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22
522
눈을 뜨기 싫었다.
자고 일어나면 사람의 몸은 언제나 피로의 한계치가 오기 마련일까? 몸이 무거워서 고개도 들기 싫고 그냥 이대로 자고 싶은 기분만 들었다.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한 평생을 잠으로 잘 수는 없는 법. 잠을 무한적으로 자는 날이 있다면, 그 날이 스틱스 강을 넘어가는 풍경을 보게 되겠지.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을 때 아무도 없었고, 잡화점 안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천천히 일어나서 이불을 접으려고 했지만, 오늘따라 커다란 이불 때문에 힘이 좀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말 기묘하네 분명 카운터의 높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레시아. 시나.”
평소에 부르는 목소리가 아닌 어린애가 부르는 듯 음이 높다. 설마 진짜로 날 여자애로 만든 거냐? 하나의 인생에 이상한 체험은 다 해보네. 조만간 외계인으로 변해서 ‘제 7원소’를 부르지 않을까? 참드람 벤드람하면서 말이야.
내가 부르는 목소리에 어디선가 덜그럭하는 목소리가 났다. 고개는 소리를 잡고 빠르게 감지했는데, 허리를 넘기지 못한 머리카락이라 해도, 고개를 따라 흔들리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지. 그전에 이번 머리색상도 코발트 블루냐...
“뭐, 뭔가? 주, 주인.”
검은 고양이로 변한 타락의 마왕. 레시아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로 내 말에 대답했다.
“왜 거기에 숨어서 바라보고 있어요?”
“그거야 주인의 아이언 클로가 무서우니 그러지 않는가? 따, 딱히 너무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아니다.”
아이언 클로는 핑계고 지금 내 모습 때문에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소리로군. 사람의 감정은 좀 기묘한 것이 있는데, 너무 귀여운 고양이가 내 앞에 불쑥 나타나서 애교를 부린다면, 그 사람은 도덕적인 관점으로 형성된 초자아의 강력한 중재를 당함으로써, 어쩔 줄 몰라 하는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나도 가끔 길가에 어린 고양이가 버려지면서, 주워가야 하는가? 하지만 내가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오랜 시간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가지는 선택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는가?
내 경우에서 그녀들의 입장은 어마어마한 내적 갈등이 피어 오르고 있겠지.
“마스터는 많이 당황한 모습이 아니군요. 오히려 침착하다는 말이 더...”
하얀 올빼미로 변한 빛의 여신 람파시나는 용기를 내며 내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당당하게 나아가려는 올빼미를 보며, 검은 고양이가 “비, 비둘기! 그 앞은 위험하다!”라고 말했고, 시나는 “올빼미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5M앞까지 왔다.
“성별이 전환된 것은 이제 어쩔 수 없이 익숙해져서 그래. 다만, 아직까지 어려진 것에 대해는 이질감이 생기긴 하네. 시나와 레시아가 어린 모습으로 있으려는 이유가 어쩌면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있으면, 최약체인 상황에서도 강력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연습을 할 수 있는데, 나중에 성장하면 할수록 노련해지기 마련이다. 에너지를 관리하는 입장에 있어서 회전을 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거리가 짧아지기 때문에, 신체를 강화하는 마법이나 특정 마법의 시전속도는 향상이 된다.
“어째서 가까이 더 안 오는 거야?”
쭈뼛쭈뼛하며 서있는 올빼미가 움찔거리면서 내 말에 반응했다. 내가 자연스럽게 결계를 사용한 것도 아닌데, 내가 한발자국 전진하자, 올빼미는 자연스럽게 뒤로 한발자국 후퇴한다. 저 멀리 있던 레시아마저 후퇴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전신 거울로 보는 내 모습에는, ‘카린이 만일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이라는 타이틀에 나올 정도로 닮았지만, 신비롭고 단아한 모습보다는 귀엽고 총명한 모습이 더 어울렸다. 긴 생머리와 곱고 깨끗한 이마까지 비춰졌고, 옷은 은은한 옥색의 하프넥 니트, 소매의 경우에는 내 손을 감추고 나팔꽃마냥 넓었다. 거기에 맞추려는 듯이 무릎을 넘어가는 옥색 치마까지 입히고, 짙은 녹색으로 겉 부분을 마무리했다. 누가 이런 옷으로 입혔는지 몰라서, 내 눈이 자연스럽게 거울을 노려보듯이 보자 쨍그랑!하고 깨졌다.
“거, 거울이 깨져버렸다! 역시 거울에도 심장이 있는 것인가!”
거울에 심장 없어요.
“마리아와 루니아 누나는요?”
앳되고 맑은 목소리가 퍼지자 카운터 위에 있던 유리컵이 깨져버렸다.
“세린. 유리 좀 그만 깨뜨려.”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열자 이번엔 샹들리에가 떨어지면서, 나는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아서 고치겠지...어쨌든, 제 질문에 대답을 해야죠?”
