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95
595
시간은 유연하게 변한다.
따라서 공간도 유연하게 변한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모든 걸 꼬아버렸다.
그런 나에게 어떤 벌이 내려지는 걸까?
-혼자서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카일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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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순덩어리다.
그야 말로 내 존재 차체는 이미 모순으로 가득 찼...아니, 이렇게 인트로를 시작하려니까, 내 왼팔에 흑염룡이 살고 있는 거 같잖아. 사실 흑염룡은 없고 월식이라는 검은 뱀은 살고 있긴 한데. 아무튼 현재 모든 시공간에 존재하던 각본가가 사라지고 나서, 나를 죽이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상황이 없어졌으니. 착한 마왕인 레시아나, 친근하게 다가오는 루니아 누나라던가. 아무튼 그냥 다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원래 없는 존재니까. 인간관계부터 원만하지 못한 경우가 되겠지.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보도록 하자. 세린.”
“응? 뭔데?”
뒤에서 나를 바라보던 세린은 이전과 다르게 차분히 대답했다. 내가 항상 물어보면 퉁명스럽게 대답하거나, 뭔가 시비가 목에 걸려서 따가웠는데...
“어째서 나는 카린의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거냐!!!”
날카로운 비명은 여김 없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애초에 남자이며 이름은 카일이다. 설령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존재하고 있으니, 아무리 그래도 잡화점 내부에서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으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애초에 네가 규칙을 수정해달라면서.”
“그래! 맞아! 이 곳을 운영하는 종족을 늘려달라고 했지! 신이든 뭐든 상관없게 말이야!”
“하지만 그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그러니 너의 본 모습인 남자는 이미 인간을 벗어나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규격으로 남아있던 카린이라는 여성형 인간으로 남아있는 거야.”
“도대체 너는 왜 내 말부터 무시하는...머리 쓰다듬지 마!”
그리고 이 상황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니...
“자. 카린 씨. 오늘은 저를 어떤 신비한 세계로 보내주실 건가요?”
“리제로트. 이건 타디스가 아니거든? 메두사 폭포로 던져버리기 전에 이제 좀 나가!”
“어머머? 이런 가녀린 소녀를 혼자 버려두겠다는 건가요?”
“달라붙지 맛!”
찹쌀떡처럼 달라붙으려는 리제로트를 겨우겨우 뿌리치고 잡화점 창문을 바라보았다. 먼 은하수가 펼쳐진 공간은 이 시간대가 밤이란 걸 알려주고 있지만, 미래에서 볼 법한 거대한 빌딩이나, 전등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과거. 아니, 내가 본래 되돌아가야 할 고향과 같은 장소.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정말로 약육강식의 세계네.”
파이론은 마왕으로부터 멸망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지금은 누가 마왕인지 모르겠지만 레시아라고 해도 똑바로 잡아줄 사람이 없다면, 제멋대로인 폭군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육포에 대한 집착만 봐도...아니, 이런 걸 육포에 빗대어서 뭐하게?
“봐요. 밖은 몬스터들이 불을 키고 살아있는 사람을 잡아먹는 세계라고요. 시체를 처음으로 보는 건 아니지만...”
음산한 기운이 리제로트를 감싸듯 들어왔다. 그래도 여기는 그나마 좋은 점이라면, 백장미가 없다. 이거야 말로 이 세상이 좀 좋아지는 이유인가? 세상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환멸을 느낄 때쯤.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잡화점에 손님이 찾아...와야 하는데...
“내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도, 손님이 잘 안 온다는 공통점은 어째서일까?”
“그거야 내가 막고 있으니까. 이미 이곳은 마왕군의 손아귀에 있잖아. 그런데 인간이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퍼져봐. 어떻게 생각하겠어?”
지금 겨우 평화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지만, 약육강식이 살벌한 공간에 잡화점이 나오면, 그 안에서 물품을 구입하기 보단, 약탈과 습격의 빈도가 매우 많이 늘어날 거라 생각한다.
“일리가 있네. 그냥 이대로 매출 없이 평생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렇게 빈둥거리면서 오지 않는 손님이나 기다리며, 죄다 사라진 잡화점 멤버들에 대한 그리움도 잊어보자. 아니...잊혀질 리는 없나.
“그나저나 아쉽네요. 잡화점 멤버가 있을 당시엔 저와 어울려줄 꽃들이 많았을 텐데.”
“널 위해서 잡화점 멤버를 영입한 게 아니거든. 리제로트.”
