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272
272
때때로 시간이라는 것은 늦게 지나갈 수 있고 빠르게 지나가기도 한다.
늦게 지나간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 볼일 없이 힘든 일에 속하고,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은 자신에게 즐거운 시간이 된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평온이라도 빠르게 깨져나가지 않기를 빌어야 한다.
-허브티를 마시면서 창밖에 첫눈을 바라보는 카일의 생각
----------------------------------------------------------------------------------
12월 첫 번째 주가 시작하자마자 은빛을 머금은 하늘에서, 하얀 눈을 사방팔방으로 폭격하기 시작할 무렵. 난로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느닷없이 불이 붙어, 주변 공기를 데우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따듯한 곳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최근에는 카운터 위에 올라오지 않고 난로 앞에서 웅크리며 편안하게 있는, 검은 고양이는 이게 마왕인지 진짜 고양이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하게 있었다.
“레시아. 많이 편해요?”
“편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yES다.”
보통 Y가 대문자잖아.
“마계에는 계절이 뚜렷하지 않고 온통 불바다와, 화산, 검은 구름과 붉은 번개, 특정부분만 멈추지 않은 만년설로 이루어진 곳이 마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며, 릴리스의 성은 유일하게 인간계에 있노라.”
그러니까 2층 침대를 타고 가도 인간계로 이동하는 것뿐이라, 마계까지는 도착하지 않는 그런 거로군. 하지만...
“그럼 릴리스가 마계로 어떻게 이동을 한다는 거에요?”
“릴리스의 성 안에는 마계로 가능 포탈이 있다. 물론 릴리스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릴리스의 부하들이 자주 써먹고 다니지. 그 정작 몽마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릴리스는 대게, 꿈의 미로에서 인간들의 정기를 뺏어가느라 바쁘니까. 아니면 인간계에서도 권력자들의 정기를 뺏어가거나.”
“저는 마계로 어떻게 이동하냐고 물어봤지, 그 뒤에 있는 내용은 안 물어봤다고요!”
“본래 주인의 호기심은 릴리스가 어떻게 정기를 착취하느냐가 아니었던가?”
“절 대체 어떤 사람이라고 보고 그리 대답하는 겁니까!”
“괜찮다. 주인의 정기는 짐이 직접 착취할 수 있노라.”
“제가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잖아요! 걱정하지도 않았고!”
7대 죄악과 묵시록의 4기사, 그 모든 것의 결과로는 타락과 허무로 이어지는 것. 타락의 표식을 가진 레시아는 아무래도 마계 12공작 중에서 대부분의 힘을 사용할 줄 아는 듯하다. 전에 비무대회에서 해연 씨를 처참하게 묵살시킨 것도, 정기를 착취하라는 레시아의 도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레시아가 만일 본연의 힘을 전부 개방하며 싸운다면, 레시아와 대면할 수 있는 존재는 얼마나 될까?
“마스터. 저런 위험한 고양이는 멀리하고, 저를 가까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얀 올빼미가 왼쪽 어깨 위에서 노란 부리로 입을 열었다. ‘창세의 빛’이라고 불리는 시나는 어디서 봤는지 몰라도, 기묘하게 유명할 것 같은 단어를 내뱉고는 다시 입을 열기를...
“냥캣은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저 난로에게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군요.”
“주인의 품 안은 확실히 따듯하지만, 그것은 밤에 해야 더욱 더 분위기가 고조되지 않는가?”
“시나의 질문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 텐데요? 요즘 레시아 캐릭터가 변해가는 것은 자주 느끼지 않나요?”
“무슨 소리인가? 주인은...늘 그래왔듯이 짐은 마왕이니라, 짐은 절대적으로 마왕이라고 해서, 절대로 틀린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짐이 마왕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지금은 뭐냐...그래! 맞아. 나태다. 짐은 나태하게 벽난로 앞에서 따스한 온기를 맞이하며 뒹굴 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짐의 단어에는 색욕이 들어가있듯이, 주변을 매료할 수 있기도 하고 사람의 감정을 들었다 놓을 수도 있노라.”
검은 고양이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봤자.
별 감흥도 안 온다.
