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50
550
외통수나 체크 메이트를 맞아버리면 머리가 얼얼하게 아프기 마련이다. 아직 저녁만찬까지는 1시간이 남아있는 상태였고, 콘서트 도중에 루나의 이름을 울부짖는 팬들 때문에, 저 멀리서 루나가 부르는 노래가 잘 들리지 않았다. 마리아는 내 옆에서 키득키득 웃고 있었는데, 아까 전에 카페에서 이야기 한 내용을 다 들었기 때문이리라.
“카렌이 중요한 것은 잘 알겠다만, 그 안에도 이중함정을 설치할 가능성이 높지 않는가? 그보다 카일이 그렇게 당황한 표정을 하는 것은 처음 봤다. 내 생에 이런 진귀한 표정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거늘.”
“예전부터 많이 지어왔던 표정이라 생각했는데요.”
태클을 걸 힘조차 없었다. 시나를 급하게 불러와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결국 나이가 어려지는 것도 서러운데 성별까지 변화하게 생겼으니, 나중에 카렌을 돌려받고 깨어나게 된다면 무조건 아이언 클로를 처벌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런데.
“어째서 카렌이 그 안에 있는 걸까요?”
“그거야 첩도 모른다. 어찌 알겠는가? 기나 긴 공백 동안 무엇을 만들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필이면 그 탐욕에 물든 리제로트 손에 붙잡혀있는지. 게다가...”
“세린에게도 연락해봐야겠어요. 카렌을 이곳으로 무사히 인도 받으면, 카렌 안에 기이한 함정이 설치되어있는지 까지도.”
“세린? 아. 그 잡화점의 인격을 말하는 거였던가? 오랫동안 거론하지 않아서 잊고 있었다.”
아무리 거론을 하지 않아도 까먹으면 안 되지.
아무튼, 그 이전에 카렌이 어쩌다가 저 안에 갇히게 됐는지 알아야만 했다. 그 전에 카렌을 몰래 빼오는 방법이 없을까?
“흠.”
내 머리 위에 있던 그리티스 씨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잡화점 주인의 말처럼 라 캄베리 회사에는 카렌이 없는 모양이네. 게다가 저런 부자들의 비밀장소를 알아내려면, 이상한 퍼즐이나 비밀번호. 혹은 괴상한 장소까지 다 찾아가봐야 알겠지만, 아까 본 사진만으로는 추격이 힘들 것이라 보고 있네.”
아까 그 사진의 형상이 뇌에 깊숙하게 박혀버린 모양이다. 여전히 눈을 감아도 그 사진이 보이고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야 한다. 그나마 지금 계획이 어쩌다가 물거품으로 변했을 때, 곧바로 카렌이 잡혀있는 그 장소를 습격해서 빼내올 수 있게라도 해야 하니까.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몰렸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들을 말은 다 들었으니 나중에 마리아가 루나에게 알려주면 될 거고, 그리티스 씨는 계속해서 카렌의 위치를 탐색해 주세요. 카렌이 있는 위치에 달 토끼가 있을지도 모르고, 설령 제가 다른 외형으로 변해도 컬렉션의 위치를 알려주리라고 상상은 하지 못하겠네요.”
리제로트의 성격상 탐욕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지만, 머리도 어느 정도 돌아가기에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잡화점 멤버라고 특정 지으며 견제를 하려는 걸 보아하니, 의심부터 하리라 보고 있는데, 그건 나중에 생각해야 할 문제고 앞으로 54분동안, 다른 변수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시험을 해봐야 한다.
“하아...왜 이런 일이...”
머리를 쥐어짜내면서 다른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많이 남은들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 소용없는 일이다. 최후의 방법은 어린 소녀로 변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지 꾸준히 생각하면...
“아무래도 카일이 첩의 도움으로 소녀로 변해야 하는 길밖에 없는 것 같다만?”
참담한 현실이 나를 반겨주고 있을 뿐이다. 하기 싫은 일을 즐기면서 하라는 말이 있는데, 그 양반이 이 일도 즐기면서 할 수 있다면 내가 인정한다.
