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384
384
어느 때와 달리 평범할 법한 오후에 사고도 터지지 않고, 이상한 기싸움도 일어나지 않은 유일한 날에 해연 씨와 엘라임이 잡화점으로 찾아왔다. 엘라임은 날 봄과 동시에 찻잔에 식어있던 허브티를 보며, “예나는 선정이 딸이다.”라면서 내 얼굴에 뿌려버렸고, 대체 예나가 누군지 선정이라는 사람은 또 누군지 알 수 없는 체, 괜한 분풀이를 당해야만 했었다. 여전히 분노조절장애가 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해연 씨는 대신 사과하면서 손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줬고, 곧 이어 엘라임은 이프리트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프리트! 어째서 이런 녀석과 계약을 맺은 거냐!”
“안고 잘 때 편안해.”
이프리트는 아직도 치우지 못한 이불을 자신의 몸과 돌돌 말아서 애벌레인지 정령왕인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건 둘째치고 내 체질상 나의 주변에는 마나의 소용돌이가 치기 때문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쾌적하거나 안심이 되는 그런 기분이라고는 하지만, 이프리트가 이 잡화점에 오고 나서, 자고 일어나면 내 옆이나 위에서 이프리트가 자고 있는 형태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형태라서 레시아와 시나도 그에 대한 대책을 아직까지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지금 이 시점에서 엘라임이 화난 것은 불의 정령왕과 사이가 단순히 안 좋은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
그렇다고 왜 내 얼굴에 허브티를 뿌리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해연 씨와 엘라임이 잘 지낼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만 좀 일어나! 이 잠탱아!”
“잠은 중요한 것. 그럼 잘자. 엘라임.”
오렌지 빛의 안구가 서서히 닫히고 다시 자고 있을 무렵. 나는 이제 슬슬 엘라임에게 천천히 물어보기로 했다.
“뭐. 제가 정령계약을 맺으면 안 되는 거라도 있어요? 아니면, 제가 정령계약을 맺을 때 세상이 붕괴된다는 그런 설정은 없죠? 아무리 글쓴이가 막 나가는 글쟁이라고 해도, 그런 막장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대체 너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엘라임은 기다란 하늘빛 머리와, 날카로운 하늘색의 눈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성미가 넘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잠깐 대화를 수정해서 2차 대화를 시도했다.
“저에게 설마 정령계약을 하지 말라는 그런 규율이 있던가요?”
“아니. 그건 없어.”
“그런데 왜?”
“그냥 네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거 그냥 싸우자는 건가?
그래도 지금 싸우면 내가 엘라임에게 두들겨 맞는 것은 시간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비어있는 찻잔을 홀짝이며 향을 음미했다. 향을 음미할 수 있는 이유는 당연히 내 얼굴과 옷에 거하게 뿌려버렸으니까. 아직까지 끈적끈적하면서도 상쾌한 향이 내 마음에 한 가득 자리잡고 있겠지. 허브티의 향이 너무 강해서 남의 작품에 막 나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튼 정령이 아니라 정령왕을 파트너로 삼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야. 사용해봐서 알겠지만 네가 자랑하던 그 거대한 마나도 순식간에 소멸할 정도지. 애초에 내가 해연과 계약을 맺지 않은 이유도, 아직까지 해연의 마나가 그리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지금은 계약 했잖아요? 해연 씨가 직접.”
“그 덕에 폭주가 일어나서 하마터면 해연이 죽을 뻔했다고!”
“뭐, 유능한 해결사인 제가 있어서 정말 다행...어푸푸!”
입안에 짠맛이 나는 것으로 보아 엘라임이 내 입 속에 바닷물을 붓고 있었다. 10초동안 괴로운 짠맛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나를 놓고는 엘라임은 소리쳤다.
“정령왕의 시련을 이겨낸 사람은 거의 없어! 근데 너는 무슨 생각으로......”
“저는 그저.”