“짐 또한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노라. 모든 이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다만...예상외로 주인은 그리 쉽게 넘어오지 않아서 이상하지만...”
“예상외는 뭔데요?”
“그야 당연히 주인이 짐과 사역마에 대한 계약을 맺고, 페어링까지 강화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짐의 영향력이 점점 나타나기는커녕, 오히려 그게 익숙하다는 듯이 면역이 되고 있지 않은가?”
“그래야 사역마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거잖아요.”
대체 어디가 뭐가 어떻게 잘못 된 거야?
다르게 말하면 나는 지금 레시아를 제대로 통제하고 있다는 소리잖아?
“설마 지금 역전현상을 기다리면서 계속 저에게 붙어있었단 소리에요?”
주인과 사역마의 입장이 바뀌는 역전현상은 사실상 주종관계가 아니면 없는 것 아니던가? 따라서 엘티노스의 책 중에서 사역마 소환에 관련된 책을 따라서, 주종관계는 위험하니 평등한 친분관계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그렇게 마법진을 그리고 주문을 외운 것이었는데?
“확실히 평등한 관계에서는 주종관계가 없다고는 하지만, 관계라는 것은 자신이 어느새 위에 있고, 또 아래에 있을 수도 있는 무의식적인 서열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조만간 짐에게 홀린 주인을 데리고 마계에서 처음으로 끌어안고 잘 인형이 생기나 했더니, 의외로 완고하고 정신방어가 너무 높아 지금까지 잘 안되고 있는 것이다.”
“끌어안고 잘 인형은 따로 사! 나에게 그러지 말고!”
시나는 가만히 보고 있다가 부리로 내 옷깃을 흔들면서 바라보게 했다.
“마스터. 실제로 저 냥캣이 마스터가 자는 동안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서, 같은 이불 속에 계속 자고 있는 적이 있긴 합니다.”
“자...잠깐! 비둘기 이 녀석! 지금 짐을 모함하는 것이냐! 주인! 저 비둘기도 주인이 자는 동안 본 모습으로 돌아가서 주인의 베개를 치우고, 무릎 위에 주인의 머리를 올려 놓으면서 주인의 자는 얼굴을 면밀하게 관측했노라! 매우 흡족한 얼굴로 보고 있어서 신혼부부인줄 알았다!”
“자...잠깐! 냥캣! 그것에 대해서는 서로 비밀로 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요!”
“오히려 비둘기가 먼저 발설하지 않았는가!”
“마스터에게 불경스러울 정도로 붙은 횟수가 저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누구의 편을 들어주기는 좀 힘드니까.
“둘 다...싸우지 말랬잖아요!”
두 명에게 아이언 클로를 시전했다. 온갖 비명과 아프다는 소리만이 이리저리 퍼지는 와중에, 카렌이 방 안에서 눈을 비비며 나왔다.
“아버지...아침이라고 해도 어제는 제가 잡화점을 봐서 피곤하다니까요?”
“아. 그래 미안...이 아니라! 너 대체 뭘 입고 있는 거야!”
“아...와이셔츠인데요? 아버지꺼...”
“내 와이셔츠를 왜 입냐고 그러니까!!!”
아이언 클로에 정신이 팔려서 태클이 약 2초정도 늦었지만, 지금 카렌의 복장을 보고 나서야 나는 양손에 있던 사역마들을 힘없이 떨어뜨리고는, 카렌에게 다가가서 따지는 내 모습을 잠깐 거울로 통해 봤을 때는, 영락없이 철 없는 누나에게 따지는 남동생과 같았다.
...잠깐? 카렌의 키가 더 크잖아?
제길...내 키는 저주받았어.
“괜찮아요. 아버지.”
짙은 코발트 블루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순진하게 웃으며, 나를 안정시키려고 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건 나에게 있어서 독이 되었다.
“아니. 내가 안 괜찮아. 그리고 네 복장은 심하게 괜찮지 않아. 당장 제대로 입고 다시 나와!”
“흐응...이런 걸로 아버지를 유혹할 수 없구나.”
애초에 부모를 유혹한다는 그 자체부터가 뭔가 잘못 된 거 아니니?
