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337
337
새벽에 접어들어 손님이 그렇게 많지 않은 잡화점 안에서는, 은은한 불빛 아래에 책을 읽는 즐거움이 넘치고 있을 시간대다. 우선 여담으로 이실직고 말하자면 공포체험은 공포체험이지 그 이후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누가 내 옷을 입혀놓은 것 같은데, 그것에 대해서는 굳이 알려고 머리를 쓰기에는 시간낭비라고 생각되어, 더 이상 이것에 관해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만약에 칸포리우스가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면, 가장 먼저 오는 곳은 파이론이라고 말했다. 비공정을 타고 마장병기 하나가 내려와서 춤이라도 추는 날에는 그 마을은 흥겨운 박자로 멸망해버리겠지만, 애처롭게도 파이론에는 마장병기가 내려오자마자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터져버릴 것이라 본다.
새벽에 눈이 그치고 얼음이 만들어지는 날에, 내용을 다 확인한 페이지를 한 장 넘겼을 무렵. 잡화점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손님을 알리는 종이 허리를 흔들었다. 사방팔방에 울려 퍼지는 음파는 당연히 내 귓속에 들어왔고, 올라간 시선에 따라 눈에 들어온 광경은 엘리시아 옆에 붙어있어야 할 메이드인 유나 씨였다.
“늦은 밤에 정말 죄송합니다. 카일 님.”
“아뇨. 지금은 장사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느긋하게 미소를 지으며 유나 씨는 자신이 원하는 물품을 고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레시아는 내 무릎 위에서 작은 몸을 돌돌 말아 눈을 감은 상태로 말했다.
“저번처럼 멋대로 주인의 피를 가지고 가지 말거라. 주인은 지금 병약한 상태이니라.”
멋대로 나를 병약소년...아니, 지금은 나이가 있으니까 병약청년으로 만드는 레시아의 화술에, 늘 그래왔듯이 나는 내용부분에서 따지고 들어가야 했다.
“아니. 병에 걸리지 않았거든요? 대체 언제부터 제가 병에 걸렸다는 설정을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거에요?”
“아니다. 병에 걸렸다고 하거라. 그 뭐냐. 그래! 수영을 못하는 맥주병이라고 하지.”
“그런 쓸 때 없는 말장난 한번만 더 하면, 유리병에 레시아를 넣고 행운의 편지와 함께 저 먼 대륙으로 보내버릴 거에요?”
레시아는 보복인지 아닌지 몰라도 손톱을 드러내며 내 종아리를 살짝 찔렀다. 시나는 내 티셔츠 목 부위에 고개만 내밀며 같이 책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흡혈귀는 무엇을 사러 온 겁니까?”
시나가 유나 씨에게 물어보자 유나 씨는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카일 님을 사러 왔습니다.”
“안 팔아요!”
태클은 결국 내가 걸었지만, 유나 씨의 말 한마디로 잡화점에서 유지되고 있었던 정적과, 고요한 분위기는 단숨에 깨져나갔다. 그럼에도 유나 씨는 “유감이네요.”라는 느긋한 말과 함께, 내 앞에 물품들을 조용히 놓고 계산을 기다렸다.
“그나저나 카일 님. 전에 당주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사실상 아카드 가문의 재고는 거의 없는 상태라. 2천금을 준비하기에는...”
“알고 있어요. 그리고 안 되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책을 덮어버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엘리시아의 일에 대해서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제 피만 줘서 일시적으로 걸린 봉인을 풀어주는 일만 도와줘서, 확실하게 2천금이라는 거액은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돈이 없으니 몸으로 갚겠다는 클리셰는 제가 허용할 수 없습니다. 전 엘리시아에게 일찍 죽고 싶지 않아요.”
유나 씨는 언제나 만연의 미소를 보이면서 “들켰네요.”라고 순순히 인정을 했다. 그리고 유나 씨는 나에게 거스름돈 30실버를 받고 다시 되물었다.
“그나저나, 오늘 무슨 일이 있던가요? 어째서 카일 님의 옷이 전투복으로?”
