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417
417
의혹은 항상 남아있다.
크리자리드가 죽기 전에 했던 그 말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아직까지는 섣부르게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비니스 여신을 거론한 말에 대해 깊은 심연에 가라앉듯 조용히 생각만 하고 있었다. 깊게 빠진 이 생각 속에서 계속 머물면서, 이것마저도 검은 높새바람이 꾸민 일인지. 아니면, 정말로 흑막에는 비니스 여신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지. 확실한 물증도 없는 상황이니까 진실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다고 천계에 오랫동안 살 수도 없는 일이고,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상대방에서는 노련하게 알아차리기 마련, 본래의 성별인 남자로 다시 돌아와서 나의 뇌에 채찍질을 가하듯 추측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또렷하게 정확한 가설이 나오지는 않았다.
“주인. 벌써 5시간째 그 자세에서 생각만하고 있지 않는가? 그만 저녁을 좀 먹거라. 오늘은 짐과 주인의 딸아이까지 돌아와서 진수성찬으로 준비했다고 루시피나가 말했노라.”
“카렌은 저와 레시아 사이에서 나온 딸이 아니잖아요. 1시간정도만 더 생각을 하면 되니까 먼저 드시고 계세요.”
힘없는 발걸음으로 돌아가고 있는 레시아는 “그 말만 5번째 중이지 않는가...”라고 작게 중얼거리면서 식탁으로 돌아갔다. 이토록 신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손에 붙잡혀버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한 경우도 있지만, 빈틈을 보인 나를 용서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먼저 신분에 대한 정밀조사가 확실해야 했는데.
“나는 대체 뭐에 홀려서 그런걸 못한 걸까.”
중얼거리며 거울 속에 있는 나에게 질문을 던져봐도, 돌아오는 것은 무거운 분위기가 짓누르고 있는 현실뿐이었다.
“차라리 과거로 갈 수만 있으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있을 텐데.”
아직까지 시공간술사의 등급이 낮아서 과거로 갈 수 없는 사실 때문에, 내 머릿속에서 스펀지라도 가득하게 채워나가고 있는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알아내야 할 것은 상당히 많은데, 알아낸 것조차 사실인지 거짓인지 검증까지 해봐야 하다니? 이 의심병은 대체 어디에 숨어있다가 내 몸에서 발병했는지 한숨만 계속해서 쉬고 있었다.
“마스터. 조금이라도 식사를...”
“아주 조금...뭐해요? 다들?”
아직 1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기에 시나에게 고개를 돌려서 대답을 하려고 할 때. 모두가 나에게 불쌍한 강아지 눈처럼 슬픈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 기세에 당황한 나에게 카렌은 무작정 팔을 잡아당겨서 소리쳤다.
“아버지! 저녁이나 먹어요! 좀! 밥을 먹어야 생각을 하던 말던 하죠!”
“늘 말해왔지만 제발 내 나이에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그만둬줄래? 남들이 보면 사이가 좋은 남매로 보고 있단 말이야.”
“아이니스가 아저씨라고 부르잖아요!”
아이니스를 들먹여가며 아버지라는 호칭을 꼭 사수해야 할 필요까지는 있을까? 아무튼 나는 백기를 드는 심정으로 식탁에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 먹으러 간다. 저녁이나 먹고 편하게 잡화점을 열 준비를 해야지.”
과거로 가는 것에 대해선 페어리들의 정점을 찍은 여왕인 티아에게 물어보도록 하자. 나머지는 티아에게 물어본 뒤에 생각을 하던, 행동으로 옮기던 그때 결정하기로 마음을 먹으니 속이 좀 풀린 기분이었다.
저녁을 모두 먹은 이후에 레시아는 검은 고양이인 상태로 육포를 씹고 있었는데, 육포를 먹어가면서도 나에게 말을 거는 것으로 보면 의외로 할 말이 좀 많이 있나 보다.
“주인은 어째서 진실을 찾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방해하는 적에 부수는 것만 집중을 한다면 일이 손쉽게 끝날 텐데.”
“그렇다고 잡화점 멤버가 두 팔 걷고 나서서 지도 하나가 지워지는 것은 바라지 않거든요. 게다가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풀어나가서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주인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좋은 결과인가!”
