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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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찾으려고 하면 불쑥 찾아와서 어처구니 없이 충격적인 말만 내뱉은 어릿광대의 행동이라면, 평소처럼 나에게 들러붙으려고 하는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릿광대가 다가가기도 전에, 레시아가 분노로 터지기 직전이었기에 추가적인 정보를 듣지 못하고 새벽이 넘어가버렸고, 그런 레시아를 달래기 위해 레시아가 잠드는 동안, 어마어마한 투정과 응석을 받아줘야만 했다.
그 결과가 지금 내 모습일까?
같은 이불 속에서 꿈지럭거리고 있는 레시아가 검은 고양이가 아닌, 인간형의 모습으로 내 옆에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편하게 숙면하기 위한 나의 계획이라면, 한풀이건 뭐던 일단 다 받아주고 자연스럽게 마왕성으로 보내는 거였는데...
10대 중반의 외형을 지닌 레시아.
카리스마보다는 거만함이 느껴지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에서는 그 거만함마저 귀여움으로 환원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이미지를 가진 여자애가 마왕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대략 60년정도는 살아왔다.
“선생님...가지...마세요...”
여전히 이별의 순간만큼은 잠꼬대로 기억을 하고 있는 모습에 애처롭기까지 보였는데, 만일 자신의 스승을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괴물 같은 천재적인 녀석들 밖에 없다. 아무리 마왕이라도 자신을 잠시나마 이끌어준 스승을 기억한다. 보통은 자신의 부모님이 되어야겠지만...
그나저나...
분명 잘 때 고양이 모습이었는데?
기묘하군.
“어라? 주인. 벌써 일어나는 건가? 아직도 해가 중천이니 조금 더 눈을 붙이는 것을 요구하노라.”
“왜 제가 더 자야 하는 거에요.”
“주인은 신부이니까. 짐의 아침키스로 일어나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거다.”
“뭐가 당연해요. 대체 그건 어느 마법소녀 세계관에서 나올법한 의식인데요? 아직도 잠꼬대하고 싶다면 레시아가 계속 자요. 영원히.”
엉망진창인 논리로 나에게 들이대고 있는 소녀는 마왕답지 않는 말을 자연스럽게 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조금이라도 방심하고 있으면, 말 그대로 농락당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터.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 여김 없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서...
-쪽!
“아침인사 대신 볼에 키스를 했어! 신랑!”
뒤에 다가오는 복병을 너무 늦게 눈치챘다. 태양과 같은 미소를 띠고 너무나도 상쾌한 얼굴로, 산뜻한 움직임과 함께 주방에 들어가는 루시피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볼에 여전히 따듯한 감촉이 남아있기에, 내 오른뺨을 가린 손은 뇌의 명령을 거치지 않고 움직였다. 온 몸이 너무 놀래서 경직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을 때.
-쪽!
“레시아! 뭐 하는 거에요!”
부스스한 붉은 눈을 하면서도 양 볼을 발갛게 물들이면서, 일명 ‘레시아 논리’를 앞장세웠다.
“옛말에 오른뺨을 맞으면 왼편으로 돌리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 오른쪽 볼에 키스를 받으면, 왼쪽 볼에도 키스를 받아야 하는 것이 이 세상에 정해진 법칙이니라.”
“그건 다른 성서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그 성서를 제멋대로 변이시켜서 이상한 혼종을 만들지 말라고요.”
“어째서 주인은 짐이나 다른 여성이 애정표현을 하는데도 싫다는 내색을 하는 건가?”
그거야 당연히...
“그...언젠가 보답을 해야 하잖아요. 한 가득 모아서...”
받은 것이 있다면 10배로 갚으라는 말이 있으니까. 잠깐 시선을 돌린 이유라면 내가 이런 말 하기에도 소름이 끼치기 때문이니까. 당연하게도 모든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당장 멸망할 것만 같은 이 세상을 살려내는 것이니까. 평화가 온다면 언젠가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짝 치켜 뜬 눈을 하고 있는 레시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내 귀에 다 들릴 정도로 작게 입을 열었다.
“츤데레~”
“시끄러워요. 아이언 클로가 날아가기 전에.”
얄밉게도 살짝 웃으면서 “쿡쿡!”하고 웃는 소리까지 완벽할 정도로 요망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마스터.”
