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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모리아에게 보고를 했을 무렵. 그렇게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분명 내가 일 처리를 똑바로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검은 높새바람에 대해 알아내려는 것보다 기억을 지워버린 그 상황이 거슬렸던 것.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켈모리아는 내 스커트에 손을 가져….

 

어딜 손대는 거에요!”

 

어라? 독백 중 아니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때가 빈틈이라고 생각했는데?”

 

스커트에 손을 대서 뭐 하려고요!”

 

그야. 옷이 낡았는지 낡지 않았는지 확인하려고.”

 

이 옷에 절대로 낡지 않게 마법처리를 한 것도 당신이잖아.

 

하지만, 나는 아리엘에게 하루에 한번이라도 성추행을 하지 않으면 죽는 병이 있다고?”

 

차라리 죽어!”

 

그걸 지금 핑계라고 두는 건가? 다른 사람이 이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 성별이 같은 여성이라도 해선 안 될 일이 있는 법이거늘! 무슨 약을 하면 저런 바보 같은 병을 창조하는 거지? 그런 병이 진짜로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간다면 인류는 종말을 면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사이에, 레이나 씨는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책을 산처럼 쌓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레이나 씨는 왜 저러고 있어요?”

 

이곳은 도서관이니까 책을 읽는 것은 당연한 거잖아?”

 

아니, 저건 책을 읽는다는 수준이 아니라 흡입을 하는 수준이잖아요. 아무리 속독에 숙련된 사람이라고 해도 300페이지 이상의 책들을 1분안으로 보는 행동은 못해요! 초당 50페이지를 넘겨버리잖아요!”

 

레이나 씨의 풍성한 연갈색의 앞머리가 종이를 얼마나 빠르게 넘기는지, 책에 따라 펄럭이고 있을 무렵. 아무리 내가 레이나 씨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절대로 책에서 눈을 때지 않는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레이나는 본래 문학소녀와 비슷한 이미지잖아. 물론 결혼을 하고 애를 낳으면서 문학소녀라기보단 문학유부녀라고 해야 맞겠지. 그래도 저 상황에서 멋대로 말을 걸지 않는 게 좋아.”

 

그래요?”

 

확실히 읽고 있는 책을 살펴보면 약물 제조에 대한 기초부터, 비밀리에 제조되고 있는 독극물까지 폭은 넓었지만, 어째서 그게 이 도서관에 존재하는 지에 대한 여부는 나중에 판단하기로 하고, 발갛게 올라오기 시작한 켈모리아의 손등을 제차 때리고 나서, 시선을 돌려 다음을 말하기 시작했다.

 

마법 기동반에서도 이번에는 카멜롯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순찰하기로 했어요. 당연히 저는 오후에 순찰을 돌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이라도 잡일을 하고 싶지만 켈모리아가 너무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지금 보고를 드리는 거니까요.”

 

, 그 때는 내 침대에서 아리엘이 유혹하고 있었는걸?”

 

그거 대체 무슨 꿈이에요?”

 

켈모리아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이슬과 같은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입 안에서는 아쉬움과 행복했던 기억을 풀어내는 듯이 조용하게 읊조렸다.

 

드디어 아리엘을 내 손아귀에 넣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그것이 잔혹하고도 행복한 꿈이란 것을 알고 눈물을 흘렸지.”

 

흘리지마.”

 

별 이상한 거로도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학원장이 된 것도 신기하지만, 쾌락주의자에게는 확실히 저런 꿈이라도 꾸는 것이 다반사일까?

 

다음에 아리엘이 내 꿈에 침입하면서 나랑 어른의 놀이를 하자!”

 

안 해요.”

 

깍쟁이~”

 

시끄러워요.”

 

사실상 내 성격으로는 이 이상 귀찮게 굴면 폭언을 해버리는 성격이지만, 만약 나이 이야기라던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나의 앞길은 절망편이라고 써 붙여야 할 정도로 암담하기 때문에 모든 인내심을 다 끌어 모아서 참아내고 있었다. 인내심을 얼마나 끌어 모으고 있냐고 물어보면, 이 행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인내심을 조금씩 받아서 참아내고 있다고 보면 되겠지.

