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05
505
레인은 자기가 차고 있는 목걸이를 내 손 위로 조심스럽게 올려놓고는, 내가 마시고 있었던 허브티를 자기 입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아직 다 마시지도 못했는데 그 뜨거운걸 거침없이 들이키다가, 어마어마한 기세로 내뿜으며 “얼굴이 뚫리는 줄 알았네.”라고 물어보는 행동에 한숨만 나왔지만, 목걸이를 보면서 한가지 느낀 거라면 이 안에 누군가가 잠들어 있다는 것.
“예전에는 비니스 여신이 잠들어있었는데, 이 안에 누가 잠들어있는 거지?”
이번엔 제발 이상한 여신이 튀어나와서 날 괴롭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나에게 넘겼다.
“오라버니?”
“시나. 네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내 형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기분이야. 그냥 원래대로 부르도록 해.”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나저나 이 목걸이는?”
“네가 봉인을 풀 수 있다면 풀어보라는 거야. 예전에 비니스의 목걸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의 여신 비니스가 봉인 되었는데, 지금은 누가 봉인 되었든 비니스의 목걸이가 아니란 소리지.”
정확한 명칭을 알고 싶었지만 내 감정마법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신들을 봉인하는 도구니까, 어마어마하게 좋은 등급을 지닌 물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안에는 복잡한 수식들과 장치로 설계되어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곳의 창조주가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들을 가두기 위한 것입니다. 가끔가다 강력한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해 검을 겨누면, 그 안에서 가둬 반성을 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저도 하나 가지고 있기에 알 수 있습니다.”
시나는 자신의 목걸이를 보여주며 다른 형태이지만, 한 가운데에 박혀있는 보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백금으로 이루어진 목줄과 밑으로 내려가면서, 커다란 자물쇠처럼 생긴 팔각모양 한 가운데에 보석이 박혀있었고, 시나가 들고 있던 것은 양 옆에 날개라도 달린듯한 장식물이었다.
뭐라 설명하긴 힘들지만, 황금 딱정벌레 한 가운데에 보석이라도 박혀있는 기분이다. 이게 미이라를 만들 때 쓰는 곤충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시나는 나에게 다시 주면서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저는 이 차원의 창조주가 아니기에, 지금 이 안에 있는 신을 풀어주기엔 힘듭니다. 이곳에 관여를 하려면 절차가 따라야 하지만, 절차를 따르게 되면 저는 다른 차원 건너온 신비롭고 귀여운 창조신이 아닌, 길에 걸어 다니는 일반 여신이 되기 때문이죠.”
“...네 입으로 신비롭고 귀여운이라는 수식어가...”
“오라버니?”
“알았어! 태클 안 걸게! 그러니 호칭으로 날 부르지마!”
칼 같이 들어오는 시나의 말에 베일뻔하면서도, 아이리스의 표정을 살펴보니 날 이 세상 쓰레기로 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정말 변태네요.”
“웃기지마. 그리고 나는 21세라고! 아저씨라 부르지마!”
“앞에 3이 빠졌잖아요!”
“이 꼬마가 진짜! 레인! 이 꼬마 관리 안 할래!”
“꼬마라뇨! 저는 어엿한 숙녀...”
“시끄러! 이 꼬마가!”
“뭐라고요? 이 아저씨가!”
“아저씨 아니라고 했지!”
아리엘과 편안하게 대화하고 있던 레인을 부르면서까지, 내 앞에 있는 꼬마를 치워주길 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살짝 보다가 “사이가 좋으시네요.”라고 웃은 뒤에 루시피나가 가져온 쿠키를 집어먹고 있는 모습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만...
“제길...저런 꼬마를 상대할 때마다 고혈압으로 죽을 것 같아.”
흔들의자에 앉아서 화를 다스리기 위해 명상을 좀 하려고 했지만, 루시피나가 쿠키를 가지고 오면서 달콤한 향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자. 신랑. 아~”
다른 사람들의 눈이 레이저로 변한 순간에도, 루시피나는 본래 드래곤이라서 그런지 주변 분위기 변화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쿠키를 먹여주려고 했다.
“루시피나. 제 손으로 집어 머...읍!”