레시아는 오랜만에 나를 향해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생각을 한다면 팔, 다리를 부러뜨리고 당장 마왕성 안에 가둬놓을 것이다! 전에도 죽을 뻔했으면서 뭐 하러 이런 일에 대해 목숨을 걸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노라! 확실히 주인이 신중하게 나아가는 것으로 수 많은 사건을 해결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과는 전혀 다른 규모다. 만약 잘못된 의심으로 띄우려는 시도를 한다면, 천계에 있는 존재들이 전부 주인의 적이 되는 것을 왜 모르는 건가!”
“그때는 잡화점 멤버를 믿고 가는 거죠. 저는 잡화점 멤버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놔두면서, 다른 사람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저 혼자서 의뢰를 해결하려는 성격에 대해, 바보같이 성실하다거나, 착하다고 말하거나 생각을 하지만, 저는 항상 비장의 카드를 남겨놓는 사고방식 때문에 혹시 제가 잘못된다고 해도, 그것을 발판 삼아 다른 사람이 해결할 수 있게...”
“비장의 카드를 위해서 자신이 소비되면 그게 무슨 궤변인가!”
레시아가 호통을 치고 있었을 때. 옆에 있던 시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상황만 보고 있었다. 천천히 가라 앉고 있는 분위기와 침묵에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와중에...
-끼이익!
“매지컬 루니아! 등장!”
분위기는 개나 줘버린 루니아 누나가 이상한 마법봉을 들고 나타났다. 포근하게 웃는 얼굴로 “어라아? 왜 다들 침울해져있어요오?”라고 말을 걸어왔고, 검은 고양이는 화풀이 하듯이 육포를 강하게 씹으면서 아까의 말 싸움은 없던 걸로 하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루니아 씨. 마스터가 여전히 자기 자신을 희생하려고 합니다. 마법의 힘으로 버릇을 고쳐주세요.”
시나도 뭔가 쌓인 게 많았는지 루니아 누나에게 의뢰를 하듯 말을 걸었고, 루니아 누나는 약간 화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카일? 정말이에요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서 “저는 잠깐 생각할 게 있으니 이만...”이라는 말과 함께 그 거북한 자리에서 떠나려고 했지만, 나의 어깨를 눌러서 식탁 앞에 강제로 앉혔다.
“누나가 동생을 혼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아. 도망가면 안 되죠오?”
“어째서 그게 당연한 일인데요?”
“모의전투방으로 따라오세요오.”
루니아 누나는 따라오라고 말했지만, 내 팔을 붙잡고 끌고 가고 있기에 말과 행동이 살짝 모순되었다. 게다가 루니아 누나뿐만이 아니라 카렌과 루시피나, 레시아, 시나까지 전부 따라 들어가서 관전하려는 속셈인가보다.
“오늘은 카일에게 내리는 벌인 만큼 각오해두세요오?”
“벌이라니? 저는 잘못한 거 없는데요?”
“여전히 카일은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으니까요오.”
내가 날 얼마나 잘 아끼는데? 평화와 평온이라는 그 두 단어를 위해서 살아가니까.
“그것도 있고, 카일은 요즘 마법에 너무 의존한 것 같아요. 그러니 검으로 상대하도록 할까요오?”
“그걸로 제가 검사의 길 등급을 올릴 수 있을까요?”
“그건 카일의 노력에 따라 달렸답니다. 다만, 저는 카일에게 상대한 것처럼 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적을 상대하듯이 다루도록 할거에요오?”
그렇다는 의미는 0.3초 안으로 내 몸이 잘려나갈 수 있다는 소리잖아!
급하게 시공의 눈을 개안하고 나서 어느 사이에 날아오는 시퍼런 검날을, 허리를 이용해 뒤로 젖히면서 피하고 다시 눈을 닫았다. 루니아 누나의 미소 속에 걸려있는 붉은 두 눈은 오로지 적을 죽이겠다는 소름 끼치는 살기. 진심을 보이는 루니아 누나의 검은 보이지 않아도 이미 휘두르고 있었다.
티르빙을 급하게 타도로 변형시켜서 가장 위험이 되는 부분을 허공에 휘두르자, 오른팔에는 어마어마한 충격과 함께 나는 허공을 날아다녀야 했다. 넘어져도 빠르게 일어나야 다음 공격을 막을 수 있지만, 아주 조금 늦은 바람에 옆구리 쪽에 얕게 베이면서 피가 튀었다.
