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75
575
머나먼 과거.
바다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존재들은 한낱 단세포생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경쟁하여 살아남고 진화하게 되었으니, 먼 훗날 복잡한 기관을 가진 생물이 되어, 각기 다른 환경에서 적응했고, 그 이후로도 멈추지 않는 성장은 지능을 발달시켜 무리를 만들고, 우월한 유전자를 찾아 번식을 하며 경쟁자를 죽이고, 터전을 만들어 후손을 위해 죽어갔다.
과연. 이런 말을 들어보니 창조주가 수많은 종족을 뱉어냈다는 말은 믿지 않게 되는군. 사실상 창조설에 대해 믿지는 않지만, 창조주의 존재를 생각하면 가능성이 매우 높긴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창조주가 ‘설레여라 얍!’하면서 만든 존재가 아니라, 실험정신으로 투철한 진화설까지 확립한다면, 결국 우리를 탄생시킨 건 창조주가 되는 거다.
그러나 창조주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릿광대는 내가 과거에 선생으로 변장했던 모습을 이미 알고 있었고, 레이베리아는 보이드로 모든 것을 지우려고 하고, 설상가상으로 수정구에선 염라대왕이 계속 난동을 부리는 오후였다. 여전히 겨울이라 쌀쌀하지만 한파는 지나가고, 약간 따스해진 햇빛을 만끽하며 흔들의자에 앉아 허브티를 마시고 있을 무렵.
생각만큼은 긴박하게 돌아가서 조만간 급정지가 필요하리라 판단했다. 어릿광대가 과거로 시간여행 할 때의 변장한 내 모습을 알고 있다면 둘 중 하나인데.
직접 봤거나.
누가 보여줬거나.
저 두 개가 아닌 이상 다른 방법으로 알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어릿광대가 월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엔 시기가 너무 이르고, 나 또한 과거로 갔을 때는 시나로 인해 잠식되어있던 월식은 모조리 제거되었을 시기다.
서로 맞지 않는 시간대이니 월식의 종족특성간의 정보공유는 물 건너갔고, 나머지는 기록에 따라 누가 보여준 거 아니면, 어릿광대가 스스로 시간여행을 했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도대체 누가 유랑극단에서 시간여행까지 하는 만행을 저지른단 말인가? 당연히 시간이 정지되어버린 세계에서 공간마저 없애려고 했던 유랑극단이라서 가능하겠다만, 역시나 그거마저 시기가 너무 이르다. 오히려 시간을 조종할 수 없어서 티르를 조종해 호문쿨루스로 난장판을 벌였으니까.
그렇다면 시간의 파수꾼을 통해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들도 지능이 있는 생명체인만큼, 무언가 자신과 맞아떨어지는 사상이나 개념이 있으면 친근해지기 마련이다.
시간을 지키는 정의의 수호자라고 해서 타락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시간의 파수꾼 중 누군가가 유랑극단과 오래 전부터 협력하고 있다는 말이 될 테고, 시공간에 관련된 정보를 넘겨줬다는 경우를 통해, 날 300년 뒤로 밀어 보내버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홀짝하며 마신 허브티는 배를 편안하게 하고, 머리는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만끽할 무렵. 안리아스의 수정구로부터 연락이 도착했다.
[음? 여장한 잡화점의 주인은 어디 있는가?]
“왜 그거부터 따지고 드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염라대왕님.”
짙은 붉은색 눈 화장이 슬슬 부담스럽지 않게 느껴진다는 건, 그 사람의 개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일까? 치켜 뜨는 모습에는 카리스마가 느껴지지만, 최근에는 매우 귀엽게 느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없다면 본론만 간단히 말하지.]
“천계의 동태를 파악하셨나요?”
[아니. 여장하고 다시 본인에게 연락하거라.]
“그러니까 왜! 내 여장에 집착을 보이냐고요!”
평화로운 오후를 즐기던 나의 시절은 단 5분만에 여장이라는 키워드 한방으로 모조리 날아갔다. 명계의 지배자가 살아있는 인간의 여장을 보고 싶어하다니? 이거야 말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몇 초나 지속되었을까?
