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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협박 같은 협박을 당한 상태로 레이몬드 저택 안에 있을 때, 조용히 그림모델이 되어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그런데 왜 수영복을 입고 하라는 걸까?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르겠지만 붉은 색의 비키니는 분명 이곳에 있어야 할 물건이 아닌데. 의외로 300금을 주고 사왔다는 이 물품은 검은 달의 여왕이 직접 팔았다고 한다. 레이몬드는 그림에 집중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막연한 상황에서, 나에게 계속 힐끗힐끗 눈을 돌리고 있을 때. 니아 씨는 태양보다 더 화사한 웃음으로 우리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아. 이렇게 보니까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그보다 아리엘 님은 뭘 입으셔도 외모가 받쳐주니까. 지금 밑그림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그림이 되었어요.”

 

그보다 전 지금 추워죽겠는데…….”

 

초여름이라고 해도 바람이 불어오면 추운데, 이곳은 바람이 자주 놀러 오는지 체감 온도는 10도 미만이었다.

 

어머나. 도련님? 지금 아리엘 님께서 춥다고 하시니까. 그림은 멈추고 가서 안아주는 것이 어떨까요?”

 

이 말을 들은 레이몬드와 나는 동시에 니아 씨를 바라봤다. 무식할 정도로 강도 높은 주문이 레이몬드에게 들어왔으니 허탈한

 

어라? 저는 그냥 아리엘 님께서 춥다고 하셔서 안아달라는 것뿐이에요. 춥지 않도록. 물론 그 이상의 단계로 진행하신다면 부디 저에게 말씀해주셔야 제가 이 자리를 비킬 수 있답니다?”

 

그 이상 단계는 대체 뭔데?

나갈 리가 없잖아.

 

그러면 실례할게.”

 

잠깐만!”

 

포근한 온기가 내 상체를 덮기 시작했다. 이거 아마 세피르가 본다면 무시무시한 눈으로 볼 것 같은데? 레이몬드에게 안겼을 때는 의외로 약해 보이는 체구에 비해 다부진 근육이 느껴졌다.

 

, 의외로 단련되어있네.”

 

니아 씨에게 훈련을 받고 있거든. 따듯해?”

 

, 그만 놔줬으면 좋겠어. 이제 따듯하니까.”

 

따듯하다 못해 온 몸이 과열로 터지기 직전이라 레이몬드의 몸을 살짝 밀어서 떨어졌다. 잠깐 안겼을 뿐인데 어째서 온 몸이 반응을 한 걸까? 아까 레이몬드에게 달콤한 향이 났는데?

 

설마. 오늘 니아 씨에게 받은 향수를 쓴 거야?”

 

, 어떻게 알았어?”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밀한 계산에 작열하고 있는 몸보다는, 소름 끼치는 한기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라라? 저는 잠깐 할 일이 있어서 나가볼게요? 두분 모두 그렇게 찰싹 달라붙어있으면 오해하겠어요? 호호!”

 

여우무녀의 비술이라서 그런지 내 이성을 녹여버리는 향수 때문에, 온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거의 무방비상태. 아까 레이몬드를 살짝 밀었던 팔도 서서히 접혀서 어쩌다 보니 기대는 형태가 되어버렸고, 내 머리 위에서는 침을 삼키는 소리가 청명하게 들려왔다.

 

역시 무시무시하네. 니아 씨가 말한 것처럼 되어버렸으니까. 오늘은 어떻게든 아리엘과 엮어주겠다고 말을 했더니. 이런 난폭한 방법을 사용할 줄이야. 이번 일은 너무 미안해. 솔직히 이런 방법으로 연인 관계가 되거나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그걸 알고 있다면 다행이지만아까는 추웠는데 이번엔 온 몸이 너무 덥다 못해 녹아버리겠어. 이 바보 같은 비술은 언제쯤 풀리는지 알려줄래?”

 

그거. 니아 씨에게 들었을 때는 키스를 해야 한다고…….”

 

너무 뻔히 보이는 진행방법이잖아. 지금 당장 키스를 한다면 무조건 레이몬드가 죽어버리는 건 한 순간의 일이다.

 

잠깐만. 어떻게든 진정할 테니 그런 모험은 떠나지마. 지금 당장 정기를 흡수한다면 조절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니까. 어떤 사람은 그 편이 더 기분 좋다고는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닌걸.”