일단 확실히 따지자면 내 체세포를 사용한 호문쿨루스지만...
카렌이 방안에 들어간 뒤에, 다시 남아있는 허브티를 마시려고 테이블 앞에 이동했다. 평온한 생활을 때려 부수는 것은 멀리 있는 적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적도 아니라, 주변 사람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두자. 지금 당장은 휘청거렸을지 몰라도, 이렇게 느긋하게 첫눈을 바라보며 즐기는 시간은, 영원히 이어갈 것처럼
“신랑! 이번엔 내가 신랑의 와이셔츠를 입어봤어!”
“푸하아앗!!!”
덤으로 7% 확률로 걸린다는 사레까지 확실하게 전통으로 걸리고 나서, 흐릿한 시야에서도 레드 드래곤이 폴리모프를 했으니 특유의 붉은 머리카락과 뱀과 비슷한 붉은 눈에는, 철부지를 나타내는 순박한 빛을 내고 있었다. 게다가 카렌보다 더 좋은 몸을 가지고 있는 루시피나가 입고 있으니, 그건 그거 나름대로 파괴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 그런걸 신경 쓸 기색은 없으며, 내 와이셔츠는 대체 어디서부터 쇼케이스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해 따져야만 했다.
“대체! 왜! 내 와이셔츠를 가지고 못살게 굴어요! 그 애가 대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아니. 이렇게 따지는 것이 아닌데.
“아니. 그보다! 대체 제 옷을 왜 루시피나와 카렌이 입었던 거에요? 어디 서비스 컷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잘 알겠지만, 여기는 글밖에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라 그런 시각적인 이미지는 소용이 없다니까요?”
“그럼 쓰면 되잖아?”
“아니! 루시피나! ‘쓰면 되잖아?’가 아니라! 그거 쓰면 다른 곳에서는 잘려나간다고요! 적어도 이건 15세 이상이 볼 수 있는! 그나마 청소년이 볼 수 있는! 수위로 만들어야 한다니까요! 제발 와이셔츠 안에 티셔츠라도 입어요! 지금 추운 계절이란 말이야!!!”
하지만 루시피나는 듣고 있는 것인지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방류하고 있는 것인지 태도가 상당히 애매했다. 그러다가 루시피나는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니...
“앗! 신랑의 향기~♥”
“당장 세탁물에 넣지 못할까!!!!!”
루시피나의 마지막 한 마디로 결국 폭발해버렸다. 덤으로 카렌도 붙어서 와이셔츠에 코를 묻는 행동을 했지만, 다시 나의 호통으로 인해 그 와이셔츠는 제대로 된 인도를 받아, 세탁물이 모여있는 바구니로 들어갔다고 한다.
하물며. 이런 해프닝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내가 쩨쩨하게 옷 하나로 소리지른 것은 그렇다고 해도, 실제로 당해보면 상상 이상으로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으니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만화나 소설에서는 정말 야하게 그려지거나 표현되어있지만,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누가 내 와이셔츠와 잘 어울리는가?’에 대한 그런 품평은 없다.
조만간 내 옷은 따로 내가 알아서 세탁을 해야겠군.
“주인은 쩨쩨하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능구렁이 같이 오히려 작업멘트를 날리거나, ‘오늘 밤은 너와 같이 보내겠어!’라는 암시를 하는 말을 해야...”
“수위 높이지 말라고 이 고양이야!”
“냐아아아! 아이언 클로는 제발! 아프다고 하지 않았는가! 주인은 어떻게 짐의 마음을 이토록 아프게 하는가!”
“뭘 마음을 아프게 해! 레시아야 말로 내가 억지로 정상적인 분위기로 환기시키려는 의도를 왜 읽지 못하는 거에요!”
장르가 개그와 만담으로 이루어진 이 곳에서는! 서비스 컷이 많다는 의미는 분명 망하고 있다는 의미란 말이다! 애초에 심야방송에서나 할법한 말들은 여기서 하면 안 된다고!!!