“저, 저는 천계에 볼일이 좀 있어서...”
“짐은 마왕성에 일을 해야 하니...”
“지금 현 상황은 300년 뒤에 천계와 마계가 전쟁하고 있잖아요. 전 마왕이면서 왜 일을 해야 하고, 천계에 추방당할 것 같은 시나는 왜 자리를 벗어나려고 해요?”
내가 말하고도 기억력에 아무 이상이 없는걸 보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봐야겠지. 내가 걸어오면서 2M정도 남아있을 무렵. 레시아와 시나는 구석에 몰려서 벌벌 떨고 있었다.
“아이언 클로는 하지 않을 테니 그만 떨어요.”
“아니. 지금은 아이언 클로보다 짐의 심장을 지키는 것이 먼저이니라.”
바보 같은 말에 한숨을 내쉬게 되는 경우도 있구나. 쪼그려 앉아서 반 강제로 검은 고양이를 들자. “냐아앗! 냣!”하며 어마어마한 반항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는 달라붙으면 좋아하는 레시아가 이 정도라니.
이리저리 휘젓고 있는 발톱에 상관하지 않고, 진정하라는 듯이 품에 꼭 안아주었다. 안아주면서도 레시아가 “주인! 이러지 말거라! 안 돼에에!”라고 소리쳤지만, 그것도 시간이 약간 지나니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 마스터! 냥캣이!”
“응? 어라?”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혼절했는지 혀를 내밀고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레시아? 레시아!”
마왕이 어린애가 안아줬다고 해서 기절할 줄은 몰랐는데.
이런 모습으로는 외출도 제대로 못하리라 본다.
잠깐 의식을 잃은 레시아를 다른 곳에 놓고, 시나는 내 어깨 위에 올라와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나마 시나의 경우에는 제대로 적응을 했는지 입을 열었다.
“마리아와 루니아는 방금 전에 마스터의 모습을 보고, 과호흡에 빠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외출하러 나갔습니다. 옷을 사러 간다고 했는데 외출한지 13분째 됩니다.”
“또 여러 가지 옷을 입히겠구나. 하아.”
이제 조건만 되면 자연스럽게 한숨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시스템 가동. 한숨, 출동준비 완료.”
“넌 사이클론이 아냐!”
이제 한숨을 쉴 때마다 태클을 걸어야 하는 걸까?
“마리아의 계획으로는 SNS에 영상을 퍼트리면서, 사람들의 자의식을 심어주는 최면마법까지 집어넣는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꼭 내가 변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마리아 본인이 찍어도 상관없고, 레시아와 시나가 변한모습으로 찍어도 될 텐데.”
“하지만 거울을 보면 마스터가 가장 으뜸입니다.”
나에게 있어선 그 말은 칭찬이 아니라 상처가 되는 말이야. 상처라기보단 원래 없어야 했던 말이었지. 주기적으로 오고 가는 성별의 정체성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라면, 원래 나는 남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빨리 이 모습에서 돌아올 생각만 하면 된다.
그렇게 희망을 가지면 언젠가는 되돌아오겠지...
“그런데 지금 내 신장이 얼마나 되는 거야? 평소와 너무 달라서 상자라도 있어야겠는데?”
“대략적으로 139.9cm입니다.”
140이면 140으로 해줄 것이지, 0.1cm가 모자란 경우는 뭐야?
“한숨밖에 안 나오는 신체라. 죽기살기로 뛰어도 루니아 누나가 쉽게 따라잡을만한 신체능력이네.”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떻든 하얀 올빼미는 계속해서, 내 어깨 위에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스터에게는 보호자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합니까?”
“내가 어린애로 변했다고 해서, 어른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거든? 내 상태는 마리아와 비슷하게 보면 될 거야. 몸은 소녀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건장한 21세 청년이라는 거지. 하아...코난도 어려지기만 했지 성별은 바뀌지 않는 게 부러울 따름이야.”
그래도 정신상태의 경우에는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했다. 신체나이가 어려졌다고 해서 정신연령까지 어려지면, 그거야 말로 큰일나는 상황이니까. 예를 들어서 천계와 마계가 전쟁 일어난 급박한 상황에서, 느닷없이 솜사탕 먹고 싶다는 말을 하게 되면, 그거야 말로 이불 속에서 우주 끝까지 걷어찰만한 상황이 된다.
흑역사를 신체나이가 낮아진 상태에서 만들고 싶지 않기에, 슬슬 레시아를 깨우기로 했는데 땅에 쓰러진 검은 고양이는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20세 중반의 여성이 앞치마를 두른 상태로 서 있었다.
“......”
“......”
