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472
472
작전상 후퇴라는 단어가 내 입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상대해야 하는 적이 미지의 생물인 뱁새인간이었으니까. 지금은 3명도 제대로 제압할 수 없는 가운데에 내가 돌아가보니, 거대한 T-렉스가 검은색 그림자에 뒤집어 씌워진 체 난동을 부렸다. 여기에는 분명 공룡이 멸종한 걸 뛰어 넘어서 보이지도 않는 생물인데, 한쪽 전선은 거의 쥬라기인지 백악기인지처럼 되어버렸고, 다른 한 곳은 몬스터들이 모두 그림자에 잠식이 되어 붉은 눈만 살벌하게 띄고 있었다.
마왕군의 30만과 바퀴벌레보다 많은 용사들이 합쳐져서 그 군세를 막아내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처치를 해도 그림자 속에서 다시 튀어나온다는 소리였다. 이렇게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한데, 밤이라도 되는 순간 끔찍한 악몽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선에는 시나가 필요할 지경이고, 검은 존재는 전선을 넘어 계속 세계 각국으로 뻗어나가고 있었으니...
“그렇다고 사람의 그림자를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대로 가면 하루도 못 버틸 거야. 생각보다 가장 극단적인 해결방법이 필요할지도 몰라.”
말하자마자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바라보니, 시나의 올빼미 눈이 무언의 압박을 담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말만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내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말은 안 했잖아.”
“아뇨. 마스터라면 결국 저희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마리아와 릴리스를 찾아가는 거겠죠.”
“마리아와 릴리스를 찾는다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아리엘의 의식세계로 가서 침식되지 않게 하려는 속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스터의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재워서 검은 존재의 먹이를 제공하고 있는 행동부터 막으실 거니까요.”
시나마저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라면 소용없겠구나. 잘못되면 개죽음을 당할 수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켈모리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상황에서 아리엘을 봉인하지 못했다는 소리라면, 어디선가 기회를 엿보고 있거나 자신마저 당했다는 소리일 텐데. 시나가 안리아스의 수정구로 과거를 녹화했으니, 저곳이 싸우던 말던 잠깐 동안 휴식을 취하도록 하자.
“어이. 주인. 지금 전투하고 있는데 그걸 보고 있는 여유가 있는가?”
레시아가 붉은 말 위에서 검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지휘를 하고 있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뭐라 하려다가, 상황이 급박하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대신 가슴을 태워가는 어처구니 없는 기분은 한숨으로 승화하겠지.
“명확하게 알아야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붉은 말은 어디서 구한 거에요? 만약 그게 여포가 그토록 찾고 있던 적토마라면 정말 가만 안 둬요?”
“묵시록의 기사 중 전쟁<War>에게 빌린 거다. 안심하거라.”
“전쟁의 기사? 그 4명의 기사요?”
7개의 죄악과 묵시록의 기사. 그리고 때에 따라 칭하는 번외적인 직위가 1개이니까, 12마계공작이 전부 참여한 건가? 자세히 보면 적토마가 아니라 피로 칠한듯한 가죽과, 탄탄한 근육 위에 판금으로 된 갑옷을 입혀준 상태. 눈에서는 살의가 가득 차고 이 말은 왠지 사람을 뜯어 먹을 것 같은 공포심을 유발했다.
“어...그렇군요. 뭐 어쨌든 지금은 레시아도 같이 이걸 보도록 하죠.”
마법학원 안에는 찍히지 않았으니 그 주변에 있는 환경은, 아무런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는 모습. 그 이후에는 아리엘이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검은 날개가 펼쳐지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아리엘이 각성하기 전에는 마법학교 쪽에 결계가 펼쳐지지 않는 것을 보아, 지금은 켈모리아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상황.
“지금 의식을 잃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올빼미가...아니, 비둘기가 말한 것처럼.”
“잠깐만요. 냥캣. 제대로 부르다가 일부러 틀리게 부르는 이유는 뭡니까?”
방금 전에 제대로 시나의 모습에 대해 맞췄지만, 정정을 하면서 다시 비둘기로 말한 레시아는 시나의 항의를 무시하고 질문에 답했다.
