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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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승을 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한들, 이겼다고 말한다면 이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카렌은 세린이 회복시키면서 서서히 깨어날 것이고, 리제로트는 망연자실을 한 체 돌아가기만 하면 될 뿐. 그렇게 모든 것이 제대로 흘러가기만을 기다렸다고 생각했다.
느닷없이 폭주한 월터에게 휘말리기 전까지는...
옛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승리했을 때 방심하면 크게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내 기억으로는 리제로트가 월터에게 뭔가 발라주는 즉시, 공허한 인형의 눈에서 붉은 빛이 일렁이던 찰나, 기적적으로 반응을 하면서 막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어디인지 모르고 내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후였을 뿐. 주변에는 예쁘장하게 옷을 입은 인형들이 옹기종기 모여 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고작 립스틱 하나 칠했다고 그런 바보 같은 참사가 벌어지는가에 대해 웃음만 나오리라 생각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고작 립스틱 칠했다고 바보 같은 참사가 내 눈앞에서 벌어졌으니, 지금 이러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온 몸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는데 움직일 때마다 뼈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 눈을 뜨셨군요.”
“그래서...여긴 어디야?”
이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평범하게 일어났냐고 물어보는 리제로트. 내가 보여준 기행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는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아프다고 난리를 치며 반 송장이 되어있어야 하는 데미지일지라도, 침착하게 어디냐고 묻는 것에 대해 놀라지 않았나 보다.
“그야 제 별장이죠. 그리고 이곳은 인형들을 모아놓은 방이고요.”
“그래? 그럼 이제 족쇄 좀 풀어줄래?”
“그건 안 돼요. 당신의 가치를 알아버렸으니 더 이상 풀어줄 수가 없는걸요.”
내 가치를 알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족쇄부터 풀어달라고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럼 인형이 되어주세요.”
“그냥 날 죽여라.”
정중하게 말했지만 거절당했으니 비협조적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치를 알았다는 그 점은 마음에 걸리기 시작하더니, 머릿속에서는 매번 회전하는 생각의 바퀴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할 무렵. 그 해답을 그냥 말해주듯이 리제로트는 시원시원하게 입 밖으로 열었다.
“당신을 붙잡았더니. 지금 세계는 혼돈의 도가니로 변해버렸어요. 300년 전에 있던 마왕이 재림해버렸고, 잡화점의 주인을 따르던 모든 이들이 폭주하기 시작했죠. 그나마 아쿠아리움에 마법을 잘 아는 사람들을 뽑아, 텔레파시를 방해하는 마법진을 설치한 것이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아요.”
신의 한 수?
하긴, 천천히 생각을 해보면 아쿠아리움으로 가자는 제안은 리제로트의 선택을 한 거니까. 내가 리제로트의 돌발행동을 예상했던 것만큼, 리제로트 또한 나의 행동패턴에 대해 많이 분석을 한 모양이다. 생각 외로 끈질긴 치킨레이스의 승리자가 나타나지 않은 걸 보아, 오늘의 운세는 믿지 말아야 할 족속일지도 모르지.
“다른 이들을 유일하게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잡화점의 주인 뿐인데, 만약 당신이 저의 인형이 된다면, 커다란 분노를 떠안고 저는 죽어야겠죠. 어차피 마지막 제안도 거절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요.”
어차피 시한폭탄을 짊어졌으니 나더러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본들, 내가 대답할 말은 한가지 길로 따라갈 뿐이다.
“그러면 빨리 풀어주던가?”
날 풀어주면 다른 잡화점 멤버들의 폭주는 일시적으로 안정을 되찾을지라도, 곧 이어 개화를 하듯 피어 오르는 적대심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소리일까? 모든 것은 어디부터 비틀어졌는지 몰라도, 나는 빠져나갈 구멍은 꼭 파놓고 싸운다. 리제로트도 비슷하긴 하지만 오히려 붙잡아야 하는 쪽은 리제로트고, 나는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일 뿐.