어디선가 시나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지금 머릿속에서 처리중인“기상할 때 존재하면 안 되는 가장 위험한 장소 TOP10”중에서 3위정도에 속하는 내 이불 속을 빠르게 들췄더니, 백은을 지닌 머리카락이 내 배를 거의 뒤덮고 있는 상태였다.
어째 무겁다고 생각했더니 컨디션이 안 좋은 게 아니라...
“비, 비둘기! 이 녀석! 어째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냐!”
“올빼미입니다. 냥캣. 그리고 오랜만에 마스터 곁에서 자고 싶었을 뿐입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백은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했을 때.
-쪽!
“아니! 너도 하는 거냐!”
위화감과 긴장감이 내 목에 집중되어 왼손으로 목을 가렸을 때는, 이미 시나의 입술이 떠난 후였다.
“냥캣이 했으니 저도 못할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하지만 양쪽 볼은 이미 다른 2명이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에다 해야만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가장 사랑스러운가요?”
“사랑스럽고 아니고를 떠나서, 너희 둘은 나에게 애정을 보이는 것조차 전쟁이냐?”
“언젠가 마스터가 우리들에게 보상을 해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애정이란 마일리지를 하루에 2씩 차곡차곡 쌓으면, 제가 다치거나 병에 걸렸을 때, 약값이나 병원비로 거액의 애정이 나온다는 소리지요.”
“실비보험드는 소리하고 있네! 그전에 분신이 아니라 본체가 온 것 같은데, 밖에 있는 시간은 그럼 전부 멈춘 거야?”
시나는 다른 이야기로 빠지는 것을 눈치채고 건성으로 대답만 했다.
“멈춰있습니다. 제가 밖에서 시간을 억지로 움직여도, 3일 뒤에는 모든 공간이 다 날아갈 테니까요. 그건 그렇고, 저에게 대한 애정은 어떤 식으로 표현할 예정입니까? 그 예정된 날에 따라서 저도 예쁘게 마스터 앞에서 서고 싶으니까요.”
“마스터라니...이미 페어링도 되어있지 않은 사람에게...”
“그럼 서방님?”
시나의 눈이 번뜩하는 것으로 보아 예로부터 준비해온 단어. 그리고 살짝 수줍은 목소리가 가미되어 폭발적인 파괴력이 내 정신을 강타했다.
“마스터라 불러라 그냥. 잠깐 생각해보니까 그 호칭을 견뎌내기에는 손발의 내구도가 강하지 않아.”
“그럼 짐도 주인이라 부르지 말고 여보라고?”
“그러기엔 제 손발의 내구도가 강하지 않다고요. 만약 시공간의 저편으로 날아가는 제 손과 발을 어떻게 책임지실 거에요?”
“우서가 책임질 것이다.”
그럼 안 되잖아.
납치하는 스킬이 늘어서 이제 부위별로 납치하는 거냐?
“하아암~ 잘 잤다. 어라? 빛의 여신님도 이곳에 있네?”
릴리스의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는데, 레시아와 시나가 각각 오른쪽과 왼쪽 시야를 손바닥으로 막으면서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릴, 릴리스! 옷은 입고 자라고 하지 않았는가!”
“맞습니다. 그런 모습을 마스터에게 보이면 실례입니다.”
“하지만 잘 때 옷을 입고 자는 건 왠지 불편하지 않아? 적어도 실크로 된 이불을 감싸는 느낌을 제대로 알려면 맨 살이 최고라고? 부드럽고 꼭 안겨있는 기분이...
“시끄럽다! 당장 옷을 입어라! 색욕의 공작!”
“당장 옷을 입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정화하겠습니다!”
“알았다고요. 카일은 내가 어떻게 돌아다녀도 신경 쓰지 않고 멀쩡하게 말할 것 같은데.”
투정을 부리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릴리스의 목소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두 눈은 광명을 찾은 듯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사물을 하나 둘씩 인지하기 시작했다.
“방금 뭐가 지나갔길래 제 눈을 가린 거에요?”
“제길. 릴리스 이 녀석. 몽마의 여왕이라서 그런 뇌쇄적인 몸으로 주인의 시선을 빼앗으려 하다니.”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서로 한마디씩 주고 받으면서 안심을 하고 있었으나, 무슨 일이 터졌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카일 씨? 잡화점에 있는 목욕탕은 너무 크네요?”
“어째서 너까지 이곳에 있는 거냐?”