나는 엘라임의 말을 자르고 머릿속에 생각나는 걸 그대로 다 퍼붓기 시작했다.
“해연 씨가 댁 때문에 울고 있는 걸 해결할 뿐이에요. 해연 씨야 말로 엘라임을 되찾겠다는 결사의 각오로 정령왕의 시련을 받은 것뿐이고요. 이번 기회에 화나거나 스트레스 받은 것이 있다면 저에게 풀어도 상관은 없으나, 저 또한 어쩔 수 없이 이번 일을 도와준 거라고 생각은 해주세요. 그쪽이야 말로 멋대로 가출한 주제에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쯧.”
짧게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려서 창 밖을 바라봤다. 이 일에 무슨 날벼락으로 내가 봉변을 당해도, 그걸 다 감당할 자신이 있으니 나는 내 할말만 하고 끝냈다. 레시아와 시나는 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엘라임은 한숨을 푹 내쉰 체로 살기를 거두고 내 앞에 앉았다.
“해연의 일을 도와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럼 다행이네요.”
“그래도 그 방법 이외에 다른 것도 있었잖아.”
“그래도 해연 씨와 엘라임의 애정관계에는 제가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엘라임도 해연 씨가 자신을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태초의 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쪽지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거잖아요? 설령 자신이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없어, 긴 시간을 동면해야 할 지라도, 해연 씨 옆에서 필사적으로 도와주었던 보답은, 제가 아니라 해연 씨가 직접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니까요.”
분명히 엘라임이 인간형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해선, 그 자리에서 마나 주입을 하기만 해도 일은 해결 되었다. 하지만 이번 계기로 해연 씨가 자신을 도와준 정령왕에게 고마움을 느끼고자 일부러 그런 편한 작업을 하지 않고, 직접 정령왕의 시련에 뛰어 들으라는 무리수를 내던졌다.
도중에 엘라임이 정신을 차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우연이 겹쳐져서 기적을 만들어 내듯이, 의식을 잃은 해연 씨를 쓰러뜨리면서 그나마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다음 안다고 하지 않는가? 이 둘은 서로 더 강하게 결속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해연 씨에게 다시 고백했어요?”
“아니. 이번엔 내가 고백을 받았다.”
“봐요. 모든 게 다 잘 되었잖아요. 애꿎은 허브티만 다 날리고 옷만 다 버렸네. 덤으로 입안에 짠맛이 한 가득하고.”
엘라임은 나처럼 똑같이 창 밖을 보며 입을 열었는데, 어째서 그 행동을 알 수 있는가 하면 유리창에 어렴풋이 반사되는 엘라임의 슬픈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멋대로 죽지. 그리고 소식으로 들었지만 너도 죽을 뻔했다면서?”
“정확히는 1분간 죽어있었어요.”
내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나와 엘라임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모두가,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심지어 자고 있어야 했던 이프리트마저 이불 밖으로 두 눈을 뜬 체. 그렇게 보면 무섭잖아.
“죽은 사람은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전부 다 떠나 보내야 하는데, 너는 거기에 대해 미련이 남아있지도 않았던가?”
“죽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다만, 자포자기였던 저를 엘티노스가 일으켜줬으니, 제가 지금은 살아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친구를 잘 둔 것도 크죠.”
베가프가 사제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비니스의 여신을 부르지 못하고 나는 죽어버렸을 것이다. 만일 내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대가의 마법을 생명이 아닌 목숨으로 선택했다면, 비니스의 여신도 나를 살리지 못하고 모두가 좌절하고 말았겠지.
“죽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지금은 일단 살아있으니까. 저의 목적은 평온한 삶과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잡화점만 조용하게 운영하다가, 편안하게 떠나는 것이 지금의 목적이에요.”
물론 현실은 상당히 잔인해서 날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겠지만.
“꼭 은퇴한 노인처럼 입을 여는군. 누가 보면 나보다 더 늙은 줄 알겠어.”
