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32
532
준비를 하는 시간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는 레시아가 내 대행으로 움직일 것, 또 다른 하나는 시나가 내 몸 속에서 동화를 한 상태로 다양한 변수에 즉각 대응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덕분에 지금 내 머리는 하얀 눈이 내려온 백발로 변했다. 그런 모습에도 루니아 누나는 귀엽다고 끌어안고, 마리아는 좋은 상품이 나왔다고, 음흉한 웃음이 흘러 들어왔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사소한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레시아는 지금 모습이 여자들에게 더욱 더 인기가 많겠네요.”
잡화점에 나와 도로에서 걸은 지 몇 분이 흘렀을까? 묘한 침묵을 담은 공기에 못 이겨서 상대의 외모를 칭찬하기로 했다.
“주인. 그것은 남에게 예의상 말하는 것인가?”
날카로운 카리스마와 시크한 분위기. 그럼에도 나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차가 다니는 방향에 서서 걷고 있는 장신의 사내. 남성과 여성의 경계가 애매모호해서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개체는 적다고 하지만, 레시아는 마왕이기에 여성체로는 매혹적이고 남을 타락시킬 것처럼 다가오게 만드는 외모, 남성체일 때는 내가 오히려 다가가서 나락에 빠져 버릴만한 외모였다.
“예의상 말하는 것도 있지만, 제가 레시아를 대하면서 예의상 대하는 거 봤나요?”
“그렇군. 주인은 언제나 짐을 마왕으로 본 것이 아니었지.”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내 마음을 울리자마자, 안에서 시나가 [마스터.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이런 모습으로 30일은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거니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타협을 한다. 그러니 지금 내 심리변화나 성 정체성이 엉망진창으로 변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무너지지는 않겠다고 매번 다짐했다.
21년간 남자로 살아왔는데 30일정도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산다고 한들, 지금까지 건축한 가치관이 그리 쉽게 바뀔까?
“게다가 짐은 남성체로 변하면서 주인이 대륙에서 최고로 귀엽다고 생각하지만, 매번 가슴속에는 한가지씩 응어리가 지는 기분이다.”
“응어리가 져요? 구체적으로는 어떤 건데요?”
마왕도 인격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말일 수 밖에...
레시아의 경우 질투도 심하고 독점욕도 강하다.
지금 나와 동화된 시나는 적어도 나를 배려할 줄 알지만, 레시아보다 질투가 더 심할 뿐.
그러니 레시아 입에서 그 어떤 말이 나와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
“주인을 지금 당장이라도 가까운 모텔에 데려가서,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나만의 색으로 물들이고 싶은 적이 30분 간격으로 일어나고 있다.”
...어야 하는데 무시무시한 말을 들어버렸다. 차라리 아직 주인과 사역마의 관계라면 모를까,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결혼식을 하지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마왕의 부부는 나로 되어있다. 물론, 잡화점 맴버 중에 반지를 받은 대부분이,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아직까지 반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릴리스 밑에서 비서역할을 하고 있는 아리엘이 있다.
“정말이지. 냥캣은 하나부터 열까지 발정해서 탈이군...읍!”
“음? 주인? 지금 뭐라고 한 것인가?”
무의식적으로 저런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말이라 너무 놀랬다.
“아니에요! 제가 말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 마스터에게 손가락이라도 대는 순간 그 즉시 빛으로 심판해드리겠습니다.”
시나의 질투심이 내 입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레시아도 둔하지 않고 오히려 더 빨랐다.
“칫. 비둘기녀석. 어째서 주인의 곁을 호위하지 않고 동화했는지 의구심이 들었으나, 짐을 놀리기 위한...”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입니...읍!”
“아무래도 비둘기와 더불어 주인은 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냥 넘어가겠다.”
“그거, 정말 고맙네요...”
시나에게 따져.
왜 나까지 벌을 주는 거야?
무심코 레시아에게 감사의 말을 내뱉었지만, 이것도 왜 내가 내뱉었는지 모르겠다. 카리스마에 짓눌려서 자동으로 튀어나왔나? 지금 당장도 레시아가 강압적으로 나가면 킹 크림존이 300년 미래로 출장 다녀가야 할 정도.
우선 내 사고방식부터 제대로 지탱해야겠어.