[하...정말 실망이로다. 본인은 지금까지 명계를 지배하면서 남에게 부탁을 해본 경험이 없다. 당연히 부탁을 당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언제나 독보적으로 결정을 해오고 판결했으니 말이다. 그로 말미암아 본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고집만 본다면 레시아보단 위에 속하지만, 루니아 누나보단 아래에 속하기도 하고...
“아뇨. 알아도 모른다고 할 거에요.”
[칫!]
염라대왕이 혀까지 찼다.
대체 백장미의 영향력은 어디까지인가?
[본론만 말하도록 하지. 천계는 멸종한지 오래다.]
멸종?
“잠깐만요. 멸종이라뇨? 발키리와 천사들은요? 모조리 다 어디로 갔어요? 상급신들은? 그 신들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길래 멸종된 거에요?”
엘티노스가 있는 이상 멸종은 아닐 터.
[말 그대로 멸종이다. 천계에는 더 이상 천사, 발키리, 심판자, 하급신, 상급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소멸해버렸다고 봐야겠지. 애초에 천계로 부름을 받은 이들은 명계로 와서 다시 환생할 수 없으니 말이다. 환생할 수 없는 불멸의 존재들을 소멸시킨 것도 꽤 특이한 경우로다.]
불멸의 존재가 소멸해서 멸종을 당했다면, 시간의 파수꾼이 유랑극단과 함께하고 있다는 가설이 점점 힘을 받게 된다. 무시무시한 일이 그대로 내 생각대로 벌어진다면, 그 다음은 잡화점부터 제거하려고 들겠지.
그런데 시간의 파수꾼이 왜 나에게 직접 나서지 않고, 몰래 유랑극단과 손잡으며 움직이고 있을까? 그것도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다.
“그렇군요. 멸종이라 보기엔 한꺼번에 봉인되어있을 수도 있으니 잘 관찰해주세요. 제가 만일 천계에 갈 수 있었다면, 시간을 돌려서 무슨 일인지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애석하게도 저는 천계로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이 없거든요.”
[한낱 인간이 천계에 출입할 자격이 있다는 거야말로 이상한 거다.]
“아니, 그건 그렇지만. 예전에는 출입도 가능했었다고요. 300년전에 말이죠.”
300년전에는 아우리스 여신이 존재했으니까.
[본인은 모르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염라대왕이 말을 늘리며 잠깐 자리를 비켜주는 듯했다. 그리고 10초뒤에 짙은 회색의 로브로 몸을 둘러싼 소피아가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아빠! 좋은 오후!]
레시아와 비슷한 외형이었지만 조금 더 앳되고 밝게 웃는 미소부터 눈에 띄었다. 레시아와는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미래의 나와는 매우 사이가 좋은 듯한 분위기. 안리아스의 수정구를 준 이후 연락횟수도 늘어났다. 나 또한 좋은 오후라고 답을 했는데, 타이밍 나쁘게 검은 고양이가 내 왼쪽 어깨로 올라왔다.
“주인. 아직도 쉬는 건가? 음?”
[어라?]
검은 고양이와 명계의 뱃사공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시아였다.
“주인! 어째서 어린 시절의 짐의 모습이 여기에 있는 건가! 안리아스 수정구는 +9강까지 강화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 이상 강화를 해버리면 파괴되거나 변질이 되어버린다!”
“아니. 강화기에 넣은 적이 없...”
[아빠! 그 도둑고양이는 또 누구야! 지금 당장 사지를 뽑아서...]
“도둑고양이가 아니라 이쪽이 레시...”
잠깐만? 레시아가 검은 고양이라는 사실을 모르나? 그럼 소피아가 살아가는 동안 레시아가 동물로 변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못 봤다는 소리잖아. 그리고 고양이에게 도둑고양이라는 말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짐은 타락의 마왕 레프리시아다. 과거의 나인지 아니면 우연히 닮은 객체인지에 대해 알릴 것을 명하노라.”
[뭐? 레프리시아? 그렇군! 나의 영원한 라이벌의 과거인가!]
어쩌다가 모녀관계가 라이벌관계로 진화를 한 걸까?
“호오? 라이벌이라? 아쉽게도 지금 그대의 모습을 보아하니, 짐의 라이벌이라고 떠들고 다니기엔 12억하고도 139만광년정도이르다.”
