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98
98
내 앞에 루니아 씨가 왔다는 소리는 지금껏 평화로웠던 나날이, 재미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파괴된다는 소리라고 해야 할까? 이쯤 되면 그냥 멸망이라는 수준으로 볼 수 있다. 유난히 머릿속에서 경계하는 대상이 1위가 루니아 씨인 만큼. 저기 히죽히죽 웃고 있는 얼굴 뒤에, 과연 어떠한 일이 숨어있을까?
“오늘은 그냥 놀러 왔어요오.”
그냥 놀러 온 것치고는 손에 들고 있는 세면도구와 파자마로 추정되는 면 옷이 상당히 거슬립니다만? 급기야 백합을 뜻하는 순백의 제복이 아니라, 평상시에 사람들이 입을만한 옷을 입고 있었다.
세부적으로 묘사를 하면 연 파랑 계열의 스커트와 흰색의 블라우스인가.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사람이 날개인 듯. 뭘 입어도 무서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정말 이쯤 되면 호러가 아닐까?
“정말 휴가라는 것은 따분하게 그지 없네요오. 그래서! 누나도 잡화점에서 숙박을 한 번 해볼까 합니다아!”
마치 자신은 휴가 때 심심하고 할 게 없어서, 이곳에 온 것이라고 태연하게 말을 하고 있으나, 그걸 듣고 있는 나의 평화는 멸망수준이 아니라 소멸로 변할 기세다.
“루니아 씨...아니 누나. 기왕 휴가 받은 거라면 바다라던가, 칸포리우스 제국이 자랑하는 ‘영원의 투기장’관람이라던가, 이런 꿈과 낭만이 넘치는 계획도 많잖아요? 근데 왜 하필 이런 촌구석 마을에서 구석진 곳에 있는 잡화점에, 이번 휴가를 시궁창에 돈 버리듯이 쓰는 겁니까?”
“그거야 휴가 받은 사람 마음이잖아요오? 그리고 저는 그렇게 많이 출현하지 못 했고오...”
출현빈도를 따지자면 루니아 씨도 상당히 많이 나오셨는데요...
“게다가 전 지금은 조연이지만, 언젠가는 주연의 자리를 강탈할 거에요오.”
그건 즉...잡화점의 멤버가 되겠다는 선언? 그런 선언을 한다고 해서, 진짜로 될 가능성은 없지만, 루니아 씨라면 현재 있는 잡화점 멤버 중에 한 명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을 전투력을 가진 만큼, 흘려 듣지는 못하겠지. 그보다 슬슬 식비가 빠듯해지는데 그만 좀 왔으면 좋겠다.
레시아는 루니아를 향해 위압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만일 이 잡화점에 들어오고 싶거든, 짐의 부하가 되야 한다. 인간으로서 마족의 노예라는 인식을 아직까지 받는 지금...”
“좋아요오.”
레시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좋다는 대답을 한 루니아 씨였다.
“하...역시나 좋을 리가 없지. 그래서 그대는 잡화점의 멤버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오로지 잡화점의 멤버는 짐과 관련된 부하들이 짊어지는 것...잠깐 뭐라고?”
오오. 레시아의 시간차 태클! 그보다 루니아 씨는 몬스터를 그간 학살해왔으면서, 이번엔 몬스터들의 최고 우두머리인 마왕의 밑에서 일하면, 이번엔 사람을 학살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위바위보를 연마해서 마계를 평정할 것이 될까나?
현 마왕도 당황하게 만드는 루니아 씨의 입은 다음으로 이어갔다.
“좋다고 했어요. 어차피 기사단장 직에 오래있을 것도 아니고, 본래 가문의 이름도 없었던 평민인 제가 그만 둔다면, 카일의 옆에서 누나 노릇을 평생 하겠다고 다짐을 했거든요오.”
애초에 그런 다짐을 왜 하는 거야...
그러나 레시아는 잠깐 고민을 하더니, 그냥 받아들이는 듯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감고 엎드렸다.
그 뜻은...
앞으로 내 평화가 매일 아침마다 아이니스에게 태클 거는 것도 모자라서, 오후에는 루니아 씨에게 시달리다가 새벽에는 레시아와 가위바위보를 해야 한단 소리잖아? 랜덤으로 루시피나 씨와 마리아, 루나가 또 사고를 치거나 바보짓을 해서 태클을 거는 날에는, 내 정신이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랜덤 한 확률로 릴리스의 존재도 생각해봐야 한다면...
