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601
601
용사도 이곳에 찾아오고 마왕도 이곳에 찾아오니, 이 정도면 내 잡화점은 이론상 먼지가 되어 허공에 뿌려지거나, 어마어마한 손님으로 북적거리게 되는 극과 극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내 잡화점에 온 손님들은 정상적인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번에는 제 7그룹으로 참여해달라는 프리트론 왕국의 기사나, 아무리 봐도 10대 초반의 어린애가 용사이며, 마왕은 프리트론을 밟고 차근차근 진격하고 있다. 프리트론 왕국을 점령하고 동쪽으로 가게 되면 칸포리우스 제국과 하란국이 존재하는데, 그 곳에서 시간을 얼마나 버느냐에 따라, 마왕군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 7그룹은 잡화점에 와서 한다는 일은, 어린 용사에게 잡화 물품에 대해 설명해주고 부족한 물품을 사는 중이다. 뭐, 체크포인트 같은 역할이라면 잡화점이 당연하지만...
“와! 키르겔!”
“네~ 용사니임~!”
저 안에서 애정행각 비스무리한 건 그만 뒀으면 좋겠다. 아무리 봐와도 키르겔이라는 저 여성은 용사를 심상치 않은 눈으로 보고 있는 듯 한데, 조만간 은팔찌를 채우고 아공간에 던져놔도 할 말이 없을 법한, 범죄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지...
그런걸 내가 신경 써서 어쩌겠다고?
우선 이 상황을 어떻게든 빠져 나와 두 번 다시는 귀찮은 일에 휩싸이지 않도록 해야지.
아까부터 내 앞에 있는 기사는 뭔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가만히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었다. 관심법을 사용하지는 못해도 이 상황으로 보면 꽤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마주한 거 같은데.
“왜요? 뭐라도 묻었나요?”
“아뇨. 성녀님께서 지금 안고 계시는 고양이는 뭡니까? 키우시는 겁니까?”
“고양이?”
잠깐 고개를 밑으로 내려다보니 검은 고양이 하나가 내 무릎 위로, 기분 좋게 앉아있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듯 “냥?”하고 올려다 봤다. 무심결에 쓰다듬고 있는 손을 멈추고는...
“아이 깜짝이야! 뭐야 이거!”
“냐아앙!”
뭐야! 언제 내 무릎 위에 앉아서 저렇게 기분 좋다는 듯이 앉아 있었던 거야! 그나저나 검은 고양이라니? 내가 알고 있는 검은 고양이라면 분명...
[설마 용사들과 접촉했을 줄이야. 역시 짐의 예상대로군.]
[마왕!?]
그 깜찍한 모습으로 내 무릎 위에 올라와서 동태를 이미 다 살펴보고 있었나. 게다가 키르겔마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그보다 그대의 말대로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모습이로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잡화점에 용사 일행이 도착했다면, 그대가 귀찮아하지 않도록 지금 당장 쓸어버리는 것쯤은 간단하다.]
[그럼 지금 해치우던가...]
옛날부터 전승된 이야기로 용사와 마왕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면, 변수가 생기기 전에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다만, 나에게 다시 다가와 앞발을 핥는 고양이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으니...
[아니, 좋은 시나리오가 생각났다. 그대가 용사의 대열에 참전하여 짐이 있는 마왕성까지 끌고 온 다음에 끝에 타락을 하여 배신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런 흔한 레퍼토리를 내가 왜 해줘야 하는데?]
그 놈의 타락과 배신으로는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는 거냐?
[성녀가 악의 힘에 굴복해 타락하는 것이야 말로 흔하지만 좋은 기믹으로...]
[성녀 아니라고!!!]
머리에 분노라는 점화장치가 터지자마자, 거칠게 고양이 머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그대로 끌어올렸다. 고양이의 두개골을 부셔버리겠다는 심정으로 오랜만에 아이언 클로가 나와버렸고, 그 덕에 작은 4개의 다리가 허우적거리면서 고양이의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몇 번을 말하지만 나는 잡화점 상인일 뿐이란 말이야!!!”
“저, 저기! 고, 고정하세요!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성녀님은...힉!”
순간 내 눈빛을 본 기사의 헬멧이 덜그럭거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살의를 담았기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질겁을 했겠지만...
“그, 그래도 그 고양이는 죄가 없습니다. 물론 신성한 성녀님의 무릎을 침범하는 행위를 했지만...”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성녀 아니에요. 그리고 고양이 하나가 그저 앉아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렇게까지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되요.”
