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56
556
그나마 안개가 낀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는 기분이다. 전투를 한바탕 해서 그런지 몰라도 평소의 나로 돌아온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지금까지 리제로트의 초능력에 영향이 좀 갔으리라 생각한다. 경위는 맨 처음 저녁 만찬에서 리제로트의 눈을 보았던 그날, 리제로트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면 그 독은 빠르게 침투해서 내 정신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으나, 애석하게도 나를 구해주려고 했던 계획이 역으로 내가 리제로트를 구해줬고, 최종적으로 월터가 암살자를 박살내야 했지만, 내가 박살을 내면서 리제로트의 계획이 꼬여버렸다.
특정 이벤트를 지나면 사람의 자의식을 파괴하게 되는데, 그거야 말로 리제로트에게 호감을 가게 된 순간이 아닐까? 어차피 리제로트는 미소녀에 돈도 많고, 똑똑하며, 붙임성도 좋아서 리제로트의 눈을 보면 단숨에 넘어가게 되어있다. 그럼 어린 달 토끼들은 어떻게 꼬인 걸까?
당연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관리자를 찾아줄 때까지, 지켜준다고 하고 선심을 쓰면 자연스럽게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결국 인간형이란 인간형은 다 꼬여버렸으니, 리제로트를 자연스레 따르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인형이 되는 달 토끼들을 볼 수 있다.
사람이 구해지는 그 순간엔 그 사람을 믿고 따르게 되는데, 이번 함정은 제대로 잘 넘어가게 된 셈이다. 이런 모습으로 솔선수범해서 먼저 튀어나가는 성격인 줄은 몰랐다는 거겠지.
나는 리제로트로부터 등을 돌려 암살자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눈이 없고 심지어 말을 하지 못하고, 그 주변에서 파손되어있는 물품을 발견했다. 양손으로 주워담아 붙잡고 천천히 고치기 시작하자. 가루가 되어있던 마법공학 물품은 마스크 중에서 입에 끼기 좋은 구조였다.
“마나를 불어넣으면 해당사항에 맞춰서 소리를 내주는 장치인가...”
아까 분명 말을 했지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게, 꺼림칙할 정도로 괴상한 목소리가 들렸으니, 피를 흘리고 쓰러진 암살자의 얼굴은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뭉개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암살자는 소울칼리버에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절대적으로 평범한 사람의 단계는 아니었다.
“호문쿨루스 계획. 그렇군. 너도 호문쿨루스를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카렌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놨고.”
절대로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과 호문쿨루스의 차이점이라면 피를 흘리긴 하지만, 죽는 순간에는 곧바로 풍화되어 사라지는 게 호문쿨루스다. 내가 검으로 암살자의 목을 잘라내자 곧 먼지처럼 바람을 타고 흩어지니, 이런 암살자를 알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리제로트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 대강 알 것만 같았다.
“제가 호문쿨루스 계획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들, 그 자가 호문쿨루스 인 것은 어떻게 알았죠? 죽이지 않고서는 모를 텐데?”
“사람이었으면 나와 몇 번 마주치고 도망갔을 테니까. 만약 네가 인형을 만들어 놓은 상태의 인간이었다면 곧바로 나에게 역습을 맞아 죽었을 거고, 기괴한 형태로 허리를 꺾어서 피한다거나, 이상한 움직임으로 맨 처음에 역습하지도 않았을 거야. 호문쿨루스는 인간의 결점을 어느 정도 해소한 상태니까. 고무처럼 매우 유연하고 값이 비싸겠지.”
“흐응. 제 능력에서 처음으로 벗어나는 인간이 되셨군요?”
“싸움만 시키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당하면서 살뻔했어.”
인간은 극적인 상황일 때 혹은 한계가 부딪쳤을 때야 말로, 포기하지 않는 한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오늘 기적적으로 내가 그것을 실행했고 성공을 했으니, 리제로트의 인형이 되는 이기적인 사례는 당분간 힘들 것이라 본다.
생각지도 못하게 승전보를 2번 울리는 쾌거를 마음속에 간직한 체, 한숨을 내쉬며 다 포기한듯한 리제로트의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질문은 나를 향해 뻗어 나아갔다.
“그러면 이제 데이트는...”
“아니. 데이트는 진행해야지.”
뜬금없이 목소리를 높여 “네?”라고 놀라는 리제로트.
