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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뛰었는지 기억조차 나지는 않는데, 멈춘 이유라면 명확하게 리제로트의 체력에 한계 때문이다. 나야 어떤 모습이든지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운동을 빼놓지 않았지만, 리제로트는 인형을 이용한 안정된 삶을 살아서 그런지, 자기 관리가 허술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체력적인 면에서는 매우 약했다.

 

제발...! 그만 좀...! 뛰라고요!”

 

비상시에 도망을 갈 때는 월터가 공주님 안기로 리제로트를 옮겼는지 몰라도, 지금은 내가 옆에서 공주님 안기로 도망치지는 못하니까, 리제로트의 손목을 붙잡고 무작정 뛰었는데, 일부러 2분정도 더 뛰고 난 뒤에 리제로트의 손목을 풀어주자, 땅에 절을 하고 있는 금발의 소녀를 볼 수 있었다.

 

당신은...어째서...우윽! 멀쩡한 거에요...!”

 

운동을 하니까.”

 

리제로트의 삶에 있어서 인생에 가장 싫은 순간이 있다면, 그 중 하나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때까지 달렸다는 것이 될까? 사람이 오래 달릴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는 다리보단 폐활량 때문이다. 가슴속에서 어마어마한 열과 숨막히는 기분이 중첩으로 엉망으로 만들어서, 뇌에서는 제발 그만 좀 달리고 숨을 고르자고 협상을 내놓는다.

 

대답이 안 되잖아요!”

 

너도 운동하던가...”

 

지구력을 늘리기 위해선 운동을 하며 오래 달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금방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꾸준하게 달려야만 1초정도 늘어난다면 매우 크게 늘어나는 거겠지.

 

당신은 정말 막무가내군요. 도망치는 것은 좋지만 제 손목을 무작정끌어서 아프잖아요! , 그래도 절 구해줬으니 보답은 제대로 해드리죠. 저에게 호감 갔던 건 한번 무효로 처리해드릴까요?”

 

아니. 나는 너에게 호감이 가서 구해준 게 아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 받으니까 그 원인을 잠깐 외각으로 이동시킨 거지. 그리고 난 너에게 단 한번도 호감간 적 없어.”

 

사람을 구하는 것에 있어서 호감이고 나발이고 전혀 없다. 순간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초적인 도덕관념. 그거 하나만으로도 관대한 것일뿐더러. 말 그대로 만약 리제로트를 그 장소에서 빼내지 않았다면, 사람이 많고 복합적인 그 건물에 부수적인 피해와 인명피해는 덤으로 가져가야 하는 셈이니까.

 

결국 보는 눈이 너무 많아져서 사건이 너무 커지게 된다.

그런 사건에 덩달아 나까지 휘말리고 싶은 경우는 죽어도 없기 때문에, 세간의 눈에는 리제로트와 관련이 있는 테러활동이라고 적혀야 한다.

 

저는 분명 무의식적으로 구해주실 때. 호감이 갔다고 생각을 했지만, 단순하게 생각을 해보면 처음 보던 남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가 그 사람이 쓰러지면, 무심결에 도와주고 싶고 행동이 우선이라면 도와주게 된다는 거죠?”

 

이해는 빠르네.”

 

그러니 이건 호감의 문제가 아니니까 넘어간다.

 

그나저나. 그 사람은 뭐야? 스토커? 혹시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다른 남자와 같이 다니니까 앙심을 품고 이런 일을 저지르는 걸까나?”

 

비아냥거리는 태도는 일부러 보이지 않았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 고의로 되지도 않는 소리를 했다.

 

스토커가 만약 붙었다면 월터에게 찢겨나갔겠죠. 저래 보여도 꽤 우수한 인형이니까요.”

 

인형?”

 

. 과거 인형의 신이라고 불리는 사브누아 베리타네시아 님은 비어버린 판도라의 상자 안에 연인의 영혼을 담아, 인형의 원동력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죠. 당연히 저 또한 비어버린 판도라의 상자를 얻어 월터를 구속하고 있는 것뿐이랍니다. 비록 립스틱을 칠해줘야 간단한 대화를 입 밖으로 열지 못하는 인형이지만, 저는 그를 매우 신뢰하고 있어요.”

 

그래서 누구의 영혼이지?”

 

소녀의 비밀은 많아야 좋답니다? 물론, 당신이 여리고 귀여운 소녀의 모습 그대로 제 인형이 되어드린다면 그 비밀을 이야기 해드리죠.”

 

이야기 하기 싫으면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해.”

