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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가 약간 지나고 있을 무렵. 저 멀리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건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그저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뿐. 시나가 없으니 백발이 아니라 코발트 블루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기다리는 동안, 어째서 남자일 때는 검은 머리가, 여자로 변할 때는 코발트 블루가 되는가에 대해 고찰을 좀 해야 했다.

 

아니, 솔직히 내 유전자가 남녀로 따졌을 때, 머리카락의 색상이 바뀌어있다는 건 내 유전자중에서 머리를 짙은 파랑으로 물드는 유전자가 잠재되어있다는 건데, 여자로 바뀌어서 그 유전자가 발현된 것인가? 내가 만약 생물시간에 수마의 유혹을 견뎌냈다면, 지식으로 대할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네. 무슨 생각을 해도 제대로 떠오르는 게 없으니까.”

 

어떤 생각을 그리 하시는지요?”

 

여기 장르가 공포인가? 심장 하나가 날아갈 뻔했다. 어느새 뒤에서 나타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으니까. 적어도 잡화점 멤버들은 내가 생각을 할 때마다, 방해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앞에 있는 소녀는 나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저 주어진 정보 이외엔 아무것도 모른다.

 

상상하기 힘든 곳에서 튀어나오지 말아줄래?”

 

쿠쿡! 당신 어제는 그리 쌀쌀맞더니 맹한 구석은 좀 있나 보네요?”

 

나를 대놓고 놀리는 저 소녀는 리제로트 라 캄베리. 유랑극단 소속의 인형사이며, 당연히 내 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적인 면에서 본다면, 금빛의 애쉬 블론드와 더불어 맑은 하늘을 담은 푸른 눈동자. 하얀 밍크 코트와 하얀 벙어리 장갑을 끼고, 하얀 털 구두로 하얀 눈이 내린다면, 그것보다 더 잘 어울릴 수 밖에 없는 코디를 입고 왔다. 그 이외에 목도리를 하고 있는데, 목도리만큼은 기이하게도 다른 색상을 띄고 있는 걸 보아, 소중한 사람이 하나하나 정성스레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어쩌면 부모님 중에 한 명이 유산으로 남긴 물건이 아닌가 싶다.

 

아니면 상당히 아프시거나.

추측은 여기까지, 현실로 들어보기 전까지는 언제나 예상은 예상일 뿐이다.

 

흐응? 코발트 블루였어요?”

 

거리낌 없이 다가와서 화사하게 웃고는 내 머리색상에 언급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눈빛이나 분위기에서는 신기한 걸 본 듯,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을 걸고 있었지만, 나는 한숨을 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다리느라 추우니까 따듯한 곳에 들어가고 싶은데?”

 

그렇네요. 제가 좀 늦은 거 같아서 미안하기도 해요. 고양이 카페는 많이 들어갔으니, 오늘은 저곳으로 들려볼까요?”

 

벙어리 장갑이 가리키는 곳으로 보자, 거대한 건물 하나가 나를 맞이 했다. 상가건물이니까 그 안에는 다양한 목적을 지닌 간판이 많이 걸려있었는데, 그 중에서 옷 가게를 가리키는 듯한 모습. 옷 가게라고 하면 진절머리가 나는 판에, 또 옷을 사서 입을 생각을 하니 다음 미래가 참담하다고 본다.

 

내가 생각하는 옷의 기능은 움직이기 편안하고 계절에 따라 적정온도를 유지하게 만들면 그만인 것. 그리고 옷 갈아입는 것에 트라우마가 걸릴 정도로 싫은 이유라면, 저주받아서 공허속으로 내던져도 모자랄 판에, 아직까지 이 세상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백장미 때문이다.

 

나에게 거부권은 있어?”

 

없죠. 가요!”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남자가 좀 거슬리긴 했어도, 리제로트 손에 억지로 끌려가는 나의 처량한 신세에 대해 불쌍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 건물 안에는 거대한 백화점까지 있었는데, 고속도로에 달리는 차마냥 어마어마한 속력으로 옷 가게로 직진하더니 10분이 지났을까?

 

흐흥♪ 흐흐흥♫

 

어마어마한 양의 옷이 한 가득 쌓여가는 걸 느끼고 있었는데, 리제로트를 잘 아는 종업원인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는 탐욕이 가득한 시선으로 물들어있었는데, 리제로트가 마음에 들어 하는 옷은 꺼내놓고 다 사는 타입일까? 직원들도 전혀 귀찮아 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200골드라? . 카린? 이거 어때요?”

 

너도 이제 날 카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거냐...”