“이건 이거고 노는 건 노는 거야. 어차피 네가 준비한 깜짝 이벤트는 저 암살자 하나겠지. 그보다 흥미로운 곳이 생겨서 그쪽으로 가볼까 해. 네가 정 가기 싫다면 나 혼자 가면 되는 거고.”
환도는 내 손에 창조되고 세계를 위해 환원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화사한 빛으로 내 주변에 퍼져나가는 이 에너지들은 다른 이들의 마나가 되고, 마기가 되며, 신성력으로 자리잡게 되겠지.
하늘로 올려다보았을 무렵, 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급하게 붙잡느라 오른손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하늘도 못 보게 하는 건가. 젠장...빨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 소녀로 살아가려니 신경 써야 할 점이 한 두 번이 아니잖아.
“큭...쿠쿳...”
옆에 잔잔한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아뇨...저의 의중을 대강 간파한 것치곤 담력이 꽤 크시네요. 언제 인형이 될지도 모르는데도 저와 놀아주시겠다니. 보통 적 앞에서도 잘 놀아주고 그런가요?”
“아니. 평상시에 가보고 싶은 곳이 있긴 하거든. 아쿠아리움이라던가, 바다인지 뭔지도 가보고 싶고. 내 평생 살아가면서 바닷가에 놀러 가는 것이 소원이었거든. 그리고 선언하는데 나는 너의 인형이 될 마음은 전혀 없어.”
그 놈의 바다가 뭔지 몰라서 잡화점 멤버가 날 바보취급 한 적은 없지 않아 있긴 했다. 하지만 겨울 바다는 볼 것이 없었는지 리제로트는 아쿠아리움에 가자는 말을 꺼냈다. 암살자로 인한 자작극에 대해 불문으로 취하는 나의 태도에 의구심이 들긴 하겠지. 리제로트가 만약 지게 되면 유랑극단에서 나오고, 자신의 목숨도 끊는다고 했었다. 다만, 그 말을 지킬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으나, 리제로트가 엉망으로 만든 오늘을 나는 부담 없이 즐기기로 했으니 상관 없겠지.
***
아쿠아리움에는 바다에 사는 동물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물은 파란색으로 빛이 나는 가운데 돌고래와 같이 떠돌아다니는 다이버가 손을 흔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마나에 반응을 한 건지 주변에 있던 물고기들이 내 주변에 몰리기 시작했는데, 리제로트는 나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른의 미소를...
“잠깐만. 왜 네가 그런 표정으로 보는 거야?”
“아뇨. 저도 모르게 영락없이 잘 뛰어 노는 여자아이를 보는 것 같아서요.”
화사하게 짓고 있는 미소에 영락없이 태클을 걸어도, 솔직한 대답으로 뻗어 나오는 리제로트의 말. 그런 리제로트 말에 대응하기로 했다.
“그러면 너는 뒤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잘 따르고 있는 거야?”
“이건 불가항력이에요. 저의 초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제 미모와 바른 품행이 그들을 사로잡는걸요?”
“미모는 그렇다고 쳐도 바른 품행은 다 죽은 거야? 양심의 일말이라도 있으면 그런 말을 내뱉는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태클을 거나 말거나 리제로트 주변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리제로트의 초능력과는 무관하게 월터와 리제로트를 보며 소근거리는 사람들. 내용은 다 들춰봐야 알겠지만 대부분 긍정적인 뒷담화에 가깝다. 내 경우에는 그나마 리제로트와 월터에게 가려진 터라,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지만...
-콩! 콩!
아무래도 해상동물들에겐 많은 인기도를 누리고 있는지, 상어 한 마리가 벽에 살짝 살짝 부딪치면서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만일 이 상어가 말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를 봐라 샤아!”라고 말하기나 할까? 고리타분한 생각을 벗어 던지고 전장을 다시 보도록 하자.
리제로트의 자작극에 선방은 제대로 했다.
리제로트의 능력에 당한 상태로 호감을 주지 않고, 나의 신념에 대해 관철을 했으니 능력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 하지만 이게 두 번, 세 번해서 걸릴지도 모르고, 어쩌면 잠복기가 있을지도 모르며, 혹은 상대가 거짓정보로 나를 안심시키는 요소가 될지도 모른다.
아쿠아리움에 있는 동물들이 불쌍하기만 했다. 누군가에게 갇혀서 살아가야 한다는 슬픔. 이 곳이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결국 바다보다 넓지 못하겠지.