 

누구의 영혼이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꽤 친애하던 사람의 영혼인 것처럼 보였다. 리제로트는 몇몇 사람들에게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지만, 혹시 월터에 지닌 영혼이 남자이기에, 다른 남자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거라면, 필히 가슴 아픈 과거를 지녔겠지. 약간은 슬픈듯한 눈빛에서 원래대로 자신만만하게 돌아오기까진 0.3초보다 더 짧은 시간이 걸렸다.

 

혹시 불쌍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저걸 돌려 말하자면 호감이 가냐고 물어보는 건데...

 

아니.”

 

당연히 아니다.

지금은 리제로트의 장난으로 카렌이 혼수상태 비슷한 거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절대적인 적의는 확실하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하루가 지나려면 시간은 많이 남았다. 그 전에, 연장까지 요청을 했으니 내일 새벽까지라고 봐야 하지만...

 

주변에 살기가 짙게 물들이자 내 몸은 자연스레 반응을 했다.

 

너의 그 경호원이 그리 유능하지 않나 보네.”

 

? 그게 무슨 소리죠?”

 

리제로트가 전투에 취약하기에 월터라는 방패의 인형을 옆에 두고 있다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황금빛의 마탄은 리제로트에게 쏟아져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아앙!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환도를 급하게 만들어냈지만, 시간이 없으니 검집을 치켜세우며 몸을 웅크리고 충격에 대비했다. 그 결과는 처참하게도 벽 건너편까지 날아갔는지, 흐릿한 시선과 작렬하는 등의 고통. 다시 천천히 일어서서 정면에 있는 남자에게 살기를 뿌렸다.

 

리제로트는 이미 사색이 된 상태에서 몸을 떨고 있었는데, 그 자랑이던 초능력을 사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상대는 눈을 가린 맹인.

 

눈과 눈을 마주할 수 없는 상대야 말로, 리제로트의 가장 큰 적이 되리라.

 

이유라도 알고 좀 구르자...!”

 

리제로트를 노리는 것은 맞지만, 그녀를 처리하는 것에 있어서 방해되는 존재가 나인 것은 제대로 집어낸 모양. 단검을 들고 날아드는 몸을 보고, 겨우 발검을 하여 힘겨루기로 동선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힘을 겨루면 내가 밀리기 때문에 옆으로 발을 옮기고 휘둘렀다.

 

단검은 나에게 닿지 않지만 환도는 암살자의 몸을 닿았으리라 생각했는데, 상대적으로 매우 긴 검의 궤도에 맞춰, 림보라도 하듯이 유연하게 허리를 거꾸로 휘기 시작했다. 정말 뼈가 없는 괴물을 암살자로 키워서 보내는 기관이 있는 건가?

 

애석하게도 다시 황금빛의 광선이 총구에서 솟아올랐고, 방패를 소환하기보단 온 몸으로 에너지를 퍼트려서, 반사신경과 운동신경을 극한으로 늘렸다. 어떻게 피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오감으로 감지하는 신체구조상 하나의 감각에 걸리기라도 하면, 본능적으로 몸은 움직이게 되어있다.

 

리제로트! 월터를 불러!”

 

사실 월터는 어찌되었든 간에 나는 밀려서 패배하거나 심하면 죽을지도 모르겠으나, 끈임 없는 공방전을 벌여가면서 내 페이스를 되찾기 시작했다. 암살이라는 것은 잘 싸우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잘 죽이는 것이다. 시간을 끌면 이쪽이 유리하지.

 

숨을 고르려는 건지 전략을 구상하는 건지 가만히 멈추고 있는 암살자.

 

나는 검을 고쳐 잡고 입을 열었다.

 

누가 보냈지?”

 

아무래도 상대는 맹인일 뿐만 아니라 말도 하지 못하는 걸까? 질문에 돌아오는 것은 꾸준히 맴돌고 있는 침묵뿐이었다.

 

카린 씨! 날려버려요!”

 

정작 목숨을 노려지고 있는 리제로트는 나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분명 평탄한 구조로 이루어진 계획이라 생각했는데, 본의 아니게 어처구니 없는 형태로 깨져버렸다.

 

사실, 내 계획은 나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리제로트를 역이용하여, 나에게 빠지게끔 유도를 하는 것이 가장 큰 그림이었다. 관점을 달리한다면 리제로트가 나에게 호감을 얻어 스스로 인형을 만들기로 포기한다면, 아니...사실 나를 인형으로 더욱 만들려고 할 것 같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이런 바보 같은 싸움을 무효화 시키는 것에 있었다.

 

호감을 얻기 위해 공격하는 리제로트와 호감을 주지 않기 위해 방어하는 나의 싸움.

