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99
599
다짜고짜 이곳에 찾아와서 스트레스를 푼다는 마왕의 선전포고를 듣고, 마왕이 세계정복을 하다가 용사들에 의해 저지당하면, 내가 무슨 꼴을 당하게 되는 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마왕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에는 뭐가 있을까? 적어도 따듯한 차를 마시면서 심신을 달래진 않을 텐데 말이다. 기본적으로 ‘악’이라는 속성을 가진 자들의 유희라면, 생포한 포로를 고문하거나 자신의 욕망해소로 사용하는 등. 누가 보면 정말로 비인간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아. 생각을 해보니 포로를 심문할 때도 그런 경우가 있긴 하지. 그러면 마계의 유희는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행위를 일삼는다는 말이 더 모욕적일까? 어느 날 고문을 하고 있는 마족에게 찾아가서 “와! 정말 인간적이시네요!”라고 말하는 날엔, 때에 따라 그 자리에서 즉석고문을 당할지도 모른다.
음. 어쩌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왔더라?
아무튼, 지금은 아침부터 잡화점 청소를 하고 있으니 오랜만에 깨끗해지는 공간을 보며, 마음 속에 의지가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외출해서 남자로 되돌아가야지 언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있을 수 있나?
“자. 세린. 잡화점도 깨끗하게 닦고 물품도 가지런히 정리했어. 이제 밖에 나갈 테니 슬슬 성별 좀 되돌려주지 않을래?”
“안 돼.”
“이 빌어먹을 단호박 같은 녀석! 그 머리를 때고 할로윈에 장식하기 전에 바로...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이렇게 노력을 했는데...슬슬 본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서...헤헷...!”
순식간에 분노조절장애가 왔다가, 서리 빛의 싸늘한 눈동자를 바라보자마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뭐야 저 표정...무서워. 순식간에 내 등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니까?
“잡화점 밖에서도 그 모습으로 있어야 해. 이건 부탁이기보단 잡화점인 나의 명령이야.”
“내가 잡화점의 주인인데 잡화점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는 힘을 봉인한다면,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되니까 괜찮지 않아?”
“사람의 틀을 이미 부셔버리고 어떻게 사람으로 돌아올 거야? 그럴 줄 알았으면 시공간술사의 길을 걸었을 때, 너의 인간이었던 모습을 미리 백업했어야지?”
“아니, 그래도 최대 24시간 전의 나를 백업하는데, 몇 일이 지난 그 모습을 어떻게 되찾아? 차라리 외장메모리에 저장하면 모를까, 시공간술사의 길은 인간이 담기엔 너무 버겁단 말이야!”
“그건 네 능력부족이지.”
저 잡화점을 판자째 뜯어서 캠프파이어로 만들어버릴라...아침부터 혈압이 오르는 말이 오고 가는 동안 리제로트는 의외로...
“카린 씨? 아침 드세요?”
“잠깐. 카일이라고 부르란 말이야.”
요리를 할 줄 아는 아이였다. 예전에 납치한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다과회나 파티를 자주 했고, 음식은 전부 리제로트가 만들어서 나눠줬다고 했다. 그래도 사람이니까 영양분은 섭취하고 잠은 꼬박꼬박 재워야 오랫동안 가지고 논다나 뭐라나...
“지금은 카린 씨잖아요. 그러니까 카린 씨라고 부르는 건데요? 카린 씨?”
“오호라? 그렇게 3파장 스텐드마냥 디럭스 콤보를 먹이시겠다?”
“꺄아..! 귀여운 여자아이가 잡으러 온다~!”
“누가 귀여운 여자아이야! 너 거기 안 서!”
이런 취급을 받으려고 이 세상을 한바탕 갈아 엎은 게 아닌데. 이럴 때마다 자괴감이 든다. 그래도 아침에 신문이라도 와야 세상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 텐데, 어처구니 없게도 잡화점 근처에 마을은 전멸해버렸으니, 지금 남아있는 건 주둔하고 있는 고블린 때, 그리고 먹을 것이 없는지 어슬렁거리고 있는 마수들뿐이었다.
