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479
479
봉인이 되었다가 풀려나면 무슨 기분이냐고 물어봐도, 그냥 자다 일어난 기분과 매우 흡사하다. 다른 점이라면 봉인을 한다는 의미는 냉동인간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게, 그 대상의 힘이 매우 강해서 나중에 처리를 하겠다는 의미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힘까지 같이 봉인하니까 다음 절차는 필요 없다. 대부분 나에게 모든 것을 앗아가고, 정작 아리엘은 신격화가 풀려버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식사를 해도 돈은 내가 8을 내고 아리엘이 2를 낸 미묘한 기분이다.
확실하게 5:5로 냈으면 페어링은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자랑스러운 정신방어하나만 살아있다는 사실에, 살아갈 희망이 생기긴 하고 있다. 저 멀리 있는 조그마한 별을 바라보면서, 아직까지 세상은 살만하다고 헛된 생각이 기대어 겨우겨우 마음을 잡았는데.
“애초에 기대를 하면 배신을 당하는 법이에요.”
“뭐냐. 늑대 개 뭐시기 하는 그거냐? 뜬금없이 남의 독백을 읽고 반응하는 건 그만둬줄래? 게다가 너의 한마디가 너무 뜬금없어서 위화감이 저 멀리서 눈치를 보고 있잖아.”
내가 상세하게 태클을 걸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뭐가 불만인지 계속해서 입안에 있는 내용이 아리엘의 고운 입술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나저나 여긴 대체 어디에요?”
“그러게. 그걸 알았다면 이상한 독백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될 텐데.”
머릿속에 기억 되어있는 풍경으로 보아 이곳은 리베리티아 고원과 매우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고는 지금 하늘이 검붉은 이유가 뭘까? 항상 이런 우중충한 하늘은 사람의 불길함을 +5정도 해주는 그런 경우가 있는데, 이 하늘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마계에서 인간계로 침공한 건가?”
정기적으로 놀고 먹고 자는 용사들이 없도록 침공을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싸움이 아니라 수수깨끼를 풀면 마족들은 알아서 돌아가준다. 다만, 아무리 마계에서 인간계로 침공했다고 해도, 검붉은 하늘은 본 기억이 없지만...
“대체 뭐가 잘못 되었는지 모르겠네.”
별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레시아가 마음을 잡고 정말 인간을 모두 학살하기 위해 공격한다면, 오히려 그게 더 해결하기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도 다른 판타지의 주인공처럼 마왕에게 검을 뽑겠지. 비록 모든 능력이 봉인 당해서 내 안주머니에 있는 단검이 모든 것.
지금은 아리엘에게 의존하면서 내 몸을 보호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리베리티아 고원이니까 근처에 프리트론이 있다는 소리라는 거야. 근처에는 페어리들이 살고 있는 숲도 존재하고, 너는 세피르를 불러봐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야 하니까.”
아리엘이 세피르를 부르기 시작하듯 텔레파시에 집중하는 동안, 다른 곳에 흔적을 찾고 있었다. 위화감이라는 것은 언제나 평상시와 다르면 생기는 것이기에, 철저하게 둘러보고 차이점을 밝혀내지 못하면 안되니까.
“세피르와 연락이 되었어요. 그보다...카멜롯에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고.”
“그거야 잘 되었네.”
잘 된 것치곤 아리엘의 목소리가 그리 밝지는 않았다.
“뭐야? 또 무슨 일인데?”
“지금 세피르의 말로는 잡화점에 있는 인원들을 데리고, 모든 대륙이 전부 마왕에게 굴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요?”
...
“아직도 봉인 당한 상태인가? 나는 잘 테니까 밖에서 보자.”
“무슨 헛소리를 밥 넘어가듯이 하는 거에요! 당장 일어나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을 때, 아리엘은 어느 사이엔가 내 다리를 짓밟았다. 힘 조절을 했으니 뼈가 나간다거나 근육이 뭉개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아팠기에 소리를 지르고 내 오른쪽 다리를 부여잡아 달래주고 있었다.
대체 이번엔 레시아가 뭘 어떻게 했길래?
시나는 왜 안 말린 거야?
“우선 잡화점부터 찾아보자. 이게 대체 무슨 난장판인지 알아내야겠어.”
“잡화점까지 가지 않아도 되지 않나요? 세피르에게 연락하면 바로 마계로 갈 수 있으니까.”
