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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아침에 눈을 떠보니 루시피나는 어딜 갔는지 안보이고, 엘티노스의 기척마저 사라진 뒤였다. 아직 물어볼 것이 남아있어서 아랑과 이야기를 하고, 거침없이 나를 깨우면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잠자는 인간은 그냥 놔두나 보다.

 

아님, 나를 피하기 위한 묘책일수도 있지.

 

엘티노스가 초능력자를 만들기 시작한 날은 언제인지 몰라도, 300년전에 마신이 강림한다는 정보를 받고 골치 아프게 뛰어다니던 시절에도, 초능력자는 분명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카멜롯의 역사학원장이 마나 없이 보석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사이코메트리를 사용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예전부터 은밀하게 진행된 계획이라고 추측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에서는 배고프다고 소리를 질렀고, 루시피나를 찾아 여우신사에 나가서 잡화점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루시피나가 문을 열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신랑! 큰일이야!”

 

잠자고 일어난 사람에게 다짜고짜 큰일이라고 외친다고 한들, 커다란 반응을 해주기가 너무 애매했다. 뇌세포들이 아직 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서, “...또 무슨 일이길래 아침부터 이 난리야.”라고 짜증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으니까.

 

무슨 일이에요? 거대한 일이 걸어 다니기라도 해요? 그거 완전 넘버 원이네요.”

 

그런 썰렁한 개그가 나올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 큰일이야!”

 

이곳까지 뛰어왔는지 숨을 고르고 있는 루시피나에게 20초의 시간을 주자, 안정적인 호흡으로 돌아온 루시피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천마전쟁이 인간계에서 터지려고 하고 있다고!”

 

뭐라고요?”

 

이번엔 전쟁이냐? 그것도 천마전쟁이면 자기들끼리 싸울 것이지, 이제 인간까지 끌어드리는 건가? 이럴 때만큼은 잘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듣고 싶지 않는 정보 때문에 머리가 핑 돌기 시작했다.

 

마티는 미래에 가서 자식들 때문에 고생을 하더니, 왜 나는 300년 뒤에 가서 전쟁 때문에 골치가 썩는 걸까...”

 

천계와 마계가 인간계에 내려와서 싸운다는 것은, 단순히 천족과 마족의 전쟁에 휘말린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부분 천족을 믿는 인간들과, 마족의 힘을 받은 인간끼리 싸우는 건데, 결국 그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애들은 소모적인 피해는 입지 않으니, 겉으로는 천마전쟁이고, 실제로는 인형으로 전쟁놀이나 하는 거다.

 

과거 선조들이 카멜롯에서 득도를 해서 천족과 마족을 쓸어버렸을 때는, 그만한 반전세력이 천계와 마계에 튀어나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번엔 아예 작정을 하고 전쟁을 한다면...

 

저기? 신랑? 어떻게 천계와 마계가 인간들만 조종해서 전쟁하려는 걸로 되는 거야?”

 

그야 당연히...인간계에서 제대로 힘을 낼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잖아요. 그런 인간을 회유해서 자신의 아군으로 만든다. 그런 거죠. 아주 먼 과거에 인간들에게 모조리 썰려나간 천족과 마족들을 보며 고안해낸 것이 이거라고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한 거에요. 이곳은 아랑의 결계로 숨겨져서 찾아올 수도 없는 안전한 장소지만...잡화점으로 먼저 돌아가는 게 좋겠네요.”

 

루시피나로 인해 끊어진 독백을 다시 이어보자면, 이들은 인간을 멸종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이 맞다. 신인류가 벌이던 짓과 비슷한 수준으로, 인간의 힘을 최소한으로 줄인 뒤에 멸망을 시킨다는 것이 맞는 해석이겠지.

 

해결법이라고 한다면 말이야 엄청 간단한데...

인간을 규합하고, 천계와 마계를 상대로 싸우면 된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말만 쉬운 거지. 현실적으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을 보이고 있다.

 

가기만 하면 사건, 사고에 전쟁만 터지는 이 인생이라니...