“이래서야 사람이 찾아올 일은 없네.”
프리트론 왕국으로 가볼까?
아니, 어쩌면 프리트론 왕국도 망했을지도 몰라. 만약 전쟁중이라면 더더욱 참여를 해선 안 된다. 나는 그 어느 누구의 편을 안 하기로 맹세했으니까. 맹세까지는 아니고...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래, 괜히 귀찮은 일에 끼어들어가서 생고생하지 말고, 평화와 평온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다짐.
“맞아. 더욱 더 격렬하게 이 집에서 나가면 안 돼.”
“일이나 하시지. 잡화점 매출이 아예 없어도 곤란하니까.”
지금은 자동으로 세금을 땔만한 나라는 없지 않나? 그냥 나는 이대로 자급자족하면서 살면 될 텐데?
“일이라. 그래도 위험천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 늘 그래왔듯이 의뢰를 받는 잡화점은 더 이상...”
-벌컥!
이제서야 아침 먹으러 들어갔는데 곧바로 누군가가 문을 열어버렸다. 세린과 나는 그저 당황한 눈으로 열린 문만 바라보았고, 리제로트는 먼저 먹고 있다가 포크를 입에 넣은 상태로 정지해버렸으니.
“차...찾았습니다.”
“네? 찾다니요? 그보다 당신은 그때 만났던 기사잖아요?”
그보다 잡화점 주변에 인파가 많이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을 찾은 사람은 저 기사 하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서늘한 감촉의 건틀릿이 내 양손을 감싸며 절박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성녀님! 저희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시옵소서! 이전처럼 저의 프리트론 왕국의 구원을 주시옵소서!”
이건 또 무슨 개판이야.
“아니. 저기요...일단 저 아침부터 먹어야 하는데...”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저흰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아니. 그 제안은 승낙한 것도 아니고, 저는 성녀도 아닌...”
“일전에 성녀님께서 마왕군을 혼자 괴멸하여 후퇴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여신님께서 보내신 성녀님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습니까?”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정말 잘못 꼬여버렸다.
애초에 잡화점은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올 수 있게 만들었으니, 지금 내 앞에 있는 기사가 이곳에 찾아오는 건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분명 세린이 아무도 올 수 없도록 가상좌표까지 열어놨다고 했을 텐데.
하긴. 어제 마왕이 불쑥 찾아온 것도 그렇고...
“각본가는 분명 모두 사라졌을 텐데 말이야...”
“네? 방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일단 손부터 놔야 제가 아침을 먹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중얼거림을 당신 모르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쪽 귀에 들렸으니 이 기회에 제가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제 양손을 해방시키기를 권유하는 바입니다.”
어찌 된 상황인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먹고 천천히 생각을 해보자.
갑작스러운 정보가 한꺼번에 몰려왔을 땐, 상상을 초월한 스트레스가 몰려오기 마련,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에 있어선, 잠깐 동안 쉬면서 문제를 해결할 작전을 세우는 것밖에 답이 없다.
그 잠깐 동안 쉰다는 행위는 스트레스를 줄이기만 하면 되는데, 먹는 것도 그렇고 자는 것도 그렇고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만 하면 된다.
음식을 다 먹고 허브티를 마시는 와중에도, 그 기사는 주변에 정리되어있는 물품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전부 잡화점에서 파는 물품입니까?”
“네. 이 세상에서 다양할 정도로 기괴한 물품을 파는 잡화점이지요. 다만, 저는 단지 잡화상인일 뿐. 여신이 내려준 성녀라던가 용사라던가, 저 은하 너머에 있는 걃스나 욟스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욟스?”
