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34
534
사람이 많이 놀라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인간만이 살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달라. 이 말은 엘티노스가 행하려는 계획과 일치했다. 아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만, 한가지 문제점은 웨인즈라는 사내가 레이베리아에게 선택 받았다.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몰라도, 사실상 내 적이나 다름이 없을 텐데.
“인간만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는 범위라면?”
“오직 인간만이 있는 세상을 말하는 겁니다. 몬스터라는 개념도 없고 오직 인간들만이 존재하는 세상.”
나에게는 디스토피아였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잡화점 멤버가 대부분 사라지는 삶을 사는 것과 다를 게 없고, 내 기준이 아닌 공통의 기준점으로 보았을 때, 몬스터가 있으니 경제요인 때문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점이 있다는 것.
새로운 일자리는 계속 있지만, 300년 뒤에 몬스터가 사라지지 않아서, 아직까지 모험가를 찾는 인터넷 게시판이 많이 떠돌아다닌다. 이는 마리아와 같이 확인한 결과로 엘프들이 있어야지만 즐길 수 있는 관광명소라던가, ‘극한직업! 고블린 부족장편’과 같이 어처구니 없는 것들마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누가 고블린 부족장으로 직업을 삼은 걸까?
“인간만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달라는 말은 나에게 넌센스야. 마리아에게 부탁을 해서 너희들만 차원이동을 시켜줄 수 있지만, 검은 달의 여왕에게 맹약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네.”
웨인즈는 안경을 번뜩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이 안경 밖으로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아뇨. 저희는 잡화점 주인에게 빚을 많이 지지 않고, ‘협력’을 통한 일의 성취를 얻고자 하는 바입니다. 지금 그 말을 그대로 이행하게 되면, 저희 3명의 의뢰만 성공하게 되겠지만, 이곳에 남아있는 마법사들은요?”
“그때는 나에게 직접 찾아오라 해야겠지. 나는 인류의 방패라던가 그런 거창한 사람이 아냐. 잡화점의 주인일 뿐이라고. 잡화점 알지? 그냥 잡다한 물건들 싼 가격처럼 내놓은 다음에 비싸게 바가지 씌우는 거. 그게 바로 나야.”
고작 잡화점 주인이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내 기분에 따라서 하고 안하고가 결정된다. 그전에 나는 이들을 만나고 결정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며, 의뢰 내용만 듣고 빠져 나와도 별 상관없는 일이다.
애초에 레이베리아의 사자가 되어 나를 만난다는 그 자체부터, 뭔가 기묘하게 잘 맞지 않는 부분이지만 아마 저 두 명도, 천사던, 여신이던, 마족이던 누구에게 힘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마법사이면서도 천계, 마계를 대표하는 싸움꾼들.
모두가 책상에 앉아서 숨죽이고 나와 웨인즈의 대화만 듣고 있었다. 실질적인 계획도 없을뿐더러 인간만 있는다고 해서, 세상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몬스터가 없어진 그 날, 그리워하며 씁쓸한 입맛을 다시다가, 그렇게 잊고 적응해서 세상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뿐.
“하긴, 공존을 좋아하시는 카린 님께는 반감을 살 수 있는 말이군요. 인간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것은, ‘지금 인연을 모두 다 끊고 우리에게 오라.’라는 말이니까요.”
“잘 아니까 다행이군.”
“그러면, 의뢰 내용을 바꾸겠습니다. 인간들이 주인이 되는 세계. 그거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정정해야 할 것이 있다.
이 남자와 엘티노스의 뜻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엘티노스는 인간들이 천계와 마계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힘을 길러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천계와 마계를 몰살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능력자라는 존재를 만들어 인간의 세력을 강화하고, 상대적으로 커졌으니 지금 천계와 인간의 세력을 줄이기 위해 견제를 하는 거고, 이미 엘티노스와 모든 입이 다 맞춰진 마계에서는 그러는 척 하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웨인즈는 인간이 모든 생물의 중심이 되어 움직이겠다고 하는 소리이니, 몬스터나 천계, 마계도 모조리 파괴할 심산으로 활동하려는 듯 보였다.
“그렇다고 저희들이 막 나가자는 건 아닙니다. 단계라는 것이 있지요. 그 과정에서 카린 님의 힘이 꼭 필요한 것뿐입니다.”
