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25
525
레퍼토리가 여동생이 일하고 들어와 지친 형제든 자매든 치유해주는 이야기였지만, 의외로 까다로운 마리아의 성격 때문에 매번 다시 찍고 있었다. 잡화점을 운영해야 하는 나의 운명은 루니아 누나가 대신 봐주기로 했고, 지금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방 안에서는...
“좀 더 녹아 드는 목소리로! 그래서는 사람들의 영혼까지 치유할 수 없다! 카린이여! 조금 더 영혼을 실어서 연기하거라! 여우주연상을 받아봐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300년 뒤의 세계에서 유명인으로 되면 안 된다는 거 아니었나요? 그리고 제 이름은 카일이에요.”
허탈하다면 허탈한 거고, 어이가 없다면 어이가 없는 것이 맞다. 대본이야 대략적으로만 보고 대부분 상황에서는 애드리브로 넘기자고 했지만, 하기 싫은 마음이 굴뚝을 넘어 거대한 성벽을 넘어갔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때려 치고 싶었다.
“좀 더 다른 방향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없나요?”
내 얼굴을 정면에서 찍고 있던 카메라를 치우고, 마리아는 고민을 하고 있다. 좀 더 다른 방향이라고 해도, 의도는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는 상대에게, 어떤 말을 해야 좀 더 효율적이고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어쩔 수 없군. 마왕님.”
마리아가 레시아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루시피나에게 코디를 받고 있던 레시아는, 멋진 남성용 슈트 위에 트렌치 코트까지 입히고 있었다. 쓰다듬을 때는 부드러웠던 검은색 면장갑에서, 광택이 나는 검은 가죽장갑까지. 나중에 저런 모습으로 인간계를 침공하는 마왕이 생긴다면, 그 즉시 가까운 장소에서 사진을 찍어서 보내도록.
사진에 있는 내용을 판별해서 진짜 레시아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하니까.
그래도 이렇게 보니, 남자로 편한 레시아가 기준치보다는 잘 생겼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거기에 반칙과 같은 카리스마나 주변에 다가가서 말을 걸고 싶은 분위기. 분명 타락의 표식을 든 자의 곁에 있다면, 치명적인 매혹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마왕님께서 직접 상대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지금의 카일로는 충분한 감정이나, 애정행각을 할 수 없으니 말이죠.”
그런 애정행각을 내가 왜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레시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짐이 주인을 교육하면 되는 건가?”
“교육이라는 차원의 수준이 아니거든요?”
“같이 Yee.T 게임을 한다는 연출을 넣는다면 짐이 하도록 하겠다.”
“그 바보 같은 보드게임을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그거 집어넣으면 내가 안 해!”
옆에서는 흡족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루시피나와 마리아, 그리고 질투가 너무 심해서 눈에 광선이라도 쏠 것 같은 하얀 올빼미가 천장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다른 차원에서는 창세의 여신, 혹은 빛의 여신이라고는 불리고 있기에 남자로 변하지 못하는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나의 경우엔 본래 모습이 없다. 빛이 닿는 모든 곳이 시나가 있는 구간이기도 하고, 형체를 딱히 지니지 않아도 어디서든 존재하니까.
그런 시나가 남자로 변하기까지 한다면, 서로 싸우다 마법이 폭주하고, 그 폭주에 내가 휘말려서 날아가는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에, 시나에게는 변하지 말라고 말을 한 것뿐.
아무튼, 독백의 늪을 빠져 나와 현실을 마주하니, 백발의 남자아이가 내 무릎을 베고 있었다.
“......”
“......”
아, 깜짝이야. 이게 뭐야...
모든 사람이 갑작스러운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생각으로 도피하고 있던 시절에, 그 소년은 다음과 같이 입을 열어버렸다.
“마스터...아니, 누, 누나?”
남자다움보단 중성에 더 가까워서, ‘생긴 것은 여자인데 알고 보니 남자애였다.’라는 게 내 눈앞에 현실로 나타날 줄은 몰랐으니.
“시, 시나였어? 바뀌지 말라고 했잖아? 너는 여신타이틀이 있어서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냥캣의 독점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게다가 제 모습은 하나의 빛. 빛은 모든 곳으로 곧게 뻗어 나아갈 때도 있지만, 때로는 굴절하기도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붙어있는 여신타이틀은 제거했습니다.”
