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76
576
허구한날 일이 꼬이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다. 아직도 풀어야 할 일이 산더미임에도 풀어가는 것보다 꼬이는 속도가 더 빠르니, 지금 당장 굴러다니는 장난감 공마저 매우 심심하게 보였다. 간단하게 일을 끝내고 싶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 아직까지 쓰라린 등을 가지런히 의자에 기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생각의 늪에서는
“메에에에!”
6번째 양도 있...아니? 언제 또 잠든 거야? 푸른 초원에 울타리가 있고 양들이 여김 없이 울타리를 뛰어넘지만 6번째 양만큼은 울타리를 부수고 들어간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이런 꿈이 나올 때마다 불안하긴 마찬가지. 이번엔 어떤 참신한 방법으로 울타리를 못 넘는가에 의구심을 표출했다.
“메에?”
나에게 뭘 물어보려는 건지 몰라도 양의 언어는 배운 적이 없으니 그만둬. 순진한 눈으로 다가와서는 자신의 털 속에 앞발을 집어넣더니 담배 한 보루가 튀어나왔다. 꿈이라고 하여 뭐든지 다 되는 건 맞지만, 아무리 나라도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줄 안다고.
그런데 담배는 또 어디서 뭘 하려고?
그 전에 양이 능숙하게 담배 피우지마.
썬글라스도 끼지 말고 기이한 갱스터 음악도 나오지마.
-부우우우웅! 파지지지직!
하...이번엔 울타리를 자동차로 부수는 거냐. 사전준비를 위해서 담배와 썬글라스. 그리고 어디서 틀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양털 안에 숨겨져 있던 카세트로 갱스터 음악까지? 조만간 염소가 아니라 양시뮬레이터가 나와도 할 말이 없겠구나.
“그런데. 왜 이곳으로 부른 거에요?”
고개를 들어올리니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하얀 반팔티셔츠와 부드러운 털로 이루어진 잠옷바지가 융합된 엘티노스는 성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날 찾잖아. 잘 자고 있는데 봉창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염라대왕이 찾아와서 세계가 종말직전이라고 난리를 피우니, 누가 그런 소리를 했냐고 물어봤고, 잡화점의 주인이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하더라. 무시무시하지 않냐? 명계에 가만히 있어도 바쁠 텐데, 지상에 올라와서 용케 날 찾았으니 말이야.”
“그 동안 소식도 없이 어디에 숨어있었던 거에요?”
“당연히 보이드에 대해 조사를 하고, 그 보이드 안에 유랑극단이 숨어있는 것까진 알았지만, 아쉽게도 레이베리아가 천계에 있는 모든 이들을 인간의 육체로 편도여행을 보냈더라고. 나는 인간의 몸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한동안 숨어 지낼 생각이었어.”
인간의 육체에 봉인된 천계의 필멸자들은 인간의 자의식이 강한 이상, 봉인되어있다고 봐야 한다. 예전에 마리아와 같이 인간의 자의식을 강화시킨다고, 개고생을 한 트라우마가 스쳐 지나가려고 할 때. 강하게 머리를 휘두르며 단칼에 끊어버리고 입을 열었다.
“그럼 레인은요? 레인의 잡화점에서 지내는 게 아니었어요?”
“그런 정신 나간 녀석하고 1분 1초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없다. 너도 레인의 집에 가서 스테이크에다 딸기주스를 부어버리는 참사를 두 눈으로 꼭 목격하길 바래.”
그나마 요리는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퓨전요리가 주 요리인가? 딸기주스를 스테이크에 부어버리는 참신한 식습관에 어울릴 필요는 없겠지. 차라리 무지개 음식을 먹고 기절하거나 죽을 뻔한 게 더 편하다.
“그래서 레인의 집에서 뛰쳐나와 그 동안 행방불명으로 독립적인 수사에 들어갔다는 거죠?”
“그렇지.”
“그래서 얼마나 많은 여자를 꼬셨어요?”
“얼마 못 꼬셨어.”
꼬시긴 했구나. 이 양반은...
“그래도 난 어마어마한 정보를 담고 왔지. 그래서 6번째 양을 너에게 보낸 거야.”
“그래요? 언제부터 울타리도 못 넘는 애가 제 꿈에서 튀어나와 난동부리던 모든 원인이 전부 엘티노스 때문이에요?”
“잠잘 때 양을 세니까.”
