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273
273
하얀 눈을 직접 맞아가면서 걷고 있는 나는...아니. 질질 끌려가고 있는 나는, 지금까지 “목줄 좀 풀어주시죠!”라고 13번의 외침에도, 모두 “안 돼.”라고 거절을 당한 체, 지금쯤이면 슬슬 나를 끌고 온 이유라도 알려줘야 할 터인데도, 얕게 쌓인 눈을 부드러운 손으로 잡아 녹이면서 나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눈 싸움 하고 싶은데 눈이 뭉쳐지지 않아.”
“아직 눈이 쌓이려면 멀었거든요!”
이 여신은 정말 뭘 하러 온 여신인가?
레시아도 물론 마왕으로서 이상하게도 비틀려버린 존재이긴 하지만, 이 여신도 다른 방향으로 비틀려버린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아...슬슬 저를 끌고 온 이유를 알고 싶은데요? 잡화점으로부터 이제 거리가 상당히 멀어졌다고요? Yee T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인간 한 명과 자전거 하나를 빌려서 공중으로 날아가는 수 밖에 없다고요? 그러니까...”
“뭉쳐졌다! 에잇!”
-철퍽!
나 인생 왜 살지.
“카일은 내 처음을 잘 받아줬구나?”
“그 대사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니까 쓰지 마세요!”
첫눈으로 뭉친 첫 번째의 눈뭉치에게 그대로 폭행당하고, 추격타로 언어로 폭행당한 나는 데모르테 씨에게 소리를 쳤
“저기. 데모르테라고 불러줘? 뭔가 뒤에 ‘씨’나 ‘여신님’이나, 접두사에 ‘아름다운’이 붙으면 이질감이 생겨서.”
“접두사에 ‘아름다운’은 왜 붙어요! 괴짜라고 하겠지!”
...?
“데모르테. 내 독백을...보고 있구나!”
목줄이 채워진 체로 나는 오른손은 얼굴을 살짝 가리고, 왼손으로는 데모르테를 가리키면서 기묘한 포즈를 취했다. 이 멋진 포즈를 여기서 사용할 줄은 몰랐네. 나중에는 로드롤러라도 가져와서 내려 찍을까?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그저 ‘보이기 때문에 보는 것.’이라고? 내가 카일의 독백을 보고 있는 운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저 입으로 말한 것뿐이야.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왜냐하면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기 때문이야.”
“올 픽션은 사양합니다.”
나중에 AT필드를 전개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 제가 왜 여기까지 나와서 옷도 제대로 못 입어서 얼어 죽겠는데, 빨리 볼일 볼 것을 다 보고 집에 돌아가서 느긋하게 쉬고 싶은데 말이죠?”
데모르테는 대체 어디서 모았는지 몰라도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놓고는, 손을 털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당연히 지금 당장 말해야겠지? 내가 카일에게 상당히 무리한 부탁을 하려고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은 레시아에게 있어서는 분노를 일삼는 행위이기도 하며, 때때로는 카일도 맨날 품었던 여자들 보다는, 새로운 여자를 가끔씩 품어도 좋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런 애매모호한 대사로 혼란을 주지 말라...잠깐? 지금 데모르테를 품으라고요? 저를 신격화 시킬 생각인 거에요?”
“정답!”
“허나. 거절한다!”
겨우겨우 남자로 되돌아 간지 아직 1주일도 안 됐다고! 12월초부터 나를 난잡하게 만들 생각이냐!
“괜찮아. 나는 레시아나 시나와는 달라서 적어도 숙주에게는 많이 상냥하거든. 아랑에게 신격화 한 것처럼 남자인 상태 그대로 유지 될 거야. 나도 여신 중에서는 상급인걸?”
그거라면 다행이지만...
“데모르테는 애초에 지상에 아무런 일 없이 지상에 내려왔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을 품을 몸을 찾는다니?”
“애석하게도 지금 이 상태로는 본래 힘을 전부 발휘할 수 없거든. 인간계에서 내려오면 힘을 그만큼 깎고 와야 인간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니까. 모든 힘과 권능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성녀가 필요하지만, 애석하게도 아우리스 교도에 있는 성녀들은 내 존재를 금기하거든. 이단으로 취급하거든. 오히려 적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렇거든. 방금 라임 괜찮지 않아?”
“안 괜찮아요! 잘 이야기 하다가 다른 걸로 엇나가지 말라고요!”
