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502
502
마계에 가는 방법은 간단한데 레시아에게 부탁을 하거나, 마물에게 마계로 가는 길을 물어보면 된다. 마계로 가는 것은 엘프의 숲으로 가는 것보다 더 낮은 난이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손쉽게 사람들도 찾아갈 수 있지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마기가 인간의 몸에 침식하기 때문. 처음에 레시아가 나왔을 때도 일반인이 레시아의 본 모습을 보면 죽거나 침을 흘리는 이유가 오러의 기초적인 재료가 마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말을 왜 하고 있냐고 하는가 하면...
“자기는 어느 쪽이 좋아? 오른쪽? 왼쪽?”
“내가 분명 결계를 5중으로 치고 잤을 텐데 어떻게 꿈속으로 들어온 거야?”
릴리스에게 그대로 꿈속에 잡혀버렸다. 그것도 양 옆에 분신술을 쓰는 듯한 그런 기분일까? 오른쪽이 말을 끝내면 왼쪽이 말하기 시작하는 그런 구도. 잠을 자고 있다가 눈을 떴더니 이상한 집 안에서 양 옆에 릴리스가 누워있다면,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내 경우에는 기겁을 했다.
기겁한 이유라면 아까 전 내기에서 내가 졌는데 그대로 공약을 지키려는 집착이라고 해야 할까? 평소보다 더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보라 빛의 눈동자가 나를 빨아드리려고 하고 있었다. 우선 모르는 척을 하고 말을 해보자.
“그래서 지금 여기에 부른 이유가 뭔데?”
“내기에서 이겼으니까 같이 자는 거잖아?”
“오늘은 단기기억상실증이 걸려서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래? 그러면 그거대로...”
“하지마!”
레시아나 시나도 진정시키는데 20분이 걸린다면, 릴리스의 경우에는 본능이 이성을 누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기 때문에 40분의 시간이 걸린다. 양 옆에 릴리스가 같이 붙은 상태로 귀를 달구면서 뇌에 침범하려는 걸 버텨야 하니까.
“본의 아니게 시행되는 거지만 이건 2차전이라고?”
“2차전은 무슨! 어떤 불합리한 내기를 할 생각이야!”
“오늘 밤이 다 지나는 동안 유혹을 참아내기?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글쎄? 다음날 말라비틀어져서 일어나지 않을까? 정말로 미이라가 되어버린다면 미순이도 올 거야.”
“그 미순이라는 녀석 진짜로 있는 거냐!”
하긴 묻고 싶은 것이 있긴 하니까 다른 말이라도 할 겸 시간을 때우도록 하자.
“그러고 보니 실베스에게 얼마나 당한 거야? 아까 다리의 상처만 봐도 심각해 보였는데?”
“당연히 그는 오랫동안 전투를 해서 노하우가 있으니까, 마왕이라는 자리가 더 어울렸을지도 몰라. 레프리시아의 경우에는 내정과 외교에 강하다면, 지금 실베스는 레시아가 닦아놓은 내정과 외교를 중심으로 전쟁을 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어.”
말하는 건 좋은데 릴리스의 손이 느닷없이 내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이거 참 궁금하네. 다른 이들은 릴리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까? 아니면 느닷없이 내 단추를 풀어버린 릴리스의 행동에 관심을 더 가질까?
3번째 단추가 풀리기 전에 단추를 푸는 손을 잡으려 했지만, 왼쪽에 누워있던 릴리스가 이미 내 팔을 베개로 쓰고 있었다.
“게다가 마신의 옥좌에 앉았다면 실베스는 거대한 파괴의 욕구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할 거야. 레프리시아는 저주처럼 걸려있는 전대 마왕들의 욕구들을 모두 타락시켜서 바꿔놨기 때문에 면역이라고 보면 되겠지만, 만약 이성을 조금만 늦게 차렸으면 레프리시아가 죽었을지도 몰라.”
“레시아와 실베스 씨에게 무슨 차이가 있길래 그렇게 많이 벌어지는 거야?”
“말 그대로 레프리시아는 전대 마왕의 욕구를 모르고 자유롭게 방랑하고 있는 상태라면, 실베스의 경우에는 저주에 빠져서 더욱 강인한 힘을 추구하며 살아왔다는 거지. 게다가 3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실베스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상상을 하니 소름이 돋아.”
오른편에 있던 릴리스가 한숨을 내쉬면서 내 웃옷의 상의를 점거하려고 하기 전에, 어떻게든 이곳 미로를 탈출하기 위한 생각만 하기로 했...
“후우~”
“히익!”