진짜 이게 무슨 개판이지.
이럴 때는 사전에 차단을 해야 앞으로 있을 고생이 줄어든다.
“루니아...누나 저는 그것에 대해 반...아악!”
반대한다고 말하려는 찰나에 루니아 씨가 내 목을 슬리핑홀드로 조르며, 입을 천천히 열었다.
“찬.성. 할거죠오?”
“켁! 루니아 씨!”
“누.나.”
이런 상황에서도 꼭 그걸 강조해야 하는 거냐!
“누나...숨이...크윽!”
루니아 씨의 가는 팔을 계속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항복의사를 표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처럼 주문을 외쳐야, 내 목을 조르는 팔이 풀릴 것 같다. 하지만 그 주문을 말하면 지금의 고통에서는 사라지겠지만, 앞으로 미래에 역경과 고난을 예약하는 셈. 하지만 앞으로 40초인가...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알았어요...! 어차피 잡화점은 가는 사람이든 오는 사람이든 안 막으니까! 편하실 대로 하세요!”
그러자 목에 팔이 드디어 풀렸다. 산소 결핍직전까지 몰아갔던 루니아 씨의 무서운 목 조르기는 내가 땅에 쓰러져서 산소를 흡입할 때까지 10초의 시간이 걸릴 정도. 뒤에서 목을 조르니까 등에 기분 좋은 감촉은 없었냐고?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런 것 신경 쓸 겨를이 있냐!
“자 그럼 미래의 할 일은 결정!”
박수를 치며 기쁘게 말하는 듯한 루니아 씨는, 잠깐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 역시 부탁할 일이 있어요!”
그럴 줄 알았다.
“이번에 칸포리우스 제국에 귀부인들과 팬미팅을 해야 하거든요오. 언제쯤 시간이 되나요오?”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팬미팅? 그게 뭐지? 먹는 건가?
“전 영원히 바쁩니다. 앞으로도 바쁠 예정이고...”
“1주일 뒤요? 알았어요오!”
...저에게 발언권은 아예 없는 겁니까? 칸포리우스 제국까지 가는 것은 사키엘의 문을 통해 가면 되고, 강제귀환을 하면 잡화점으로 순식간에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분명히 내가 싫어하는 여장을 하고, 귀부인들과 만나면서 팬미팅을 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누가 그걸 좋아하냐고!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났지!
누군가는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
지금 내가 딱 그 상황이다.
그나저나 방은 또 어떻게 나눠야 하지...
“그럼 방편성은...루시피나 씨와 루니아 씨가 방에서 자는 걸로 하고, 루나와 마리아가 밑에 지하에 있는 루나의 방에서 자는 걸로...저와 인큐버스는 그냥 바닥에서 같이 자야겠네요.”
순간 옆에서 루니아 씨의 금발 하나가 올라왔다. 안테나인가? 라고 생각을 하던 찰나에, 루니아 씨는 작은 입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카일과 인큐버스가 한 이불에! 이것은 정말 잘 팔리는 아이디어에요! 여장은 어떻게 코디를 해야 할까요오? 역시 그때 봤던 엘프 코스프레가 가장 좋겠죠오? 엘프x인큐버스 정말 좋은 조합이에요!”
...정말 내 인생이 어쩌다가 이렇게 꼬였을까?
그보다 엘프와 인간이 내가 여장한 엘프 코스프레에 화해를 했다는 것이 신문에 나올 정도였다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백장미인지 흑장미인지 하는 잡지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내 사진을 보고 탐하고 있는지 생각만해도 소름이 돋았다.
대략 22시정도 다 되어가자, 밖에서 홍보를 하고 있던 루나와 마리아, 루시피나 씨, 그리고 인큐버스 이렇게 4명이 잡화점에 우루루 몰려왔다.
“야호! 마리아! 루시피나!...그리고 누구?”
루나와 루니아 씨는 첫 대면인가...
그보다 왜 앞에 ‘루’로 시작하는 사람이 3명이나 될까?
“저는 주인님의 영원한 노예인 루나라고 해요.”
“잠깐! 루나!”
나는 잠시 루나를 저 구석에 끌고 간 다음에 조용히 말했다.
“애초에 나는 너를 노예로 생각한 적도 없거든?”
