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멜롯 마법학원의 비서 -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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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에 대해 읽은 적이 있지만 다리를 얻은 대신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공주의 어마어마한 분노를 간접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세피르가 나를 대신해서 말을 알아듣고 눈치 있게 행동하는 것에 감사하자. 이 저주는 잡화점으로 가면 해결할 수 있으니까 차분하게 마법진 위로 올라가서 마나를 흘려 보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라? 안 되는데? 반응이 없어.”
[어째서!]
다급하게 손을 휘둘러서 마나로 글씨를 남겼다. 잡화점이라면 한번 가본적이 있기도 하고, 애초에 파이론에서 정기적으로 운영하는 공간이동 게이트로 가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이유로 마법진까지 고장 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는데. 예를 들어서 마법학원에 있는 오컬트 부 같은 거 있지 않았던가?”
[있긴 해. 하지만 지금은 부활동을 할 시간이 아니야.]
이젠 악필이 되어버린 나의 글씨를 읽는 세피르의 눈인지 의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켈모리아를 피해 숨어 다닐 수 밖에 없는 건가? 거대한 한숨도 소리 없이 나오고 있을 무렵. 저 멀리서 켈모리아가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도망갔…
“여기에 있었네? 아리엘?”
어느 사이에 내 뒤에 나타난 켈모리아 때문에, 너무 놀라서 비명이 나올 뻔 했지만 그 어떤 소리도 내 목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도망가려는 내 손목을 낚아채고는 벽에다 밀친 켈모리아는…….
“엘티노스 잡화점에 갈 생각을 하는 거겠지? 하지만 지금 이곳은 내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놨으니까. 편법으로 저주에 헤어나올 생각하지마. 그 전에 저주를 풀던 말던 서류 정리는 해주실까?”
여전히 켈모리아의 힘 앞에서는 새끼 강아지가 된 듯한 내 몸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피르는 대체 왜 안 도와주는지 옆을 확인했을 때. 이상한 장막이 세피르 주변을 가득 채워서 나갈 수 없게 만든 것.
싫어!
이대로 끌려가기 싫어!
누가 좀 도와줘!
“학원장님? 지금 뭐하세요?”
“어라? 빅터? 여기는 어쩐 일이야?”
내 목에다 목줄을 채우기 위해 나를 몰아세운 켈모리아가 느긋하게 뒤를 바라보며 멀리서 말을 걸어온 빅터에게 답했다. 빅터는 갑옷이 아니라 중요한 행사에서 입을 법한 제복이었다. 짙은 녹색 겉옷에는 수많은 훈장이 달려있었는데, 그걸 입고 돌아다니는 의미는 중요한 행사에 참여한다는 소리.
“저야 학원장님께 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온 거지만, 매니악한 취향은 분명 일반인이 안 보는 곳에서 해달라고 제가 부탁을 드리지 않았나요?”
“그야 나도 집안에서 아리엘과 이런저런 일을 하고 싶지. 하지만 아리엘이 그걸 허락해주지 않는걸?”
누가 그걸 미쳤다고 허락을 해줍니까?
저번에는 입욕제라고 속이고 수면가스를 생성하는 가루를 나에게 쥐어준 주제에?
아무튼 켈모리아의 답변을 들은 빅터는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지?”라는 듯한 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다시 표정관리를 한 빅터가 켈모리아에게 서류를 하나 가져다 주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는데.
“이건 저번에 부탁한 건가?”
“네. 오늘은 제가 아리엘을 독점해야 할 것 같아서요.”
빅터가 나를 독점한다고?
“그렇네. 오늘 하루는 빅터에게 양보를 해야겠군. 지금 아리엘은 말을 못하는 상태니까 제대로 에스코트를 해줘야 해? 어디론가 납치당하면 정말 찾기 어려우니까. 세피르는 잠깐 나 좀 도와주도록 하실까?”
“저는 아리엘의 사역마인데요?”