 

애석하게도 마법학원지부를 모두 순찰하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 검은 높새바람의 기억소거 작업이라던가 능력을 보면 필요 없는 작업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기억을 잠깐 덮어씌워서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일지도 몰라, 기억소거라고 확실하게 말할 필요는 없어.”

 

어깨가 훤히 드러난 청색의 드레스를 입은 켈모리아는 붉게 달아오른 손등으로 찻잔을 들어올리며 느긋하게 오후를 맞이하는 듯 보였다. 표정만 느긋한 것인지, 마음도 느긋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면 지금 당장이라도 숨겨진 기억을 전부 끄집어내야 한다는 소리인가요? 사람의 꿈에 침투해서 숨겨진 기억을 들춰내는 자체가 고된 작업인데요.”

 

그건 뭐. 나중에 세피르하고 같이 릴리스를 찾아가면 돼.”

 

그렇군요.”

 

??????

누굴 찾아가라고?

 

잠깐만? 뭐라고요? 제가 누구를 찾아가요?”

 

릴리스. 색욕의 공작이기도 하고, 의식세계에 거대한 거미줄을 만들고 사는 몽마들의 여왕이기도 해. 그 사람에게 가서 양해를 구할 수 밖에 없거든.”

 

너무 자연스럽게 말해서 넘어갈 뻔했으나, 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말로는 매우 위험한 곳으로 산책을 다녀오라는 말 같은데?

 

그럼 켈모리아가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날 그런 곳에 보내는 거죠?”

 

술 약속이 있어서.”

 

술 마시지 말고 그런 위험한 지역은 켈모리아가 다녀오란 말이에요! 이 술고래야!”

 

? 뭐라고?”

 

살기! 켈모리아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경직에 당하고 나서, 보통 나의 계획표는 보고를 하고 오후에 내부를 순찰하고 돌아와서 쉬는 거였지만, 지금 계획표를 수정하자면 켈모리아의 무자비한 보복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가장 1순위였다. 인생은 이렇게 변수가 만들어지는 건지.

 

아무래도 아리엘에게는 자유분방함을 선물해주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싫어하는 단어는 3억하고도 23백만에 41가지가 있어.”

 

요즘은 이 세상의 단어들이 다 싫은 건가?

 

저번보다 더 늘지 않았어요? 그보다 사랑, 평화와 같은 단어도 싫어요?”

 

당연히 싫지!”

 

묘하게 살기와 분노가 가시화가 되기 시작하면서, 지금 내 몸이 빨리 이곳에서 도망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얼마나 화났는지 마법이 아니라 직접 나에게 뛰어오고 있기에, 나는 걸음아 나 살려라!’라는 마인드로 철저하게 도망치며 도움요청을 했다.

 

우와아아앗! 세피르 살려줘!”

 

아리엘! 당장 일로와! 그 옷을 찢어발겨서(이후 생략)”

 

***

 

죽을 뻔했다.

인생에서 죽을 뻔한 경험을 한 경우는 많이 있어도, 지금처럼 여러 가지 의미로 죽을 뻔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도중에 세피르가 공간이동을 그리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 상당히 끔찍했다.’라는 후기밖에 적혀있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여긴 대체 어디지?

 

어서 와! 이곳이 릴리스 님께서 계시는 몽마의 성이야. 현실 세계니까 안심하고 들어오도록 해.”

 

현실이든 꿈이든 마계공작의 성이라면 안심이 안 되는데 말이지.”

 

초기에는 세피르를 통해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라고 했었지? 아마? 몽마로 각성하는 조건으로 나를 이곳에 받아들여주겠다고 했던가? 애석하게도 몽마가 아니라 마신의 피라고 알아버린 나는 과거에 있었던 거부감 없이, 천천히 성안으로 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간만 되면 성의 내부구조를 모두 알려주고 싶지만, 지금은 이곳에 있기 싫어하겠지?”