는데 릴리스의 화산과 같은 뜨거운 숨결이 뇌와 가슴속을 지피기 시작하면서, 어쩌다 보니 점점 본능이 이성보다 더 커지게 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기회가 있기에, 다른 걸 생각하자. 다른 거. 그래 세계평화라던가...음. 그 다음은 다른 생각이 전혀 안 나네.
“귀하고 얼굴이 새빨간데?”
“시끄러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여자에게 압도당하는 나의 인생이 된 이유가, 루니아 누나 때문이라고 하면 되는 것일까? 그 바보 같은 백장미인지 뭔지 때문에 이 지경까지 왔다면 정말 커다란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은 다른 사람들과 많이 자는 것 같은데, 나하고만 같이 안 잤잖아?”
“그거야 레시아와 사이가 안 좋으니까. 다음에 일어나면 분명 레시아가 내 눈 앞에서 어마어마한 마법을 사용할 거라고.”
“레프리시아와 사이가 안 좋다라...확실히 그럴 만도 할 거야.”
쓸쓸해 보이는 릴리스의 말에 이번엔 왼쪽으로 돌아보았다.
“레프리시아가 좋아하는 선생님은 내 은인이니까. 서로 연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야. 여자들은 좋아하는 남자가 하나라면 그 남자를 빼앗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그러니 예전에는 레프리시아가 땅꼬마였던 시절에, 신체적인 우의를 강점으로 먼저 빼앗으려고 했지.”
그래서 나는 과거에서 자다가 습격을 받은 거냐.
“그래도 선생님의 존재는 상당히 대단했어. 정신방어와 자기관리가 너무 뚜렷한 거였지. 그때는 몽마들의 여왕자리가 아니었어도, 나 나름대로 서큐버스라서 자신감은 있었으니 내 남자로 된 줄 알았는데, 다음날에도 평소와 같이 레프리시아와 나에 대한 애정이 동등한 거야.”
그거야 과거에 오래 속박당할 수는 없으니까.
릴리스가 말하는 것마다 머릿속에는 문장이 만들어졌는데, 절대로 입밖에 내뱉지 말라고 머리가 명령한다. 쓸쓸해 보이는 눈과 얼굴이 마주했을 때도 심장이 가속하고 있지만, 차분하게 냉정히 다른 대답을 했으니.
“결정적으로 무엇 때문에 레시아와 사이가 틀어진 거야?”
“선생님을 찾지 말라고 했어. 다른 우상을 찾으려는 가련한 모습은 마왕의 본보기가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레프리시아는 반발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사이가 멀어지게 된 거야.”
“지금도 찾지 말라고 설득하고 있어?”
“말할 기회가 없지만, 대화를 나눈다면 찾지 말라고 할 거야.”
“어째서?”
릴리스들이 양 옆에서 꼭 껴 앉은 체 내 귓가로 동시에 속삭였다.
“지금은 내 옆에 있으니까.”
***
킹 크림존이 빠르게 지나간 아침은 기력이 공중분해 당해서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한번 같이 잔 남자는 기억하고 있는 릴리스가, 과거에 나를 알아보고도 끈질기게 달라붙지 않고 멀리서 지켜만 본 이유라면, 레시아와 사이가 좋지도 않은데 자신이 찍어둔 사람을 빼앗기는 것이 가장 싫어해서, 릴리스가 나와 레시아의 사이가 많이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는 것.
마치 간사한 뱀과 같은 움직임이라고 생각한다.
“아아~ 기분 좋게 잘 잤다~ 자기도 잘 잤어?”
매우 행복해 보이는 릴리스가 거의 죽어가려는 나를 보며 인사했다.
“너. 지금 내 모습을 보고 그런 말이 나오냐?”
“꿈의 미로에서 짜릿하게 잘 보낸 것 같던데?”
“끊임없는 고문을 받는 줄 알았다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쾌락으로 인한 고문이니까. 내가 거기서 살려달란 말을 몇 번이나 외쳤는데도, 릴리스는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분위기에 심취된 나머지...아니,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나중에 트라우마로 남기고 싶지 않아.
아무튼 알게 모르게 릴리스는 나의 대한 정체를 비밀로 하고 있었으니, 선생님과 관련되어 주의사항을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좋겠지.
“주인? 아침부터 왜 기어 다니는 것인가? 혹시 인간에서 지렁이로 종족이 바뀌는 이상현상을 체험하고 있는 건가?”
검은 고양이가 내 속을 뒤집어놓기 위해 도발하는 건지, 진짜로 걱정해서 묻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아이언 클로를 사용할 힘도 없어서 약이 필요하다고만 말했다.