“평생 아리엘의 목소리를 듣기 싫으면 가도 상관은 없어.”
잔인한 협박에 세피르는 쓴 웃음을 지으며 “미안. 이번 일은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 할 것 같아. 빅터 형. 아리엘이 아무리 귀엽다고 해도 범죄는 저지르지마?”라고 말한 뒤에 켈모리아와 같이 다른 곳으로 향해 걸어갔다.
“정말 이상한 고생은 다 하는구나. 보나마나 켈모리아 학원장님이 듣기 싫은 소리를 아침부터 쏟아냈다고 생각은 하는데.”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지?
초능력자인가?
“어찌되었든 내 곁에 꼭 붙어있어야 해? 꼬마 아가씨?”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빅터의 소매를 잡고 걸어가고 있었지만, 행선지를 알 수 없어서 물어보려고 할 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갈 곳은 신성 제국인 아우리온으로 갈 거야. 거기서 베가프 추기경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보조 수행원으로 트릭스와 같이 가려고 했어. 그런데 트릭스가 많이 바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아리엘을 데려가면 어때?”라고. 트릭스가 제안을 한 결과가 지금 이렇게 된 거지. 베가프 추기경에게 가서 저주도 풀어달라고 하자.”
빅터는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것 같으면, 그 틈을 메우려는 듯이 말을 걸어줬다. 빅터와 같이 공간이동 게이트에 다가섰을 때까지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저번에 의욕이 완전이 상실된 빅터의 모습보다는 보기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내가 꿈으로 빅터의 옛 연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여전히 트릭스 씨는 나와 빅터를 이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나보다.
“어서 오세요. 아우리스 여신님께서 보살펴주시는 아우리온에.”
“감사합니다. 친절한 사제님.”
환영인사를 해준 사제에게 보답하는 말을 건네준 빅터. 나도 뭐라 하고 싶지만 그저 가만히 빅터를 따라가기만 했다.
“꼬마 숙녀가 얌전해서 보기 좋군. 여동생인가?”
“아는 분이 저에게 맡긴 동생이에요. 이 애가 낯을 많이 가려서 다른 사람들과는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해를 해주세요.”
“당연히 이해해줘야지.”
말이 끝나고 다른 곳을 향해 바라봤을 땐. 수 많은 사제들과 수녀들이 자신이 신봉하는 여신을 위해 기도하고 평온한 모습과
“이번 달에 백장미 18호집이 나온다고 해!”
“어머나! 그게 정말이야! 이번엔 돈을 어디서 빌리지!”
는 정반대로 백장미에 대한 열망이 가득 차있는 모습이었다. 어딘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차마 그런 말은 할 수 없고, 실제로도 할 수 없어서 정말 유감이었지만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라고 한다면 나의 존재가 이곳에서 눈에 띈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아리엘? 어디 불편한 거라도 있어?”
대부분의 수녀들이 빅터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저 남자도 여장하면 백장미에 나오는 사람처럼 귀엽지 않을까?”
“너도 그 생각을 했니? 나도 그랬는데!”
‘이 사람들 모두 백장미를 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는데,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빅터의 옷깃을 힘껏 잡아버렸다.
“괜찮아?”
[괜찮아.]
마나로 허공에 짧게 글을 남겼다.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한 괜찮다는 글이 사라질 때. 건너편에서는 하얀 사제복을 입고 아우리스 교의 문양인 천사의 날개가 그려진 상태로, 우리를 온화하게 맞이한 남자.
“어서 어세요. 카멜롯에서 오신 두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야말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베가프 추기경님.”
어느 사이에 나타난 건지 모르겠지만, 나와 빅터의 뒤에서 말을 먼저 꺼낸 남성은 하얀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는데, 베가프라고 불린 남성의 안에는 무언가가 더 있는 모양인지, 다른 위화감이 내 온 몸을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위화감은 점점 현실처럼 다른 무언가가 노려보는 기분이 들었고, 빅터의 등 뒤로 넘어가서 마나로 눈을 강화했다.
