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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185

FNL-Phantasm 2016. 8. 23. 01:03

185

 

 

 

내가 잠깐 의식을 잃었다고 생각해서 눈을 뜬 시각은, 여전히 새벽을 달리고 있는 3시에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저 피곤하니까 말 소리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잠깐 흐린 초점이 자동 조정 중.’이라는 문구와 함께 선명하게 조정하자, 비춰진 모습은 무릎을 꿇고 있는 엘리시아와 거기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검은 고양이.

 

대체 어느 현실에서 자동 조정 중이라는 문구와 함께 시야가 조정되냐고 묻는다면...

그러게? 왜 내 눈 앞에 문구가 사라지지 않는 거지?

아니 잠깐. 아직도 내 눈앞에 자동 조정 중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라기보단 이 문구는 원래 다른 위치에 있어야 하잖아.”

 

나는 내 눈앞에 있는 푯말을 치우고 천천히 일어섰다.

 

이 시베리아 벌판에서 귤이나 까라고...! 크흠...주인. 일어났는가? 몸은 그렇게 많이 나빠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방금 전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1억개의 욕을 들은 것 같은데요?”

 

? 설마. 짐은 마왕이다. 아무리 마왕이 악한 이미지라고 하지만, 마왕도 군주이기에 언제나 공평하고 동등하게 상과 벌을 내려야 하는 법. 절대로 주인의 흡혈 당하는 모습이 부럽고 야릇해 보여서...가 아니라, 남의 것을 멋대로 뺏어가려고 하길래...도 아니라, 어쨌든 괘씸해도 그런 1억개의 별똥별은 쏘아 보내지 않았노라.”

 

뭔가 쓸 때 없는 사족이 많이 보였으나, 전부 다 태클하기에는 너무 피곤하니까 넘어가기로 하죠. 아무튼 엘리시아는 어째서 무릎을 꿇고 있는 건가요?”

 

내가 말을 하자마자, 엘리시아는 나를 쏘아붙이는 듯한 눈으로 다급하게 소리를 높였다.

 

난 무릎을 꿇은 적 없어! 고대 뱀파이어인 내가 어느 강자에게도 무릎을 꿇을 리가 없잖아! 이건 그냥 무릎을 접고 싶어서 이런 모습으로 된 거라고!”

 

대체 그런 기분은 어디서 나타나야 하는 걸까? 아무래도 오래 전에 살았던 흡혈귀들은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는 생명체라고 생각했다. 뭐 그건 그렇다고 해도 방금 전까지 레시아가 엄청나게 몰아붙이던 이미지였는데...

 

레시아. 혹시 마계 공작들 중에 엘리시아의 부모님이 있나요?”

 

아니. 지금은 마계 공작을 사퇴하고 요양 중이니라. 물론 전 마왕이 마계를 막장을 부리며 아무런 계획도 하지 않고, “인간을 몰살한다!”라며 소리를 치던 시절에, 짐은 그저 가위바위보 만으로 마계를 평정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시절과 같노라. 그 때 가장 첫 상대였던 인물이 사이언 아카드’. 그 자는 폭식의 표식을 지녔던 공작이었노라. 가위바위보는 2번 비기고 한 번 이겨서 리타이어를 시켰으나, 사이언은 짐에게 제 딸은 지금 800년째 동면 중인 만큼 확실한 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 딸을 부하로 드릴 테니, 저는 폭식의 공작을 그만두고 조용한 곳에서 요양하고 싶나이다.”라고 말을 했노라.”

 

그 가문은 무슨 프리저가 운영하나요? 동면이 길면 길수록 더 강해지다니? 조만간 우주를 손에 거머쥐겠네요.”

 

물론. 사이언의 말로는 엘티노스가 마지막으로 가기 전에 자신의 딸이 너무 버릇없다며, 수면 마법을 사용해서 강제 동면으로 빠지게 된 것이 원인이라고 하더라.”

 

죽기 전까지 그 사람은 다른 곳에서 깽판을 치고 있었다는 겁니까?”

 

그 보다 레시아의 말을 풀어보면, 자기는 죽기 싫어서 숨어 지내는 대신에, 자식을 레시아의 수하로 붙이는 것을 약속으로 살았다는 것 아닌가?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고 겁쟁이라고 들을 지 몰라도, 나름대로 레시아를 꿰뚫어보고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가문을 살릴 수 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것으로 보아. 정말로 대단한 생존력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종언의 시작의 마법이 발동되어도 살아남는 것이라면, 바퀴벌레와 아카드 가문이 아닐까?

 

그럼. 결국엔 레시아의 부하라는 소리네요?”

 

그렇지. 뭐 주인이 그때 말리지 않았다면, 사실상 사이언을 찾아가서 모든 가문을 전멸 시켰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점은, 짐의 잡일을 처리하는 노동력이 이렇게 잘 살아있으니. 짐은 느긋하게 쉴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한다.”

 

아니...애초에 마리아를 시켜먹었잖아요.”

 

마리아가 감당하기 힘들만큼 서류처리가 많은 것일까? 아직까지 알 수 없었지만 동면에서 막 깨어난 엘리시아에게 있어선 혼돈 그 자체가 아닐까?

