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93
593
이 시공간을 의심했던 순간은 언제부터일까? 그건 후손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후손이 어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300년이 지난 이후 나의 자손이 어찌 생겼는지. 그리고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유전적인 경우를 뛰어넘어 300년이 지나도 내가 아는 사람은 대부분 살아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과거로 돌아갔다면, 300년 이전에도 레시아의 행방이나 다른 이들의 흔적을 찾았어야 했지만, ‘일기장’이라는 수식어 하나만으로 이곳의 시공간이 안전하게 지나왔다고 볼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레인이 일기장을 보고 있다는 시점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다.
분명 레인은 일기장에 적혀있는 내용대로 수행할 것이고, 나는 그 내용을 모르고 그 일기장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되는 일. 결과적으로 그 일기장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레인은 리제로트를 죽이는 걸 포기했다.
“후손과 내 일기장이라는 타이틀로 이곳에 오랫동안 발을 묶거나, 정해진 미래대로 나조차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 도달할 때까지라...과연, 내 사고방식은 역시 인간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 혹은 다시 돌아올 거란 것도.”
“그럼. 저란 존재도 가짜인가요?”
“아니. 그건 아냐. 이 시공간 자체를 창조하고 생명을 만들었으니까, 가짜는 아니지만 이곳에 날아든 잡화점 멤버를 제외하곤 생사여부는 레이베리아에게 달려있다는 거지. 그걸 따져봤을 때, 레인이 살고 있는 잡화점에 일기장은...단순히 레이베리아의 각본에 불과하다는 소리가 되는 거고, 이 여신은 결국 방구석에서 내가 스스로 자멸할 때까지 볼 생각만 했다는 거야.”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군. 언제까지 자신의 각본에 맞아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걸까?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창조된 시점부턴 이미 가짜는 아닌데, 과거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 너를 증인으로 사용할 수 있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과거로 날아갈 거야.”
“좋군요. 과거로 간다니. 제 기억 속에 있는 과거가 맞는지, 아니면 당신의 추측대로 이것이 전부 조작된 것인지 확인해보겠어요.”
동의는 얻었다.
그러면...
“히드라. 힘을 좀 나눠줘야겠다.”
내 왼팔에 잠들어있는 사슬에게 외쳤다.
[과거로 가기 위해 나의 힘이 필요하다는 건가?]
“별거 아냐. 과거로 가기 위해선 네가 좀 같이 움직여야 하거든.”
생각을 해보면 시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게 있지만, 어째서인지 내가 스스로 사용하지 못하고, 남에게 꼭 힘을 빌려서 가야 하는 슬픔. 나중에 스스로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봐야겠다.
“다양한 시공간과 평행차원에 퍼져있어도 하나인 존재잖아. 월식이란 건 그런 거 아냐?”
[그렇군. 종족의 특성을 이용해 이 차원의 과거로 갈 생각인가?]
“맞아. 제대로 이해했으면 빨리 진행하자고. 방해꾼이 찾아오면 내일 가야 하니까. 귀찮은 일은 오늘 안에 끝내놓고 잡화점 운영을 해야, 다음날에도 일찍 일어날 수 있어.”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기엔 좀 무리가 있어도, 마음의 평화라는 건 별도의 문제니까. 사슬이 자기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원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9개의 쇠사슬 끝에는 단검이 허공에 박히기 시작했다. 박혀있는 장소에 마법진이 나타나면 꽤나 멋있는 연출일 것 같지만, 블랙홀처럼 검은 원형의 공간만 나타날 뿐.
“자. 과거로 가자. 어찌 되어먹었는지 확인하자고?”
자연스럽게 리제로트를 인도하며 발을 앞으로 향했다. 이러니까 이상한 나라로 끌어들이는 토끼처럼 느껴지는데? 아니, 그래도 하트 여왕은 안 나오니까 상관 없나? 어두운 공간은 얼마든지 걸을 수 있고, 우리의 목적지가 나올 때까진 무조건 걸어가야 한다. 뛰어가든 날아가든 상관은 없는데, 언제까지 가야 할지도 모르는 그 길을 뛰고 날다간 쉽게 지쳐버리니까.