“아니, 그거와 관계없이 6번째 양은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길래, 애가 울타리를 못 넘어서 갱스터가 되는데요?”
지금도 옆에서 과속하는 소리와 함께, 갱스터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매번 나와 엘티노스 주변을 계속 턴하고 있다가 엑셀을 밟을 때, 나무판자가 끼었는지 한 순간에 전복되어버렸다.
“뭐. 저 애야 유별나니까 상관없고 너의 왼팔에 잠든 건 월식이야?”
“그건 또 바로 맞추네요?”
“나는 의식과 무의식을 관리하는 상급신이야. 그런 거 하나 잘 알아둬야 무시를 안 당하지. 사회는 뭐 하나만 잘못하면 그대로 무시당하고 놀림을 받는 거야.”
“그럼 엘티노스 씨는 뭘 잘했길래 대마법사라는 칭호까지 받은 거에요?”
“당연히 마법을 잘 했지.”
이 양반하고 말하는 게 이렇게나 피곤할 줄이야.
하긴, 전설의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받으려면 그만큼 마법을 잘 해야지.
맞는 말이긴 한데 너무 짜증났다. 뭔가 다른 태클이나 발언을 기대했건만!
“월식은 하나이면서 여럿인 존재라고 하더라고요. 본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한 마리가,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조각으로 잘려나가 살아가고 있지만, 그 수많은 조각들이 하나 같이 정보공유를 하는 종족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면 그 중에 하나는 어릿광대가 가지고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너의 왼팔에 잠들어있는 월식과 더불어, 수많은 월식이 사방팔방에 다 깔려있다는 건가?”
“평행우주관점으로 보면 그렇죠. 사실상 다른 차원에서 월식이 넘어오는 것도 봤고요.”
그 날은 끔찍했지만 트라우마로 다시 급부상하기 전에 고개를 휘저어 떨쳐냈다. 생각도 하기 싫다는 굳은 의지가 다시 한번 빛을 발휘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엘티노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완전히 인간에서 벗어나려고 난동을 부리는구나. 너는 언제쯤 신세계의 신이 되는 거냐?”
“제가 이름 쓰면 죽는 공책이라도 주웠나요? 신세계의 신이 되기 전에 죽잖아요.”
“그래도 사과 좋아하는 사신이 따라붙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사과 말고 나를 좋아하는 뱃사공이 따라붙을 거 같아서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그럼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서, 천계에 있는 존재들은 인간의 몸 속에 봉인되어있는 상태라면, 마계는 지금 어떤 상황이 된 거에요?”
엘티노스는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가 자연스레 탄식으로 물들어갔다.
“어쩌긴. 초능력자들과 대판 싸우고 있지. 천계는 이미 멸망했다고 가정하고 둘이 피 터지게 싸우면서, 서로 극심한 소모전에 돌입하고 있어. 유랑극단의 움직임은 겉으로는 너의 잡화점을 찾고 있는데, 속으로는 또 다른 움직임이 보이는 거 같아서 불안하단 말이야. 세상을 지우개로 지워버리겠다던 계획도 너 때문에 실패한 걸 보면, 플랜 A에서 플랜 B로 넘어갈 거 같아.”
세상을 지우는데 조용한 방법이 남몰래 지우는 방법이라면, 플랜 B의 경우엔 세상사람들이 알기 싫어도 알게 될 정도의 소란스러움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한들 내 앞에 떠들어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고, 세상뿐만이 아니라 평행차원마저 위태롭게 하는 나에게 있어선 스케일이 너무 작았다.
허구한날 다른 사람이 “제가 오늘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따오겠습니다.”이러는데 이미 옆에서 달을 따와 세계를 멸망시켜버리면, 별을 따온다는 사람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을까?
당연히 하늘에 별을 따오는 건 오히려 달을 떠오는 것보다 더 위험천만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튼 세간의 눈에는 상대적으로 자신이 하는 일이 경쟁자보다 더 쉬워 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눈에 띈다는 의미다. 그러면 그들은 이제 어떻게 나와야 할까?
“뭐, 전 세계의 인류들을 인질로 잡아서 죽인다고 해도, 저와 관련된 사람들만 안전하다면 굳이 움직일 필요도 없을 것이고, 이전에 시간을 멈추고 죽였다는 거짓말은 통하지 않고, 이제 공간을 지운다고 할지라도 저의 존재만으로 지워진 공간이 다시 재생성되니까. 저들 입장으로는...”