 

그보다 마왕님! 어떻게 저런 하인의 사역마로 있을 수 있는 거죠?”

 

너는 날 부르는 것에 있어서 하인으로 고정인가...

본래 흡혈귀에게 물리는 그 순간부터 주종관계가 일어나는 것처럼 들린다.

 

그야. 주인이 짐을 불렀기 때문이니라.”

 

아니. 그것이 아니라! 보통 마왕이 인간에게 불려지면, 무슨 수치라던가 아니면 모욕이라면서 그 인간을 중심으로 모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이 먼저 아니에요?”

 

뭔가 맨 처음에 내가 레시아에게 태클 걸었던 주제로 재생하고 있는 엘리시아.

그러나 레시아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대가 자고 있는 동안 마계가 어떻게 변화가 되었고, 천계와 맺은 맹약이 어떻게 체결이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군. 그렇게 오랫동안 자고 있었으니 알 수 없는 것은 무리도 아니니라. 게다가 주인은 남자인 상태에서 여장을 하면 꽤나 금단의 매력이라던가 그런 게 있노라.”

 

금단의 매력은 또 뭐에요. 애초에 누가 들으면 날 여장시키려고 사역마가 된 것 같잖아요.”

 

확실히 지금의 모습도 매우 아름답지만, 역시 남자를 여장 시켜서 본래 여성보다 예쁘게 꾸미는 것을 확실한 주제로 삼는 것이, 이번 소환을 하면서 맺은 맹약이 아니더냐?”

 

멋대로 이야기 바꾸지 마시죠! 이야기 1의 내용을 확인 해도 그런 맹약은 없었으니까!”

 

그럼 오늘부터 하지 뭐.”

 

레시아!!!”

 

결국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것은 내 쪽이 되었다. 레시아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대체 이 고양이가 마계를 지배하는 마왕인지,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 괴롭히는 것 대신, 만담을 하러 나온 마왕인지 헷갈릴 무렵에, 엘리시아는 잠깐 생각을 하다가 레시아를 보고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왕님과 저는...”

 

나와 레시아가 도중에 말을 멈추고 엘리시아를 보았을 때는, 엘리시아가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취향은 같은 모양이네요!”

 

그대는 지금부터 내 직속 부하로 일하도록.”

 

설마 바보 콤비의 탄생인가...

 

방금 전에 저 하인을 흡혈하면서 여장을 당한 기억만 저장했지요. 인정하긴 싫었지만 그 여장을 하면 매우 잘 어울리더라고요.”

 

뭔가 신이 나서 입을 여는 엘리시아와, 거기에 흡족해하는 분위기가 된 레시아의 대화는, 정작 피해를 받은 당사자 앞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그대도 뭔가 잘 아는 군. 엘리시아라고 했던가? 그대에게 백장미 레전더리 에디션을 수여하도록 하마.”

 

오늘부터 몸과 마음을 바쳐서 마왕님을 모시겠습니다!”

 

레전더리 에디션은 또 뭐야?

그리고...무슨 인재인지 몰라도 왜 그런 걸로 포섭이 되는 거야?

마치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내가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법 기초편을 줄 테니 우리의 군사가 되어 일을 해주게.”라고 해서 제갈 공명이 포섭당한 것 같잖아? 큐티 제갈 공명 빔이 그것 때문에 나온 건가?

 

뭘 이상한 독백을 하고 있는가? 주인도 어서 새로운 잡화점 멤버에게 환영의 박수를 쳐야 하지 않는가?”

 

레시아가 신난 이유는, 자신의 취미를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좋아하는 거잖아요! 그보다 같이 살 거에요? 정체도 알 수 없는 흡혈귀하고 같이?”

 

흡혈귀라니! 나는 오늘부터 마왕님을 따르는 고대 뱀파이어. 엘리시아 아카드라고! 그리고 흡혈귀라고 하지마. 뭔가 멋이 안 살잖아. 이름을 부르면 되잖아? 그 가련한 모습으로 엘리시아 님~. 이라던가.”

 

나를 약을 올리다 못해 하늘을 넘어 폭주시키려는, 엘리시아가 턱을 살짝 들고 왼쪽 손가락들을 모아 턱을 바치며, 짜증나게 만드는 몸짓과 함께 저 위와 같은 대사를 말했으니. 내 머리는 서슴없이 단어를 뽑아내서 입으로 쏘아버렸다.

 

뭐래? 오래 살아온 박쥐가.”

 

멋이 더 없어졌잖아!”

 

시끄러워. 모기.”

 

너 당장 이리와!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빨아들일 테니까!”

 

나의 막말에 결국 붉어진 얼굴에는 곧바로 나에게 달려올 만한 준비를 갖췄으나, 레시아는 나와 엘리시아 사이에서 그만들 하거라.”라며, 조용하고 침착하지만 똑똑히 들리는 음성이 엘리시아의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마왕님! 저 하인이 절 괴롭힌다고요!”