냉소하고 계산적이며 높낮이가 없는 어조. 그리고 차갑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눈.
“세계를 창조할 수 있지만, 인간의 한계로는 그 능력이 제한되어있죠. 그러니 누군가는 창조신이 되면 그만입니다. 새로운 신이 되어서 지금 눌러 앉아있는 창조신을 배척하면, 그야 말로 인간을 위한...”
“억지로군.”
더 이상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네가 한 소리를 비슷하게 한 녀석이 있었지. 자신이 초월체가 되어 창조신을 공격하기 위해, 억지로 시간 축마저 엇나가게 하는 시건방진 녀석 말이야.”
분노가 힘껏 솟아오르니 감당할 수 없는 듯, 내 몸이 작게 떨리는 것쯤은 알았지만, 이 말만큼은 해야 했다.
“잡화점의 주인이 하는 일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냐. 나도 천계와 마계가 이번 일로 난장판을 부리길래, 세계를 억지로 혼돈에 빠뜨려서 천계, 마계 그리고 중간계가 하나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려고 했지. 그래서 너희들을 만나러 온 것뿐인데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군. 인간들만이 있는 세상이니, 인간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니. 네가 하는 소리는 전부 이상향일 뿐이야.”
“인간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뭐가 그리 나쁘다는 겁니까?”
“너는 레이베리아의 사도잖아. 능력을 이어받았다면서? 아냐. 너는 기만자야. 진짜 웨인즈는 어디에 있지?”
진짜 웨인즈가 어디 있냐는 말에, 테일즈와 레밍즈, 그리고 레시아마저 동요하기 시작했다. 혹은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영 모를지도 모르겠다만,
“깜빡 잊고 있었어. 네가 준 물건에 대해서.”
회색코트를 손에 넣고 물건을 빼냈다.
오래 전에 받아냈던 어릿광대의 가면.
지금 300년이 지난 미래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헤? 어디서부터 안 믿었던 거지? 자기야? 레이베리아의 사도라는 점부터?”
“아니. 네가 나와 레시아의 본질을 꿰뚫었을 때부터. 그리고, 레이베리아의 능력이 레이베리아에게 먹힐 리가 없잖아?”
“처음부터 나를 안 믿고 추려나가면서 속을 떠봤다는 거네? 역시 우리 자기밖에 없어!”
다른 인격이 그를 조종하듯, 침착하고 냉철한 사람이 웃고, 떠들며 목소리 톤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속아넘어가는 척하면서도 위화감이 들었더니, 내 앞에는 지금 각본대로 움직이는 듯한 어릿광대가 있었을 뿐.
“뭐? 웨인즈가 아냐?”
듣고 있던 레밍즈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테일즈는 일단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
하지만 웨인즈의 품속에서 나와 비슷한 하얀 가면이 서로 공명하듯 빛이 일어났다. 히죽히죽 웃는 사내의 얼굴로부터 나타난 불길함.
“유랑극단이 부활했군. 사회자를 어디선가 찾았나?”
“맞아. 멤버를 모집하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이 세계는 우리와 맞지 않아서 이주하려고 했지만, 자기가 내가 떠나는 걸 붙잡는다니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사건, 사고를 터트려야 하지 않을까? 그보다 굉장히 귀여워졌다! 각본가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데!”
내 앞에 있는 도플갱어는 ‘월식’이라는 포식자의 표본이 된지 오래. 300년이 지난 시점으로, 어릿광대는 하나의 월식이라고 불려도 될 정도다. 솔직하게 지금 내 심정은 다행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더 나아가 지금 유랑극단을 제거하는 거야 말로 마땅했지만...
“언제나 자기에게 항상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자기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 게다가 이번 유랑극단은 사회자가 오고 나서 새로운 멤버를 또 모집하고 있거든! 레밍즈와 테일즈도 올래? 그보다 본명이 뭐였지? 분명 다프네와 레오파드였던가?”
“그걸 어떻게!”
“어째서 알고 있는 거지?”
이미 적의가 가득 찬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어릿광대를 쫓아내고 싶었겠지만, 도발과 심리전에 일가견 하는 어릿광대는 300년 전에도 못 당해냈다.