엘라임은 일어서더니 해연 씨에게 “가자.”라고 말하면서 손을 잡았다. 서로 손을 붙잡고 잡화점을 나가는 모습에 나는 이제서야 안심이 되면서, 아직 찻주전자에 남아있는 허브티를 빈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레시아도 저의 최후의 순간에는 주인이 아니라 제 이름을 불렀죠?”
“그,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았는가! 죽어가는 주인을 보면서 짐의 감정이 제대로 통솔될 리가...”
“시나는 여전히 울보였고.”
“그건 마스터가 나쁜 거였습니다. 제가 우는 것은 정당한 행위였습니다.”
검은 고양이와 하얀 올빼미에게 대답을 듣고는 그나마 평화로운 오후를 만끽했다. 그나저나 지금 잡화점에 살아야 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을까? 잡화점 내부 구조도 지금 인원수에 맞춰서 넓어지기 시작했고, 여전히 이불과 혼연일체가 되어 애벌레처럼 기어 다니고 있는 이프리트 위에, 윈디가 “석양을 향해 가자! 이랴!”라고 시끄럽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니, 무슨 석양을 향해 가? 지옥으로 가고 싶어?”
“그래도 이프리트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 자버리니까요.”
윈디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당당하게 입을 열고 있었다. 이프리트는 밑에서 “무거워. 비켜.”라고 항의하고 있었다만, 그 말을 들을 리가 없는 윈디는 계속 이불 위에서 시끄럽게 소리질렀고, 그에 화가 난 이프리트는 이불에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윈디의 머리를 다 태우기 위해 날뛰기 시작했다.
굉장히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불꽃이 이불은 태우지 않는다는 것?
“제발 서로 그만 좀 싸워요. 레시아와 시나 싸우는 것도 통제해야 하는데, 이제 윈디와 이프리트까지 싸우는 걸 통제하려면 노이로제가 걸린다고요.”
나의 하소연에도 이프리트와 윈디는 계속 이리저리 날뛰면서 공방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결국 나는 두 정령왕에게 아이언 클로를 사용했다.
“그만 좀 하라고!”
“으아아아악!”
“아파.”
아무튼 2분 정도 집행한 뒤에 이프리트는 아무런 일 없다는 듯이 자고 있었고, 윈디는 눈동자에 하트라도 넣어놓은 마냥, 거친 숨을 내쉬면서 바닥을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서 이제 뇌가 수축하는 기분이야. 평화로운 오후가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잠시라도 제대로 쉬고 싶은 마음은 계속 맴돌기만 할 뿐.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아도 이미 평화가 깨지기 일수다. 아무튼 기분 나쁘게 기어가는 윈디의 머리를 살짝 밟고는,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윈디. 왜 나에게 기어오는 거야.”
“카일 씨에게 있어선 기어오는 혼돈이기 때문이죠!”
“그런 건 크툴루 신화에서나 해라.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해.”
그러자 윈디는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대피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예상치도 못한 사고에 대비해서 말이죠.”
대피?
-똑똑똑!
누군가 잡화점에 노크를 3번했으니 분명 매너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는 사뿐하게 걸어나가서 잡화점의 문을 열고 정중하게 “오후에는 영업을 하지 않아요.”라고 멘트를 날릴 준비가 됐는
-파파파파팡!
데...날아온 것은 거대한 바위덩어리 5개가 연속으로 잡화점에 날아들어, 검을 뽑아 베거나 마법으로 날릴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옆으로 굴러서 빠져나올 뿐이었다.
“아이니스! 그만해! 뭐 하는 거야!”
은발의 소녀 아이니스는 분노로 가득 찬 청안으로 나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아저씨는 매번 잠만 자고! 저와 놀아주지도 않고! 이번에는 내가 나오는 분량이 이것밖에 없고!!!”
-슈아악!
“아니. 분량에 대해서는 글쓴이에게 따지라고...아악!”
아스타로트.
넌 대체 어디 있는 거니? 잡화점에 와서 아이니스 좀 달래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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