성녀가 아니고 잡화점 상인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어차피 듣지도 않고...
[이, 이것이 성녀의 힘인가...가녀린 체구에 비해 역시 신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자로다. 하마터면 방심할 뻔했노라.]
한눈 판 사이에 마법으로 순간이동 했는지, 내 손에서 벗어나 저 멀리서 노려보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 사실 마왕이 고양이가 될 필요가 없지만, 마왕이 고양이가 되어 인간계를 살펴보고 전략을 세운다는 그 자체가 이상하지 않을까?
“이제 좀 돌아가주세요. 잡화점 청소도 겨우 했고, 지금 잡화점 개방시간이 아니니까요.”
이제 다 좋으니까 모두 사라져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너무 앞선 나머지, 입이 자동으로 위와 같은 말을 했다.
“그, 그러면 저희도 이 근처에서 야영을 준비하겠습니다.”
“왜 잡화점에서 야영을 준비하는 건데요...”
잡화점 근처에서 야영을 준비한다는 의미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대로 찾아오겠단 소리인가? 아니 어떤 모험가가 잡화점 근처에서 야영을 즐기는 걸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메타가 바뀐 건가? 잡화점 야영 메타는 어디서 나온 거지? 최근에는 간절하게 기도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속설은 들었지만, 잡화점 근처에 야영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포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닌데?
“성녀님! 무슨 일이 있으면 절 불러주세요!”
도저히 저 꼬마 용사에게 뭔가 부탁하기에는 너무 빈틈이 많았다. 그렇다고 한들 자랑스럽게 웃어 보이고 있으니, 한숨을 내쉬며 알았다고 말했다. 눈동자가 밝게 빛나면서 한 사람의 몫을 했다는 듯한 기쁜 발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잡화점 밖으로 빠르게 빠져 나온 용사 일행. 그리고 그 모습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타이밍을 읽고 있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옆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저 사람들이 마왕을 타도할 제 7용사라고 하는데?.”
“확실히 저 꼬마아이에겐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보이긴 한다. 허나 짐은 마왕이니라. 저런 아이 하나 이기지 못하고 어찌 마계를 이끌 것인가? 그러니 침공을 하는 동안에도 제 7그룹을 절대 얕보지 않을 것을 이곳에서 선언하노라.”
“시끄럽고 그만 내 발목에서 그만 떨어지시지?”
“안 된다. 그대는 짐의 것이니라.”
저 고양이 목에 방울 걸어서 진도8.0으로 흔들어버릴까?
“그나저나 용사도 갔으니 짐도 이런 불편한 모습을 그만둬야겠군.”
순식간에 마기를 끌어 모아 변한 모습은 편하게 보이는 검은 면바지와 맞췄는지 검은 와이셔츠가 눈에 보였다. 옅은 회색으로 줄무늬를 넣어 심플하면서도, 깔끔한 이미지를 띄고 있으면서도, 손목에 있는 금빛의 장신구가 여럿...잠깐만?
“어째서 남성체로 변한 거냐!”
말 그대로 여성체의 마왕은 카리스마가 있으면서도 주변을 현혹시킨다면, 남성체의 마왕은 모든 것을 압도하고 굴복시키는 무언가를 뿜어낸다. 형용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네크로노미콘을 보는 듯한 기분. 사실 네크로노미콘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모르겠지만, 분위기와는 관계없이 어울리지 않은 짧은 자색의 머리를 긁적이며 마왕은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히 그대는 여성체이고 여성체와 같이 한 쌍을 이루는 것이야 말로 남성체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니라. 아직 짐은 마왕이지만 다른 방면에서 지식이 계속 들어와도, 끊임없는 무한한 지식은 아직까지 짐의 고뇌를 뿌리치지 못하게 하는...”
“그 지식이 어느 정도 맞긴 하지만 대체 누구에게 들었는데?”
“색욕의 공작에게 들었다.”
아무래도 색욕의 공작 특유의 성교육을 마왕에게 가르친 거 같지만, 마왕은 그와 다르게 깊이 있고 심도 있는 고뇌와 고찰로 인해 전혀 효과가 없는 모양이다. 리제로트는 문 밖으로 나오다가 마왕을 보고는 다시 문을 닫아 들어갔으니...
“아무래도 리제로트의 입장에선 지금의 마왕을 이겨내기엔 무리인가...”
