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놀이터인지 공원인지 아직까지 잘 모르는 듯한 이 장소에서, 그네에 몸을 맡긴 체 이리저리 흔들고 있을 무렵. 하늘에 붉게 태우던 해는 어느덧 사라지고, 은은한 어둠이 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을 때였다. 혼자서 고독하게 있는 편이 나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막상 이런 어둠 속에 혼자가 되면, 즐기기보단 쓸쓸함이 더 앞서나간다. 어떤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즐기는 것이 고독이라고 하는데, 고독하다는 것은 결국 외로움으로 바뀌는 것.

 

하지만 내가 스스로 고독하고 싶다거나, 외롭게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제대로 길을 잃어서 지금은 북쪽을 알려주는, 북극성을 찾을지 언정 켈모리아의 집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당연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아직까진 없지만….

 

문뜩 차가운 감촉이 내 다리를 감아 올라오고 있을 무렵. 나는 누구인지 알기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피르. 어떻게 날 찾은 거야?”

 

난 인큐버스라서 내가 노린 여자의 페로몬은 잘 맡거든.”

 

페로몬으로 추적해서 오다니? 그건 난생 처음 들어보는 추적기술이었다. 내 잡지식으로는 어떤 개미의 페로몬은 너무 강해서, 행성을 한 바퀴 돌고도 남을 정도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어쨌든 세피르는 다시 소년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그네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았고, 나는 아까 전에 세피르가 한 말에 대해 따지기 시작했다.

 

네가 노린 여자가 어째서 나야? 나는 너의 주인인데?”

 

나는 아리엘과 결혼할 거거든. 설령 빅터와 결혼한다 해도 나는 아리엘의 사역마라서 떨어지지 않잖아?”

 

정말 간단하고도 무식한 사고방식이네. 누가 보면 정말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겠어. 너도 켈모리아처럼 쾌락주의라고 할 거야?”

 

남을 기분 좋게 해주는 거야 말로 내 존재의의니까.”

 

인큐버스가 말하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말이긴 했다. 마족이라는 것은 대부분 남들을 타락시키고, 철저하게 파괴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몽마에게 직업정신이 투철할 만한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추운 날에도 검은색으로 광택이 나는 가죽 반바지와, 가죽으로 된 반팔을 입고, 장식과 같은 작은 박쥐 날개와, 검은 뿔은 세피르의 천진난만한 귀여움을 더욱 증가시켜줬다.

 

보기만 해도 치유가 될법한 이 소년에게 잘못 걸리면, 밑도 끝도 없는 나락의 함정 속을 빠져들어간다고 하니, 말 그대로 전형적인 소악마의 표본이다. 나와 눈을 마주치던 세피르는 느닷없이 자신의 무릎을 작은 손바닥으로 팡팡 치고는 이렇게 말했다.

 

무릎베개 해줄게! 오늘은 많이 피곤하지?”

 

그 피곤한 원인이 너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둬. 네가 맨 처음부터 나를 구속한 가죽끈들을 풀어줬으면, 내가 지금 이런 일까지 오지 않았을 거야.”

 

나는 세피르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보다 더 어려 보이는 소년에게 무릎베개를 받는다는 그 자체는, 어처구니 없게도 응석을 부리지 못한 나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아무리 마족이라고 할지라도 진심이 담긴 호의를 받는다면, 마음은 누그러지고 편안한 기분으로 한숨을 내쉴 수 있는 것이었다.

 

힘들 때는 나에게 의지하라고? 내가 사역마니까. 그 가죽끈을 풀어주지 못한 것은, 켈모리아가 협박을 해서 풀어주지 못한 거니까. 이건 사실 내가 풀어주기 싫어서가 아닌, 불가항력이라고? 나는 이렇게 아리엘의 미움을 받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해.”

 

그래? 그럼 내 머리나 쓰다듬어. 꼬마녀석. 아무리 해명을 하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일부의 책임이 너에게도 있는 거니까.”

 

알았어. 알았어.”