그게 대체 무슨 라임이야? 라임을 다 쪼개버릴라.
“그런데...제 몸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들어야 하는데요?”
데모르테는 나에게 평온한 미소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
“별의 아이 계승식에 참여를 해야 하거든.”
“별의 아이라면...지금은 루멘이잖아요?”
전에 루멘이 나에게 보냈던 편지에서는, 내가 루멘을 보는 날이 자신의 마지막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 데모르테가 별의 아이 계승식에 참여한다는 소리는 즉, 데모르테는 운명에 따라 루멘이 죽고, 다른 계승자가 별의 아이를 이어 받는 것.
“애초에 별의 아이라는 것은 우주를 눈 안에 품는 아이. 그런 방대한 우주를 고작 한 어린아이의 두 눈에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부담이 될 거라고 생각해? 눈에 우주를 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수명이 깎여나가는데? 적어도 마지막에는 너를 꼭 보고 싶어 할 정도로 고통스러웠겠지.”
“데모르테는 루멘의 영혼을 직접 데려가기 위해?”
데모르테는 말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별의 아이 계승식이 언제인데요?”
“3일 뒤?”
...왜 의문문인데?
“3일 뒤라면 좀 남은 시간인데요?”
“그야 당연히 카일과 내가 레시아보다 궁합이 잘 맞는지 알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미리 들어가보겠단 소리로군? 저 말은.
“애초에 남들이 오해할 만한 말은 하지 말라니까요? 그리고 저를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에요! 그냥 잡화점에서 말하고 나갔으면 됐잖아요!”
“그야. 육포 50개를 사야 하는데. 나는 육포를 어디서 파는지 모르거든. 하지만 우연히 내가 봤던 운명 중에는 카일과 같이 육포를 사러 데이트를 나가는 운명이었어!”
“둘이 사이 좋게 육포를 사는 것이 뭐가 데이트야!”
최근에 데이트 코스 중에서는 육포를 사는 것도 포함인가? 무슨 여자 꼬실 때 “우리 같이 육포나 씹으러 가지 않을래?”라고 멘트를 날리는 남자는 없잖아!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지금 당장이라도 내 주변에 마나가 폭주하겠다!
“육포만으로 얼마나 다양한 로맨스가 가능한데?”
“듣기 싫으니 그만 하시죠.”
“단호박.”
데모르테가 천천히 사라지는가 하더니 내 안에서 뭔가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항아리 안에 물을 붓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발끝부터 시작해서 따스한 무언가가 이윽고 목까지 곧바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랑을 품었을 때는 너무 순식간이라 몰랐고, 시나를 품었을 때는 너무 익숙해서 모르고, 레시아는 어째서인지 몰라도 반 강제로 여체화를 시켜서 고통만 느껴졌지만, 데모르테는 편안하고 포근해서 주위에 추위도 전부 물러갔다.
“본래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라 딱히 뭐가 변했다거나 그런 것은 없지만, 이 정도의 궁합이라면 나의 권능을 전부 사용할 수 있어.”
반 투명화가 되어있는 데모르테가 나에게 말했다. 분명 딱히 변한 것은 없고 남자인 것도 그대로이고, 누가 보면 평범하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지금 당장 나에게 바뀐 것은 ‘눈’이다. 눈이 지금 대략 1분 앞에 있는 나의 운명을 보여주고야 말았다.
“운명의 여신을 몸 안에 품으면, 자동으로 운명이 보이거나 그러지는 않죠?”
“물론 아니지. 대신 자신의 운명을 볼 수 있긴 해. 보고 싶지 않아도 자동으로 볼 수 있다고나 할까? 그래도 운명을 거스르는 행동을 한다면, 더 강한 인과율이 작용해서 더 처참한 결과로 맞이하게 되겠지.”
“...그리고 두 번째로. 전에 쾌락과 향락의 여신으로 일한 적 있다고 했죠?”
“응. 지금도 가끔가다 도와주고는 있지. 그런데 왜?”
그렇다면...
“지금 상황이 아랑을 품었을 때보다 더욱 더 심각한 상황이 되어버렸잖아요!”
“아 맞다. 권능을 잠깐 지워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렸네? 데헷!”
“지금 느긋하게 ‘데헷!’할 상황이냐!”
그리고 정확히 1분 뒤에 벌어진 상황에 있어서는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이, 나를 보자마자 끊임없이 달려왔고 거기서 나는 도망갔다. 이거야 말로 운명대로 이행하는 것일까?