 

, 마계공작이라는 이름 때문에 짓눌린 것도 아니고, 이곳이 인간계와 다르다고 해서 위화감이나 그런 걸 너무 예민하게 받는 것도 아니지만….”

 

뭘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고 싶어지는 이 불길하게 짝이 없는 오러는? 성 내부에서 어떻게 저런 오러가 나타날 수 있는 거지? 오히려 오러가 끈적하게 내 몸을 감싸서 끌어들이려는 듯, 아직 출입하지도 않았는데 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하네. 이것만으로도 사람에게 최음을 걸어버리는 건가? 식충식물도 이 정도로 잔인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마법 기동반에서 배포한 검은색의 망토를 한차례 휘두르자, 나에게 엉겨 붙은 불길한 색상의 오러 같은 것들이 뜯겨져 날아갔다.

 

이비를 데려오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지금은 릴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는 말을 내가 직접 하게 될 줄은 몰랐네.”

 

학원장님이 시킨 일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소년인 모습으로 되돌아온 세피르는 붉은 눈이 서서히 번뜩이기 시작할 무렵. 아무런 소리도 없던 성의 내부에서 천천히 쇠사슬을 끌어올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다른 곳에서는 이곳이 마지막 보스가 있는 방이다! 우하하!”라고 알리는 신호탄이었겠지만, 지금은 내가 딱히 릴리스를 해치러 온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괜히 이상한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마치 마지막 보스를 잡으러 온 사람 같잖아. 용사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거라 생각해.”

 

그래도 릴리스님이라면 그 용사마저 잡아먹었을 거라고?”

 

농담으로는 안 들리네.”

 

어찌 잡아먹는 건지는 상세하게 알고 싶지는 않지만, 성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어처구니 없는 것은, 색욕의 공작이라고 해서 맨 처음부터 인큐버스나 서큐버스가 집사나 메이드 복장으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신발과 구두는 벗어주세요.’라는 문구를 먼저 보고야 말았다.

 

어째서 성인데 이게 있는 거야?”

 

신발을 벗으면 편하니까.”

 

나도 학원에서 신고 온 신발을 벗고 바닥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보라 빛의 불꽃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 보고는 곧바로 시선을 돌리면서, 다른 곳을 빠르게 바라보고 있을 무렵.

 

이곳은 왜 전부 남에게 최면을 빠뜨리기 위해서 설계된 것 같지? 애초에 신발을 벗으라는 의도 또한 경계를 좀 더 쉽게 풀기 위함이잖아. 이 장소가 따듯한 것도 그렇고, 밖에 이상한 오러가 펼쳐진 것도 그렇고.”

 

함정을 피했다고 생각하면, 그 안에 사소한 함정들로 인해 자신이 점점 거미줄에 얽혀지는 것도 모르고 전진하는 먹잇감과 같았다.

 

혹시나 기분이 이상해지거나, 졸음이 몰려오면 그때는 뭐 여기서 같이 자게 되겠지.”

 

좀 더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방안은 없는 거야?”

 

그보다 1층에 릴리스의 방! 노크를 하고 들어와주세요♥라고 적혀있는 문이 있는데, 이건 노크를 하고 여는 것이 좋겠지?

 

-똑똑똑!

 

노크를 3번 두드리자 달콤하고 끈적한 향이 코끝을 찌르기 시작하면서, 나와 비슷한 은발에 기나긴 머리는 바닥을 쓸고 다닐 듯이 늘어져 있었고, 모든 이들의 욕망을 부추길 것 같은 눈과 잔인하게 정기를 빨아올리는 탐스러운 붉은 입이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어머나~? 내 함정을 돌파하고 오다니, 용사들이려나? 아니면 손님이려나? 어느 쪽에나 상관없이 귀여운 아이라면 모두 환영이야.”