 

사실 황홀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모두 절제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빅터의 꿈에서 하마터면 빅터를 죽일 뻔한 일도, 내가 절제를 못했다기 보단 빅터가 절제를 하지 못했으니까. 어쨌든 레이몬드 가문의 아들이 이상한 몽마 때문에 죽는 일이, 신문 1면기사에 실려서 모든 곳에 돌아다니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니까.

 

레이몬드는 그림을 마저 그린다고 캔버스 앞으로 이동했지만, 여우의 비술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지속되어있었다. 몽롱한 상태에서 분홍빛으로 물드는 상태는 무시무시한 현상인데, 매료를 시키는 입장에서 매료가 당한 입장으로 바뀌어보니, 사람이 왜 정신을 못 차리고 흐느적거리는 가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세피르?”

 

왼팔에 차가운 비늘이 기분 좋게 해줬다. 검은 뱀은 내 팔을 물고 피를 흘리게 만들었는데, 그 통증 때문에 몽롱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잠깐! 왼팔에 피가!”

 

괜찮아 레이몬드. 이게 적절한 조치니까.”

 

아파서 정신을 차리게 되자마자 의식이 확연하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만하면 됐어.”

 

검은 뱀은 내 팔에서 입을 때고 입을 커다랗게 벌리기 시작하더니, 엘릭서가 담긴 작은 병을 내 오른손에 토해냈다. 비록 진짜 몸 속에 있었는지 끈적한 소화액이 붙어있었지만, 병뚜껑을 열고 상처부위에 뿌렸다.

 

다음부터는 제발 정상적으로 건네줘. 진짜 몸 안에 삼켜서 오지 말고. 아무리 소화액에 유리가 녹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런 소화액이 범벅이 된 상태로 유리병을 잡기 싫단 말이야.”

 

[다음부터는 챙겨가도록 해.]

 

텔레파시로 들려오는 세피르의 목소리는 심기가 살짝 불편한지 조용한 어조로 들려왔다. 세피르의 심기를 건드린 이유라면 니아 씨 때문일까?

 

아무래도 켈모리아가 부르는 것 같아서 돌아가봐야 하는데, 슬슬 마법학원의 옷이 세탁이 되었다면 돌려줘요. 니아 씨.”

 

문 뒤에 니아 씨가 있을 것 같아서 말했는데,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면서 ~ 지금 다 되었어요.”라고 말하며 들어왔다.

 

아리엘 님은 정말 눈치 빠른 사역마를 잘 두셨네요? 그보다 저를 너무 적대하는 거 같아서 무서운데요?”

 

세피르가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입을 벌려 위협했지만, 나는 니아 씨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세피르가 화난 이유라면 니아 씨가 더 잘 알잖아요. 다음에는 레이몬드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조심하도록 할게요. 오늘 아리엘 님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 분인지 잘 알았으니까. 다음에는 좀 더 치밀한 방법으로 두 사람을 엮어드리겠습니다~”

 

다음에도 또 하겠다는 니아 씨의 선전포고를 들은 세피르는 텔레파시를 보냈다.

 

[저 여우 정말 싫어.]

 

***

 

세피르가 조용히 입을 굳게 닫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적은 처음이다. 가만히 내 왼팔에 감겨있는 상태로 혹시라도 화를 내는 것이 아닐까? 괜히 신경 쓰이기도 하고 나에게 쓴 소리를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걸까? 눈치 없게 내가 먼저 다른 말을 걸기도 거북해서 20분동안 걷고 있었다.

 

니아라고 했던가? 아까 그 여우무녀. 애초에 그 무녀가 걸고 있는 비술은 모두 진짜야. 그런 거에 방심하면 절대로 안 돼.”

 

알았어.”

 

그런데 왜 그렇게 기운이 없는 거야?”

 

여태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사람이 누군데? 나더러 기운이 없어 보인다고 말하다니? 어이가 하늘을 찔러서 별을 만들었다고 해도 믿겠다.

 

, 그야 세피르가 아무런 말도 없이 화내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화를 내도 나는 아리엘이 잘못한 게 아니란 것까지 알고 있어. 보나마나 반강제로 브레체투스 가문에 끌려갔겠지. 나는 적어도 200년 이상을 산 최상급 인큐버스라고? 인간들이 꾀라던지, 여우무녀의 조잡한 꾀는 대부분 꿰뚫고 있으니까. 그걸 알고 있는 내가 아리엘을 나무랄 수는 없잖아?”

 

그럼 빨리 말하라고…….

