전에 어떤 생활을 했는지 몰라도, 이전의 짐과 같이 생활을 했었다는 건 사실이라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그대의 곁에서 짐과 오래 생활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흔적이 보인다고?”
“그렇다. 함께 했던 사념을 이곳에서 볼 수 있노라. 짐은 마왕이다. 마왕이 모르는 것 또한 없어야 하며, 설령 다른 차원에서 일어났던 일이라도, 그것을 감지하고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기묘한 긴장감속에 만들어진 고요함. 그리고 그 고요함을 깨부수는데 5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 매일 이곳에 찾아오겠다.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대는 오히려 편한 관계를 더 선호하기 마련. 그대의 마음을 얻어야 세계정복도 손쉽게 이룰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확실히 레시아와 같은 점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인가?
마왕의 뒷모습이 내 눈 앞에서 사라지는 동안, 굳어버린 듯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세계정복을 하러 나가라고. 이곳에 왜 매일 놀러 오겠다는 건데?”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다.”
더 불길해...
그보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이곳에 찾아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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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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