“약인가? 그렇군. 그러면 머나먼 행성에서 추출한 테라진은 어떤가? 주인에게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슨 탈다림이세요?”
“짐의 꼬리가 주인의 손보다 잘 싸운다.”
“헛소리 그만하고 활력이 회복되는 그런 약이나 가져와요!”
“주인은 정기가 이미 한 가득 빨린 터라 활력이나 그런 건 소용이 없노라. 그건 그렇고 릴리스.”
레시아가 릴리스 앞에 천천히 움직이더니, 예전처럼 다시 싸우려고 하는 게 아닐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여전히 침묵이 감도는 이 한 가운데에서, 레시아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는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어떤 플레이를 했는지 짐에게 공유를...냐아아아아아앗!”
“무슨 플레이 공유야! 이 정신 나간 고양이가! 나중에 실시간으로 공개처형도 하겠다! 이 녀석아!”
“아프다! 아프단 말이다! 놓아라! 짐이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시끄러워!”
뜬금없는 한마디에 분노에 몸을 받기며 검은 고양이 머리를 한 손으로 집어 들고 아이언 클로를 시전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바닥에 널브러진 레시아가 목소리가 묻힌 상태로 입을 열었으니.
“그래서 지금은 기운이 좀 나는가?”
“뭐. 덕분에요.”
릴리스가 멀리서 숨죽여 웃는 동안 루니아 누나가 내 앞에 무지개 약을 줬다. 느긋한 웃음으로 다가와 햇살에 비치는 금색의 파도처럼 흐르는 긴 머리가 마치, 금색의 사신을 연상하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분위기다. 뭐든 것을 꿰뚫는 듯한 붉은 시선과 마주했을 때, 루니아 누나의 입술이 움직였다.
“마셔요오.”
“네?”
“원샤앗~”
“네?”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에요오?”
“네?”
저런 건 어디서 배우고 온 거야?
“루니아 누나. 저는 약을 달라했지 독극물을 달라한 적은 없어요. 그보다 이 무지개 약은 상처에 발라서 죽이는 용도와 마셔서 사람의 식도를 태우는 용도가 있나 보네요? 그리고 왜 분유병에다가 담아서 준거에요? 그거나 좀 물어봅시다.”
“누나 무릎 위에서 카일이 얌전하게 약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요오~”
“웃기지마! 누가 이 약을 먹을 것 같아! 분유병에 들어가 있어도 그게 정상적이었으면 먹긴 했겠지만, 무지개 약은 아냐! 무지개 다리를 건너게 하고 싶어!”
“빨리 마셔야 쑥쑥 자라난답니다아?”
“내 키는 이게 끝이란 말이야! 으웁!”
강제로 루니아 누나에게 붙잡혀 분유병에 있던 무지개 약을 마시는 동안, 생사를 오가는 경험을 하고 있는지 하얀 방이 가득 매워진 장소에 도착했다.
“솔직히 물어보자 세린. 여기 무슨 체크포인트 같은 곳이야? 내가 쓰러질 때마다 이곳에 오는 것처럼 보이는데?”
“오기 싫으면 오지 말던가!”
“아니, 물어본 의도와 그에 따른 대답이 전혀 다른 방향이잖아.”
이번에 세린은 여전히 날개 옷과 같이 하늘빛 하란복을 입고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계량을 좀 했는지 치마가 짧고 소매가 길지 않았으니. 나름대로 수수하다고 봐야 할까?
“엘티노스에 대한 일은 들었어. 레이베리아에게 강제 퇴장을 당했다면서?”
“천계에서 퇴출당했지. 본래 천계에서 돌아다니면 안 되는 몸이긴 하지만, 레이베리아가 그렇게까지 정색을 하면서 보낼 줄은...”
“그야 당연하지. 그녀의 계획을 네가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잖아.”
하지만 그게 무슨 계획인지 모른다는 게 걸린다. 봉인 당한 엘티노스가 어디에 갇혀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레이베리아의 계획을 방해하고 있다라.”
여전히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지만, 우선 실베스 씨를 만나고 해결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았다.
“너는 그 몸으로 지금의 마왕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 강대했던 타락의 마왕도 죽을 뻔했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아니. 이번에는 아냐. 지금 상태로 너를 보내면 늑대들의 소화리스트로 너의 신체 부위가 들어갈지도 모르지. 그러니 단련을 시켜주도록 하겠어.”
카린이 지니고 있던 특유의 신비로움도 관찰이 끝났는지, 세린에게 뿜어져 나오는 묘한 신비가 이내 살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
의식세계와 현실세계에서 동시에 고통을 받고 있는 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