그리고...
“제, 제발...좀 천천히 걸어요...”
“월터에게 업어달라고 하던가? 얼마나 체력이 안 좋으면 고작 15분정도 걸었는데 지치는 거야?”
“당신은 3보 이상 자동차 몰라요?”
“너의 장래가 심히 걱정된다.”
세상에 리제로트가 먼저 만담을 열다니. 심리상태를 꿰뚫는 건 아니지만, 나와 있으면서 경계를 하는 모습은 많이 풀어졌다. 물론 월터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면도날처럼 날카롭기 시작했지만...
“그런데 이 공간은 뭐죠? 위험하지 않나요?”
“당연히 위험하지. 날 놓치고 다른 길로 가면 시공간적으로 미아가 되어버려서, 찾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니까.”
“당신은 어떻게 이 길을 잘 알고 있는데요?”
“내 왼팔에는 이 공간을 열어준 존재가 있어. 그 존재를 믿고 따라가고 있는 거야.”
[그래도 이 몸이 만약 그대를 다른 길에 방황하게 만드는 함정을 팠다면?]
[만약 그러면 넌 레시아와 시나에게 맞아 죽는 일 밖에 없어.]
대부분 주인공들은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매우 강하거나 강해지는데, 나는 왜 아무리 강해져도 주변에서 보살핌을 받는 걸까? 정형적인 클리셰 중에 여주인공이 맨 처음에 남주인공을 지켜주다가, 남주인공이 각성하고 강해지면서 거의 마지막쯤에는 여주인공을 지켜주지 않는가?
근데 나는 아무리 강해져도 아직까지 초반부마냥, 레시아와 시나 이외에도 잡화점 멤버들에게 지켜지고 있다. 맨 초기에는 혼자 구르면 거의 반은 죽어서 왔어도,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오히려 잡화점 멤버들에게 반정도 죽는 일이 더 많다.
그 바보 같은 백장미만 아니었어도...
“과거로 가서 충격이나 받지 말라고. 처음 보는 과거에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서슴없이 하는 바보 같은 녀석이 아니길 빌어야지.”
“과거에 가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뇨?”
“너는 그 영화도 안 본 거냐? 자동차 타고 과거로 갔다가 본인이 사라질 뻔했잖아. 다행히 해결책을 찾고 겨우겨우 미래로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그 영화는 마지막에 미래가 바뀌었잖아요?”
솔직히 그 영화가 지금 시대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째서 이렇게 잘 아는지 금시초문이다. 본적도 없는 지식이 마음대로 흘러 들어오는 일은 이렇듯 좋은 일은 아니다. 아무튼...
“슬슬 다 왔는데.”
기나긴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고 처음 본 광경은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진짜냐? 이 상황?”
모든 땅이 전부 메말라있었다. 그 누구도 없고 생명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을 무렵. 언제부터 이 일이 계속 진행되어왔을까?
“내가 너무 과거로 돌아와서 이 땅이 이렇게 된 건가?”
이 땅에 있는 모든 존재는 창조가 되었는지, 적합한 환경에 의해 진화를 한 것인지에 대해, 이 세계는 창조와 진화를 반반 섞어버린 닭마냥, 물을 만들고 산소를 만들고, 태양빛에 보호하는 오존층대신 다른 보호막을 씌웠다.
“레이베리아는 없나 보네.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망해버린 세상은 이런 거야. 그보다 이곳 시간대가 언제야? 내가 왜 이런 꼬맹이와 같이 어린 왕자를 찍어야 하는데?”
“제가 꼬맹이가 아니라 당신이 늙은 거에요. 어린 왕자는 또 뭐에요? 당신이 왕자라고 말할 정도로 젊기라도 해요?”
“아직 젊어! 아직 20대밖에 안 됐어!”
“거기에 300은 추가로 붙여야 하잖아요!”
“300을 왜 붙여! 스파르타냐!”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무렵. 이곳의 현재시간을 알아보기로 했다. 레시아와 시나가 있으면 더 정확한 측정이 가능했겠지만, 지금의 내 능력에도 대략적인 결과값을 찾아낼 수 있으니, 잠깐만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뜨자. 내 시야 위에 13자리 정도 숫자가 나타났다.