정확히는 나무로 이루어진 경갑을 입고 있었다. 잡화점을 만들 때 사용한 정체불명의 검은 나무를 이용했는데, 아직까지 넘쳐 흐르다 못해 3대가 장작으로 사용해도, 너무 남아서 처리가 곤란할 지경이기에 경갑으로 만들었다.
“그건 주인이 시공의 눈을 뜨고 나서 혜안과 통찰력이 너무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칸포리우스 제국의 첫 번째 침공이 시작된다고 말했으니, 머지 않아 다가올 전투를 대비해서 3일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아무리 2월이라고 할지라도 공격할 자들은 온다. 하지만 처음부터 맥없이 막혀버린다면, 정말 유감스럽게 되는 상황이 오겠지.”
“그렇군요. 역시 카일 님. 날로 갈수록 성장하는 것을 몸소 보니 기쁩니다. 그나저나 언제쯤 저의 남편으로?”
유나 씨의 발언에 뭔가 문제가 있어서 내가 말하려고 하지만, 레시아가 먼저 입을 열어버려서 어떻게 말하는지 한번 듣기나 해봤다.
“주인은 애초에 한 명만 바라보는 일편단심의 사내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꽃을 탐내는 그런 방탕한...냐아아아앗! 아프다! 뭐 하는 것인가!”
아이언 클로를 하며 내 무릎 위에서 천천히 들어올렸다.
“듣자 듣자 하니까 지금 뭐? 방탕? 누가 맨 처음부터 트라우마를 새겨놓고 언제부터 내가 호색하다는 이미지로 바꾸려는 건지 설명해 주실까요? 네? 귀 잡아 늘리기 전에 빨리 말 안 해!”
내가 소리를 치며 레시아에게 화를 내자, 레시아는 더 목소리를 올리며 말하기를...
“그래도 막상 실전에 가서는 엄청난...냐아아아아앗! 귀는 항상 민감도 설정이 최대라고 말해줬거늘! 놓지 못하겠느냐!”
나와 레시아가 서로 말싸움 하는 것을 보고 유나 씨는 조용히 웃어 보였다. 시나는 그저 멀뚱멀뚱 지켜보면서 “냥캣이 또 맞을 짓만 골라서 하는 군요.”라고 작게 중얼거릴 뿐. 1분 후에 집행이 끝난 레시아는 카운터 위에서 녹초가 된 상태로 쓰러져 있었고, 유나 씨는 언제 차를 타왔는지 모르겠지만, 내 앞에 따듯한 김이 올라오고 있는 하얀 찻잔을 건네줬다.
나는 찻잔을 들고 차를...
“잠깐? 레시아. 아까 뭐라고요?”
“주인이 방탕하다는 소리를 냐아아앗!”
“기동로봇 불러와서 아이언 클로를 하기 전에 제대로 말해요! 아까 그 이전에 뭐라고 말했냐고요!”
시공의 눈이 개안되면서 혜안과 통찰력이 너무 올라갔다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주인은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니지 않는가? 몸은 인간이어도 능력만큼은 신의 힘이라고 두려워하는 시공간술사다. 아직은 등급에서 하급단계에 속해도 그 하급단계에서 불러오는 듯한 능력은 최상위. 중급부터는 앞으로의 일을 예지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시간선상의 예지이기 때문에 그 것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고, 상급이면 과거로 도약이 가능하며 최상급으로 진입할 경우에는, 솔직히 이 것에 대해서는 별 할말이 없을 정도로 신적인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우연히 시공간술사의 길 하급에서 생을 마감했겠지.
거대한 과부화가 부작용으로 작용하는 만큼, 시공간마법에 대한 숙련도는 올리기 매우 힘든 분야다.
“저는 이제서야 처음 듣는 소리네요. 저번에 레시아가 엘리시아의 행적에 대해 제가 추측할 때도 놀랐던 이유가 있었군요.”
레시아의 설명을 조용히 들은 나는 이제서야 알아차렸다. 통찰력과 혜안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뛰어나다는 소리는, 이제 그냥 사건에 대해 듣게 되어도 그 과정이 어떤지, 결과가 어떠한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어버린다는 소리이고, 이는 내가 2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70세 할아버지의 간장 비빔밥의 노하우를 모두 알고 그걸 뛰어 넘은 상태가 된 것.