다만, 여긴 대체 어디길래 잡화점 멤버들이 나를 찾기 위해 난리를 쳐도, 지금까지 못 찾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인형사. 그럼 쓸 때 없는 일을 그만두라고 했을 텐데?”
어디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갑기 그지 없는 딱딱한 표정과 상대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이 정해진 대로 말을 하는 목소리. 너무 정감이 없는 여성의 목소리인지라 머리부터 입 밖으로 튀어나가기까지 1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레이베리아!”
“300년이 지난 미래는 어떠하지?”
격양된 기분 덕에 몸을 억지로 움직이려다, 아직 완치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시 비명을 지르는 몸. 입 밖으로 튀어나오던 것을 꾹 눌러 참느라 기분이 나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각본가는 자기 할 말만 했다.
“이 남자는 미래에 흉이 될 남자다.”
“지금은 여자니까.”
레이베리아의 권능은 진실을 꿰뚫어보는 것.
내가 남자인 것쯤은 이미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에 담배를 피우던 과거라도 알고 있으리라. 예시가 좀 바보 같아서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지만, 레이베리아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고, 리제로트는 알고 있어도 지금의 내 외견에 만족하듯 오히려 레이베리아를 차갑게 쏘아봤다.
“1주일 안에 길들이면 된다면서. 지금부터 훼방을 넣는다면 당신도 용서하지 않아.”
“그 남자인형 안에 신을 처벌할 수 있는 힘을 손에 쥐었다고 해서 기고만장 하지 않는 게 좋아. 하긴, 지금은 당신의 공이 크니까 잡화점의 인원들을 각개격파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 그러니 1주일의 시간을 주는 거야. 허튼 수작을 부리지 말고 역할에 충실하도록.”
끝끝내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고 나가는 레이베리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리제로트.
“뭐, 일단 내가 가장 불리하다는 사실은 잘 알겠어.”
그런 어색한 침묵을 깨고 내 입은 버젓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뻔뻔하다면 뻔뻔하게 멋대로 짓거리는 입은 쉴 줄 몰랐으니까.
“어째서 네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몰라도, 레이베리아의 말이 맞는 건 확실해. 하지만 그건 듣고 싶기도 하네. 어째서 나를 살리기 위해 네가 노력을 해야 하는지 말이야. 고작 동성애자의 타이틀에 맞게 소녀의 몸을 원한다면...”
“아냐! 그게 아냐...”
쉴 줄 몰랐는데 다른 곳에서 소리치는 걸 들으면 나도 모르게 입이 멈춘다. 리제로트는 나를 무슨 수로 1주일 만에 자신의 것으로 예속시키는 가에 대해서, 1초도 남김 없이 치밀하게 생각을 해야 함에도 모자랄 판에, 어딘가 슬퍼 보이는 청안이 나를 내려다보며 작은 입술을 떨기 시작했다.
“다, 당신이 살아야...다음 계획을 진행할 수 있으니까.”
아직까지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인지, 단순한 이기심에 억지를 부리는 건지 알 방도는 없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상황은 불리하다. 그 전에 내 발목을 채우고 있는 족쇄가 어떤 녀석인지 알아야 하는 게 먼저였는데, 지금쯤이면 붙어야 하는 뼈가 지금까지 안 붙고 있으니, 치유회복속도를 올려주는 에너지가 흩어지고 있는 중인가보다.
몸은 욱신거리고,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조만간 기억상실까지 걸려버린다면 최고의 나락을 보게 되리라. 최악의 상황이긴 하지만...설마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이 사고를 치겠...
“마셔. 이걸 마시면 살 수 있어.”
독백을 다 끝내지 않았는데, 내 시야에 리제로트의 작은 손과 무언가 담은 병이 끼어들었다. 마시면 살 수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연금술사가 만든 고가의 포션은 아니고, 짙은 검은색의 물이 “날 마시면 지옥의 나락으로 보내주지! 크하하핫!”하며 출렁이고 있었으니까.