그 싸움 자체를 없는 셈으로 쳐도 나는 이미 받을 거 다 받았고 잃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리제로트가 나에게 호감이 가서 빠지도록 만들까? 방법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런 소녀의 모습으로 같은 동성과 연애를 하라고? 솔직히 말해서 가능은 하지만 하기가 좀 싫다.

 

싫은 이유야 당연히 귀찮기 때문이지.

 

어쨌든 이건 이거고...

 

-슈아악! !

 

저건 저거다.

끊임없이 목숨이 줄타기 하듯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상황에서, 내 뇌가 잘 굴러가는지에 대해 잡생각을 좀 했더니 삼천포로 빠져서, 공격을 해야 하는 타이밍에 방어만 했다.

 

자세를 낮추고 양손으로 고쳐 잡아 빠르게 접근해서, 수직으로 베는 것이 가장 간단하지만, 어마어마한 힘과 속도가 붙는다면 굉장히 위협적인 공격수단...

 

-휘이익!

 

인데 저걸 그냥 피해버렸다. 암살자의 몸이 크게 움직여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딱 필요한 부분만 작게 몸을 움직여서 빠르게 회피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상대가 가지고 노는듯한 기분이다.

 

공격에 유효타가 없고 나는 방어와 흘리기만 하고 있으니, 서로에 대한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마탄이 날아들어도 상관 없이 온 몸에 보호막을 두르며 뛰쳐나가면 될 뿐.

 

고출력의 마탄만 맞지 않으면 내 몸이 튕겨나갈 일도 없다. 그리고 고출력의 마탄은 적어도 2초 이상은 마나를 모아야 하니, 2초미만의 공격으로 빠르게 치고 나아가면 되지만,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빠르게 도달하는 검기를 쏘아 보내면 되는 일이다.

 

혈월!<Blood Moon>”

 

피빛의 초승달 하나를 그리자 마자 뛰쳐나가 암살자의 몸을 강타했다. 초기에 날 벽으로 날려 부딪치게 했지만, 이번엔 내가 암살자를 벽으로 날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뜨리는 것을 성공했으니까.

 

힘겹게 이긴 싸움은 아니다. 본래의 모습이라면 10초도 오래 걸리는 편. 정작 6분 이상을 끌어서 내리며 겨우겨우 제압했다. 내가 거칠게 몰아 쉬는 숨소리가 이제서야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죽은 건가요?”

 

느긋하게 입을 여는 리제로트. 하지만 암살자의 행동도 그렇고 월터가 놓치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네. 다 너의 자작극이야.”

 

. 맞아요. 잡화점 주인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 보려고 했답니다. 얼굴은 귀엽다고 하더라도 쓰임새가 무엇인지는 알아둬야 하니까요. 그래도 실제로 제가 저에게 암살의뢰를 해서 뛰어난 사람을 모집했다고 하지만, 설마 이렇게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금 뭐 하는 거죠?”

 

나는 마법공학으로 이루어진 총을 뺏고 천천히 지켜봤다.

황금빛의 마탄. 그건 하멀 씨의 고유마법 중 하나였으니까.

 

지금에 와서 권총을 자세히 보고 있는데 하멀 씨가 사용하는 마법진이 존재했다.

 

이 세상은 마나만 있으면 마법공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

 

마법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된다. 마법진과 마법수식이 적혀있는 마법공학으로 이루어진 물품이라면, 마나만 집어넣어도 사용할 수 있다.

 

한 때. 이 암살자가 하멀 씨의 후손이라던가, 망령이라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심안까지 터득한 암살자다. 하멀 씨의 후손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레이비스 가문이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누가 차기 당주인지 얼굴까지 확인해봤다.

 

이 사람은 레이비스 가문과 관계도 없고, 하멀 씨와 관계가 없지만...

권총을 만든 사람에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권총을 품속에 집어넣은 체, 차갑게 식어버린 머리를 이끌고 리제로트에게 걸어갔다.

 

그렇네. 그러고 보니 나의 호감을 얻기 위해 자작극을 펼치는 것은 안 된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군. 그래서 이런 바보 같은 해프닝이 일어나버렸어. 어차피 너는 죽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믿고 있었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그러면 저를 경멸하실 건가요?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이제서야 저와 똑바로 마주해주시는 건가요?”

 

처음부터 이 녀석은 호감이고 뭐고 그런 건 없었다.

 

호감에 상관 없이 언제나 기습적으로 인형을 만들어버리면 그만.

어느 사이에 빠져들어갈 것만 같은 짙은 보라 빛의 눈동자와 대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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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강의를 재미있게 할 줄은 몰랐는데...

역시 특강 강사는 다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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