저 사막여우보다 더 괘씸한 생각을 가진 리제로트의 말에 대못을 박았다. 아니, 사막여우는 괘씸하지 않고 귀여운 동물인가? 실제로 여우를 본 기억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심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창문이나 보고 있는 소녀는 이윽고...
“밖에 나가고 싶어요.”
“안 돼. 밖은 안전하지 않아.”
답답함을 못 참고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걸 만류해보려고 해도 이제 4일정도 경과했으니, 탐색과 정보를 모을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니까...
“내일 나하고 같이 나가자. 너는 월터가 붙어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해도, 사실 마법에 대한 지식은 초보잖아? 그러니...”
“아니? 마법에 대한 기초는 이미 마스터 했는데요?”
뭐?
“잠깐? 뭐? 어떻게?”
“놀라는 모습이 귀엽네요?”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어떻게 기초를...아! 잡화점은 사라진 게 아니니 엘티노스의 자서전과 서적들이 남아있구나!”
엘티노스의 자서전과 서적. 그리고 덤으로 어마어마한 물품들까지. 사실 모든 시공간에 레이베리아를 빠짐없이 가둬버리면서, 엘티노스의 잡화점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모순투성이인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잡화점은 이 시대에 모순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네. 재미있더라고요. 이 시기의 마법은 전성기에 가까울 정도로 발전했잖아요? 마법공학이 발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그러면 카린 씨도 마법사의 길을 걸으신 거 맞죠?”
“카일이라고 불러.”
“지금은 카린 씨잖아요? 카.린.씨? 푸훗!”
저 앙증맞은 볼을 잡아서 늘려버릴라!
“세린. 규칙을 바꾸자고 했을 때 말 좀 들으라고...”
한숨을 곱게 포장해 밖으로 내뱉었다. 산지직송으로 가는 한숨은 공기 중에 사라졌고, 새벽 1시가 다 되어갈 무렵. 조용하게 생각하고 싶은 내 입장에선 리제로트가 빨리 잠들길 바라고 있었다.
“넌 안 자냐? 키 안 큰다?”
“카린과 같이 잔다면 지금쯤 꿈나라에 갔을 텐데요?”
“쉿! 그 이름은 거론해선 안 돼. 볼트모트와 같은 거야.”
“카린 씨야 말로 말하면 안 되는 이름을 거론했잖아요?”
한숨만 쌓였다.
뭐, 밖을 외출하면 본래 남자로 되돌아갈 수 있을 테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려나? 그냥 검은 고양이인 레시아를 쓰다듬으며 새벽을 보내는 게, 하얀 올빼미인 시나를 옆에 두고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제는 기억에서 독처럼 남아 퍼지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작별인사도 못 건넸구나.
적어도 몇 마디 나눴으면 좋았을 텐데.
천천히 눈을 감고 조용히 정리를 하자. 내일 아침에 밖에 나가면 기다리는 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 그런데 어디서 재료를 사야 하지? 밥은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현실적인 생각이 먼저인가?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 것이 맞는 표현인가 보네.”
눈을 떴다.
시야는 이미 햇빛이 들쳐진 아침. 오랫동안 생각했다고 했는데 설마 아침이 올 줄은 몰랐다. 정기적으로 명상처럼 빠지는 것도 아니고, 눈을 깜빡 하는 사이에 모든 것이 지나갔다. 아무래도 내 의지를 받들어 지금 이 순간은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기적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그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 볼...”
생각해보니 나는 깨어났어도 리제로트는 아직까지 자고 있는 시간대. 멍하니 앉아있기도 뭐해서 아침을 만들러 나아갔다.
“그나마 암흑물질이나 형광물질 같은 건 먹지 않으니 다행인가?”
그렇다고 해도 루시피나의 요리는 먹고 싶었다.
“모든 걸 버리고 떠나는 건 후회만 남는 일이구나. 어쩔 수 없지.”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겠지?”
세린은 가시가 돋친 말을 여김 없이 뿌렸다. 거칠게 마음을 파고드는 말은 나를 더 강인하게 해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약해진다는 말은 맞지만, 너는 꽤 신난 거 같다? 혹시 잡화점 멤버가 없어지고 나서 나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거야?”
“아니. 진정한 파트너에 대해 알려주려고 했지.”
“그러니까 왜 이 안에서 내가 여성체를 지니고 있어야 하냐고! 규칙 바꾸는 걸 수락하기만 해도 나는 남자인 모습으로 자유롭게 살았을 거 아니냐!”
