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97
597
마계에는 유독 붉은 보름달만 뜨는데, 그 이유는 마족들이 붉은 보름달에서만큼은 어마어마하게 강해지기 때문이다. ‘어마어마’라는 표현이 거슬리면, ‘매우 강해진다.’라는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냐면...
“흐음? 그 정도인가? 아까 전과는 달리 많이 지쳐있는 모습이군?”
“시끄러워...잡화점 열어야 하는데 너 때문에 못 열잖아.”
과거에 단련하고 경험하고 노력해왔던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처참하게 깨져나가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도망갈 수 있게 구멍을 파놓는 나의 성격을 어떻게 읽었는지, 빠져나갈 수 없는 결계가 사방에 널려있을 무렵. 아직 익숙하지 않는 이 몸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 신기했다.
아니. 익숙하긴 해도, 신장차이가 있기 때문에 유효타를 넣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겠지. 온 몸이 욱신거리고 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엉망진창이 되었어도 아직까지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라면, 과거의 신체 데이터를 백업하여 원상복구 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지금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사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잡화점을 열어야 한다는 그 하나 때문에...
“프리트론 왕국의 몰락을 막아낸 것은 좋으나, 그 바보 같은 행동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구나.”
“사실 프리트론은 어찌 되도 상관은 없는데, 일단 마왕을 만나러 온 것뿐이니까.”
만나러 온 이유야 뻔한 이유지만...
“짐이 누군지 알면서도 만나러 왔다? 그러면서 명을 재촉하는 것이야 말로 실로 우습구나.”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호랑이 가죽을 남긴다고 하지. 아니, 다른 건가? 어쨌든 마왕을 만나려면 마계로 가는 게 아무래도 일반 상식 아닐까? 솔직히 내가 한 말을 끊고 “호랑이를 잡는 거겠지!”라던가,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 거다!”라고 소리치는 걸 듣고 싶었다만, 뭐 지금에 와서야 그런 바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으려나?”
마음이 좀 착잡해졌다. 그래도 태클을 걸면서 살아온 인생이 좀 오래 되었으니, 이렇게라도 만담을 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이나마 추억이 되살아나려고 할 때, 마왕 옆에 천천히 다가왔다.
“마왕님. 이 소녀를 저에게 주신다면 쓸만한 아이로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쓸만한 아이는 뭐야?
“마음에 드는가? 그대는 아직까지 거느리고 있는 신부가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만?”
“새로운 장난감은 언제나 가지고 싶은 법이죠.”
뭔지 모르겠지만 저 남자를 날 바비인형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군. 허나, 짐 또한 저 소녀에게 아직 못 본 것이 많다. 그러니 그걸 확인 하기 전까진 보류로 해두도록 하지.”
“그렇군요. 그럼...”
그 남자의 시선이 날 훑고 지나갔다. 어마어마한 사념이 나에게 침투했는데, 그 중엔 피투성이가 된 체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한 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대체 신부들에게 무슨 짓을 하면 그 지경까지 가는 거지?
“저건 마계토착 생물을 떠나서 이미 정상이 아닌데...”
“아무래도 마계공작 중 하나인 거 같네.”
자기가 닥친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세린은 매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잡화점 주인 밖에 보이지 않는 세린을 마계공작이나 마왕 레프리시아가 볼 일은 전혀 없다만, 지금 그런걸 생각할 때가 아니라, 저런 변태 같은 녀석에게 갈고리에 걸려서 엔티티에게 제물로 받쳐지는 걸 막으려면, 이제 슬슬 이탈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로 나는 검을 허공에 집어 넣었다.
행동으로부터 이미 레프리시아에게 전해지자, 눈살이 살짝 찌그러진 마왕. 그거 하나만으로 거대한 마기가 나를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내지 말라고? 잡화점 문을 열어야 하는 시간이라서 말이야. 슬슬 돌아가봐야 하거든.”
“도망치게 놔둘 것 같은가!”
거대한 마기가 허공에 응축되어 모든 땅을 갈아내도, 내 손에 바다 빛의 마나가 한 곳에 모여 퍼지기 시작했다.
“새벽<Daybreak>.”
-파사사사사삭!
“뭣이?”
마기는 자연상태로 되돌아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애초에 내 앞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건 그리 큰 효과가 없다.
“마왕도 생각보다 약하네? 이런 마법에 상쇄 당할 줄이야?”
사실 내가 특이한 거지만 분위기에 맞춰서 도발을 해보았다. 이런 도발에 걸린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왕 레프리시아는 상상이상으로 냉철한 분석가였다.