 

그렇긴 하네요. 그래도 뭐, 저의 인형이 되면 새로운 이름을 지어드릴 테니, 임시적이나마 당신이 여성이었을 때의 사용했던 가명으로 불러드리죠.”

 

제길. 어쨌든 그 옷은 왜? 너에게 잘 어울리냐고? . 잘 어울리긴 하네.”

 

그래요? 고마워요. 칭찬이라고는 1도 담겨있지 않는 공허한 예의범절이네요. 그래도 빈말이라도 칭찬을 들었으니. 이거 입으세요.”

 

잠깐만 뭐라고?

 

너의 옷을 사는 거잖아. 나는 이 옷만으로도 불편하고 귀찮아서 다른 옷으로 입고 싶지 않아. 게다가 이건 네가 카렌을 보냈을 때 덩달아 딸려온 거라고?”

 

어처구니 없는 건 얼마나 많은 인형을 소유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이즈에 딱 맞아서 기겁했다는 건 비밀이었다.

 

소녀에게 코디란 것은 무기! 언제나 새로운 무기를 착용하고 시험하는 것이야 말로 여성의 도리라고요! 언제까지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고 있을 건가요? 제니퍼! 저 소녀를 도와 이 옷으로 갈아 입혀주세요.”

 

기다려! 나에게 거부권을 좀 달란 말이야!”

 

제니퍼라고 불린 사람이 아마 옷 가게의 점장인 모양이다. 리제로트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알겠습니다. 리제로트님.”이라고 대답할 정도였으니까. 그래, 사람이 살다 보면 거부할 수 없는 순간이 있고, 도망치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잔혹한 현실도 있다고 하자. 하지만 이건 아냐.

 

이건 아니라고!!!

 

그러나 우악스러운 아줌마 파워라고 해야 할까? 자식을 보살피며 일도 하고 있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고 집안일의 프로마저 등극한 백전노장. 나 같은 것은 단숨에 제압한 뒤 능숙하게 옷을 벗기고 다시 입히기 시작했다. 오히려 루니아 누나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입히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려보니 리제로트가 골라준 옷으로 전부 뒤바뀌었다.

 

과거에 켈모리아에게 옷이 바뀌는 마법을 당한 이후로, 안경을 번뜩이며 나를 바라보고 흡족하게 웃고 있는 제니퍼의 미소가 날 당황시켰다. 다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단어가 내 입 밖으로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 프로시군요. 감사합니다.”

 

오호호! 당연한 일인걸요. 그보다 리제로트님과 많이 친하신가 보네요?”

 

, 아뇨. 그리 친하지는 않아요.”

 

지금은 결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혈투를 벌이고 있답니다. 옷도 사주고, 친근하게 대해주고, 먹을 것도 사줄 예정이고 놀러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절대로 호감을 줘서는 안되며 행여나 호감을 보일 경우에는 인형뽑기에 뽑혀서 나오는 인형마냥, 자의식이 없는 완전한 빈 껍데기가 되어야 할 터이니.

 

이런 생고문을 내가 왜 받아들였는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확실히 말해,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도망가고 싶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둘이 있는 동안 호감을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지만, 완전히 용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네요. 후훗!”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해서 웃고 있는 리제로트. 허나 저 웃음도 함정에 속한다. 상대와 놀 때, 상대가 웃으면 나도 모르게 전염되어 웃는 일이 있지 않는가? 그것을 노리는 거다. 허물없는 사이가 되면 그때부터 호감이 보이기 시작하며, 나는 철저하게 담을 쌓고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입장을 표현해야 하지만...

 

아까와도 말했듯이 나는 옷에 대한 트라우마가 없지 않아 있기에 기분이 좋지는 못했다. 다시 말해 호감을 사지 못했다는 의미겠지.

 

좀 웃고 다니는 것이 어때요?”

 

시끄러워.”

 

튕기기는...”

 

나는 튕기거나 그런 게 아니라 태클을 거는 캐릭터야. 하나부터 열까지 사소한 것은 넘어가지 않지.”

 

다른 말로 츤데레라고 하던데 확실하게 말해 나는 츤데레는 아니다. 태클을 거는 캐릭터 중 하나지. 만약 이게 정상적인 용사가 나오는 글이었다면, 나는 매번 잡화점 상인이 되어 용사에게 태클을 걸고 있는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으리라.

 

그거 왠지 좋아 보이는 배역인데?

 

그러면 이제 옷도 다 입었으니 소녀다운 일을 하죠.”

 

세상에 소녀다운 일이 있었던가?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일은 단 한번도 없을 텐데.”

 

그러면 몸소 체험해보세요. .”