“아니. 이건 잊어주세요. 어쨌든 저는 신의 사도라던가, 인류의 구원자 같은 게 아니란 겁니다. 오히려 저는 이 시대를 방관해야 하는 방관자에 걸맞죠. 손님으로 와서 마왕을 퇴치하기 위해 물품을 사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제가 직접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모든 것은 용사가 스스로 나서서 마왕을 타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왕은 용사가 무찌른다.
혹은 마왕을 무찌른 자가 용사가 된다.
이런 두 가지의 전승을 보았을 때, 나는 잡화상인이니까 그저 길목에 지나간다면 포션만 싸게 처리해도 상관이 없다는 의미다. 그래 맞아. 잡화상인이 길목에 따라다니면서 파는 경우도 있는데, 생각을 해보면 마왕성 깊은 곳까지 잡화상인이 대기하면서 아이템을 파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그러니까 잡화상인은 용사보다 더 강해야 한다.
어쩌다가 이런 생각까지 오게 되었더라?
“애석하게도 마왕 레프리시아에게 벌써 6그룹의 용사가 당했습니다. 거의 죽어서 돌아왔고 살아있다고 해도 타락하는 바람에 마왕군에 붙어있거나,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이 많아요.”
설마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세계를 멸망시켜버리겠다고 직접 움직이고 있으니,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일지도...
“그러니까 마왕성 전체를 날려버릴 만한 위력을 가진 용사 6그룹이 전부 날아갔다고요?”
“마왕 레프리시아는 뛰어난 통찰력과 치밀한 전략을 선호하는 마왕입니다. 저희가 마왕의 군세를 막을 때, 마왕성을 공략하려고 하면 어느 사이에 정예부대를 이끌고 돌아와서, 용사들을 전부 공격하죠.”
아니, 마왕의 핵심 간부들이 다 살아있는데, 그걸 처리하지 않고 다짜고짜 빈집을 공략하려고 했으니 다 망해버리잖아. 마계 12공작은 그냥 폼이 아니라고?
군고구마 동시에 16개정도 집어넣다가 속이 막혀버린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내 오른손이 자동으로 이마에 대고 고래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전략부터 다 잘못 되었어요. 도대체 용사가 무능한 건지 용사에게 명령을 내리는 칸포리우스 제국이 무능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기본적으로 핵심세력은 자르고 기습작전을 펼치는 건데, 그걸 다 무시하고 사지로 내몰아서 용사가 다 당했다는 소리밖에 안 들린 나는, 한심함이 가득 찼으나 어떻게 보면 그거야 말로 승부수라고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전선에 나가있을 때 빈집을 털어버리는 건 기초전략이지만, 상대는 마왕 레프리시아. 이미 통찰력에는 따라갈 수 없으니 모두가 다 당했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통찰력이 뛰어나다는 건 그 용사그룹은 어느 것이 강점이고 약점인지 다 파악한 모양.
“제국은 그리 무능하진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것도 하나의 전략. 하지만, 마왕 레프리시아는 그걸 뛰어넘는 괴물이었습니다. 오히려 역으로 이용해서 용사들을 전부...”
“뭐. 생각해보니 그렇게 되기도 하겠네요.”
애초에 나란 존재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은 모순적인 존재이지만, 그거마저 변수로 인지하고 나를 쫓아 마왕군을 이끌고 돌아올 정도다. 이렇게 보면 레프리시아에게 초인적인 감각이 달려있거나, 아니면 엔티티가 속삭여줄지도 모르지...
“엔티티는 뭔가요?”
“남의 독백을 함부로 읽는 게 아닙니다.”
뭐냐? 내 독백은 아직 이름도 알지 못한 기사에게까지 보이는 값싼 녀석인 거야? 언제부터 내 가치가 그렇게 떨어진 건데? 하긴 지나가던 잡초마저 읽을 수 있는 게 내 독백인데...
“결과적으로 남아있는 용사가 없다는 건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이제 저희들에게 있어서 마왕을 토벌할 힘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성녀님.”
“아니. 전 성녀가 아니라니까요.”
“그럼 여신입니까?”