마왕에게는 특유의 오러가 뿜어져 나온다. 그 중 13대 마왕인 레프리시아만의 오러는 상대방을 순식간에 죽이거나 심한 경우 침을 흘리게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강도가 전혀 반대인 거 같지만, 리제로트가 마왕을 보자마자 바로 문을 닫아 피한 것은 현명한 대처라고 볼 수 있다.
마왕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분위기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뒤로 움직였다. 그러나 벽에 다다르고 나서 갈 길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마왕은, 내 얼굴 바로 옆에 있는 벽을 쾅!하고 치면서 박력을 내세...
-파아아아앙!
우려고 했으나 어마어마한 파괴력으로 잡화점 벽 일부가 날아가면서, 남자의 박력보단 이 무식한 파괴력은 어디서 나오는 가에 대해 고찰하게 생길 판이다.
“흠. 그대는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상대에게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이건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거의 사형선고잖아.”
“로맨틱하지 않은 건가?”
“로맨틱이 어디 죽어버렸냐!”
누가 가르쳤는지 모르겠지만 그 어떤 것도 살인기술로 승화하는 마왕을 볼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옆에서 뭐가 폭발하는 마당에 장르가 로맨스가 아닌 스릴러로 변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러면 짐이 마이클 마이어스가 되어 할로윈마다 나타나면 되는 건가?”
“그 빌어먹을 정보는 어디서 나왔길래, 아무런 거부감 없이 술술 튀어나오는 거야!”
이 세상.
이 시간대는 아무리 봐도 잘못 되어있었다. 결국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원래 없어야 할 지식이 이곳에 오염되어있는 것일까? 아니, 모든 차원의 융합으로 인한 붕괴도 막았고, 그런 일을 꾸미는 사회자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가끔씩 이런 오염된 정보가 나타나고 있으니, 결국 이렇게 마왕과 한가하게 만담이나 하는 것도 누군가에 의해 쓰여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왕.”
나는 진지하게 이 세상의 비밀 같은 것을 풀어보려고 했다. 그리고 마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가? 불을 꺼야 그나마 부끄럽지 않은 것인가?”
“뭘 끄긴 꺼! 이 미친 마왕아! 댁 정신부터 꺼줄까!”
아무리 봐도 예전에 레시아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마왕이잖아? 이곳까지 와서 태클의 사명을 이끌고, 최선을 다해 오늘도 태클을 거는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니, 나란 인간은 도대체 언제쯤 평화를 맞이할까?
“이번엔 짐이 그대를 쓰다듬고 싶군. 아까 고양이었을 때 잠깐 느꼈지만, 쓰다듬을 받는 쪽은 기분이 좋아도 쓰다듬는 쪽은 기분이 어떠한 가에 대해 알고 싶다.”
“어째서 댁 같은 마왕이 마왕이 되어 마왕 같은 일을 마왕처럼 하다가 나를 만난 이후로 마왕 같지 않은 일을 마왕이 하는 건지부터 알고 싶은데요. 어떤 마왕이 쓰다듬는 쪽과 쓰다듬을 받는 쪽에 대해 고민을 하냐고!!!”
끊임없는 폭주와 태클로 인해 심신이 모두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저 잡화점 안에 쓸쓸히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평화롭게 창 밖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내 오른 팔을 붙잡은 따듯한 감각이 내 몸을 확 끌었다. 마왕의 온화한 미소를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지금이 그런 미소겠지. 저게 연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뒷머리와 허리를 살짝 끌어 안은 마왕은 다음과 같이 입을 열었다.
“그대의 중심으로 마나가 소용돌이를 치고 있는 현상은 모든 생물들에게도 이로운 영향을 주지. 결혼을 하기 싫다면 짐의 마나 창고라도 되는 것이 어떠한가?”
“나는 누군가의 마나 창고가 되어준 적은 있어도 너는 아니거든?”
“뭐. 그리 서두르지는 않지. 천천히 공들인다면 그대도 결국 짐에게 타락하게 되어있을 테니 말이다.”
아무래도 이 마왕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내 성별은 본래 남자라고, 그런 말을 들어봤자 전부 쓸모 없는 이야기란 말이다.
그나저나, 나는 언제쯤 본래의 성별을 되찾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래도 한달 안에는 어떻게 해결되지 않을까?
===========================================================================
일은 진행하면서 더 바빠질 예정이라네요.
...망했...
'취미로 글쓰는 중?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606 (0) | 2018.12.30 |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602 (0) | 2018.11.06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600 (0) | 2018.10.18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99 (0) | 2018.10.04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98 (0) | 2018.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