타오르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시공의 눈을 개안하지 않은 상태로 본능이 가는 곳마다 빠르게 3번을 휘두르며, 순간 순간 날아오는 검을 튕겨내기 시작했다. 내 제자들에게 죽을 각오로 덤비라는 루니아 누나의 모습도 강력했지만, 지금은 5번 정도 죽을 준비를 하라는 듯이 몰아붙이면서, 나에게 상처가 서서히 늘어나기만 했다.
모의전투방에 있는 잔디들은 내 피로 적셔가기 시작했고, 내 앞에 있는 루니아 누나는 호흡은커녕 땀 방울 하나도 흐르지 않았다.
“이런 무시무시한 사람하고 여태까지 잘 지내온 것도 신기하네...”
허세를 부르기 위해 내가 중얼거리는 거 하나하나 루니아 누나는 놓치지 않았다. 전장에서는 적이 약해지면 더욱 매섭게 공격하는데, 내 자리에 검을 내려찍는 모습이 눈에 보이자마자 옆으로 굴러서 피했고, 바닥이 으깨지다시피 거대하게 파여버린 땅속에서도, 다시 내 눈앞까지 도달하며 날아오는 검을 막자, 다시 무중력체험을 하듯 저 뒤로 날아가야 했다.
그렇게 숨도 못 쉬고 1시간째 날아가고, 피하고, 막고, 베이고. 차라리 날 죽여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의 지옥의 시간을 보내오면서, 손 하나 까닥할 수 없는 내 앞에서,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루니아 누나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카일은 누나가 보기에도 많이 성장했네요오. 예전에는 장난으로 대련을 했을 때는 맥없이 무너졌는데. 지금은 카일이 이를 악물고 덤비면 저도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줘야 할 정도에요오.”
“아직 저는...”
나는 뭐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타이밍이 좋지 않은 건지, 의도적으로 루니아 누나가 내 말을 끊어버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계속해서 느긋한 웃음으로 나를 보며 말을 이어 나아갔다.
“그 이상 더 강해질 욕심은 버리세요오. 우리에게 너무 멀리 떠나지 말아 달라는 말이에요오.”
“멀리 떠나간다니? 무슨 소리에요?”
영문도 모르는 소리를 들은 내가 물어보자. 검은 고양이가 천천히 다가와서 해석을 해주듯이 입을 열었다.
“주인은 강해져야 한다는 그 집착에서 좀 벗어나라는 소리다. 아니, 지금의 경우에는 여전히 버릇처럼 혼자서 우리들을 지키려는 경우겠지. 주인이 짐과 다른 멤버를 보호해준다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나, 사실상 주인이 직접 고생하지 않아도 해결될 일이 많았을 것이다.”
“나는 그리 강해지기 위해서 집착한 기억은 없어요. 나중에 그게 내가 가장 편해지는 길이니까 그런 거지. 그리고 남자로 태어난 이상 강해지려고 노력을 하는 건 본능적이라고요. 의식을 하지 않아도 결국 강해지려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거나,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혼자서 노력을 하는 게 뭐가 나쁘다고...”
잠깐? 집착? 물고 늘어져?
“여신들은 집착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루니아에게 맞더니 이제 정신까지 놔버린 것인가? 천계에 있는 자들이 아무리 고고한 자라고 해도 당연히 집착은 있노라. 창조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집착이 따로 있겠지.”
나를 너무 무시하는 발언을 내뱉은 레시아를 위해서라도 내 질문의 상세화가 필요했다.
“제 설명이 부족한 거에 대해 정말 미안하네요.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자신의 자리까지 다 내던져 가면서 집착을 할 수 있느냐?’였어요.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어간다고 할지라도, 혹은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집착을 할 대상이 있는가에 대해서죠.”
나의 말에 모두가 정지된 상태로 있었다.
“시나는 어때? 우선 여신이긴 하잖아?”
“저는 마스터만 살아있다면야 당연히...그런데 이 질문은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딱히 이유는 없어도 뭔가 가설은 내세우는 것이 가능하니까. 솔직히 이유라고 할 것 같으면 검은 높새바람을 누가 지원하고 있던 간에, 영겁의 노래라던가 ‘악신’이라고 불리는 거에 대해 너무 집착을 한다는 거지. 솔직히 그 정도로 강하면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도 될 텐데 말이야. 굳이 재창세에 목숨을 걸 필요가 있냐 그 소리지.”
검은 높새바람이 정말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는지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또 다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회복이 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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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멍하니 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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