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96
596
잡화점 내부에서는 본래의 모습으로 지낼 수 없으니, 밖으로 나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인생은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인데, 어째서인지 밖으로 나가도 나는 ‘카린’이라는 여성체의 모습일 뿐. 결국 한숨을 쉬고 나중에 되돌아갈 방법을 찾기로 생각했다. 대부분 짧은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폭염이지만, 숲에는 긴바지를 입어야 마음이 놓인다.
맨살이 드러난 부분에 가시에 찔리거나 독을 지닌 생물에게 물리기라도 하면, 어떤 변수로 작용해 목숨을 빼앗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리베리티아 고원 특유의 바람은 오히려 시원하다 못해 서늘할 정도니, 반팔과 반바지를 입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된다. 최적의 기온으로 맞춰진 이곳이 낙원이긴 하지만...
“그 덕에 이곳에 몰려오는 수많은 몬스터들과 인간들의 전쟁터가 되었구나.”
덕분에 비릿한 냄새가 떠나지 않는 붉은 빛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리베리티아 고원에서 조금만 더 가면 요정과 엘프들이 사는 숲이 나오지만, 어차피 들어갈 일이 없으니 비명을 들었던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다. 주변에 시체로 황폐해진 곳을 산림욕 하듯이 들어갈 수 없는 이 찝찝한 기분은 뒤로하고, 세린에게 말을 걸어 내가 궁금한 것부터 말했다.
“혹시나 하는 말인데 너도 내 상태정보라던지 그런 걸 수정하거나 멋대로 작성할 수 있어?”
“일부는 가능하지만 일부는 불가능하지.”
“내 성별은?”
“......”
아. 침묵을 하시겠다?
“당장 돌려내! 이 로리콘아!”
“나는 겨우 로리콘이 아냐. 그저 귀여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것뿐이지. 만약 잡화점의 주인이 키도 작고 귀여운 남자애나 여자애였으면, 보살필 맛이 나는데 어째서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사람이 우중충하고 따질게 많은 남자였는지.”
“어째서인지 평소의 카린보다 키가 좀 더 작더니만!”
그나마 여성체로 변했을 때는 160cm 후반대로 갔다면, 이번엔 아예 150cm초반대로 가버렸다. 이래서 내 프로필을 적을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키가 어느 정도고 몸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죄다 ‘불명’으로 적거나 ‘변수가 많음’으로 적어야 하잖아!
대체 어느 신체검사원이 좋아하겠냐고!
그보다 ‘겨우’라는 말을 사용한 거냐? 지금?
“아무래도 은팔찌를 차야 할 녀석은 너로구나.”
“글쎄? 잡화점에 팔이 있던가? 집을 감옥에 넣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보라고 하시지?”
저 얄미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카린의 입지가 더 굳어져서는 안 되는데...
“지금은 주변에 있는 시체부터 조사를 해야 되나?”
“시체를 뒤적거린다고? 그런 지저분한 일을 그런 귀여운 모습으로 할 거야?”
“생존에 있어서 귀엽고 멋지고가 어디 있어? 그냥 추악하게 사는 거지. 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게 시체든 쓰레기더미든 모두 뒤적거리며 살고 있는 거잖아. 어차피 모든 생명은 죽지만, 모든 생명은 구차하게도 살아남으려는 강한 생존 의지가 있지. 그거야 말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거야.”
거대한 손톱에 깊게 파인듯한 갑옷. 그 안에 들어있는 따듯한 내장들이 텅 비어있었다. 사람이 습격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고, 어처구니 없게도 정말 마왕군에게 쫓겼는지 내 근처만 해도 풀 숲에서 감시하는 듯한 고블린 무리가 감지 되었다.
그래도 일단 나를 공격하지 않으니 모른 척.
다만, 마나가 요동치며 주변의 공기를 휘두르고 있을 때. 주변에서 발 소리가 더 들려왔다.
“뭐지? 지원군인가?”
곧 죽어갈 것 같은 여성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울려오자마자, 주변에 있던 고블린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거기 이쪽으로 빨리 오세요. 그런 곳에 있으면 죽어버릴 테니까.”
“아, 알았다. 그런데 너 같은 소녀가 이런 곳에 무슨 일이지?”
소녀라는 말에 열이 받쳤지만,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 멋대로 화내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럼 당신 같은 기사가 이곳에서 대패한 이유는 뭔가요?”
흔적을 쫓다 보면 멋대로 추측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전투가 벌여진 것으로 보였다.
“대패한 이유야 13대 마왕 레프리시아가 이끄는 군세 때문이지. 벌써 프리트론까지 함락하고 있어. 미약하게나마 부탁을 하지...”
“제가 부탁을 받는다고 해도 손쓸 도리는 없어 보입니다만...”
“적어도 프리트론에 있는 귀족들만이라도...”
“귀족이 아니라 약자를 지키는 게 기사의 사명 아니던가요? 저는 어차피 기사도 아니고 민간인이니 그 말을 들어줄 의무는 없다고 봅니다만?”
-털썩!