난 연약한 소녀가 아냐! 그건 겉모습일 뿐! 남자다운 마음가짐! 남자다운 생각!
“그거 알고 있는가?”
레시아가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너무 방향성이 없어서 U턴을 하면서까지 내 귀에 도달하는 기분. 아직 본질에 대해 이해할 수 없으니 레시아는 말을 더 이어 나아갔다.
“그런 독백으로 매번 정신을 가다듬어도, 결국 귀엽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주인이 남자였을 때도 무척이나 귀여웠으니 말이다.”
“귀엽다고 하지 마시죠. 기껏 쌓아 올린 저의 멋진 이미지가 무너지지 않습니까?”
“주인은 애초에 멋진 이미지는 거의 없었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무의미한 말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인정하기는 싫었다. 당연히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라는 편견으로 이루어진 것을 옹호하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매우 엄격해야 하니, 나만 제대로 된 남자처럼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당연히 용병시절에도 적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적도 있다. 이브센티아를 멸망시키면서도, 그 고통과 아픔을 다른 사람과 함께 이겨내면서 어마어마한 성장을 했다. 앞으로 미래에 얼마나 더 힘든 일이 생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 스스로가 살아온 발자취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수라장을 넘어가서, 나 스스로도 ‘의외로 멋져 보이는 남자.’라는 타이틀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마왕이 보기에는 아직까지 나는 귀여운 남자밖에 되지 않았던 것. 생각을 해보면 레시아는 잡화점 초창기부터 오랫동안 지켜봤으니, 멋지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일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멋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고 말하는 걸로 보아, 상대적으로 내 기대치와 레시아의 기대치가 달랐던 거겠지.
“주인이 멋지다고 생각한 적은...같이 자면서 짐을 천국 그 이상으로 보냈을 때다.”
뭘 천국으로 보내? 마왕이 천국도 가?
이해할 수 없군. 애초에 킹 크림존은 항시 대기 중이니까. 나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래. 나는 이해할 수 없어.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마법사들을 만나고 어떤 말을 할 생각인가?”
“무슨 꿍꿍이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들어야겠죠.”
이들은 나를 보고 싶어하는 이유가, 마나, 신성력, 마기를 하나로 모아 섞어버린 힘을 사용하고 싶어했다. 이 힘을 뭐라 부를 말이 없으니 ‘창조주의 권능’이라고 시나가 자주 표현하지만, 나는 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일부러 사용하지 않는 이유라면,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겠지.
“그런 말로 될 거라 생각하는가? 주인은 좀 더 머리를 쓰도록 해야 할지어다. 그 마법사들이 언제 주인을 배신할지 모르니, 안전장치 같은 것도 생각하거라.”
“안전장치라면?”
“유언비어를 자신 있게 말한다면 그리 되겠지.”
하긴 거짓말도 자신 있게 말하면 진짜로 받아들이는 게 인간이다. 의심을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증거라는 걸 발견하기 어려운 상태일수록, 제대로 먹혀 드는 것이 인간의 심리.
“정말 세상을 하나 만들 정도로 바꿀 수 있는 계획이 아닌 이상, 저도 그 사람들에게 사실대로 말해줄 이유는 전혀 없다고 봐요. 그러니, 아...”
내 팔을 붙잡은 레시아의 행동에 잠깐 맹한 소리를 냈지만, 앞에는 신호등이 붉은 빛으로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의 발을 통제했다.
“미안해요. 레시아.”
고맙다는 말 대신 미안하다고 했다. 주의를 조금만 더 신경 쓰면 알아차렸을 텐데. 300년 이후의 세계는 묘하게 질서가 더 복잡하게 늘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이런 간단한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여인을 에스코트 하는 것은 신사의 몫, 짐은 지금 어엿한 신사처럼 행동하고 있노라. 한 때, 주인도 짐을 여인으로 아끼지 않았는가?”
“그런 적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만?”
“아니. 분명히 있다. 주인만 보면 항상 그리운 기억이 나타날 것 같으니 말이다.”
내가 과거로 갔을 때, 어린 레프리시아를 돌봐줬던 그 기억인가?
“또 선생님과의 기억이에요?”
“그렇다. 이렇게 주인을 바라보니 지금은 짐이 선생이 된 기분이군.”