“모든 마법을 단숨에 자연상태로 바꿔버리는 마법. 확실히 그대는 마법사에게 있어선 최대의 적이로구나. 지금까지 쓰지 않았다가 쓰는 걸 보아하니, 어떻게든 아껴서 반격을 할 속셈이었군. 실력을 숨기고 있어서 몰랐으나, 마계공작에 어울릴만한 기술이니라. 다만, 잡화점이라는 장소는 그저 잡다한 물건을 파는 곳인데, 그게 세계를 종말로 몰아넣을 마왕을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인가?”
“맞아. 더 중요해.”
“호오...”
“실로 흥미로운 동물이 아닐 수 없구나!”라는 듯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마계의 군단을 회군시킬 정도로 거대한 힘을 지닌 사람이, 잡화점 하나 열어야 한다고 세계평화고 나발이고 집어 던지면서 돌아가니까.
마치 “내가 중요해! 일이 중요해!”라고 했더니 “일이 중요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아님 말고...
아무튼 완전하게 적의가 없다는 표시로 뒤로 돌아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뒤에 기습을 받을 수 있긴 하지만, 이미 시공간까지 조작하는 내가 그런 거에 당할 일은 없었다.
-파앙!
“집에 좀 가자! 아프잖아!”
오늘 처음 있는 걸로 하자.
“보내지 않는다. 애초에 세상에는 관심이 없는 자라고 한들, 그 정도의 힘을 지녔다면 분명 짐에게 있어선 커다란 장해물이 될 존재. 그러니 선택을 하거라.”
“보나마나 자신의 아군이 될지 죽도록 싸울지 결정하라고 하겠지.”
“맞다. 짐과 같이 세계를 멸망시키고, 더 나아가 모든 차원을 한줌의 흙으로 공허에 흩뿌리지 않겠는가?”
모든 차원을 한줌의 흙으로 흩뿌리기엔 아직까지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는 레시아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바보 같은 허상은 언제나 이럴 때만 나타나네. 아무튼 나는 그런 거에 관심이 없거든? 그렇다고 해서 죽도록 싸울 의미도 없어. 단지 그 기사의 각오를 무시하기엔 너무 애처롭거든. 그래서 1번 정도는 회군시키도록 유도한 것뿐이야. 그 다음에 프리트론이 망하던 칸포리우스 제국이 망하든, 잡화점만 열 수 있다면 나와는 전~혀 관계 없지.”
나의 말을 들을 때마다 분한 건지 아쉬운 건지 계속해서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마왕. 저들 입장에서도 소녀 하나가 마계의 대군을 막고, 왕국 하나를 구한 셈이 되어버렸으니 어떻게든 죽이거나, 자신의 수하로 만드는 선택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자신보다 어느 정도 약해야지, 내 경우에는 지금 마왕마저 갈등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아니, 그 이상으로 힘을 숨기고 다녔다. 그 진가를 알아보는 건 역시 레프리시아 밖에 없는 건가?
“그럼 어쩔 수 없지.”
순식간에 내 앞으로 순간이동한 레프리시아. 그리고...
“짐의 수하로 있기는 싫고 그렇다고 죽도록 싸우기 싫다고 하는 의미는 지금 그대는 적의가 전혀 없다는 것으로 인지해도 괜찮은가?”
멀리서 마법을 맞을 땐 몰랐지만, 예전에도 많이 본 레시아의 칠흑의 드레스를 기초로, 흑색의 무구들이 마왕의 카리스마를 더욱 높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렇게 인지해도 상관 없어.”
“다만, 그대가 언제 돌변하여 짐에게 칼을 들이밀지 모르는 일. 그런고로 짐은 사소한 변수마저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이곳에서 전한다.”
만일 내가 용사와 같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지했는지, 그런 가능성도 없는 경우의 수마저 제거하기 위한 마왕의 입이 열렸다.
“짐의 신부가 되어라.”
......
“녜?”
“짐의 신부가 되라고 말했다.”
“아니. 신부고 나발이고 나는...”
“알고 있다. 그대는 본래 여성체가 아니라는 것쯤은. 다만, 그대가 설령 남성체라고 해도 짐의 신부가 되라는 말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기본적으로 남자가 신랑이고 여자가 신부라고!”
“그대는 지금 소녀이지 않는가?”
아.
제길. 마왕에게 논리적으로 밀려버렸다.
“아냐. 잠깐만! 아냐! 그게 아냐!”
“짐과 애정관계를 쌓으면 언젠가 짐을 위해 움직이는 날이 올 것이고,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고 해도 짐의 감시 아래에 그대가 수상한 행동을 할지라도, 초기 진압이 가능한 이점을 살린 것이다.”