아직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 여럿이 있는데, 모든 사건을 뒤로한 체 과거로 돌아가야만 할까? 잡화점에 돌아온 내 인상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걸 아는지 검은 고양이로 변한 레시아는 나에게 뛰어들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과거로 돌아갈 방법은 아직 못 찾았노라. 어쩌면 이곳에서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괜찮아요. 태풍이야 잘 지나가겠죠. 그보다 지금 천족과 마족은 어디에 있는 거죠?”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각자 인간의 몸에 들러붙었을지도 모르지. 초능력자들은 일반인보다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으니, 이들이라면 쉽게 몸을 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엘티노스가 초능력자를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갈 생각이라도 했을까? 상급신의 인생을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인간계로 와서 여자를 꼬시는? 아니, 그럴 생각으로 했다면 그 이전에 벌써 하고도 남을 사람이겠지.

 

마스터. 전쟁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까?”

 

있기야 하겠지.”

 

하얀 올빼미는 내 앞에서 기대심이 가득 내뿜고 있을 때, 가장 간단한 해결방법을 이야기 해줬다.

 

인간이 모두 사라지면 될 거야.”

 

극단적인 해결방법을 내가 말해주니, 시나는 올빼미 인형이 되면서 아무런 소리나, 행동도 할 수 없었는지 멍하니 있을 뿐... 당연히 그건 최악의 수이기도 하고, 절대 하면 안 되는 방법이니, 이걸 실현할 가능성은 개구리가 느닷없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보다 확률이 낮다.

 

하긴, 매개체가 사라지면 힘이 빠지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다시 인간을 창조할 수 있고, 인간과 비슷한 것도 창조할 수 있다.”

 

레시아. 정확하게는 창조주가 하는 일이지, 천계나 마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거에요. 실베스 씨는 결국 전쟁을 시작해버렸고, 레이베리아는 뭘 숨기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

 

주인은 개입할 것인가?”

 

애석하게도 니드호그를 발견하는 바람에 그래야 할 거 같아요. 카렌도 찾아야 하고...”

 

그러자 레시아와 시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니드호그?”라는 말을 내뱉었다. 순간 내가 뱉은 말에 등골이 서늘해지기 시작하면서, 실수라는 것을 자각하기도 전에 루시피나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랑과 저의 후손이에요! 정확히는 둘이서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나~? 에헤헷!”

 

오늘따라 유난히 기뻐하고 있는 루시피나가 도화선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오호라. 주인은 후손을 위해서 아무런 관계도 없을 미래의 전쟁을 막겠다는 거로군?”

 

마스터...”

 

아니. 전쟁을 막아야 하는 목적은 니드호그도 있긴 하지만, 지금은 후손이 살아나갈 땅을 깨끗이 닦아주는 것도 선조가 해야 할 일...”

 

***

 

말도 모두 끝내지 못하고 잠깐의 폭발음을 뒤로 의식이 끊어져버려서 죄송할 따름이지만, 레시아는 앞발을 핥으면서 내 배 위에 앉아있었다. 검은 고양이가 붉은 눈을 하며 나를 바라보는 기분은 어떠할까? 솔직히 내가 살아가는 동안 봐온 고양이 종 중에서, 붉은 눈을 한 고양이는 없으니 오히려 기묘할 뿐이다.

 

길을 닦는 것은 길라잡이가 해야 할 일 아니던가? 바보 같은 변명으로 짐 앞에 어중이 떠중이처럼 이야기 하지 말지어다. 그런데 어쩌다가 루시피나와 주인의 후손을 발견했는가?”

 

드래곤은 오래 사는데 아직도 루시피나의 아버지가 드래곤을 이끌고 있더라고요. 세월이 지나면서 돈이 필요했는지 회사를 차렸지만...”

 

그렇군. 좋겠구나. 루시피나는...과거에 주인과 이어졌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

 

레시아도 제 부부에요. 괜찮을 거에요.”

 

내가 안심하라고 입을 말하고 있지만, 질린다는 눈으로 보고 있는 검은 고양이는, 순식간에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멱살을 붙잡기 시작했다.

 

주인이! 짐을 제대로 상대만 했어도! 축구 할 수 있을 정도로 수 많은 후손이 태어났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레시아가 흔들고 있는데, 내 머리는 매번 천장에 부딪쳤고, 의식이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 레시아가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풀어줬다.