묵직한 소리가 땅을 울리고 내 시선은 무릎을 꿇은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간절히 외쳤다.
“제발! 부탁이다! 약자를 보호해주는 것이 나의 사명이지만, 그 약자를 이끌고 보살피는 것이야 말로 왕과 귀족이 행해야 하는 사명이니까! 그들을 지켜야지만 약자를 이끌고 모두 대피할 수 있다!”
대답이 좋았다.
아니, 정말로 이 기사는 자신의 주인만 생각한 줄 알았으나,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남을 챙길 생각을 할 줄이야.
“그렇군요. 적어도 당신은 올바른 사람인가 보네요. 그렇다면 그대로 가만히 있으세요.”
드디어 공격을 감행하려는 듯한 풀숲의 움직임. 순식간에 뛰어가 기사의 등을 밟고 뾰족한 단검을 든 고블린의 얼굴에 발로 차버렸다. 살살 차면 살아있을 수 있으니, 목뼈가 날아갈 정도로 강하게 차버렸다.
물 흐르듯이 허공에 떨어지려는 뼈 단검을 붙잡고, 내 동쪽 방향으로 빠르게 던지자, 풀 숲 한곳에서 찢어지는 짐승의 비명이 울렸다. 한 손에는 검을 만들어 휘두르고, 다른 한 손에는 마나를 모아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일방적인 학살을 하고야 말았다. 어쩌다 보니 고블린이 더 불쌍해질 정도로 괴멸시켰고, 엉망이 되어버린 숲을 더욱 더 황폐하게 만들어서야, 널려있는 고블린의 시체들은 곱게 죽지 못해 사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거기 다친 데는 없어요?”
다친 데는 없는지 물어보고 있지만, 그 기사는 뭐에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숨을 쉬는 걸로 봐선 서서 죽었다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으니, 다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서는데...
“호, 혹시 용사입니까?”
“아뇨. 잡화점 주인입니다. 그보다 이 나라에 용사가 없어요?”
“아, 예. 용사는 여신의 신탁을 받고 축복을 받아야만 가능하니까요. 지금으로부터 500년동안 대마법사 엘티노스 일행 말고는 용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흠. 내가 알던 용사들은 바퀴벌레보다 더 많은 숫자로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직업인 줄 알았는데, 이곳은 비정상적으로 신탁을 받고 축복을 받아야 용사로 취급되는 세계구나.
“아니. 너희가 이상한 거잖아. 매번 용사들이 득실거려서 무서울 지경이었다고?”
“세린은 조용히 하고 있어.”
“네? 무슨 소리를?”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말들을 받아 치느라 머리는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음이 호수처럼 넓은 내가 참아야지.
“그러면 마왕은 어디서 볼 수 있죠?”
“마, 마왕이라면? 그 13대 타락의 마왕 말입니까?”
“네. 맞아요.”
그 마왕 아니면 누가 있겠어? 이런 잔혹한 일을 벌이는 건 내가 아는 레시아가 아니라, 어느 이야기에서 나올 법한 잔혹한 마왕 ‘레프리시아’라고 보면 된다. 어찌되었든 나와 마주했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혹은 맨 처음 만나자마자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전투가 벌어질 지도 모른다.
“마왕은 직접 대군을 이끌지 않고 마계에 있는 마왕성에 있지만, 마기가 가득해 여신의 축복을 받지 않는 이상 도달할 수 없다고...”
“아. 거기에 있구나. 알려줘서 고마워요. 어차피 마계로 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뭣?”
“잘 들었으면서 못들은 척을 하다니요? 마계로 가는 길은 알고 있다는 소리에요. 다만, 제가 알고 있는 방식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마왕을 막아야 한다는 건 맞죠?”
마왕을 막는 게 개구리를 만질 수 있는 용기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라면 싸우지 않고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에서야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결정하는 방법은 통하지 않으니까. 철저한 방해공작을 통해 프리트론 왕국과 반대 방향으로 끌어들일 수 밖에 없다.
“인간계의 반대 방향이라면 마계밖에 없지만, 이렇게라도 유인을 해야 지금 당장이라도 함락되지 않고 더 많은 시민들을 살릴 수 있잖아요?”
“하지만...혼자서 그 마계대군을 막을 수는...”
“아니. 유인만 하는 거지 누가 군세를 막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군세를 막을만한 위력을 지닌 무언가가 필요했다. 계기라던가 아니면 내가 직접 마왕성을 때려부수거나. 아니면 다른 세계처럼 마왕을 자칭하거나...아니, 이 모습으로 마왕을 자칭하기도 힘들겠구나. 이미지라는 것이 있지.
“그러면 저는 출발할 테니 고블린 이빨이라도 가져가세요. 팔면 그래도 저녁에 먹을 음식이 호화롭게 될 테니까요.”
고블린 이빨은 잡화점에서 취급한 적이 있었는데, 화살촉으로 만들면 위협적인 물건이 되니까. 잡상인에게 팔면 짭짤하게 벌 수 있다. 그나저나, 돈과 관련된 일이 있으면 주제를 벗어난 독백을 하는 버릇 좀 고쳐야겠다.