“검은 존재 밖으로 벗어났을 때는 침식이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회복하고 있었으니 마법 기동반에 있는 자들은 모두 안전하다. 하지만 퍼지는 속도를 보아하니 이곳 전체를 뒤엎는 것은 앞으로 하루 정도 남은 것 갔노라.”
“그래도 켈모리아가 펼친 그 결계 안에는 검은 존재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고 있어요. 그러니 켈모리아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고 보면 되죠. 어쩌면 애석하게도 켈모리아를 살려놔야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거나. 생각을 해보니 그녀는 엘티노스를 뛰어넘는 영웅이 되고 싶어했으니, 지금 이 상황에서도 영웅놀이를 할지도 모르겠네요.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나고 싶어 할 테니, 세피르로 추정되는 검은 존재가 이 세계를 모두 뒤엎는다면 해결하러 나설지도?”
“하지만 이 검은 존재에서 태어난 괴물들은?”
“그건 아리엘이 생각으로 창조해낸 괴물들이겠죠. 정확히는 생각 속에 있어야 했던 괴물들이 다른 차원에서 뽑혀 나왔지만, 이 세계로 강제소환 된 터라 형체가 아직까지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걸 거에요. 마침 저기에 몽골리안 데스웜처럼 보이는 거대한 지렁이가 땅 밑에서도 나오고 있으나, 제대로 구현되지 않아서 전부 검은 그림자로 덥혀있는 상태에요.”
검은 고양이가 저 멀리 둘러보고는 다시 한번 이야기를 했다.
“그럼 저들은 아직까지 짐이 통솔할 수 있다는 소리로군?”
“네?”
아. 마왕은 마물들의 왕이라서?
“냐아아아아아아앙!”
고양이 목소리에서 울려 퍼지는 충격파를 0.2초간 듣고 곧바로 귀를 막기 위해 손이 올라갔다. 어처구니 없게도 지금은 마신이 있어도 검은 존재 안에서만 통제가 가능한지,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의 경우에는 모두 카멜롯으로 사라지듯 되돌아가고 있었다.
“역시나 짐의 예상대로다. 이 세계에 넘어오면서 모든 몬스터들의 통솔은 짐이 붙잡고 있으니 말이지. 하지만 카멜롯으로 가면 짐보다는 더 위에 있는 존재가 통제권을 붙잡는 모양이다.”
“그럼 레시아는 저 안에 들어가면 마신의 부하로 들어가게 되는 건가요?”
“짐과 주인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데, 저런 마신의 밑에 들어갈 것 같은가? 이미 짐은 주인의 남편이자...”
“아내겠죠...”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나와 이미 사역마로 계약 되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마신이 레시아를 통솔할 수 없고 나만 할 수 있다는 거니까. 페어링이 이어져있는 동안에는 마신과 더불어 레시아까지 난동을 부리지 않는다는 소리.
계속해서 안리아스 수정구를 보고 있는 동안, 다른 지역에서 거대한 흙먼지와 함께 검은 괴수들이 모조리 카멜롯으로 향했고, 안리아스 수정구를 해독한 결과는 전혀 좋지 않았다.
“결국 마법학원 안으로 들어가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거 같네요. 아리엘이 카멜롯으로 돌아오고 있는 모든 괴수를 재우길 바라면서, 마리아와 릴리스에게 꿈의 미로로 사람들을 전부 집어넣으라고 해주세요.”
“하지만 그곳은 서큐버스들이 사람들의 의식을 납치하는 곳이 아닌가?”
“생명체들이 잠에 빠져들면 검은 존재는 그 생명체의 몸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갉아먹는 거라고 보고 있으니까요.”
“증거는?”
“제가 멀쩡하게 깨어있었을 때는 침식을 안 당했잖아요.”
결국 몸이 검은 색으로 물들이는 그 작업은, 사람들의 의식이라고 해야 할지, 영혼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영적인 에너지가 약해지면서 침식한다.
“주인의 안일한 생각 때문에 상상하지도 못하는 변수에 당하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그럼 그때 생각하는 걸로 하죠. 살아있는 한 언제든지 변수는 만들어지니까.”
“그 변수에 죽으면 어찌할 것인가? 주인은 아직 짐의 의뢰를 받아야 하지 않는가! 같이 짐의 선생님을 찾기로 한 그 일 말이다.”