“그야 당연히 밖에 있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시간이 정지하게 되니까요. 이 사건이 해결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해서, 릴리스에게 이야기도 해보았고 세피르가 꿈의 미로를 관리하고 있으니, 밖의 상황을 알 수 있으니까요.”
잡화점을 밝게 비추는 빛에 반사되고 있는 자신의 은발을 신경 쓰면서 물기를 말리고 있었다. 임시거처로 활용만 한다고 하니 한숨을 쉬고 내 할말을 하기 시작했다.
“꿈의 미로는 현실세계와 영향을 전혀 안받는 거냐?”
“꿈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죠. 당연히 시간이 정지되면 꿈의 미로에 갇힌 사람들은 전부 사라지겠지만, 쉽게 말해 의식의 전송이 되지 않아서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하니, 세피르의 연락을 받아서 지금은 모든 사람들의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소식이에요.”
꿈은 현실이 아니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이나 공간이 날아가도 그 영향을 받지 않기에, 몽마는 한정적인 꿈의 공간에서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다는 소리로군. 그걸 이용하면 해결법은 보이지 않아도 시간을 벌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꿈과 같은 방법이다.
현실은 불가능하니까.
“어차피 지금은 3일안으로 시간을 찾아야 하니, 그 기간 동안 사고 치면 안 된다?”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아리엘은 볼을 부풀리면서 노을을 연상하게 만드는 눈이, 손을 대면 베일 정도로 날카롭게 변했다. 애써 시선을 돌려 레시아와 시나가 빤히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며, 두 사람을 보고“왜요?”라고 말하자...
“여전히 이상한 곳에서 마음이 너그럽지 않는가? 그렇게 한 명을 더 채워야 속이 풀리는 것인가?”
“마스터는 역시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잘 알았으니 한 마디만 하자면, 그럴 의도는 전혀 없으니 안심하시죠.”
한숨을 내쉬면서 달래주려고 했는데...
“아니. 주인이 그럴 의도가 없어도...”
“방심하면 마스터가 당할 겁니다.”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은 루시피나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있는 아리엘의 모습을 쫓아 눈이 이동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집중하는 모습은 흡사 눈알이 튀어나와 그 방안까지 쫓아갈 기세였고, 일부러 내가 헛기침을 하면서 주변의 분위기를 바꿨다.
“지금의 문제는 시간을 되찾는 거잖아요?”
“하지만 주인. 사회자가 날려먹은 시간을 어떻게 찾아올 것인가? 그게 더 문제이지 않는가?”
애석하게도 날아간 시간을 찾는 방법은 없다고 보면 되지만, 어릿광대의 말을 듣고 힌트를 얻은 것이 있다.
“레시아. 어제 어릿광대가 하는 말을 들었죠?”
“그 증오스러운 도둑고양이의 말을 짐이 왜 들어야 하는가?”
고양이는 레시아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어릿광대는 3일 뒤에 공간이 사라질 것이라고 알려줬잖아요.”
“확실히 그건 들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걸 집어볼 일이 있는가?”
가능성이 조금 있는 사실이라면...
“지금 사회자는 완벽하게 시간을 날리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날아간 것처럼 감추고 있다는 것이라 생각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그렇다면 마스터의 말씀은?”
“애초에 시나가 시간을 강제로 움직이는 것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시간을 완전히 날려먹었다면 시나와 티아마저 멈춰버려야 할 거야. 아니면 이 공간이 같이 사라져버리거나.”
하지만 시나는 외각에서 힘을 사용해 시간을 움직이고, 아직까지 시간의 개념을 지닌 어릿광대의 말을 보아. 시간을 몰래 빼돌리며 숨기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공간을 날릴 수 있으면 바로 날릴 것이지 왜 3일이 필요할까요? 사회자는 이미 검은 존재와 합쳐져서 신적인 존재를 뛰어넘었을 터인데?”
상급 신을 넘어 손가락만 움직여도 모든 것이 뒤바뀐다.
의지만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다시 태어날 정도의 힘이다.
하지만 공간을 지우는데 3일동안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적은 생각했던 것보다 약할 것일 테니...
“만약에...아주 만약에...시간을 숨겨놓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어디일까요?”
내가 던진 질문에 레시아와 시나는 아무런 말도 안하고, 깊은 고민의 늪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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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새니까 피곤하네요.
워프레임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