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

 

 

 

침묵만이 감돌고 있는 이 상황.

내가 만찬을 억지로 종료시켰다.

리제로트의 사고패턴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만약 인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인형사라는 입장에 대해 조금 생각한 것뿐. 만일 내가 리제로트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만한 눈속임을 만들었으리라고 생각했다.

 

확률은 언제나 공평하게 50 50.

1%의 확률이라도 50 50으로 치환이 되는 세계다.

결과론적으로 생각하자면 맞거나 틀리거나 둘 중 하나일터.

 

억지로 무산시켜버리는 나의 임무는 여기서 끝이고, 내일 리제로트의 페이스만 휘말리지 않아도 해결될 일이다. 그런고로 나는 나 할말만 하고 쏙 빠지기로 결심했으니,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루나를 데리고 나가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독백을 하느냐고 한다면, 아니나 다를까...

 

거기 앉으시죠? 아직 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세상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일이 없는 법. 리제로트도 당할 수 만은 없는지 나에게 제안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나 보다.

 

선을 먼저 그었으니 이쪽에서도 선을 긋도록 하죠.”

 

의자로부터 반쯤 떠있던 엉덩이를 다시 붙이고, 마음속으론 혀를 차면서도 좋아. 듣도록 하지.”라고 말했다.

 

첫 번째로 시간연장을 좀 해주세요.”

 

시간연장?”

 

벌써부터 시간연장이란 소리에 골머리가 썩어 들어가는 기분이다.

 

솔직히 자정이 넘어가고 각자 돌아가면, 24시간동안 보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고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가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만 따져도 10시간이 안 될 것 같은데, 그러니 그 다음날 새벽까지 시간을 주세요.”

 

놀고 먹고 떠드는데 시간이 오랫동안 필요하던가?”

 

두 번째.”

 

내 이의를 무시하고 뜬금없이 두 번째로 넘어갔다.

 

데이트 플랜은 저에게 맡겨주시죠? 당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서 노느냐는 제 마음대로 인걸로 할 겁니다. 당연히 저희 집은 초대받지 않는다고 하니, 그와 비슷한 공적인 장소로 초대할 예정이에요. 거기가 어디인지는 미리 알려드릴 것이며, 믿지 못하시겠다면 미리 사전조사를 하셔서 제가 무슨 술수를 쓴 증거라도 발견하신다면 안 오셔도 됩니다. 내일 하루만큼은 정말 순수하게 당신과 놀러 다니며, 나에게 호감을 보이게 할 목적이니까요. 그게 제 승리조건이었죠?”

 

내가 리제로트에게 호감을 보이게 된다면 패배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만, 확실히 적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만으로 마음의 일부가 굴복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사적인 마음일 뿐이지, 유랑극단 자체에 굴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너와 나의 내기에서는 이기겠지. 그런데 설마 남은 세 번째라는 것이...”

 

. 당연히 패자의 벌칙이죠.”

 

인생이 정말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패자의 벌칙을 따로 정할 필요는 없을 텐데?”

 

도무지 내기에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 회피하려고 했지만, 리제로트는 오히려 그 점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먼저 선을 그어놓고 내가 한 말에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니? 그럼 저도 카렌을 보내주지 말까요? 그렇다면 꽤 공평하리라 생각하는데요?”

 

유리하지도 않는데 상대가 제안한 횟수만큼 자신도 따라 제안을 한다. 그거야 말로 거래의 기초이며, 자신만 당하지 않기 위해 세워놓는 전략이다. 내가 제안한 것과 더불어 리제로트 또한 맞제안 한다는 변수는 생각에 들어왔지만, 패자의 벌칙만큼은 차라리 피하고 싶었을 뿐.

 

제가 패배를 한다면 유랑극단을 나가고 원하신다면 목숨도 스스로 끊도록 하죠.”

 

저 말을 들은 나와 루나는 순간 움찔했다. 터무니 없게도 벌칙의 강도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에 나올 리제로트의 말이 무엇인지 뻔했기 때문이었다.

 

잡화점의 주인이 진다면 제 인형이 되어줘야겠어요.”

 

상대의 호감을 얻는 것은 매우 쉽다.

둘이서 놀러 다닌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불구대천지원수라고 해도 호감이 가는 상황은 반드시 존재한다. 조만간 내가 적들의 손에 붙잡히거나, 현혹당해서 적이 되었을 경우 행동강령을 좀 써놔야겠구나.