뭔가 입 속으로 거칠게 들어갔다 싶었더니 쿠키였다. 쿠키가 안에서 부드럽게 으깨지는 걸 보면 기묘할 수는 있어도 맛있으니 상관없다. 촉촉하게 으깨지는 쿠키라...
“그보다 아저씨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꼬시고 다니는 거에요? 무릎 위에 앉아있는 소녀는 또 누구고요?”
“소녀라니. 짐은 한때 마왕이었노라. 13대 마왕이며 타락의 표식을 지닌 절대적인 군주...”
“아이 깜짝이야! 이게 뭐야!”
“냐아앗!”
언제 올라온 거야! 사람 놀라게!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레시아를 다른 의자에 앉혔다. 어떻게 생각하면 임시조치라고 하지만 15세로 시간을 거꾸로 먹은 레시아가 항의하기 시작했다.
“주인! 무슨 짓이냐! 기껏 좋은 분위기로 같이 붙어있었는데!”
“뭐가 좋은 분위기야! 너무 자연스러워서 암살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고요!”
이러니 내가 이곳에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지.
“저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데 13대 마왕이에요?”
“그렇다. 짐이 13대 마왕 레프리시아이니라. 겉모습에는 속지 말고 똑바로 봤으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대는 아이니스처럼 마나를 잘 다루지 못하나 보다.”
“제 조상님에 대해 알고 계세요? 저의 조상님은 어떤 분이죠? 정말 자서전에 나와있는 업적을 다 이루신분인가요?”
자서전? 업적?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아이리스가 나에게 책을 건네며
“자. 보세요.”
이상한 그림일기 같은 책을 나에게 건넸지만, 300년 지난 것 치고는 관리상태가 꽤 좋았다. 감정마법으로 주변을 훑어본 결과, 300년이 지난 물품은 맞지만 제목부터 이미 내용물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랑을 전하는 소녀 아이니스의 일대기?”
이 녀석은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부수러 오는 사신과 같은 존재인데. 이건 각색을 넘어서 창조하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이 안에서 내가 어떻게 나오는데?”
“변태로요.”
“돌아가면 그 빌어먹을 은발을 다 쥐어 뜯어버려야지.
너무 빠른 페이스로 대화가 오고 가니 한 박자 쉬기로 하자. 레인은 루니아 누나에게 백장미를 받고 돌아갈 생각인지 잡화점 밖을 나가려고 하고 있을 무렵. 아이리스도 레인을 따라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래서 주인이 왜 소녀가 취향인지 알아야겠다.”
“무슨 헛소리를 당차게 하는 거에요. 그런 말을 하면 루시피나까지 폴리모프로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변하잖아요.”
마나를 집중하던 루시피나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법을 취소한 듯이, 응집된 마나를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상한 헛소리를 해서 팔찌를 채울 생각하지 말고, 이 안에 있던 봉인이나 풀어야 하는 방법을 생각해야죠. 아니면 잡화점 어딘가에 집어넣었을 때 풀릴지도 모르겠군요. 당분간 3층에서 보관하고 자료조사를 합시다.”
어찌 생각하면 레인에게 자서전을 읽고 힌트나 달라고 하면 괜찮겠지만, 그러면 내 인생이 한 방향으로 고정되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하기로 하자.
“주인. 궁금한 것이 있다.”
“뭔데요?”
“지금까지 일의 진행을 보아 우리들에게 들려온 소문이 없지 않는가?”
“당연히 저희는 300년 뒤로 날아가버린 여행자니까요. 아니면 미아라고 하는 게 맞나?”
레시아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넘어가려고 했는데 좋은 향이 가까이 나기 시작하면서, 내 귀에 이상현상을 체크했다.
-할짝!
“우앗! 놀랬잖아요! 뭐하고 있는 거에요!”
불의의 습격이라는 것은 언제나 온몸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야 당연히 주인이 짐의 말을 듣지 않으니 귀를 핥은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을 부를 때 귀를 핥지 않잖아요. 그리고 저는 제대로 대꾸했고요.”