“이게 뭔데?”
“망각의 샘물이야. 이건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어린애도 알고 있지. 기억을 잃게 되면 나의 것으로 교육하고 그 이후에는 당신도 살고, 나도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될 거야. 1주일이라는 시간이 남았어도, 정확하게는 이틀 정도 생각할 시간을 줄게.”
1주일이 이틀이 되는 마법을 겪고 앞에 있는 비약을 어찌 처리할지 고민했다. 마신다면 인형확정이고, 마시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먹이겠다는 소리인가? 신파극도 이렇게 막장으로 치닫는 경우가 없었을 텐데.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밥 먹듯이 내리는 걸까.
망각의 샘물도 2가지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포션을 만드는 연금술사가 재료를 잘못 넣으면 망각의 샘물이 되는 거고, 또 다른 하나는 명계에서 뱃사공 앞에 강이 있는데, 그 강 하류에는 망각의 샘이 있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그 강 하류까지 도달하기 위해선 무궁무진한 시간이 걸리니, 시공간을 왜곡하는 존재들만 다녀올 수 있는 비밀장소다.
그러니 이 물은 90%의 확률로 연금술사가 제작한 포션이고, 모든 기억을 흩어지게 만들어 거대한 공간을 중앙에 만들어내는 경우다. 근데 10%의 확률로 진짜 망각의 샘물이라면 기억이고 뭐고 전부 날아가버린다.
복구?
못하지 당연히.
여전히 복잡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가, 지금 당장은 아무런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그대로 방에서 나가버렸다. 주변에 인형들이 리제로트가 나가자마자 모두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살아 숨쉬고 있는 생명체들이겠지.
“너희도 마신 거야?”
말을 걸었다.
대답은 없음.
“그렇군. 너희들도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
다시 말을 걸었다.
하지만 대답은 없음.
“그래서 리제로트가 너희들에게 이걸 마시라고 강요한 거지?”
또 다시 말을 걸었다.
결과적으로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렇군! 모든 것이...해결 될 리가 없잖아...”
아무리 몸이 아파도 한숨은 제대로 나왔다.
정신적으로 몰려도 혼잣말은 잘 나왔다.
아직까지 완전하게 패배한 것이 아닌 이상, 살아갈 방법은 분명히 있다고 자신한다. 지금도 분명 빠져나갈 구멍이 어딘가 있을 거야.
...아니면, 이런 것이 헛된 희망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들은 활발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좋아한다.
언제까지나 힘들고, 지치고, 외롭고, 죽고 싶어할지라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무마하고, 웃고, 떠들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긍정적인 사고방식?
그건 그냥 미친 거다.
다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미 나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해도, 계속 자신을 속여 할 수 있다는 최면을 거는 것뿐.
현실은 그렇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결과가 나오고 난 뒤에 그런 일을 해도 바뀌지 않는다.
결국 그 뒤에 시간이 흘러야지 살았는가 죽었는가가 나오겠지.
문뜩 모든 어둠을 담은 듯한 액체를 보았다. 저게 생명수가 아니더라도 저걸 먹음으로 레이베리아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없겠지. 그 이전에 이틀의 시간을 줬으니 시간이 지나도 강제로 먹게 될 사약이다.
마시는 척 하면서 연기를 할까?
아니. 이곳은 인형의 방이기에 나를 감시하는 사람만 5명이 넘어간다.
족쇄를 풀을 방법을 찾을까?
그것도 기각. 레이베리아의 사술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니 억지로 풀다간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몰라.
리제로트를 설득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불가능하리라 본다.
커튼은 쳐져 있어서 밤인지 낮인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레이베리아가 각개격파를 한다는 선언아래에 잡화점 멤버 걱정을 하는 시간을 좀 갖자. 어차피 내 걱정만 한들 바로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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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금금 야근 에디션 중입니다.
틈틈히 쓸게요...;
[정기적인 연재는 못할거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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