뼈 아픈 침묵과 갑작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사고. 소리를 질러야 할까? 핀잔을 줘야 할까? 내적 갈등이 심화되어 심화문제로 나오기 전에, 레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뭐냐. 주인과 같이 놀기 위해선 이런 복장을 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루니아 누나에게 들었어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레시아.
앞에 있는 여성의 연보라 빛의 파도가 살랑거림과 동시에, 공기라도 가를듯한 칼답으로 대답했다.
“아니니까. 평상시의 복장으로 돌아오기나 하세요.”
“짐이 이유식을 만들어주도록 하지.”
“요즘 이유식은 10대 초반도 먹어요? 암흑물질밖에 못 만들면서 억지로 요리하려고 하지 마시죠.”
“오늘따라 주인의 태클이 아프구나.”
잠깐이나마 한숨을 쉬며 나는 말했다.
“그러면 레시아가 남자의 모습으로 바꾸시던 가요.”
“알았다.”
“못하실 줄 알았어요. 애초에 레시아는 어릴 때부터 여성체로 살...잠깐? 뭐라고요?”
느닷없이 검은 마기가 레시아의 몸을 감싸기 시작한 이후로, 짧은 연보라 빛의 올백머리, 날카로운 눈매와 그 안에는 홍옥처럼 번뜩이는 눈동자. 턱선과 콧날이 날카롭고 검은 후드티와 검은 청바지를 입은 상태로 내 앞에 나타났다. 당연히 앞치마는 왜 안 바꾸는지 입고 있었지만...
“어떤가? 짐도 잘 어울리는가?”
남자로 변해서 목소리까지 듣기 좋고 깔끔한 중저음으로 바뀌어버렸다.
“레시아? 안 불편해요?”
“마족에는 애초에 성별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한 것. 게다가 짐은 마왕이다. 때로는 특정 마족을 만나기 위해선 남자로 변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주인의 이상형에 맞춰서 여성체로 오래 존재했노라. 의외로 지금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니 신선하고 좋구나.”
평상시의 레시아와는 다르게, 성별 하나가 바뀌었다고 권위적으로 들리는 건 처음이다.
지금은 말 그대로 마왕.
정말 마왕이다.
손을 흔들자 그 끝에 마기가 서두르며 따라오기 시작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냈는데 하마터면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그대로 내 체감시간마저 정지할 뻔했다.
“생각을 해보면, 주인이 지금 어린 소녀로 변해있으니, 짐이 임시적으로 이 모습을 해야겠군. 짐이 곁에서 항상 지켜보면서 위험할 때는 구출해야 하니 말이다.”
섣부르게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라면, 집안에 남자는 한 명씩 필요하기 때문. 여자만 있는 장소는 그리 안전한 구역이 아니다. 지금은 레시아가 임시적으로 남자로 변하면서 잡화점의 전체 분위기를 흩트리지 않기에, 알아서 하라는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런 모습으로 느닷없이 안기면 당하는 입장에서 너무 놀라지 않는가? 심장이 부셔지는 줄 알았노라.”
“그건 평상시에 단련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 아니고요?”
“짐은 강력한 마왕이니라. 주인의 생각으로는 ‘전’마왕이지만, 단련을 하지 않아도 강해지는 것이 마왕이며, 단련을 하게 된다면 100배씩 전투력이 증가하여, 슈퍼 마왕 갓 블루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1년도 걸리지 않지.”
“그 이상한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 수련을 하는 모습부터 보여주라고요...”
남자로 변한 레시아는 아무 말 없이 뚫어져라 보기 시작해서, 고양이 특유의 공격자세인 줄 알고 잠깐 경계했다.
“지금 뭘 빤히 보는 거에요!”
내 목소리가 날카롭게 잡화점을 가로지르니,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는 레시아는 솔직하게 모든 걸 다 말했다.
“아니. 순간 주인의 모습을 보아하니, 기이한 감각이 눈을 뜨려고 했노라. 마치 단 둘이서만 Yee.T 보드게임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라고 해야겠군.”
“그런 기이한 감각에 멋대로 눈뜨지 마세요. 단 둘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오해한다고요.”
레시아의 경우에는 남자로 변한적은 있어도, 오랫동안 살아본 경험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방금 전에 나를 보며 강력한 소유욕을 느낀 것 같은데, 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그대로 은팔찌와 전자발찌가 세트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은 다음 레시아의 말에 묻혀버리고 말았으니.
“짐과 주인은 지금도 부부니까. 단 둘이 있어도 괜찮지 않는가?”
“설령 제가 괜찮을지 몰라도, 세간의 눈이라는 것이 있으니 자중하고 절제해줬으면 좋겠어요.”
세간의 눈이라기보단, 내 옆에서 어마어마한 열기로 바라보고 있는 올빼미 하나 때문에, 레시아와 싸우지 않기 위한 중재의 말을 계속 변호하고 있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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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게도 람파시나는 여신이란 타이틀이 붙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