“그럼 마계로 가는 게이트를 열어줘. 세린.”
“마계로 가는 길은 스스로 갈 수 있잖아?”
“그럼 본래 성별로 되돌려 주던가!”
“그건 싫은데?’
대체 세린을 어떻게 아이언 클로를 해야 내가 남자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가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하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걸어가는 동안, 마기가 몸을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몸 안쪽에선 신성력과 마기, 마나를 계속해서 합성하기 때문에, 마기에 대한 침식은...
“아니! 게이트를 열어줄 거면 열어주던가!!!”
조금 걸어갔는데 마계로 간다는 그 자체가 이상하잖아.
“이건 내가 한 게 아니거든? 이것도 네가 가고 싶다는 소망이 이루어낸 기적이야.”
“내가? 그런 거야?”
“그래. 또 그 마왕을 되찾으려는 거야? 아니면 그 마왕을 죽이러 가는 거야?”
그야 뭐. 되찾으러 가는 거긴 한데. 생각을 좀 해보니까 마계에서 난동을 부리고 마왕에게 호감을 얻는 건 바보 같은 일이고, 결국 죽이러 가는 것보단, 어쩌다 보니 싸우러 간다는 표현이 맞다. 이 세계에 있는 레시아가 날 알아본다는 가능성은 0에 수렴하지만, 그래도 0.1정도 가능성이 있다면 괜찮겠지.
“뭐가 되었든 회군시키러 가볼...”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살기가 주변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레시아와 잡화점 생활을 하면서, 매우 얕보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레시아의 정보습득 능력은...”
“전군. 정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미 최상위권이잖아...”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배치. 거대한 군세에 포위당한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환영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많이 데려오지 않았으면 좋겠...”
“타락하라.”
마왕 레프리시아의 말 한마디에 내 주변이 모두 빛으로 물들었다. 주인공은 악당들의 대사를 끝까지 기다려주는 경우가 있는데, 어째서 악당들은 말도 듣지 않고 속전속결로 공격하려는 걸까?
거대한 폭음도 들리지 않고 그대로 전신에 충격이 몰아쳤다.
“아프잖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내가 바닥에 기고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탈진감부터 서서히 몸의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다.
“흐음? 마왕님? 저 인간 일어났는데요?”
“그야 당연하지 않는가? 인간이기엔 매우 변칙적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짐의 마법을 직격으로 맞고도 살아남는 자가 있다니.”
“좀...사람이 말을 할 때, 마법을 직격으로 날리지 말던가...”
레시아와 시나가 항상 예측이 불가능한 곳에서 마법을 사용하니까, 조금이라도 마법을 사용하는 움직임이 보이면, 그대로 마법방패와 몸 안에 에너지를 둘러서 충격에 대비하는 버릇이 빛을 발휘했다.
차이점이라면 지금 건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마법인 거 같은데, 생각보다 10배는 더 아프게 느껴진다. 그래도 살아남은 게 의아한 걸까? 굳어있던 마왕의 고개는 살짝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름이 뭔가 소녀여?”
“소녀 아냐...원래는 남자라고...”
아무래도 나에 대한 정보는 습득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보다 내 이름을 묻는다면 둘 중 하나인데. 하나는 대화를 할 여지가 있거나, 다른 하나는...
“짐의 마법을 버틴 자의 이름을 알리고, 최후까지 전해주도록 해주기 위함이니라. 어서 대답하거라.”
그래 저거. 꼭 사람 죽이려고 하면 피해자의 이름을 듣더라.
아이고...
“내 이름은 카...”
“잠깐만. 그 입으로 카일이라는 흉한 이름을 대는 건 아니겠지?”
“그럼 내가 카린이라고 대답해야겠냐!”
“그렇군. 그대의 이름이 카린인가?”
“아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세린의 방해공작으로 나의 진짜 이름을 알리지 못한 체, 카린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당장 저 마왕에게 살해당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고양이 모습이었을 때는 그나마 고분고분 잘 따라줬는데, 각본가가 사라지고 난 세상의 레프리시아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잔인한 마왕임이 틀림 없다.
“마왕답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도 난 마법 한번으로 뻗어버리지 않아.”
아마 두 번 맞으면 뻗어버릴 것 같은데...
어쨌든 설령 패배해도 날 죽이지 못하도록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하니까. 얇고 긴 백은의 검을 만들었다. 붉은 달 아래에 휘날리는 검은 그 뒤에 별빛이 따라다니듯 어두운 공간에 잠깐이나마 실선을 번뜩였다.
“그대는 용사인가?”
처음으로 마왕 레프리시아의 눈빛에는 빛을 띄기 시작했다. 자신의 호적수라도 찾은 모양인지 고양된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봐도...내 대답은 고정되어있었다.
“아니. 잡화점 주인인데...저녁에는 잡화점을 열어야 하니까 그냥 돌아갈까?”
이토록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대사가 어디 있을까?
...내가 했으니 여기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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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일이 절 죽이네요.
위험등급이 진돗개 2마리 정도라 글을 제대로 못씁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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