아니, 비유가 좀 이상한데?
잡화점이 망해가면 간장 비빔밥을 파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노하우까지 알고 있어야 하는 거야?
“미리 이기고 싸우는 것이야 말로 좋은 거지요. 제 미래의 남편다운 모습을 가지셨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유나 씨의 미래의 남편이 내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시나는 “안 됩니다. 안 줄 겁니다. 돌아가세요.”라고 3연타를 먹였다. 유나 씨는 잡화점에서 물품을 들고 밖으로 나간 뒤에 3분 정도 지났을 무렵.
“인간! 급하다! 빨리 물건을 넘겨라!”
고블린 한 무리가 쳐들어와서 난장판을 만들기 시작했다. 녹빛의 매부리코와 더불어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는, 레시아가 눈빛을 한번 번뜩이자 모두 얼음이 되어, 누군가가 ‘땡!’이라고 터치해주기 전까지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52마리의 고블린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나는 “네가 대표로 말해.”라고 입을 열었고, 그 고블린은 한 순간의 도약으로 카운터 위에 올라와,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몬스터의 숲을 방어하라는 마왕님의 명령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지키기 위해 도구가 필요하다! 우리는 최대한 사상자를 내지 않고 조용히 숨어 지내야 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물건을 내놓거라.”
“제대로 된 돈은 가지고 있겠지?”
위장에 뛰어난 고블린들이 숨어 산다고 하다니, 레시아가 마왕답게 모든 마물에게도 의지를 퍼트려서 전쟁준비를 하고 있나 보다. 마왕 나름대로 전쟁준비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삽과 곡괭이를 6자루씩 줬다.
고블린에게 제대로 된 돈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발 저번 코볼트마냥 원석을 던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빨이 곧 돈이다! 우리들의 이빨을 5개씩 넘기겠다! 키엑!”
오 이런 신이시여.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두 눈을 뜨면서 직접 지켜봐야 하는 것입니까? 제 정신상태를 다양한 방법으로 가루로 만들고 승천시키는 방법을 연구 중입니까? 네?
검은 바닥에도 보일 정도로 녹색의 체액들이 사방팔방에 흩뿌려지기 시작하며, 이는 돈을 지불하는 수단인 것인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바닥을 더럽히게 만드는 수작인 것인가? 라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를 뽑을 때마다 들려오는 비명이 잡화점 한 가득 채워질 때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나의 슬픔은 한 가득 채워졌다.
“우리 동포들과 나까지 합쳐서 260개의 이빨이다! 받아라!”
“아니. 이빨은 필요 없으니 바닥청소나 하고 가.”
스트레스로 인해 두통이 몰려오면서 고블린의 이빨 260개를 받은 나는, 한 순간에 그 많던 고블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아니, 이상한 녹색의 액체가 이리저리 흩뿌려진 것으로 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어쨌든 시간이 지나서 바닥청소를 다 했을 무렵.
라벤더 향이 가득 피어 오르며 비릿한 향을 서서히 제거하고 있을 때.
-콰앙!
거대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뭔가 달라는 듯이 계속 땅에 내려찍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이언트 중에 하나가 온 것 같은데, 나는 천천히 밖으로 나가서 입을 열었다.
“무슨 물건을 원하는 건지 알려줄 수 있어요?”
목소리는 좀 크게 해야 거인의 귀까지 들리기 마련. 아무튼 거인은 거대한 동굴 같은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루나링의 만화 신간호를 줘.”
“그런 건 여기서 안 팔아!”
아무래도 루나가 그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만화책을 사러 온 것 같다만, 이곳에는 그런 물품을 팔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장부를 펼쳐서 하나하나 확인해도 ‘[카일X하멀] 비밀 수사.’라는 책이….
왜 있지?
잠깐 5분 정도 생각을 하고 난 뒤에 나는 지하 1층에 있는 달 토끼의 방으로 옮겼다.
“어라? 주인님? 아직 잘 시간…자, 잠깐만요! 주인님! 귀를 난폭하게 잡아당기지 마세요! 아이언 클로는 안 돼에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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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층에서 뭔 난장판인지는 저도 모르겠네요.