“지금 레시아를 만나면 분명 다짜고짜 화를 낼 것 같거든, 생각할 시간이 잠깐 필요해. 페어링도 끊어진 상태라서 레시아를 소유한 주인이 아니라, 진짜 인간과 마왕의 관계니까.”
“그래도 결혼했잖아요?”
모든 싸움 중에서 부부싸움이 가장 무서운 법이란다. 하지만 그걸 알 리가 없는 아리엘은 중얼거리면서 내 말을 따라 세피르는 부르지 않기로 했나 보다. 마계가 인간계를 침공해서 성공을 했다면, 지금의 삶은 어떠한지 사람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극단적이지만 내 기준점에서 양호하다면, 1개월 뒤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왕군은 마계로 다시 갈 것이다.
그렇게 프리트론으로 천천히 이동하면서 나아갔을 땐, 세상이 내 기대를 완전히 배신이라도 하듯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거대한 폐허가 자리잡았다.
“제길...이건 또 무슨 일이야...”
레시아를 의심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레시아는 내가 없는 동안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마족들이 인간계를 침공했다고 하고, 같이 협공할 수 있는 그런 모습도 존재하니까. 어쩌면 아리엘이 거론한 사회자와 각본가 때문에 유랑극단이 난장판을 벌이는 모습이겠지.
그 증거는 아리엘과 내가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
“아리엘. 잡화점으로 갈 수 있지? 그곳으로 공간이동 좀 부탁해.”
“아. 네. 알았어요.”
거대한 빛에 둘러 쌓이며 내 시야를 바꾼다. 예전에는 자주 느꼈던 감각이었지만, 지금은 남을 의지해야만 경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마음 한편으로는 쓸쓸했지만 아리엘이“도착했어요.”라는 말을 하자마자, 내 눈이 담아낸 풍경은 경악 그 자체였다.
“이게 잡화점이야...폐허야...”
덤으로 파이론에 있던 마을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낡아빠진 잡화점 하나만 예전에 인간이 살았었다는 기록을 남겨주듯이, 자리 한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내가 정문 앞에 다가가자마자 삐걱거리는 문이 천천히 열리다가, 남은 부분이 썩어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안에는 사람이 살았었다는 흔적과 완전히 비어버린 물품들, 그리고 완전히 썩거나 부패해버린 물건들...
“얼마나 지난 거야?”
시공간술사의 길마저 끊어졌으니 제대로 된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슨 북두신권의 구세주도 아니고, 이런 세기말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모르는 찰나에, 이 집을 지키고 있던 베니와 팔랑크스도 모조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
2층에가면, 3층에가면 있어야 하는 물품이 모조리 사라진 상태.
아니, 사라졌다기 보단 보관을 할 수 없기에 잡화점에서 자체적으로, 다른 공간으로 보내고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켜온 듯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잡화점에 있던 벽난로를 천천히 쓸어주면서 미안한 감정만 들었다.
“아무리 꺾여도 정도 것 꺾여야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거람...”
천천히 쓸어주고 있을 때. 잡화점 자체에서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본래 주인의 마나를 일부 먹고 살아가서 그런지, 촛불이 암흑과 거미줄을 치워버리고 썩어 문드러진 나무바닥의 틈을 매워 검은 광택이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금만 흡수해도 강대한 힘이 들어온다는 창조신과 동등한 마나라서 그런지, 예전모습을 찾기 시작한 잡화점에 거대한 진동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서, 당황해 하는 아리엘을 데리고 잡화점 밖으로 탈출했다.
“잡화점이 왜 저래요!”
“주인이 밥 줘서 기쁜지 탈피하려고 하는 거 같아!”
“탈피요? 잡화점이 살아있는 생명체도 아니고 탈피를 어떻게 해요!”
“잡화점은 살아있거든!”
거의 다 죽어가던 잡화점은 시리얼을 먹고 호랑이기운이 솟아나는 것처럼, 거대한 울부짖음처럼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파장과 진동과 더불어, 서서히 밝게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보통 잡화점이 반정도 때려 부셔지면, 마나 공급을 3시간정도 해야 고칠 수 있는데, 3분도 안 돼서 느닷없이 멀쩡한 상태로 돌아왔으니, 아리엘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마법사의 길이 끊어진 거 맞아요? 아직까지 마나를 운용할 줄 아는 거 아니에요?”