“이 안에 있는 애들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리제로트에게 물어봤지만 날아오는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이미 관점의 차이부터 사고 방식까지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면서 겉으로는 놀고 있는 모습.
그런 격식에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이번 결투는 없던 걸로 할까?”
이제 재협상의 시작.
리제로트도 자신에게 유리할 줄만 알았던 게임이 이렇게 뒤집어질 줄은 몰랐으리라. 그러니 어떤 어필도 하지 않고 가만히 따라다니며 말해준 것뿐이겠지. 재협상을 해서 없던 걸로 치면 그나마 더 누그러진 분위기가 될 것이라 판단하고. “아뇨. 계속 진행해요.”
라고 말하게 될
“그러죠. 불편하기도 했고 제가 일부러 망쳐놓은 것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그 바보 같은 결투 때문에 스킨십도 제대로 못하고 있고. 이번 내기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요즘 인생사는 제대로 되어먹는 일이 없다니까. 억지로 스킨십을 하지 말라고 거리를 떨어뜨려 다니긴 했었는데, 겨우 그거 하나 때문에 재협상을 할 여지가 있다는 거였나?
“그나마 잡화점의 주인을 보고 깨달았어요. 이 사람은 절대로 넘어오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도 있고, 어째서 이런 사람을 유랑극단에서 제 1위험 인물로 지정했는지 이유를 알기도 했고, 게다가 어릿광대가 제가 자고 있는 새벽에 난리를 치며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이유도 말이죠.”
리제로트의 얼굴 빛이 체념으로 물들었다.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긴 하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어린애들은 다른 건가?
“방금 전에 저 아이들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드냐고 물어봤죠? 당연히 잘 지내고 있을 거에요. 아무런 의사도 없이 붙잡혀와서 먹을 것은 먹을 대로 먹고, 사람들의 괴성과 무례한 행동으로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도 잘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나마 적응을 해서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쯤.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전 생각을 해봤어요. 어떻게 하면 카일 씨를 망가뜨리고 새로운 인형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불길한 분위기가 스쳐 지나갔다.
“아쿠아리움에서 던진 질문. 당연히 카일 씨는 저의 답과 반대겠죠.”
매료가 되었다고 생각했더니 이미 초능력에 당해 인형이 되어버린 건가?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설마 반사하는 물체들을 통해서? 내 머리가 분석을 하는 동안, 리제로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아갔다.
“그러면, 이런 바보 같은 게임은 뒤집어버리고 제 멋대로 하면 되는 거였어요. 게다가 카일 씨가 제안한 것처럼 이 결투는 없던 걸로 하죠. 아니, 그 모습으로는 카린 양이라고 불러야 더 정확하겠죠?”
도발하며 웃는 리제로트의 눈엔 광기가 서려있었다. 가지지 못할 거라면 부셔버리겠다는 결의가 눈으로 나오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팔짱을 끼면서 유리벽에 등을 기댔다.
“당신의 전투능력은 잘 봐왔지만, 좁은 구역에서 이 많은 사람들을 모두 뿌리칠 수 있을까요?”
“아니. 못하지.”
아무리 나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제압하려면, 레시아나 시나가 옆에 따라 붙어야 했다. 저 사람들을 죽이는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얼떨결에 휩쓸려버린 민간인을 죽일 정도로 무자비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경고는 하겠어. 리제로트. 그 사람들을 풀어줘.”
“경고라고요? 지금 당신이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가 안 가시나요?”
“아니. 알고 있지. 지금 보이는 사람만 해도 족히 100명 이상은 되는데, 여태까지 진입하면서 반사된 물체들로 사람들과 마주했다면 300명도 더 넘어가리라 생각해. 다음을 위한 함정으로 나를 몰아갔다고 생각을 했겠지만 오산이야.”
일부러 아쿠아리움을 지정한 이유는 너의 생각을 물어보기 위함이 아니니까.
너의 생각은 아무래도 좋았다.
“결투도 다 뒤집어졌고 내가 얻을 것은 다 얻었지. 어쩌다 보니 이렇게까지 왔지만, 도주경로는 내가 원하던 그대로야.”
내 등 뒤에 유리가 서서히 금이 가면서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 뒤로 거대한 수압이 약해진 부분을 그대로 박살내면서, 거대한 해일이 나와 정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그대로 덮치기 시작했다.
=============================================================================================
첫 출근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인생...
+
상상의 나래 : http://cafe.naver.com/novu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