세피르가 사려심이 깊어서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지만….

 

. 그래도 레이몬드에게 안겼을 때는 꽤나 화가 났으니 이거 하나는 혼내야겠어.”

 

역시나 안심이 되지 않는 사역마였다. 검은 마기가 세피르로부터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안개가 내 눈을 가린 사이에, 성장한 세피르가 나를 안아 들어올리며 자연스럽게 내 두 팔이 세피르의 목에 걸쳤다.

 

어째서 본 모습으로 돌아온 거야?”

 

그야. 이렇게 공주님 안기를 하고 가는 게 아리엘에게 처벌할 거였거든. 어때? 속죄할 마음이 들어?”

 

장난스레 웃으면서 붉은 눈은 웃지 않고 내 반응을 흥미롭게 살펴보고 있었다. 뭐라 말해야 했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속죄를 안 하겠다면 이대로 키스해도 상관 없는 거지?”

 

하지마!”

 

그래도 나쁜 아이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어째서 내가 세피르에게 밀리고 있는 거지? 그보다 화를 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세피르였지만, 이런 식으로 화를 내는 것은 논외라는 소리인가? 어떻게 생각하면아니, 뭐가 어떻게 생각하면이야!

 

웃기지마! 아무리 내가 잘못을 했다고 해도 이번 일에 이런으웁! !”

 

발버둥을 치면서 거리를 떨어뜨리려고 해도 온 몸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져 나가버렸다. 인큐버스의 키스를 받자마자 온 몸이 다시 불타면서, 내 입안에 침범한 뱀이 내 온 몸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하아그만그만해…! 미안해앞으로는으우웁!”

 

아무래도 세피르는 날 용서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잔혹한 건지 달콤한 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벌을 20분 정도 받고 난 뒤에, 그대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구름 중에서 어떤 게 제대로 된 솜사탕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 찾아보았다. 그리고 어지러웠던 머리가 서서히 멀쩡해지기 시작하면서, 세피르에게 내려달라고 입을 꺼냈고….

 

사역마 주제에!”

 

-파악!

 

세피르의 정강이를 강하게 차버렸다.

 

아프잖아. 아리엘. 아무리 내가 단련되어있다고 해도 지금 정강이를 맞으면 아픈 건 똑같다고?”

 

사역마 주제에 주인에게 벌을 주려고 하다니!”

 

나에게 벌을 줄 때는 직접 키스해줬으면 좋겠는데?”

 

시끄러워! 너에게는 상이잖아! 바보 같은 뱀가죽을 벗겨서 말려버리기 전에 슬슬 공간이동이나 하란 말이야!”

 

화가 난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에서 압도한 것이 너무 괘씸해서 소리질러버렸다.

 

나도 솔직히 그러고는 싶은데 우리 둘만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잖아? 게다가 아리엘은 나중에 내 신부가 되야 하는 걸? 내가 그렇게 만들 거라고? 그러니 여기서 진도를 빠르게 나가야아팟!”

 

진도고 뭐고 세피르의 말이 더욱 더 괘씸해서 다시 발로 차버렸고, 그 이후에 머리에서 생겨난 말들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이 바보! 멍청이! 건어물!”

 

뱀은 건어물이 아닌데 말이지. 알았어! 그만 때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었을 때아니! 아직!

 

시끄러워!”

 

다시 한 번 더 때리고 슬슬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엉뚱한 곳에 분노를 폭발한 뒤에 빠르게 식어가는 머리는 이윽고 냉정하게 다음 해야 할 일을 정했다.

 

켈모리아가 날 찾는 거야?”

 

맞아. 데리러 왔어.”

 

그러기엔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

 

그럴 줄 알고 내가 돗자리를 가져왔지. 잠깐만 기다려봐.”

 

주변을 둘러볼 때는 사람이 없는 평원이라서 적당한 곳에 돗자리를 펴야 하는데. 이비가 날아오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불안감이 내 정신을 급습하기 시작했다.

 

잠깐? 돗자리를 가져왔다는 게 설마….”

 

-브웨에에에에에에엑!!!

 

“…….”

“……이상하네? 분명 제대로 다리로 잡아서 들고 오라고 했는데. 하하!”

 

하하가 아니잖아!”

 

돗자리를 내뱉으라고 했더니 그 이외에 동물 뼈들이 사방에 흩뿌려지면서, 쉬고 갈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고, 이비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삑삑!”하고 내 어깨 위에서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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