 

최대한 정을 버려서라도 곧바로 죽이라고 말이다.

 

제 제안이 이렇게 3개니까 받아주신다면, 카렌을 지금 당장 보내드리죠.”

 

끝끝내 나를 시험하고 있는 리제로트의 말에 당당히 외쳤다.

 

좋아. 지금 보내도록 해.”

 

주인님!”

 

루나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한 것처럼 보였어도, 이 제안은 받아들여선 안 되는 제안인 것쯤은 파악하고 있겠지만, 나에게도 생각이라는 것이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깊이 있는 눈빛에 대한 의미를 잘못 받아들였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달 토끼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전 반대에요! 어째서 주인님께서는 패배만 가득한 싸움에 들어가셔야만 하는 건데요!”

 

이건 저희 둘만의 거래입니다. 루나 플로니아 양. 그래도 잡화점 주인을 인형으로 만든다면 1주일마다 어떻게 지내는지는 영상으로 녹화해드릴게요.”

 

도발적인 내용과 도발적인 웃음. 원투펀치를 그대로 맞아버린 루나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망연자실한 얼굴로 변한 이유라면, 내가 루나의 손목을 붙잡고 저지했기 때문이니까.

 

루나. 밖에서 이야기 해.”

 

이야기 할게 뭐가 있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기계식 보병들을 다 끌고...아야야야얏!”

 

루나의 귀를 난폭하게 쥐어 잡고 자리에서 끌고 가며 리제로트를 향해 말했다.

 

그럼 카렌은 빨리 보내주도록 해. 내일 보도록 하지.”

 

이런 장소에 더 있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지금은 루나를 위해서라도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럼 카렌과 함께 내일 입고 오실 옷도 보내드릴 테니, 꼭 그 옷으로 입고 오셔야 해요?”

 

화사하게 맞이해주는 리제로트의 말을 뒤로 한 체, 루나를 끌고 어디론가 걸었지만 10분정도 걸어서 화가 났는지 루나는 내 손을 뿌리쳤다. 평상시와 다르게 씩씩거리며 화를 참고 있는듯한 얼굴. 따끔거리는 연녹색의 상실감을 마주하는 동안, 근처에 있던 가로등이 눈치 없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었다.

 

왜 그런 거에요! 무슨 짓을 한지 알기나 해요?”

 

분노에 휩싸여버린 루나. 자제심을 잃고 나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카렌이라면 제가 구해올게요! 이번 의뢰는 주인님께서 무리하시지 않아도 됐잖아요! 어째서 계획과는 다르게 먼저 치고 나가서 사고를 일으키는 거에요!”

 

나는 평온과 평화를 원한다.

하지만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면, 의도와는 다르게 정 반대로 나아가버리는 행동.

 

주인님께서 이루신 업적은 당연히 제가 잘 알고 있어요. 300년동안 주인님을 잘 알고 지내왔으니. 하지만 이건 아니에요! 보나마나 비열한 함정을 파놨는데, 그걸 보고도 뛰어든 꼴이잖아요!”

 

미안한데 이건 좀 말할게. 내가 먼저 치고 나가지 않았어. 리제로트가 날 먼저 만나고 이야기를 한 거지. 게다가 함정에 빠졌어도 나는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내가 없을 때 내기하는 행동은 좀 따져도 될까?”

 

안 돼요! 지금은 주인님이 루나에게 혼나고 있으니 조용히 하세요!”

 

루나가 화를 낼 때는 귀엽기도 하면서 내용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안쓰러워 보였다. 한숨은 마음속으로 내쉬면서 제 풀에 지친 루나가 잠깐 진정한 듯하니 말을 걸었...

 

언제나! 주인님은 매번! 루나를 짐덩이로 생각하는 거죠! 저도 달의 관리자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아직 안 끝났나 보다.

슬슬 추워서 잡화점에 들어가고 싶은데.

 

저기, 루나?”

 

아직 안 끝났어요!”

 

그대로 지금 계속 진행되면 내가 냉동참치로 변할 거 같은데?

 

잔소리는 안에서 다 들어줄 테니 슬슬 잡화점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될까? 추운데? 벌써 30분동안 찬바람보다 더 시린 잔소리를 들어서 신종플루에 감염될 거 같아.”

 

하아...알았어요.”