“사실 카린이었을 때가 보기 더 좋거든. 쓸 때 없이 위화감이 들지도 않고.”
“쓸 때 없이 위화감이 드는 이유가 뭔데? 반신이라서?”
“카일이라서?”
“넌 진짜 타이타닉이 붕괴될 때 구출되지 마라.”
아무래도 자신이 나올 타이밍이라던가, 사실 이전에 레인처럼 세린과 같이 붙어 다니는 모습에 질투가 난 것일지도 모르지만...어쨌든 리제로트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침밥은 완성이 되어갔다. 얼마 없는 재료로 토스트와 에그 스크램블이 끝이지만...
“세린.”
카린과 비슷한 외형을 지닌 세린은 내 옆에서 “왜?”라고 대답을 했다.
“너도 먹는 거야.”
“난 잡화점의 중추인격일 뿐이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
“그러니까 먹어. 어차피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주제에...”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내 앞에 앉는 세린. 거울 속의 내 자신을 보는 듯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수려하면서도 차분한 외모와 신비로운 분위기. 날씬한 몸과 고풍스러운 옷의 조화가 주변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토스트에 버터를 발라 한 입에 무는 모습은, 예를 갖춘 귀족의 영애와 같다고나 할까?
쉽게 풀어서 말하면 고작 토스트 하나 먹는 주제에 매우 고상하...
“아침을 먹는 다면 그런 쓸 때 없는 독백은 그만두고 어서 먹기나 하시지? 고풍스러운 카린 양?”
“시끄러워.”
결국 고풍스러운 태그까지 붙어가며 아침식사는 이어갔다. 여전히 리제로트는 꿈나라에 빠지고 있는 동안, 잡화점 밖에는 함성소리와 칼부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프리트론 왕국은 파이론을 되찾으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파이론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추격하는 중인지.
뭐, 그건 중요하지 않나?
“하아암~ 어라? 카린 씨? 밖이 너무 소란스러운데요? 조용히 해달라고 하면 안 되요?”
“왜 일어난 거야? 영원히 잤으면 더 좋았을 텐데.”
“키스로 깨우시는 거에요?”
월터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도대체 왜 죽은 사람이 키스를 하면 깨어난다고 생각하는 거야?”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확인된 치료법이잖아요.”
“정말 숲으로 버려버린다.”
더 이상 찾지 못하도록 깊게 봉인해버리겠어. 나의 결의가 마음속으로 다져지는 순간 사람의 비명소리가 찢어지듯 들려왔다.
“아아아악!”
“밖에 무슨 일이 있나요?”
“누군가가 몬스터에게 쫓기고 있는 모양이야. 나야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자세한 상황은...”
“지금 도와주는 게 도리잖아요!”
도리?
“그 도리 하나로 모든 걸 망치고 싶다면 네가 직접 나가서 구해보던가? 자세한 상황을 몰라서 멋대로 끼어들다가 죽어버린 녀석도 많이 봤어. 잡화점 멤버들은 정보능력이 좋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 너는 생존에 있어선 아무것도 몰라. 머나먼 미래...아니, 레이베리아가 만들었던 그 공간은 치안과 안전이 확보된 공간이었으니 당연하다고 해도! 아냐...아니지. 심지어 그런 공간마저도 도리 하나로 인생이 망하는데, 그런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이 세상은 지금 살아남기 위해 얼마든지 인간을 버릴 수 있는 시공간이다. 심지어 남의 눈에는 짐승만도 못한다고 한들, 자신의 가족에겐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먹여 살리는 가장으로 보이는 모순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그런 혼돈의 세계가 바로 지금 이곳이다.
“애초에 너처럼 예쁜 아이를 납치해서 인형으로 만드는 녀석이 도리라는 단어를 꺼내지 마. 내가 생각했을 땐 차라리 저것들이 너보단 더 나아.”
리제로트는 고개를 홱 돌리고 분한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그 이후로 잡화점엔 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리제로트도 저지른 죄가 있지만 마음을 고치고 갱생한다고 해서 저지른 업보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그나저나.
밖에 상황이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고 정보수집을 해야 하니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삐쳐있으니 대답은 안 할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다녀오도록 하지. 넌 밖으로 나가지 마. 밖은 내 생각보다 더 위험하니까.”
그래도 탈출할 수 있으니 세린에게 문을 굳게 닫아놓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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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의 리셋
이제 몬헌월드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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