“아니. 주인의 생각이 뇌로 가기 전에 척추반사로 말이 튀어나왔노라. 짐이 의도한대로 나와야 할 대답은 그게 아니니, 답이 정해져 있기에 주인이 제대로 짐을 상대하기 전까지는 귀를 계속 핥는 형벌을 내리노라. 하암...”
“핥지마!”
레시아의 빨간 혀가 내 귓속까지 들어가기 전에 어깨를 밀어서 거리를 벌렸다. 레시아가 말한 의도라면 분명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힘을 쓰고 있으니, 엘티노스의 봉인을 풀어주려고 천계에 가다가 레이베리아에게 쫓겨나고, 마계는 이미 인간과 전쟁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는 그냥 우리대로 알아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이 목걸이에 담겨있는 기이한 존재의 봉인을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음...레시아가 원하는 답은 그냥 세상을 다 쪼개버리자는 건가요?”
“짐의 말을 듣기나 하는 것인가!”
어린 소녀가 소리치는 거라도 마왕이라서 그런지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우리에 대해 소문이 들려오지 않으니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려주려는 의도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주인이 행한 일은 비밀리의 자서전에만 담겨있을 뿐이지만, 주인의 후손들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제 후손이요? 음...그거 참 이상하네요.”
“어째서 그리 무관심한 태도인가? 주인과 짐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이 얼마나 강인한지 보고 싶지 않는 것인가? 영웅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마계에서 군단장을 할지도 모른다. 혹은 짐의 성품을 이어받아 마계를 탈환하려고 하겠지.”
“그렇긴 하겠네요. 나중에 레인에게 물어보세요. 후손들이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혹은 후레쉬맨이 되어서 돌아올지도 모르겠네요.”
생각을 해보니 내 후손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그리고 카렌은 무슨 일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혹시 레인이라는 자도 주인의 후손이 아닌 것인가?”
“그건 아닐 거에요. 레인은 아마 고아출신에 개조수술을 받은 듯한 그런 이미지니까요. 전 적어도 300년전에는 부모님이 다 살아계셨어요. 무엇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후손들은 대부분 ‘하프’라는 말이 수식어로 붙어서 다니겠죠.”
잡화점 멤버들만 따지자면 정상적인 후손은 태어나지 않고, 특별한 후손들이 이리저리 솟아날 테니까. 진짜로 후손을 찾는 여행을 한다면, 천계와 마계도 다 들려야 하고, 드라고니스까지 찾아가서 난동을 부려야 한다.
몽마의 특질을 이어받은 후손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뭐 사실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아서 후손을 찾는 것은 나중에 시간이 남았을 때나 하려던 것인데, 애석하게도 정말 우주멀리 사라져서 나중에 후레쉬맨으로 되어 돌아오는 게 아닐지 더 걱정스럽다.
루니아 누나의 경우에는...
무지개 푸드라던가 약에 저항이 없는 후손이 나타나겠지.
“주인? 그러니 후손을 이곳에서 만들고 미래지향적인 자산을 만드는 것이 좋지 않는가?”
“냥캣에게만 허용할 수 없습니다. 마스터 저에게도...”
“기다려! 잠깐만! 둘 다 진정하세요!”
나는 어디 공룡테마파크에서 나올법한 자세로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흔들의자에 앉아서 레시아와 시나를 다른 곳에 앉혀놓고는 양팔을 벌리면서 두 눈을 마주보며 진압하고 있는 사이에, 지금쯤 은팔찌를 얼마나 차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내고 있을 때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에요.”
“하지만 사랑에는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은팔찌라면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짐이 더 위험하다.”
“그러니 마스터는 안전합니다.”
“뭐가 안전해! 제 3자가 보면 위험하다니까!”
후손은 궁금하지만 레시아와 시나의 현재모습은 상당히 위험하니까, 오늘도 전력을 다해 저 두 명과 말씨름을 해야만 했다.
=============================================================================================
로스트 아크 하다가 늦었어요.
이제서야 루테란 에피소드는 다 끝났고 해적때려잡으러 가는...
'취미로 글쓰는 중?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07 (0) | 2017.09.23 |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06 (0) | 2017.09.21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04 (0) | 2017.09.17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03 (0) | 2017.09.15 |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02 (0) | 2017.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