 

괜찮다. 9월 이후에는 그대도 주인의 여장시키기 프로젝트에 동참할 수 있으니. 그때까지만 참고 있거라. 가면 갈수록 주인이 날뛰는 바람에 최근 백장미를 잘 찍지 못하고 있지만, 그대가 있으면 단숨에 제압되고 백장미를 찍는 것에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겠지.”

 

오호라. 그때는 열심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길 루니아 누나만 있어도 탈출할 확률이 3%미만으로 줄어드는데, 엘리시아까지 껴서 나를 제압한다면 천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0.1%미만이다.

분명 2개월 분량의 백장미를 찍지 못했기에, 상당히 빽빽한 일정으로 찍어낼 것이라 예상하고, 급하게 도망갈 준비부터 차곡차곡 하고 있었건만, 나중에는 엘리시아가 크게 날 방해하러 올 것 같다.

 

그래도 잡화점에 크게 화를 끼칠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

 

본래 흡혈귀는 태양에서 움직일 수는 있지만, 그렇기 위해서는 피부 밖에 노출이 되는 옷을 입으면 안 되며, 해가 떠 있는 이상 능력에 제한이 온다. 따라서 흡혈귀는 아침에 해가 멀쩡히 걸려있는데 돌아다닌다면, 그건 흡혈귀 사냥꾼에게 나 좀 잡아주소.”라고 푯말을 걸어놓고 다니는 행위.

 

하지만. 고대 흡혈귀는 그와 다르게, 이미 자신의 몸에 흐르는 혈액부터 달라서, 태양에 피부가 노출되어도 멀쩡하고, 오히려 흡혈귀들의 약점이 없는 상태. 그러니까 은탄을 쏴도 정화되지 않고, 마늘을 줘도 잘 씹어 먹으며, 십자가인지 뭔지는 그냥 귀찮은 듯이 내려쳐서 부셔버린다.

 

그 많은 진실에 대한 것을 어떻게 확인 했느냐 하면...

 

츄웁...”

 

제길...일어나자마자...!”

 

헌혈을 하면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분량이, 엘리시아의 아침식사로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니까. 보통 주변에 마늘과 은으로 된 십자가를 사방팔방에 봉인진을 만들 듯 흩뿌려놨지만, 그거에 아랑곳 하지 않고 아침부터 따사로운 햇빛과 함께, 내 목에서는 강렬한 따가움과 정신적으로는 현기증을 느끼며, 허우적거리는 팔이 천천히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애초에 다른 사람도 있잖아. 왜 하필 내 피만 마시는 건데!”

 

탈진한 목을 억지로 끌어올려 내가 소리를 지르자, 엘리시아는 내 목에서 입을 때고는 남은 피를 가느다란 손가락에 묻혀서 핥은 뒤에 입을 열었다.

 

왜긴. 네가 인간이라서 그렇지.”

 

매리와 마리도 있잖아!”

 

그 아이들은 전부 혈액형이 AB형인걸? 혀가 타는 듯한 감각은 이제 싫어서.”

 

O형이다.

 

아니! 그보다 헌혈팩이 맛이 없는 이유는, 현혈팩 안에 특수한 공정을 처리했기 때문이니까, 그냥 매리와 마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흡혈하라고 말 했잖아! 그 타 들어가는 맛은 혈액형 때문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오늘 한 번.”

 

제길. 나도 드디어 머리가 돌이 되어 굳어가는 건가.

 

어쨌든 디저트로 한 번 더...”

 

-콰악!

 

다른 곳에서는 흡혈하는 행위가 남을 흥분시킨다고 하는 설정으로, 미화를 시키거나 성적인 환상을 심어준다고는 하는데...

퍽이나! 목덜미에 송곳 2개가 내려꽂아버리는 데! 뭐가 흥분을 해! 아파 죽겠다!

 

디저트는 또 뭐야...날 이제 죽이려고 작정했어?”

 

전채요리가 있으면 메인도 있고, 디저트도 있어야지.”

 

. 그러니까 지금 날 흡혈하는 것이 3번째라는 거군? 전채흡혈은 또 언제 한 거야? 애초에 그렇게 나누면 피 맛이 달라져? 당장 입 때! 떨어져!”

 

지금 당장이라도 밀쳐내고 싶지만, 아쉽게도 흡혈 당한 순간부터 모든 힘이 강탈당하는 에너지 드레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발버둥을 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찰칵!

 

“...?”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거꾸로 매달려있는 윈디가 사진기를 들며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아니 내 시야에서는 거꾸로 매달려 보여도, 윈디는 지금 바닥을 밟고 있는 것인가?

 

이야! 카일 씨. 이 사진은 정말 잘 팔릴 것 같네요. 미소녀 둘이 엉켜서 흡혈하는 사진이라니. 그럼 저는 이 사진을 복사하러 가보겠습니다. 호호호. 그럼 두 분끼리 좋은 시간 보내세요.”

 

뭐가 좋은 시간이야! 당장 안 돌아와! 윈디!!!”

 

오늘따라 안 좋은 일이 겹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내가 전생에 나쁜 일을 저질렀을 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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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에게 흡혈 당하면 무지하게 아픕니다.

별거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