“그건 아냐. 3개의 자원이 합쳐진 에너지원은 상당히 강해서, 나도 모르게 발산한 에너지를 먹고 다시 기운을 차린 거 같아. 지금은 촉매와 마법수식이 붙여진 마법도구라면, 나도 사용할 수 있겠네.”
그러면 마법공학에 대해 잘 알아야 하지만, 기프트피어스라도 있는 게 다행인가? 그나저나 페어링이 끊어졌으니 그 누구에게도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잡화점이 다시 돌아왔으니 파장을 감지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오겠지만, 10분을 기다려도 3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묘하네.
기분이...
“밤에 영업을 한다면 누군가가 올라나?”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심술궂은 표정으로 카운터 위에 앉아있는 아리엘의 대답을 듣고 납득해버렸다. 미래에 있는 일은 그 누구도 예지할 수 없으니까. 데모르테의 방도 3층에 그대로 있는지 확인을 해보기로 하고, 1층에 아리엘을 그대로 놔둔 체 천천히 올라갔다.
사키엘의 문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3층에는 천계와 관련된 다른 물품이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앙에 놓여있는 사키엘의 문 우측 벽에는 데모르테의 방이 있었지만, 쓰지 않는 방을 오래 놔둘 수 없었는지 폐기가 된 것처럼 보였다.
데모르테의 방뿐만이 아니라, 루나가 살았었던 지하 1층의 문과 카운터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간도 자체폐기를 한 이유라면,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기 위함이 아닐까?
“2층이건 3층이건 다 비슷비슷하네. 누군가가 털어간 것도 아니고...대부분의 물품이 모두 사라져버렸어.”
어쩌면 어릿광대의 소행일까?
지금 당장 나를 가장 완벽하게 따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릿광대뿐이니까.
“유랑극단을 찾아야 하는데 지금 검은 높새바람은 이 대륙에 없겠지?”
“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내 의도는 너에게 해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물어보는 거야. 잡화점의 멤버였다면 내 말을 받아서 불꽃 슛을 날렸을 거라고.”
“제가 통키도 아니고 어떻게 날려요? 받는 입장에서는 죽잖아요?”
그렇게 투덜거리며 아리엘 나름대로 생각을 하는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빅터에게 안 달려가냐?”
“생각하란 사람이 누군데요! 기껏 도와주고 있는데 갑자기 빅터 이야기는 왜 나와요!”
빅터 이야기만 꺼내면 불이 붙네.
“아. 좋은 생각이 안 나요. 카일 씨. 여장해주세요.”
“내가 여장을 한다는 것과 너의 발상에 어떤 도움이 된다는 거냐? 무리수 던지지 말고 제대로 생각이나 해. 그런데 세피르와 연락이 닿았으면 레시아가 어떤 상황인지 볼 수 있는 거 아냐?”
“그런데 세피르의 말로는 하얀 올빼미와 함께 인간들을 포로로 잡고 있다고 하는데요?”
“가면 갈수록 정말 난장판이네.”
-딸랑딸랑~
손님을 알리는 종이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영업시간이 아니고 왠 토끼하나가 찾아왔다. 오른손에는 거대한 당근을 들고 넓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 황야의 무법자가 생각날법한 분위기.
“여. 형씨. 안녕하신가?”
“넌 뭐야. 이상한 나라에 가는 건 사절인데.”
“어라? 레빗이잖아요?”
“음? 소녀여. 돌아와서 다행이군. 릴리스 님으로부터 널 데리러 오라는 말이 있었다네. 요즘 마왕님께서 인간과 마족이 같이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시니까.”
레시아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둘째치고, 오히려 마왕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움직이고 있는 건가?
“이봐. 토끼.”
“레빗이라네.”
“‘ㅐ’를 ‘ㅔ’로 바꾼 것뿐이지 소리 나는 것은 똑같으니까 그냥 토끼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냐?”
“안 된다네. 나의 자아정체성을 존중해주게.”
저 썩을 토끼를 석쇠에 올려놓고 돌려버릴라.
“지금 레시아. 아니, 마왕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내 질문에 토끼는 모자를 살짝 툭 올려서 붉은 눈을 마주하더니, 진지하게 멋들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각본에 쓰여있기 때문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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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집에서 돌아오고 난 뒤에 써서 늦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