생각해보니, “제가 바로 그 선생님입니다. 레시아.”라고 말하게 되면, 레시아는 무슨 말을 하게 될까? 여태까지 속여왔다고 할지도 모르고, 애초에 농담으로 넘어가면서 믿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타이밍이 너무 늦어버렸다.
그러기에 지금은 말하지 않고 기회를 보고 있을 뿐.
지금 레시아와 같이 지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굳이 내가 선생님이었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설령, 레시아가 그 진실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관계가 악화될 일은 없다.
“귀엽지 않아?”
“남자친구인가? 아무튼 멋지다~”
“와...저거 범죄 아니냐? 오늘부터 스토킹 1일인가?”
기분 좋게 생각의 늪에 잠겨있었는데, 주변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생각의 늪에서 꺼내버렸다. 나와 레시아는 분명 존재감을 낮췄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들키지 않는 거라면 다른 존재를 보며 나오는 소리일 터.
“저기. 레시아? 무슨 일이에요?”
“아무래도 저 앞에 있는 존재 때문인 것 같군.”
앞을 바라보니 금발의 소녀가 백옥 같은 피부를 지닌 체, 다른 남자의 손을 붙잡고 나타났다. 고급 진 차 안에서 나왔으니 평범한 신분은 아닐 터. 300년이 지나서 문명이 많이 발전했으니, 사람들의 의식에 따라 제도도 많이 달라졌을 거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귀족은 있었고, 여전히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존재했다.
아마 내 앞에 있는 사람도 그 유명인사 중 하나겠...
“어라?”
“왜 그런가? 주인?”
방금 눈을 마주쳤다.
보지도 않고 무시당해야 하는 나와 레시아의 존재가, 하늘을 담은 듯한 벽안의 눈동자가 내 시선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우연일까?
“레시아. 우리들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인지될 확률은 얼마나 되죠?”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설령 부딪쳤을 때도 우리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할 뿐.”
반대편 20M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나를 알아본 저 소녀는 예사인물이 아니란 소리다. 붉은 입꼬리를 소름 끼치게 올리며 웃고, 건너편에 있는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아, 들어가버렸다.”
“그런데 저 건물은 ‘라 캄베리’아냐?”
“뭐야. 저 애는 귀족의 영애였어? 스토킹 했으면 팔 하나 날아갈 뻔했네.
지금은 라 캄베리인지 뭔지 하는 것은 관심 없다. 다른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동안 초록불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나와 레시아는 발을 맞춰서 앞을 향했다.
“묘하군. 주인에게 관심을 주는 자가 있을 줄이야.”
“레시아도 봤어요?”
“당연하다. 그 시선은 주인을 향해 있었다. 짐의 매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자가 이곳에 또 있을 줄은 몰랐군.”
이해가 안 된다는 분위기가 레시아 손으로부터 나타났다. 손을 꽉 쥐고 있는 거라면 지금 레시아는...
“인간이 아니군.”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위화감이 들던 말던, 우선 내 앞에 있는 일을 처리해야겠지. 저곳이 라 캄베리라면 오히려 잘 된 것이 있는데.
“라 캄베리에서 왼쪽으로 돌면, 고양이 카페가 하나 보인다고 했으니까. 빨리 가자.”
“주인은 짐이 있는데 다른 고양이를 보고 싶은가?”
레시아도 검은 고양이였지. 하지만, 손목에 걸려있는 시계를 통해 내 목적을 명확하게 밝혔다.
“나는 고양이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지금 약속시간이 아슬아슬해서 그래.”
“어쩔 수 없군. 주인 꽉 잡거라.”
“꽉 잡다니? 그게 무슨? 자, 잠깐! 레시아! 공주님 안기를 안 해도, 속도는 따라잡을 수 있다고...꺄아아악!”
횡단보도를 반정도 걷다가 나를 안아 올린 레시아의 도약 한번 때문에,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참새들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할 정도로 높이 떴다. 그렇게 바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5분정도 걸어야 할 거리가, 12초정도 단축된 순간을 생생하게 목격해버렸다.
=============================================================================================
다른 글을 쓰고 싶다.
근데 잡화점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취미로 글쓰는 중?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34 (0) | 2017.11.16 |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33 (0) | 2017.11.14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31 (0) | 2017.11.10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30 (0) | 2017.11.08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29 (0) | 2017.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