“어라? 아리엘? 대체 무슨 일이야? 내 등 뒤에 숨을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고?”
[나도 알아! 하지만 저 남자 안에 뭔가가 있다고!]
허공에 글이 남아서 춤추기 시작할 무렵. 베가프는 나를 자세히 보더니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군. 이름은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켈모리아 학원장의 비서였구나. 그보다 내 안에 있는 아랑도 뭔가 시끄럽게 소리를 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적이 아니라 아군이라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았으니.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 들어온 목소리에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어마어마한 신성력은 베가프 씨의 의도와 정반대로 강하게 방출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다가오면 태워버리겠다는 듯이.
“저기. 베가프 추기경님. 다짜고짜 부탁해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
“아~. 아아. 목소리 테스트. 아. 아.”
“정말이지. 이런 애를 도와주기 위해 이 몸의 신앙까지 꼭 서야 하는가? 아무리 아군이라고 해도, 이 아이는 몽마라고! 마족이라고 몇 번을 경고했는데!”
저주에서 풀려난 내 목소리를 점검하고 있는 사이에, 아무도 없는 예배당 안에서는 여우 꼬리를 가지고 있는 어린 소녀가 베가프 씨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랑이라고 불리는 여우 소녀는 베가프 씨의 몸에 동화되어있었다는데. 지금 이렇게 보니 연한 갈색으로 베가프 씨의 머리가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래도 서로 돕고 살아야죠. 아랑도 다른 신도들에게 신앙을 받아가면서 살고 있잖아요? 아리엘도 아랑이 저주를 풀어줘서 좋은 신앙을 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흥! 마족에게 받는 신앙은 내 쪽에서 거절할 것이니라!”
“어째서 마족을 싫어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주에서 풀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 이 바보! 이 몸이 나쁘게 말했는데, 네가 착하게 고맙다고 말하면 내가 나빠 보이지 않는가! 빨리 철회하거라! 오히려 기분 나쁘다는 듯이 따지고 들으란 말이야!”
여우 신령이라고는 들었는데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오히려 이쪽이 더 괴로워 보이니까. 나는 아랑에게 가까이 가서 손을 마주잡고 웃어 보였다. 여우 꼬리가 경직이 되고, 부드러워 보이는 하얀 여우 귀가 삐쭉하고 솟을만한 소름을 선사하고 있을 때. 베가프 씨는 옆에서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봐요. 아랑. 몽마라고 해도 아리엘의 경우에는 우리를 배신하거나 그러지 않아요. 카멜롯에서 왔는데 설마 배신하겠어요?”
“칫! 그 바보 같은 창세의 집회 녀석들보단 100만배는 더 좋아 보여서 다행이군.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냐! 그만 놓거라!”
소리를 지르면서 내 손을 뿌리치고는 베가프 씨에게 달려가더니 그대로 동화해버렸다.
“베가프 씨도 정말 고마워요.”
당연히 저주를 풀어달라고 아랑을 설득해준 베가프 씨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했다.
“서로 돕고 살아야지. 아무튼 오늘은 아우리온 제국 중앙에서 내가 연설을 해야 하는데, 너희들이 내 옆에서 지켜줬으면 좋겠어.”
호위를 하는 이유는 다른 이들에게 방해를 받거나 목숨이 노려지는 것. 나도 베가프 씨 덕분에 저주가 풀렸으니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은 둘째치고 왜 보호해 달라고 하는지 자세히 묻기 위해 오랜만에 질문을 던졌다.
“누구에게 노려지고 있는 건가요?”
직설적으로 묻는 나를 보며 베가프 씨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누가 나를 스토킹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 스토커를 붙잡아줬으면 좋겠어.”
스토커에게 노려지고 있다는 것은 베가프 씨의 근심 어린 말을 듣고, 빅터와 나는 암묵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