 

리제로트가 뜬금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걸 잡는다면 결국 나의 패배인가?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이 있기에 거절할 수가 없다. 잘도 이런 곤욕을 치르게 만드는 군.

 

한가지 말해두지.”

 

뭔가요?”

 

화사한 웃음으로 나의 쓴 소리를 다 받아 쳐낼듯한 방탄미소.

 

나는 네가 무서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상황을 이용하는 것도 그렇고 하나하나 눈짓과 몸짓에 모두 계산이 되어 들어가고 있는 모습. 절대로 10대 청소년이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겉모습은 따라 할 수 있지만, 리제로트의 머릿속에서는 그 행동을 취함으로써 사소한 득과 실까지 전부 계산에 집어 넣었다.

 

단지 하루도 주지 않았지만, 머릿속에 그려진 시뮬레이션대로 내가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여유로운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그걸 아시면서도 저와 같이 다니시다니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요? 어서 저에게 푹 빠지셔서 인형이 되세요. 그러면 영원히 함께 지낼 수 있으니까.”

 

호감이라는 것은 매우 간단한 정의로 이루어진다. 그냥 그 상대방이 상대적으로 좋게만 여겨지면 된다. 그런 예시라면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라고만 말해도 그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증거랑 뭐가 다른가?

 

다만, 내 눈에 각인된 카렌의 모습이 떠오르자, 모든 잡생각은 물러가고 머리는 냉정하게 식어갔다. 단순히 손만 잡는 것만으로는 호감을 띄는 경우가 없으니, 잡기 위해 뻗으려는 그 순간...

 

-콰지직! 챙그랑!

 

유리가 깨져나가면서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가 나타났다.

 

목표를 찾았다.”

 

민첩한 몸놀림으로 무언가 휘두르는 것을 보자마자 리제로트의 손을 붙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신도 당황했는지 꺄악!”하고 비명을 질렀으나, 지금은 승부에 관련 없이 사고가 터져버린 상황. 암살자로 보이는 사람은 리제로트를 향해 단검 하나를 던졌지만, 내 쪽으로 당길 것을 알았는지 마법공학으로 이루어진 듯한 권총 하나를 나에게 겨눴다.

 

아니.

매우 익숙한 흑색권총에 황금빛의 마법수식과 마법진이 난잡하게 그려진 물건.

예전 하멀 씨가 쓰던 권총 그대로였다.

 

리제로트! 숙여!”

 

내 말에 즉각 반응하여 내 뒤에 숙였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빛으로 이루어진 방패를 소환했다.

 

-파앙! 콰지직!

 

크읏!”

 

정면으로 받아들이지 말걸 그랬나?

팔에는 어마어마한 통증과 거대한 충격으로 넘어질 뻔한 것을 겨우겨우 버텼다. 다만, 빛의 방패가 깨져나가기 직전이라는 것을 보면, 하멀 씨보다 더한 두 번째 마탄은 버틸 수가 없겠지.

 

남자의 목소리는 음성변조를 통해 잘 알아들을 수 없도록 깨져있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 모습으로는 나 자신은 지킬 수 있지만, 과연 리제로트를 죽도록 놔두는 것이 현명할까?

 

, 당신...어째서 저를...?”

 

착각하지마. 딱히 너를 위해서 이러는 게 아냐. 지금 이곳에는 민간인도 껴있어. 멋대로 다른 사람까지 죽는 건 내 눈으로 볼 수는 없지.”

 

이건 리제로트에 대한 호감의 문제가 아니라, 이브센티아에서 나로 인해 멋대로 죽어간 사람들 때문에 태어난 죄. 그리고 내 행동은 오늘도 여김 없이 무의식적으로 그 죄값을 치르기 위해 멋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다만, 저 암살자는 리제로트. 너를 노리는 거 같지만 말이야.”

 

표정이 어둡지만 굳은 의지가 하늘색 빛 청안이 번뜩이더니, 잔뜩 화난 소녀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월터어!”

 

이곳은 여성용 의류점이라 리제로트의 경호원이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천장을 뚫고 멋지게 나타나 자신에게 내릴 명령을 기다렸다. 그 전에, 저 천장은 벽돌로 되어있지 않았나?

 

저 빌어처먹을 암살자를 당장 도륙내세요!”

 

자신의 입으로는 소녀다운 일을 하자고 했던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소녀가 담기에는 과격한 말이 튀어나오자 마자, 암살자와 월터는 서로 격돌을 하기 시작했고, 그 사이로 우린 빠져나가기 위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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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날 기숙사로 이사 예정이라...그 날은 글을 쓸 수 있을지 없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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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나래 : http://cafe.naver.com/novu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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