 

설마...루시피나와 주인이 외박했을 때. 이어진 것은 아니겠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주인이 품고 있는 씨앗을 잘라야...”

 

어째서 제가 아이를 품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겁니까?”

 

주인은 신부이니까.”

 

그 소리를 제가 앞으로 얼마나 들어야, 신랑과 신부의 개념이 올바르게 잡히실 건가요?”

 

꾸준히 신랑과 신부의 차이점을 헷갈려 하고 있는 모습이니 태클을 걸 수 밖에 없었다. 마왕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신랑이라는 입지를 굳히고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귀찮은 일이니까.

 

그러면 어제는 루시피나와 주인 사이에, 킹 크림존이 오지 않았다는 그런 이야기군?”

 

뭘 기대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다시 일어나서...

어라?

 

레시아?”

 

왜 그런가? 주인.”

 

비켜요.”

 

싫다.”

 

왠지 모르게 나만 어색해진 침묵의 시간을 보내게 되고, 불길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돌고 있을 때. 레시아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쨌든 지금은 천족과 마족이 전쟁을 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주인의 말대로 인간을 이용해서 싸우는 것은, 전쟁이라기 보단 모의전투 같은 같은 느낌이로군.”

 

하지만 실베스 씨라면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인. 애석하게도 마왕의 자리를 올라서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많다. 짐도 서로 공존하는 길을 찾는가 하면, 머릿속에 마구니가 가득한 자들은, 인간계를 지배해서 자신의 세력을 키울 생각을 하고 있노라.”

 

선과 악은 언제나 공존한다. 하지만 선과 악은 임시로 지어낸 개념일 뿐. 다양한 관점으로 보면 다 맞고 다 틀리다. 다양한 모순이 결합되어있는 이 세상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라면...

 

이 일을 해결하려면 3파전을 만들 수 밖에 없겠네요. 인간을 효과적으로 통합해야 하고, 양측 세력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니까요.”

 

그래? 그러면 주인이 그 일을 할 것인가?”

 

레인에게 말해보고 못하겠다고 말하면 제가 해야죠. 하지만 엘티노스에게 궁금한 것을 풀기 전까지는 보류로 하고 있을게요.”

 

엘티노스는 이 초능력자들을 어째서 만들었는지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그의 괴랄한 인성과는 반비례로 인간을 위해 살아간 그는, 티르처럼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는 강인함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지금이라도 인간을 모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간이 늦더라도 엘티노스가 방법을 찾아내거나, 이미 알고 있다면 그의 계획을 먼저 따라줘야 하니까요.”

 

엘티노스가 천족과 마족의 도움이 되라고 초능력자를 만들지는 않았을 터. 그러니 나는...

 

레시아. 어째서 제 몸에 감각이 없는지 이제 설명하시죠!”

 

당장 내 눈앞에 닥쳐온 시련을 해결해야 한다.

 

그야 루시피나와 외박을 하지 않았는가? 짐이 그 사실에 가만히 눈감아 줄거라 생각하는가?”

 

그리고 내 옆에서 뭔가가 담긴 그릇을 가져오기 시작했는데, 싸늘하게 웃으면서 조용히 웃고 있는 레시아의 미소는, 매력적이라는 말과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보다 심보가 너무 쪼잔해!

 

, 그 안에 든 내용물 뭐에요?”

 

짐이 루시피나와 밖에서 으쌰으쌰를 한 줄 알고, 피곤하고 지칠 것 같기에 장인의 정신으로 손수 만든 스테미나 영양 암흑물질이다. 루시피나도 요리를 도와줘서 무지개 소스를 같이 받아왔지.”

 

날 죽일 생각인가?

진심으로?

여기서 삶이 마감되는 거야?

 

. 주인. 끈적하고 뜨거운 것을 입에 담아낼 준비가 됐을까? 크흐흐흣!”

 

일부러 음흉하게 말하지마! 그 전에 스푼이 녹는 건 음식이 아니라고요...하아...”

 

비참하게 녹아가는 은수저가 미래의 내 혀와 장기가 되기 전에 도망치고 싶었지만, 서서히 가까워지는 죽음 앞에서, 어차피 죽나 안 죽나 저걸 먹어야 한다는 체념 때문에 한숨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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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를 철근같이 씹어먹고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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