“서...설마! 주종관계를 파기하고 절 버리시겠다는 말씀인가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째서 저를 버리는 겁...”
“지금 네가 시나리오 쓰지 말고...애초에 잡화점 내부에서 우리는 수평적인 위치에 있다는 소리야. 그러니까 노예나 그렇게 소개하지 마.”
“아하! 그러면 밤 봉ㅅ...”
“그건 더 안 돼! 그보다 그런 일을 시킬 리가 없잖아!”
우선 루나의 사고패턴을 따지고 보면, 자신이 나보다 최하위 노예계급인 줄 아는 듯 하다. 문제는 루나는 지금 현재 달에 있는 모든 기계와 모든 루나들을 지휘하고 통제할 수 있는 ‘마스터 카드’를 가지고 있는 시점에서, 보통 달의 주인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달에서 살아야 하지 않나?
아무튼...
“그냥 우리 둘은 친구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알았지?”
“음...친구는 너무 쓸쓸한데...알았어요! 그게 주인님의 소원이라면!”
그러니까 그 주인님이란 단어도 말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다시 루나와 루니아 씨가 ‘정상적으로’소개를 하는 동안, 마리아와 루시피나 씨는 목욕탕으로 갔는지 자리에는 없었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와! 토끼 귀다아!”
“저기? 루니아 씨?”
“언니라고 말하세요오~”
루니아 씨로 인한 피해자가 한 명 더 늘어났다. 물론 같은 성별이면 친해지기 쉬운 것이 있다고는 했던가? 그건 그 때가서 보는 걸로...
“오늘은 많이 힘들었어요...”
“수고했어. 매니저.”
녹초가 되어버린 인큐버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인큐버스는 그래도 다시 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은 내용은 “힘들지만 재미있었다.”와 같은 내용이겠지.
“그래도 콘서트에서 루나 씨는 정말 굉장했어요! 모든 몬스터와 인간들이 한 가득 모인 장소를 천천히 구경한 것은 살아생전 처음이었거든요!”
인큐버스의 입장에서는 왜 있는지도 모르는 여성공포증, 때문에 인간을 꿈에서밖에 만난 적이 없었다는 것으로 추측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차근차근 알아가면서 바보 같은 공포증도 어느새 완화가 되어 한 몫을 하는 인큐버스가 되길 빌자.
따지고 보니 인간에게는 해가 되는 녀석이 잘 되기 비는 것으로 봐선, 나도 제정신은 아닌 걸로...
“이 아이가 인큐버스???”
“히익!”
루니아 씨가 가까이 가자마자, 그걸 또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내 뒤에 인큐버스가 숨으며 벌벌 떨었다.
“이 녀석은 좀 별종이라서요. 그나저나 기척을 지우고 오는 것은 저도 심장에 안 좋으니까. 그만둬 주시죠?”
“사랑스러워서요오?”
저런 미ㅊ...아니. 발짝 들어올리며 귀여운 포즈를 취한, 루니아 씨를 때리고 싶다는 충동이 머리 끝까지 올라갔으나, 다시 마음속으로 분노를 가라앉히고 해탈의 경지를 향해 마음을 다스렸다.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깜짝 놀라기 때문이에요. 심장이 약한 사람은 바로 심장마비로 쓰러질 정도로 말이죠.”
“음...그래도 사랑스러운 것은 맞죠오?”
애초에 그게 사랑스러웠으면 사람들이 다른 이유로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지겠지만, 지금은 러브가 아니라 호러인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거짓말로 긍정을 대답한다면 평생 기척을 숨기다가 나를 놀라게 하는 것에 전념을 할 것 같다.
“저는 잘...아악!”
-꽈아아악!
“맞.죠.?”
언제 또 목을 조르고 있었냐!
“맞아요! 맞다구요! 하하! 정말 사랑스러워라! 그러니까 제발 풀어줘요! 뇌에 산소가 가지 않아서 뇌가 죽으려고 하잖아요!”
다시 풀어주자마자 내 폐는 산소를 찾아 기침을 유도하기 시작했고, 루니아 씨는 돌아오는 마리아와 루시피나 씨에게 “꺄아~! 카일이 말이죠오!”라는 말과 함께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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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여러분의 주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긴 모험을 떠나서 고생하지 않아도, 잡화점에서 개고생을 하고 있는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