“아니, 그건 네가 따로 제거할 수 없는 거니까. 그냥 좀 놔둬.”
그 굴절이 지금의 모습인가?
아니면 그 굴절하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도 될 수 있는 건가?
“칫! 비둘기녀석 제법이지 않는가.”
“올빼미입니다. 냥캣.”
무표정일지라도 질투했던 시나의 모습을 보니, 무심결에 시나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레시아의 경우에는 은근히 페이스를 자신 쪽으로 끌어드려서, 나를 끌고 다니려는 경향이 보였다면, 시나의 경우에는 지금 연약한 나라도 지금의 시나를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유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든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모성애라는 것을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몰라.
“마스터. 상황설정에 따라 누이 컨셉으로 진행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남동생 역을 할 테니, 마스터야 말로 적극적이고 활발한 누나역할로 리드를...”
“저기...전 연령에 뭘 바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귀청소만하고 끝날 생각이야. 알았지?”
“이 세상은 유흥거리가 많이 늘어남에 따라, 보너스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긴 역할을 맡으려고 하는 시나의 본질은, 거대한 폭주를 일으켜 내가 모르는 지역에서, 화산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만드는 듯 했다. 실제로 터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무심결에 쓰다듬는 손이 멈추니, 시나는 자신의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비단보다 더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허벅지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시나의 머리를 살짝 잡아 누르면서 간지러운 감각에서 잠깐이나마 해방되었다.
“가, 간지러우니까...가, 가만히 좀 있어줄래?”
“알겠습니다. 마스터.”
말은 그래도 잘 들어서 다행이었다. 레시아라면 분명 도를 넘을 듯한 장난을 치겠지만, 부부라는 관계도에 따라 수용해야 한다며 난리를 쳤겠지.
“흐음. 그렇군. 컨셉을 변경하면 꽤 좋은 느낌의 작품이 나올지도 모르겠노라. 카일이여. 지금 녹화용 카메라를 설정해서 빛의 여신님...아니, 이젠 빛의 신님이라 해야 하는가? 어쨌든 그런 분위기와 기분으로 연기...라고 하지도 않고, 평상시처럼 진행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당연히 호칭은 변경해서 말이지.”
이 세상이 사이가 좋은 남매가 얼마나 많을까?
적어도 내가 아는 친구들은 싸우기만 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설정은 판타지가 맞을까?
“전쟁을 막는 방법이 어쩌다가 이런 일을 하게 만드는 건지, 간에 기별이라도 갔으면 정말 좋겠네.”
전쟁이라는 것은 결국 계획적이든 충동적이든 일어나기 마련, 무자비한 태풍을 겨우 이런 치유계열이 높을법한 영상을 퍼트려서 멈추려고 한다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나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체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시나의 응석을 받아주고, 귀청소를 계속 해줬던 것은 대사에 상관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설정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도 거의 비슷한 포지션을 하고 있었으니까.
시나의 경우에도 상세히 들어가면 가족이고, 아직 이 세상을 잘 알지 못하는 어린애라고 생각하기에, 반말로 상대하고 있는 경향도 있다. 게다가 시나는 본능적으로 나보다는 작고 어린 모습으로 있으려고 하는지, 매번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보다.
“마리아. 다 끝난 건가?”
“네. 마왕님. 정말 제대로 된 작품을 찍었...히익!”
남자가 한번 화를 낼 때 불같이 화내는 타입과,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타입이 있다면, 시나의 경우가 사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불같이 화내는 타입이며, 레시아의 경우 감정마저 사라질법한 싸늘해지는 타입이다.
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온 몸에서 흘러나오는 레시아는,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하면서 자고 있던 시나를 거침없이 치워버렸다.
레시아가 머리를 잡고 휘두르니, 로켓처럼 날아가는 시나. 얼마나 강하게 집어 던졌는지 한동안 날아가는 듯 보였다. 이 방안은 거리마저 조절할 수 있으니, 지금은 거리 제한을 걸어놓지 않아서 무한적인 좌표로 쭉쭉 뻗어나가고 있는 모양.
“주인.”