“분명 다른 길이 있을 거에요. 이건 호언장담할 수 있으니 잠깐만 좀 기다려봐요.”
좋은 생각이라도 난다면...
“없지 않는가?”
히죽히죽 웃으며 내 상태를 살펴본 마리아의 얼굴에 본능적으로 아이언 클로를 집행해버렸다.
“아팟! 자, 잠깐만! 그만하거라아아!”
처절한 비명 속에 알아차린 것이 있다면, 이런 상황에도 시간은 매일 흘러가고 있었다. 매번 그렇듯이 우리 눈에는 항상 앞으로 향하는 것만 같은 시간.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 다 일까? 1분 정도 시간을 소비한다고 했을 때. 다른 이들에 따라선 1분이란 시간이 1시간이 되는 경우도 있는 법.
“아직 45분정도 남았으리라 생각하니 정리만 해두죠.”
이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세심하게 들어가보면, 해답이 나오리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회전을 시키는 머리는, 달궈지는 철판마냥 온도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사람을 깎아 놓은 동상도 이런 기분일까? 마그마 속에서 기발한 생각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생각을 꺼내려면 손을 뻗어야 한다니, 어떻게 하면 이런 잔혹한 상황을 묘사로 쓸 생각을 다 할까?
“카일이여. 벌써 딴 생각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는가? 배가 산으로 간다더니 우주로 치솟을 지경이니라.”
“배가 왜 우주로 가요? 나선력으로 운행하는 것도 아닌데.”
“쓸 때 없는 태클은 여전히 잘 하는구나. 여전히 다르지 않는 모습에 감탄을 하게 된다.”
언제 부활했는지 태연하게 말을 걸어온 마리아에게 말하는 도중.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빛이 번뜩였다.
“여전히 다르지 않는 모습이라뇨?”
“음? 지금 카일의 태클 말이다. 터무니 없는 태클을 거는 태도에 감탄을 하게 되는...”
“아뇨. 그게 아니라. 다른 이들이 보았을 때 저의 다르지 않는 모습이 뭔데요?”
나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표정이 천천히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보자마자, 내가 설명을 너무 장황하게 해버렸다는 실수를 알아차렸다. 그 실수를 알고 다시 이야기 하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었는지, 불만을 토로하는 분노의 마리아를 볼 수 있었다.
“그걸 어찌 아는가? 아무리 첩이라도 다른 이들의 주관적인 관점을 하나하나 모두 대변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그런데 다른 이들의 비춰진 다르지 않는 카일의 모습을 천단위, 만단위, 억단위로 설명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는가!”
“좀 진정하세요. 그러다 거인으로 변해서 월 마리아를 타격하게 생겼잖아요. 마리아가 월 마리아를 타격하는 상황은 좀처럼 보기 힘들지 몰라도...”
“이름 가지고 장난하면 혀가 잘려나가는 것 모르는가!”
“알았어요. 제가 잘못했으니 이제 좀 진정하세요.”
씩씩거리는 어린 아이를 진정하듯이 머리를 쓰다듬자, 열이 식은 검은 달의 여왕은 내 몸에 기댔다. 마리아에게 질문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정리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릿광대는 제 모습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300년이 지났는데, 곧바로 저를 알아볼 수 있었어요. 의뢰를 하기도 전에 이미 알아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러니까 어릿광대가 저를 봤을 때 변함없는 저를 알아차린 거잖아요?”
“과연. 생각을 해보니 이상하기도 하군. 300년이란 시간은 카일이 잊혀질 시간대가 아닌가? 물론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 우리는 미래에 과거로 돌아가서, 매우 조용하게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일부에게는 우리의 행각이 알려졌으며, 레인이라는 차기 주인에겐 카일의 일기가 있노라. 그 미래를 아는 것은 레인뿐이니. 딱히 교정하려고 들지 않으려는 것을 보면, 그리 나쁘지 않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걱정해야 하지 않는가? 터무니 없게 그 일기장에 ‘오늘 날씨는 맑음’이라고 적기만 해보거라. 그 다음은 흐려서 비가 올지, 강풍이 올지, 폭설이 내릴지 모르는 일이다. 정글도 언제나 맑은 뒤에는...”