1분정도 집행을 한 뒤에 레시아는 축 늘어지며 바닥에 엎어졌다. 흔히 가위바위보 0%의 한을 여기서 푸는 것도 있고, 최근에 레시아의 발언은 내가 듣기에도 너무 도발적이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내 딸과 잘 어울리고 있었구나. 음...확실히 예상과는 다르지만 보기 좋은 광경이야.”
...뒤에 농염한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질거리자마자, 좌표마법으로 나는 저 멀리 도망간 뒤에서야 뒤를 돌아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늘 걸까나?”
는데 왜 나와 거리감이 제로인가요?
“데모르테...”
“어머니?”
내 마나의 반이 날아가더니 이윽고 검은 고양이 몸에서 마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본래 있어야 할 모습으로 돌아가는 증거를 보인 레시아는, 천천히 나보다 키가 커지기 시작하더니 칠흑의 드레스를 입은 레시아의 붉은 눈에서는, 분노가 가득 차오르다 못해 흘러 넘쳤다. 지금의 살기만으로 주변의 식물들이 시들어가기 시작했고,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들은 공중에서 서서히 부유하며 떠올랐다.
“이 곳이 어디라고 찾아오는가!”
“어머나?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한 거 아니니? 나는 잠깐 카일을 빌리러 온 것뿐인데?”
“주인을...?”
잔뜩 화가 난 레시아와 다르게 차분하고 포근한 웃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데모르테 사이에서, 나는 혼자 가만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봤다. 그 이유는 내가 괜히 끼어들다가는 레시아가 난동을 부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든 주인은 짐의 것이니라. 아버지를 무참히 살해하고 나를 버리면서까지 천계로 도망친 그대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고! 제대로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폭탄과 같은 존재인 너에게 주인과 단 1초도 붙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그러고는 레시아는 내 팔을 끌어 당기면서 나를 끌어 안았다.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절대로 넘겨주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소중한 것을 끌어 안는 것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내가 말했잖니. 너를 마계에 두고 도망치는 것도. 내 남편을 죽이는 것 또한,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고. 세상이 좀 더 좋아지게 될 운명을 위해서는...소수의 희생은 필수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덤으로 나는 세상을 지켜낸 보답으로 여신이 되었지만, 마계에서는 상당~히...위험한 반역자로 찍혔지만. 어차피 그건 다 각오했던 일이었어...”
데모르테는 잠깐 눈을 감고 회상을 하듯이 읊었으나, 곧 이어 눈을 뜨자마자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그건 그렇고. 카일이 정말 필요해서 그런데 잠깐 빌려주면 안 될까?”
“싫다!”
“부탁이야? 착하지 내 딸?”
“그대는 오늘부터 내 어머니가 아니다!”
“그러지 말고 좀 빌려줘라? 다음에는 육포도 가져다 줄게?”
“짐이 육포로 주인을 빌려줄 것 같은가!”
확실히 나를 육포로 등가교환 한다는 그 자체가 좀 이상한
“50개다! 50개를 가져오거라!”
“알았어~. 역시 내 딸은 말이 잘 통한다니까?”
저 마왕이 진짜 정신이 나간 건가!
“자. 그러니까. 어서 나를 따라오도록?”
데모르테는 내 팔에 팔짱을 낀 상태로
-찰칵!
아니. 내 목에 목줄을 건 상태로...???
“왜 여신이 사람의 목에 목줄을 채워서 끌고 다니는 건데!”
“산책하면서 설명을 하도록 할게. 카일~♥”
“놔! 풀어! 뭔 산책이야!”
“네발로 기어 다니면 더욱 고맙겠어.”
“제가 무슨 데모르테 씨의 개에요? 제발 사람을 대할 때는 목줄로 채우지 말란 말이야!”
이 여신의 정신상태는 대체 뭐가 잘못 된 걸까?
그리고.
“레시아! 이 녀석! 내가 집에 가면 가만히 안 둬! 감히 날 육포 50개로 팔아!”
“그러니 아이언 클로를 멈춰달라고 했을 때 멈추는 것이 좋다.”
심기가 아직도 불편한 레시아는 내 얼굴을 보며 위와 같이 말했다.
아오! 저 삐순이가 이렇게 복수를 하다니!
=============================================================================================
※육포는 좋은 협상의 수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