[웃기지마! 너의 마수로부터 아빠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고!]
부부관계는 어떻게 하면 내가 마수에 빠진 걸로 되어있는 걸까? 마치 내가 반 강제로 레시아에게 끌려간 것처럼 보이잖아?
“저기! 잠깐만! 그만들 좀 싸워요!”
소란이 더 커져서 레시아와 소피아가 수정구를 박살내기 전에 중재를 시도했다. 적어도 내 말은 잘 따를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결과는 다행히도 레시아와 소피아의 말싸움이 멈추고...
-파아앙!
레시아의 마법에 휘말려서 잡화점의 창문을 깨고 4M밖으로 더 날아갔다. 뭐가 다행히도 말싸움을 멈춘 건가? 결국 감정조절을 못하고 마법을 날린 건데.
“여전히 아파죽겠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상처 속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하얀 올빼미가 날 보자마자 날아와 입을 열었는데.
“마스터. 이곳에서 자면 입 돌아갑니다.”
“충고는 고마운데...나는 이곳에서 자려고 한 게 아니거든?”
다른 차원에선 창세의 여신이라고 불리는 람파시나. 줄여서 시나라고 부르고 있지만 정찰을 다녀왔는지 아직까지 하얀 올빼미는 내 주변에서 활공하고 있었다.
“레시아와 그 후손은 왜 이렇게 살벌한지 아직도 모르겠네.”
“후손? 그 냥캣에게 후손이 있다는 겁니까?”
“아. 소피아라고 명계에서 뱃사공을 하고 있더라고, 기괴하게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명계의 배를 조종하고 있어. 안리아스의 수정구를 주며 자주 연락하라고 하긴 했는데, 오늘 레시아와 마찰이 빚어져서...”
“결국 마스터는 마법을 맞고 날아온 전개입니까? 좀 더 참신하게 마법 말고 다른 방법으로 날아오길 바랍니다.”
요즘 따라 이 올빼미도 내가 구르는 모습에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좀 더 참신한 아이디어로 구르라고 강요하고 있다니.
“그보다 마스터. 왼팔에 있는 건 월식입니까?”
왼팔에 감겨있는 검은색의 뱀 조종자.‘히드라’에 시선을 살짝 돌렸다.
“지금은 협력하는 사이야. 어릿광대를 찾거나 유랑극단의 본진을 찾으려면 꼭 필요해서.”
“그렇군요. 하지만 마스터에게 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히드라를 대신해서 입을 열려고 했다가, 검은 사슬이 멋대로 움직이더니 이윽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웃기지 마라. 멸망한 차원의 여신이여. 오히려 이쪽은 조용히 죽고 싶었건만, 잡화점 주인의 협박과 폭력으로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니는 것뿐이다.”
“협박과 폭력이라니?”
폭력이라기엔 히드라가 먼저 공격해서 반격한 것뿐이고, 협박이었다면 협력하는 관계가 아니라, 내가 부려먹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겠지. 이건 좀 억울했다.
“나처럼 평화적이고 온순한 사람이 협박과 폭력이란 키워드를 사용하다니? 그런 유언비어를 퍼트리면 안 되지.”
“직접 경험한 입장에서...”
“맞을래?”
히드라는 다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왼팔을 감싸며 가만히 있었다.
“뭐 어쨌든. 서로 협력을 하면서 살아야 좋은 세상이 되지. 그렇지 않아?”
“마스터에게 방금 섬뜩한 무언가가...”
“응?”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웃고 있는지 몰라도 시나마저 인정했으니, 평화적이고 온순한 사람으로 증명되었다.
“아 맞다! 이게 문제가 아니지! 시나. 한가지 확인할 것이 생겼어요.”
“뭡니까? 마스터?”
“샤이어의 행방을 좀 알고 싶은데, 염라대왕의 말을 들어보았을 때 천계에 있는 모든 자들이 멸종해버렸다고 하더라고요.”
“멸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누군가의 소행으로 인간의 몸 속에 갇혀있는 것뿐이죠.”
“인간의 몸 속에 갇혀있다고?”
그 많던 개체수가 각기 다른 인간의 몸에 갇혀있다?
이건 또 어떤 난장판을 만들려고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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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피곤해요...
살려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