“뜬금없이 잘도 빠져나가네요. 미꾸라지가 형님이라고 부르겠어요?”
“기왕이면 누님이 더 좋다.”
삼천포로 빠져나가니 진지하게 물어보는 내가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리티스 씨는 뜬금없이 내 머리 위에서 입을 열었는데.
“그거야 자네의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분위기요?”
“어릿광대는 누구라도 흉내 낼 수 있는 자. 그 사람의 행동과 미세한 분위기 마저 완벽하게 동화할 수 있기 때문이지. 과거에 잡화점의 주인을 흉내 냈다고 한다면, 특유의 동질감을 표현할 수 있으리라 본다네. 자신이 어떻게 변하든 카일이라는 사람은 카일이니 말일세. 예로 들자면 딸기 파르페와 딸기 케이크가 있지만, 같은 딸기가 들어간 것이니 새콤달콤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는가?”
이해는 잘 안 되지만, 예시를 들어보니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성별 자체가 바뀌었는데 말이죠. 나이하고 같이.”
“그래도 사건을 직면할 때 계속해서 생각하는 습관이 있지 않는가?”
아...
자세히 본 적은 없지만 분명 있던 걸로 기억했다.
생각할 때 표정이 날카로워 지는 것은 막을 수 없는 노릇이니, 게다가 이상한 독백이라도 한다면 다른 이들이 그걸 읽지 않는가?
“그 이전에 엘티노스 잡화점 자체에 의뢰를 보냈다는 행동부터, 이미 저를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도 결국 어릿광대는 카일이라는 것을 알아 맞췄다. 다른 이를 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그러니 카일은 고민하거나 생각을 할 때 말 없이 침묵을 유지하고, 말을 걸면 그것이 짜증나는지 날카롭게 변한다. 이거야 제대로 당했나 보군. 그때 방해가 들어오기 전에 확실히 죽여놨어야 했는데.”
양손이 각각 주머니 속에 들어간 마리아는 분한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맹수 조련사가 방해를 하지 않았다면, 필시 어릿광대는 과거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겠지만, 죽이지 않고 살아 달아나니 300년 뒤에 이런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공존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공존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규모를 더 크게 바꾸자면. ‘이 세상이 존재하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되겠네요. 그러니 유랑극단은 이 세상이 사라지길 원하는 걸지도 몰라요.”
“그런 머리 나쁜 사상에 동참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더 기이하군.”
“아뇨. 머리 나쁜 사상은 아니에요. 처음이 있다면 끝이 있듯이, 지금 각본가의 각본은 최종페이지를 향해 가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처음과 끝이 있지만, 그 이후의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누구도 모른다. 백설공주의 처음과 끝은 다 알지만, 책을 덮으면 그 이후의 일은 모르니까. 각본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하는 것은 나로 인해 이야기의 끝이 나지 않는 것.
세계의 시작이 창조주에 의한 창조라면, 세계의 끝은 누군가에 의한 마지막. 세상의 종말이라고 보면 된다.
“머리가 아프네. 어릿광대는 300년이 지나도 나를 단숨에 알아차리지, 레이베리아의 각본의 원고는 세계의 종말을 향해 나아가지, 게다가 카렌은 리제로트가 붙잡아 놓고 농성을 부리고...잠깐? 리제로트는 어릿광대와 마주했다면 정보교환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잠깐? 애초에 나를 엮어내기 위해 저번에 만났던 소녀를 데려오라는 것 아닌가? 세밀하게 생각을 했어야 했다. 어릿광대가 리제로트와 이야기 하면서 나에 대해 모든 이야기를 했겠지. 좀 특유해도 어릿광대는 나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른 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매력포인트를 모조리 토해내는 것도 일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소녀의 모습이 되었던 것도 알고 있을 거고, 그 사실이 리제로트 귀에 들어왔다고 한다면...
“설마...각본대로 흘러가는 건가?”
“응? 무슨 말인가?”
“큰일 났네요. 아니. 지금 체크를 얻어맞은 기분이에요.”
아무도 없다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협상에서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더니, 내가 불리하게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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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불 밖은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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