 

어차피 나보단 켈모리아가 더 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는 세피르의 고백은, 이미 전부 예상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어도, 내 사역마가 남의 말을 듣는 그 자체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억울했다. 작은 손이 부드럽게 스윽스윽 쓸어 내리면서 서서히 기분이 풀어졌고, 그 뒤로 편안함이라는 세 글자가 내 온몸을 장악했다.

 

다음부턴 어느 누구의 말보다는 내 말에 최우선으로 복종해. 설령 그게 켈모리아를 넘어서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일지라도.”

 

좋아. 그렇게 하자고.”

 

11살짜리 남동생에게 치유 받는 듯한 누나의 기분은 이런 것일까? 의외로 이 시간은 길게 늘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다른 곳에서 발걸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보면 몰라? 밀리아. 치유 받고 있잖아.”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내 기억 속에서 밀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긴 금발이 빛에 반사가 되어 내 눈을 비추는 것과 동시에, 그늘이 진 밀리아의 얼굴에는 하늘 빛의 벽안이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나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인지, 아니. 할 말은 분명히 상당하게 많을 거라 생각한다. 그야 내가 모든 팀원들을 대표해서 켈모리아에게 처참하게 당하고 난 뒤에 조우했으니까.

 

옆에 앉아도 될까?”

 

그러도록 해.”

 

나는 담담하게 대답을 하고 옆에 가장 왼쪽에 밀리아가 앉아서 입을 열기까지, 세피르의 손길을 하나하나 기분 좋게 받아들이면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을 무렵에, 나는 가만히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리엘 정말 미…!”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마.”

 

단숨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밀리아를 위해서, 세피르의 부드러운 무릎베개의 감촉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리고 밀리아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네가 내 지시를 듣지 않고 그 둘을 구하러 간 것은, 틀리지 않은 선택이었으니까. 다만, 켈모리아의 잔머리로 그 둘에게 다른 마법이 부여될 확률이 높아서, 나는 그저 혹시 모르니까 가지 말라는 말이었을 뿐. 평범한 너의 정신상태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는 내가, 공항상태에 빠진 너를 어떻게 말릴 수 있겠니. 어차피 이렇게 깨지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어.”

 

다만, 레이나 씨가 개최한 공포의 신체검사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건 마음 깊숙하게 비밀로 간직해두고. 나는 비장의 수를 밀리아에게 내던지기로 했다.

 

그래도 무의식적으로 나를 인정할 수 없으면. 좋아. 켈모리아에게 말해둘게.”

 

? 지금 뭘 말하려는 거야?”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듯이, 밀리아의 목소리가 차츰 떨려오기 시작했다.

 

비서자리를 내놓겠다는 거야. 네가 켈모리아의 비서역할을 하면 되겠네. 학생회장은 어차피 부회장을 시키고, 부회장이 총괄하면 되는 거잖아? 확실히 나는 이제 이곳에 태어난 건지, 기억을 잃은 건지 알 수 없지만 1주일이 좀 넘게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아낸 것은 내 말대로 움직일 사람은 거의 없다는 소리야. 다시 말해, 나의 존재에 대해 아직 어색해하고 익숙하지 않아서, 무의식적으로 날 멀리 밀쳐내려고 하거나 거부감이 들려고 하지. 그래도 그건 인간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약간 거부하는 습성이….”

 

아냐! 아니야…….”

 

솔직히 놀랬다.

사람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리아는 여전히 자신이 인정하지 못하면 소리를 질러서 말을 끊거나, 무작정 남의 말을 방해하려고 한다.

 

그냥 나에게 잘못했다고 말하란 말이야. 어째서 네가 쓸 때 없는 짐까지 전부 짊어지려고 하는데? 왜 이걸 다 네 잘못이라고 하는 거냐고!”

 

나는 밀리아를 보며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카멜롯에 있는 사람들이 엘리트라고 할 지라도,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 어린애에 머물고 있으니까. 그보다 솔직히 켈모리아의 비서를 관두고 밀리아를 주려는 이유는 당연히, 그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으니까 이러는 건데. 밀리아가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면 가장 간단한 답을 말해줘야지.