“요즘은 보안이 강해서 좀 어렵긴 하더라고. 그래도 도플갱어를 얕보면 안 되지.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얼굴을 빌려서 살아왔으니, 수많은 역사와 지식이 모두 나에게 흡수된다. 정말 멋지지 않아?”
“웨인즈 씨도 죽였나 보네.”
담담하게 내가 입을 열자, 레시아와 어릿광대를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시나도 내 안에서 놀랐는데 내 안에서 분노가 태동하고 있으니, 내 감정에 예민한 시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마스터.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알고는 있다.
지금 이곳에서 어릿광대를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혀서 돌려보내야 하지만, 어릿광대는 뱀. 궁지에 몰리면 독니를 드러낸다. 얄팍한 한 수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면, 알면서도 억지로 풀어줘야 하는 것이 있다.
“레시아. 마기를 거둬요.”
“주인.”
이런 상황에서도 레시아는 몰래 공격을 준비하려고 했다. 내 이름을 불러서 반박하려고 했던 것도 잠시. 이내 체념을 하며 살기를 풀었다. 내가 알아차릴 정도로 너무 적나라해서, 어릿광대는 방심한 척하면서도 결정타를 던질 준비가 되었겠지. 그러나 의도한대로 흘러가주지 않으니, 어릿광대는 하얀 가면을 천천히 쓰고 입을 열었다.
“자기는 정말 눈치가 빨라. 너무 빨라서 빛이라도 따라잡지 못하겠지. 그래서 나는 꼭 자기가 유랑극단에 와줬으면 좋겠어.”
유혹이라면 유혹이다.
자신에게 와서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자는 말.
더 나아가서 모든 세상이 광기에 미쳤을 때, 우리는 그 정상에서 웃고 떠들며 지켜보자는 거겠지.
“미안하게도 그 제안은 거절할게. 300년전에도 그 이후에도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아. 너희들의 바퀴를 부수고, 움막을 다 찢어놓을 때까지 멈추지 않겠어.”
“그래? 그렇구나! 흐음~! 역시 자기는 어울려주지 않는구나.”
독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입을 벌린다.
그것은 바로 사냥을 할 때.
번뜩이는 단검이 날아왔지만 레시아가 도와주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시나가 즉각 반응하여 왼쪽으로 흘러가듯 몸을 비틀고, 동시에 어릿광대 가면을 향해 레프트 훅을 먹였다.
-파앙!
예전에 쇼콜라에게 맞아가면서 배운 격투술이, 지금 이 몸에 새겨져 있을 줄은 몰랐으나, 본래 시간대로 되돌아간다면 그녀에게 먼저 찾아가 고맙다고 해두자.
“크하아악!”
이번엔 웨인즈가 결계 밖으로 튕겨나갔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모두 볼 것이라 예상했지만, 레시아가 이미 다른 결계를 씌워놨다. 남은 마기를 돌려서 결계를 쳐놨으니, 지금 어릿광대에는 퇴로도 없는 싸움.
“이런...방심했나?”
극심한 격통을 겪고 있는 어릿광대는 힘겹게 내뱉었다.
시나와 나의 시너지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게다가 월식과는 극상성의 관계. 침식하는 빛으로 몇 번 더 맞는다면, 어릿광대는 소멸해버리고 말겠지. 유랑극단이 인원을 선동해서 모집하기 전에, 한 명이라도 더 줄이려고 했다.
그런데...
내 귓가에서 누군가가 일어서더니 빠른 동작으로 뭔가 날렸다. 공기를 찢고 날아가는 투사체는, 내가 피하면 테일즈가 맞기 때문에 피하지 않고 붙잡았는데, 아직까지 생크림이 남아있는 포크.
“당연히 내가 아니라 자기가 말이야! 꺄하하하핫!”
미치광이처럼 웃는 포인트가 완전히 반전이었다. 분위기가 전혀 다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저 멀리서 레시아의 결계를 먹어 치우는 검은 뱀과 유쾌하게 빠져나갔고,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시민들이 모두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레시아가 이미 내 밑에 마법진을 펼쳐줬고, 남아있던 2명도 공간이동 마법진에 몸을 맡긴 체, 다른 건물 옥상으로 전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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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극단 부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