“그보단, 타락의 마왕이니까 결국 내가 타락해서 마왕군에 들어갈 거라는 생각을 한 거겠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그 특유의 파동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멀쩡한 사람도 결국 타락할 테니까.”
“짐의 의도마저 파악할 정도인가?”
오랫동안 봐오면 무슨 꿍꿍이인지 자동으로 알게 된다.
“그러니 나는 잡화점을 오픈 하러 갈 거야. 신부가 되라는 제안은 정말 진심을 다해 거절할게.”
대체 왜 장르나 전개가 이 모양으로 되는 건지...
분명 모든 시공간에 있는 각본가는 왜곡시켰을 터인데.
“아니, 불허하다. 운이 좋게도 짐은 마왕이니라. 얻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얻어야 하며, 얻을 수 없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어야 하느니라.”
“내 입장에서는 운이 너무 나쁜 거 같은데...”
“조용히 하거라. 짐이 윤허하지 않는다!”
초창기의 레시아는 고분고분한 성격이었다면, 지금의 마왕은 그냥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성격인가?
“저기...역지사지라는 말 알아?”
“알아도 모른다 할 것이다.”
“전혀 상대방을 생각해주지 않잖아!”
“그야 당연하게도 마왕이기 때문이니라.”
이걸 때려? 말아?
아니, 왠지 때려도 내가 곱게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전 세계에 레시아와 성격이 은근히 비슷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도 신부는 싫어. 또 과도한 사랑을 받다가 죽거나, 힘 조절 안 되는 태클을 맞으면 죽어버릴지도 몰라.
“아니면, 지금 당장 혼약식을 치르도록 하지.”
“진도가 너무 빠르잖아! 학원강사냐!”
가끔가다 학원강사들이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는 문제를 풀게 만들어, 학교 선생님을 깔보게 만드는 그런 경우도 있다. 그 이전에 이 세계에는 학원강사라는 개념이 없지. 300년 이전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보다 더 멀리 왔을지도 모르니.
“아니면 짐이 남성체로 변해야 받아들일 건가?”
“내 성별은 원래 남자라고!”
“그럼 그대가 남자로 변해서 짐의 신부가 될 것인가?”
“태클을 걸어야 할 곳이 너무 반복적이니 따로는 말하지 않겠는데...”
“따로 말하지 않는 거면 승낙하겠다는 의미로 알겠...”
“좀 사람 말을 끝까지 듣고 멋대로 해석하지 말란 말이야!!!”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면서 잠깐 고개를 숙이고 지친 정신을 수습했다. 마왕과 싸우면 적어도 장엄한 전투로 인해 죽는 경우는 봤어도, 마왕과 이야기 하다가 화병으로 먼저 쓰러질 뻔한 이야기는 전혀 없겠지만...5분만 더 이 상황이 지속되었으면, 오늘 처음으로 마왕과 이야기 하다가 고혈압으로 사망한 캐릭터가 될 뻔했다.
“뭐가 문제인가? 짐은 이래 보여도 꽤 귀엽다고 생각한다.”
“그게 지금 마왕이 할 말이냐...”
모든 각본가는 제외시켰으니, 원래대로라면 용사와 마왕의 싸움, 제국과 마왕군의 대립. 더 나아가 인간의 내부분열 등. 흐름을 타고 악순환이 되어도 나는 아무도 오지 않는, 어쩌면 가끔씩 의뢰인이 오는 잡화점 안에서, 평화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뒹굴 거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걱정 말거라. 처음에만 아플 뿐이라고 마계공작 중 한 명이 말했으니...”
“누가 그걸 걱정한대!”
“경험이 있는 것인가?”
“무슨 경험타령이야!”
“가위바위보 말이다.”
“그 망할 것의 가위바위보는 대체 왜 이곳까지 나타나서 괴롭히는 거냐고! 그게 처음에만 아프다는 건 또 뭔 상황인데!”
아무래도 세계가 대격변을 해도 중심점은 마왕의 가위바위보가 아닐까?
그건 그렇다고 해도...가위바위보를 처음 하면 많이 아픈 건가? 내 생에 첫 가위바위보는 4살 때 동네친구와 같이 했던 기억밖에 없다. 졌을 때도 마음이 아프거나 그러진 않았으니까.
“혼례를 한 뒤에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은 정통이 아닌가?”
“대체 어느 곳의 정통이 그렇게 삶은 물에 데쳐먹을 정도로 막장이 됐는지 설명부터 해!”
아무래도 나의 사명은 차원을 넘어서도 계속 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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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는 첫날밤에 가위바위보를 한 뒤에 공격팀과 수비팀으로 나뉜뒤 일리오스로 떠납니다.(??????????????????????)
...그냥 잊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