날 유랑극단으로 초대하는 방법이 있다.
최악의 적을 자신들이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최고의 장소에서 처절하게 능욕하는 것이야 말로...
나를 죽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겠지.
당연히 자신이 죽으러 적진에 가는 바보 같은 사람은 없다.
“정말 사람이란 건 목숨이 너무 질겨서 탈이야. 그렇지 않냐?”
엘티노스도 사람이었던 시절이 있으니 장난끼가 가득 넘쳤다. 조그만 나뭇가지로 급소만 찔러도 죽는 게 사람이지만, 죽기 전까지 발악하여 가까스로 살아가는 것도 사람이다.
“그래도 소 힘줄보단 질기지 않더라고요. 그러면 슬슬 활동하셔야죠? 고작 보이드와 천계가 망하는 동안 어디에 숨어서 비밀병기를 만드신 거에요?”
엘티노스는 주머니 속에서 이상한 빨간 버튼을 꺼냈다. 설마 어디서 대륙을 이동하는 미사일이 날아오지 않겠지?
“이걸 누르면 모든 게 해결 될 거야.”
“뭔데요? 자폭스위치에요? 이거 누르면 누가 죽어요?”
“그거 누르고 5초뒤에 반경 1km정도는 모두 사라지는 거지. 강함의 유무도 따지지 않고 피하는 방법도 존재하지 않거든. 완전한 죽음을 만들어낼 수 있어.”
그래도 왠지 루니아 누나라면 살아서 돌아올 것 같다.
이전에 마법이 없으면 5초 안으로 1km를 뛰라는 소리잖아.
그게 가능한가?
“레인도 똑같은 물건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 녀석이 사용하면 반경 1km가 반경 100만km로 증가해버리니까. 이 세계가 완전히 끝장이 날 징조가 보이면 사용할 거야. 그리고...아마 모든 평행세계가 이쪽으로 거의 집결 되었을 때도 누를 거다. 멸망까지 가는 건 현명하지 않지.”
뭘 해야 반경 1km짜리가 반경 100만km가 되는 거지?
“아뇨. 모든 평행차원이 겹쳐지기 전에 제가 떠날 거에요. 애석하게도 사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레인에게 맡겨야죠. 선임이 일 처리를 못하면 후임이 대신 처리한다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너는 레인이 장난감 마법지팡이 휘두르면서 다이어 울프를 때려죽이는 걸 못 봤구나? 그 녀석은 지루하다고 툭하면 튀어나가서 사건을 일으키고 수습하는 게 취미라고. 내 생전에 별별 싸이코는 다 만나봤지만, 그 놈만큼 단단히 돌아버린 싸이코는 처음 봤다.”
사건을 일으키고 그걸 다시 수습하는 귀찮은 일을 지루해서 한다라...
아무래도 그 녀석은 면담이 좀 필요해 보였다.
특히 마법지팡이로 다이어 울프를 구타한 시점부터...
“확실히 제 후배는 정상인이 아니네요. 나중에 제가 확인하는 걸로 하고...이 꿈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나가야 해요?”
“글쎄? 뭣하면 6번째 양에게 물어봐.”
참나...잠에서 깨고 싶다고 해서 6번째 양에게 물어보면 해결책을 알려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6번째 양에게 가까이 가보니...
“저기 앞에 9와 3분의 4승강장에 뛰어들면 깨어날 수 있메에에.”
“너 말도 하냐! 그리고 4분의 3승강장이겠지!”
역사상 가장 소름 끼치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지금까지 봐왔던 정이 있으니 정말로 9와 3분의 4라고 쓰여진 기둥을 보며 중얼거렸다.
“좋아. 혹시 몰라? 여길 통과했는데 호그와트가 나올지.”
쓸 때 없는 걱정을 하며 긴장한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꿈일지라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바람을 가르며...
-파악!
“악! 내 이마!”
설마 낚인 건가? 눈 앞에 별이 비춰지면서 6번째 양과 엘티노스가 실실 웃을 거 같은 모습이 머리에 그려졌다. 하지만 비웃음도 없고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 흔들의자에서 떨어졌을 뿐. 고요함이 비어있는 공간을 한 가득 채웠을 뿐이다.
===========================================================================살려줘...아니 차라리 날 죽여줘...
[일요일도 출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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