“그 사람 할아버지 되어있어서 죽어있을 지도 모르는데, 굳이 찾을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그야 당연하지 않는가. 짐과 주인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단 말이다.”
과거에서 내가 레프리시아에게 너무 강한 이미지를 보여준 부작용이, 현재에 이르러서 나타나게 된 것일까?
-구그그그그그...
“레시아. 묘한 울림이 하늘에서 들리지 않아요? 마치 대기가 울고 있는 소리인데?”
“주인이 카린으로 변하니 그런 쓸 때 없는 소녀감성적인 말이 나오는 건가?”
“제가 말하는 게 다 쓸 때 없다고 하기 전에 좀 들어보기나 하세요.”
설마 레시아의 목소리가 저 우주 밖에 나가는 경우는 없겠...
“주인? 저 하늘에 있는 커다란 눈은 무엇인가?”
“아. 잊고 있었는데 아마 달에서 대치하고 있었던 괴수인가 보네요. 이제 저게 추락이라도 하게 된다면, 어디서 많이 보았을 법한 멸망시나리오를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 그대로 운석이 이곳으로 충돌하는 기괴한 장면임과 동시에, 마신이고 뭐고 초고속으로 모든 생명체가 종말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진귀한 장면 말이지.
“저거라면 루나가 알아서 해줄 것이니라.”
“알아서 해준다고요? 저 운석처럼 떨어지는 괴수를 무슨 수로 격퇴할 생각이에요? 하늘에서 빛 줄기라도 내리지 않는 한 저건...”
-콰아아아아아앙!
오늘 정말이지 바보 같은 소리를 한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괴수의 중앙을 뚫고 갈갈이 찢어버리는 광선 하나가 지상으로 내리 찍히자 마자, 거대한 폭발과 함께 카멜롯의 일부 땅덩어리를 등분시켜버리는 파괴력을 보여줬다. 완전히 땅이 녹아 내리면서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는 붉은 땅을 보며, 저 하늘 위를 바라보았지만 저 멀리서는 루나가 미소를 짓고 있을 거란 모습에 소름 끼치기 시작했다.
달 토끼의 기술력은 대체 어디까지일지.
“하늘에서 광선이 내려온 것을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마스터.”
“헛소리였는데 그게 진짜로 되어버린 거야. 생각만 하면 이루어지는 그런 편리한 것이 아니니 그렇게 우러러보면 안 돼.”
하얀 올빼미가 내 왼쪽 어깨에서 점점 얼굴을 들이밀며 부담감을 주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올빼미의 이마를 살짝 두드려서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 거대한 괴물이 깨져나간 후유증으로 작은 별똥별이 되어 사방에 흩어지고 말았으니, 나중에 저 조각을 모아서 구슬로 완전히 완성시키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 당사자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리 찍어버려야지.
아니! 바보 같은 일은 이제 그만 생각해!
현실이 되면 어떻게 하려는 거냐! 카일!...지금은 카린을 외쳤어야 했던가?
“그래도 한시름을 놨으니 다행인가...가장 커다란 적을 격퇴했으니까요.”
“격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일시적인 조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그림자 괴수들은 어디선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나타나니, 짐이 가장 골치 아픈 이유 중에 하나이니라. 그러니 엘티노스가 말한 그 아이언 메이든인지 동상인지 하는 것을 직접 받아온 뒤에, 아리엘을 가둬놓는 것이 현명한 방법인데...주인은 설마 그것에 대한 작전을 안 세웠다고 하지는 않겠지?”
의심의 눈초리로 붉은 눈을 지닌 고양이가 쏘아봤지만, 거기에 위축되지 않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당연히 다 세웠죠. 제가 미끼가 되어서 아리엘과 같이 그 동상에 들어가면 될 겁니다. 다만, 제가 없을 때 폭주해버리는 검은 존재를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달렸죠.”
그 태연한 말 한마디에 레시아와 시나의 눈초리가 더더욱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시나의 작은 목소리로는 “결국...마스터는 무리를 하는 제안을 생각하신 건가...”라며 한탄해 하고, 검은 고양이는 말 없이 나에게 어퍼컷을 휘두르기 위해, 마기를 오른손 고양이 앞발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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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그라운드 하느라 늦었어요.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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