“제길! 킹 크림존에 이상한 효과가 붙어있을 줄이야!”
“나는 데모르테인데? 시간을 지우지는 못한다고?”
“시끄러워요! 이래서는 육포를 어떻게 사냐고요!”
“에피타프를 사용하면 될 걸?”
“내가 디아볼로냐!!!”
영원히 죽기는 싫다고.
가까스로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거의 대륙 끝까지 도망친 것 같은 기분으로 잡화점에 귀환마법을 사용했다. 육포는 아직까지 모아 놓은 것이 있으니 그걸 줘버리면 되겠지만, 애석하게도 운명을 보는 눈은 억제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데모르테가 말했다. 자신의 운명을 보게 되는 것 또한 운명이라나 뭐라나.
“쾌락이라는 것은 다양한 사람에게 작용되는 거지만, 청소를 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것도 쾌락이고,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다는 것에 만족한 것도 쾌락이며, 쓰레기봉투를 뜯고 거기 안에 있는 내용물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도 쾌락이지. 사실상 쾌락이라는 그 자체는 정말 단순한 거야. 쾌락을 즐기고 이어지게 해주는 향락은, 말 그대로 자신이 기뻐하는 일을 계속해서 지속해주는 일. 부족한 욕구를 충족하는 것만으로도 생물들은 대게 살 수 있지. 게다가 자신의 운명을 예지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카일은 또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거고.”
데모르테는 반투명한 상태로 계속해서 설명을 했다. 그보다 대체 어떤 사람이 쓰레기봉투 안에 있는 내용물을 보고 즐길 수 있다는 거지? 어쨌든 나는 신세를 한탄해 하며 데모르테에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지금 이 상태까지 왔잖아요.”
루시피나와 마리아가 나를 꼭 끌어 안고는 놔주질 않는 운명을 본 뒤에, 10초만에 습격을 당해서 이 모양이 되어버렸다. 루나는 토끼 귀를 세차게 움직이면서 지금의 모습을 스케치 하고 있었다고...
“저기. 루시피나.”
“안 돼.”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마리아?”
“윤허할 수 없다.”
“아직 아무 말 도 안 했다고!”
끌어안는 이유야 욕구가 충족되기 위해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루나가 지금 자신의 욕망에 몸을 맡기면서, 마치 온 몸에 불이라도 나는 듯한 오러를 띄고 있었다.
“새로운 소재라니! 주인님 조금만 더 애매하면서도 살짝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어주세요! 루시피나 언니는 조금만 더 주인님의 오른쪽 가슴에 손을 올려주고, 마리아는 왼쪽다리를 주인님의 오른쪽 다리와 서로 얽히면서 색기가 있는 표정을! 좋아요! 엄청난 리얼리티야! 이제 이 소재를 만화에 사용하기만 하면, 흐흐흐! 불타오른다!”
저대로 타 죽었으면...
헤븐즈 도어를 사용하는 로한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니 뭐하니 하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루나의 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어버렸다.
어쨌든 지금 루나의 눈은 정상이 아니기에 레시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저기 레시아?”
“육포 100개.”
“왜 나는 100개냐!”
레시아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어투로 나를 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짐의 숙적이라고 불리는 데모르테를 품었지 않았는가?”
“레시아는 그 숙적에게 육포 50개로 절 팔아먹었잖아요!”
누가 막아줬었다면 이런 일까지 일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어머나. 우리 딸이 좋~아하는 카일을 엄마가 뺏어가서 마음이 속상하니?”
“시끄럽다! 감히 짐을 상대로 NTR을!”
“잠깐! 레시아! 그만! 멈춰! 거기까지!”
NTR의 약자는 그저 Nothing to Report의 약자일 뿐이다. 절대로 다른 의미로 쓴 것이 아니길 빌어야지.
반투명한 상태에서 데모르테가 보이는지 계속해서 대화를 주고 받고 있는 모녀를 보며, 한 숨을 길게 내쉬고 있는 사이에 카렌은 천천히 분홍색 앞치마를 두르고는, 점심이 다 되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물론...느닷없이 또 다른 나의 운명이 예지되기 시작했는데, 카렌이 나에게 떠먹여주는 것이 화근이 되어 결과적으로, 모두가 질투의 화신이 되면서 잡화점과 같이 내가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난 이제 죽었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떨궈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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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르테가 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