 

내가 그나마 애처로운 표정으로 올려다보니 기세가 누그러지기 시작한 루나의 얼굴. 그리고 잡화점의 문을 열고 나를 반기는 것은, 거대한 상자에 쌓인 알 수 없는 무언가. 아니, 알 수 없는 무언가는 아니지.

 

주인? 저 물건은 무엇이고...어째서 그런 모습을 또 하고 있는가? 슬슬 그런 취향으로 눈을 뜬 것인가?”

 

검은 고양이로 변한 레시아의 어조에서 질렸다는 늘어짐을 감지했지만, 그 말을 가볍게 넘어가지 못하고 받아 치는 나였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적은 없어요. 다만, 지금은 상황이 좀 안 좋아서 이러고 있을 뿐이죠. 아마, 내일까지 이러고 있을 거 같은데 길면 오후 중으로 끝날 거에요.”

 

빠져나갈 구멍은 이미 머릿속에 다 짜놨다. 나란 인간은 뻔해 보이는 함정을 들어가서 그대로 당하는 바보가 아니란 말이지. 그런 자신감이 루나의 귀를 움찔거리며 나에겐 질문공세로 바뀌었다.

 

주인님? 분명 내기는 자정까지라면서요?”

 

그렇긴 해. 하지만 도중에 그만둘 수 있는 방법은 언제든지 있지. 다만,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줄 테니 카렌의 상태부터 살펴보자고.”

 

도대체 어떤 녀석이 인간을 상자에 포장해서 보내는 거냐.

정말 인형이라고 생각하고 보내는 거 아냐?

용납할 수 없는 마음이 내 손을 거칠게 만들었고, 칼이나 가위도 들지 않은 체 완력만으로 쥐어 뜯게 만들었다. 다 뜯고 푹신한 매트릭스에 동화에서 나올 법한 드레스를 입은 소녀. 마치 왕자님의 키스를 기다리듯이 고요한 잠을 청하고 있는 카렌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음 한 구석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리는 것을 주워담을 수 없는 답답함을 해소하지도 못한 분노가,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악!”

 

주인...”

 

마스터...”

 

나를 진정시키려고 부르려고 했지만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한가?

결국 내 눈 앞에 카렌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숨을 쉬고 있어서 살아있다는 것은 잘 알았지만 그것뿐이었다.

 

영원한 잠에 빠진듯한 카렌을 보며 이성을 유지했던 것이 모두 날아가버렸다. 이렇게 만나려고 그딴 바보 같은 내기를 승낙했다니. 머리를 강하게 쥐어뜯어 정신줄을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머리카락은 정신줄이 아니라는 사실에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비릿한 맛도 났다. 피도 났으니 당연한 건가? 그런데 지금은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지금 당장이라도 카렌을 이렇게 만든 리제로트 그 가여운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고 싶은 충동만 일어났다. 어처구니 없는 파괴본능이 내 무너진 이성을 마음껏 침범하려고 했고, 루니아 누나가 뜬금 없이 내 앞에 나타나서 거울을 보여줬다.

 

카일? 잘 보이나요?”

 

장난치지도 않는 진지한 루니아 누나의 말이 내 이성을 겨우겨우 일으켜줬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눈시울이 붉게 발광하는 듯이 거울을 비추고 있는 소녀. 얼마나 쌔게 물었는지 입술에 난 피는 턱을 따라 흐르고, 눈에서 볼을 타고 미끄러지는 눈물들이 끊임없이 흘렀다.

 

하아...끄으윽...”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흐느끼느라 정신이 없었고 목이 메였으니 말하는 게 괴로웠다. 그래도 루니아 누나는 거울을 내려놓고 나를 감싸며 눈을 마주했다.

 

마음이 상한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제가 아는 카일은 지금보다 더 냉정한 사람이죠? 마음이 약해져서 무너져 내려도, 자신에게 닥쳐온 시련은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언니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포근하게 안아주고 등까지 토닥여주는 최강의 여기사. 나를 진정시키는 말을 그대로 귀에 담아 듣고 대답했다.

 

저는 본래 남자거든요. 정말이지...이런 몸은 너무 불편하네요.”

 

그러면 구별하기 쉽게 울보 카린으로 불러드려요?”

 

시끄러워요.”

 

이렇게 당하지만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런 수모를 겪었으니 그대로 넘어가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니 이제 리제로트를 어떻게 때려부수냐에 대한 생각의 톱니바퀴가, 루니아 누나의 포근한 품속에서 잔혹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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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일부터 출근확정났답니다.

이제 글은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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