“여신 찾을 거라면 천계로 가란 말이에요!”
말을 듣지 않으니 소리를 치게 되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내 앞에 있는 기사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엎드려 사과를 하고 있었다. 마왕 레프리시아가 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도 그렇고, 그걸 막고 평화를 되찾는 것도 그렇고, 애초에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거늘...
“아무래도 조율은 필요할 거 같은데요? 카린 씨?”
조율이라는 단어가 내 귀에 걸렸다. 리제로트의 단 한마디가 분위기를 다짜고짜 부셔버린 것.
“애초에 전쟁이라는 것은 양국이 모두 발전하는 단계를 뜻하잖아요? 마왕이 너무 우세하니까 그 반대쪽으로 붙어서 균형을 맞추면...”
“우리가 붙어봤자 마왕 레프리시아를 막을 수는 없어.”
세린이 직접 출동한다면 모르겠지만...딱 잘라서 거절의 표시를 날렸다. 각본가가 사라지기 전, 레시아와 함께 행동했을 때는 빈틈이라던가 변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그렇다면 용사와 같이 행동하시지요.”
뭐야? 용사가 있었어?
“제 7그룹을 편성하는 중인가보네요? 그 사이에 제가 참가하라는 말씀입니까?”
“지금 살아있는 용사를 죽게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프리트론 왕국의 주민들이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는 이유는 성녀님의 숭고한 희생도 있었지만, 용사의 존재가 그곳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숭고한 희생이라니...저 아직 안 죽었거든요?”
“실례했습니다. 성녀님의 아름다운 희생이...”
“희생이란 단어 좀 빼고 말해주시겠어요!”
대체 누굴 희생해서 오벨리스크의 거신병을 소환할 거야?
머리를 식히고 생각을 해보면, 애초에 이 사건에 나설 수 없는 몸이니까. 지금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는 이런 귀찮은 일에 직접 나서서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만 돌아가주세요. 그 제안은 승낙할 수 없네요.”
“어, 어째서입니까?”
귀찮아서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도 없고, 이들에게도 계기가 되는 한마디는 던져놔야겠다. 내 말은 절대 거짓이 아니면서도 살짝 일을 커지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한 마디라면...
“사실, 전 마왕에게 노려지고 있어요. 머지않아 마왕의 부인이 될지도 모르죠...”
살짝 어두운 기색을 하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시선은 땅바닥으로 약 45도로 내렸다. 이 정도면 내 입장은 ‘사연이 많은듯한 사람’으로 보이겠지. 애초에 마왕에게 노려지고 있는 말은 사실이고, 마왕의 부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도 사실이다. 마왕 레프리시아의 입장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신부로 취급하는 기이한 가치관이 있는데, 그 기발한 발상은 왜 이전에 있던 레시아와 같은지 모르겠다.
“그러니 저는 용사그룹과 이동한다면 언젠가 배신할 운명이라는 겁니다.”
지금의 말은 가정을 통해 나를 절대로 용사그룹에 데려가면 안 되는 이유를 명확하게 집었다. 아무리 내가 성녀든 여신이든 뭐든 간에, 용사를 배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로 데려가지 않겠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제서야 납득을 하는 건가...
“그럼 제가 이곳에 용사를 불러오도록 하지요.”
“네? 아니. 그럴 필요가...”
“그럼 나중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결심했다는 듯한 행동은 거침없이 잡화점 밖을 빠져나갔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곳에 용사를 불러서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진다면, 잡화점 문을 잠가버려야 하나? 아니면 잡화점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야 하나?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데 이번 일을 받아들이면 마왕 레프리시아가 토벌되기 전까진 끝나지 않을 테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꼬였지...”
“자업자득이네요. 카린 씨가 이상한 말로 사람들에게 오해하게 만드니까 그렇죠.”
옆에 있던 리제로트를 마법으로 날려버리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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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왜 줄지 않지...?
어째서 쌓여만 가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