“내가 아까 있던 곳과 상대적인 숫자를 알려줄래...”
내 혼잣말이라도 들었는지 순식간에 줄어드는 숫자. 최종적으로 줄어든 숫자를 보며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게 5년전의 파이론이라고?”
“5년전?”
모든 이들이 5년전이 모두 사라졌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데? 뭐, 무슨 일이 있는지 그리 궁금하지 않지만, 확실히 재창세가 되기 전에 모두가 사라졌다.
내가 넘어가버린 세계는 결국 5년만에 만들어진 가짜란 소리다. 아니, 가짜 세계는 아니지만, 나를 속이려고 만든 세계니 내 입장에선 가짜.
“그래서 이 세계는 왜 다시 만드는 거지? 너의 각본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무조건 다시 부수고 만드는 건가?”
허공에다 외치는 듯한 내 소리는 방향을 정확하게 찾아 날아갔다.
“레이베리아!”
“결국 잡화점의 주인은 이곳까지 찾아온 건가?”
“결국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 보니 내가 지금쯤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나 보네?”
4쌍의 날개는 대체 뭘 의미하는지 이제 기억이 잊을 정도, 여신이라는 태그가 붙으면 보통 인간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압도하지만, 그건 일반인이나 신앙심이 가득한 사람의 경우다.
“모든 건 멸망했어. 이런 미래는 원하지 않았지. 각본에 쓰여지지 않는 멸망의 시. 잡화점의 주인. 그건 모두 당신 때문이야.”
“나 때문인지 아닌진 잘 모르겠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경우는 머나먼 미래의 일이니까.”
아무리 봐도 295년 이후의 일이잖아.
그렇지 않나?
“잡화점의 주인. 아니...카일. 이 각본에는 당신이 기록되어있지 않아.”
“그보다 각본에 하나하나 적을 생각부터 하는데?”
“우주의 별 하나마저 모두 끝이 존재하지. 그 끝을 막기 위해서라도 모든 이들을 각본에 적을 필요가 있어.”
“그렇다고 쳐도, 재창세를 하기 위해 모조리 갈아 없는 건 문제가 있는데? 아니, 애초에 모조리 갈아 없애는 것에 문제 유무는 따지지 않도록 할 게. 하지만, 가짜 일기장을 레인의 잡화점까지 집어넣을 정도로 날 묶어놓을 이유가 뭐야? 너 또한 300년 이후의 미래보다 더 머나먼 미래에서 온 레이베리아잖아.”
지금 이 시간대의 각본가가 아닌, 다른 시간대의 각본가.
“맞아. 나는 다른 시간대의 각본가. 유랑극단 최후의 단원이자 단장. 다른 미래에도 너 때문에 모든 것이 망해버렸지.”
“꼭 내가 살아있으면 모든 게 망해버린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 같은데. 당연하게도 내가 살아있으면 너희들이 손해보고, 너희가 살아있다면 내가 손해를 봐. 하지만, 다른 존재들은 그런 거에 신경이나 쓸까?”
“뭐라고?”
“불멸자든 필멸자든 언젠가 끝이 있다고 해도, 전부 너의 각본대로 움직여서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얼마나 대단하든 차원에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기록할 수 없는 일이니까.”
격노하는 듯한 레이베리아에 투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지금 죽이면 미래가 바뀌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 같은데...글쎄? 불가능하지 않을까? 넌 나를 각본에 적을 수 없잖아?”
“직접적으로 적을 수 없지만, 네가 데리고 온 그 계집을 이용하면 가능하지.”
“가능하다고?”
생각을 해보니까 저 레이베리아는 상대적으로 미래에서 왔으니까, 리제로트의 최후에 대한 각본은 이미 적혀있겠지. 그러나 여기서 문제...
“각본이 없다면 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거지?”
그 질문 하나가 모든 공기를 멈추는 듯했다.
아니, 애초에 이곳엔 공기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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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리벳팅을 했어요.
솔리드 리벳 죽이고 싶어요.
어째서 수동으로 쥐어 짜내야 하는 건가요...
내 손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