 

내가 리더니까. 적어도 나는 이 일을 맡으면서 절대로 건성으로 하거나, 대충 하고 이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아. 나는 적어도 내가 맡은 모든 것은 철저하게 다 하는 타입이니까. 팀원이 실수를 해서 리더가 본보기로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겠지.”

 

이상한 곳에서는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니까?”

 

시끄러워. 세피르. 고양이 밥으로 만들어서 던져버리기 전에 가만히 있어.”

 

세피르가 우중충한 분위기를 농담으로 치우려고 했지만, 내가 사전에 차단을 하면서 지금 계속 무거운 분위기를 이어가야만 했다. 밀리아에게 나에게 해줘야 하는 것은 분명, 자신의 의지를 조금이라도 억누르고, 팀을 위해서 행동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기에, 본래 목적은 그냥 밀리아에게 비서자리를 주고 극한 직업: 켈모리아의 비서편을 만끽하게 해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하지 않을 것 같으니 나는 정리해서 입을 열었다.

 

난 절대로 일을 대충하거나 그러지 않아. 날 따라와준다면 확실한 승리는 장담 못해도, 이번 마법 무투제에서 각개격파 당해서 망신당할 일은 없을 거야.”

 

밀리아는 나의 눈을 보면서 이윽고 고개를 숙이고는 생각하는 듯 보였다.

 

정말. 그 근본도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람……. 내가 위로해주려고 왔더니 오히려 위로를 받아버렸잖아?”

 

작게 중얼거리고 있는 밀리아의 소심한 불평을 듣고, 나는 밀리아의 어깨를 살며시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건 그렇고 켈모리아. 거기서 뭘 훔쳐보고 있는 거죠?”

 

아까 전부터 나무 뒤에 음흉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싶었는데, 나에게 세피르를 보내고 내 위치에 밀리아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을 추려내면, 나무 뒤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켈모리아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또 이곳에 있기 싫다면서 가출하는 줄 알았어. 하지만 아리엘. 이거 하나만 알아두도록 해.”

 

켈모리아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자신감이 넘치는 입으로 말했다.

 

내 비서는 아리엘 밖에 없어. 그야 귀엽고 신기하고 진귀한 물품은 난 절대 놓치지 않거든.”

 

나를 끌어 안고는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고 강하게 잡았다. 붉은색 와이셔츠의 매끈거리는 촉감과 더불어 한가지 내가 감지한 것은…….

 

켈모리아. 또 술 마신 거에요?”

 

농후한 와인 향이 내 코를 괴롭히기 시작했기에, 포도향과 더불어 기묘한 지독한 알코올 향에 내 정신까지 혼미해질 뻔했다.

 

? . 그렇지. 확실히 이번 일은 너무 미안해서 말이야. 내 바로 옆에는 항상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원칙이기도 해. 나를 5개월간 가르친 스승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켈모리아를 가르친 스승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아니지.

지금은 이런 생각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의 내 집은 켈모리아와 같이 살던 그 집이니까.

 

그러면 나와 아리엘의 오붓한 신혼집으로 가볼까?”

 

켈모리아. 그런 헛소리 한번만 더 하면 저녁밥은 없을 줄 알아요.”

 

그래도 저녁밥을 안 주는 건 너무 하잖아? 아리엘도 조금만 더 솔직해져서 아까 세피르의 무릎베개에 눕듯이 응석을 부리면 좋았을 텐데.”

 

켈모리아는 저에게 이상한 흑심을 품기 때문이죠. 어떻게 생각해보면 몽마보다 더 위험한 존재는 켈모리아라고 생각해요.”

 

역시 사람은 과거를 돌아보고 싶어하지만, 지금 사람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일 뿐이다. 다음날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처럼 바보같이 켈모리아에게 당한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본다.

 

그럼 리더 씨. 내일은 뭘 할 거야?”

 

밀리아가 나를 보며 계획을 묻고 나는 답했다.

 

친해져야지. 다른애들하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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