“히익!”
나도 마리아와 같이 숨을 들이마셨던 이유가,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야 말로 알아차렸다. 날카로운 턱과 차가운 눈빛, 저 2개가 조합이 되었을 때 길가는 강아지와 고양이마저 기절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중압감이 내 온몸을 누르며 압사시킬 생각인 듯, 아무 말 없이 나를 계속 보고만 있었다.
“아까 비둘기에게 했던 그 귀청소. 할 수 있겠나?”
“네? 그, 그건...”
“할 건가! 안 할건가!”
“하, 할게요! 하게해주세요!”
레시아의 호통이 내 등골까지 파고들었고, 머리에서 무작정 지어낸 말들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러자 흡족한 미소를 지은 레시아는, 내 무릎에 누워서 “특등석이니라~”라고 좋아하고 있었다. 본래 성별로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레시아에게 붙잡혀 살지도 몰라.
“그런데 지금의 주인이나 짐도 잘 어울리지 않는가?”
“어울리다니? 그건 무슨 소리에요?”
냉정하게 정신차리고 레시아에게 질문을 질문으로 답해버렸다. 그렇지만 귀엽다는 듯, 레시아의 가죽장갑이 내 뺨 위에 살며시 올라왔다. 실내에서 가죽장갑은 벗으라고 말하고 싶어도, 지금은 사소한 것들은 전부 넘겨야 할 때니까.
“부부에게는 금실이 맞아야 좋다고 하지 않는가? 주인이 남자일 때나, 여자로 변할 때나 짐과 주인은 잘 지낼 것이라고 본다.”
“그걸 말한다면 궁합이라는 단어가 더 가깝겠죠.”
어차피 호칭을 변경하거나 약간 다른 클리셰의 절차를 밟고, 귀청소와 말상대를 해준 그 결과, 레시아의 얼굴이 내 배쪽을 향하면서, 눈을 감고 편안한 얼굴로 잠에 들고 있는 듯 보였다.
평상시에 남자들이 자는 모습을 보고, 별 감흥이 없었다는 것이 맞지만, 지금은 쓸 때 없는 마리아의 암시로 인해, 심장의 고동소리가 제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럴 때는 다른 생각을 하거나, 마음속으로 노래를 부르는 게 제일이지만, 내가 진정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으니...
한 줄기의 붉은 빛이 레시아와 나를 관통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자마자, 거대한 광채가 한번 번뜩였다. 나는 그 광채에 휘말려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거 같지만, 레시아가 저 멀리 날아가면서, 반대방향으로 무한한 시간 동안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스터와 즐거운 한 때를 방해하다니, 정말 꼴불견이군요.”
시나는 하얀 올빼미로 되돌아왔는지, 활공을 하며 내 어깨에 안착했다.
“음. 카일이여. 고생 많았다. 이제 첩은 영상을 확인할 테니, 조금 쉬고 있거라.”
“그보다 마리아. 저는 언제 남자로 되돌아올 수 있는 거에요?”
“음? 뭐,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어이.”
뭐가 곤란한지 잘 모르겠지만 머리를 살짝 긁적이는 마리아는, 마법적인 설계로 문제가 생겼거나 그런 경우는 아닌 것 같지만, “그게...”라고 말하며 말을 늘어뜨렸다.
“카일이 지금 당장 남자로 변하면, 루시피나라던가 루니아가 좀 쓸쓸해 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말이다. 번외로 첩에게까지 3명에게 더 귀청소를 해준다면, 생각은 좀 해보겠노라.”
“받고 싶었던 거에요?”
“마왕님도 그렇고 빛의 여신님도 그렇고...지금은 빛의 신님인가? 어쨌든 현장을 직접 바라보면서 느낀 거라면, 카일의 성별과는 관계 없이 귀청소는 잘한다고 생각했노라. 그러니 카일이여? 당분간만, 아주 당분간만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면 안 되겠는가?”
“하아...그렇다면, 제 안에 걸려있는 암시는 풀어주시고 이야기 해주시죠.”
마리아에게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고, 일이 3개 더 늘었다는 것에 대해, 조금만 더 고생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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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쓰레기통을 자로 실측하러 가야해서...
그 전에 게임을 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