 

손님을 환영하려면 적어도 옷 하나는 걸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지금 그 모습으로는 절대적으로 무리가 있을 거라고 보는데 말이죠.”

 

, 그렇긴 하지?”

 

웃으면서 넘기기에는 파격적인 스타일이었다. 저 무식하게 공격력이 높아 보이는 깨끗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육체에 안기기만 해도 모든 남자가 녹아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러 의미로 끔찍한 학살극을 떠올리다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영원히 제거했다.

 

저는…. 소개 안 해도 아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귓가가 끈적할 정도로 점성이 높은 목소리가 느긋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릴리스.

 

당연히 알지~ 켈모리아 마법학원의 비서. 아리엘이잖아? 원래는 몰래 데려와서 기분 좋게 몽마로 각성시키려고 했는데, 마왕님의 견제로 인해 하지 못한 것이 좀 아쉬워.”

 

세피르가 납치하려다가 멋대로 사역마 계약을 맺은 이유도 마왕님께서 릴리스를 견제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 마법학원에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설마 검은 높새바람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을 아직도 쫓고 있는 걸까? 요즘 내 달링도 오랜만에 이곳에 왔는데 반지 하나만 주고 높새바람 때문에 바쁘다며 상대 하나도 안 해줬는걸?”

 

달링이라니? 그건 또 누구에요?”

 

카일이라고 귀여~운 잡화점의 주인이 있어.”

 

카일 씨는 대체 누구를 함락시키고 오는 길입니까?

 

그 사람이라면 저도 만나봤어요. 아무튼! 검은 높새바람이 스파이를 이곳 저곳에 파견해서, 적어도 카멜롯에 있는 사람들 중에 누가 검은 높새바람인지를 찾아야 하니, 몽마들의 힘을 빌리고 싶어요.”

 

그래서 대가는?”

 

느긋하게 내 몸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몸이 움찔거렸다. 역시나 마족은 일을 부탁하면 특정 대가가 필요하다는 걸까?

 

, 대가요?”

 

당황한 내 목소리를 감지한 건지. 아니면, 자신이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인지 하얀 손이 내 뺨을 타고 턱까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릴리스가 말했다.

 

맞아. 대가. 요즘 세상은 공짜로 도와주기 힘들지. 우리 몽마들은 꿈에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엿보고, 들추고, 농락하며 악몽을 만들기도 해. 그 작업은 하나하나 생존을 위해서 갈고 닦은 기술이야. 그 기술에 대해 당연히 돈으로 값을 지불한다고 하면, 모든 이들이 금은보화를 쏟아서 나를 질식시킨다고 해도 그것보다 높지.”

 

한 손뿐만이 아니라 양손으로 나의 턱을 내려와 목을 쓰다듬고 쇄골까지 서서히 내려가면서 이야기를 이어 나아갔다.

 

그렇다면 몸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 아닐까?”

 

….”

 

기가 차서 뭐라 말하고 싶지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에 비해 릴리스는 웃으면서 나에게 명령하듯이 소리쳤다.

 

지금 당장 나의 방에서 Yee.T 보드 게임을 하자? 벌칙은 탈의로 할까?”

 

게임도 싫고! 벌칙도 싫어요!”

 

하지만 나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무지막지한 힘이 나를 방안에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세피르. 오랜만에 보드 게임을 할 사람이 왔으니. 쿠키와 홍차 좀 부탁해.”

 

. 여왕님!”

 

세피르! 날 구해야 하잖아!”

 

지금은 여왕님 앞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나 할까?”

 

세피르의 현실성 있는 발언과 함께 홍차와 다과를 만들기 위해 사라졌고, 나는 뭔가 일이 꼬여도 정말 단단히 잘못 꼬였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물맴이 마냥 돌도 돌았다. 그보다 릴리스는 아무래도 용사들이 침입하기 쉬운 1층에 방을 잡은 이유는, 보드 게임을 같이 할 친구가 없어서 이쪽으로 옮긴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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